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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 boy .

 

 

 

 

 

 

 

 

 

 

 

 

 

 

 

 

 

 

 

현대인은 편리한 것을 문화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불편한 것을 야만적인 것으로 규

정한다. 레비스트로스'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 너나 잘하세요 ! " 라고 말한 모양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그러한 업신여김은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다. ( 레비스트로스와 사르트르의 논쟁은 유명하다.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엔 인간은 역사의 의해 진보한다는 사르트로의 논리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 말은 결국 원시사회'는 미개하다는 논리가 아닌가 ? 그래서 대판 싸운 모양이다. 싸움에 승패가 어디 있는가마는, 그래도 상처 입은 사람은 사르트르인 것 같다. ) 그는 < 야생의 사고 > 와 < 신화학 > 을 통해서 원시사회가 매우 치밀하게 짜여진 토템 사회'라는 것을 밝혀낸다.

 

레비스트로스는 " 오이디푸스 신화 " 를 설명하면서 근친상간과 수수께끼의 공통점은 서로 분리되어야 할 것들이 결합한 형태라고 말한다. 근친상간은 사회의 규범에 의하면 서로 분리된 채로 있어야 하는 것들의 결합이고, 수수께끼'는 결코 답이 연결되지 않는 물음'이 이상한 방식으로 결합한 것이다. 그러니깐 근친상간은 수수께끼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수수께끼'란 사실 답이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다. 우리가 수수께끼'를 우스갯거리'로 치부하는 이유는 질문과 답 모두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이 둘은 결코 짝이 아니다. 그런데 억지로 결합시키는 꼴이다. 그런데 신화의 기본 속성은 이렇게 서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들의 결합이다. 예를 들면 나무 위의 새둥지를 보았더니 곰이 잠을 자고 있더라는 식이다. 엉뚱하다. 하지만 엉뚱하지 않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엉뚱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성적 사고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성적 사고에 길들어진 현대인에게 야생적 사고'도 함께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곁가지 없이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자.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어머니와 섹스를 한다면, 오대수는 자신의 딸과 섹스를 한다. 이 금기를 깨는 사건이 발생한 시점이 오이디푸스는 아들/boy'이었을 때이고, 오대수는 아버지/old'였을 때이다. 영화 제목 < old / boy > 는 근친상간을 저지른 아버지와 근친상간을 저지른 아들'에 대한 은유라 할 만하다. 영화 올드보이'는 오이디푸스 번안근이다.  

 

개인적으로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여왕 이오카스테와 스핑크스의 관계이다. 우선 이우진의 정체는 무엇일까 ? 유지태가 연기한 이우진 말이다. 유지태는 소포클레스의 < 오이디푸스왕 > 에 나오는 스핑크스'를 닮았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최민식'이다. 유지태는 최민식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묻는 말에 대답하세요. " 이보세요, 오대수 씨 ! 15년 동안 감금된 이유에 앞서 15년 만에 풀어준 이유가 더 궁금하지 않습니까 ? " 그는 끊임없이 오대수에게 질문을 퍼붓는다. 마치 길손들 앞을 막고는 " 아침에는 네 개의 발로, 점심에는 두 개의 발로, 그리고 저녁에는 세 개의 발로 걸어다니는 짐승은 무엇인가요 ? " 라고 묻는 친절한 스핑크스 씨'처럼 말이다.

 

스핑크스의 어원은 괄약근'이다. 똥구멍 괴물'이다. asshole ! 이다. 별별 괴물은 다 들어봤어도 똥구멍 괴물'은 처음 들어보았을 것이다. 똥구멍을 살짝 먹물 꼰대 언어'로 바꾸자. 그렇다. 항문이다. 여기에 일정한 기간을 의미하는 " ~기 " 가 합쳐지면 그 유명한 프로이트의 < 항문기 > 가 된다. " 항문기 " 란 무엇인가 ? 똥을 눌 때 쾌락을 얻는 단계로 주로 언어'를 배우기 전인, 사회화 전 단계인 꼬마를 말한다. 이때 똥구멍과 가장 밀접한 주변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엄마'다. 엄마는 아이'의 똥구멍을 관장한다. 엄마는 배변 습관, 청결을 집중적으로 교육한다. 엄마는 말한다. " 이제부터 너의 똥구멍은 엄마가 감시한다. 똥 누면 잘 닦어 ! 소처럼 엉덩이에 똥딱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엉덩짝을 차 버릴 테니깐 ! 알았니 ? " 스핑크스의 주체는 바로 엄마, The Mother 이다. < 스핑크스 = 엄마 > 다.

