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발이냐 불발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섹스 피스톨즈





- 리오 브라보, 1959




                                                                                                    영화 속에서 " 총 " 은 " 딱딱한 페니스 " 에 대한 은유'이다(섹스 피스톨즈'라는 이름의 미국 롹밴드도 있다). 격발은 사정이며 불발은 발기 불능'이다. 그리고 총알은 강철로 만든 정자'이고 리볼버 회전식 탄창은, 음.... 그러니까, 그게 일종의 불알'이다. 


그것은 남성의 욕망이자 그 욕망이 반영된 페티시'다. 영화 << 다이 하드 >> 에서 도시를 순찰하는 흑인 형사는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총을 겨누지 못하는데 이것은 명백히 성 불능에 대한 은유이다. 그와 무전기로 대화를 나누며 동병상련을 느끼는 존 맥클레인 형사'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는 무능한 남편으로 아내와는 이혼 위기에 처해 있으며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아내는 남편의 성을 숨긴 채 처녀적 이름으로 직장 생활을 한다. ​ 그러니깐 아내는 < 홀리 맥클레인 > 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결혼 전 이름인 < 홀리 제네로 > ​로 처녀 행세를 하는 것이다. 


맥클레인 형사는 나카토미 빌딩 로비에 있는 방문자 명단에서 아내가 처녀적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린다. 맥클레인'이라는 성'은 말 그대로 아내로부터 제거(거세)된 상태인 것이다.  지금 그의 페니스는 발기와 거세 사이에 있다.  잘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꼴린 것도 아닌 상태.  마치 휴대폰 표시창에 방전을 알리는,  깜박거리는 아이콘처럼 말이다.  그는 자신의 남근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그는 자세를 고추세우며 외친다. " 우린, 죽지 않아 !!!!! " 영화 << 다이하드 >> 는 서부 LA에서 벌어지는 현대판 마천루 서부극이다. 


< 총 > 이 중요한 오브제로 활용되는 서부 영화 장르는 발기된 불알후드의 세계를 다룬다. 주인공은 총구에 불을 품어냄으로써 남성다움을 과시'한다. 퐈이야 ~             그러니까 웨스턴 무비는 기본적으로 남근 선망 판타지에 기반을 둔 장르인 셈이다. 서부 영화의 아이콘이었던 배우 존 웨인과 하워드 혹스 감독이 프레드 진네만 감독이 연출한 << 하이 눈, 1952 >> 에 대하여 격렬한 어조로 비난한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윌 케인 보안관(게리 쿠퍼 분)이 히마리 없는 거세된 남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형사가 트라우마로 인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총을 겨누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 다이 하드 >> 의 흑인 형사를 닮았다. 


윌 케인 보안관은 악당과의 대결보다는 마을 사람들의 연대를 강조한다.  또한 그는 부보안관에게 애인을 빼앗긴 상관이며 그와의 몸싸움에서도 가까스로 이긴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여성을 구원하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남성'이다.  존 웨인과 하워드 혹스가 보기에 월 케인 보안관은 겁쟁이'다.  그래서 그들이 손을 잡고 만든 영화가 << 리오 브라보, 1959 >> 이다.  영화 << 리오 브라보 >> 는 << 하이 눈 >> 제작진에게 보내는 발기한 남성-들의 딱딱한 답장'인 셈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보안관(존 웨인 분)은 악당과 시시때때로 대결하는데, 그는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들의 선의를 모두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독고다이 정신으로 수많은 악당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둔다. 게리 쿠퍼 보안관이 고뇌하는 햄릿 유형이라면 존 웨인 보안관은 돈키호테'다. 다시 말해서 게리 쿠퍼 보안관이 당기되 쏘지는 않는다는 " 인이불발 " 을 실천한다면,  존 웨인 보안관은 " 일단격발 一旦擊發 " 을 주장한다.  전자가 지루라면 후자는 조루다. 이처럼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두 영화를 감상하며 그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시각적 쾌락 너머의 지적 유희'이다.  불알후드의 극렬 다이오드적 시네마틱 극성 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고개 숙인 남성의 히마리 없는 불발'에 애정이 간다. 무릇 총이란 위험한 무기'로 언제나 격발이 가능하기에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 


