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여행 안내서도 있듯이 
깨어있어야 하는 밤을 여행하기 위한 안내서도 있는 법이다. 
여기 놀라운 여행 안내서가 있다. 밤의 여행서.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 해설서라는데.... 이게 해설해준다고 읽을 수 있는 책인가? ㅎㅎ

김종건 교수는 조이스 최후의 걸작인 [피네간의 경야]가 "꿈같은 밤 시간의 기록" (피네간의 경야 이야기, 2015)이라고 정리해준다. "모든 인류문화의 우주적 및 희비극적 종합을 묘사하려고 시도한", 그야말로 '만사(萬事)에 관한 책"이다.

만기친람이 얼마나 해로운데..  만사에 관한 책을 읽을 수 있나?

 

일찌기 고 움베르토 에코께서는 [피네간의 경야]를 사전dictionary과 동급으로 놓으셨으니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상적인 독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상적인 책" ([젊은 소설가의 고백] 57)이라고 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전기작가 리처드 앨먼이 그랬나, 조이스의 작품 세계를 "난해하지만 궁극적으로 가치있는 난해함"이라고 정리해줬다.

무려 1천여페이지 넘는 이 사전 해설서 또한 불면증에 궁극적으로 가치있는 이상적인 치료제로 권할 수 있을 것 같다.

[피네간의 경야]에 동참하고 싶을 때 김종건 교수의 이 밤의 미로를 따라가면 될 것 같다.

 

[피네간의 경야]까지는 아니어도 [율리시스] 정도는 꼭 읽어줘야 할 것 같고, 그래서 아직도 읽지 않았다면 왠지 빚진 것 같은 부채감을 갖게 되는 이상한 마음이 생겼다.

쓸데없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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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7-05-13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개해 주신 김종건 교수님의 새 책을 보니 흥미가 생기는군요.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난해하다는 평을 받는데, 『피네간의 경야』는 ‘무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해서 더더욱 난해하다는 얘길 들은 기억이 납니다. 정작 『피네간의 경야』라는 책은 구경도 못해봤지만요.『밤의 미로』에 달린 주석이 1,400개라고 하는데, 『율리시스』엔 주석이 무려 4,463개나 달렸으니 ‘주석의 분량‘으로 봐서는『피네간의 경야』도 한번쯤 도전해 볼 만하다는 생각도 가져보게 되는군요.

포스트잇 2017-05-13 11:33   좋아요 1 | URL
율리시스도 읽으셨는데 ‘경야‘도 읽으실 것 같습니다^^
‘밤의 미로‘는 원텍스트 ‘경야‘와 달리 출구가 보이는 미로일 것 같아서 아마 충분히 ‘재밌게˝...까지는 장담 못하지만 흥미롭게 읽을 수는 있을 듯한 느낌은 듭니다.

저는 또 새로운 개정판 나오기 전에 [율리시스]부터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ㅎㅎ

oren 2017-05-14 15:12   좋아요 1 | URL
셰익스피어에 대한 글을 살피다가 『피네건의 경야』에 대한 언급이 나온 글귀를 보니 문득 포스트잇 님의 이 글이 생각나더군요. 그래서 달려왔습니다^^
* * *
조이스는 『피네건의 경야』에서 셰익스피어에게 열렬했던 관객들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한탄했지만, 내가 볼 때는 이 새로운 영상 시대에 셰익스피어의 작품마저도 소멸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프루스트도 사라질 것이다. 기묘한 아이러니다. 이런 지독한 시대에 소설이 많은 독자를 확보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소설들이 암울한 이 시대 상황을 짊어진다 해도, 우리는 다시 책장을 넘겨야 한다.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중에서

