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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편지......

 

 

 

 

 

 

 

 

 

 

 

 

 

 

 

 

 

 

포우의 < 도둑 맞은 편지 > 와 이언 매큐언의 < 속죄 > 의 공통점'은 편지'가 사건의 열쇠로 등장한다는 점일 것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편지 때문에 개고생을 한다. < 도둑 맞은 편지 > 는 편지의 수신인이 여왕의 정부가 아닌 여왕의 정적의 손에 들어간 경우이고, < 속죄 > 는 정상적인 편지지 대신 엉뚱한 편지지'가 편지봉투에 들어간 경우이다. 둘 다 자기 자리가 아니다. 어긋난 것이다. 이 어긋남은 소동'을 만들어낸다. 소설가 김영하가 지적했듯이 모든 멜로'는 엇갈림의 미학이다.

 

 


 

 

 

 

건축의 기본은 < 집 > 을 짓는 일이다. 집의 탄생은 곧 내부와 외부'를 창조한다. 허허벌판이었을 때는 오직 < 밖 > 의 영역으로만 존재하던 터가 집이 만들어지는 순간 < 안 > 이 된다. 이처럼 안과 밖의 경계는 건축 구조물의 탄생과 맥을 같이 한다. 건축의 원리'를 가만히 살펴보면 집은 하나의 유기체적 머리'와 비슷하다. 집은 잘린 머리의 은유다. 문은 입이요, 항문이다. 그리고 창문은 눈의 역할을 한다. 영화 건축학 개론'은 집을 짓는다는 행위'를 통해서 첫사랑의 트라우마'를 치유한다. 사실 < 건축학 개론 > 은 < 정신상담학 개론 > 이라고 해야 한다.

 

 

최초의 건축 설계도는 엉터리'다. 집을 완성할 수는 있으나 좋은 집'을 얻을 수는 없다. 이 흠'을 방치하면 금'이 갈 것이고, 금의 깊이가 더해지면 거친 바람에 집은 무너질 것이다. 설계 변경'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설계 " 하자 " 를 첫사랑에 대한 실패'로 이해하자. 사랑의 설계도'는 완벽하지 못했다. 작은 오해 때문에 결국은 둘의 사랑에 금이 갔지 않은가. 사람 일이란 한 번 쏟아내면 담을 수 없는 법, 없던 일로 하고 다시 설계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어 부분 수정한다. 옛 건물의 기둥을 부수고 다시 짓는 방식이 아닌 그 기둥을 살려서 보강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서로에 대한 오해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남자는 드디어 튼튼한 집 한 채'를 짓는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끄덕없는 집이다.

 

 

멜로의 본질은 엇갈림'이다. 대부분의 연인들은 사소한 오해 때문에 헤어진다. 오고가던 편지'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오지 않을 때 연인들은 그것을 변심'으로 이해한다. 그 오해를 풀어줄 수 있는 열쇠는 오직 먼 훗날뿐이다. 이와이 슌지의 < 러브레터 > 에서 여자 주인공은 남자의 메시지'를 너무 늦게 발견한다. 송해성의 < 파이란 > 이나 이정국의 < 편지 > 에서도 사랑의 메시지는 죽은 후에 도착한다. 영화 < 건축학 개론 > 에서 한가인이 엄태웅에게 불쑥 내민 설계도'는 설계도'가 아니라 설계도의 형식을 빌린 편지'였다. 아주 오래 전, 노트에 그린 그 그림 편지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멜로 드라마'에서 편지'가 모두 과거와 현재를 화해시키지는 않는다. 포우의 < 도둑 맞은 편지 > 에서는 letter가 litter'가 되었을 때의 혼란을 다룬다. 편지를 훔친 장관은 편지/letter'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긴다. 왕비가 비밀리에 밀사(들)를 보내 장관의 집을 이 잡듯이 뒤지지만 편지를 찾을 수는 없었다. 장관은 이 편지를 어디에도 숨겼을까 ? 정답은 책상 위에 널브러진 편지함에 두었다. 왕비의 밀사들은 왕비의 목숨이 달린 중요한 letter가 litter로 둔갑되어 아무렇게나 방치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litter : 어수선하게 흩어진 물건, 잡동사니, 찌꺼기, 쓰레기, 난잡, 혼잡

 

 

장관은 편지/ LETTER'라는 단어를 잡동사니/ LITTER'로 둔갑시킨 것이다. 장관은 말 그대로 중요한 편지‘를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물건’으로 위장했다. 누가 보아도 그것은 잡동사니‘였으며, 구겨지고 찢어졌고, 더렵혀진 쓰레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뒤팽‘은 장관의 속임수를 단번에 간파한다. 뒤팽이 장관의 집을 방문하여 눈여겨본 것은 고급 양장의 편지 LETTER’가 아니라 더러운 편지 / LITTER'였다. 이렇듯 사물과 장소‘가 서로 엇나가면 소동’이 일어난다. < 도둑맞은 편지 >에서 편지는 편지의 수신자 혹은 발신자‘가 보관해야 하는데 제 3자인 장관’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배달 사고‘다 !

