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7)만력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새물결)의 저자 레이황은 1918년 중국에서 태어났다. 1918년 생이니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한 신산한 생을 살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60년대 문화혁명까지 치르고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막노동으로 먹고 살아야 했고, 그 와중에 공부를 시작했다. 어려움을 벗어났다고 느끼자 이미 중년의 나이가 되었고, 이때부터 나의 역사 연구에는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경향도 생겼다고 그는 자신의 역사관과 이 책의 기본 관점을 담담하게 쓰고 있다.

 

문득 이 문장을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역사란 무엇이며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나간 것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을 위해 소환된다.

 

 

 

 

 

 

 

 

 

 

  

[고양이 대학살] 표지를 넘기니 "96년 10월 19일"이 휘갈겨 있다. 이 책을 샀던 날짜를 써놓은 것이다.

그리고 밑줄도 그어져 있고 빈곳에 메모들도 드문드문 되어 있다. 그러다가 책갈피는 페이지 126과 127 사이에 놓여있다. "제2장 노동자들은 폭동한다 : 생-세브랭 가의 고양이 대학살" 장이었다. 그 뒤로는 깨끗하다.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책 제목이 된 '고양이 대학살' 장에 이르기까지 무던히도 애쓰며 읽으려 했던 기억이 있다. 최근에 이 책을 책꽂이에서 다시 뽑아들고 면면을 들여다봤다.

 

마르크 블로크의 [봉건사회]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옛 몸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날학파 역사가의 저서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지만 읽기가 언제나 쉽지 않았다. 정치적 사건들, 인물들,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매개로 해서 풀어나가는 역사서술이 놓치는 당대 일반 사람들의 이 소소하게 부딪친 현실, 그로부터 그 시대를 읽는 방법이 주는 보다 총체적 역사인식을 이 아날학파들이 제공해 줄 것이란 기대는 무지막지한 '사소한 것'들 앞에서 기가 꺽인다.  

[봉건사회]는 요즘 읽고 있는 유학에 대한 생각들을 보완하고자 선택한 책이었다. 아직 다 읽지 못하고 있다. 봉건사회를 '인격종속관계의 형성' 관점에서 서술한 1권은 200여 페이지를 읽었고 2권 '계급과 통치'는 거의 다 읽어가고 있다. 계속 읽어야 하는지 망설이게 된다.

애초의 질문은 이러했다. "유학은 봉건사회의 사상인가, 그렇다면 이 봉건사회란 정확히 무엇인가, 중국의 봉건제와 서구의 봉건제는 어떤 유사점과 차이를 지니는가, 이들의 사회체제, 물적토대의 차이가 사상적 차이와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인가?"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닌지 내내 고심하고 있다.

 

 

 

 

 

 

 

 

 

 

 

 [신주무원록](사계절)은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원대에 왕여란 인물이 정리한 '과학수사'를 위한 지침서이자 법의학서다. 부제가 "억울함을 없게 하라"이다. 좋은 제목이지 않은가? 이 제목만으로 이 책이 무엇을 위하여 그리고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1308년 혹은 1335년 경에 저술된 이 책을 조선 세종 17년(1435)에 주석작업을 하여 1438년에 간행함으로써 조선전기 과학수사를 위한 체계를 잡아나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

 

이후 영조때 그 동안의 조선에서의 실제 상황과 경험들을 증수하여 언해를 한 책이 [증수무원록언해]인데 이 역시 도서관에 있었다. [신주무원록]이 의학으로 분류된 반면 [증수무원록언해]는 언어학으로 분류되어 있다. 언해이니 만큼 법의학 뿐 아니라 무엇보다 언어를 연구하는 쪽에서 관심을 기울였던 듯 하다. 연구에 참여한 이들도 언어학자들이었다. 무려 7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문으로 된 원문, 거기에 현대언어로 해석을 해 두었고, 당시 언문 원문, 그리고 언어에 대한 해설까지. 물론 관심있는 것들만을 죽죽 읽어나간다면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대략을 알 수 있겠지만 그런 읽기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읽고 싶은 책들은 한가득이다. 생활에 쫓기는 와중에 시간을 아껴가며 읽는다 해도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더 막막한 것은 막상 책을 들쳐보면 다가오지 않는 내용들로 난만한 책들일 경우, 이 책을 읽어야 할 의미를 애써 찾아가야 한다는 것도 고역일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스스로 의심스러워 하며 붙잡고 있게 된다. 그 땐 방법이 없다. 질문을 명확히 할 것!