 

지나친 해석이 아니다. 엉뚱한 해석이 아니다. 소포클레스의 < 오이디푸스 왕 > 을 보면 오이디푸스의 엄마인 이오카스테 여왕'은 스핑크스는 같은 운명을 가진 도플갱어'처럼 보인다. 둘은 모두 아들 오이디푸스의 " 근친상간 " 이 실패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계획을 세운다. 아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실패로 끝나자 둘 다 자살을 선택한다. ( 엄마인 이오카스테는 스핑크스'로 변신하여 아들의 신탁을 막으려는 계획이 실패하자 자살을 한다. ) 이우진은 아이를 돌보는 엄마처럼 최민식을 보살핀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씻겨준다. 또한 그는 최민식에게 수수께끼'를 던지는 인물이다. 이 운명의 싱크로'는 비극적 결말에서도 동일하다. 아들인 최민식이 모든 비밀을 알자 그는 비로소 스스로 자살을 선택한다.

 

1. 영화에서는 이우진과 이수아'는 남매'로 나온다. 하지만 사실 이 두 인물은 한 사람'이다. 학교 과학실에서 남매가 섹스를 할 때 수진은 자신의 거울을 보며 즐기는데 이 장면은 명백한 나르시즘'을 뜻한다. 거울보다 명징한 나르시즘의 상징적 오브제가 어디에 있는가. 나르시즘은 곧 셀프 퍽, 자위'로 이어진다. 최민식이 바라본 것은 남매의 섹스가 아니라 엄마의 자위'이다. 엄마는 아들에게 자위 행위를 들킨다. 이수아가 오이디푸스의 엄마인 이오카스테라면, 이우진은 이오카스테의 하수인인 스핑크스가 된다. 그녀의 이름 수아'는 秀我'다.

 

2. 스핑크스 질문에 대한 도발적 해석 : 아침에는 다리가 네 개이고, 점심에는 다리가 두 개이며, 저녁에는 세 개인 짐승은 ? 정답은 인간이다. 여기서 저녁은 인간의 늙음을 의미하며 다리가 세 개인 이유는 지팡이에 의지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이 신화적 해법이 영 못마땅하다. 아침은 구순기이고, 점심은 항문기이며, 저녁은 남근기이다. 저녁에 다리가 세 개인 이유는 남근의 발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가 이 질문의 정답을 알았다는 사실은 이미 오이디푸스가 아이를 떠나서 남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의 페니스는 이제 단단해졌다.

 

다소 어렵겠지만 < 항문기 > 로 돌아오자. 프로이트는 성욕의 발달 과정을 구순기 - 항문기 - 남근기'로 구별하였다. 항문기는 언어를 습득하기 전까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언어를 배우는 순간 아이는 똥을 쌀 때 오르가슴을 경험하는 그런 천박한 시기를 떠나 본격적으로 사회화 과정을 배우게 된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아이가 사회로 진입하였다는 명징한 징후인 것이다. 영화 < 올드 보이 > 에서 최민식은 스스로 혀/tongue'를 자른다. 여기서 tongue'는 혀'라는 신체 부위를 지시하기도 하지만 " 언어 " 라는 뜻도 내표하고 있다. 결국 최민식이 혀를 자른다는 것은 언어'를 거부하겠다는 태도이다. 이처럼 언어'를 거부한다는 것은 그가 영원히 항문기 이후의 과정으로 진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지 않겠다는 것.

 

여기서 남근기란 성기 중심의 쾌락을 의미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남근기 때 시작된다고 한다. 최민식이 남근기를 거부하고 항문기에 머무른다는 사실은 결국 영원한 오이디푸스 금지'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영화 < 올드보이 > 는 생각보다 풍부한 텍스트를 보여준다. 흥미, 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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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사회와 그 적들. 