남근도 총이다(아님 말고). 당기되 아무때나 쏘지는 마라, 잉글랜드 토끼가 비웃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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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8-22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황혼에서 새벽까지>에 나온 ‘섹스 머신’이 생각나네요. 하체로 총을 쏘잖아요.. ㅎㅎㅎㅎ 중학생 때 그 영화를 처음 봤는데, 정말 잊지 못할 캐릭터에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8-22 17:10   좋아요 0 | URL
인상에 남는 캐릭터였죠. 섹스 머신.... 보고 싶네요. ㅎㅎㅎ
 












미워도, 원 모어 타임 플리즈 ! "










                                                                                                       한때 시네마 떼끄가 우후죽순처럼 들쑥날쑥하던 때가 있었다. 퀄리티를 놓고 보면 죽(竹)인지 쑥인지 알 수 없는 죽 쑨 시설도 많았지만 지하 골방에서 접이식 의자에 앉아 말로만 듣던 세계 명작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었다. 


장 비고의 << 품행 제로 >> 를 그곳에서 보았으며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 거울 >> 도 그곳'에서 보았다. 영화의 원형을 경험한다는 것은 묘한 감동을 준다. 서부극은 시네마 떼끄의 단골 상영작 목록이었다. 존 포드의 << 역마차 >> 에서 존 웨인은 서부 영화의 원형에 가까웠다. 서부인은 적과 싸울 뿐만 아니라 거친 자연과도 싸운다. 존 웨인은 현대극 이전의 존 맥클레인이었고 존 람보'였다. 그는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역경을 헤쳐나가며 적과 싸워 이긴다. 그리고는 홀연히 떠난다. 영광은 잠시뿐, 굴비는 짜다 !  서부극은 앞모습으로 시작해서 뒷모습으로 끝나는 장르'였고 나는 그 영웅들의 뒷모습을 좋아했다. 


앞모습은 초라해 보일지라도 뒷모습이 당당한 남자야말로 진짜 사나이'가 아닐까 ? 프레드 진네만 감독이 연출한 << 하이 눈 >> 은 전통 클래식 웨스턴 무비'와는 사뭇 다르다. 은퇴한 보안관을 연기하는 게리 쿠퍼는 늙고 지쳐 보인다. 그의 뒷모습은 당당하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며 불안해 보인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악당을 물리치자고 애원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악당 프랭크 일당이 공동체의 위협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무질서의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보안관은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프랭크 밀러 일당과 싸워 이긴다. 이 승리에 크게 환호하는 사람도 없고 적으로부터 마을 공동체를 지켜냈다는 주인공의 자부심도 없다. 보안관은 경멸인 듯 아닌 듯 마을 광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그곳을 떠난다. 그는 영웅이라기보다는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처럼 보인다. 오래전에 이 영화를 보았을 때에는 이 영화가 나를 매혹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입이 바짝바짝 마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다른 서부극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벼랑 끝에 서 있었지만 이 직립의 애티튜드는 장렬하다기보다는 나약해 보였다. 


오래전 내 기억 속에서 이 영화는 그다지 매력적인 영화가 아니었다. 최근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매력에 흠뻑 빠졌다. 게리 쿠퍼가 연기한 윌 케인 보안관은 서부극 영웅의 전통적인 영웅이 아니다. 그는 고독한 영웅이라기보다는 절망하고 고뇌하며 다가오는 죽음에 불안해하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이 영화 속에서 은퇴한 보안관은 적과의 " 대결 " 보다는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 대화 " 를 시도하지만 그가 이 과정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거대한 권력과 무소불위의 힘 앞에서는 약해지는 인간의 추악한 속성'이다. 


프레드 진네만 감독은 이 과정을 통해서 서부영화 장르의 허망한 판타지를 낱낱이 고발한다. 또한 이 영화에서 여성들은 남성보다 정의롭고 정직하다. 프랭크 밀러 일당 네 명 중 두 명은 에이미(그레이스 켈리 분)'가 처단한다. 주류 서부 영화가 주로 여성을 구원하는 남성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에서 위기에 빠진 남성(게리 쿠퍼)를 구원하는 사람은 여성이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진보적이고 전복적이다.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혹은 읽었던 고전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동일한 텍스트를 반복 경험한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텍스트를 경험하는 행위'다. 같은 영화라 할지라도 어제 본 영화와 오늘 본 영화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이 만날 때마다 새로운 기쁨을 얻는 것과 비슷하다. 좋은 사람은 항상 새로운 사람이다. 영화도 그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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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21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 전, 무삭제 장 자끄 베네의
<베티 블루> 세 시간을 아무런 자막
도 없이 그림만 보며 황홀해 하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그리고 보니 링클레이터의 <비포어
선라이즈>도 시네마떼끄에서 본
것 같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8-21 17:08   좋아요 0 | URL
제 친구가 프랑스 유학 갔을 때 티븨에서 베티블루 무삭제판 상영했다고 편지에다 구구절절 적었더군요.
ㅎㅎㅎㅎㅎ....
 

