지금 나는 무엇을 알고자 이 책을 읽는가, 이 책을 선택한 나의 초심은 무엇이었는지를 자문해 보는 것일 게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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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동안 미뤄뒀던 [논어]와 [공자평전]을 정리했다. 뭐, 마지막에 결국 뒷글을 알라딘이 삼켜버려서 흐지부지하게 됐지만, 어떻게든 정리를 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처럼 날 사로잡았다.

[논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동양고전사상에 눈돌린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흔히 현실이 어려울 때, 복잡한 현실 상황에서 길을 찾을 수 없을 때 옛 일, 옛 사람에 의지하고자 하는 심리가 고전을,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고 말한다. 나도 그런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지내온 세월이 어느덧 앞을 보기 보다는 과거에서 편안함을 찾는 심신의 피곤함으로 쌓인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피로한 것일까?

어느 날 문득 옛 한시, 옛 산문을 보는데 그것이 그리도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가 내 선조들의 삶의 역사를 제대로 무시하고 살았었구나 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과거를 직시하지 않는 한 나의 인식과 지식은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을 것만 같은 허기감을 느꼈다. 그렇게 시작한 옛 것에 대한 관심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망망대해 속에 겨우 일엽편주 하나 띄웠다가 벌써 무서워 다시 해변가로 돌아가고만 싶은 심정이다. 어찌할꺼나 어찌할꺼나, 나의 능력과 허락된 시간들이 나의 욕심을 메우기에는 턱없다는 것을 자꾸만 생각하게 한다. 벌써 지친 것도 같고.... .@@ 이럴 때는 그저 마음을 비우는 것이 제일 속편한 것인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제 풀에 지치겠지.

몇 권의 책들을 들여다보면서 '공자는 도대체 난세에 아무 쓸모가 없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논어]에도 공자에 대해 '안되는 줄 알면서 가는 사람'이라고 단정한 사람 얘기가 나온다. 공자는 당대 현실 정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이상은 도달할 수 없기에 빛나는 것이고 우러러지는 것일지 모른다. 공자와 유가는 바로 그러한 이상체인지 모른다.   

공자 자신이 춘추쟁패 시대에 그러했고, 맹자가 법가, 도가, 묵자, 양주 등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싸워나가던 전국시대에 그러했다. 19세기 서구와 쟁패한 난세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중국, 베트남, 조선에서 유학의 몰락은 처참했고, 일본은 영리하게 재해석을 했다.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을 때 '하필왈리'라고 반문하며 '자신은 오로지 인의를 말할 뿐'이라는 대의를 밝힌 원문을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는 시부자와 에이이치는 "의로써 이익을 도모한다"고 전유했다.

[공자평전]에는 1988년 중국 TV 정치토론프로그램 <<하상>>에서 나온 말을 소개하고 있다.

"용의 후계자여! 황하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미 우리 조상들에게 다 주었다. 우리 조상은 이미 문명을 창조했으며, 황하는 더 이상 다시 문명을 잉태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창조해야 할 것은 참신한 문명이다. 더 이상 그것이 황하에서 흘러나올 수는 없다. 구문명의 찌꺼기는 이미 황하 강바닥에 쌓여진 진흙처럼 우리 민족의 혈관 속에 쌓여 있다. 그것은 한 차례 큰 물살로 씻어내야 한다. 이 물살은 이미 와 있다. 그것은 바로 공업문명이다. "

씻어내야 할 구문명의 찌쩌기가 무엇을 말함인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인문적 가치, 도덕철학적 가치로서 유학이 여전히 유효할 수도 있으며, 처세와 인생에 대한 지혜를 구하는데 공자사상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

피곤하다. 경제토대와 정치체제의 관계 속에서 유학을 보는 것, 조선에서의 유학,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취향으로서 유학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지금은 피곤하다. 나중에 다시...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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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의 "TV,책을 말하다" 22일자 방송에서는 장하준, 장승일의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다뤘다.