 

 

 

 

 

 

 

 

 

 

 

 

 

 

현대인은 편리한 것을 문화적인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불편한 것은 곧 야만스러운 것으로 정의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울리히 벡'은 기술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현대 문명 사회'가 역설적으로 불완전한 사회'라고 주장한다. 좋은 예'가 전기 공급의 차단이다. 만약에 문명 도시에 전기 공급이 한 달 간 중단된다면 어떻게 될까 ? 아비규환이 따로 없을 것이다. 당장 물을 퍼올리는 펌프가 멈추게 되면 지하철에 물이 넘치게 된다. 대한민국 부의 상징인 타워팰리스의 화장실은 어떻게 될까 ? 똥이 둥둥 떠다닐 것이다. 그 아비규환의 세계'를 주제 사마라구는 < 눈 먼 자들의 도시 > 에서 생생하게 묘사한 바'가 있다. 초고층 빌딩은 현대 최첨단 기술의 총합이지만 그 총합의 부피만큼 재난의 사이즈도 거대해진다. 초가집이 불타면 지붕만 타지만 타워가 불타면 모두가 죽는다. 울리히 벡'은 이러한 기술 사회'를 경계해야 된다고 말한다. 방법은 딱히 없다. 편리함을 조심씩 버리고 불편함을 서서히 받아들이는 것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학서의 필독서다. 일독을 권한다.

 

 

 


 

 

 다이하드.

 

 

 

<나카토미 빌딩’> 은 하이테크 신기술로 지어진 일종의 <바벨탑> 이다. 방재와 보안이 완벽한 빌딩은 오히려 그 이유로 인하여 경찰의 빌딩 내 투입이 거부된다. 완벽한 보안 경비 시스템이 오히려 재앙을 부른 꼴이다. 만약에 이 영화의 무대가 지은 지 50년이 지난 재개발 은마 아파트에서 벌어졌다면 테러리스트들은 쉽게 소탕되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완벽한 보안 시스템은 오히려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존 맥클레인 형사가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디지털 장비가 아닌 아날로그 장비때문이었다. 그가 가진 최고의 무기는 권총도 아니고, 컴퓨터도 아니며, 위치추적장치도 아니고, 목소리인식시스템도 아니다. 그것은 낡은 <무전기> 였다. 이영화는 일종의 무기판 <다윗과골리앗의싸움>이다. 첨단 무기 대 한물간 무전기의 격돌인 셈이다.

존 맥클레인 형사에게 있어서 이 무전기는 일종의 검은 안락의자와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정신과 상담을 받을 때 눕던 그 환자용 안락의자 말이다. 그는 끊임없이 밖의 수호천사와 소통을 함으로써 외로움을 견디며 자신의 상실을 치유한다. ( 빌딩 밖에서 순찰을 하던 흑인 형사는 백인 형사의 멘토이자 멘티이다. 그들은 모두간댕거리는자지를소유한 거세 직전의 불쌍한 형사들이다. 흑인 형사 알 파웰은 실수로 13살 소년을 쏘아 죽인 후, 더 이상 권총/페니스를 발사/사정하지 못한다. 그 또한 거세 직전의 형사다 ! 이들 짝패는 서로의 멘토와 멘티가 되어서 서로를 위로한다. 사실 존과 홀리의 화해의 포옹보다는 존과 알의 포옹이 더 감동적이다. )

무전기라는 상징성이 말하듯, 존 맥클레인 형사5,60년대 포드주의에 대한 향수를 대표하는 노동자 인물이다. ( 그는 오로지 육체의 힘으로만 상대를 제압한다. ) 이 영화는 자본과 기술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반영된 작품이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기술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재앙의 리스크도 높아진다고 경고한다. 최첨단 기술이 접목된 고층 빌딩일수록 화재에 인한 재난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단독주택 화재와 63빌딩에서의 화재를 떠올려 보라. 디지털 시대도 마찬가지다. 해킹에 의한 금융 전산망과 기계 오작동은 자칫하면 엄청난 재난을 초래한다. 이제는전기가 며칠만 끊겨도 국가 전체가 멈추게 된다. 사람들은 더위나 추위에 죽을 것이고, 냉장고는 음식들의 시체보관소가 될 것이며, 하루 종일 물을 끌어올리는 지하 펌프가 멈추면 지하철은 물바다가 될 것이다.

이처럼 기술의 발전은 영화 속 나카토미 빌딩처럼 보다 완벽한 방재와 보안 시스템이 최악의 조건을 만들 수도 있다. 기술의 발전은 위험을 증가시킬 뿐이다. 오히려 가장 안전한 것은 디지털이 아니라 똑딱이 버튼이 달린 아날로그. 더 나아가 맨손이다, 맨발이다. 어쩌면 인류의 희망은 아이폰 따위의 기술이 아니라 존 맥클레인 형사의 씩씩한 맨발처럼, 단순한 자전거가 세상을 구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 ?

