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 : 막장의 탄생.
낙원동 아트 시네마'에서 유현목 감독의 < 오발탄 > 을 상영한 적이 있다. 감독 영화제 따위가 아니라 재개봉 영화 형식으로 상영되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박스오피스 집계 현황에 이 영화도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예술 영화 열풍이 불어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영화가 예술 영화 전용관에서 개봉되어 흥행이 되기도 했던 기이한 시절이었다. 아마, 자신이 만든 영화가 관객 동원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감독이 알았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춤이라도 추었을 것이다. < 오발탄 > 도 같은 맥락에서 야심차게 개봉되었으나 성적은 처참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개봉 첫 주 주말이었는 데도 극장 로비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서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은 서너 명이 전부였다. 영화를 상영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많이 남아 있던 터라,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영화 관련 서적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 오발탄 보러 오셨나 보오 ? "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백발의 노신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맙소사, 유현목 감독이었다 ! 그것은 마치 팀 버튼이 만든 영화 < 에드 우드 > 에서 영화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선정된 에드 우드'가 세계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감독 중 한 사람이었던 오손 웰스를 만나는 장면과 유사했다. 내가 깜짝 놀라서 눈이 휘동그레졌더니 노신사는 방그레 웃으며 " 내가 누군지 아십니까 ? " 라고 말했다. 우리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그 자리에 앉아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이 누가 이런 늙은 영화를 보냐며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 말투에는 섭섭함도 감지되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러 와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상영관 안으로 사라졌다. 그 이후 이 영화는 내가 한국 영화를 평가할 때 항상 베스트 넘버 원'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나는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마다 극장 로비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던 에피소드도 함께 곁들여서 말하고는 했다. 이 영화에 비하면 임권택의 < 서편제 > 따위는 " 그지 " 같은 영화였다. 그런데 김기영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유현목 감독님에게는 미안한 소리이지만 말이다. 그 영화가 바로 < 하녀 > 시리즈'였다. 김기영 감독은 1960년에 < 하녀 > 를 만들고 나서, 1971년도에 같은 내용을 리메이크한 < 화녀 > 를 만들었고, 1982년에는 < 화녀 82 > 를 내놓았다.
그는 정확히 11년에 한 번씩 자신이 만든 영화를 다시 만들었다. 이 시리즈는 각각 11년이라는 터울이 있었기 때문에 당대의 변화를 엿볼 수 있어 소중한 작품이다. 예를 들면 1960년에 만들어진 < 하녀 > 는 달걀을 " 닭알 " 이라고 말하는데 71과 82년에 만들어진 영화에서는 " 계란 " 이라고 표현한다. 에그그, 닭알이라 ! 시대마다 유행하는 상품이 있듯이 언어도 그 과정 속에서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겪는다. 옛날 신문 자료를 살펴볼 수 있는 서비스 기능을 통해 살펴보니 " 닭알 " 이라는 낱말은 50년대까지는 흔히 사용되는 일상어'였다. 그러다가 7,80년대 들어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 닭알 > 은 지금도 북한과 남한에서 가끔 쓰이기는 하는데 구조는 사뭇 다르다고 한다.
조사해 보니 : 달걀을 북녘에서는 ‘닭알’로 쓴다. 발음은 [달갈]이다. 달걀과 닭알은 남북 두루 쓰던 말인데, 각각 다른 말을 쓰게 됐다. 두 낱말은 같은 뜻이지만, 구조가 다르다. 닭알은 ‘닭’과 ‘알’이 합쳤지만, 달걀은 ‘닭의 알’이다. ( 한겨레, 사설 中 )
김기영 감독은 한국적 스타일'을 가장 빨리 내다버린 감독'이었다. 문예 영화를 중심으로 리얼리즘을 추구하던 당대의 경향을 김기영은 < 하녀 > 를 통해 전복시킨다. 김기영 감독은 애초에 자신이 만든 영화를 사실적으로 보이게 만들려는(철학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이음매 없는 매듭) " 그럴싸한 " 욕망이 없었다. 그는 도덕적 기준을 통과한 안전한 욕망보다는 불온한 욕망이 더 끌렸지만 이 불온한 욕망을 재현하기에는 당대의 검열이 가지고 있는 진입 장벽은 견고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텍스트를 모호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김기영은 욕망을 리얼하게 만드는 대신 욕망을 초월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논리 대신 비논리'를 선택해서 행동과 원인이 억지스럽다. 관객을 웃게 만드는 힘은 바로 비논리적 막장 드라마'에 있다.
