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턱대고 어렵다는 책들부터 사놓고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부동산'의 한 귀퉁이에서 먼지와 시간만 흡수하며 살도록 내비두고 있는 바보들(나같은)이 읽어보면 좋지 않을까. 요령을 좀 익히고 먼길 가자.

속는 셈치고 한번 읽어봐. 

 

[어려운 책을 읽는 기술 : 어떻게 하면 시대를 뛰어넘는 명저를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다카다 아키노리).

 

 

독서노트를 쓰는 노하우, 관련 사상 계보의 독서 목록, 자유로운 독서법 등 ‘어려운 책’을 무탈하게 독파할 수 있는 실용적 기술을 일러 준다. 이 ‘기술’을 익히면 못 읽을 거라 섣불리 예단했던 책들의 진입장벽이 낮아진다. 지레 겁먹지 않고, 편견을 거두면 어렵다고 소문난 형이상학적 명저들을 내 욕망과 마주 이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저마다의 내밀한 독서길안내서도 읽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여행기처럼, 서평만이 아니라.   

 

 

 

 

 

 

 

 

 

 

 

 

 

 

이렇게 기술 한번 부려서 어려운 책들 좀 읽고 나면, 이런 책도 쓸 수 있을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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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는 대충 이렇다.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다 읽고 나서도, 왜 하루키는 메타포를 들고 나왔을까, 이데아는 뭐고, 메타포는 뭐며, 이 둘의 관계는 소설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며 결국 하루키는 뭘 말하고자 뜬금없다면 뜬금없는 부제까지 달아가며 이런 소설을 썼는지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저부제(장밍밍)의 [고로, 철학한다]를 읽는데 하이데거장에서 크게 감명받았다.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한나 아렌트의 유부남 애인, 나치에 협력했던 철학자 정도로만 알고 있던 나는 장밍밍의 글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하이데거 철학의 요지는 차치하고, 우선 그가 지닌 스토리 자체가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자연인으로서 하이데거는 철저히 루저였다. 그가 나치의 품에 안긴 순간 그의 비참한 말로가 결정된 셈이었다. (172)

 

그런데 어떤 변명을 늘어놓든 하이데거가 이익을 위해 나치에 협조했으며 궁지에 몰리자 자신의 유대인 스승 후설과 유대인 연인 한나 아렌트, 친구 야스퍼스를 내팽개쳤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인격적으로 고상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한 치의 에누리도 없는 소인배였다. (172~173)

 

반전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자연인으로서의 하이데거는 그리 떳떳한 사람이 아니지만 철학자 하이데거에게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젊은 시절 신학의 굴레를 박차고 나와 철학을 연구했고, 나치에게 버려진 후에는 낭만파 시인 횔덜린의 시와 사랑에 빠졌으며, 말년에는 아무도 모르는 숲속에 파묻혀 노자의 『도덕경』을 연구했다. 어느 단계에서든 그는 사색가로서 찬연한 지혜를 발산했다. (173)

 

재승박덕(才勝薄德).

 

나는 하에데거의 철학을 읽으면 눈물이 터져 나올 정도로 어떤 힘같은 것이 느껴진다.(173)

 

[존재와 시간]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같은 글을 읽고 눈물이 터져 나올 정도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지적 능력과 감수성.

하이데거는 나치와의 전력 때문에 말년을 깊은 숲속의 작은 오두막에 숨어 살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횔덜린의 시를 연구했다. "인간은 시적으로 대지 위에 거주해야 한다."

하이데거의 본 저작도 저작이지만 나는 그가 참담한 말년을 대지와 접하면서 읽었을 횔덜린의 시가 궁금했다.

하이데거는 1930년대 중반부터 이미 횔덜린을 연구해왔다지만 신상에 어려움이 생긴 이후 매달린 연구가 어떠했을지.

횔덜린의 시.

시는 어떻게 읽는가. 시를 어떻게 감상하는가. 다시 난제.

 

메타포와 시. 생각은 그렇게 흘러 '시인수업' 시리즈로 나온 엄경희의 [은유]에서 딱 멈췄다.

엄경희는 처음 접해보는 저자다.

현재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데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된 바 있고 미당 서정주 시를 연구한 저서도 있다. 근데 또 예전에 민주노동당 지지선언 명단에도 이름을 올린바 있다.

정치분야가 아니더라도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학을 떼는 사람이라 어쨌든 이 신문에 기고한다든가 하는 사람을 선입견을 가지고 보기도 하는데 엄경희의 경우는 조선일보와 미당, 두가지에서 벌써 경고등이 켜졌었다.  

