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은 너무 얇은 자그마한 책이다. 장황하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 들어있는 욕망은 어마무시하게 크다. 

아이와 사전들을 챙겨 국경을 넘어 목숨 건 탈출을 하는 여자.

 

자전적 에세이가 이렇게 간략하면서도 모든 걸 말해주는 것 처럼 쓸 수 있다는 걸 배울 수 있었다. 

조국의 언어를 쓸 수 없고 대신 삶의 터전이 된 언어를 배우고 익혀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짧은 '문맹'의 시기를 벗어나 그 외국어를 사용하여 창작을 한다는 것에 대하여.

작가의 길은 운명에 아마 나 있었을 것 같다. 글을 쓰고자 하는 이 지독한 갈구는 난민캠프에 떨어졌을지라도 어김없이 그 길을 찾아가는 것 같다.

장황하거나 주저리주저리를 싫어하는 나 같은 이에게 맞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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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싫어한다.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싫어한다.

집떠나면 아프니 어딘가 낯선 곳에 간다는 걸 좋아할 수가 없었다. 허덕허덕하면서도 어딘가로 떠나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의 경우는 아프면 만사가 싫은 사람이다. 그 기억도 오래가는 편이고.

그래도 일 때문에 할 수 없이 골골거리며 꾸역꾸역 다녔던 것도 옛날이다. 이제는 싫으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정체되어서인지 떠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한다.

책을 읽을수록 특히 한 작가의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삶의 현장을 보는 게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걸 더 절실히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예전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작가 또는 저자의 흔적을 찾아서 같은 여행기나 문학기행에 대한 책들에도 관심이 간다.

아르테에서 기획한 클래식 클라우드는 아주 적절하게 나와줘서 나와 만날 수 있는데 셰익스피어와 니체 그리고 클림트가 우선 나온 '거장'들이다. 이 기획의 테마가 "내 인생의 거장을 만나는 특별한 여행"인 모양이다.

와, 이 시리즈 구비해놓는 것도 거대한 프로젝트가 될 것 같다. 일단 책으로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거장들의 리스트만해도... 어마어마하다.

 

니체의 경우, 이진우 교수가 길잡이 역할을 맡았다.

예전에 팟캐스트 방송에서 고병권 교수가 이런 기획을 얘기했던 것 같다. 이걸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 들으면서 참 흥미롭고 재밌는 기획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니체 강의를 하면서 니체가 요양하기 위해 떠났던 길을 따라 가면서 니체를 탐구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언젠가 할거라고 말했었다. 클래식 클라우드의 니체 기획에서 따라간 니체의 길과도 정확히 겹치는 거 아닌가 싶다.

바젤 대학을 그만두고 토리노에서(그 유명한, 말을 끌어안고 일으킨 발작) 몰락하기까지 정확히 9년 반을 따라가면서 니체의 방랑의 10년을 돌아봤다고 한다.

길위에서 탄생시킨 니체 사상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지 이진우 교수를 믿고 따라가 볼 예정이다. 고병권 교수가 맡았다면 어땠을까. 나중에 그의 저작도 만나보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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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이 발발한지 2년 뒤 1941년 6월 히틀러의 독일군은 소련을 침공했다. 파죽지세로 진입해 들어가던 독일군은 그해 9월 레닌그라드 포위작전을 실행한다.

이미 대공포시기에 갖은 이유로 엮어 처형하고 총살하고 고문하고 수용소로 보내는 등 군 장성과 지휘관들을 솎아낸 스탈린에게 히틀러의 독일군은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적이었다. 스탈린은 전쟁 개시 초반에 모든 걸 포기했었다. 그때 스탈린을 제거할 수도 있었지만 각료들과 군은 그를 다시 불러내 앞에 세웠다.

