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포드의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1893년 뉴욕을 배경으로 하여 변화하는 시대상에 흔들리는 예술가의 정체성과 예술가를 유혹하기도 하며 그 유혹에 도전하여 망가져가는 예술가의 초상, 그것의 극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확고한 자신의 신념 따위를 붙잡아야 한다는 작가 자신의 도전과 각오를 그리고 있는 듯해 보이기도 하는 소설이었다.    

당대 최고 화가라는 자부심과 자만에 들떠있던 피암보에게 어느 날, 한 부인의 초상화 의뢰가 들어온다. 조건이 있다. 그녀의 모습을 보지 않고 그녀와의 이야기만을 통해 그려야 한다는 것. 의뢰를 해온 쪽의 대행자는 피암보를 자극한다. "당신이 해본 그 어떤 일과도 다를 겁니다."

피암보가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결정적 계기는 아버지가 남긴 유언, 아버지의 명령이다. 훌륭한 기계공이자 공학도였던 피암보의 아버지는 장차 피암보의 스승이 되는 사보트가 그린 걸작을 보여주며 '이게 진짜'라고, 자신도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고 싶었지만 시간과 열정, 재능을 낭비하며 돈을 벌기 위해 살인기계나 만들어내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후회를 쏟아낸다. 영혼을 잃어버린 자신처럼 되지 말고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라'는 유언을 내린 것이다.

병풍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게 된 샤르부크 부인과 피암보. 병풍 뒤에서 샤르부크 부인은 자신의 얘기를 들려준다. 피암보는 점점 그녀가 들려주는 기이하고도 환상적인 이야기에 빠져드는 한편으로 자기에게 부여된 임무와 주변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들과 맞닥뜨려가며 악전고투하게 된다.    

이 의뢰는 무슨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려야 할 실체 대상을 가로막는 병풍 앞에서 이야기만으로 대상을 그리는 것. 그러나 그 그림은 관념화가 아니라 초상화라는 것. 대상의 재현. 그 앞에서 시험받는 건 화가가 대상에 얼마나 가까이 가는가가 아니다. 어차피 병풍 뒤의 대상과 얼마나 일치하도록 재현하느냐는 중요치 않다. 이미 피암보 이전에 당대 내노라하는 화가들이 같은 조건하에 의뢰받아 그려놓은 수많은 그녀의 초상화가 모두 그녀인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피암보 역시 처음엔 그 재현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어서 방황한다. 위기를 겪으면서 겨우 포착해낸 그녀의 초상을 '그녀의 남편이라는 샤르부크'는 자기의 아내가 아니라며 파괴해버리기도 한다. 점차 피암보는 재현의 강박에서 벗어나 재현 너머의 어떤 실체, 샤르부크 부인이 원하는 것과 피암보 자신이 대상을 통과하여 들여다본 어떤 것을 확신한다. 마치 세잔의 <사과> 처럼.   

 

소설의 말미쯤에 이르면 피암보는 풍경화를 그린다. 풍경의 발견. 

흥미로운 건, 여타의 작가들이 그렇듯, 피암보가 이렇게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하는 세계에 '여자'가 있다는 점이다. 피암보의 모험으로 읽다보면 샤르부크부인, 루시어라는 이름의 여자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존재'다. 남자들에게, 화가들에게 그녀는 '불가능한 의뢰라는 계약으로 남자들에게서 창조력을 뺏는 여자'이다.  

피암보는 루시어가 왜 자신이 화가들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했는가를 이야기해주는 대목에서  '그녀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한 불가해한 의미를 지닌 여자와의 마지막 대면에서 그녀가 들려주는 <단짝 친구>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동화를 듣고 나서 헤어지면서도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내용'이라며 더이상의 불가해함의 유혹을 감당하지 않으려한다. 그런 정신나간 헛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현실에 단단히 고정점을 박는 것이 그녀에 의해 영혼이 갉아먹히지 않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되뇌인다.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어떤 완성의 세계, 충족되지 않는 결여를 응시할수록 영혼이 갉아먹힌다는 교훈을 부여잡고 혼돈과 알 수 없는 세계를 봉인하는 절차를 거친 후 현실의 헌신적인 여인, 해변의 여인을 맞이한다.  

