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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도 준치와 집나간 며느리   :




 



밥그릇 크기, 실화냐 ?







이 스틸은 이봉래 감독이 1962년에 연출한 << 월급쟁이 >>  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다.  오른쪽에는  젊은 엄앵란이 밥그릇 위에 손을 얹고 행복하게 웃고 있다.  밥그릇 크기가 국을 담는 그릇보다 2배 이상 크다.  그 옆에 앉은 꼬마의 밥그릇도 성인 밥그릇과 같다. 현재 식당에서 파는 공깃밥 그릇보다 최소 3배 이상은 크다(양으로 따지자면 어림잡아 4배 이상 많은 것 같다). 그러니까 1960년대 사람들의 한 끼는 현대인이 하루에 세 끼 먹는 밥의 총량보다 많았다.  밥그릇 크기, 실화냐 ?   라고 묻는 이가 있다면 5,60년대 한국 영화를 감상하는 일을 유일한 낙으로 사는 내가 그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응, 실화야 !

이 그릇은 영화용 소품이 아니라 실제로 5,60년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밥그릇이라고 한다. 소국에서 벌어지는 대식의 풍모는 전설이 되어서 서양 사람들이 조선인을 두고 놀라울 정도로 밥을 엄청나게 많이 먹는 민족이라고 서술한 기록도 있다.  이 스틸 장면은 중요한 정보 두 가지를 현대인에게 알려준다. 첫째, 탄수화물 중심 식사는 비만의 주범이 아니다. 둘째, 탄수화물 중심 식사는 성인병의 주범이 아니다. 5,60년대는 한국인이 가장 날씬했던 시대로 고혈압과 당뇨와 같은 성인병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식품 기업의 스폰서를 받아 가며 대중에게 가짜 정보나 흘리는 사이비 식품 영양학자들이 " 비만의 주범은 탄수화물 " 이라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저탄고지가 다이어트 식단으로 유통되면서 고탄이 비만의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탄수화물은 죄가 없다(물론 지방도 죄가 없으며 저탄고지 식단도 죄가 없다). 탄수화물이 죄인이라면 한 끼 식사로 현대 한국인의 세 끼보다 많은 밥을 먹어치웠던 5,60년대 한국인은 비만과 각종 성인병으로 고생했어야 한다. 저탄고지 식단이 다이어트에 효과적인 이유는 맛이 없다는 데 있다. 설탕과 양념을 최대한 제한한 음식이 바로 저탄고지 음식이다. 우리는 < 저탄고지 > 가 제한 없이 마음껏 먹어도 좋은 마법의 다이어트 식단이라고 믿고 있지만 저탄고지 식단이 체중을 감량시키는 원인은 저탄고지 음식 맛이 일반 음식보다 맛이 없어서 식사량이 줄어든 탓이다.

그리고 가공식품과 외식 음식은 저탄고지 식단이 아니기에 자연스럽게 외식과 간식을 거의 하지 않게 된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하루 전체 식사량이 대폭 줄어든다. 매우 클래식한 결론이어서 실망할 수도 있는데 비만의 주범은 탄수화물도 아니고 지방도 아니다. 단순하게 말해서 현대인은 5,60년대 한국인보다 더 많이 먹기 때문에 살이 찌는 것이다.  밥그릇의 크기가 작아졌을 뿐 하루 식사량의 총량이 5,60년대보다 크가 증가하였다. 그렇다면 과식을 부르는 요소는 무엇일까 ?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매우 클래식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음식이 맛있으니까 !  물을 과음하는 이는 없다. 물이 맛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향미와 조미와 감미료를 탄 청량음료는 얼마든지 과음할 수 있다.

이처럼 향미와 조미와 그리고 감미료의 발달이 음식 맛을 폭발적으로 증진시켰다. 여기에 더해 고춧가루와 고추장이 착색료 역할을 담당하니 시각적으로도 풍부해진다. 떡볶이가 맛없다는 황교익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떡볶이는 맛있는 음식이다. 하지만 정크푸드'이다. 음식으로써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황교익은 단짠 음식(설탕과 소금)이 비만과 성인병의 주범이라고 주장하지만 진짜 범인은 < 맛 > 이다.  맛있는 음식이 비만을 부른다.  그런 점에서 맛집을 찾아 소개하고 맛을 예찬하는 황교익의 태도는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황교익이 " 말이 맛을 만든다 " 고 주장하는 것은 경청할 만하다.  전어와 준치는 종종 같은 말로도 사용된다. 하지만 전어는 청어목 청어과이고 준치는 청어목 준치과이다.

