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 테리 이글턴의 [악],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롯의 세계](테리 이글턴은 "인간의 어둠을 다룬 위대한 기념비"라고 평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쇼펜하어의 [의지와 표상]을 소설에 구현한 작품).....슈테판 츠바이크의 [톨스토이를 쓰다]...로

메뚜기처럼 이책저책으로 옮겨가며 읽고 있는데, 츠바이크의 [톨스토이를 쓰다]를 보다가 전기작가의 왕이라는 츠바이크의 평전은 누가 썼나, 는 생각에 머물렀다.

[어제의 세계]가 츠바이크의 회고록이고 타인이 쓴 그의 평전이 있는지 모르겠다. 검색해보면 있겠지만 번역되어 나온 건 없는 듯하다.

[톨스토이를 쓰다]를 읽다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와 도대체 어쩌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나.

흔히 3대 전기작가로 츠바이크와, 영국의 리튼 스트레이치 Lytton Strachey, 프랑스의 앙드레 모루아 를 뽑는 모양인데(리튼 스트레이치의 글을 읽어본적이 없어서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리에겐 딱 두 권의 번역서가 있다) 다른 두 작가에 비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번역서도 압도적으로 많고 단연 인생 자체도 극적이다.

 

토마스만의 대표작으로 흔히 왜 [마의 산]을 꼽는지 읽어봐야 할 것 같다.

[파우스트 박사]는 생각보다 고개가 갸우뚱 거려지고 있다.

뒷장부터 거꾸로 읽어도 보고, 분권된 우리의 민음사판 1권의 마지막으로 돌아가 읽고도 있지만, '나치 독일의 우화'로서, 그리고 악의 전형 또는 악에 대해 많은 걸 알려주는 아드리안 레버퀸이라는 인물을 부여잡고 읽기엔 인내가 대단히 필요한 소설이다.

레버퀸 자체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화자인 나에 의해 전적으로 관찰되는 레버퀸이 실감나지 않는다.

토마스 만은 왜 레버퀸을 직접 다루지 않고 나라는 화자, 나라는 창을 걸쳐 그를 바라보게 했는가.

'나' 또한 살아있지 못하다. 간간이 '나'의 생활에 찾아온 변화를 서술한 것외엔 살아있는 인물의 맛을 좀체 느끼기 어렵다.

그러면서 나의 평이 등장한다.

화자가 이글을 집필하는 기간은 2차대전이 한창으로 자신이 머무르는 뮌헨이 공습으로 폐허가 되어가는 상황을 직접 겪으며,

1차대전에 독일이 취했어야 했던 과오.

무조건적 항복으로 초토화되는 것을 막았어야 했는데, 독일민족은 '강렬한 비극성에 이끌리는 성향'에 의해 점점 더 비극적 영웅주의로 기울었다는 식의 평가가 끼어든다.

 

비극성에 이끌리고 도취되기를 갈망하는 독일민족성을 작가는 레버퀸을 통해서 비판하고자 했던 것인가.

매혹되지도 비판적이지도 못한 어정쩡한 거리감이 이 소설을 갸우뚱거리며 읽게 하는건 아닌지 .... 더 두고볼 일이다.

 

어느 인물 하나 사로잡고 놓치 못할 만한 인물이 아직은 없다.

다만,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인상이 강해서인지 모르지만 젊음, 아이, 여성, 눈, 외모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낭만적이라는 느낌은 받는다. 이런 낭만성이 죽음, 비탄, 비극... 이런 거에 끌리도록 하지 않았는지 짐작해본다. 토마스 만에 대한 전기적 정보도 필요하고 더 많은 그의 작품 독서도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그런 느낌이 든다.

[마의 산]을 읽어봐야겠는데... 당분간 토마스만을 더 들여다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솔찮은 양반이여. 어쩐지 허리가 휘는 느낌이여.

 

다시 츠바이크.

츠바이크의 브라질에서의 마지막을 담고 있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이 생각났다.

정말 재밌게 본 영화였는데. 특히나 츠바이크를 모티브로 삼아 영화를 만들었다는 감독의 얘기 때문에 더 인상적이었던 영화가 됐다.

영감을 주는 인물의 존재.

츠바이크와 프로이트도 당연히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악에서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은 필수지참 요소다.

츠바이크의 다른 글들도 굉장했지만 톨스토이를 다룬 이 글들도 감탄에 감탄을 하도록 한다.

나는 감탄하는 자이다. 