                                                     


좋은 예술가는 빌리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














결정적 순간






                                                                                                    일요일 오전 10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시원한 맥주와 안주를 준비하고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다음,  에어컨을 가동했다. 플레이 버튼'만 누르면 영화가 시작되지만 오늘 준비한 이벤트의 화룡점정은 상영 시간'에 맞춰져 있다.


프레드 진네만 감독이 연출한 << 하이 눈, 1952 >> 은 반드시 오전 10시 35분'에 플레이 버튼을 눌러야 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모두 다 아시다시피 이 영화 속 배경은 오전 10시 35분에 시작되어 12시 정오에 끝나는 영화'다( 물론 시계가 12시를 가리킨 이후에도 15분가량 마지막 대결 장면이 보이기 때문에 12시 15분에 끝나는 영화라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이다). 하이눈은 영화 속 시간(10:35~12:15)과 영화의 상영 시간(100분)을 일치시킨 영화로 관객이 영화를 보는 실재 시간과 영화 속에서 상기시키는 시간 흐름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매우 실험적인 영화'이다. 


나는 이 기쁨을 만끽하고 싶어서 정확히 오전 10시 35분에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영화 속 등장인물과 관객인 나는 지금 동시간대를 공유하는 것이다 !). 영화에 등장하는 시계는 등장인물과 관객에게 악당이 마을에 도착하는 예정 시간인 정오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정오는 말 그대로 " 데드라인 " 인 셈이다. 나는 영화 속에서 시간을 알리는 시계가 등장할 때마다 거실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영화에서 11시를 가리키면 현실 속 시간도 정확히 11시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아따, 허벌나게 짜릿하다 ! 이 영화는 주류 서부극 장르'에서 흔히 보이는 클리셰'가 없다. 


예를 들면 서부극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추격, 폭력, 액션, 서부의 광활한 자연 풍경 찬양 따위'가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보안관 케인(게리 쿠퍼 분)은 기존 서부극 영웅과는 결이 다르다.  기존 서부극 속 영웅은 혼자의 힘으로 악당을 물리쳐 마을을 구원하는 맨-파워의 상징적 인물이지만 이 영화에서 보안관 케인'은 전지전능한 구원자가 아니다.  그는 적과 싸우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힘을 합쳐 함께 싸우자고 호소하는 다소 나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일종의 수정주의 서부극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전통 서부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곱게 볼 리 없었다. 


서부극에서 전지전능한 영웅을 연기했던 존 웨인'은 이 영화를 싫어했고 하워드 혹스는 존 웨인과 의기투합하여 영화 << 리오 브라보 >> 를 만들었다.  마을 보안관이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악당-들'과 대결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를 만든 목적은 단순했다.  하워드 혹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존 웨인과 나는 < 하이 눈 > 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 리오 브라보 > 를 만들었다. 나는 좋은 보안관이라면 겁쟁이처럼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보안관의 목숨을 살리는 것은 그의 아내가 아닌가 ?  이러한 설정은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서부극이 아니다 ! " 


불알후드의 발광 다이오드적 3파장 극성에 해당되는 지랄 같은 허세'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존 웨인'보다는 게리 쿠퍼 보안관'이 마음에 든다. 나는 영화 속 게리 쿠퍼 보안관을 열렬히 지지했다. 영화에 흠뻑 빠지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 12시(high noon)에 다다랐다.  악당 프랭크 밀러 일당과 게리 쿠퍼'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때였다. 내 집 거실 벽에 걸려 있던 시계가 12시를 알리는 알림 소리'를 냈다. 불길한 예감. 거실에 걸린 시계는 알람 소리 기능이 없는 단순한 시계'가 아니던가 ?  알고 보니 시계의 알람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 현관문 벨을 누르고 있었다. 