맛도 비슷하고 생김새도 비슷해서 전어를 준치라고도 하고 준치를 전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내가 전어와 준치를 예로 든 이유는 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프레임 때문이다. 준치는 " 썩어도 준치 " 라는 이름으로 유통되었고 전어는 " 집 나간 며느리 " 로 유통되었다.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프레임은 2000년대 만들어진 전략이라고 한다. 그런데 전어는 실제로 맛있는 생선이 아니다. 옛날에는 맛없는 생선이어서 동물 사료로 사용되었던 매우 값싼 생선이었다. 그랬던 전어가 집 나간 며느리라는 프레임이 덧씌워지자 환장할 맛으로 둔갑하였다. 반면, 준치의 프레임 전략은 실패하게 된다.  준치 하면 " 썩어도 ~ " 라는 나쁜 어감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준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만하다. 준치나 전어나 맛은 서로 대동소이한데 말이다.

이처럼 맛을 좌우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말이다. 포방터 돈가스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는 돈가스가 된 것도 맛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종원의 말이 큰 작용을 한 것이다. 맛집은 대부분 외진 곳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그토록 맛있다는 포방터 돈가스가 외진 곳이기에 장사가 안된다는 서사는 쉽게 납득할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  권위를 부여받은 누군가가 맛을 보장하는 순간 맛없던 음식도 맛있는 음식으로 등극하게 된다.  맛을 믿는 것은 어리석다. 환상적인 맛은 대부분 환상이다. 맛은 환상이다.


■  덧대기

저탄고지식을 하기도 했고 자연식물식을 하기도 했으나 어느 것 하나 완벽하게 완수하지 못한 채 지금은 일일일식'을 실천하고 있다. 그래도 저탄고지식과 자연식물식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자연식물식이 저탄고지식보다는 자연스러운 식단이란 생각이 든다(저탄고지식에서 " 고지식 " 이란 표현에 마음에 걸린다, 농담이다). 하지만 자연식물식과 일일일식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일일일식을 선택할 것이다.  일일일식은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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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9-01-08 2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탄고지 음식은 설탕과 양념을 최대한 배제한 요리법이다.
만약에 이 조리 방식으로 ( 설탕과 양념을 최대한 배체한 채로 )
일반 음식을 만들어서 제한 없이 먹을 수 있다고 했을 때,
저탄고지와 같은 체중 감량 효과가 발생할까 ?

100% 동일한 체중감량 효과가 발생할 것이다.
ㅡ 왜, 맛이 없으니까 ?
물을 과식하는 인간은 없다.
ㅡ 왜 맛이 없으니까.

맹물에 감미료, 향미료, 조미료가 투하되는 순간 상황은 역전된다.
청량음료는 맛있는 맹물이다.
맛이 보강되면
한때 나처럼 코카콜라 중독이 되어서
코카콜라을 너무 많이 마셔서 코카콜라 쇼크를 경험하게 되는( 토하게 되는.. ) 경우도 발생하게 된다.


수다맨 2019-01-09 1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포방터 돈가스에 가서 ‘어렵사리‘ 식사를 하고 온 지인이 한 명 있습니다. 그 친구 말로는 분명히 맛이 좋지만, ‘이거 안 먹는 사람은 인생 후회한다‘라고 할 정도의 맛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주방장의 능력보다는 백종원의 권위에 더 신뢰를 부여하는 것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1-09 11:06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과연 줄 서서 먹을 만큼 맛있는 것인지 그냥 그럭저럭 맛있는 것인지...
줄 서서 먹을 만큼 맛있는 돈가스라면 이미 맛집으로 등극했겠지요.
맛집은 대부분 대 외진 곳에 있잖아요... 백종원의 바이럴 마케팅이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한정판 겨울 에디션, 양장) - 아직 행복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곰돌이 푸 시리즈
곰돌이 푸 원작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채찍은 가고 당근은 오라 !











