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사용 설명서'와 레시피 !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 첫 번째 단계는 봤던 영화를 두 번 이상 본다. 두 번째는 그 영화를 보고 생각을 정리한 후 글을 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영화를 직접 만들어 본다. 일반 관객들에게 영화를 직접 만들어 보라고 요구하는 것까지는 무리'이겠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는 손쉬운 실천이니 누구나 할 수 있다. 첫 번째 감상이 전체적인 틀 안에서 줄거리를 따라간다면, 두 번째 감상은 특정 부분을 집약적으로 관찰하게 되는 여유를 제공한다. 이때 눈'은 숲(전체) 이 아니라 나무(부분 집약적) 를 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기술적 측면도 엿보게 된다. " 저 장면을 찍기 위해서는 트랙을 8자 모양으로 설치해야 하고, 카메라가 180도 회전을 하게 되면 촬영 장비를 신속하게 이동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감독은 왜 굳이 이 장면을 힘들게 찍었을까 ? "
만약에 이 의문점이 해결되지 않으면 영화를 다시 보면 된다. 그러니깐 영화를 다시 본다는 행위'는 특정 장면에서 감독의 의중을 파악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런 다음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작성하면 끄읏 ! 문학을 대하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 다시 - 읽기 > 는 전체를 보느라 놓친 부분을 세부적으로 분석하기에 좋은 방식이다. 첫 번째 읽었을 때 느꼈던 감상과 다시 읽었을 때 느꼈던 감상이 달라서 당황했던 경험은 다들 있으리라. 내게는 로맹 가리 소설이 그런 경우'였다. 나이가 들어서 다시 읽은 로맹 가리 소설들은 어딘가 모르게 미성숙했으며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렇다고 반드시 재독을 해야 독자로서 자격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문학 비평가는 한 작품을 깊이 읽기 위해서 반드시 " 다시 읽기 " 과정을 거쳐야 한다.
새움 출판사는 "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까뮈의 이방인이 아니다 " 라는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번역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몇몇 사람들은 이 광고 문구가 < 자극적 > 이라고 지적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 적극적 >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니 내 판단이 틀린 모양이다. 판이 시끄러울수록 출판사의 적극적 마케팅은 성공적이었다. 아마도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카뮈의 < 이방인 > 을 이번 기회에 처음 읽었다기보다는 다시 읽었을 확률이 더 높지 않았을까 싶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니 말이다. 평가는 극과 극을 달렸다. 별점 테러는 카뮈의 < 이방인 > 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 이정서가 번역한 번역물 " 에 대한 평가에 가까웠다. 결과만을 놓고 보았을 때 이정서는 까뮈에게 민폐를 끼치는 꼴이다. 이 책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내린 독자들은 한결같이 가독성을 높이 평가하며 다른 번역에 비해 이해하기 쉬웠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 가독성과 이해 > 는 이정서가 번역을 매끄럽게 잘했기 때문에 내린 평가라기보다는 다시 읽기'에 따른 효과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영화도 마찬가지이고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 다시 - 보기/읽기 " 는 놓친 부분을 다시 보게 만드는 과정이다. 첫 번째 읽기보다는 두 번째 읽기'가 이해력에 도움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정서가 번역한 책이 김화영이 번역한 책보다 가독성이 뛰어나고 이해하기가 쉽다는 지적은 착각일 확률이 더 높다. 만약에 당신이 카뮈의 < 이방인 > 을 이정서 판으로 처음 접하고 나서 김화영이나 다른 이가 번역한 < 이방인 > 을 다시 읽었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 두 번째 독서'이다 보니 놓친 부분을 다시 읽을 기회가 늘어날 것이다. 이처럼 보지 못한 부분을 다시 보게 만드는 과정이 다시-읽기'이니 이해의 폭이 그만큼 넓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
사실, 나는 까뮈의 < 이방인 > 을 김화영 교수가 번역한 책으로 읽었다(혹은 다른 번역본으로 읽었을 것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입 주변에 솜털이 부슬부슬 자라던 시절에 읽었으니 제대로 읽었을 리는 없다. 줄거리 뼈대 몇몇만 기억난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아도 뫼르소의 행위가 난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우, 하지 마라. 와와, 할 필요도 없다. 천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다.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한 길 사람 속도 모르기 때문에 탄생한 영역'이다. 인간 행동과 그에 따른 해석을 박하사탕'처럼 시원하게 내릴 수 있다면 문학은 의미가 없다. 모든 문학이 계몽 소설은 아니지 않은가 ? 계몽 소설만큼 재미없는 소설도 없다. 인간이란 분석되지 않는 존재이기에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존재다. 그런데 이정서는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행위'에 답을 부여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 정당방위 > 라는 기상천외한 해답이 나온다. 만약에 이정서가 자신있게 주장하는 것처럼 단 하나의 해석만 가능하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전자제품 사용설명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정서는 문학을 번역한 게 아니라 전자제품 사용설명서를 번역한 것이다. 왜냐하면 전제제품 사용설명서는 오로지 하나의 명령문'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 1번을 4번에 삽입 후 전원을 연결하라 > 는 문장은 오로지 < 1번을 4번에 삽입 후 전원을 연결하라 > 라는 단 하나의 해석문'만 존재한다. 여기에는 의뭉스러운 은유도 없고 중의적인 표현도 없다. 문화적 차이에 의한 오해도 없다. 1번을 4번에 끼우라고 하는 데 무슨 얼어죽을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오해란 말인가. 만약에 엉터리로 번역을 하게 되면 결과는 뻔하다. 1번을 3번에 삽입한 후 전원을 연결하면 어떻게 될까 ?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문학은 제품 사용 설명서가 아니다. 번역이란 기본적으로 번역가의 입장과 차이'를 반영한다. 번역이 아날로그'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레시피를 따라 요리를 했다고 해서 음식 맛이 모두 동일할 리는 없다. < 레시피 > 는 재료의 계량, 순서, 방식을 재현하기에는 탁월하지만 결정적으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아날로그적 손맛을 재현할 수는 없다. 번역 또한 마찬가지'다. 번역은 결코 한 가지 맛으로 통일되지 않는다. 번역은 레시피(원본)를 그대로 재현하려고 노력하지만 번역가가 만들어낸 손맛은 제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정서는 자신이 요리한 음식 맛을 표준이라고 우긴 후 다른 사람이 만든 요리에 대해서는 표독스러운 시어머니처럼 짜네, 다네, 싱겁네, 라며 타박을 한다. 나중에는 맹물 마시고도 짜다고 할까 걱정된다.
이번 논란을 보면서 < 이방인 > 을 다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서가 번역한 < 이방인 > 이 아닌, 김화영이 번역한 책이거나 아니면 다른 이가 번역한 책을 말이다. 전자제품 사용 설명서'를 읽는 것만큼 인생을 허투루 낭비하는 것도 없다. 새움출판사에게 영화 < 친구 > 를 권한다. " 고마해라, 책 마이 팔렸다 아이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