현관문 렌즈를 통해 밖을 보니 복도에는 세 명의 남자가 카우보이 복장을 한 채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영화 속 악당인 프랭크 밀러와 그 부하들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서 현관문에서 한 발짝 물러나다가  내 허리춤에 리볼보 45구경 권총이 걸려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영화에 집중하다 보니 영화 속 세계로 빨려 든 것이다. 타임 블랙홀에 빠진 것이다. 좋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사나이답게 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죽으리라. 나는 현관문 잠금장치를 해제한 후 문을 냅다 걷어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문이 열리면 악당들은 당황해서 허둥대리라. 그때를 노려야 한다. 


내 계획이 빗나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문이 열리자 눈부신 정오의 햇살이 밀려 들어와 " 결정적 순간 high noon1) " 에 갑자기 앞이 하얗게 보이는 화이트아웃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그때 세 방의 총성이 동시에 울렸다 !  때는 늦었다.  소리와 속도의 물리적 계산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 니미, 시이이이발 ~ "  총알을 피하기에는...... 나는 너무 늙었다. 사람이 죽으면 제일 먼저 열리는 것은 항문의 괄약근이라고 한다. 푸쉬쉬쉬 ~   열린 내 괄약근 사이로 방귀가 새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으나 나에게는 많은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                                  



1)   high noon 은 " 정오 " 라는 뜻과 함께 " 결정적 순간 " 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어느 하드보일드 소설의 대가(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독자가 지루하다 싶으면 느닷없이 소설 속에 총을 등장시켜 방아쇠를 당긴 후 잉글랜드 토끼처럼 토끼라고 했다. 그래야 독자의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쿠엔틴 타란티노는 머리통을 날릴 기세로 총을 뽑되 절대 쏘지는 마라 _ 라고 충고한다. 영화 << 펄프픽션 >> 의 도입부에서 두 명의 짝패 펌킨과 허니버니는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밑도 끝도 없이 식객을 향해 소리친다. " 모두 꼼짝 마. 우린 강도다. 발가락만 움직여도 모두 머리통을 날려버린다 !!!! "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냅다 소리를 지르며 시작하니 관객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시작부터 이 모양이니 관객은 총알이 빗발치는 현장을 상상하지만 격발은 내내 지연된다.  이 지적은 발기하되 사정하지는 마라 _ 라는 고대 인도의 성전 < 카마수트라 > 의 문장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너무 천박한가 ? 그렇다면 인이불발 (引而不發)  정신이라고 해두자. 활시위를 당길 뿐 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 영화 << 펄프 픽션 >> 에서 이 장면은 당기되 쏘지 않는 방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기똥찬 영화'다.



두 대가의 작법론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훌륭한 작법일까.  에둘러 말하지 않고 서둘러 말하자면 둘 다 옳은 지적이다. 전자는 선행된 액션에 방점이 찍혔고 후자는 지연된 심리에 방점이 찍혔다. 또한 전자는 서프라이즈에 해당되고 후자는 서스팬스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활극이 스토리텔링의 중심이라면 일단 쏘고 나서 잉글랜드 토끼처럼 토끼는 편이 유리하고, 서스펜스를 중심으로 한 심리극이라면 장전은 하되 쏘지 않는 편이 유리하다는 소리이다.  여기서 잠깐 샛길로 빠지자면 많고 많은 토끼 중에 왜 하필 잉글랜드 토끼'인가 _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련다. 잉글랜드 토끼는 일종의 나의 맥거핀'이다.  잉글랜드 토끼는 그런 존재'다 !  나는 아무래도 일단 쏘고 나서 토끼는 잉글랜드 서사가 좋은 모양이다(물론 때에 따라서는 가거도 우럭 서사도 좋아하는 편이다). 고전 영화 리뷰랍시고 글을 쓰다가 글이 막혀서 느닷없이 총을 든 악당을 등장시켰으니 말이다.  오후 3시가 온전히 << 아비정전 >> 의 시간이라면 << 하이 눈 >> 은 10시 35분, 혹은 정오의 세계이다.  << 하이 눈 >> 은 좋은 영화'이다. 일요일 아침 10시 35분에 이 영화를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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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불 앞에서 요리를 하는 것에 대하여  :













에이스 침대와 기생충











                                                                                                    10년 전, 가구는 과학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이는 에이스 침대'였다. 에이스 침대 광고 모델이었던 박상원은 이렇게 말한다. "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입니다아. " 


이때부터 소비자는 가구 하면 제일 먼저 인체 공학적 설계를 따지기 시작했다. 이 광고로 재미를 쏠쏠하게 본 에이스 가구 회사는 수면공학과학연구소를 설립한다. 공학에, 과학에, 연구에..... 아따, 조또, 대따 머시따. 그런데 가구는 과학이 될 때 미학을 잃는다.  잠자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침대가 아니라 근심 걱정이다. 가구가 과학이 될 때 미학을 잃는 대표적인 예가 컴퓨터 의자'이다. 인체 공학적 설계로 만들어졌다는 PC방 컴퓨터 의자의 디자인은 누가 봐도 이상한 가분수'다. 텔레토비 같다고나 할까 ? 의자다운 권위도 없고 세련된 몸매도 없다. 