이것이 장르적으로 구상된 엔딩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굳이 연관짓자면, 최근에 작가'수업' 혹은 작가의 심리를 다룬 책들을 좀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키는 인터뷰에서 작품을 꾸준히 기다려주고, 구입해주는 독자들이 있다는 걸 확인하면서 자신이 하는 작업이 주는 막막함을 다소나마 이겨내는 듯하고, 르귄의 소설작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스킬을 강의한 것이라서 조금 동떨어진 것일수도 있겠지만 참고할만하고, 구체적인 스킬보다는 작가와 심리적 문제를 연구한 책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가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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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이명원의 에세이 [마음이 소금밭인데 도서관에 갔다]라는 제목이 확 와닿았던 때가 있었다. 직업이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들의 현실만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삶이란 이런 속성의 애환을 갖는 것이라서 엄살 떨 것도, 잔망스럽게 굴 일도 아니고 담백한 평정을 가져야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 가끔 책이 도저히 들어오지 않을 때 책을 어따 써먹어야할지 막막해질 때가 있다. 그럼에도 아직은 나의 유일한 취미는 책이다. 가끔 평안도 주고 위무도 준다. 어제 약속시간 짬을 두고 서점에 들렸다. 쌓여있는 실물 책들이 건네는 아찔함에 한동안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르귄이 이런 책을 쓸 줄 생각하지 못했기에 깜짝 놀랐다. 소설 작법 스킬을 '구체적'으로 '강의하듯이' 서술하고 있다니 구경해볼만 하겠다.  

 

 

 

 

 

언제부터인가 한정된 지면에만 글을 쓰며 활동을 줄인다싶더니 강준만교수가 어느 새 또 한 권의 책을 냈다. 읽고 싶은 재미있는 책 또 한 권 추가요. 

  

 

 

 

 

강준만 교수의 허전하던 자리를 선방해주는 우석훈 소장의 <프레시안> 칼럼 "이마트 피자사건과 거머리" 에서 우 소장이 소개하고 있는 책도 급 관심가는 책이다.   

 시장에 대해서 국민들이 심각한 '철학적 고민과 논쟁'을 해가며 고민하는 힘과 행동을 길러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열심히 읽는 사회 아닌가. 

 

 

 

 

 

또 우 소장이 언급한 책 한 권. 이번 서울 폭우와 침수 사태를 두고 쓴 글에서 언급한 건데, 이번 사태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돈 드릴로의 [화이트노이즈]에 원자력인지 핵 관련 시설이었는지 찾아봐야겠지만 어쨌든 그런 시설에서 일으킨 재앙 때문에 주인공 가족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대피해야 하는 상황이 나온다. 가난한 사람만이 이런 재앙에서 대피하는 줄 알았는데 자신과 같은 중산층 사람들 또한 같은 처지에 처하게 된 상황에 당혹해하는 장면. 그런가? 그럴까?  

 

 

 

 

 

 

 

어제 광화문에 나갔는데 햇살은 좋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말끔하게 치워진 도로. 그 멀쩡함이 오싹했다. 더불어 한겨레신문 신기섭 기자의 칼럼 을 읽다가 알게 된 책.  

'더 피할 수 없는 현실, 자살'에 대해서 사회가 지금보다 더 강한 관심과 대책을 고민할 때라는 걸 피력한 칼럼인데. 일본 기자인 저자 후쿠오카 켄세이의 이 책의 한 장의 제목은 '마음이 피를 흘리는 시대'이다. 다른 대목들도 볼만하겠지만, 특히 자살한 사람들의 유서를 다룬 글은 꼭 읽어보고 싶다.  

 

 

 

 

장정일의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을 최근에 읽었다. 장정일은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에 대해 요약하면서 현대인들의 타인에 대해 무감각한 "발기불능"을 지적한다. 신기섭이 주목하는 부분도 이 맥락과 상통하다. 자살이 증가하고 있지만 사회는 이제 점점 그런 현실에 오히려 무덤덤해지는 거 아닌가를 염려한다. 그런 틈으로 의도적인 숨기기나 빠른 처리만이 횡행해지는 건 아닌가.  

장정일의 [빌린 책...]은 간절히 읽고 싶었던 책은 아니었지만 빠르게 읽을 수 있었고, 읽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은 예전에 미처 읽지 못했는데 이번에 장정일을 통해서 이 책이 19세기 말 비슷한 연대를 살다간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를 통해 당시와 21세기 초입부를 비교하며 '근대'를 극복하는 고민하고 있는 책이라는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 기왕에 읽고 있는 소세키의 [마음]도 그렇고, [고민하는 힘]까지 꺼내 놓았다.  

 

 

 

 

 

 

 

또 하나, 장정일의 책에서 아주 재미있는 정보를 얻었는데, 바로 잭 런던의 [암살 주식회사]라는 책이다.  

이 소설의 탄생부터 운명이 재미있는데, 잭 런던의 미완성유고를 사후 40여 년이 지난 1963년 추리소설 작가 로버트 L. 피시가 결말을 완성하여 출간했다고 한다. 탄생은 1910년, 34세의 베스트셀러 작가 잭 런던은 씀씀이는 늘어났던 반면, 상상력과 소재는 고갈되다시피 하여, 돈을 주고 이야깃거리를 사는 지경에 이르는 모양이다. 소재를 판 사람은 25세의 무명작가 싱클레어 루이스. 훗날 싱클레어 루이스는 미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다. 결말을 어떻게 지어야할지 결론 내리지 못해 결국 런던의 손에서는 미완성이 된 소설. 작품성을 크게 기대하진 않지만 볼만 하겠다 싶다.   