이후 레닌그라드는 872일간 인구 250만명이 57만 5천명으로 줄어든 채 견뎌냈고 마침내 연합군과의 공조로 2차대전의 승전국의 도시가 됐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가 1917년 10월 혁명으로 노동자의 나라가 되자 이 도시는 페트로그라드가 되었다가 레닌 사후 그를 기리는 도시 레닌그라드가 되었다. 레닌의 꿈이 영영 무너진 후 소비에트에서 다시 러시아가 되자 이 도시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미하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바로 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줄리언 반스가 이미 썼듯이 그는 윤년을 특히 두려워했었던 모양이다

촉망받던 음악가였던 그는 스탈린이 장악한 나라에서 언제 죽음을 맞이할 지 모를 요주의 인사가 된다.

체포될 상황을 염두에 두고 간단한 짐을 담은 가방을 꾸려놓고 베란다에서 잠을 청했다지 않나.

간당간당한 삶을 이어가던 그에게 2차대전 발발은 구원이었을까? 자신이 살던 고향 레닌그라드가 적에게 포위당한 채 하루하루 옭아들어오는 공포 속에서 교향곡 7번, 일명 레닌그라드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탈출행렬에 나서 레닌그라드를 떠난 후 곡을 최종 완성하고 전쟁의 폐허속에 잠긴 조국과 고향을 위해 교향곡은 연주된다. 미국을 위시한 유럽에서도 그 곡은 전쟁의 비참함에서 인간이 되고자 한 인간들의 희망처럼 퍼져나갔고 결국 이 곡은 연합군의 연대를 강조하는 데도 역할을 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어찌됐든 조국을 구하는 영웅의 역할을 떠맡았다.

 

그러나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서도 스탈린의 저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의 음악은 금지곡이 되었고 교수직에서도 쫓겨났다. 스탈린과 쇼스타코비치의 전쟁에서 승자는 쇼스타코비치였다. 스탈린은 1953년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레닌그라드가 포위당한 후 벌어진 참사는 인간의 조건이란 과연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M.T. 앤더슨은 작가이며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현대사와 레닌그라드 포위상황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 다만 이를 다루는 것과 쇼스타코비치를 다루는 데 있어 균형이 좀 어긋나 있다. 쇼스타코비치를 알기 위해서는 이책만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줄리언반스의 소설에 나왔던가, .... 쇼스타코비치가 말년에 겪었다는 틱장애 같은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언급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들도 함께 들었다. 대충의 느낌, 분위기라도 알며 읽기 위해서. 

그렇잖아도 음알못인데 쇼스타코비치 음악에 대해서 다룬 대목들이 내게는 그다지 만족할만한 것이 아니어서 다른 책을 통해서 보충해야 한다.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또 한가지, 번역도 대체로 만족스럽긴 한데 걸리는 부분이 있다.

뭔 넘의 '일기작가'들이 그렇게 많나. 아마도 일기 자료들을 인용하며 쓴 말인 것 같은데 굳이 '작가'를 붙인 건 정말 일기작가라는 특정 작가들이 있는 것인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악보가 들어있는 마이크로칩을 조심스럽게 미국으로 옮기는 '배달원들'의 존재는?
자꾸 저 '배달원'이란 단어를 읽을 때마다 마이크로칩이 든 택배상자를 든 택배 아저씨를 떠올리게 되는 이 망극한 상황은 어쩌란 말인지. 그런 아주 사소한 몇가지를 제외하고는 흥미롭게 읽었다.

포위된 채 872일간 살아간 레닌그라드의 사람들 이야기가 워낙 강해서 다른 이야기들을 압도한다.

쇼스타코비치가 참여한 레닌그라드 교향곡 초연은 1942년 3월 볼쇼이 극장 오케스트라 연주로 쿠이비세프에서 열렸고, 이후 6월과 7월 영국과 미국에서 연주되어 라디오방송을 통해 세계시민들은 음악을 들었다. 정작 주인공인 도시 레닌그라드에서는 연주할 수 있는 음악가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가족 중에 굶어죽거나 병들어죽지 않은 이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듯 레닌그라드 라디오방송국 오케스트라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굶주리고 병약해져서 그들이 연주를 위해 다시 모였을 때 트럼펫 연주자는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폐에 힘이 들어가지 않네요."