사람들은 <아이폰> 이 세상을 변화시켰다고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그런 소릴 할 때마다 나의 페니스보다는 2배 작은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며 엿먹어라, 를 외치고 싶다.클린턴이 부시에게멍청아, 문제는 경제야! “라고 말했던 것처럼,나 또한 이렇게 말하고 싶다. “ 멍청아, 문제는 하이테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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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라는 숫자.

 

 

 

 

 

 

 

 

 

 

 

1.  멜로는 엇갈림의 서사다. 엇갈리지 않고 오다가다 다 만나면 그건 텔레토비지멜로가 아니다. 멜로는 시간, 공간, 벡터,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물리적으로 달라야만 성립한다......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만날 듯 만날 듯하면서도 만나지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빠르거나 느리다.

-김영하의 영화이야기

 

2.   나를 빈방으로 끌고 들어가는 여백이 고맙다고, 청파에는 골목이 많고 골목이 많아 가로등도 많고 가로등이 많아 밤도 많다고, 조선낫 조선무 조선간장 조선대파처럼 조선이 들어가는 이름치고 만만한 것은 하나 없다고, 북방의 굿에는 옷(衣)이 들고 남쪽의 굿에는 노래가 든다고
 

- 당신이라는 세상, 부분

 

3.   <철도원>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 중에서 '철도원'과 '러브 레터' 두 편이 영화화되었고, '츠노하즈에서'와 '백중맞이'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되었는데, 이는 나오키 상 제정 이래 최초이자, 단일 소설집으로는 가장 많은 작품들이 영상화된 이례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영화 「철도원」은 99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된다.

 

- 출판사 소개글, 부분

 

 


 

 

김영하'는 멜로'를 어긋남의 서사'라고 말했다. 오고가다 다 만나면 그것은 텔레토비'이지, 멜로 영화'가 아니라고 말이다. 강재'는 변두리 바닥 깡패'다. 조직이 운영하는 비디오 가게 영업장을 관리'하는, 30대 중반의 넘버 3'다. 자신의 동료는 조직 오야붕이 되어 있고, 자신은 새파랗게 어린 후배들에게도 치이는 꼬붕 아닌 꼬붕이 되었다. 아귀다툼 속 변두리 깡패들의 바닥'을 보고 있자니 " 조선낫 조선무 조선간장 조선대파처럼 조선이 들어가는 이름치고 만만한 것은 하나 없다 "는 어느 젊은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한때 조선이었던 이 나라는 여전히 살아가는 데 팍팍하다. 아라비아 숫자 3은 묘하게 비루한 느낌을 준다. 3은 그 어느 영역으로도 속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경계'이다. 12시 정오와 6시 저녁 사이이며, 청년과 노년 사이'이다. 강재... 그는 딱 숫자 3 같은 존재이다. 그렇게 끼인 존재이다. 점심이라고 하기에는 늦고, 저녁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오후 3시의 짜장면처럼 초라한 강재는 깡패라고 하기에는 여리고, 여리다고 하기에는 폭력적인 인물이다.

 

 

중국 여자 파이란은 그린 카드를 위해 강재와 결혼을 한다. 위장 결혼'이다. 하지만 강재에게 파이란'은 아내이면서 동시에 아내가 아니다. 그는 기혼이면서 동시에 미혼이다. 그들 법적 부부는 단 한 번의 엇갈림이 있었을 뿐, 서로 마주친 적이 없다. < 파이란 > 이란 영화를 다시 보다가 문득 내가 강재의 입장에서 서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파이란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난 파이란의 시선으로 강재를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사내 새끼'가 강재를 안쓰러워 하다니......

 

 

 

몇 년 전, 도망치다시피 집을 떠나 강원도 속초에 머물렀었다. 영화 속 파이란처럼 그곳에서 1년을 혼자 버텼다. 춥고 배 고팠다. 첫눈에 반한 여자와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0년 연애 끝에 헤어졌다. 첫눈에 반했던 그 여자 생각을 하며 동명항 방파제 앞 가게에서 밖을 바라보면 대설 특보'가 내려진 방파제가 보였다. 첫눈에 반한 여자와 폭설이라...... 어쩌면 나는 그 유배지'에서 파이란처럼 헤어진 정인'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강재처럼 저렇게 방파제에서 통곡 한 적이 있다. 노무현의 노제'를 다녀와서 동명항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방파제에 앉아서 통곡을 했다. 비단 노무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 영화 속 파이란의 손끝, 파란 정맥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오늘, 약속이 있었으나 계속 잠만 잤다. 잠을 자면서 꿈속에서 결정을 했다. 오랜 고민이었다. 결정을 하고 나니 환해졌다. 최승자 시인의 시'처럼, 터널은 끝에 가서야 환해진다.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용서하기로 했다. 끝에 가서야 환해진다는 시인의 말, 요즘 계속 생선 가시'처럼 걸려 있다.