 

 

 

그런가 하면, 이언 맥큐언의 < 속죄 > 라는 소설 속에는 cunt'라는 단어가 전체 서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 편지를 쓰다가 갑자기 사랑 고백 편지‘로 빠진다. 그런데 그만 성적으로 흥분한 나머지 삐딱선을 탄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맨발로 너희 집을 활보하고 다니고, 그 오래된 꽃병을 깨뜨리기도 했으니 네가 날 미쳤다고 해도 난 할 말 없어. 사실 난 요즘 네가 있는 자리에서 자꾸 경솔한 행동을 하게 되고 ( 중략 ) .... 날 용서해주겠니 ? 꿈속에서 난 너의 보지에, 너의 그 부드럽고 젖은 보지에 키스를 해. 상상 속에서 난 하루 종일 너와 사랑을 나눠. "

 

이언 매큐언, 속죄 중

 

 

 

남자는 이 편지를 버리고 다시 정중하게 사과 편지‘를 쓴다. 그런데 사과 편지’를 편지봉투에 넣는다는 것이 그만 낙서처럼 쓴 음란한 편지‘를 넣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CUNT''라는 걸러지지 않은 단어가 쓰인 편지’가 그녀에게 도착한 것이다. 이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두 남녀’에게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소설 속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보낸 것은 letter가 아니라 litter'였던 셈이다. 편지란 이처럼 배달 사고'가 잦은 소통 도구'이다. 하지만 그것이 러브레터의 운명이기도 하다. 가장 아름다운 멜로'는 이와이 슌지의 < 러브레터 > 나 송해성의 < 파이란 > 처럼 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 때문이다. 그리고 위험을 무릅쓴 연서'는 두 사람의 사랑을 위험에 빠트리지만, 위험에 빠지면 빠질수록 그 사랑은 보다 더 운명적인 사랑으로 남는다. 편지의 힘'이다.

 

 

cunt에서 c, u, n 은 서로 닮았다. cunt는 보지'라는 뜻이지만, 인체해부학적으로 c,u,n 이라는 철자 또한 여성 질을 닮았다.

 

 

멜로 영화에서 편지'란 매력적인 오브제다. 누군가에게는 letter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litter가 된다. 사랑 편지 속 문장은 뛰어난 문필가의 문장보다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며 먼 훗날에 당신 앞에 한 통의 낡은 편지가 도착할 지도 모른다. 파란 잉크로 쓰여진 글씨가 눈물 때문에 번져 그 뜻을 알아볼 수 없다고 해도, 당신만은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무수한 글자 하나 하나'가 거대한 파란 얼룩으로 남는다고 해도 말이다. 눈물에 젖은 편지의 내용은 모두 하나다. 그리움이다. 파랗게 번진 모든 것은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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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 내가 한가인과 맥주를 마신 사연. http://myperu.blog.me/20156486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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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빠가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에서 가족이라는 키워드는 만병통치약'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가족이다. 뭔가 막힌다 싶으면 " 가족이잖아 ! " 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을 풀린다. 그래서 일일드라마'는 가족 이야기'가 끝날 줄을 모른다. 신경숙의 < 엄마를 부탁해 > 는 이명박 각하 시대의 불행이 엄마를 무시한 죄'라고 은연 중에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가족이 복원된다고 상황은 달라질까 ? 중요한 것은 가족이 아니라 계급이다. 그녀는 그것을 아주 철저하게 무시했다. 가족은 모든 것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이득재의 <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 는 제목 그대로 " 가족 신화 " 의 허구를 살벌하게 폭로한다. 그가 가족 주의의 병폐'에서 벗어나는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들뢰즈의 노마드 개념이다. 싸돌아다녀야 썩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니 말이다.

 

 


 

 

 

 

 

< 7번 방의 선물 > 이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동네 바보 용구'가 천만 관객을 울린 것이다. 흥행의 열쇠는 무엇이었을까 ? 중년의 남성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봇물을 이루었으니 " 부성애의 재발견 " 인 것은 확실하다. 이 영화를 본 그날의 가족 풍경이 눈에 선하다. 다 큰 자식들은 아빠'를 쇼파에 앉히고는 이런 율동을 선보였을 것이다. " 아빠, 힘 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 아빠, 힘 내세요. 우리가 있어요. " 참새처럼 글썽거리면서, 물개처럼 콧물을 훌쩍거리면서 부르는, 다 큰 딸은 커다란 가슴을 출렁거리고, 군대를 막 제대한 아들은 곰 같은 몸으로 촐랑거리면서, 아.... 이런 슬픈 가족의 풍경 !

 

 

그런데 < 가족의 재발견 > 은 용구 아빠'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 내내 우리는 " 엄마가 필요해 ! " 를 외쳤다. 그 촉매제'는 신경숙의 < 엄마를 부탁해 > 였다. 책만 보면 쳇 ! 이라며 혀를 끌끌 차던 사람들도 이 책은 사서 읽었다. 이 책의 서평 란에는 온통 눈물 바다'다. 종종 " 배송이 빨라서 좋아요 ! " 라는 이상한 감상평이 올라오기는 하나 주류는 엄마에게 잘하자, 이다. 그러니깐 이명박 정부는 엄마의 재발견으로 시작해서 아빠의 재발견'으로 끝나는, 매우 독특하며, 꽤나 신파적인, 일일 드라마 가족극에 충실한, 복고 취향의 정권'으로 기록될 것이다. 각하는 (기업)프렌들리'가 아니라 (가업)페밀리'적이다. 아마도 이명박이 욕심을 부려서 정권을 5년 더 연장했다면 오빠, 언니, 누나, 여동생은 물론이고 당숙에 당숙 조카의 재발견 시리즈'가 미친듯이 이어졌을 것이다. ( 아, 잡담은 집어치우자 ! 아빠는 사형을 당하고, 엄마는 집을 나갔는데 잡담이 웬 말인가. )

 

 