 

 

 

1942년8월 9일 레닌그라드 라디오 방송국 오케스트라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교향곡 연주.

 

거리에서 그대로 쓰러져 죽어도 시체를 옮겨 묻어줄 힘이 남아 있지 않던 사람들, 식인이 횡행하던 .. 말을 입에 담는 게 참담한 겨울을 보내고 음악을 듣기 위해 기꺼이 표를 구입했다.

M.T. 앤더슨의 [죽은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을 읽는 일은 바로 이 평범해보이는 사진에 담긴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 인간의 일을 읽는 일이다.

 

세상은, 현재는, 역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죽음 위에 세워져있다.

우리의 지금. 남북한이 다시 만나려고 하는 지금.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이들의 죽음이 있었나.

다시는 인간의 조건을 시험하게 되는 그런 상황에 처하는 그런 날을 만들지 않기를 .. 

러시아를 가본적이 없고 레닌그라드, 즉 상트페테르부르크도 가본적이 없는데, 레닌그라드를 알고난다면 그곳 거리 어느 한곳 회한없이 볼 수 있을까.

작년이 러시아10월 혁명 100주년, 올해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어쩐지 소설은 잘 안읽히고 역사서나 인물평전 들이 더 읽고 싶어지는 요즘이다.

올해 우리는 한국전쟁 종전의 해를 맞게 될 것인가. 1950~2018.

 

 

 

 

 

 

 

 

 

 

 

 

 

 

 

솔로몬 볼코프가 쓴 [증언 : 쇼스타코비치 회상록]에 대해 앤더슨은 신뢰하지 못한다고 밝힌다.

볼코프가 진짜로 쇼스타코비치의 회상을 받아적었다는 말을 믿을 수 없고 따라서 교차검증해서 크게 문제되지 않는 내용 정도만을 인용했다고 한다.

그러니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이나 다시 읽어야겠다. .

나의 능력은 정말 놀라워서, 작년에 분명 읽은 이책이 어쩜 이렇게 완전 처음 읽게 될 책같은지.

기억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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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잖아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을 계획을 잡고 있었는데 때마침 문학동네에서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다.(김희숙 역)

범우사판으로 읽었던 때가 언제였던가. 언제나 그렇듯 거의 처음 본것처럼 읽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새번역본도 나왔겠다 아주 기분좋게 처음 읽는 것처럼.. 처음 읽는 거나 마찬가지처럼 독서할 수 있게 됐다.

'자유'란 개념이 이 소설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더 나아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 전체와.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소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하루키는 음악과 책에 대한 나름의 생각과 평을 소설에 직접 써넣는데. 때로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단독글로도 손색없고(가령, [1Q84]에서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같은..), 때로는 단 한장면에서 맥락없이 생각났다는 듯이 끌어오기도 한다. 그게 또 그럴듯하게 어울리며 분위기나 주제를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는 후자인데 [악령]의 키릴로프처럼 '자신이 자유롭다는사실을증명하기 위해 권총자살하는 남자'.

바로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는 "자신이 신이나 통속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임을 증명하려고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는 인간이 많이 나'온다는.(2권 전이하는 메타포, 214~215)

'내'가 자유롭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일탈하기 전에 세상이, 현실이란 것 자체가 충분히 궤도를 벗어난 상태라서 '나'는 그 궤도를 벗어난 현실에서 오히려 제대로 있고 싶다. '나'까지 일탈하면 그야말로 수습이 불가능해진다.

하루키에게 [악령]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특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각별한 소설이라서 꼼꼼히 읽어봐야겠다.

스메르자코프. 하루키가 강하게 끌린 인물. '바로 이거'라는 느낌을 받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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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어야 했지만, 손에 쥔 건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나날 The Remains of the Day].