                                                                                                                 한때 < 채찍 > 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원조는 국밥집 욕쟁이 할머니'였다. 진양조장단으로 걸쭉한 욕자배기를 뽑으면 듣는 이는 배가 부르는지라. 국밥 한 그릇 먹었을 뿐인데 왠지 두 그릇을 먹은 것처럼 포만감이 들었다. 이명박도 이 국밥집에서 욕을 먹으며 따순 국밥을 먹었다. 이 쥐새끼 가튼 놈아, 배 터지게 먹구 부지런히 일혀. 나랏일 하려믄 많이 먹어야 혀 ~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그였지만 자신보다 한 살 많은 국밥집 할머니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꾸역꾸역 국밥을 말아먹을 만큼 강한 승부욕의 소유자여서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에 오른다. 하지만 세상 일이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지금은 국가를 말아먹어서 국밥 대신 콩밥을 먹고 있다지, 아마 ?  지금 여러분들은 믿지 못하겠지만 : 이처럼 멘토의 독설이 정직하고 솔직한 충고라는 상품으로 유통이 된 적이 있었다. 김미경은 언니의 독설이라는 프레임으로 파이트머니를 벌었던 이였다. 꽤 장사가 잘 되었는지 " 언니의 독설 스페셜 에디션 양장본 " 까지 출간한 것을 보면 욕먹으면서도 즐거워하는 인간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맙소사, 스페셜 에디션 양장본으로라도 간직하고 싶은 럭셔리한 욕의 품격은 무엇일까 ?  김난도도 김미경'과 같은 부류였다. 그도 아프니깐 청춘이라는 책으로 파이트머니(떼돈)를 벌었다. 박근혜도 김난도의 채찍이 탐이 났는지 청년 실업 타계를 위한 정부의 해법으로 아프리카 같은 오지에 가서 삶을 개척하라는 " 아프리카 청춘론 " 을 펼치기도 했다.  그녀도 이명박처럼 마음은 콩밭에 있었던 모양이다. 훗날, 콩밭 매는 아낙네가 되어 국밥 대신 국가를 말아먹었다. 어쩌면 이명박과 박근혜는 지금이야말로 화양연화인지도 모른다. 아파야 찬란한 청춘이니깐 말이다. 회춘하셨네, 회춘하셨어 ! 그런데 그 많던 채찍들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 자리를 < 당근 > 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 위로받고 싶은 날의 보노보노 >> , << 울고 싶은 날의 보노보노 >> , << 상처 하나 위로 둘 >> , << 너라는 위로 >> , << 작지만 따뜻한 위로 >> , << 아래보다는 위로 >> , << 캡슐 유산균 위로 진격 ! >> 기타 등등. 2018년에 " 위로 " 라는 키워드로 걸려든 신간이 무수히 쏟아졌다. 위로'라는 단어가 출판계의 떠오르는 신성이 되다 보니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를 출간한 출판사도 내심 기대를 거는 모양이다. 이 위로라는 당근의 최상위를 점령한 책이 바로 <<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 이다. 출판사가 메인 카피로 자신있게 선보인 " 매일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 라는 문장은 마치 " 술을 마시며 운전했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 " 는 변명과도 맥락이 통한다. 몇몇 문장을 나열하면,



1 이제 한계라고 느끼는 순간이 한 번 더 도전할 때에요

2 매일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3 멋지지 않으면 어떤가요 ? 눈앞의 행복을 잡아요

4 이미 선택한 것에 미련을 두지 마세요

5 다른 사람의 기분을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세요

6 가끔은 좋아하는 것에 흠뻑 빠져보세요



 


이런 달달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반응하게 된다. 곰돌이 푸는 왜 이러는 걸까요 ?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위로라고 하고 있으니 아래로 숨고 싶은 마음이 든다.  채찍을 팔던 장사치가 이제는 당근을 팔고 있다. 채찍을 팔 때에는 당근은 아편이라고 공격하던 이가 이제는 당근을 팔면서 채찍이 아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당근이 다 팔리고 나면 다시 채찍을 팔 것이다. 유행이란 돌고 도는 것이니까. 출판사는 죄 없다, 책을 파는 게 일인 출판사가 책 팔아먹은 게 죄는 아니다. 문제는 독자다. 매일 행복하지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_ 라는 달달한 위로에 위로받는 이는 조삼모사의 원숭이'이다. 매일 행복하지 않다면 행복한 일은 매일 없어. 이런 쪼다쉬, 그 말은 당신을 위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조롱하는 거라고. 당근과 같은 말은 채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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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1-08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캡슐 유산균 위로 진격!>이라는 책까지 나왔군요, 라고 댓글창에 써놨다가 혹시 하는 마음에 검색해봤더니
심지어 <아래보다는 위로>도 없는 책이었네요 ㅋㅋㅋㅋㅋㅋㅋ

낚였어, 곰발님 스타일 알면서 또 낚였어......