포스트잇 2017-05-14 15:31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도 조이스도 프루스트도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사드맞은 기분 듭니다. ...최종 종말단계 미사일 시스템 ㅠ 아마 종말 단계 거치면 신인류가 나올지도 모르죠. 무덤덤한 둔한 인간들. 근데 그중에 우연히 쓰레기더미에서 셰익스피어나 조이스나 프루스트 작품을 발견하는데 일부만 읽고 눈물을흘리는 겁니다. 그리고 놀라죠, ‘이게 뭔가, 이게 뭔데 날 울리나...˝ 그래서 막 찾아다니게 되는 겁니다. 고전들을...ㅎㅎ상상입니다. 우리는 그런 작품들을 지키는 경야, 밤의파수꾼이 되는거죠. 피네간의 경야페이지를 넘기면서..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말이죠..,,;;

왠지, 밤의미로, 읽어야 할거 같네요 ㅎㅎ
 

출판된지 50년이 지났다고 하는 로봇원칙의 아버지 아이작 아시모프의 생명과학의 역사가 흥미를 끈다.

그러니까 1967년도경에 저술되었다는 얘기다.

이후에 발견되었거나 바뀐 내용들은 역주로 보완했다고 하니 과거와 현재의 변화도 알 수 있을 듯 하다.

책소개는 이렇다.


이 책은 미국 자연사박물관에서 학생과 일반인에게 신뢰 있고 가격 부담 없는 과학교양서들을 보급하기 위해 기획된 과학사 시리즈 중 하나이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이 책에서 생명과학의 역사를 Alcmaeon과 Hippocrates에서부터 Urey와 Miller의 체외 아미노산 합성 실험과 세포에서의 DNA와 RNA의 역할까지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현대적인 측면을 다루는 후반부에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생화학 분야의 내용이 많은 것은 저자의 전공과 관련이 있다할 것이다. 
저자는 사실을 단순히 연대순으로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논리의 흐름을 파헤쳤으며, 중요한 실험 및 학자들을 빠짐없이 기록하며, 과학자의 공과도 과감히 논하였다. 또한 생기론과 기계론과 같이 과학철학과 관련된 부분도 짚고 넘어가며, 많은 생명과학 용어에 대한 유래를 밝히고 있어 왜 그런 용어가 쓰이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이 모든 것을 매우 읽기 쉽고 흥미롭게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을 아직도 읽지 못했는데, 그래서인지 왠지 빚진 느낌이다. 허, 참...
아시모프는 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했고, 박사학위까지 있으며 교수도 역임한 작가다. 
대단하다.
이과분야에는 정말 맹한 나로서는 번번이 과학분야 독서에 실패해온 역사가 있다보니 두렵긴 한데 기회되면 이런 분야도 읽어보고 싶다. 
빚진 느낌을 지니고 이 작가의 책도 부지런히 읽어보기로 한다, 기회되면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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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같은 날 비라니.. 내일도 비가 올 거라는 예고.

아직 투표하지 않았다. 이번처럼 느긋한 대선날도 없었던 듯.

비 좀 잦아든 틈타서 투표해야지.

 

파우스트도 여러 버전이 있어서 죄다 일별이라도 해보려면 이거 또한 대략 대공사일 터.

오늘도 토마스만의 [파우스트 박사]를 읽고 있다.

1권의 마지막 장은 드디어 아드리안 레버퀸과 악마와의 거래를 가록한 대화. 아드리안이 직접 내는 목소리.

이런 구성, 별로긴 해.

이 거래가 있은 후 화자인 나와 내 가족이 아드리안의 거처, 피난처를 찾았던 것.

그러니까 바로 앞 장의 일(24장)은 아드리안에게 찾아온 변화 후의 일인 것이다.

 

아드리안에게서 느껴진 변화는 바로 그일이 저질러진 후였기에 느껴졌던 일이다.

더할나위 없이 정교하고 디테일하며 정감 넘치는 작곡 뒤에 남겨진 감상은 감탄과 비탄, 정감과 비애가 교차하는 묘한 느낌이었다고 화자는 말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 아드리안이 창조한 음악은 빼어난 음악성과 함께 비애를 뒤로 남긴다.

모든 것에 혐오를 드러내는 아드리안의 고립과 고독을 포착하는 화자의 질투어린 눈을 또한 감상해야 한다.