 

 

 

 

 

 

 

 

 

 

 

 

 

 

 

 

 

 

 

 

츠바이크와 프로이트

츠바이크의 내면을 다룬 소설이라는 [체스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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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5-08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츠바이크와 나브코보는 연구 대상입니다.. 글을 잘써서..

포스트잇 2017-05-08 14:17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그렇습니다. 대단한 글쟁이들이에요. 감탄 감탄합니다.

oren 2017-05-08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은 저도 꼭 읽어보고 싶은 소설입니다. 만도 쇼펜하우어를 유별나게 좋아했던 작가였던 듯한데, 따지고 보니 쇼펜하우어를 좋아한 작가들이 읽기가 쉽잖다는 게 하나의 공통점인 걸까요? 니체, 톨스토이, 보르헤스 등등 말이지요... 헤럴드 블룸은 ‘무엇이든 한 번 더 본 것에 다가가기가 쉽다.‘면서 『마의 산』도 여러 번 읽을 것을 강조했더군요. 한 번 읽기도 어려운데 말이지요.
* * *
『돈 키호테』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은 작품은 구성을 찾으려고 읽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인물의 발전 과정과 작가의 비전이 펼쳐지고 밝혀지는 것을 보려고 읽어야 한다. 따라서 산초 판자와 돈 키호테, 스완과 알베르틴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처럼 친밀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된다. 나는 스탕달과 디킨스에 관해서 다시 읽는다는 개념에 대해 주창한 바 있는데, 이는 제인 오스틴이나 세르반테스의 경우에는 더더욱 필수적이다.

소설을 처음 읽으면 단순한 즐거움을 느끼지만 『위대한 유산』이나 『파르마의 수도원』같은 작품을 다시 읽게 되면 전혀 다른, 혹은 보다 나은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 전에는 불가능했던 전망 속으로 들어서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즐거움은 첫 번째 독서보다 더 다양하고 계몽적인 요소가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도 어떻게 , 왜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새로운 인식이다. 무엇이든 한 번 더 본 것에 다가가기가 쉽다.

누구나 젊은 날 열정적으로 반복해서 책을 읽고, 소설 속의 마음에 드는 인물과 동질성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의 『마의 산』은 그러한 동일화의 즐거움이 나이에 관계없이 독서라는 경험의 합법적 일부라고 앞서 내 경험을 통해 이야기했다. 그러한 즐거움이 비록 중년 이후에는 단순한 것에서 감상적인 것으로 될지라도 말이다.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토마스 만>

포스트잇 2017-05-08 14:57   좋아요 1 | URL
좋을 글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네, 한번 읽는 것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소설들입니다.
그럼 좀 분량이 적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어떻게 된 게 책들이 죄다 벽돌 수준이라 ㅎㅎ
한번 읽고 다시 또 읽기엔 머리에 쥐날 것같아 시간을 좀 묵혔다가 봐야할 듯합니다.

쇼펜하우어의 저작도 난해하다는 소문이 자자한데요, 읽어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이제는 더 많은 책을 욕심낼 게 아니라 반복해서 읽을 책들 몇권 선별해서 그것만이라도 잘 읽어야 하는거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
 

어젯밤, 유레카! 같은 기분.

그러니까... 토마스만의 [파우스트 박사]를 붙잡고 있은지 어언 .... 몇주.

각권이 5백여 페이지로 1천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은 분량으로서만이 아니라 내용과 스타일이 주눅들게 하는 맛이 있는데

토마스만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넘는데, 초보자가 멋모르고 무작정 오르기 시작하다 길을 잃고 다리에 쥐도 나고, 넉다운될 지경에 이르러 이걸 포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려가더라도 이른바 '질서있는 하산'을 해야 하는데... 고민고민하던 차에 에라이 모르겠다 [고전의 유혹](잭 매니건)이나 보자며 널부러져 이리저리 페이지를 넘기며 보던 중이었다. 

아, 이거구나, 이렇게 오를 수도 있겠다는 새로운 등산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잭 매니건 역시 토마스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를 읽으며 혼돈에서 헤매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중력의 무지개], 이 소설은

 

 

거의 뚫을 수 없는 홍수림처럼 서로 연결된 요소들이 제멋대로 뻗어가면서, 벽에 그래프 용지를 붙여 놓고 계속 메모하지 않는 이상 방향을 잃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거의 전이되어 버린다.