사흘걸렸다. 내딴에는 열심히 읽었다. 이 소설을 2013년 여름에 읽었다. 그리고 페이퍼를 남겼다.

(http://blog.aladin.co.kr/mysty/6539608)

어설펐다.

 

하루키와 이시구로의 역사에 대한 생각을 비교해보고 싶어서 찾아 읽었던 책인데, [창백한 언덕 풍경][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우리가 고아였을 때] 등 전쟁과 관련된 작품들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남아있는나날]을 다시 읽으니 왜 하루키가 아니라 이시구로가 노벨문학상의 수상자가 됐는지 수긍하게 된다.

(하루키를 좋아한다지만 그가 노벨문학상을 탄다는건 상상이 잘 안된다. 이후 진짜 그가 늘 소망했던 '종합소설' 같은 작품이 나온다면 모를까.. 근데 그게 잘 상상이 안된다._)

예전에 읽을 때 알았을까? 이번에 다시 읽으니 기가막히게 구성을 잘 쓴 소설이었다. 1인칭 화자의 회상이라는 도구도 이만하면 정말 잘 쓰는 축에 속할 것이다.

소설이 전개될 수록 스티븐스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앞에 서술된 진술들이 바로바로 부정당하며 스티븐스가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사실들이 밝혀진다.

그 절정이 예전 포스팅에서도 썼던 '아치 밑 자리'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스티븐스 클로즈업에서다.

아, 정말이지 그장면은 정말 대단하다.

 

나는 다시 홀을 가로질러 아치 밑 내 자리로 돌아갔고, 그로부터 한 시간쯤 흐른 뒤 마침내 신사분들이 자리를 파할 때까지, 내가 자리를 떠야 할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거기에 그렇게 서 있었던 시간이 지금까지 두고두고 내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처음에는 약간 울적한 기분이었음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서 있는 사이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주 깊은 승리감이 내 마음속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이 감정을 어디까지 분석해 보았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오늘날 그 순간을 돌이켜 보면 그다지 설명하기 힘든 것 같지는 않다. 그 때 나는 극도로 힘든 시간들을 거의 마무리한 직후였다. 그날 저녁 내내 '내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키느라 애써야 했고, 게다가 내 부친도 자랑스러워하셨을 정도로 잘해 냈다. 그리고 홀 건너편, 내 시선이 머물고 있는 문 뒤, 방금 막 내 직무를 수행하고 나온 바로 그 방에는 유럽 최고의 실력자들이 우리 대륙의 운명을 논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집사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거의 도달했다는 것을. 그때 거기에 서서 그날 저녁의 사건들, 즉 그 시각까지 있었던 일들, 그리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것들을 되씹어 보자니, 내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성취했던 모든 것들의 요약 판인 양 느껴졌다. 그날 밤 나를 고무시켰던 그 승리감을 나로선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p.282) 

 

 

그런데 마지막에 이시구로는 왜 스티븐스에게 독백을 하게 했을까.

물론 선창에서 만난 상대가 있었지만 급작스럽게 스티븐스는 그 남자에게 얘기하듯 꺼내지만 실은 한번도 하지 않았던 독백이자 고백을 한다. 전문가적 실존이 아니라 사적인 실존으로서. 집사라는 가면을 벗고 가면 밑의 배우 자신을 드러내면서.

달링턴 경에게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들을 모두 바쳤다고. 그래서 남은 게 별로 없다고 토로한다.

달리 방법이 없었을까...

이 고백과 체념. 그리고 새로운 각오. 새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한 '농담의 기술' 연마.

나는 마지막의 이 고백이 급작스러웠고 아쉬웠다. 다른 길은 없었을까.

스티븐스는 새로운 각오를 하지만 아마도 남은 게 별로 없는 그로서는 농담도 시원찮을 것이며, 최고의 집사였을 때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실수들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이시구로의 소설에서는 잘못된 선택을 했던 인물들이 나온다. 반성이나 후회없는 뻔뻔함이 있다.