곰곰생각하는발 2019-01-08 15:5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이해해주세요..

2019-01-08 15: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1-08 15:54   좋아요 1 | URL
제가 독해력이 딸려서 그런가 ? 다음 문장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역대급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해 괴로운가요? 가끔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마음껏 즐겨보세요. 그것이 바로 건강한 삶의 비결이에요.˝


하고 싶은 걸 못해서 괴롭다는데... 이 책에서는 그 해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마음껏 즐기라네요.
아니 ˝ 좋아하는 일 ˝ 이 곧 ˝ 하고 싶은 것 ˝ 이잖아요.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해서 괴롭다 하니 하고 싶은 걸 하라네요 ? 이게 도대체 말이야 소야 ? 논리야 유리야 ?
 

 

 

 

 

 

 

 

 

돌의 방향

                         나이 20은 " 이십 세 " 라는 표현보다는 " 스무 살 " 이라는 어감이 더 어울린다. < 스무 > 라는 관형사에는 " smooth " 와 " sweet " 의 느낌이 나서 다방 커피 맛이 난다. 반면에 나이 30은 " 서른 살 " 이라는 표현보다는 " 삼십 세 " 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스무 살이 달달하고 부드러운, 설탕과 프림을 넉넉하게 넣은 커피 맛이 난다면 삼십 세는 블랙커피 맛이다. 전자가 낭만에 빠져도 될 나이를 미각적으로 표현한 어감이라면 후자는 쓰디쓴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직시해야 된다는 현실 인식으로 읽힌다. 그렇기에 < 스무 살을 지나 삼십 세에 도달한 사람 > 은 철이 든 사람이고 < 이십 세를 지나 서른 살 > 이 된 사람은  철분이 부족한 사람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여 스무 살 낭만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한국 교육은 10대부터 치열한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경쟁해야 된다고 가르친다.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베틀로얄인 것이다. 낭만 따위는 지나가는 민들레에게 주시라. 뭐, 이런 분위기'이다.

대한민국 청춘은 독고다이 인생인 셈이다. 독고다이가 " 죽을 때까지 홀로 간다 " 는 뜻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 독고 > 가 < 고독 > 으로 읽힐 법도 하지만 한국인은 고독과는 거리가 먼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 10대들은 또래 중 한 명이 " 튀 " 면 침을 " 퉤 " 뱉는다.  요즘 등골브레이커로 등장한 10대 롱패딩의 색깔이 모두 똑같은 이유는 튀는 색깔의 옷이 자칫 튀려는 수작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인은 독고다이의 경제학(이면서 동시에 경쟁학)을 숭배하면서도 막상 獨孤( : 홀로 독, 외로울 고)한 자는 왕따라는 집단 폭력으로 응징하려는 모순된 폭력성을 보인다. 독고한 자를 독거(獨居)라는 형태로 가두려는 짓이 바로 이지메'이다. 이러한 모순은 세대를 초월하며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이 부의 기준이 되는 나라가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서구에서 아파트는 실패한 주거 정책이지만 유독 대한민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집단과 조직에 대한 열망이 주거 형태와 맞물리면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아파트 입주민 회의에서 배달 노동자의 엘리베이터 사용을 불허하겠다는 방침을 놓고 토론을 진행한 예가 좋은 사례'이다. 이제 십 대는 이십 세를 거쳐 삼십 세에 도달해야 된다.  불행은 바로 그것이다.  삼십 세'가 빛나기 위해서는 스무 살'이라는 낭만적 성장통을 겪을 때에만 가능한 것인데 이 낭만성이 제거되다 보니 한국 사회는 빠르게 인간성을 잃고 있다.  골리앗이 다윗을 때리는 행위는 인정도 없고 사정도 없는 무자비한 폭력에 불과하지만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 하는 행위는 무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적이다.