컴퓨터 의자는 마치 스테로이드를 남용한, 상체 운동에만 올인한 늙은 보디 빌더의 최후 같다. 이두박근, 삼두박근, 사두박근, 오두박근은 우람한데...... 남근은요 ? 



 




내 관심사가 의자'이다 보니 영화 << 기생충 >> 을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영화 속 소품도 박 사장 집 의자'였다. 공사판에서 나뒹구는 각목으로 만든 것 같은 의자는 누가 보아도 불편한 것처럼 보인다. 팔걸이도 없고, 등받이 면도 없고, 바닥 쿠션도 없다. 인체 공학적 설계와는 거리가 멀다. 가구는 과학이라고 외쳤던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찰 만하다. " 허허. 허리가 불편해서 어디 오래 앉아 있을 수 있겠소 ? 허리 다운 되기 십상이오, 허리 업 ! 박 사장, 당장 저 싸구려 의자부터 바꾸시구려. 침대와 의자는 인간의 가장 오랜 벗이라오 ! " 


그런데 어쩌나. 봉준호 감독은 맥스무비와 인터뷰에서 소품으로 등장한 쓰레기통이 250만 원, 식탁 테이블이 500만 원 그리고 의자 하나에 2,500만 원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의자 세트 가격이 아니라 의자 한 개 가격이 말이다( 물론, 봉준호 감독이 말한 의자는 이 의자가 아닐 확률이 높다).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이지만, 나는 그닥 놀랍지는 않다. 왜냐하면 비싼 의자일수록 불편한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입만 열었다 하면 인체공학적 편안함을 강조하는 이에게는 이 의자는 불편한 의자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 창조적 생략 " 이다. 


내가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편리함(편안함)에 대한 현대인의 강박과 믿음'이다. 현대인은 불편하다는 것을 나쁜 요소라고 인식한다. 집을 지을 때도 제일 먼저 고려하는 것은 편리이다.  침대, 가구, 신발, 의상도 모두 편리를 우선한다. 하지만 인간은 인체 구조상 편리에 최적화된 존재가 아니라 편리에서 쾌락을 느끼는 존재도 아니다. 때론 불편이 주는 미덕을 그리워한다. 믹스 커피보다 손수 기계로 내린 커피가 맛있는 까닭은 불편한 과정에 쏟는 애정 때문이다. 케이블카를 통해 본 풍경과 정상에 올라 내려다 본 풍경은 다르다.  불편이 죄악이 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하여, 나는 모든 노동자 파업을 지지하며 기꺼이 그 불편을 감내할 용의가 있다. 학교 급식 노동자 파업을 지지한다. 좋은 의자는 앉기 불편하다. 









​                                  


1) 봉준호  :  박 사장네 집과 기택네 집, 기택이 사는 동네 모두 세트거든요. 특히 부잣집은 가구 하나하나 신경 썼어요. 의자 하나에 2,500만 원에 식탁이 500만 원이더라고요. 임대료도 되게 비싸요. 촬영장에 모포로 덮어두고 애지중지했죠. 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경수 가격이 그렇게 비싼지 처음 알았습니다.




 


▶ 봉준호 감독이 2500만 원짜리'라고 말한 의자는 아마도 이 의자'일 것이다. 이 의자는 바실리 의자로 바우하우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마르셀 브로이어가 1925년에 제작한 의자'이다. 영화 속 의자는 바실리 의자 디자인을 바탕으로 변주된 예'이다. 의자 이름이 " 바실리 " 인 까닭은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의 집에 입주할 목적으로 설계되었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별칭으로 " 바실리 체어 " 라고 불리다가 나중에는 공식적 이름이 되었다. 가만 보면 의자의 형태(점,선,면)가 칸딘스키의 회화를 닮았다.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철학답게 처음에는 대중을 위한 의자였는데 그 의미가 퇴색되어 지금은 사업적 성공과 감각적 우위를 자랑하기 위한 고소득자의 전유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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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 살인의 추억 그리고 트럼프