여튼 한번 찾아온 독서의 고비를 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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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 테리 이글턴의 [악],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롯의 세계](테리 이글턴은 "인간의 어둠을 다룬 위대한 기념비"라고 평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쇼펜하어의 [의지와 표상]을 소설에 구현한 작품).....슈테판 츠바이크의 [톨스토이를 쓰다]...로

메뚜기처럼 이책저책으로 옮겨가며 읽고 있는데, 츠바이크의 [톨스토이를 쓰다]를 보다가 전기작가의 왕이라는 츠바이크의 평전은 누가 썼나, 는 생각에 머물렀다.

[어제의 세계]가 츠바이크의 회고록이고 타인이 쓴 그의 평전이 있는지 모르겠다. 검색해보면 있겠지만 번역되어 나온 건 없는 듯하다.

[톨스토이를 쓰다]를 읽다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와 도대체 어쩌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나.

흔히 3대 전기작가로 츠바이크와, 영국의 리튼 스트레이치 Lytton Strachey, 프랑스의 앙드레 모루아 를 뽑는 모양인데(리튼 스트레이치의 글을 읽어본적이 없어서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리에겐 딱 두 권의 번역서가 있다) 다른 두 작가에 비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번역서도 압도적으로 많고 단연 인생 자체도 극적이다.

 

토마스만의 대표작으로 흔히 왜 [마의 산]을 꼽는지 읽어봐야 할 것 같다.

[파우스트 박사]는 생각보다 고개가 갸우뚱 거려지고 있다.

뒷장부터 거꾸로 읽어도 보고, 분권된 우리의 민음사판 1권의 마지막으로 돌아가 읽고도 있지만, '나치 독일의 우화'로서, 그리고 악의 전형 또는 악에 대해 많은 걸 알려주는 아드리안 레버퀸이라는 인물을 부여잡고 읽기엔 인내가 대단히 필요한 소설이다.

레버퀸 자체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화자인 나에 의해 전적으로 관찰되는 레버퀸이 실감나지 않는다.

토마스 만은 왜 레버퀸을 직접 다루지 않고 나라는 화자, 나라는 창을 걸쳐 그를 바라보게 했는가.

'나' 또한 살아있지 못하다. 간간이 '나'의 생활에 찾아온 변화를 서술한 것외엔 살아있는 인물의 맛을 좀체 느끼기 어렵다.

그러면서 나의 평이 등장한다.

화자가 이글을 집필하는 기간은 2차대전이 한창으로 자신이 머무르는 뮌헨이 공습으로 폐허가 되어가는 상황을 직접 겪으며,

1차대전에 독일이 취했어야 했던 과오.

무조건적 항복으로 초토화되는 것을 막았어야 했는데, 독일민족은 '강렬한 비극성에 이끌리는 성향'에 의해 점점 더 비극적 영웅주의로 기울었다는 식의 평가가 끼어든다.

 

비극성에 이끌리고 도취되기를 갈망하는 독일민족성을 작가는 레버퀸을 통해서 비판하고자 했던 것인가.

매혹되지도 비판적이지도 못한 어정쩡한 거리감이 이 소설을 갸우뚱거리며 읽게 하는건 아닌지 .... 더 두고볼 일이다.

 

어느 인물 하나 사로잡고 놓치 못할 만한 인물이 아직은 없다.

다만,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인상이 강해서인지 모르지만 젊음, 아이, 여성, 눈, 외모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낭만적이라는 느낌은 받는다. 이런 낭만성이 죽음, 비탄, 비극... 이런 거에 끌리도록 하지 않았는지 짐작해본다. 토마스 만에 대한 전기적 정보도 필요하고 더 많은 그의 작품 독서도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그런 느낌이 든다.

[마의 산]을 읽어봐야겠는데... 당분간 토마스만을 더 들여다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솔찮은 양반이여. 어쩐지 허리가 휘는 느낌이여.

 

다시 츠바이크.

츠바이크의 브라질에서의 마지막을 담고 있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이 생각났다.

정말 재밌게 본 영화였는데. 특히나 츠바이크를 모티브로 삼아 영화를 만들었다는 감독의 얘기 때문에 더 인상적이었던 영화가 됐다.