현상'이란 결핍'의 결과이다. 영화 < 배트맨 > 에서 고담 시민들이 초인적 영웅'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초인적 영웅의 출현이 아니고서는 병든 고담 시티'를 구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영웅을 간절히 원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건강한 사회'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웅 없이도 세상은 알아서 잘 돌아가지 않던가 ? 그것이 진정한 지방자치요, 풀뿌리 정치'이다. 건강한 사람의 면역 기능처럼 말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엄마와 아빠가 필요하다고 펑펑 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 간단하다 ! 가족은 해체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가족이 결핍의 존재가 되는 순간, 우리는 가족을 복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호명해야 한다. 그래서 다 큰 어른들이 엄마와 아빠 앞에서 슬픈 동화를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 가족 " 이 강박적으로 호명되는 현상은 징조가 나쁘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현상을 마치 휴머니티의 복원이라거나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는,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한 섬세한 증후'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파란 신호등이 아니라 빨간 신호등이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당 환자'가 급히 초콜릿'을 찾는 이치와 비슷하다. 오사마 빈 라덴'이 비행기를 뉴욕 쌍둥이 빌딩을 향해 돌진하면 콘돔은 많이 팔린다. 신문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재난으로 인해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맞는 말이다. 가족 서사'가 강조된다는 것은 재난이 발생할 때이다. 헐리웃 모든 재난영화는 사실 해체된 가족을 복원하는 가족영화이다.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강조된다는 것은 이미 위기에 봉착했거나 위기일발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이처럼 가족 이데올로기'의 강조는 위기의 증후'인 것이다.

 

 

< 7번 방의 선물 > 에서 용구'는 바보'로 나온다. 착하고 착한 우리 용구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예쁜 딸. 하지만 용구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다. 아, 시발 ! 이 지점에서는 동네 굴다리 아래 컨테이너'에 살던 해병전우회 마초들도 눈물을 흘리고, 어버이 연합 가스통 할배'들도 눈물을 쏟는다. 안경을 고치는 척하지만 사실은 눈물을 훔친다. 훔쳐도 죄가 되지 않는 것은 눈물뿐이로구나. 아, 아아아. 보아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부성애냐. 그런데 이 슬픔'은 좀 묘한 구석이 있다. 멜랑꾸리'하기는 한데 뭔가 야리꾸리'하다. 대한민국 사람은 바보'가 나오는 영화'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 포레스트 검프 > 는 워낙 세계적인 흥행작이니 그렇다고 쳐도, 숀 펜이 나온 < 아이 엠 샘 > 은 수입사마저 예상하지 못한 대박이었다. 본토에서는 별 볼 일 없어서 천대를 받던 영화가 한국에 오면서 대박을 친 것이다. 바보 코드는 먹힌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말이다. 맨발의 기봉이는 어떤가 ? 백만불짜리 다리'를 외치던 조승우는 ? 영구의 원조인 < 여로 > 는 ?

 

 

한국인은 바보가 어눌하게 말하면 감동하고, 일반인이 잘못을 또박또박 지적하면 화를 낸다. 하지만 무조건 바보'에게 감동하는 것은 아니다. 착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 사람이 착하기만 하면 못 써 ! 독한 구석이 있어야 돼... " 라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바보는 백치일 만큼 착한 존재이기를 바란다. 착할수록 눈물은 곱하기'가 된다. 이러한 태도가 불쾌한 이유는 바보'나 장애인'을 대하는 이중적 잣대 때문이다. 리퀘스트 방송은 집요하게 마음씨 착한 장애인'을 부각시킨다. 아파도 엄마 마음 아플까 봐서 내색도 못하는 자녀의 깊은 성정'을 나레이터는 앵무새처럼 읽는다.

 

 

이 지점에서 반대로 한번 물어보자. 그렇다면 성질 고약한 장애인은 도울 필요가 없는 것일까 ? 만약에 둘 중 한 명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면 누구에게 사랑의 열매를 주어야 할까 ? 사람들은 대부분 당연하다는 듯이 착한 장애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둘 다 공평하게 나누어야 한다. 그게 바로 복지의 기본이다. 성질 고약한 장애인 대신 착한 장애인에게 기부하는 행위'가 당연하다고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편애는 장애인 주제에 성격마저 고약하네, 라는 태도가 은연 중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시대가 지나고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다. 어쩌면 각하'야말로 한국 코미디 영화'의 공식을 몸소 증명해 보인 셀프 무비-바디'였다. 국민 대다수인 에브리바디를 혼자서 웃기고 울렸으니깐 말이다. 코미디 정권이라기보다는 신파 정권이라고 하는 게 맞는 말 같다. 이명박 시대의 서사가 어머니 신파라면, 박근혜는 시대는 아버지 신파'로 첫 번째 문장을 찍었다. 나는 그녀가 대통령 임기를 마칠 동안 아버지 신드롬'이 계속 이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가족 이데올로기'란 시대의 위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성공하길 바란다. 진심이다, 라고 말하고 싶으나 캄캄한 어둠뿐이란 사실을 잘 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글 속에 늘 작은 반전을 숨겨두고는 했다. 이 글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책을 읽지 않고도 서평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피에르 바야르는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에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노하우를 가르쳐주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지 않고도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참고로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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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의 경우는 한 권만 읽으면 읽지 않은 천 권의 자기계발서'를 읽은 것처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목만 바뀌었지 내용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 디테일이 중요하다 > 란 책과 < 사소한 것에 목숨 걸자 >라는 책이 있다. 전혀 다른 소리를 하는 자기계발서(들) 같지만 사실은 디테일과 사소한 것은 같은 말이다. 일처리가 꼼꼼해야 된다는 주문 아닌가 ? < 어머니로부터 배우는 경영 철학 > 이란 책은 어떤가 ? 자상함이란 키워드는 결국 꼼꼼하다는 뜻이다. < 중요한 것은 성과가 아니라 인간이다 > 이라는 책도 결국은 인간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자기계발서'를 전혀 읽지 않는 이유이다. 만약에 자기계발서'를 백 권 읽었다고 자랑하는 놈은 멍청한 놈이다. 나는 자기계발서를 한 권도 읽지 않았으나 그 책들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책을 읽지 않고도 그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피에르 바야르의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도 읽지 않은 책이다 !! 내가 이 글에 숨겨둔 반전은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피에르 바야르의 책마저도 읽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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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린 무기를 찾아서

 

 

 

 

 

 

 

 

 

 

 

 

 

영화사를 써내려갈 때 우리는 대부분 세계 3대 영화제를 중심으로 한 걸작의 목록을 훑는다. 하지만 로빈 우드는 <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 > 에서 7,80년대 미국 영화사'를 B급 싸구려 오락 영화 중심으로 풀어낸다. 대중의 욕망을 읽는 것이다. 로빈 우드가 보기에 레이건은 대중 마초의 상징적 존재였다. 수잔 재퍼드의 < 하드바디 > 도 같은 맥락으로 70년대 스타워즈'를 분석한다. 착한 사람의 손에 든 권총은 안전하지만 악당의 손에 든 권총은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유포한다. 뻔뻔한 논리이다. 이와 함께 하워드 진의 < 오만한 제국 > 을 읽으면 당신은 그때부터 쌍욕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추악한 제국을 향한 꼿꼿한 지식인의 고백이 꽤 우렁차다.