난 조선일보는 ㅈ자도 쳐다보기 싫다. 지 아무리 상식과 정보에 도움이 된다해도.

조심스럽게 시작한 [은유]를 읽고 난 지금은 엄경희의 글을 더 읽어보고 싶다.

시리즈 제목답게 '시인수업'을 더 받아보고 싶다. 은유의 세상인 시.

 

포켓북 형태의 작고 얇은 분량의 책이지만 곱씹어 읽어볼만한 문장들과 내용으로 꽉 채워져 있다.

은유의 전복적인 의미부터 은유가 문학에서 차지해온 위상의 변화와 이론의 변화까지.

 

은유metaphor는 그리스어 metaphora에서 온 것인데 '넘어로'라는 의미의 meta와 '가져가다'라는 의미의 pherein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하나의 대상이 다른 대상으로 옮겨감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은유란 부적절한 명사를 옮겨서 붙이는 것인데 이는 유(類)에서 종(種)으로, 혹은 종에서 유로, 혹은 종에서 종으로, 혹은 유추의 관계에 따라 이루어진다", 라고 정의내렸다.

여기서 전이(轉移 transference)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시인은 사전속에 결박된 단어들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13) "여기에는 시가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적 야심이 담겨 있다."

은유는 남에게서 빌릴 수 없는 것이며, 타고난 천품을 길러내는 징표라고 말함으로써 은유란 언어의 일상적인 양상에서 일탈될 것이며 은유적 표현은 특별한 정신행위라는 시각을 드러낸다.

은유가 단순히 수사법의 하나의 '장식'이 아니라 의미의 상호작용까지 나아가는 극도의 고급을 지향해나가는 단계를 설명하는 데서는 오랫만에 감탄이라는 감정을 기억해내야 했다.

예시처럼 다루고 있는 몇편의 시의 해석, 은유의 해석은 고차원적 사색과 잘 벼려진 감수성의 향연을 보여준다.

시를 읽고 싶게 한다. 더 많은 시를.

 

은유란 한 마디로 말해 사유의 층위가 움직여 의미의 양을 풍부하게 만드는 언어운용방식이라 할 수 있다. 원관념 A가 B로, C 로, D로 움직여갈 때 하나의 고립된 세계의 문이 열리고 섞이는 것이다.

 

 

왜 하루키는 '현현하는 이데아', '전이하는 메타포'같은 부제를 따로 단 소설을 쓰게 됐을까.

왜 부제를 만들었나

이를 통해 하루키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다시 한번 더 강조하지만 이 놀이는 움직이는 사유의 유희라할 수 있다. 움직이지 않으면 층위변동도 확장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루키는 인터넷시대 짧은 글, 짧은 사유에 대항하는 작업으로서 소설을 자신의 역할이자 임무로 여기고 있다고 밝혔다.

 

움직이는 사유의 놀이(유희)

 

하루키의 [기사단장죽이기] 2권 '전이하는 메타포' 에서는 내가 메타포의 세계로 들어간다. 

무엇이 움직였는가, 어디에서(A) 어디로(B) 전이되었는가, 어떤 층위인가.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이데아는 기사단장의 외피를 입고 나타난다. 

모차르트의 <돈죠반니>에서 기사단장은 초반에 나왔다가 돈 후안에 의해 칼에 찔려 죽음을 당한다. 초반에 죽어버린 기사단장은 극 후반에 석상으로 나타나 돈 후안을 초대하고 그를 지옥으로 떨어트려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이 모티프는 모차르트와 아버지와의 관계선상에서 극적인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가면을 쓴(얼굴없는) 남자가 의뢰한 레퀴엠의 작곡과 더불어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이 모든 게 버무려져 있는 느낌이다. 오쓰카 에이지식대로 말하자면 '샘플링'.

 

요양원에 누워있는 도모히코 앞에서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과 같은 행동을 재현함으로써 '나'는 기사단장의 외피를 쓴 이데아를 죽이고 메타포의 세계로 들어간다. 일견 지옥으로 떨어짐. 이데아를 죽이자 메타포의 세계가 열린다. 메타포의 세계는 모든 연관성의 세계에서 오로지 '나'의 생각과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

 

나는 화가이다. 추상화로 시작해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활한다. 아내의 갑작스런 이혼 통보로 집을 나와 아마다 도모히코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오랫만에 '나'는 추상화의 세계를 다시 불러내고자 애를 쓴다. 그러나 아무것도 그리지 못한다. 일종의 블록현상(writer's block)을 겪는다. 이 무렵 어디선가 나는 소리에 이끌려 다락방의 숨겨진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발견한다.