영감을 주는 인물의 존재.

츠바이크와 프로이트도 당연히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악에서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은 필수지참 요소다.

츠바이크의 다른 글들도 굉장했지만 톨스토이를 다룬 이 글들도 감탄에 감탄을 하도록 한다.

나는 감탄하는 자이다. 

 

 

 

 

 

 

 

 

 

 

 

 

 

 

 

 

 

 

 

 

츠바이크와 프로이트

츠바이크의 내면을 다룬 소설이라는 [체스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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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5-08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츠바이크와 나브코보는 연구 대상입니다.. 글을 잘써서..

포스트잇 2017-05-08 14:17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그렇습니다. 대단한 글쟁이들이에요. 감탄 감탄합니다.

oren 2017-05-08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은 저도 꼭 읽어보고 싶은 소설입니다. 만도 쇼펜하우어를 유별나게 좋아했던 작가였던 듯한데, 따지고 보니 쇼펜하우어를 좋아한 작가들이 읽기가 쉽잖다는 게 하나의 공통점인 걸까요? 니체, 톨스토이, 보르헤스 등등 말이지요... 헤럴드 블룸은 ‘무엇이든 한 번 더 본 것에 다가가기가 쉽다.‘면서 『마의 산』도 여러 번 읽을 것을 강조했더군요. 한 번 읽기도 어려운데 말이지요.
* * *
『돈 키호테』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은 작품은 구성을 찾으려고 읽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인물의 발전 과정과 작가의 비전이 펼쳐지고 밝혀지는 것을 보려고 읽어야 한다. 따라서 산초 판자와 돈 키호테, 스완과 알베르틴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처럼 친밀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된다. 나는 스탕달과 디킨스에 관해서 다시 읽는다는 개념에 대해 주창한 바 있는데, 이는 제인 오스틴이나 세르반테스의 경우에는 더더욱 필수적이다.

소설을 처음 읽으면 단순한 즐거움을 느끼지만 『위대한 유산』이나 『파르마의 수도원』같은 작품을 다시 읽게 되면 전혀 다른, 혹은 보다 나은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 전에는 불가능했던 전망 속으로 들어서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즐거움은 첫 번째 독서보다 더 다양하고 계몽적인 요소가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도 어떻게 , 왜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새로운 인식이다. 무엇이든 한 번 더 본 것에 다가가기가 쉽다.

누구나 젊은 날 열정적으로 반복해서 책을 읽고, 소설 속의 마음에 드는 인물과 동질성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의 『마의 산』은 그러한 동일화의 즐거움이 나이에 관계없이 독서라는 경험의 합법적 일부라고 앞서 내 경험을 통해 이야기했다. 그러한 즐거움이 비록 중년 이후에는 단순한 것에서 감상적인 것으로 될지라도 말이다.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토마스 만>

포스트잇 2017-05-08 14:57   좋아요 1 | URL
좋을 글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네, 한번 읽는 것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소설들입니다.
그럼 좀 분량이 적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어떻게 된 게 책들이 죄다 벽돌 수준이라 ㅎㅎ
한번 읽고 다시 또 읽기엔 머리에 쥐날 것같아 시간을 좀 묵혔다가 봐야할 듯합니다.

쇼펜하우어의 저작도 난해하다는 소문이 자자한데요, 읽어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이제는 더 많은 책을 욕심낼 게 아니라 반복해서 읽을 책들 몇권 선별해서 그것만이라도 잘 읽어야 하는거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
 

어젯밤, 유레카! 같은 기분.

그러니까... 토마스만의 [파우스트 박사]를 붙잡고 있은지 어언 .... 몇주.

각권이 5백여 페이지로 1천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은 분량으로서만이 아니라 내용과 스타일이 주눅들게 하는 맛이 있는데

토마스만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넘는데, 초보자가 멋모르고 무작정 오르기 시작하다 길을 잃고 다리에 쥐도 나고, 넉다운될 지경에 이르러 이걸 포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려가더라도 이른바 '질서있는 하산'을 해야 하는데... 고민고민하던 차에 에라이 모르겠다 [고전의 유혹](잭 매니건)이나 보자며 널부러져 이리저리 페이지를 넘기며 보던 중이었다. 