 

 

그 대안을 잭은 발견하는데,

 

 

심한 감기로 휴가를 내고 몸져 누워서, 내게 있는 책이라곤 [중력의 무지개]밖에 없었을 때였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흘을 내리 이 녀석을 읽었다. 그러다가 다 읽은 순간, 나는 마지막부터 첫 장까지 거꾸로(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에서 써 보라고 추천했던 방법) 전체를 다시 읽었다. 그 방법을 쓰고서야 나는 그 모자이크의 수많은 조각들을 맞춰 나갈 수 있었다. 그 방법을 쓰고서야 미국에서 가장 은둔적인 작가, 토머스 핀천의 총기 넘치고 강박적이고 편집증적인 정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중력의 무지개]와 [파우스트 박사]가 같은 구성이나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뿐더러, 잭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단은 읽고나서 비로소 뒤에서부터 다시 읽었다는 차이가 있긴 하다. 그렇지만 둘 다 제대로 된 호흡으로 처음부터 한걸음 한걸음 오르다간 중간에 숨막혀 죽을 것 같은 지경을 선사한다면 이 방법도 좋지 않겠는가.

한번 시도해 보는 거지. 뒷 장부터 앞으로 거슬러 올라 읽어보는 거다. 전체를 볼 수 없는 막막함에서 한걸음 한걸음, 한땀 한땀 꿰다 가다보면 어느새 시야가 탁 트이며 시원한 바람이 맞아주는 마루턱이나 정상을 밟는 짜릿함을 얻지는 못할지라도 죽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추리소설처럼 마지막에야 드러나는 범인이나 미스터리 수법을 알고나면 처음부터 읽을 마음이 아예 없을지도 모를 그런 장르의 소설도 아닌 바에야 결말을 알고 끝부분을 미리 본다해서 김빠질 일도 없는거 아닌가.

 

그리고 마지막 장을 읽었다.

......................................

 

난해하거나 숲이 보이지 않은채 미로를 헤매고 있는 느낌이 들게하는 소설들 읽는 저마다의 방법들.

어떤 이는 먼저 정보를 모아 기본 지식부터 무장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작가에 대해서, 소설의 기본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각종 분석서나 해설서를 읽을 수도 있다.

나같은 경우는 일단 부딪쳐보다가 아, 이거 이래선 안되겠구나 싶을 때에야 비로소 배경 정보나 지식을 찾아본다.

기쁨을 지연시키는 경우랄까. 아, 이거였구나, 그런 뜻이었구나, ... 등등.

먼저 읽은 자들의 안내를, 조언을 따를 필요가 있다.

서평, 리뷰를 열심히 읽어야 할 것 같다.

무작정 숲으로 들어가 헤매는 것보다 낫겠다 싶다.

 

왜 혼란과 절망을 느끼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소설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 걸까.

뭔가를 찾는 중이라서.

뭔지는 모른다. 또는 어렴풋이 이길로 가면 아마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이 나올 거라는 예상을 하면서 일단 출발하는 거다.

 

거꾸로 읽어보는 것.

처음 해보는 짓인지라 효과가 어떨지는 아직 모르겠음.

 

작가의 질서를 흐뜨려보는 것.

흔히 음악에서 '백마스킹'을 하다보면 악마의 속삭임을 듣는다는 말도 있는데, 소설을 거꾸로 뒷장에서부터 읽는다면 어떤 저주에 걸릴지 모를 일이다. 조금은 두려운 맛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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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를 전혀 좋아하지 않기에 책과 관련된 이벤트라 해도 그닥 주목하지 않는다.

마음산책, 북스피어, 은행나무 출판사가 X 시리즈로 독자와 한판 거나한 이벤트를 벌인다는 광고를 보고 즐겨찾는 서재에서도 소식을 만나기는 했지만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장르, 페이지 정도만 알려주고 책에 관한 정보를 일절 주지 않고 책을 선보이는 이벤트.

그런데 북스피어 X는 요즘 내가 주목하고 있는 나치 시대의 독일을 배경으로 사립탐정이 등장하는 일종의 역사미스터리라고 해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제까닥 구입했다.

제목이나 작가 등 작품 소개는 5월 16일 자정에 공개된다고 한다. 흠........ 왜? 하필? 세 권 다 역사적인 것과 관련이 있나?

 

어쨌든 아래같은 포장지에 싸여 온 책을 뜯다 종이에 급기야 손가락까지 베였다.

좀 두꺼운 종이다보니 베이는 감각과 소리가 아직까지도 몸서리치게 한다.

베인다는 감각은 얻어맞는다보다 더 치떨리게 하는 맛이 있다.