이후 나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 이상한 일들의 절정은 마리에의 실종이다. 마리에의 실종은 이데아를 죽이고 '메타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한다. 그곳에서 '나'는 메타포의 강을 건넌다.  

 

'전이하는 메타포'. 이제 A는 무엇이고 B는 무엇으로 전이되었는가. 이데아를 죽이고 비로소 창작의 뮤즈를 찾아가는 것으로 해석하면 어떤가.

메타포의 세계 이쪽에서 강을 건너 저쪽으로 가는 이유는 사라져버린 마리에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내'가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하루키는 어쩌면 작가로서의 어려움과 동시에 그럼에도 건너야 하는 운명같은 임무를 은유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현재 이야기, 소설가가 처한 상황, '흑백을 구분짓는 인터넷'과 '단편적 사고, 짧은 문장'의 시대와 대면하고 있다는 작가로서의 자각을 은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작가의 어려움. 작가의 블록.

[하이퍼그라피아](앨리스 플래허티)라는 책을 떠올리고 찾아봤더니 그책의 마지막 장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도 '은유, 내부목소리, 뮤즈'이다.

 

이책을 읽었던 때가 까마득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찾아봐야 할 것 같다.

하이퍼그라피는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생각들을 써대는 창작자의 상태이고 반대로 블록현상은 쓸 수 없는 상태다.

소설가의 임무가 재고되어야 할 지금, 하루키는 소설가가 겪는 블록현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강을 건너게 해주는 '얼굴없는 남자'. '나'는 '얼굴없는 남자'의 배에 올라타 강을 건넌다.

그전에 강을 건너게 해줄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 '대가'는 마리에의 '펭귄 부적'이다. 그 '펭귄 부적'을 대가로 주고 나는 강을 건넌다.

이 장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하데스의 강', 죽음의 강을 건너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작가로서는 죽음의 도하(渡河)일지도 모르는. 죽음같은 도하를 이룬 뒤에야 작가는 글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속에 와타루 멘시키의 와타루는 '건너다'이다. 와타루를 '건너야'만 한다. 와타루가 은유 혹은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은유의 필연적 과정에 있는 남자이다. '믿음'이라는 키워드와 관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 포스팅은 머리속에서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 계속 읽기 연장선에 있다.

이데아를 죽이고 열리는 메타포의 세계에서 일종의 죽음의 도하를 하는 이야기작가 하루키.. 오늘 내가 떠올린 하루키.

 

 

 

 

 

 

 

 

 

 

 

 

 

 

 

 

 

폴 리쾨르 사상의 연구서 정기철의 저 책을 엄경희는 어려운 리쾨르의 은유이론을 매우 친절하고도 상세하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은유연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참고문헌'이라고 한 반면 이런 책 소개에서 반드시 만나야하는 로쟈님의 2006년 페이퍼에는 조금 읽어보고 도서관에 반납한 책이라고 되어 있다. 

연구자들에게는 손꼽힐만하지만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언급했다.

최근 은유관련 소개서에 다시 이 책이 들어있는데 아마도 기억하지 못하신 것은 아닌지.

 

폴 리쾨르의 은유까지 아우르는 은유의 이론에 대해서는 보다 전문적이고 깊이있는 독서를 원한다면 관련 도서까지 읽어보면 좋겠지만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괜찮다.

 

엄경희는 마지막에 은유는 궁극적으로 고착된 것, 소멸된 것에 활력을 불어넣고 보다 가치있는 세계를 향해 사유의 움직임을 열어놓는 풍요의 지평이다고 찬미한다.

A에서 B로 건너가는 순간이동의 긴 여정은 놀이의 즐거움과 삶의 진지함이 갈마드는 영역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한 위대한 예술가가 구현해낸 정교한 사유와 미감을 동시에 거머쥐게 된다고 끝맺는다.  

 

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들게 한 책이었다.

시를 더 깊이 읽을 수 있는 도구를 하나 쥐게 된듯한 느낌. 각 다른 저자들이 다른 주제들을 다룬다. [패러디]와 [제유]가 이미 나와있고 앞으로 [직유](유성호), [환유](권혁웅)가 계속 나올 예정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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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여성 철학자 장밍밍{長明明)의 [고로, 철학한다 : 찌질한 철학자들의 위대한 생각 이야기]를 읽다보면 진짜 저 질문을 하게 된다. 진짜? 진짜로 그랬단 말이야? 이거 사실임?