아, 이거구나, 이렇게 오를 수도 있겠다는 새로운 등산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잭 매니건 역시 토마스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를 읽으며 혼돈에서 헤매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중력의 무지개], 이 소설은

 

 

거의 뚫을 수 없는 홍수림처럼 서로 연결된 요소들이 제멋대로 뻗어가면서, 벽에 그래프 용지를 붙여 놓고 계속 메모하지 않는 이상 방향을 잃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거의 전이되어 버린다.

 

 

그 대안을 잭은 발견하는데,

 

 

심한 감기로 휴가를 내고 몸져 누워서, 내게 있는 책이라곤 [중력의 무지개]밖에 없었을 때였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흘을 내리 이 녀석을 읽었다. 그러다가 다 읽은 순간, 나는 마지막부터 첫 장까지 거꾸로(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에서 써 보라고 추천했던 방법) 전체를 다시 읽었다. 그 방법을 쓰고서야 나는 그 모자이크의 수많은 조각들을 맞춰 나갈 수 있었다. 그 방법을 쓰고서야 미국에서 가장 은둔적인 작가, 토머스 핀천의 총기 넘치고 강박적이고 편집증적인 정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중력의 무지개]와 [파우스트 박사]가 같은 구성이나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뿐더러, 잭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단은 읽고나서 비로소 뒤에서부터 다시 읽었다는 차이가 있긴 하다. 그렇지만 둘 다 제대로 된 호흡으로 처음부터 한걸음 한걸음 오르다간 중간에 숨막혀 죽을 것 같은 지경을 선사한다면 이 방법도 좋지 않겠는가.

한번 시도해 보는 거지. 뒷 장부터 앞으로 거슬러 올라 읽어보는 거다. 전체를 볼 수 없는 막막함에서 한걸음 한걸음, 한땀 한땀 꿰다 가다보면 어느새 시야가 탁 트이며 시원한 바람이 맞아주는 마루턱이나 정상을 밟는 짜릿함을 얻지는 못할지라도 죽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추리소설처럼 마지막에야 드러나는 범인이나 미스터리 수법을 알고나면 처음부터 읽을 마음이 아예 없을지도 모를 그런 장르의 소설도 아닌 바에야 결말을 알고 끝부분을 미리 본다해서 김빠질 일도 없는거 아닌가.

 

그리고 마지막 장을 읽었다.

......................................

 

난해하거나 숲이 보이지 않은채 미로를 헤매고 있는 느낌이 들게하는 소설들 읽는 저마다의 방법들.

어떤 이는 먼저 정보를 모아 기본 지식부터 무장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작가에 대해서, 소설의 기본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각종 분석서나 해설서를 읽을 수도 있다.

나같은 경우는 일단 부딪쳐보다가 아, 이거 이래선 안되겠구나 싶을 때에야 비로소 배경 정보나 지식을 찾아본다.

기쁨을 지연시키는 경우랄까. 아, 이거였구나, 그런 뜻이었구나, ... 등등.

먼저 읽은 자들의 안내를, 조언을 따를 필요가 있다.

서평, 리뷰를 열심히 읽어야 할 것 같다.

무작정 숲으로 들어가 헤매는 것보다 낫겠다 싶다.

 

왜 혼란과 절망을 느끼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소설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 걸까.

뭔가를 찾는 중이라서.

뭔지는 모른다. 또는 어렴풋이 이길로 가면 아마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이 나올 거라는 예상을 하면서 일단 출발하는 거다.

 

거꾸로 읽어보는 것.

처음 해보는 짓인지라 효과가 어떨지는 아직 모르겠음.

 

작가의 질서를 흐뜨려보는 것.

흔히 음악에서 '백마스킹'을 하다보면 악마의 속삭임을 듣는다는 말도 있는데, 소설을 거꾸로 뒷장에서부터 읽는다면 어떤 저주에 걸릴지 모를 일이다. 조금은 두려운 맛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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