피를 보다니. 이벤트 싫어.

단숨에 절반쯤을 읽었고...... 작가는 우리 나라에는 그의 작품이 단 한권 번역된 작가인데, 예전에 읽었던터라 구면인 작가였다.

상당히 어려웠던 기억이 있는데 그 외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이 마~알간 뇌여 ㅎㅎㅎ

1936년 베를린의 독일인 사립탐정의 활약상이 그려지는 작품인데

1936년은 중요한 해다.

바야흐로 히틀러의 독재체제가 전쟁으로 치닫기 위한 준비를 진행해가던 시기.

그 시절 독일인들이 궁금했다. 그들은 왜 인류와 자기 자신들까지 파멸하는 길에서 돌아서지 못했나...

 

책은..... ... 절반밖에 읽지 못한 상태에서 성급하지만 .... 아쉽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캐릭터, 스타일을 답습하고 있어서 왜 그랬는지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다.

원작가를 보지 왜 아류를 보겠나.

애초에 내가 궁금해하고 보고 싶었던 부분에서 잘 완수되었기를 끝까지 기대하며 볼밖에.

오랫만에 이런 장르의 소설을 잡고 있자니 쉬어간다 싶으면서도 시간이 좀 아까울수도 있겠다싶은 생각도 있다.

끝까지 봐야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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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전락(?)을 보는 것도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다.

테리 이글턴의 [악]을 감탄해마지 않으면서 읽을수밖에 없었다.

한문장 한문장이 통찰에 빛나는 각고한 문장들이다.

밑줄을 긋고자 한다면 포기하는 게 좋다. 책 전체를 밑줄쳐도 좋다면 뭐 말리진 않겠지만.

어마어마한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일차 완독한 후 나는 별 넷(북플의 별점)을 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결말 부분이 당최 이해가 안돼서. ... 아니 이게 뭐야. 기껏 문학속의 악의 화신들, 순수한 악, 절대 근본악이라 할 수 있는 악의 판데모니움 ,일종의 매혹적인 지옥을 걷다가 추잡스런 현실로 던져진 느낌이었다.

아니 내가 처음부터 이글턴의 목적과 의도를 오해했던 것에서 비롯된 사단인지 모른다.

이미 이글턴은 1장에서 '악이라는 허구 Fiction'를 다뤘기 때문이다.

순수악의 환상에 갇히지 말라.

유물론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자 테리 이글턴은 2010년에 발간된 이 책을 통해 현실의 평범하고 진부한 일상적 악은, 악evil이 아니라 부정wickedness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악의 불가해성, 완전한 목적없음, 인과율의 불가해로 치부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테러를 악으로 규정해서 그들의 망상에 고개젓고 돌아설 게 아니라 그들의 정치사회적 불만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하의 악을 지상의 생활악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보는 것인지.

예를 들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 말이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망상으로 치부할 게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불만을 고려하고 해결하려 애써야 하는 게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당부다.

 

악이 일종의 우주적 심술(145)이던 지경에서 순결함을 강조하며 불순한 것들을 참을 수 없는 원리주의자들의 심술로 급전직하 전락한 듯한 우리 시대의 악을 탐구하는 건 또다른 연구서를 봐야 할듯 싶다.

 

강상중의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을 읽고 이책을 잉태시키게 된 동기가 됐다던 이글턴의 [악]을 읽은 뒤 느끼는 점은 악의 매혹이자 이길 수 없는 악의 힘을 다시한번 확인했다고 할까.

두 저자가 기를 쓰고 현실의 악, 이글턴식으로 말하자면 부정(사악함)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호소하여도 어쩐지 그들의 마지막 전언은 그저 그들 스스로도 매혹된 악의 힘을 서둘러 지식의 힘으로 봉합하고자 하는 안간힘처럼 느껴졌다.

악의 공허, 공동감(空洞感, '주위가 허전한 느낌'인 공허감과 달리 '속, 핵심, 중심이 비어있는 느낌'의 공동감)을 무엇으로 충족시킬 수 있나?

프로이트의 죽음의 충동 역시 충족될 수 있는 것이었던가?

무엇이든 이해가능한 영역으로 끌어놓아야 하는 지식인들의 의무를 완수하는 느낌.

물론 그거라도 해야 한다고, 성심을 다해 그거라도 해야 한다고 당부하는 건지 몰라도, 이해를 허용하지 않는 악, 악의를 상정 하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위험했던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했기 때문에,  문학속의 악을 분류하고 분석해나가는 이글턴의 앞장들(1장과 2장)은 힘이 넘쳐나고 압도한다. 그에 비해 3장의 결말부분은 잊고 있던 현실을 서둘러 끌어들여 알리바이를 만든 느낌이다.