 


 

 

 

Star Wars by Leon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동시상영관을 들락날락거렸다. 당시 내가 버스를 타고 활동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극장만 해도 그 수'가 많았다. 버스를 탄다고 해봐야 모두 은평구 안'이었다. 나열하면 이렇다 : 1. 홍제극장 2. 도원극장 3. 신양극장 4. 양지극장 5. 수색 극장 ! 과장해서 말하자면 은평구에 있는 극장 수는 교회의 수'보다는 적었지만 성직자다운 진짜 목사의 수'보다는 많았다. 은평구는 극장이 먹여살렸어, 야호 ! 당시의 동시상영관은 1+ 1 시스템이었다. 메인 영화 한 편에 보너스로 한 편의 영화'를 더 보여주는 식이었다. 관람 비용도 저렴해서 점심값이면 영화 두 편'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주말이 되면 10편의 영화가 새롭게 선보였다. 물론 이중에는 서로 겹치는 영화도 있었으나 메인 영화의 경우는 모두 달랐다. 굳이 종로에 있는 개봉관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기다리면 된다. 돌고 돌아서 계절이 두 번 바뀌면 종로에 걸렸던 불후의 명작은 다시 동네 변두리 극장에서 반딧불이처럼 희미하게 부활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 영화 " 라는 이름을 가진 창녀의 슬픈 운명과 비슷했다. 한참 젊고 아름다울 때는 588에서 제값 받다가 늙고 병들면 철원 변두리 티켓 다방으로 팔려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영화 씨는 온힘을 다해서 자신의 예술 혼을 빛냈다. 가끔은 필름이 끊기고 몸은 온통 스크래치로 더렵혀졌지만 그래도 변두리 헐리웃 키드인 나에게는 위대했다. 그땐, 몰랐다. 섹스가 영화보다 재미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그 당시엔 영화가 제일 재미있는 쾌락이었다. 당신이 그 사실을 알랑가 모르것다. 하지만 헐리웃과의 허니문'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맑스의 < 자본론 > 은 자본주의 미국 사회'가 얼마나 형편없는 놈인가를 깨닫게 해 주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 영화는 가짜다, 더군다나 헐리웃 영화는 진짜 가짜다 ! " 이 글은 한때 헐리웃 키드였던 자의 헐리웃 배신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헐리웃 영화는 뻔뻔하다. 전설적인 헐리웃 블록버스트 시리즈'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중 하나가 < 치명적 물건' > 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영화 [ 스타워즈 ] 에서는 " 데스스타 " 라는 이름의 치명적 물건'이 등장한다. [ 인디아나존스 ]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시리즈마다 보물이 등장하는데 보물'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압솔루트 파워'다. 1편인 레이더스'에서는 성궤'가 그 치명적 물건이다. 이 물건 또한 악의 차지'가 되면 무시무시한 재앙이 닥친다는 줄거리다. 우리가 그토록 열광하는 [ 반지의 제왕 '] 은 어떤가. 이들 영화의 공통점은 하나다. 치명적인 물건'을 악이 소유하게 되면 치명적 무기'가 된다는 점이다. 결국은 이 치명적 물건은 착한 집단이 보관해야지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메시지'다. 여기서의 착한 집단은 누구인가 ? 백인이다, 해리슨 포드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앵글로색슨 혈통이다. 결국은 이들이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한편 웅이네 가족은.... ( 천일염보다 저렴한 나트륨에 중독된 어리석은 백성으로 인하야, 한반도 각하 정권이 탄생하게 되는데....... 과연 한반도 은하제국의 운명은 ! )

 

 

여기에는 교묘한 제국의 우생학이 자리'를 잡는다. " 이눔아, 내가 니 애비여 ! " 라는 인류 최대의 유행어'로 먼 나라 이웃 나라 한국에서 엘티이 와프 광고'를 땄던 다스베이더'는 자세히 보면 유색인종을 형상화한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낮은 코,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다스베이더와 킹콩의 모습이 닮았다는 점은 과연 우연일까 ? 킹콩은 명백한 아프리칸 흑인의 은유가 아니었던가. 치명적 물건이 이들 유색인종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치명적 무기가 된다고 신경질적으로 반복하는 서사의 핵심은 무엇일까 ? 팍스아메리카'다.

 

 

여기서 치명적 물건'을 핵무기'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 핵 정책에 대한 미국의 이중적 잣대'가 고스란히 헐리웃 블록버스터'에 적용된다. 미국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동안 미 군사 전략가나 외교 통상부 혹은 정치평론가들이 하도 잰 체하며 핵 정책에 대해 설레발을 쳐서 그렇지 핵심은 이거다. " 에헴 ! 핵은 위험한 물건이오. 나쁜 놈들 손에 들어가면 뭔 일이 벌어질 지 모르니, 우리 같은 신사들이 보관하겠수다. " 여기서 질 나쁜 양아치는 김정은'이다. 보안관의 손에 든 총은 치안이지만 정은이의 손에 총이 주어지면 위험하다는 논리이다. 놀라지 마시라. 미국이 보유한 핵탄두는 만 개에 육박한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미국인은 보안관이고 나머지는 악당이다. 세상에 이런 논리가 어디 있나.