최근에 하루키를 다시 보면서 느낀건데 생각보다 하루키의 상처랄까.. 내면의 어둠이 더 심한 듯하다.

그저 제스처만 있는 건가, 싶었는데 그보다는 역사로부터 얻은 내상이 깊은 편. 물론 그 내상을 소설에 어떻게 담아내느냐의 문제와는 별개로. 아마도 아버지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전쟁 당시 중국에서 있었던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게 느껴진다. 마치 하루키가 샐린저에게 느꼈던 것처럼.

 

하루키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전쟁소설'이라고 평했다.  하루키는 샐린저가 전쟁에서 받은 깊은 트라우마를 콜필드라는 젊은 분신에 의탁해 쓴 작품으로만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전쟁소설이라고 했다.

'전쟁의 트라우마는 곧 이노센스의 트라우마이다.' (2010년 인터뷰)

 

하루키가 내상을 입은 사람들. 자기에게도 들어앉아 있는 상처를 발견하는 내부로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에 담고 있다면 이시구로는 내상을 입은 줄도 모르는 사람들 또는 내상을 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끝내 드러내는 이야기를 하고있는 듯.

하루키에게 역사는  중국에서 상관(시스템으로 바꿔도 된다)이 내린 명령, 잘들지도 않는 칼로 사람의 목을 쳐야 했던 일을 겪고나서 돌아와 입다문채 살아가는 사람들로 상상할 수 있다면 이시구로는 그보다는 평범하다. 직접적인 행동이 아니라 동조하거나 그 길이 옳다고 믿었을 뿐인 사람들을 얘기한다. ........ (이시구로의 작품들을 좀더 봐야할 것 같다.) 

 

이시구로가 54년생이고 하루키가 49년생이다. 하루키가 고작 다섯살 더 많다. 난 어쩐지 세대가 다를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시구로가 젊은 작가라고 생각했다.

이런 비교가 얘기가 되는지 좀더 생각해봐야겠다.

너무 늦은 시각이다. 머리가 멈춘듯하다.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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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4-25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군요. 님의 이 페이퍼!
그런데 왜 노벨문학상이 이시구로는 되면서 하루키는 안 되는 건지
님의 생각을 더 알고 싶은데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종합소설...?
저도 하루키가 노벨문학상을 탄다는 게 잘 상상이 안 가요.
그런데 그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죠.
기껏해야 너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노벨문학상의 전례를 보면
그런 작가에겐 잘 안 주잖아요.
그에 비하면 이시구로는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매번 후보 지명이 되고 있다는 말이죠.
<해변의 카프카>가 이스라엘 문학상인지 뭔지 탓는데 그게 또 노벨상의 전초 격이라고 하더만요.
그런 걸 보면 건강하게 잘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받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ㅋ

포스트잇 2018-04-25 14:43   좋아요 1 | URL
네. 어려운 문제죠.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게 늘 쉽지 않은데,
앞으로 하루키 관련 페이퍼에 지적하신 주제들에 대해서 쓰려고 합니다.
하루키 소설은 늘 조금씩 아쉬움이 있어요. 종합소설은 하루키가 늘 쓰고 싶다고 하는 소설인데요, 19세기 소설, 특히 발자크 소설처럼 세속적인 전체 시대상이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소설을 지칭했습니다. 19세기 소설의 자기완결적 소설도 같은 맥락인것같고요. 하지만 하루키가 정말 이런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지, 정작 그의 소설들을 보면 아닌것 같거든요. ...
요즘 들어 부쩍 역사에 대해 발언을 하는 내용이 실제 하루키의 소설에 반영되는지 그것도 의심스럽고요.
이중 플레이를 하는거 아닌가 싶고, 그게 아니면 문학이란 직접적인 발언이 담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주의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연구대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