 

 

 

 

 

 

 

http://myperu.blog.me/20150522526 : 파이란, 결이 좋은 나무를 잃었다.

http://myperu.blog.me/20152896891 : 파이란, 동명항 방파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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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편지......

 

 

 

 

 

 

 

 

 

 

 

 

 

 

 

 

 

 

포우의 < 도둑 맞은 편지 > 와 이언 매큐언의 < 속죄 > 의 공통점'은 편지'가 사건의 열쇠로 등장한다는 점일 것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편지 때문에 개고생을 한다. < 도둑 맞은 편지 > 는 편지의 수신인이 여왕의 정부가 아닌 여왕의 정적의 손에 들어간 경우이고, < 속죄 > 는 정상적인 편지지 대신 엉뚱한 편지지'가 편지봉투에 들어간 경우이다. 둘 다 자기 자리가 아니다. 어긋난 것이다. 이 어긋남은 소동'을 만들어낸다. 소설가 김영하가 지적했듯이 모든 멜로'는 엇갈림의 미학이다.

 

 


 

 

 

 

건축의 기본은 < 집 > 을 짓는 일이다. 집의 탄생은 곧 내부와 외부'를 창조한다. 허허벌판이었을 때는 오직 < 밖 > 의 영역으로만 존재하던 터가 집이 만들어지는 순간 < 안 > 이 된다. 이처럼 안과 밖의 경계는 건축 구조물의 탄생과 맥을 같이 한다. 건축의 원리'를 가만히 살펴보면 집은 하나의 유기체적 머리'와 비슷하다. 집은 잘린 머리의 은유다. 문은 입이요, 항문이다. 그리고 창문은 눈의 역할을 한다. 영화 건축학 개론'은 집을 짓는다는 행위'를 통해서 첫사랑의 트라우마'를 치유한다. 사실 < 건축학 개론 > 은 < 정신상담학 개론 > 이라고 해야 한다.

 

 

최초의 건축 설계도는 엉터리'다. 집을 완성할 수는 있으나 좋은 집'을 얻을 수는 없다. 이 흠'을 방치하면 금'이 갈 것이고, 금의 깊이가 더해지면 거친 바람에 집은 무너질 것이다. 설계 변경'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설계 " 하자 " 를 첫사랑에 대한 실패'로 이해하자. 사랑의 설계도'는 완벽하지 못했다. 작은 오해 때문에 결국은 둘의 사랑에 금이 갔지 않은가. 사람 일이란 한 번 쏟아내면 담을 수 없는 법, 없던 일로 하고 다시 설계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어 부분 수정한다. 옛 건물의 기둥을 부수고 다시 짓는 방식이 아닌 그 기둥을 살려서 보강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서로에 대한 오해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남자는 드디어 튼튼한 집 한 채'를 짓는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끄덕없는 집이다.

 

 

멜로의 본질은 엇갈림'이다. 대부분의 연인들은 사소한 오해 때문에 헤어진다. 오고가던 편지'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오지 않을 때 연인들은 그것을 변심'으로 이해한다. 그 오해를 풀어줄 수 있는 열쇠는 오직 먼 훗날뿐이다. 이와이 슌지의 < 러브레터 > 에서 여자 주인공은 남자의 메시지'를 너무 늦게 발견한다. 송해성의 < 파이란 > 이나 이정국의 < 편지 > 에서도 사랑의 메시지는 죽은 후에 도착한다. 영화 < 건축학 개론 > 에서 한가인이 엄태웅에게 불쑥 내민 설계도'는 설계도'가 아니라 설계도의 형식을 빌린 편지'였다. 아주 오래 전, 노트에 그린 그 그림 편지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멜로 드라마'에서 편지'가 모두 과거와 현재를 화해시키지는 않는다. 포우의 < 도둑 맞은 편지 > 에서는 letter가 litter'가 되었을 때의 혼란을 다룬다. 편지를 훔친 장관은 편지/letter'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긴다. 왕비가 비밀리에 밀사(들)를 보내 장관의 집을 이 잡듯이 뒤지지만 편지를 찾을 수는 없었다. 장관은 이 편지를 어디에도 숨겼을까 ? 정답은 책상 위에 널브러진 편지함에 두었다. 왕비의 밀사들은 왕비의 목숨이 달린 중요한 letter가 litter로 둔갑되어 아무렇게나 방치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litter : 어수선하게 흩어진 물건, 잡동사니, 찌꺼기, 쓰레기, 난잡, 혼잡