 

 

이러한 억지 주장을 우리는 헐리웃 영화에 의해 세뇌'를 당한다. 관람자인 우리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통해 이 치명적 무기는 미국인이 보관해야 안전하다는 믿음을 배운다. ( 적어도 이 무기는 엘티이 와프 모델이 손아귀에 쥐면 안된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 고작 이런 엉터리 세뇌를 받으려고 돈 내고 영화를 본 것인가 ? 미국인이 스타워즈에 열광하는 이유는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천일염보다 저렴한 나트륨에 중독된 대한민국만 보아도 5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미국 역사 교과서는 담을 것이 없다. 우리가 박혁거세 신화를 거들먹거릴 때, 그들은 몇 백 년 전에 서부 개척 시대를 미국의 원년으로 소개하는 수준에 그친다. 정통성 없는 뼈대 없는 멸치 가문이다. 과거의 역사가 이처럼 비천하니 그들은 역사'를 미래로 틀어버리는 코페루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다. 그것이 바로 스타워즈'다. 미래가 배경이지만 사실은 미국의 건국신화이다. 우리가 새 알에서 깨어나고, 곰이 마늘 먹고, 막, 막막 삼켜서 힘들게 인간이 될 때, 미국인은 광선검에 최첨단으로 꾸며진 우주선 안에서 개국 신화'를 연다.

 

 

나는 이런 영화'를 보며 미국을 동경했다. 속은 것이다. 깨끗하게 속은 것이다. 재미있으면 장땡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극우적 메시지'이다. 레이건이 괜히 스타워즈'에 열광한 것이 아니다. 부시는 어떤가. 노골적으로 스타워즈의 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부시가 벌인 전쟁의 명분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치명적 무기'를 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의 땅에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살상 무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부시는 말했다. " 음마... 이 산이 그 산이 아닌갑소 ! " 이 전쟁으로 인하여 그 무수한 아이들이 죽었는데, 한다는 소리'가 이 산 저 산 한계령 타령이다. 그가 찾고자 했던 살상 무기'는 [ 레이더스 ] 에 나오는 잃어버린 성궤'를 닮았다. 고로 부시는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순간 재앙이 몰아닥친다는 망상으로 열심히 채찍을 휘두르며 성궤를 찾아 먼 여행을 떠나는 해리슨 포드'를 닮았다. 그는 스스로를 세계의 보안관이라고 말했으나 한갓 전쟁광에 지나지 않는다. 총은 악당이 가지고 있을 때에만 위험한 무기가 되는 것이 아니다. 건/gun'은 bad man이건 good man이건 똑같이 위험한 무기이다.

 

 

 

 

 

 

+

요즘 " 씐나 ~ " 라는 표기가 자주 보여서 뭔가 하고 조사했더니 < 신나다 >를 SNS 식 용어로 " 씐나 " 라고 하는 모양이더라. 갑자기 열받았다. 적어도 내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표기법의 원조는 바로 나다. 나는 그동안 V를 < 븨 > 로 썼기 때문이다. 티브이'는 반드시 티븨'로 표기했고, 태권 브이도 태권 븨'로 썼고 브이 티 알은 븨티알'로 표기했다. 뿐만 아니라 < 희한하다 > 에서 ㅎ 이 연속 세 개'가 나열되어서, 진정으로 희한한 단어'임을 과학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앞으로는 씐나'보다는 븨'를 더 많이 애용해 주시기 바란다. 씐'은 짝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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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 영화를 위한 새빨간 다이알로그

 

 

 

 

 

 

 

 

 

 

 

 

 

 

홍상수의 14번째 영화 < 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을 보다가 묘한 기시감에 시달린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준상과 예지원'이 나누는 대화'에서다. 그들은 안개 낀 남한산성'을 오르다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본다. 예지원이 그 깃발을 바라보며 말한다. " 깃발이 얼마나 멋진 발명품이야, 이게 있으니 바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잖아. " 명대사'다. 깃발은 사람이 바람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발명품이란다. " 멋지다, 홍상수 ! " 그런데 극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 대사에 대한 묘한 기시감'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영화 속 한 장면이었을까, 아니면 롤랑 바르트의 < 사랑의 단상 > 에 나오는 문장이었을까 ? 의문은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엘리어스 카네티의 < 군중과 권력 > 에서 이와 비슷한 문장이 나온다. 다음과 같다.

 

" 깃발은 보여질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바람이다. 깃발은 구름에서 잘라낸 작은 조각과 같은 것이다. 다만 구름보다 더 가깝고 색깔이 요란한 뿐이다. 그리고 깃발은 한곳에 매어져 있고, 그 형태도 언제나나 일정하다. 정말 그것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될 때는 그것이 펄럭일 때이다. 여러 민족들은 마치 그들이 바람을 쪼개기라도 할 수 있듯이 그들 머리 위의 대기를 자기의 것을 규정짓기 위해서 깃발을 이용하는 것이다.  

 

- 군중과 권력 中

 

우연일까 ? 홍상수는 이 책을 과연 읽었을까 ? 감독과의 대화'가 있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알라딘의 기준에 따르자면 < 사회학 일반 > 으로 분류되는 이 책'은 사회학보다는 철학에 가까우며, 문장은 문학보다 더 문학적이며 시적이다. 이러한 모호한 경계는 카네티가 소설가이면서 시인이었고, 극작가였으며, 인류학자 그리고 사회과학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문은 풀린다. ( 그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상가였다. ) 이러한 전방위적 재능'을 나는 아름다운 짬뽕이라 부르고 싶다. 프랑스에 롤랑 바르트가 있다면, 독일에는 엘리어스 카네티'가 있다. < 군중과 권력 > 은 독일판 < 텍스트의 즐거움 > 이라 할 만하다.