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싸울 수 있는 용기는 낭만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은 낭만적인 사람이다. 그는 스무 살을 거쳐 삼십 세가 되어 어른이 되었지만 낭만을 잃지 않은 정치가였다. 투석(投石)의 방향에 따라 선함과 악함이 바뀐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던진 돌팔매는 선한 행위이지만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자를 끌고 나와 돌팔매를 하려는 짓은 악함이다. 남자들이 남혐이라는 이유로 여자들을 향해 돌을 던질 때마다 예수의 말을 빌려 말하고 싶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노무현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돌을 던지란 말씀입니까 ? "








 





■  본문과는 상관없는,


                                      영화는 볼 때마다 다르게 다가온다. 영화 내용이 변했을 리는 없으니 내 마음이 변한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그때에는 " 불변 " 이라 믿었던 마음이 지금에는 " 가변 " 이 되어 돌아온다. 영화 << 봄날은 간다 >> 에서 유지태가 이영애에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_ 라고 말했을 때, 이 대사가 끔찍해서 이 영화를 싫어했었는데 지금 다시 볼 수 있다면 어쩌면...... 이 대사 때문에 이 영화가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은 항상 가변이니까. 내 마음 속 영원불변한 불후의 명작이라 믿었던 영화가 어느 순간 촌스럽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 아비정전 >> 이 그런 경우였다. 일종의 권태기가 찾아온 것이다.  장 비고 감독이 1935년에 연출한 흑백 영화 << 라탈랑트 >> 를 20년 전에 시네마떼끄에서 보았을 때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세계 걸작 고전을 본다는 의무감과 보았다는 쾌감만 남았던 영화였다. 이 영화를 다시 본 곳은 10년 전 낙원동 아트시네마였다. 그때도 이 영화는 내게는 지루한 영화였다. 그리고 어제 유튜브를 통해 다시 보았을 때 내 마음은 그 전의 냉정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매우 아름답고 섬세한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흔들렸다. 어느 장면에서는 울컥해서 한지에 스며드는 농도 옅은 먹물처럼 눈물이 눈가에 번지기도 했다. 감상의 기준이 그때그때 다 다르다면 그때그때 선택했던 행위도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이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애원할 때 냉정하게 돌아섰던 내 마음은 옳았는가. 다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애원했을 때 내 슬픔과 연민은 정확한 판단이었나 ?  판단은 늘 불확실해서 결정도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십 년 후에 다시 << 라탈랑트 >> 를 보았을 때 지금 내가 느꼈던 이 설움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을까 ?  모를 일이다. 그때 나는 그 여자를 사랑했던 것일까 ?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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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7 1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7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맛 에     대 하 여

                               처음부터 백종원이 " 밥맛 " 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남자의 몸에서 낯선 여자의 향기가 아니라 쉬어 터진 밥맛을 느끼기 시작한 계기는 << 골목식당 >> 이었다. 골목식당은 성장 드라마를 흉내 낸 휴머니즘 소설로 시작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보다 강력한 빌런(악당)이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피카레스크 소설1) 로 변했다. 손수건을 옆에 두고 책을 읽었던 독자도 장르가 바뀌자 이제는 쇠꼬챙이를 옆에 두고 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 안  타깝다 > 는 마음은 사라지고 < ㅡ 티껍다 > 는 마음만 남았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악한이 주인공인 소설이니까.  특히 청파동 편은 두 명의 빌런이 등장한다.  독자는 로마 검투장에 입장한 로마인처럼 하늘을 향해 올렸던 엄지손가락을 바닥을 향해 내리꽂으며 외친다. 찔러, 찔러, 찔러 !  욕하면서 본다는 점에서 골목식당은 막장 드라마'가 된 것이다. << 백종원의 골목식당 >> 이라는 제목의 피카레스크 소설은 과연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을까,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볼까, 과연 골목식당에 출연하여 뜬 가게들은 그 골목길에서 오래오래 장사를 할 수 있을까, 방송 때문에 그 골목 상권의 임대료가 상승하여 이웃 가게들이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닐까 ?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백종원 현상을 비판하는 이유이다.