장밍밍은 저부제(哲不解, 철학은 이해하기 어려워라는 뜻)라는 닉네임으로 인터넷에 "재미있고 통속적인 철학사책을 쓰겠다"는 호언장담을 실천에 옮겼다. 그러니까, 그래? 이거 실화임? 같은 질문을 던지며 낄낄거리며 철학을 대할 수 있는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높은 조회수를 올리며 관심을 끌자, 진지하게 글을 써서 올리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쓰여진 12인의 철학자에 대한 글이 이책으로 묶였다.

 

장밍밍은 칭화대학교 철학과에서 마르크스 이론의 석박사 학위를 받은 올해 32살의 여성 철학자인데, 이책은 작년에 [미치광이, 루저, 찌질이, 그러나 철학자]라는 제목으로 이미 나온바있다. 이번에 제목이며 표지갈이를 하고 새롭게 출간되었다.

재밌는 건 2016년 버전과 각 장의 소제목이자 각 철학자들에게 붙인 네이밍이 조금씩 다르다는 건데 

나는 올해 버전보다는 작년 버전의 것이 더 흥미롭다. 예를들어, 한나 아렌트를 '아까운 사랑의 포로'라고 했는데 

'미녀, 재녀'는 비록 속물적인 냄새가 나긴 하지만 담박에 눈에 들어오긴 한다. 

여튼 좀더 세련된 네이밍이 된것도 있고, 재미는 좀 덜하다. 

중국 철학자답게 서술체가 사기를 따라 본편, 기전체와 편년체로 구분해서 볼 수 있도록 한 것도 이책의 매력 중 하나다. 

기전체는 본기(왕의 업적을 서술)와 열전(세가들의 전기)으로 이뤄진 인물 중심의 종합적 역사 서술방식으로 정사체(正史)라 할 수 있는데 [고로, 철학한다]에서는 '본편'에서 12인의 철학자를 다룬다. 12인의 철학대가, 철학황제급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철학세가급에 해당한다고 본 14인의 철학자를 '번외'편으로 다룬다.

이 '본편' 12인과 '번외편' 14인을 연대기순의 기록인 편년체로 살펴볼 수도 있다. 그게 "시간 순서와 철학 유파에 따른 차례"를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재밌는 착상이다. 더 흥미로운건, 황제급 철학자 '본편'에 칸트, 헤겔, 마르크스 다음에 오는 이가 무려 한나 아렌트다. 한나 아렌트를 철학자로 분류하는 것을 엄정하게 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니체, 스피노자 앞에 둔 것도 못마땅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렌트의 유부남 하이데거는 본편 마지막에서 다룬다. 어뗘, 통속적이제? ㅎㅎㅎㅎ

 

장밍밍의 영웅은 카를 마르크스다. 그녀의 전공이기도 하다.

그녀는 마르크스의 이론이 '충만한 에너지를 선사'하고 마치 근시인 저자에게 "도수가 잘 맞는 안경 같아서 그 안경을 쓰면 갑자기 역사를 이해하게 되고 사회를 꿰뚫어보게 되며 세상의 얼굴에 난 작은 주근깨까지도 선명하게 보'이게 해준다고 말한다.

 

아주 오래전 대학시절에 마르크스는 나에게도 영웅이었다. ... 아니, 당시 내게 진짜 영웅은 레닌이었다. 혁명가로서의 로망을 느꼈던듯한데, 지금 생각하면 순수하고 명랑하고(그땐 비장했지만) 가벼웠던 시절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레닌은 울림이 있다.

이런 생각하면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 생각이 난다.

쇼스타코비치에게 소련의 공산당, 공산혁명은 영혼을 굴복시킨 파괴자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런 러시아혁명과 소련공산당을 지지하는 서방의 지식인과 인도주의자들에게 느꼈던 배신감과 혐오감을 반스는 소설에 집어넣었다. 그러니까 쇼스타코비치같은 이에게 나같은 사람은 혐오스러운 인간인 셈이다. 아, 나 역시 러시아혁명엔 전율했을지라도 레닌 이후 스탈린부터의 소련은 더이상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다시 한번 레닌과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들을 보고 싶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을 때, 난 완전 반했다. 그의 글은 명쾌해서 아름다웠다. 그처럼 글을 쓰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만일 글을 쓴다면 마르크스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 전기도 몇권을 읽었는데 장밍밍이 전한 것처럼 마르크스가 시인이었고, 시인을 꿈꾸며 시 쓴다고 낭만거리고 다니던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조언대로 본대학교에서 베를린대학교로 옮기면서 낭만시단을 떠나 본격적인 학문에 접어들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 얘기같다. 그랬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그랬던가,,,, 이거 실화임?