평소 이 프로그램의 포맷과는 다른 토론형식으로 진행됐는데, 출연자는 저자인 장하준과 장승일 그리고 패널 진중권, 이종태였다.

[쾌도난마 한국경제]는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는데 아직 보지 못했다. 장하준 교수에 대해서는 스크린쿼터 문제 때문에 익히 알고는 있었다. 영화계에서는 스크린쿼터를 '사수'하는 경제전문 논객 대표주자로 장교수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했었다. (또 한 명의 주자는 이해영 교수였다.)

장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도 읽어야지 하면서 여태까지 읽지 못한 이 지지부진한 상태를 한탄한다. 어쨌든 장교수를 문자가 아닌 영상으로 대하긴 처음이었는데 이 사람이 어제 나를 떼구르르 구르게 했다.

예전에도 이 프로그램에서 이런 형식으로 진행했던 전례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제 방송은 다룬 책의 성격상 시의적절한 면이 있지 않았나 싶다. 물론 제한된 방송시간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방청객과 질의응답도 있었던 모양인데 방송분에는 나가지 않았다. 시간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박정희와 개발독재에 대한 문제는 저자들과 패널 사이에 더 많은 얘기가 오갔을 것이 분명한데도 방송에서는 초반에 짧게 언급하고 지나간 수준이었다.

장교수는 이 프로그램 때문에 특별히 귀국까지 했다 하니 피디가 그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초반 진중권의 쾌도를 휘두르는 공세에 장교수는 어눌한 말로 방어에 급급한 듯 보였다. 보는 나로 하여금 아연 긴장케 했다. 웬걸~ 초반의 말끊김과 먼하늘 바라보기는 "우리를 그런 식으로 몰지 마세요."라는 한마디와 함께 공세로 역전되는데, 그 말들이 거의 개그 수준이다.

장교수의 말 솜씨라기 보다는 한국경제정책에 대한 비꼼과 질책을 응축된 말로 던지는 것인데 그 한마디에 그 동안 해온 정부의 경제전략, 정책은 코미디 같은 꼴이 되고 만다. 예를 들면 '박쥐외교'라고 불렀던 OECD 가입 관련 한국정부 입장과 WTO에서의 쌀협상이나 농산물 개방에서 보여준 정부의 태도를 얘기하자 나는 거의 뒤집어졌다. 또 전후 자본축적을 해 가던 일본의 짝퉁 만들고 미국에 변명하기(이른바 Made in U.S.A.와 Made in USA 사건) 같은 얘기에 이르자 진중권을 비롯하여 TV 앞 나는 쓰러졌다.

장승일은 냉정한 어조로 조목조목 따박따박 풀어가는 반면, 장하준은 약간의 고지식한 어투로 예를 들어가며 미영중심의 자본주의의 치졸함을 얘기해주었다. 장하준은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얘기꾼 같았다. 책을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조심스럽기도 하다. '국가개입'이라는 문제는 특히 우리 같은 경우는 쉽지 않은 얘기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좀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볼 일이다.

자본주의의 독은 그 체체 내에서 싹튼다. 그것은 자본의 무한증식 속성이다. 여기에는 인정사정이 없다. 인간의 욕망은 자본과 함께 타오른다. 결코 스스로 제어하기 힘든 독성이라 할 수 있다. 내부에서 자라는 독 때문에 전체가 죽을 수도 있음을 깨달아가고 자본의 긍정성은 살리되 통제할 수 없는 자본의 욕망을 제어하기 위한 갖은 국가적 개입과 규제는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바로 자본주의를 위한 정책 '옵션'이다.

삼장법사가 손오공을 통제하기 위한 '긴고아'를 씌우듯 자본주의의 발전은 자본의 무한한 증식 욕망과 이것이 궤도를 벗어나 여행 자체를 망치는 일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통제장치였듯이.