욕망( desier)과 요구(needs)가 지나치게 과잉되다 보니 이 불온성은 위험하기보다는 어이가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다 보니 검열관은 이 영화가 위험한 영화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화를 낼 수 있는 영화는 위험한 영화이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욕을 할 수 있는 영화는 안전한 영화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검열관은 이 영화를 욕하면서 보았다. 그들이 보기에 < 하녀 > 는 단순하게 그냥 미친년'이 등장하는 막장 영화'였다. " 아내의 유혹 " 이전에 " 하녀의 유혹 " 이 있었다. 하지만 김기영표 막장 드라마를 임성한 막장 드라마와 혼동하면 안 된다. 임성한 드라마는 < 막장 > 이 아니라 < 망작 > 이다. 김기영 감독의 " 하녀 시리즈 " 를 위대하게 만드는 이유는 막장이 가지고 있는 품격 때문이다.
영화 < 하녀 > 에서 피아노 작업실을 창밖에서 잡는 구도는 히치콕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 열악한 충무로 환경을 생각하면 기적에 가깝다. 이 영화를 임상수 감독이 최고의 장비와 스텝 그리고 칸느의 여인 전도연과 몸값 비싼 배우를 이끌고 리메이크했다. 결과는 ? 개똥 같은 영화가 탄생했다.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은 최고였지만 결과는 최악이었다. 파격적이지도 않았고 으스스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깐느의 여인인 전도현은 하녀가 아니라 지나치게 똑똑하고 도도했다. 전도현이 하녀로 발탁되는 순간 영화는 이미 망한 영화가 되었다. 반면 오리지날 < 하녀 / 1960 > 에서 식모로 등장하는 이은심이라는 배우는 독특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릴 때는 정말 기괴하게 보인다.
그녀는 뻔뻔함과 악랄함으로 행복한 가족을 파멸로 이끌지만 이 캐릭터가 전혀 밉지 않다. 주인댁 갓난애를 죽이고, 아들도 죽이고, 자신을 겁탈하려는 직업소개소 남자도 죽이고, 주인도 죽인 팜므파탈이지만 묘하게 끌리는 매력이 있다. 그녀는 전형적인 팜므파탈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백치 아다다처럼 어리숙하다. 하지만 지독하다. 下女는 계급적 층위로 보자면 가장 밑바닥 계층인 불가촉 천민'에 예속되어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노예의 삶을 벗어나 반란을 꿈꾼다. 그것은 계급 투쟁이다. 그녀가 차지하고 싶은 것은 주인댁 남편이라기보다는 주인댁 꼭대기 상층上層'이다. 그녀는 피아노가 있는 2층 작업실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지랄을 하지만 결국에는 주인의 다리에 매달린 채 계단에 머리를 박으며 계단 밑으로 끌려나온다. 영화 속 악당이 처참하게 죽는 꼴은 수없이 보아왔지만 이렇게 창의적으로 죽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바짓가랑이에 매달려서 머리를 바닥에 짓이기며 끌려나오다니.......
이 막장 이야기가 임성한 식 막장과 차원이 다른 이유는 간단하다. 임성한 드라마는 욕하면서 보지만 김기영 영화는 욕하면서 감동한다. 보다 보면 욕정이 생긴다. 그 욕정(欲)이 아니라 이 욕정 (辱 : 욕할 욕) 말이다. 당신은 어느 순간 하녀를 응원하게 된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닭을, 식은 밥으로 막걸리를 만들 수 있는, 쥐를 손으로 잡고 빙빙 돌릴 수 있는, 통닭을 뜯으며 서러워서 우는 그녀는 볼 수 있다. 울면서도 통닭 앞에서는 침이 고이는 이 촌닭은 악랄할수록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