더 흥미로운 건 엥겔스와의 관계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계는 너무나 유명한데 저자가 엥겔스를 따로 다룰만큼 엥겔스의 숨겨왔던 매력이 철철 넘치게 서술하고 있다. 실화인가 묻고 싶은 사건들을 나열하면서.

예를 들어 마르크스가 집안을 돌봐주던 메이드와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았을 때 아내 예나에게 자신의 아이라고 쉴드쳐준 이도 엥겔스이며(이건 알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호방하고 과감한 글투로 옛 시와 역사의 일화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고매한 언어로 거침없이 남을 비판"한 반면, 엥겔스는 "깔끔하고 세련된 필치와 빈틈없는 논리로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글을 써냈다."

마르크스는 문과적이고 엥겔스는 이과생스러웠다는 요약인데, 문과 이과는 중국, 한국, 일본의 분류인지 세계공통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마르크스에 비해 엥겔스에 대한 관심이 덜했던 과거를 생각나게 해줬다.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해석자이며 스폰서이자 그 자신도 대단한 이론가로서 엥겔스를 시간 내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이제와서? 

그는 자본주의의 결혼제도를 비판했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후에 아일랜드 노동자 메리 번즈를 사랑했지만 결혼하지 않았고 그녀의 여동생 리지 또한 엥겔스를 사랑했으나 요절했다고 한다.

리지는 죽음을 앞두고 결혼할 것을 요청했고 엥겔스와 둘은 결혼식을 올렸지만 결혼식 후 몇시간 만에 리지는 죽었다고 장밍밍은 알려준다. 이거 실화임?

엥겔스 전기나 평전은 읽어본 적이 없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라는 태양을 바라보면 태양에 눈이 부셔 보이지 않는 인물같다. 그러나 엄연히 엥겔스의 퍼스낼리티도 눈부실만하지 않은가.

평생을 마르크스와 그 가족을 뒷바라지 했고 그토록 혐오하던 부르주아지 자본가로서 '잠복'해 살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그 엥겔스임을 사업을 했던 사람들은 몰랐다고? 장밍밍의 말대로라면 '잠복한 채' 살아서 그의 사업 파트너들은  그가 바로 그라는 걸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라는 건데, 이거 실화임?

엥겔스를 너무 모른다.

혁명은 혁명. 혁명조직의 문제. 여기까지 생각이 번지면 굉장히 복잡해진다.

조직의 문제는 사람의 문제라서 인터내셔널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학생때도 쉽게 판단이 잘 되지 않았었던 것 같다.

 

이제 읽기 시작했는데 흥미롭게 철학자와 그들의 생각, 그들의 저서를 향한 입문서로 괜찮을 듯 싶다.

다독 다음이 정독, 다음이 반복독서인듯하다.

평생을 걸쳐 읽고, 또 읽고, 또 읽는 일. 철학은 더더욱 그런 거잖아.

이 나이에 내 마음 한자락 걸칠만한 철학자와 철학책 한권 정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허하다는 느낌이 없지도 않다. 뭔 생각하며 살아온 걸까.

 

 

한나 아렌트, 이거 실화임? 환장하겄네. ...

 

  

고로, 철학한다 | 본편

은둔형 외톨이, 이마누엘 칸트
까다로운 불만쟁이, 게오르크 헤겔
사고뭉치 낭만 시인, 카를 마르크스
아까운 사랑의 포로, 한나 아렌트
천재 혹은 미치광이, 프리드리히 니체
괴짜 중의 괴짜, 바뤼흐 스피노자
남녀 협객,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고삐 풀린 망아지, 견유학파 철학자
나는 색마가 아니오, 지그문트 프로이트
여혐에 독설남,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유약한 겁쟁이, 르네 데카르트
개천에서 난 용, 마르틴 하이데거

고로, 철학한다 | 번외편

인민 대표와 인간 대표, 루소와 볼테르
천재 게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바람둥이 공공 지식인, 버트런드 러셀
사랑을 거부한 단독자, 쇠렌 키르케고르
오해받는 정치철학의 선구자, 니콜로 마키아벨리
예술을 하듯 사랑하라, 에리히 프롬
사상은 거인 행동은 소인, 프랜시스 베이컨
최초의 철학 순교자, 소크라테스
동굴을 탈출한 철학자, 플라톤
산책하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 철학의 쌍두마차,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어둠 속 요염한 꽃, 미셸 푸코

 

[미치광이, 루저, 찌질이 그러나 철학자] 

 

 

1부_12인의 철학자 본편
은둔형 외톨이 칸트
처녀자리의 철학자 헤겔
혼세마왕 마르크스
미녀, 재녀才女, 정부: 한나 아렌트
천재 반, 미치광이 반: 니체
렌즈 세공 기술자 스피노자
남녀 협객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거지파 철학자: 견유학파
훌륭한 가장 프로이트
독설남 쇼펜하우어
겁쟁이 데카르트
하이데거: 농부, 연못, 밭

