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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 집의 공간과 풍경은 어떻게 달라져 왔을까
전남일 지음 / 돌베개 / 2015년 12월
평점 :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만남의 광장
소설가 김영하 씨가 멜로드라마'라는 장르'를 설명하면서 내린 명쾌한 결론 : 멜로는 엇갈림의 서사다. 엇갈리지 않고 오다가다 다 만나면 그건 텔레토비지 멜로가 아니다. 멜로는 시간, 공간, 벡터(방향)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물리적으로 달라야만 성립한다.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만날 듯 만날 듯하면서도 만나지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빠르거나 느리다.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거 왠만하면 좀 만나게 해주지. 이런 생각이 절로 들어야 멜로는 굴러간다. 벡터가 엇갈리는 사랑도 시간과 공간이 엇갈리는 사랑만큼이나 서글프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그녀를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즉, 시선의 방향이 다를 때, 우리의 안타까움은 배가 된다. 이 벡터의 엇갈림을 다른 말로 하자면 삼각관계일 것이다(김영하 < 굴비낚시 > 엇갈림 중)
이 문장 읽었을 때 아아, 했다. 멜로'에 대하여 이보다 명쾌한 정의'는 없다. 멜로는 " 삑사리의 미학 " 인 것이다. 감독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놓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벡터'가 서로 어긋나게 만들기 위해서 < 거리(실외) > 를 활용한다. 반면, 공포영화는 대체로 < 집(실내) > 를 활용한다. " 멜로 " 가 시간, 공간, 벡터가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장르라면, " 공포 " 는 세 가지 요소'가 같은 방향으로 모아지는 장르이다. ① 살인마를 피해 숨은 곳이 하필이면 살인마가 살고 있는 집이며, ② 우여곡절 끝에 공포의 집'에서 도망쳐서 지나가는 차를 얻어탄다는 것이 살인마가 운전하는 차량이며, ③ 간신히 도망쳐서 경찰차에 오르면 살인마가 경찰 복장을 하고 있다는 설정에 그만...... 뭐, 항상 이런 식'이다. 즉, 텔레토비의 성인 버전이 공포영화이고, 공포영화의 유치원 버전이 텔레토비인 것이다 ㅡ 라고 말하면 욕먹겠지 ?
지정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멜로는 < 어긋난 거리 > 에 방점을 찍고, 공포는 < 이놈의 집구석 > 에 방점을 찍는다. 전자는 < 교차로 > 이고 후자는 < 만남의 광장(집) > 인 셈이다. 그렇기에 공포 영화 제목 중 상당수가 < house of~ > 인 것이다. 그렇다면 집은 왜 공포의 살육장(or 뮤즈)이 되었을까 ? 프로이트'가 주목한 것은 < 친숙함 > 과 < 기괴함 > 의 동일성'이었다. 그는 친숙한 감정 속에 내재된 기괴함을 설명하기 위해서 << 언캐니 1)>> 개념을 끌어들인다. 영어 un-canny의 독일어'인 un-heimlich'에서 un-은 접두사로 형용사, 부사, 명사에 붙어서 " 반대, 부정 " 을 뜻한다. 우선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heimlich의 뜻을 알아야 한다. < heim > 은 영어로 < house > 다. 이 세상에 집'보다 편한 곳은 없다.
그래서 heimlich 은 " 편안함, 익숙한, 친숙한 " 이라는 뜻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접두사 un-이 붙어서 < 기괴한 > , < 두려우면서 동시에 낯선 ( 것, 곳 ) > , < 악마적이면서 소름끼치는 것(곳) > 으로 확장된다. 그러니깐 heimlich와 unheimlich는 서로 상극이다. 반대말이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heimlich 는 편안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 알 수 없는 > , < 위험한 > 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 두 단어'는 반대말이면서 비슷한 말'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는 반의어/反義語는 곧 동의어/同義語'라는 사실을 유추해 낸다. < 反 = 同 > 라는 황당한 공식'을 주장한다. uncanny와 canny는 같은 뿌리다 ! 로보트'를 바라보는 현대인의 심리'는 정확히 " 언캐니 " 개념과 부합한다.
인간을 닮은 초기 로보트 아시모'를 볼 때 사람들은 이 로보트에 깊은 호감'을 드러낸다. 하하하, 호호호. 여기서 사람들이 이 로보트'에게 호감을 보이는 이유는 인간 흉내를 내는 로보트'가 장난감처럼 어설프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 로보트의 외양이 점점 인간을 닮아가면 갈수록 호감은 급격하게 불쾌함'으로 변한다. 그리고 인간과 로보트의 구별이 모호해지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실사 인형'이다. 인간과 똑같이 생긴 인형은 어딘지 모르게 불길하다. 바로 이 감정이 언캐니'다. 우리가 인간을 닮은 로봇이나 인형에게서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매우 익숙한 얼굴이기 때문에 그렇다. 기괴함'이라는 심리 상태의 중심에는 " 익숙한 " 이 자리잡듯이 말이다.