 

 

장관은 편지/ LETTER'라는 단어를 잡동사니/ LITTER'로 둔갑시킨 것이다. 장관은 말 그대로 중요한 편지‘를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물건’으로 위장했다. 누가 보아도 그것은 잡동사니‘였으며, 구겨지고 찢어졌고, 더렵혀진 쓰레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뒤팽‘은 장관의 속임수를 단번에 간파한다. 뒤팽이 장관의 집을 방문하여 눈여겨본 것은 고급 양장의 편지 LETTER’가 아니라 더러운 편지 / LITTER'였다. 이렇듯 사물과 장소‘가 서로 엇나가면 소동’이 일어난다. < 도둑맞은 편지 >에서 편지는 편지의 수신자 혹은 발신자‘가 보관해야 하는데 제 3자인 장관’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배달 사고‘다 !

 

 

 

그런가 하면, 이언 맥큐언의 < 속죄 > 라는 소설 속에는 cunt'라는 단어가 전체 서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 편지를 쓰다가 갑자기 사랑 고백 편지‘로 빠진다. 그런데 그만 성적으로 흥분한 나머지 삐딱선을 탄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맨발로 너희 집을 활보하고 다니고, 그 오래된 꽃병을 깨뜨리기도 했으니 네가 날 미쳤다고 해도 난 할 말 없어. 사실 난 요즘 네가 있는 자리에서 자꾸 경솔한 행동을 하게 되고 ( 중략 ) .... 날 용서해주겠니 ? 꿈속에서 난 너의 보지에, 너의 그 부드럽고 젖은 보지에 키스를 해. 상상 속에서 난 하루 종일 너와 사랑을 나눠. "

 

이언 매큐언, 속죄 중

 

 

 

남자는 이 편지를 버리고 다시 정중하게 사과 편지‘를 쓴다. 그런데 사과 편지’를 편지봉투에 넣는다는 것이 그만 낙서처럼 쓴 음란한 편지‘를 넣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CUNT''라는 걸러지지 않은 단어가 쓰인 편지’가 그녀에게 도착한 것이다. 이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두 남녀’에게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소설 속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보낸 것은 letter가 아니라 litter'였던 셈이다. 편지란 이처럼 배달 사고'가 잦은 소통 도구'이다. 하지만 그것이 러브레터의 운명이기도 하다. 가장 아름다운 멜로'는 이와이 슌지의 < 러브레터 > 나 송해성의 < 파이란 > 처럼 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 때문이다. 그리고 위험을 무릅쓴 연서'는 두 사람의 사랑을 위험에 빠트리지만, 위험에 빠지면 빠질수록 그 사랑은 보다 더 운명적인 사랑으로 남는다. 편지의 힘'이다.

 

 

cunt에서 c, u, n 은 서로 닮았다. cunt는 보지'라는 뜻이지만, 인체해부학적으로 c,u,n 이라는 철자 또한 여성 질을 닮았다.

 

 

멜로 영화에서 편지'란 매력적인 오브제다. 누군가에게는 letter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litter가 된다. 사랑 편지 속 문장은 뛰어난 문필가의 문장보다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며 먼 훗날에 당신 앞에 한 통의 낡은 편지가 도착할 지도 모른다. 파란 잉크로 쓰여진 글씨가 눈물 때문에 번져 그 뜻을 알아볼 수 없다고 해도, 당신만은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무수한 글자 하나 하나'가 거대한 파란 얼룩으로 남는다고 해도 말이다. 눈물에 젖은 편지의 내용은 모두 하나다. 그리움이다. 파랗게 번진 모든 것은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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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 내가 한가인과 맥주를 마신 사연. http://myperu.blog.me/20156486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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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빠가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에서 가족이라는 키워드는 만병통치약'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가족이다. 뭔가 막힌다 싶으면 " 가족이잖아 ! " 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을 풀린다. 그래서 일일드라마'는 가족 이야기'가 끝날 줄을 모른다. 신경숙의 < 엄마를 부탁해 > 는 이명박 각하 시대의 불행이 엄마를 무시한 죄'라고 은연 중에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가족이 복원된다고 상황은 달라질까 ? 중요한 것은 가족이 아니라 계급이다. 그녀는 그것을 아주 철저하게 무시했다. 가족은 모든 것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이득재의 <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 는 제목 그대로 " 가족 신화 " 의 허구를 살벌하게 폭로한다. 그가 가족 주의의 병폐'에서 벗어나는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들뢰즈의 노마드 개념이다. 싸돌아다녀야 썩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니 말이다.