2부_14인의 철학자 번외편
계몽의 별: 앙숙 볼테르와 루소
키 작은 천재 부자 비트겐슈타인
공공 지식인 러셀
도망친 신랑 키르케고르
마키아벨리: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에리히 프롬: 인간, 예술을 하듯 사랑하라
부정부패범 베이컨
고대 그리스의 3대 사상가 소크라테스: 우리 집에 무서운 아내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3대 사상가 플라톤: 죄수 굴에서 탈출하다
고대 그리스의 3대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 소요파의 우두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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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버트런드 러셀의 [세계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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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카 에이지의 하루키 소설에 대한 한줄 요약은 '구조밖에 없는 뼈대에 DB화한 각종 이야기의 요소들을 샘플링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오쓰카의 글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저 한줄을 풀어쓴 걸로 보면 되겠다.

그래서 그렇게 쓰여진 소설은 결국 어떻게 귀결되는가. 무엇을 남기는가. 이것까지 확인하면 이책을 잘 읽게 되는 셈이다.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 하루키 소설의 구조들을 분석할 때 꼭 나오는 이야기인데, 새삼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포르트(fort) - 다(da) 놀이 혹은 이론'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이트의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논했던 건지,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어제 우연히 TVN의 <알쓸신잡>을 보다가 유시민이 던진 '사람들은 왜 독서량에 집착할까'라는 질문을 듣고 뜨끔했다. 요즘 읽지도 못하는 책들을 계속해서 사들이고 있는 나로서는 이건 김영하 작가가 말하는것처럼, '지식에 대한 초조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아침 새로나온 책들을 점검하고, 서재인들이 읽고 있거나 읽은 책들에 대한 포스팅들을 보고 나도 읽고 싶다와 읽어야 할 것 같다라는 심리를 자극받아 열심히 사들이고 있는 내 모습은 아직 읽지 못한 정보, 지식에 대한 초조감, 안달함에 다름이 아니다. 

 

오늘 장바구니를 과감히 정리했다. 

보관함으로 옮겼고 삭제할 건 삭제했다. 읽고 싶은 몇권만 추가로 구입하고 당분간은 일절 책을 사지 않기로 다짐한다. 당분간이란 게 ... 지금 목표로 하고 있는 책을 다 읽는 동안. 딴 책에 눈돌리지 않을 생각이다. .....(이 말줄임은 뭐지?)

초조한 마음은 뭐에든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좀더 여유를 갖자. 어차피 엎어진 참이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회한을 갖지는 말자.

바보같은 결심인것도 같은데 당분간은 가지고 있는 책, 목표하고 있는 책에만 집중하자.

잔뜩 흐린 삼복더위에 다짐하는 포스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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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7-07-23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 때는 ‘리스트‘를 열심히 업데이트 한 적이 있었답니다. 카테고리별로 정리도 해 보고, 신간들까지 두루 살폈죠.
‘앞으로 언젠가는 꼭 읽어야지‘ 아니면 ‘최소한 이런 저런 책들은 알고는 있어야지‘ 싶었더랬습니다. 장바구니에도 수십 권씩 책을 넣었다 뺐다 했고요. 차츰 그런 일들이 다 부질없는 짓이다 싶더군요. 내가 이미 사 놓은 책, 혹은 오래 전부터 꼭 읽었으면 했는데 여태까지 읽지 못한 책들에 계속 주목하기 시작하니까 예전의 악습들이 차츰 없어지기 시작하더군요.

요즘엔 계속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들의 목록‘을 자주 살펴 보게 되고, 노트에도 끄적거려 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만나고 싶었던 작가와 작품들이 분명히 있어 왔는데, 그들을 너무 오랫동안 한 켠에 밀쳐두고 계속 기다리게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새로 사야 할 책‘ 보다는 ‘이미 사 놓은 책들‘에 주목하게 되더군요. 그 가운데 ‘지금부터라도 당장 읽기 시작해야 마땅할 책들‘이 결코 적지 않으니까요. 누가 그 책들을 빼앗아가기라도 할라치면 손사레를 치면서 ‘내가 지금 당장 읽을 책들‘이라고 할 만한 책들을 골라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합니다.^^

포스트잇 2017-07-23 13:11   좋아요 1 | URL
저도 oren님처럼 독서계획을 잡고 끈기있게 읽어야지 늘 생각했었더랍니다.이젠 정말 쓸데없는것들 버려가며 집중할랍니다^^ 용기주셔서 감사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7-23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 이론보다는 프로이트 저작 자체가 무척 흥미진진합니다. 일반 대중소설 저리가라입니다...