평소 백종원에 대해 비판적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황교익에 대해서는 우호적일 것이라 생각2)하겠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황교익의 집밥 타령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은 2015년 7월 13일에 작성한 글이다.




황교익과 백주부 :  집밥에 대한 환상


                                                           어머니는 다행스럽게도 음식 솜씨'가 형편없었다. 아무리 좋은 식재료로 요리'를 해도 맛은 항상 평균 이하'였으니까. 으하.  나는 그 사실에.....       감사했다. 왜냐하면 집 밖에서 먹게 되는 음식'은 우리 집 집밥 맛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았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 한식대첩 >> 에 나올 수준이었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밥그릇 싹싹 비우는 게 미덕인 사회에서  집 밖에서 깨작 깨작거리다가 밥을 남기면 까탈스러운 인간이란 소리 듣기 딱이니 말이다.  사람들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자주 " 집밥 " 을 찬양한다. 식당에서 나박나박 썬 무를 넣고 자박자박하게 조린 < 갈치조림 > 을 먹으면서 집밥을 찬양하다니 " 미틴 거 아니야 ? " 나는 사람들이 입에 침이 고이도록 칭찬하는 " 집밥 이야기 " 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겪은 경험으로 축소해서 말하자면 < 집밥 타령 > 은 여성보다는 남성이 주류였고, 도시 출신'보다는 시골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집밥 예찬'에는 " 어머니 손맛 " 이라는 해괴한 논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머니 손맛이 맛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맛집 탐방 오락 프로에 등장하는 손님들이 내뱉는 말과 비슷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카메라 앞에서 " 그 옛날 어머니가 해주던 맛 " 이라고 강조했다. 정말 그럴까 ? 그들이 집밥과 밖에서 먹는 밥'을 분리하는 기준은 의외로 단순하다. 집밥은 어머니가 주체이지만 밖에서 먹는 밥은 아줌마가 주체이다. 여기에는 한국 특유의 << 어머니 찬양과 아줌마 경멸 >> 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밖에서 먹는 밥이 맛이 없는 이유는 사랑과 정성의 아이콘인 엄마가 아니라 아줌마가 음식을 한다는 데 있다.  " 옛날 어머니 손맛 " 이라는 해괴한 논리'는 대한민국 남성 중심 사고'가 낳은 착각'이다. 그들이 어머니를 호출하는 이유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 보살핌의 아이콘 " 이라는 데 있다. 그 옛날 기억 속에 어머니는 자신을 보살피는 기계"다. 비 오는 날 김치전이 먹고 싶다면 김치전을 뚝딱 내놓고, 비빔국수가 먹고 싶다고 말하면 먹음직스러운 비빔국수가 나온다. 하지만 이 기억 속에는 절차가 생략되어 있다. 한여름 불앞에서 땀 흘리며 요리를 하는, 어머니의 무보수 노동 장면이 " 블랙 아웃 "  형태로 통편집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또한 여기에는 집밥이 공짜'라는 인식도 자리하고 있다. 이 세상에 공짜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 공짜는 다, 맛있어요 !  남성 입장에서 보면 " 집밥 " 은 여러모로 환상적인 음식'이다. 그러다 보니 식당에만 가면 집밥 타령이다. 이제 집밥 타령은 그만했으면 싶다. 집밥에 침이 고이더라도 한여름, 불 앞에서 고생하는 아내(어머니)를 생각한다면, 경제적으로 그리 궁핍한 생활이 아니라면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외식'을 합시다. 집밥이 곧 사랑이라고 ?  글쎄, 정말 그럴까 ? 집밥은 아내 혹은 어머니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음식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집밥 타령을 하며 침이 고일 때, 누군가는 집밥 때문에 땀을 흘린다. 집밥은 사랑의 결실이며서 동시에 노동의 결실이다.