 

 


 

 

 

 

 

< 7번 방의 선물 > 이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동네 바보 용구'가 천만 관객을 울린 것이다. 흥행의 열쇠는 무엇이었을까 ? 중년의 남성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봇물을 이루었으니 " 부성애의 재발견 " 인 것은 확실하다. 이 영화를 본 그날의 가족 풍경이 눈에 선하다. 다 큰 자식들은 아빠'를 쇼파에 앉히고는 이런 율동을 선보였을 것이다. " 아빠, 힘 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 아빠, 힘 내세요. 우리가 있어요. " 참새처럼 글썽거리면서, 물개처럼 콧물을 훌쩍거리면서 부르는, 다 큰 딸은 커다란 가슴을 출렁거리고, 군대를 막 제대한 아들은 곰 같은 몸으로 촐랑거리면서, 아.... 이런 슬픈 가족의 풍경 !

 

 

그런데 < 가족의 재발견 > 은 용구 아빠'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 내내 우리는 " 엄마가 필요해 ! " 를 외쳤다. 그 촉매제'는 신경숙의 < 엄마를 부탁해 > 였다. 책만 보면 쳇 ! 이라며 혀를 끌끌 차던 사람들도 이 책은 사서 읽었다. 이 책의 서평 란에는 온통 눈물 바다'다. 종종 " 배송이 빨라서 좋아요 ! " 라는 이상한 감상평이 올라오기는 하나 주류는 엄마에게 잘하자, 이다. 그러니깐 이명박 정부는 엄마의 재발견으로 시작해서 아빠의 재발견'으로 끝나는, 매우 독특하며, 꽤나 신파적인, 일일 드라마 가족극에 충실한, 복고 취향의 정권'으로 기록될 것이다. 각하는 (기업)프렌들리'가 아니라 (가업)페밀리'적이다. 아마도 이명박이 욕심을 부려서 정권을 5년 더 연장했다면 오빠, 언니, 누나, 여동생은 물론이고 당숙에 당숙 조카의 재발견 시리즈'가 미친듯이 이어졌을 것이다. ( 아, 잡담은 집어치우자 ! 아빠는 사형을 당하고, 엄마는 집을 나갔는데 잡담이 웬 말인가. )

 

 

현상'이란 결핍'의 결과이다. 영화 < 배트맨 > 에서 고담 시민들이 초인적 영웅'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초인적 영웅의 출현이 아니고서는 병든 고담 시티'를 구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영웅을 간절히 원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건강한 사회'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웅 없이도 세상은 알아서 잘 돌아가지 않던가 ? 그것이 진정한 지방자치요, 풀뿌리 정치'이다. 건강한 사람의 면역 기능처럼 말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엄마와 아빠가 필요하다고 펑펑 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 간단하다 ! 가족은 해체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가족이 결핍의 존재가 되는 순간, 우리는 가족을 복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호명해야 한다. 그래서 다 큰 어른들이 엄마와 아빠 앞에서 슬픈 동화를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 가족 " 이 강박적으로 호명되는 현상은 징조가 나쁘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현상을 마치 휴머니티의 복원이라거나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는,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한 섬세한 증후'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파란 신호등이 아니라 빨간 신호등이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당 환자'가 급히 초콜릿'을 찾는 이치와 비슷하다. 오사마 빈 라덴'이 비행기를 뉴욕 쌍둥이 빌딩을 향해 돌진하면 콘돔은 많이 팔린다. 신문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재난으로 인해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맞는 말이다. 가족 서사'가 강조된다는 것은 재난이 발생할 때이다. 헐리웃 모든 재난영화는 사실 해체된 가족을 복원하는 가족영화이다.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강조된다는 것은 이미 위기에 봉착했거나 위기일발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이처럼 가족 이데올로기'의 강조는 위기의 증후'인 것이다.

