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와 루시
켈리 라이하르트 감독, 미셸 윌리엄스 출연 / 키노필름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그때 미안했어요 ! 










                                                                                               3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  검은 천 가방 몇 개를 양쪽 어깨에 짊어진 그녀는 행색이 초라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매니큐어가 떨어져나간 손톱 밑에는 검은 때가 끼어 있었다. 여행 중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짐이 많았고 동네 주민이라 하기에도 짐이 너무 많았으며 그것이 자신이 가진 소유물의 전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짐이었다.


당시에 나는 서울역 학원 옆 건물에서 퍼펙트월드라는 이름의 영화감상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영화 한 편을 고르더니 망설이다가 내게 십만 원짜리 수표를 건넸다. 신분증을 확인하고 수표를 받는 것이 원칙이었으나(대부분은 신분증 확인조차 하지 않았었다) 나는 단칼에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부탁도 없이 퉁명스럽게 수표는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의 행색이 초라했기에 수표의 출처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라한 행색만 보고 그녀를 향해 싫은 내색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타인의 차별이 일상이라는 듯이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비디오테이프를 다시 제자리에 꽂은 후 가방을 주섬주섬 들고 황급히 나갔다. 그녀가 다시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10분 뒤였다. 한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먹을거리가 들어있었는데 아마도 다른 곳에서 수표를 교환할 목적으로 산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진열대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는 몇 편의 영화를 선택해서 카운터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고른 영화 목록들은 내 영화적 취향과 많이 닮아서 깜짝 놀랐다. 그녀가 지폐 몇 장과 먹을거리가 담긴 비닐봉지를 내 앞에 내밀었다. " 아까 잔돈을 미리 마련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 " 


그녀의 말에 나는 귀밑까지 빨개져서 어쩔 줄 몰랐다. 내가 그녀에게 행한 차별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서울 극장 영화관에서였다. 10년 만의 재회였는데 나는 보자마자 그녀를 알 수 있었다. 당시, 상영작은 영화 << 원스 >> 였다.  불이 켜지고 관객들이 출구로 나갈 때, 나는 그때 그녀를 보았다. 커다란 가방들은 보이지 않았다.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한 곳에 정착한 것일까 ?  나는 그녀와 거리를 유지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다가가 인사를 하는 것이 좋은 결정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시야에서 멀어졌고 그렇게 사라졌다. 


영화 << 웬디와 루시 >> 를 보았을 때 문득 손톱 밑에 때가 낀 손으로 돈과 간식을 건네며 미안하다고 말했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 잔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영화적 취향이 비슷하니 어쩌면 그녀도 이 영화를 보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 어쩌면 훗날 이 글을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뒤늦은 사과를 그녀에게 전하고 싶다.  그때 정말 미안했어요. 이 영화 참...... 좋죠 ?








웬디는 자신이 잃어버린 개 루시가 어느 중산층 가정으로 입양을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개를 되찾을 목적으로 찾아간 그녀는 정리가 잘 된 정원에서 놀고 있는 루시를 발견하고는 계획을 변경한다. 그녀는 되돌아오기 위해 떠나야 된다는 결심을 하지만 이 결심에는 굳은 결의가 없다. 어쩌면 떠나야 한다는 변명을 하기 위해 되돌아온다고 고백했는지도 모른다. 행선지를 알 수 없는 기차 화물칸에 무임 승차한 웬디는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밖의 풍경을 본다. 볕이 들지 않는 울울한 삼림의 풍경이 표정 없이 지나간다.  이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 공장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자본주의 미국의 민낯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룰은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철학이 때로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폭력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고발하고 있다.  영화는 반전도 없고 행운도 없다.  묵묵히 불행을 견디는 여자 웬디는 사랑하는 개 루시를 두고 길을 떠난다. 기똥차게 잘 만든 영화'다. 당신이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시 말해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행운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다. 놓치면 후회할 영화'다. 보시라. 명령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트레이트 스토리 - [할인행사]
데이빗 린치 감독, 리차드 판스워드 외 출연 / 이지컴퍼니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리차드 판스워스 스토리