잭 런던이 '소설의 완성을 위한 메모'를 남겼고 책 말미에 실려있으니 그 또한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볼만 하겠다. 

 

웬만하면 '읽지 않는(또는 읽지 못할) 책에 대해' 이런 식으로 나열하고 싶지 않지만, 갈수록 책 읽는 시간(또는 마음의 틈)은 줄어들고 그러나 견물생심처럼 책에 눈이 가고 눈이 가면 갖고 싶고, 갖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읽을 수도 있고.... 뭐 이런 마음이다 보니 이런 페이퍼를 곧잘 쓰게 된다. 책은 잘 안 읽혀지고 읽고 싶은 책은 늘고. 강박을 갖진 말자, 흐르는 대로, 책을 써먹을 수 있으면 써먹고 아니면 잠시 쉬고, 다시 돌아가고. 이 무심조차 조절을 못하면 다른 많은 것들까지 무섭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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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고 지나칠 뻔 했다. 작년 7월 히가시노 게이고의 [탐정 갈릴레오]를 보다가 이 [화성연대기]라는 책과 작가 레이 브레드버리를 알게 되었다. [탐정 갈릴레오]의 첫 단편 주인공이 읽고 있는 소설이 바로 이 [화성연대기]였다. 일부분이 인용되었는데 글이 참 좋았다. 국내에서 한 번 나왔다가 절판, 이번에 다시 완역된 모양이다. 표지가 참... 저거하다만, 번역이 좋길 바란다.  

'고도로 세련된 문체, '시적 감수성'이 풍부한 레이 브레드버리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니 확인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나는 작년에 원서로라도 보자며 구입했지만, 물론~ 잘 보관하고 있다. 페이퍼백으로 182페이지 밖에 안되는데 번역본은 408페이지나 된다.   

레이 브레드버리는 SF문학에서는 빠질 수 없는 대가인데, 그의 [화씨451]은 매우 좋은, 그리고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민들레와인]은 완독하지 못한 채 도서관에 반납했는데 읽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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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게도 어제와 그제 이틀 자기전 읽었던 책은 [바스커빌 가문의 개]였다. '우습게도'라고 한 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책을 손에 쥐었다는 점과 이틀간 (오랫만에 몸을 실컷 움직여야 하는)힘든 일을 하면서 달리 다른 책들을 읽기에는 몸과 마음이 싱숭생숭한 상태에서 읽은 책이었기 때문이다.  

피에르 바야르의 [셜록홈즈가 틀렸다]라는 낚는 듯한 제목을 달고 나온 새책을 본 후에 역시나 지대로 낚여서 [바스커빌 가문의 개]가 못 견디게  다시 보고 싶어지는거다. 바야르의 책은 아직 보지 못했다. 바야르의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를 보면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책도 다시 본 적이 있는데 ... 보기만 했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헤.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는 꼼꼼하게 재독서를 유인하는 책이었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이라는 정도 외엔 내겐 그다지 큰 반향을 주지 못했던 책으로 남아있다. [예상표절]은 나온 줄은 알고 있었지만 별로 읽고 싶진 않았는데 이번 기회에 한꺼번에 읽어보려 한다. 이 사람의 책에 관심은 가지만 썩 안 땡기는 이유가 ... 트집일 수도 있는데, 출판사 '여름언덕'의 책만듦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첫 책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까다롭기는! 한국 출판사 땜에 저자에게 불똥이 튄 어처구니 없는 사태다.!)

 

 

 

 

 

 

  

 

어쨌든, 급한 일들 대충 마무리는 했으니까, 조금 여유가 있을 것도 같고, 부지런히 책을 읽어야겠다는 계획은 한다. 계획은 계획해보는 데 의의가... .  

조지오웰의 에세이가 눈에 띈다. 제목 또한 [나는 왜 쓰는가]다. 떡하니 쓰고나니 '왜'라는 글자가 왜 이렇게 이상하게 생겼을까, 마치 잘못 쓴 듯한 느낌을 받는다. '왜'는 왜 자음과 모음이 왜 이렇게 조합되어있을까? 이상한 글자다. 뜻만큼이나. 

 

 

 

 

 

  

 

 

더불어, 책과 관련된 책들, 로쟈님, 장정일, 그리고 최성각. 최근의 책들.   