우리가 귀신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귀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더 나아가 그 귀신은 내가 알던 사람일 때가 더 무섭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귀신은 " 엄마 귀신 " 이 아닐까 ? 엄마'가 " 내가 니 엄마로 보이니 ? " 라고 말할 때 우리는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만다. 다스베이더가 아들에게 " 내가 니 애비다 " 라고 말하는 고해성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공교롭게도 < 엄마 > 는 안방마님2)이자 집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housekeeper라는 점에서 unheimlich(uncanny)한 존재'인 것이다. 영화 << 사이코 >> 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남자'이지만, 그를 조종하는 주체는 죽은 어머니'이다. 그녀는 죽은 후에도 집(베이츠 모텔)을 지배한다. 이러한 구조는 영화 << 13일 밤의 금요일 >> 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여성과 집'은 합일체'다 !
내가 공포영화라는 장르에 내린 결론은 : 공포는 만남의 서사다. 엇갈리지 않고 오다가다 다 만나면 그건 멜로가 아니라 공포이다. 공포는 시간, 공간, 벡터(방향)이 세 가지가 모두 물리적으로 동일해야만 성립한다. 공포영화 주인공들은 어긋날 듯 어긋날 듯하면서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빠르거나 느리다.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거 왠만하면 좀 벗어나게 해주지. 이런 생각이 절로 들어야 공포'는 굴러간다.
지정학3)적 관점에서 보자면 공포의 집은 여성'을 억압한 결과'이다. 집은 여성 노동'이 집약된 장소이지만 교묘하게도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다. 건축학자이자 가톨릭대학교 소비자주거학 전공 교수인 전남일'이 쓴 << 집 >> 은 집구석을 집 안 구석, 꼼꼼하게 관찰한 보고'다. 그는 집이 근대에서 현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집 구조가 어떻게 변화했는가에 주목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여성 노동의 결정체인 집이 사실은 남성 편의'를 위해 설계되었다는 점을 폭로한다. < 그 > 는 여성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부엌이 사실은 노동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에 매우 불편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전통 주택에서 부엌은 부뚜막을 사용하여 조리와 난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 구조상 바닥이 다른 공간보다 내려가 있었다. 부뚜막의 높이는 부엌일을 하기에는 너무 낮았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면 쪼그리고 앉아야 하는 구조여서 매우 불편했다. 게다가 흙바닥에 환기와 통풍이 잘되지 않는 어둡고 비위생적인 공간이었다. 상하수도 설비가 없었고 장독대 등 저장 음식을 두는 곳도 외부에 있어서 일하는 사람들은 부엌의 문턱을 넘어서 마당으로 항상 바쁘게 오가야 했기 때문에 가사 작업은 매우 고되었다. 겨울에는 특히 늘 문을 열어놓아 무척 추웠다. 또한 좌식으로 밥상을 사용하고 그것을 따로따로 차려 방에서 식사를 하는 문화는 여성의 노동을 전제로 했기에 가능했다. 보통 전통 한옥에서의 동선은 부엌을 나와서 마당을 지나 대청을 거쳐서야 방에 이르도록 되어 있었다. 때문에 음식을 조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밥상에 올려 높은 문지방을 넘고 대청에 올라 방마다 나르는 일은 보통 고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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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의 부엌이 불편한 이유는 간단하다. 남성이 < 여성 가사 노동 > 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다는 데 있다. 한국 남성은 여성 가사 노동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부엌에서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외면한 채 오로지 밥상 위에 펼쳐진 집밥에 대한 향수만 간직한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안사람, 집사람, 어멈, 아내 따위는 모두 < 집 > 이라는 공간과 여성을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한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정작 집 구조는 남성 편의 중심으로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남성은 " 정무적 판단 " 에 의해 부엌에서의 잡다한 노동을 " 컷 오프 " 한다. 알고 싶지도 않다. 부뚜막 높이가 낮든 환기가 안 되든, 그것은 자신이 관여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이 하는 일이라고는 방 안에서 다 된 밥에 숟가락 하나 얹는 게 고작이거나 " 마디꾸나 " 라는 말로 집밥을 평가하는 게 고작이다.
내가 " 집밥에 대한 향수 " 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집밥이라는 정서 속에 감춰진 여성 노동'에 있다. 과정은 생략한 채 결과만 인식한 꼴이다. 본래 < 부엌 > 은 불(火)과 섶이 합쳐진 말이라고 한다. 불섶 - 부섶 - 부엎 - 부엌으로 변했다. 여기서 < 섶 > 은 땔나무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부엌은 불 때는 나무 - 불 때는 곳 - 아궁이 - 음식 만드는 곳'이 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주장으로는 아궁이가 타밀어4)인 아그니(agni)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아그니는 힌두교 신들 중 하나로 불을 관장하는 신'이다. 종합하면 부엌의 핵심은 아궁이'다. 한여름에는 더위와 싸우고 한겨울에는 추위와 싸우는 곳이 바로 부엌인 셈이다. 왜 남자들은 불편한 부엌 구조를 외면했을까 ? 부엌은 칼과 물 그리고 불을 다루는 장소'다. 신기한 일이다.
가장 날카로운 무기와 서늘함으로 가장 따스한 밥을 만들어내는 < 곳 > 이니 말이다 ■
1) uncanny, 독일어로는unheimlich이다.
2) 구어로 아내를 안방마님이라고 한다면, 남편은 바깥주인'이라고 부른다. 집은 온전히 " 여성 " 인 셈이다.
3) 지정학(地政學) : [명사] <정치> 정치 현상과 지리적 조건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 나치스의 영토 확장 전략으로 이용되었다.
4) 타밀어가 한국어와 유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쌀은 쏘르, 뉘는 넬, 벼는 비어, 모는 무디, 낱알은 낟뚜르'로 발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