책 자체가 '악'에 매혹해 있다....고 감히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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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운 얘기 하나. 

며칠동안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와 그야말로 싸움을 하며 답답한 날들을 보내다 읽기로 일찌감치계획했던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기 시작했다. 

아, 살것같다.

[파우스트 박사]는 언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될른지... 난 아직도 레버퀸의 대학시절, 서서히 그가 악마와 거래하기 최적의 조건을 갖춰나가는 그의 성격 형성기를 읽고 있었다. 

흥미로운 논쟁도 나오고 이야기의 긴장이 팽팽한데 내가 왜 이 책을 굳이 읽으려는지 생각이 없다면 어지간한 인내로 독서에 찾아오는고비들을 넘기기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에 비해 아렌트의 책, 서문만으로도 시원하다.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처음부터 명쾌한 논리를 가지고 똭 나오잖아. 

소설이 나는 어려워. 


아렌트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옮긴이의 서문에 흥미로운 얘기가 나온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분석하면서 서로 긴밀히 연결된 세 가지의 무능성을 언급한다.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에서는 판단의 무능성을 도출하고 그 판단능력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능력, 고로 판단이란 사유와 의지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아렌트는 이해했다. 

아렌트가 말의 능력과 관련해서 지적하고 있는 것 중 상투어 즉 클리세 사용에 대한 주목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말 자체가 행위라고 했다는데 [인간의 조건]도 기회되면 읽어보고....


말의 쓸모, 그건 곧 현실인식이고 사유와 긴밀한 연관을 갖게 된다. 

말이 현실을 알게 하여 사람에게서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고 아렌트는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히만 같은 경우는 이 말에서 일단 회로가 끊긴다. 

상투어. 

그리고 또 한가지는 나치가 학살을 게획하고 실행하면서 실행자들이 사용하기 위해 고안한 언어규칙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리라 부르지 못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은폐의 언어들. 

학살은 최종해결책, 완전 소개, 특별취급으로, 유대인의 이송작업은 재정착, 동부지역 노동 등으로 직접 표현이 아니라 우회적 표현법을 만들어 대신 사용했다. 

단순히 외부인들 모르게 비밀을 지킨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는 이일을 실행하는 실무자들 스스로를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로부터 소격시키며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도움'을 얻을 수 있게 했다. 

니치의 이 언어규칙은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이히만의 상투어 사용에 판사들은 그의 말에서 공허감을 ㄷ느꼈다. 판사들은 그에게서 사실에 충실한 언어를 듣고 싶어했다. 

공허하다는 것은 현실의 힘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21)


곧 박근혜가 417호 법정에 선다. 

이 재판을 방청권을 얻어서라도 꼭 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생방송되면 좋겠다. 

박근혜의 말. 

박근혜는 또다른 공허한 말을 할 것이다. 

우리는 아이히만의 판사처럼 사실에 충실한 언어를 듣고 싶계 될 것이다. 

우리는 박근혜의 말을 충분히 들어본적이 없다. 

대독한 말에서조차 그녀의 범상치 않은 우주적 사고를 눈치챌 수 있지만 더 나아가 누군가의 질문에, 누군가 건네는 말에 답하는 그녀의 말을 충분히 들어본적이 없다.

잘 짜여진 무래위에 올라 연기만 해오던 배우가 플랜된 위치가 아닌 곳, 상황에서 어떤 말을 내뱉는지 그 배우의 민말을 듣고 싶어진다. 

우리는 이미 박근혜의 말-현실-사유의 연관을 봐왔지만 417호 법정이 연구자들에게 풍부한 영감을 줄 현장이 되길 기대해본다.


독일문학도 좀더 많이 들여다보고 싶다. 

토마스만도 그렇고, 헤르만헤세, 귄터그라스, 그리고 또... 벤야민도...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라는 나라와 민족에 대해 이 나라 독일 작가들과 학자들이 먼저 당혹해했을 거라는 생각이 이번에 새삼 들었다. 

스스로가 얼마나 당혹스럽고 또 끔찍했을 것인가.. 도대체 왜? 무엇이? 

나치가 점령한 자기 조국을 떠나 유럽과 미국에서 또 남미에서 그들은 자기 조국과 조국의 사람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도대체 왜,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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