 

 

+  해원이 도서관에서 읽고 있는 책은 엘리아스의 < 죽어가는 자의 고독 > 이다.

 

 

 


 

 

 

1.

 

내가 옛날에 시나리오 속에 꿈 장면을 자주 집어넣었더니 누가 그러더군. 꿈은 레이몬드 챈들러'가 말하는 총잡이와 비슷하다고 말이야. 뭔 말이냐고 물었더니 챈들러가 건들건들거리며 이렇게 말했다는 거야. " 소설이 막힌다 싶으면 느닷없이 총잡이 등장시켜서 총 쏘고 사라지라구 ! " 꿈도 마찬가지라고 하더군. 막히면 그냥 꿈 장면을 등장시키면 된다고 말이지. 하지만 그것은 아마츄어나 하는 짓이라고 ! 챈들러 같은 거장이니깐 느닷없는 총잡이 타령이 먹히는 거지. 좆밥들은 씨알도 안 먹힌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야. 정말 맞는 말이다. 꿈 장면이란 적재적소에 등장하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그냥 궁여지책으로 꿈이 등장하면 나쁜 효과만 초래해.

 

 

홍상수 영화를 보면 말이야. 꿈이 자주 등장하잖아. 작법의 정석대로 보자면 홍상수 시나리오는 빵점에 가깝지만 홍상수니깐 가능한 거야. 챈들러니깐 가능한 것처럼 말이지. 임재범의 삑사리'는 임재범이니깐 용서가 되는 거야. 개인적인 취향을 전제로 깔자면... 홍상수의 최고 걸작'은 [ 옥희의 영화 ]이거나 [ 북촌방향 ]이 될 거야. 세련된 맛으로 치자면 [ 북촌방향 ] 에 한 표를 던지겠어. 개인적으로 흑백 화면을 좋아하거든. 단지 그 이유야. 요즘은 애들이 영화를 보는 눈이 높아진 것 같아. 홍상수 하면 온통 차이와 반복 그리고 변주'를 이야기하더군. 좀 배웠다 하는 놈들은 들뢰즈와 데리다'를 거론하기도 하지.

 

 

또 어떤 놈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를 거론하며 원본과 복제의 관계'에 대해서 말을 하기도 해. 모두 맞는 말이야. 어차피 텍스트란 수용자의 몫이니깐 말이야. 그런데 내가 그들의 글에서 불만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글을 어렵게 쓴다는 점이야. 차이, 반복, 변주, 원본 없는 복제의 용어를 굳이 어렵게 설명할 필요가 있느냐는 거야.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는 나랏말쌈이 어려워서, 서로 사맛디 아니해서 그런 거 아니겠어 ? 이에 어여삐 여겨 한글을 맹가노니 7일째 되는 날 보기에 좋으셨던 거지.

 

 

내가 보기엔 홍상수 영화의 근작'들은 < 귀신들린 숲 > 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 효성 깊은 나뭇꾼은 한시 바삐 고개를 넘으려고 하지, 아들을 기다리는 노모 때문에 말이야.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잖아. 사람들이 나뭇꾼을 말리지. 그 산은 밤에 귀신이 나온다고 말이야. 하지만 효심 깊은 나뭇꾼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길을 떠나. 곧 산길은 어둠에 젖어들고.... 그런데 말이야. 가도 가도 계속 첩첩산중'이야. 아이구야, 갈 길 먼데 똥줄이 타지. 보다 빠른 종종 걸음으로 걸어도 상황은 벗어나질 못해. 나뭇꾼은 지쳐서 소나무 아래에 털썩 주저앉다가 깨닫게 되지. 저 소나무를 열 번 넘게 보았다는 사실?! 그러니깐 나뭇꾼은 제자리를 계속 돌고 있었던 거야 !

 

 

홍상수 영화는 바로 < 귀신들린 숲 > 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 북촌 방향 ] 에서의 북촌'은 일종의 " 귀신들린 골목 " 이야. 왔던 길을 계속 다시 오게 돼. 하지만 유준상은 자신이 왔던 길이라는 것을 잘 몰라. 귀신이 괜히 귀신이겠어. 홀리면 끝장 ! 바로 이 지점에서 반복'이 만들어지는 거야. 유준상은 귀신에 홀린 거야. 벗어나려고 하지만 결국은 북촌'으로 돌아오지. 이 기본 서사'가 반복되면 복제'가 되는 거야. 그리고 복제'가 재생산되면서 약간씩 변형이 이루어지면 변주가 되는 것. < 귀신들린 숲 > 에 대한 나뭇꾼의 태도'를 봐. 지나친 길을 또 지나가지만 그의 태도'는 전과는 약간씩 달라지기 시작하잖아. 세 번째 반복에서는 땀을 닦고 지나가다가, 다섯 번째 반복에서는 털썩 주저앉으면서 에라이, 시부랄 ! 이라고 숨을 헐떡이거든. 이것이 바로 변주'야 !

 

 

어때, 이해하기 쉽지 ?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에 나오는 서촌도 이 < 귀신들린 숲 > 과 비슷해. 거리에 버려진 담배꽁초는 일종의 특정 좌표'야. 나뭇꾼이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출발하여 다시 그 소나무로 돌아오듯이 해원은 거리에 버려진 담배꽁초가 있는 곳에서 출발하여 다시 그 좌표'로 돌아오는 것이지.