자본주의의 발전은 더 많은 이윤 추구와 이를 위해서는 내부 독을 제거하고 조절해야 하는 '(자본을 위한)합리적 규제' 또한 동시에 마련해가는 모순의 충돌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최근에 읽은 경제관련 서적으로는 [세계경제를 뒤흔든 월스트리트 사람들](우태희 저 | 새로운 제안 | 2005)이 있는데, 이 책의 흥미로운 점도 바로 이런 것과 관련 있었다.

저자가 보기에 "월스트리트는 세계금융의 교과서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인류가 고안한 가장 효율적인 자본거래 시스템이기 때문"(p. 358)이라는 것인데, 저자는 월가의 사람들 뿐 아니라 월가의 '스캔들'에 대한 고찰을 많이 하고 있다.

'스캔들'이란 월가의 시스템을 뒤흔들 수도 있는 애널들의 비도덕성이라든지, 정책의 맹점을 교묘히 파고들어 자본거래의 효율성을 극단적으로 저하시킨 사건들을 말함이다. "월스트리트에는 제도의 맹점을 이용하는 천재들이 너무 많기 때문".

따라서 미 정부와 주 정부 등은 자유방임에서 시대 변화에 맞는, 더 정확히는 자본의 규모 및 거래, 새로운 이윤창출 방식에 맞는 제도를 마련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것은 월가 내부에만 맡겨둘 수 없는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월가를 다루는 언론, 기자들이 명명하는 개념, 명칭 등의 통렬함과 세련미도 매우 흥미있다. 내게는 그랬다.

한국은 너무 뒷심없이 세계자본(미국)에 시장을 내어주는 일을 하고 말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세계경제의 막강한 힘을 알아버린 한국 국민은 사실 자본(가)-재벌이 '먹여살린다'는 말에 대해 내심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을 다무는 현실적 선택을 하는 건 아닌지 참담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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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9-23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쾌도난마 한국경제]도 [사다리 걷어차기]도 재미나게 읽었는데, 어제 방송은 놓쳤군요. 님 글 보니 꽤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포스트잇 2005-09-23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뵙겠습니다. 아, 제가 웃음이 좀 많거든요. 어제 방송 재미있었습니다. 조만간 두 책을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글 잘 안쓰는 제가 그동안 미뤄뒀던 논어와 공자평전 관련 글을 마무리짓느라 고생했는데 뒷글이 날라가버렸답니다. 어찌해야 할지, 지금 당혹해 하고 있답니다. 어쨌든 지금은 나가야겠습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산을 써도 다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제법 센 비가 왔다.

오랜만에 동동주를 마시며 놀았다.

안주는 부추전.  

새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이옥 얘기를 했다. 최근에 이옥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취미라고 하기엔 제법 작수량이나 수준이 평범하지는 않은 그이기에 이옥의 한시가 흥미로웠을 것이라고 나는 그에게 직접 묻기도 전에 지레 짐작했다.

정조 문체반정의 최대 희생자, 가엾은 사람, 이옥.

술 잔에 마음을 두는 동안 다른 곳에 둘 마음이 없어 모든 것을 잊는다던 그.

그의 여린 감성이 정조에게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나약함이었을 것이고 괘씸했을 것이다.

'그 초쇄 천박한 것은 .... 비통하고, 괴롭고, 근심스럽고, 답답한 소리인데 무엇을 괴로워 하여 이런 문장을 짓는 것인가?'

정조는 벌열가문의 자제들이 지어대는 이른바 소품문을 다 읽어가며 문체반정이라는 무딘 칼을 빼어들었는데 그 무딘 칼에도 불구하고 가장 크게 베였던 이가 바로 한미한 가문을 업보로 둔 이옥이었다.

반성문만으로도 안되고 기어코 '충군'이라는 양반으로서는 치욕이었던 벌을 내렸던 정조에게 이옥은 제대로 항변할 기회조차 없이 변방을 전전하며 불우한 생을 이어야 했다. 정조가 지어바치라는 정문을 계속 올려도 왕은 아직도 부족하다고 계속 질타했다.

그 이옥의 전집이 나왔는데 보고는 싶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다.