포스트잇 2017-07-23 14:54   좋아요 0 | URL
그러게말입니다. 천재여요.어떻게 그런 얘기를 생각해냈는지..저 포르트-다 놀이 얘기도 애기가 놀고 있는 모습 보고는 저런 이론을 만들어내잖아요.놀라워요 ㅎ

포스트잇 2017-07-23 14:57   좋아요 0 | URL
그나저나 곰곰발님 글 때문에 음악혐오 샀습니다.. 그리고 아, 이제 팔랑귀는 그만 접어야겠다고 맘먹었다는..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7-07-23 16:09   좋아요 1 | URL
생각해 보니 정말 하루키 소설은 떠났다가 돌아온다는 점에서 갓난이 실놀이 갔다리왔다리 구조 같습니다. 흥미롭겠는데요...


음악혐오 개인적으로는 끝내주는 책입니다.

cyrus 2017-07-23 19: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매일 알라딘 서재의 ‘알라디너의 선택‘을 보면 실망하는 일이 많습니다. 신간도서를 샀다는 내용의 글, 신간도서에 관심이 있다는 내용의 글, 그리고 알라딘 책 소개 내용 일부를 복붙해서 신간도서를 언급한 글이 많습니다. 이런 글들은 ‘읽는 행위‘가 빠져 있어요. 그저 신간도서에 관심이 많다는 점을 알리고 싶어서 환장한 것 같습니다. 제 독서 철학은 보수적이에요. 책을 사서 천천히 읽고 리뷰든 감상문이든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글에는 글쓴이의 ‘읽는 행위‘를 알 수 있어요. 리뷰만 쓰면 주변 사람들이 글쓴이가 이런 책을 읽었다는 것을 알아 주고, 인정해줍니다.

포스트잇 2017-07-23 20:00   좋아요 0 | URL
부끄럽습니다..열심히 잘 읽어야죠

cyrus 2017-07-23 20:13   좋아요 0 | URL
지금 생각해보니 제 의견에 감정 섞인 표현이 있었습니다. 제 말에 감정이 상했다면 사과합니다.

포스트잇 2017-07-23 20:15   좋아요 0 | URL
뭘 또 사과하시기까지..ㅎ
열심히 읽는게 빠져있던거 사실인데요. 맘쓰지 마세요~
 

[기사단장 죽이기]를 막 완독한 참이다.

마지막은 하루키로서는 처음 시도해보는 결말이라서 다소 놀랄만하다. 아, 결국 이런 결말도 내는구나 싶었다. 

나중에 언젠가 하루키에 대해 뭐라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피곤한 편이다. 

반복되는 어린 소녀에 대한 시선도 유난히 불편함이 느껴졌고('반복이 리듬을 만든다'지만 대놓고 이러니 너무 편하게 익숙한 리듬에 올라탄거 아닌가 불만스럽기도 하다) 말했다시피 꿈을 빙자한 강간 의식은 불쾌함까지 느껴졌다. 하루키를 너무 많이 읽은겨..

어쨌든 이데아니 메타포니 이중메타포니 머리 아파가며 읽어가는데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아, 이건 아닌데.. 싶은 감이 온다.

왜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렇게 처리해야 했나. 재현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 아마다 도모히코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마사히코에게까지 말하지 않고 보여주지 않고 지켜져야 할 것이 무엇인가?

그 그림은 상처받은 도모히코의 차마 발설할 수 없는 사연이, 감정이 폭발해 담겨있는 것이었는데 왜 꼭 그렇게 처리했어야 했을까.

아주 단순하게 보면 이 소설 역시 '나'의 분노, 폭력성을- 즉 내 의식 깊은 곳(이른바 지하2층)에 도사린- 우회적으로 드러냈다가 '치유' 내지는 현현화함으로써 휘발시키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지도 모른다. 

("이대로 헤어지더라도 친구로 지내줄 수 있어?" 나의 아내는 더이상 같이 살 수 없다고 이혼통보를 해놓고서 짐을 챙겨 집을 나서는 '나'의 등 뒤에 '부탁이 있다'며 이런 말을 꺼낸다. ....)

어이없는 독해일수도 있지만, 그러니까, 한 사내가 자신의 '분노'라는 감정을 인식하기까지의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독해. 자신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현실에서는 인지하지 못하는 감정 지체자의 글쓰기.