                                                                                                        홍길동은 총명하고 무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문무를 겸비했으니 장차 위인이 될 인물이었으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니, 홍길동은 아버지 홍상직의 아들이나 아들이 아니었다. 아들아들 하는 세상에서 아들로 태어났으나,


미역 줄기 같은 이 야들야들한 깊이의 얇음은 몸종이었던 춘섬이 낳은 아들(서자)'이라는 출신 성분 때문이었다. 혈기왕성한 길동은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절망하여 눈 감을 위인이 아니었다.어느날, 그는 심야에 아버지를 만나 단판을 벌이기 위해 담판을 벌인다. 형을 형이라 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  홍길동이 원하는 것은 아버지의 승락이다. 평소 총명한 길동을 애틋하게 여겼던 아버지는 호부호형을 허한다. 소설 << 홍길동전 >> 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아버지의 승낙'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대타자(Other : 라캉의 용어로 대타자는 동일시로 통합될 수 없고 상상적인 타자의 타자성을 초월하는 완전하고 근본적인 타자성 ) 이다. 


대타자 아버지는 재현불가능하다. 부자 관계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을 뿐더라 동일시도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아들은 불초 소생(不肖 아니 불, 닮을 초  :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뜻 ) 이다.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홍길동은 아버지를 초월한다. 불초에 머물지 않고 월초(越肖 넘을 월, 닮을 초)한다는 점에서 소설 << 홍길동 >> 은 전복적인 서사'이다. 홍길동은 아버지를 초월했기에 아버지가 없는 단독자 고아'이다. 그는 율도국을 세워 태초의 아버지 시조'가 된다. 영화 << 살인자의 추억 >> 에서 박두만과 서태윤 형사는 첩의 자식'이다. 


형사는 용의자 박현규(박해일 분)가 살인범이라 확신하지만 단독자의 이름으로 법을 집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박두만과 서태윤 형사가 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대타자(미국)의 승락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유명한 기찻길 터널 장면에서 집행은 선고 유예된다. 대타자의 회답은 불일치'였다. 그것은 곧 " 아버지의 불허 " 를 의미한다. 아버지의 불허에 화가 난 형사는 권총을 꺼내 직접 법을 집행하려 하지만 이때 거대한 기차가 둘 사이를 가로지르며 떼어 놓는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기차라는 오브제가 발기한 남근(팔루스 Phallus)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기차의 < 가로지르기 > 는 아버지의 개입이다. 


이 장면을 도상학으로 풀어서 표현하자면 < 아들 / 아버지 > 이다. 여기서 대한민국이 미국의 허락 없이는 자주적 결정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 식민 / 제국 > 의 관계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늑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희생되는 양들의 침묵을 통해서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컷의 무능을 고발한다. 그것은 군 작정권이 없는(군 작전권은 미국에게 있다) 대한민국의 현실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DMZ 방문을 통해서 우리가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미국의 허락 없이는 평화도, 그리고 종전도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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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07-03 16:2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보수 언론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두 정상(김정은 위원장,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음에도 평화의 집에 마련된 회담장에는 참여하지 못한 것을 두고 까내리더군요.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문통이 북미 관계를 개선하는 데 있어서 중재자 역할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수언론이 그토록 흠모하는 국부인) 이승만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이승만은 (전쟁을 지속할 머리도 전력도 없으면서) 한결같이 북진 통일을 주장해서 정전 협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심지어 본인이 집권하던 시기 내내 정전의 의의와 효력을 부정하는 언사를 여러 번 남겼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북에서는 정전 협정에 참여했던 나라들(중국, 미국)하고만 대화를 하겠다는 명분까지 얻게 되었구요.
남한이 정전 협정에 참여했다고 해도 아버지(미국)와 아들(남한)의 관계는 이어졌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아버지의 힘과 허락을 빌리지 않고도 확보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권리(미/북의 정상과 남한의 정상이 한자리에 앉아서 종전과 평화를 논의하는 것)마저 걷어차 버렸던 지도자와 과거사를 생각하니, 그저 한숨이 나올 뿐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7-03 17:41   좋아요 0 | URL
제가 할 말을 고스란히 말씀하셔서 할 말이 업슴. 조만간 한 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