황교익은 틈만 나면 식당에서 파는 음식을 비판하면서 집밥이 최고야 _ 라고 엄지 척했지만  이 집밥 예찬에는 여성이 집밥을 만들기 위해 땀 흘린 가사 노동(력)은 지워져 있다.  설탕과 MSG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우아미를 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많은 부엌력(부엌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황교익은 모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음식은 정성이 맛을 좌우한다는 소리나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종종 황교익이 가족을 위해서 부엌에서 요리를 한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한여름에 불앞에서 요리를 한다는 것이 상당히 고통스럽고 짜증 나는 일이며 갓 지은 밥이야말로 가장 맛있는 밥맛이라는 남편을 위해 끼니 때마다 갓 지은 밥을 차리는 것이 바쁜 현대 사회에서는 사치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_ 라는 그런 궁금증 말이다.


1일1식 5년 차에 접어들면서 내가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시장이 반찬이라는 점이다. 하루에 한 끼만 먹다 보면 맛없는 음식도 배고프면 달게 먹는다.  음식 투정을 자주 부리는 사람은 주로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환경에서 손을 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남성은 물론이거니와 며느리에게 상을 받는 시어머니도 여성이면서 툭하면 며느리의 음식에 대해 타박을 놓는 이유는  음식을 만드는 노동 환경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식당의 음식 맛을 가지고 그 사람의 인성을 논하면서 " 빌런化 " 시키는 백종원과 그 추종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음식을 만드는 데 소모된 노동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때 우리는 함부로 음식에 대해 논한다.  맛이란 기본적으로 " 환상 " 이다.


바나나 우유에는 바나나가 없고, 초코 우유에는 초콜릿이 없고, 딸기 우유에는 딸기가 없다.  그리고 소고기 다시다에는 소고기가 없다. 식도락이 소확행'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한갓 " 헛것 " 을 좇는 헛똑똑이에 불과하다.  포방터 돈가스 한 개 먹어 보겠다고 이른 새벽부터 텐트까지 치는 상황을 보면서 문득 허니버터칩 하나 먹겠다고 그 난리 부르스를 췄던 몇 년 전 일이 떠오른다.  한때 " 신이 선물한 맛 " 이라는 극찬을 받았던 허니버터칩은 지금은 마트 할인 행사 때 " - 떨이 " 로 팔려 나가고 있다. 허니버터칩의 거무추레한 몰락을 지켜보면서 골목식당의 거품을 지레짐작하는 것은 지나친 우려일까 ?


황교익의 지적은 옳다.  설탕 적게 넣고 조미료 사용 자제하고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서 양념을 과다하게 넣지 말라는 지적은 백 번 천 번 옳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말하는 태도에 있다.  그에게는 대중을 계몽하려는 말투가 깃들여져 있어서 바른 소리를 해도 싸가지가 없는 것처럼 들린다.  설탕과 MSG 그리고 갖은 양념의 과다 사용이 음식 맛을 떨어뜨리는 것보다 맛을 떨어뜨리는 결정적 요인은 배부른 투정'이다. 맛없다고 먹던 음식 함부로 뱉지 말고,  맛있다고 함부로 집밥 찬양하지 마라. 그리고 손님이랍시고 식당 가서 위세 떨지 마라. 가장 효과 좋은 향미와 조미는 뱃가죽이 달라붙을 정도의 허기와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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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인공이 악한이며, 그의 행동과 범행을 중심으로 사건이 진행되지만 결국에는 악한의 뉘우침과 결혼으로 끝나는 소설의 유형

2)  종종 백의 추종자들이 페루애는 남의 나라에서 내정간섭하지 말고 페루로 돌아가  라는 소리를 하던데 내 고향은 충청도유. 알았냐, 씹새야 ! 내가 왜 페루로 돌아가야 하냐, 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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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1-06 2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 씨 주연의 막장드라마는 계속
해서 전편의 역대급 빌런을 능가
하는 빌런이 등장해서 숙명의 대결
을 펼쳐야 하는 오래전 만화 <손오공>
을 연상시킵니다...