 

그리고 세대별로 이게 맞는건지 계산이 잘 안된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 화가이자 1937년 빈으로 유학가서 1938년 일본으로 송환당해 돌아와야 했던 전쟁세대인 아마다 도모히코는 1910년~1926년생에 해당하는 다이쇼세대 아닌가? (다시보니 92세인 걸로 나온다. )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베이비붐세대는 멘시키에 해당할 것이다. 정확한 나이는 나오지 않지만 대략 40대 후반에서 60세까지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아들인 아마다 마사히코는 '나'와 같은 36세이다. '나'는 이 일을 겪은 후 몇년 뒤에 동일본 대지진(2011)을 겪는 세대다. 그러니까 1970년대, 그것도 70년대 후반의 아이들일텐데.. 아버지 도모히코와는 한 세대를 훌쩍 넘는 나이차이가 나는 셈이다.

소설이 나오자마자 일본 우익에 의해 욕쳐먹은 하루키의 역사인식을 주의깊게 볼 이유가 우리에겐 있지 않나.

전쟁세대가 저지른 일을 하루키는 소설속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도모히코는 전범도 아니고 제 나라 일본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제국전쟁의 피해자인건 분명하다. 

화가의 꿈을 안고 빈에 유학갔다가 맞게 된 독일의 오스트리아병합. 그로인한 저항운동에 참여했다 모든걸 잃고 독일과 일본과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 송환된 채 돌아와 젊은 시절을 은둔하며 보낸다.  

도모히코는 '내'가 그 그림을 발견하기까지 함구했다. 그리고 이젠 죽음 앞에서 의식을 놓아버렸다.

([1Q84]에서 덴고의 아버지 역시 요양원에서 의식을 잃고 누워 있다. 치매를 앓는다. 기억을 잃어버린 걸로 설정되었다. 아마 하루키 개인사와도 관계 있을 거지만, 하루키 아버지 또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하루키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과 중국에 얽힌 이야기를 남겼다고 하니 덴고의 아버지, 마사히코의 아버지 도모히코 모두, 하루키가 아버지에대해 사고하고 경험한 모든 것일 수도 있는듯하다.)

전쟁세대의 침묵. 강변보다는 차라리 침묵이 나은 것인가. 물론 예술가로서 그는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남겼다. 그 그림속에 자신이 본것, 자신의 마음을 남겨놓았다.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후대인 '나'의 문제라는 것인가. 

그렇게 발견한 그림을 '나'는 어떻게 하는가. .......

하루키다운 방식이라는 게 맞을 듯하다. 

그의 역사인식은 [해변의 카프카]에서도 [태엽감는새]에서도 비슷했던 것 같다. 

일본의 진정한 반성없는 역사인식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도 볼 수 있다.

하루키에게서도 이 역시 반복되니 좀 짜증이 난다. 물론 내가 오독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마침 읽을만한 책이 나왔다.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

저자 오쓰카 에이지는 문화비평가라는데 소설작법을 가르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책에서는 하루키와 하야오의 '이야기구조' 특히 신화적 구조를 분석한다. 하루키 소설의 이야기구조에 대해 좀더 아는척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일듯 예전에도 많이 지적된 내용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건 오쓰카가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해 쓴 평이다.

오쓰카는 하루키의 '피해자 사관'을 비판한다. "역사를 신화적인 '수난'의 상징으로 인용해온 행위의 반복 그 이상은 아니다'고 한다.

"죽임을 당한 입장에 서서 일본을 규탄하고 있지 않다" '죽이는 쪽의 윤리'에 서 있다, 는 것이다.

(연합뉴스, "죽이는 쪽의 윤리"…하루키 소설의 '피해자 역사관' (김계연 기자)에서 인용)

 

하야오의 작품은 본 게 몇작품 되지 않은데 이번 기회에 다뤄진 작품만이라도 읽어볼만 하겠다.

 

멘시키는 베이비붐 세대로 볼 수 있다. 그가 일으킨 엄청난 부.

그러나 하루키는 멘시키를 경계한다.

그가 더할나위 없이 굉장히 흥미로운 사내지만, 그는 거의 분명한 자신의 아이에 대한 '믿음'과 거리를 둔다.

'나'는 "그래도 멘시키처럼 되지 않는다."

'믿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기사단장'으로 현현시킨 분노와 응징의 힘(나는 그렇게 믿는다)으로 세상을 향한 긍정과 낙관을 밀고 나갈 것을 조용히 믿는 것.

하루키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봐줘야할 것 같다, 지금으로서는..

 

 

 

 

 

 

 

 

 

 

 

 

 

 

 

 

오쓰카 에이지는 어떤 책을 쓰는지 몇권 더 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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