 

 

 

 

 

 

  

 

이 책들 역시 보고 싶다. 여전히 나는 남들이 읽은 책에 관심이 많고, 어떻게 봤는지 매우 궁금해한다. 그러나 '낚을 수' 있을 정도의 흥미를 부여하는 게 이런 부류의 책들이 안게 되는 과제일 듯 싶다. 특정 분야를 폭넓고, 깊게, 흥미롭게 써나가는 독서일기가 관심 받을 때인듯 싶다. 그런 의미에서 로쟈님이 기획하고 있다는 '러시아문학' 관련 책이 기대된다. 아, 이 책은 독서일기류가 아닌가? 본격 문학서평,평론집인가? 어쨌든 기대.  

책과 관련해서 나는 충분히 낚이고 싶다. 제대로 좀 낚아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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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노 나쓰오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권해서 예전에 [아웃]을 본 적이 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옹호했던 그 사람 만큼은 아니지만 치밀하게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필력이 좋다라는 생각은 했었다. 그 때도 이 작가 생각보다 지독하다고 느꼈다. 여자 작가인데도 어둠을 밀어부치는 정신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최근에 이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얼굴에 흩날리는 비]가 여기저기 보이던 차에 함께 소개되곤 하는 그의 소설들 중 표지가 인상적이어서 이 [다크]라는 책부터 손에 들게 됐다.  

일요일 내내 읽다가 잠들다 했는데, 어찌나 어둡고 참담하던지 독서가 우울했다. [아웃]도 그렇고 이 책도 주인공이 여자인데 불행을 타고난 인물로 조형되어 있다. 어떤 평범함도 허락되지 않고 오로지 불행만이 인생에 놓여있는 그런 여자들을 다루는 듯하다. 그래서 이 작가의 작품들을 보려면 어느 정도 세상의 어둠, 세상의 밑바닥, 파탄난 인물들의 정신, 심리를 마주할 각오를 해야한다.

[다크]는 썩 잘 쓰여진 작품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야기가 앞으로 나가는 데 애를 먹는 듯한데 인물들이 나올 때마다 과거가 소개되며 할애된다. 인물들의 절망스런 과거가 쌓여 작품의 볼륨을 만들고 있는 형국인데 참담한 현실들의 다른 판본이 계속 된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이다지도 어두울 수가 없다.  

'여성 탐정 하드보일드'라는 건 그야말로 관심독자를 낚는 광고문구가 아닌가 싶다. 탐정은 주인공이 한때 했던 일이었다고 소개될 뿐, 이 소설은 탐정이 활약하는 추리물이 아니다. 주인공 무라노 미로라는 여자의 조형도 어수선하다. 양아버지를 죽게끔 방관하는 그 분노가 기필코 이해되는 것은 아니며, 도망의 와중에 서진호라는 남자에게 그토록 빠져드는 심리도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아웃]에서도 주인공 마사코가 지극히 의심스러워 하면서도 자꾸만 끌리는 남자를 놓고 어찌해야 하는지 곤혹스러워하는 스릴이 있기는 하다. '지켜내야 할 존재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강해진 것인지 약해진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그 마음. 기리노 나쓰오의 여자 주인공이 겪는 불행의 도미노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인 듯도 하다.  

또 한 명의 지독한 여자, 히사에라는 인물도 처음 소개될 때의 인물과 이후 인물간의 이질적 모습이 있어 동일 인물로 받아들이는데 한동안 애를 써야 한다. 도모베라는 인물의 혼돈스러움은 말할 나위 없다. 물론 도모베라는 인물이 '혼돈' 그 자체를 보여주는 인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인공 미로를 쫓는 또 한 명의 인물 '데이'가 갖게 되는 '급작스런' 이유 추가도 끝내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진다. 구성 상 미로를 쫓아야 하는 절실한 동기 하나를 추가하는 역할 정도로 보여졌다. 

놀랍게도 이 소설에는 1980년 광주가 나온다. 서진호가 광주로 들어가 겪게 되는 과거 얘기가 있기 때문인데 서진호라는 인물을 구성하는 중요한 역사이다. 서진호 뿐 아니라 나오는 인물 모두의 불행의 총합은 그로테스크한, 그래서인지 총체적으로 어둠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한 다크, 전방위가 가늠되지 않아서 오히려 진공같은 비현실감이다. 마지막 대목에서 아이(하루오)가 '미로'라고 칭얼거리듯 부르는 장면은 머리가 쭈뼛설 정도로 잔인했다. 이 작가, 진짜 지독하다.  

펼쳐지는 사건도 사건이지만 상황이나 심리묘사도 많은 편이라서 필요이상으로 길어지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런 묘사들이 소설의 '무게'를 이루느냐가 중요할 듯한데 어둠을 계속해서 덧칠하여 막막하게 하는 효과가 있지만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걸치적거리는 측면도 분명 있다. [아웃](1998)은 훨씬 더 간결했던 것 같은데 미로 시리즈의 최신작(2002)이라는 [다크]는 왜 더 장황해졌을까?, 다른 작품들은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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