언급해 주신 대로, 혀준 선생의 애티
튜드가 역시 문제인 것 같습니다.
꼰대 스탈이 이제 먹히지 않는 마당
에 그런 컨셉으로 쇼부를 치니 대중
에게 외면을 받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알쓸신잡에서 내공을 보여 주셨
는데도 여전히 그대로시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1-07 15:02   좋아요 0 | URL
황기백기 깃발 게임 같습니다.
황기 내려, 백기 올려.. 황기 내렸다 올리지 말고 당장 백기 들어.....
뭐,이런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황 선생도 보면.. 참 꼰대에요.
혼밥하는 행위가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전 이 양반, 집밥 타령 좀 그만했으면 합니다...
만날 음식점 음식 맛 평론을 하면서 왜 수요미식회 같은 데 나갔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집밥이 제일 맛있는데 왜 식당 가서 밥 먹으며 맛 평론을 하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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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   조   선    원    년   :



국가부도의 날, 2018



                                                                                                                  국가부도의 날에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술집은 한산했고 취객은 조용했다. 이 침묵은 앞으로 다가올 고통을 지레짐작할 수 없을 때 발생하게 되는 어떤 " 무지 " 이거나 " 증후 " 였다.

김영삼이 티븨에 나와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통을 분담하자고 했을 때 여기저기서 욕지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감했다, 그날은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으니까 !  20년 전 일이라 세세하게 기억할 수는 없으나 아마도 어디선가 눈이 내리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날은 절기로 小雪 이었다. 소설(小雪)에 소설(小說)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픽션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국가는 국민 탓'을 하기에 바빴다. 국민들의 과소비가 IMF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국민 80%가 자신은 중산층이라 믿었던 시절에, 90년대 인기몰이 중이던 패밀리레스토랑에서 큰마음 먹고 생일 파티를 해본 경험이 있는 소시민이라는 누구나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MBC 9시 저녁 뉴스에서는 외국계 패밀리레스토랑을 취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곳의 음식은 대부분 수입 원료를 사용하고 있으며 여기에 로열티까지 꼬박꼬박 달러로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음식점을 통해서 우리의 달러가 물이 새듯 해외로 새나가고 있습니다. 엠비씨 뉘우스 ~ 송재익이었습니다. " 죄인이 된 국민은 외화를 모으기 시작했고 장롱 속 금을 내놓기도 했다. 20세기 초에 벌어졌던 국채보상운동이 21세기를 앞둔 끝무렵에 재현된 것이다. IMF 다음해, 9622명의 국민이 자살을 선택했지만 IMF 사태에 대해 1차적 책임을 져야 할 정치인과 경제 관료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영화 << 국가부도의 날, 2018 >> 은 내가 허름한 술집에서 생파를 하던 날로부터 일주일 전을 다룬다. 딱 잘라 말해서, 영화는 < 설명 > 은 많은데 < 갈등 > 은 없다.

이 영화에서 핵심 축이라 할 수 있는  한시연(김혜수 분)과 윤정학(유아인 분)은 관객들을 향해 경제 강의를 늘어놓는다. 문제는 두 등장인물 모두 내적 갈등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우선, 한시연과 팀원은 서민 편에 서서 IMF 구조 금융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유가 입체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감독은 이 문제를 의식했는지 영화 끝에 가서 김혜수와 허준호가 " 남매간 " 이라는 반전을 준비했는데 이 촌수寸數 반전'은 너무나 뜬금없어서 촌스러운 반전처럼 보인다. 그리고 유아인이 연기한 윤정학은 있으나 마나 한 캐릭터'다. 영화 << 빅쇼트 >> 에서의 마이클 버리(크리스찬 베일) 캐릭터를 그대로 카피한 윤정학은 염치없게도 그 유명한 대사도 그대로 훔친다.

마이클 버리와 윤정학의 차이점은 마이클 버리는 " 갈등하는 캐릭터 " 이고 윤정학은 " 갈등하는 척하는 캐릭터 " 라는 점이다. 이 차이가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납작하게 만들기도 한다. 갈등은 보이지 않고 설명만 늘어놓다 보니 김혜수와 유아인이 연기한 캐릭터는 모두 입체적이지 못하고 납작한 캐릭터가 되었다. 이 영화에서 캐릭터를 가장 쓸모 있게 사용한 예는 조우중이 연기한 재정국 차관이다. 그 또한 갈등 없는 인물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이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악마는 원래 갈등이 필요 없는 존재라는 데 있다. 인간은 갈등하지만 악마는 갈등하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국민의 과소비가 국가를 망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나라 망하게 생겼다는 지금의 주장과 닮았다. 국민소득 3만불 시대에 30년 넘게 일한 제화공의 월급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100만 원 남짓이라면 그런 나라는 망해야 한다. 1997년은 헬조선 원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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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5 14: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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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5 14: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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