 

 

< 7번 방의 선물 > 에서 용구'는 바보'로 나온다. 착하고 착한 우리 용구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예쁜 딸. 하지만 용구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다. 아, 시발 ! 이 지점에서는 동네 굴다리 아래 컨테이너'에 살던 해병전우회 마초들도 눈물을 흘리고, 어버이 연합 가스통 할배'들도 눈물을 쏟는다. 안경을 고치는 척하지만 사실은 눈물을 훔친다. 훔쳐도 죄가 되지 않는 것은 눈물뿐이로구나. 아, 아아아. 보아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부성애냐. 그런데 이 슬픔'은 좀 묘한 구석이 있다. 멜랑꾸리'하기는 한데 뭔가 야리꾸리'하다. 대한민국 사람은 바보'가 나오는 영화'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 포레스트 검프 > 는 워낙 세계적인 흥행작이니 그렇다고 쳐도, 숀 펜이 나온 < 아이 엠 샘 > 은 수입사마저 예상하지 못한 대박이었다. 본토에서는 별 볼 일 없어서 천대를 받던 영화가 한국에 오면서 대박을 친 것이다. 바보 코드는 먹힌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말이다. 맨발의 기봉이는 어떤가 ? 백만불짜리 다리'를 외치던 조승우는 ? 영구의 원조인 < 여로 > 는 ?

 

 

한국인은 바보가 어눌하게 말하면 감동하고, 일반인이 잘못을 또박또박 지적하면 화를 낸다. 하지만 무조건 바보'에게 감동하는 것은 아니다. 착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 사람이 착하기만 하면 못 써 ! 독한 구석이 있어야 돼... " 라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바보는 백치일 만큼 착한 존재이기를 바란다. 착할수록 눈물은 곱하기'가 된다. 이러한 태도가 불쾌한 이유는 바보'나 장애인'을 대하는 이중적 잣대 때문이다. 리퀘스트 방송은 집요하게 마음씨 착한 장애인'을 부각시킨다. 아파도 엄마 마음 아플까 봐서 내색도 못하는 자녀의 깊은 성정'을 나레이터는 앵무새처럼 읽는다.

 

 

이 지점에서 반대로 한번 물어보자. 그렇다면 성질 고약한 장애인은 도울 필요가 없는 것일까 ? 만약에 둘 중 한 명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면 누구에게 사랑의 열매를 주어야 할까 ? 사람들은 대부분 당연하다는 듯이 착한 장애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둘 다 공평하게 나누어야 한다. 그게 바로 복지의 기본이다. 성질 고약한 장애인 대신 착한 장애인에게 기부하는 행위'가 당연하다고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편애는 장애인 주제에 성격마저 고약하네, 라는 태도가 은연 중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시대가 지나고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다. 어쩌면 각하'야말로 한국 코미디 영화'의 공식을 몸소 증명해 보인 셀프 무비-바디'였다. 국민 대다수인 에브리바디를 혼자서 웃기고 울렸으니깐 말이다. 코미디 정권이라기보다는 신파 정권이라고 하는 게 맞는 말 같다. 이명박 시대의 서사가 어머니 신파라면, 박근혜는 시대는 아버지 신파'로 첫 번째 문장을 찍었다. 나는 그녀가 대통령 임기를 마칠 동안 아버지 신드롬'이 계속 이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가족 이데올로기'란 시대의 위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성공하길 바란다. 진심이다, 라고 말하고 싶으나 캄캄한 어둠뿐이란 사실을 잘 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글 속에 늘 작은 반전을 숨겨두고는 했다. 이 글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책을 읽지 않고도 서평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피에르 바야르는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에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노하우를 가르쳐주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지 않고도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참고로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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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의 경우는 한 권만 읽으면 읽지 않은 천 권의 자기계발서'를 읽은 것처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목만 바뀌었지 내용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 디테일이 중요하다 > 란 책과 < 사소한 것에 목숨 걸자 >라는 책이 있다. 전혀 다른 소리를 하는 자기계발서(들) 같지만 사실은 디테일과 사소한 것은 같은 말이다. 일처리가 꼼꼼해야 된다는 주문 아닌가 ? < 어머니로부터 배우는 경영 철학 > 이란 책은 어떤가 ? 자상함이란 키워드는 결국 꼼꼼하다는 뜻이다. < 중요한 것은 성과가 아니라 인간이다 > 이라는 책도 결국은 인간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자기계발서'를 전혀 읽지 않는 이유이다. 만약에 자기계발서'를 백 권 읽었다고 자랑하는 놈은 멍청한 놈이다. 나는 자기계발서를 한 권도 읽지 않았으나 그 책들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책을 읽지 않고도 그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피에르 바야르의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도 읽지 않은 책이다 !! 내가 이 글에 숨겨둔 반전은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피에르 바야르의 책마저도 읽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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