나와 그는 이런 주변적인 얘기만 나눴을 뿐 정작 그의 글에 대해서 더 깊이 있는 얘기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갑자기 이옥의 그 여린 감성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흙과 나무와 꽃이 어우려져 흐드러진 곳에 비내려 자연의 비린내가 진한 곳에서 좋은 사람과 술잔 기울이며 옛 사람들을 추억하는 것은 여전한 일상에서 취할 수 있는 드문 호사다.

비록 서울 도심 한가운데 허름한 술집에서 마셨지만,  새 사람과 비가 오는 것에 만족했다.

어제는 즐거워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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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09-03-21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옥..어딘가에서 들어본 이름인데..정조의 자격지심에 나름 억울한 문사가 있었더랬다고..어릴때 한문공부 좀 제대로 해볼걸~본다고 알겠냐마는 관심은 있습니다^^; 요즘엔 연극도 하는 모양입니다~간만에 어설프지만 아는 이름 나오니 반갑습니다~

포스트잇 2009-03-22 12:38   좋아요 0 | URL
얼마전에 이옥전집이 나온 모양이군요.지금 읽을 일은 없을 것 같구요. 정조와 심환지 사이에 오간 비밀서찰이 번역되어 나온다고 하는데 그건 관심이 가네요.'초쇄천박... 운운' 정조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이다.

오랫만에 본 소설이다. 저자 임치균은 20년 동안 고전소설을 연구해온 학자이다. 전문소설가가 아니다. 그런 그가 소설을 낸 이유는 우리의 유산인 고전한문소설이 '일반인'들에게 너무나 무시당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다고 밝힌다. 전공자인 저자가 보기에 우리의 고전소설은 그 상상력과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이 심오할 뿐 아니라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상으로도 흥미진진한데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 읽히지 않는 이유는 한문소설이 지금 '일반인'들에게 독해될 수 있는 길을 잃어버렸다고 진단한다.

한문소설은 번역되어야 하는데, 그 번역에는 고사나 인물 또는 표현들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전소설을 번역하여 나온 책들은 각주 또는 미주 등이 줄줄이 붙어 있어 소설책인지 학술서인지 '일반인'들에게 부담을 주는 형식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취약점을 타파하기 위해 생각한 것이 고전소설을 소설로 소개한다는 전략이다.

이른바 '소설 속의 소설'이다. 후자의 소설은 고전한문소설을 말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매우 어색한 듯 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신선하다. 어색하다는 것은 미안스럽게도 저자의 소설가로서의 역량이 초보자 수준이어서인지 이 소설에서 소개하고 있는 고전소설이 저자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내게 그리 재미있는 것이 아니어서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이다. 신선하다는 것은 고육지책처럼 발상의 전환을 해냈다는 점에서 상찬하고 싶은 마음이다.

저자가 소설을 쓴 이유가 고전한문소설을 각주나 미주 없이 즉, '독서의 순간 단절' 없이 고전소설을 이해하며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한문소설을 그대로 옮겨 소개한 뒤 그에 대해 저자가 고안한 소설의 주인공들이 (인간)각주의 역할을 맡아 자연스럽게 설명해주는 형식을 이어나간다.

 [검은 바람]에서 '소개' 되고 있는 고전한문소설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이며 임제의 [원생몽유록] 그리고 작자미상의 [운영전]이다. 나는 이 소설들을 고등학교 때 배운 수준 외에 아는 게 없었다.

이 책을 일단 집어든 뒤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단숨에 읽었다. 미스테리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시도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도 매우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두 얼굴의 이순신]을 쓴 은행연합에 다니는 직장인 김태훈이 최근에 낸 [이순신의 비본]도 그렇고 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이나 [열녀문의 비밀] 등 역사추리물의 성과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 하다. 소설적 성과를 논하기 전에 일단 우리의 역사, 역사인물에 대해 지녔던 얄팍한 상식 또는 정설로 받아들였던 단편적 사실들을 소설적 상상력과 문학성으로 헤집어 우리로 하여금 새롭게 인식하고 사유하도록 하는 도전은 분명 흥미진진한 일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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