 

 

자, 이제 마무리하자. 그렇다면 홍상수는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을까 ? 내가 보기엔 홍상수는 시지푸스 신화의 궤적'에 대해 말하고 싶은 모양이야. 사실 나뭇꾼과 시지푸스는 동일인물이야. 왜냐하면 이 둘은 모두 헛된 희망을 반복하고 있거든. 나뭇꾼은 계속 소나무 아래'로 돌아오고, 시지푸스의 바위 또한 계속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지.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그들은 계속 헛된 노동에 지쳐가고 있는 중이야. 그것이 바로 인간의 고독이지. < 고도 > 는 오지 않아, 바위는 계속 구르고, 다시 소나무 아래'이지. 달라지는 건 없어. 인간이란 존재는 그런 존재야. [ 북촌방향 ] 에서 유준상은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것 같아. 자신이 귀신에게 홀렸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가 북촌 거리에서 고현정'과 만났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 같아. 아, 나는 지금 귀신들린 북촌 거리를 헤매고 있었구나. 그러니깐 이 영화에서의 고현정은 소나무 같은 오브제'이지.

 

 

인간은 누구나 혼자야.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처럼 말이야. 혼자 이 귀신들린 산'을 빠져나와야 하고, 바위를 굴려야 하지. 존재론적 슬픔은 바로 이 고독에서 오는 것이야. 인간의 힘으로는 이 미궁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죽음뿐.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에서 해원은 도서관에서 이런 책을 읽고 있었어. The Loneliness of the Dying / 죽어가는 자의 고독. 우린 그렇게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죽어가는 거야. 외롭게 말이야.

 

 

깃발은 바람을 보기 위해 만든 발명품이 아니야. 하늘을 보도록 고안된 발명품이지. 깃발을 쳐다보면 반드시 하늘을 보게 되어 있잖아. 태극기'도 마찬가지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하라고 만들어놓은 것이 태극기 아니겠어 ? 결국 깃발이란 가장 먼 곳을 보라는 뜻이야. 하늘보다 더 먼 곳은 없으니깐 말이야. 유치환의 < 깃발 > 이란 시가 생각나네. 후훗.. 저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노스텔지어의 손수건이라고 했던가 ? 나는 자꾸 저 푸른 옷을 입은 해원을 향해 흔드는, 노스텔지어의 깃발로 읽혀. 무슨 뜻이냐고 ? 아이구야, 아무 의미 없어. 영화를 너무 심각하게 보진 말자구.

 

 

 

2.

 

홍상수는 점점 너그러워졌다. 시니컬한 경멸은 어느 순간 인간에 대한 위로'를 품기 시작했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 하고 싶은 영화를 눈치 안 보고 맘껏 만들 수 있는 감독'은 홍상수가 유일할 것이다. ( 예외가 있다면 김기덕 정도 ! ) 더군다나 그의 영화라면 노 개런티'라도 불사하는 배우들이 줄을 선다. 그리고 1000만 관객 동원 시대에 10만 관객만 동원해도 나름 선방이니 홍상수야말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감독이다. 그러니 굳이 삐딱하게 세상을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삐딱한 세상은 김기덕이 쫙 쥐고 있으니 수컷들의 쪼잔한 세상은 홍상수의 몫이다. 어떤 사람은 홍상수 영화가 항상 똑같은 상황극'이어서 짜증이 난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영화가 지나치게 난해하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홍상수의 잘못이 아니다. 적어도 몇 년 사이의 근작들은 감독의 잘못이 아니다.

 

 

홍상수 영화'가 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여자 만나 낮술 마시다가 모텔에서 따먹는 이야기의 무한 반복'은 그것이 바로 서사'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 천일야화 > 에서 세헤라쟈데'는 1001일 동안 1001 개의 이야기'를 왕에게 들려준 것이 아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변주의 방식을 통해서 천 개의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 수컷은 여자 만나 술 마시며 즐겁게 놀다가 모텔 가서 따먹는 서사'가 가장 스펙타클한 것이다. 지구를 지키는 것은 슈퍼 영웅의 몫이지, 찌질한 수컷의 서사가 아니다. 그리고 홍상수 영화가 난해하다는 불만도 잘못된 지적이다. 난해하다는 것은 고도의 상징성이 압축된 형태'가 될 때 발생하게 된다. 행간을 읽는다는 것은 상징을 풀어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홍상수 영화에서 < 상징 > 은 존재하는 것일까 ? [ 북촌방향 ] 에서 북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 다른 나라에서 ] 우산이라는 오브제는 무엇에 대한 은유인가 ?

 

 

정성일처럼 비비꼬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 다른나라에서'의 우산은 핵 전쟁에 대한 공포에 대한 은유죠. 핵우산을 상징하는 겁니다. " 좆 까라 그래라. 박찬욱의 영화는 고도로 응축된 상징의 세계이지만 홍상수 영화'에서는 그런 상징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북촌은 그냥 북촌이다. 문성근이 쏟아낸 문어'는 엘리트 먹물에 대한 조롱이 아니다. 그의 영화는 오히려 이런 상징 해석을 걷어내고 볼 때 흥미진진해진다. 14번째 작품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은 [ 북촌 방향 ]의 속편 같은 소품이다.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대신 [ 서촌 방향 ] 이라고 영화 제목을 정해도 무방한 것처럼 보인다. [ 북촌 방향 ] 이 유준상의 남산 아래 북촌 유람이라면, [ 누구의 딸... ] 은 정은채의 남산 아래 서촌 유람'이다. 이래저래 생각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필요 없다. 홍상수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 대상 분리 불안 장애' > 다. 홍상수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은 모두 심리적 고아'다. 그들은 한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노마드의 생을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 생활의 발견 ] 에서의 경주와 춘천, [ 밤과 낮 ] 에서의 프랑스, [ 북촌방향 ] 에서의 북촌은 주인공에게는 낯선 공간'이다. 그것은 노마드적 유람의 흔적이다.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에서의 해원'도 제목이 말해주듯이 심리적 고아의 지위를 얻는다. 뿌리를 내린 삶이 가족의 형태라면, 뿌리없이 떠도는 노마드적 삶은 전형적인 떠돌이의 방식이다. 그래서 홍상수의 주인공들은 떠남과 도착 그리고 다시 떠남'을 반복한다. 길 위의 영화인 셈이다. 사실 홍상수 영화는 매우 이상한 방식의, 한정된 로드 무비'다. 이 길'은 카프카의 출구 없는 미로이기 보다는 보르헤스의 미궁에 가깝고, 토속적인 말투를 빌리면 돌고 도는 물레방아 같은 인생이다.

 

 

[ 누구의 딸... ] 에서 담배꽁초가 버려진 거리는 마치 귀신 들린 숲속 길'과 비슷하다. 나무꾼이 이 숲속을 벗어나려고 해도 결국은 원점으로 다시 돌아오듯이, 해원 또한 담배꽁초가 버려진 그 거리로 다시 온다. 어쩌면 [ 북촌방향 ] 이후의 길들은 모두 귀신들린 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순환이며 동시에 반복이다. 왔던 길을 다시 오지만 정작 주인공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냥 막연한 기시감에 시달릴 뿐이다. 그것은 귀신들린 숲을 헤매는 나뭇꾼과 비슷하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나뭇꾼은 자신이 왔던 길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북촌방향 ]의 마지막 장면은 유준상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 같은 표정으로 끝난다. 나는 지금 왔던 길을 계속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지긋지긋한 허무'이다. [ 북촌방향 ] 의 주인공이 골목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그 길 위에 서 있듯이, 해원은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흔한 말로 표현하자면 인생이란 다람쥐 첫바퀴이고, 고상하게 말하자면 시지푸스적 궤적'이다. 요즘 사람들은 죄다 먹물 티'를 내니 나 또한 loneliness한 시지푸스적 존재의 고독한 궤적'이라고 쓰겠다.

 

 

해원은 엄마가 캐나다로 떠남으로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되었다. loneliness 한 해원이다. 해원은 이 분리'를 보상받기 위해서 성준과의 불륜 관계'를 다시 시작할 지 말아야 할 지에 대해 고민에 빠진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 곁'> 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애착 대상'에 대한 분리 불안'을 대체할 보상 심리 욕망인 것이다. 그것은 엄마의 침대에서 쫒겨난 여자아이가 애착 관계인 엄마 대신 품고 자는 곰인형'과 비슷하다. 해원에게 성준은 그런 존재'다. 성준은 엄마를 대신할 곰인형이다. 하지만 해원은 다섯 살 계집애'가 아니지 않은가 ! 그녀는 사춘기가 다가오면 이제 곰인형과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 커서도 쪽팔리게 곰인형을 껴안고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깐 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기주봉'이다. 이제 그는 홍상수 영화의 간달프 같은 존재이다. 압도적인 인장이다. 그는 지나가는 행인'으로 나와서는 항상 잽을 던지듯 툭툭 말 한 마디 던지고 간다. 마치 늙은 남자 요정 같다. 그리고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예지원과 유준상이 깃발을 보며 던진 대사'다. 깃발은 좋은 발명품이지. 유준상이 말한다. 예지원은 잠시 깃발을 보다가 말한다. 깃발은 바람을 보게 만들어요 ! 하지만 나는 예지원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바람을 보게 만드는 것은 깃발 외'에도 많다. 갈대도 바람이 지나가는 흔적을 남기고, 나뭇잎도 바람의 길을 보여준다. 내가 보기엔 깃발'은 바람을 보게 만드는 발명품이 아니라 하늘을 보게 만드는 발명품이다. 왜냐하면 깃발을 보면 자연스레 하늘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아, 이토록 시적인 심상이라니. 내가 왜 아직도 애인이 없는지, 나 스스로도 이해를 못하겠다

 

 

 

 

 

오, 수정

생활의 발견 + 다른 나라에서

북촌방향

옥희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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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 2013-06-10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여긴 댓글에도 비밀번호가 있네요. ㅋㅋ

저도 <해원>전에는 <북촌방향>이 가장 좋았어요. 시간이 뒤틀리고 녹아내리는 기분이었어요. 요즘 들어 홍상수의 영화가 왠지 알 수 없지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귀신들린 숲'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네요. 서울 북촌, 서촌에서 벌어지는 <블레어 윗치>같기도 하고. ㅋㅋ. 점점 더 흥미로워져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0 00:55   좋아요 0 | URL
앗, 아진님 !!! ㅎㅎㅎㅎ. 이러게 내방하여 주시고 감사합니다.
저도 점점 홍상수 영화에 빠지기 시작해서 뭔가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ㅇ요.
고독을 들켜버린...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술마시며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와 불을 켤 때 느끼는 그 묘한 고독 있잖습니까...그런 게 느껴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0 00:55   좋아요 0 | URL
앗, 아진님 !!! ㅎㅎㅎㅎ. 이러게 내방하여 주시고 감사합니다.
저도 점점 홍상수 영화에 빠지기 시작해서 뭔가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ㅇ요.
고독을 들켜버린...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술마시며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와 불을 켤 때 느끼는 그 묘한 고독 있잖습니까...그런 게 느껴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0 00:55   좋아요 0 | URL
앗, 아진님 !!! ㅎㅎㅎㅎ. 이러게 내방하여 주시고 감사합니다.
저도 점점 홍상수 영화에 빠지기 시작해서 뭔가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ㅇ요.
고독을 들켜버린...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술마시며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와 불을 켤 때 느끼는 그 묘한 고독 있잖습니까...그런 게 느껴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0 00:55   좋아요 0 | URL
앗, 아진님 !!! ㅎㅎㅎㅎ. 이러게 내방하여 주시고 감사합니다.
저도 점점 홍상수 영화에 빠지기 시작해서 뭔가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ㅇ요.
고독을 들켜버린...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술마시며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와 불을 켤 때 느끼는 그 묘한 고독 있잖습니까...그런 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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