 



기승전결에서 결(結)은 누에 실(絲)과 길하다(吉)가 결합한 것으로 좋은 방향으로 매듭을 짓는다는 뜻이다. 해피엔딩을 위한 강요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해피엔딩보다는 새드엔딩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매듭을 짓는 종결보다는 매듭을 묶지 못한 채 미완성으로 끝나는 종결을 좋아해서 끝이 선명하고 안전하며 예쁜 것에 대해서 항상 회의적- 이다. 영화 << 연어알 >> 에서는 한 여자가 한 여자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그녀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여자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현관문을 노크한다. 영화는 그 장면에서 느닷없이 끝난다. 일반적인 연출이었다면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서로 화해하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을 텐데 이 영화는 서로를 묶지 않은 채로 끝난다. 사람들인 불성실한 종결에 툴툴댔지만 나는 결이 없는 이 영화의 결'을 좋아했다.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엔딩이었다. 데이비드 린치의 << 스트레이트 스토리 >> 도 훌륭한 엔딩의 모범이다. 동생은 중풍으로 쓰러진 형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는 사람의 보폭보다 조금 빠른 트랙터를 몰고 6주 간의 기나긴 여정을 떠난다. 그가 먼길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는 형과 화해를 하기 위해서다. 미안하다는 그 한 마디를 하기 위해 길을 떠난 앨빈 스트레이트는 형의 집 앞에서 그 이름을 부른다. 두 형제가 십 년 만에 만나는 자리이지만 뜨거운 눈물도 없고 포옹도 없다. 그저 낡은 의자에 앉으라고 권하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영화는 거기에서 끝난다. 그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보았던 용서와 화해의 방식이 아니었지만 그 어떤 장면보다도 뜨거웠다. 내가 감독이었다고 해도 그 장면에서 대화를 넣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개입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리차드 판스워스와 해리 딘 스탠튼의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리차드 판스워스의 마지막 얼굴은 도무지 잊히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 속 캐릭터의 얼굴이 아니라 리차드 판스워스의 얼굴이었다1). 그의 얼굴에서 문득 헤밍웨이의 노인(노인과 바다)이 떠올랐다. 그는 어부였고 트랙터와 짐칸은 거대한 청새치처럼 보였다. 꿈을 이룬 자의 허무였을까 ? 영화 촬영을 끝낸 후, 그는 권총 자살로 생을 끝낸다. 그의 나이 79살이었다. 또한 이 영화는 그의 첫 번째 주연 작품이었다.  







​                       

1)    영화를 보다 보면 종종 캐릭터의 얼굴(감정)이 아니라 배우의 얼굴(감정)이 보일 때가 있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연출한 영화 << 거미의 성, 1957 >> 에서 미후네 도시로는 반란군이 쏜 화살-들 때문에 사색이 되는 연기를 펼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장면은 죽음의 공포에 사색이 된 캐릭터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공포에 떠는 미후네 도시로의 실제 상황처럼 보였다. 후일담으로 전해진 사실에 의하면 미후네 도시로를 향해 날아든 화살들은 특수 효과가 아니라 실제로 양궁 선수들이 배우를 앞에 두고 화살을 쏜 것이라 한다. 한끗만 빗나가도 죽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으니 배우 입장에서 보면 그 표정 연기는 연기가 아니라 실제의 공포 체험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리차드 판스워스의 회한도 그런 경우일 것이다. 먼길을 여행하고 돌아온,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문장 대신 표정으로 마지막 유언장을 작성한 그 장면 앞에서 나는 뭉클했다. 잊지 못할 장면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산의 부장들










                                                                                              브라더후드의 콩글리쉬 버전은 " 불알후드 " 이다. 내 성격이 성마른 데다가 혀가 짧다 보니 섹슈얼한 발음이 되었다. 아, 그놈의 R발음 !  내 발음에 대하여 눈깔 불알이는 이도 있으나 혓바닥은 죄가 없지 않은가. 


나는 앞으로도 대한민국 소년시대를 코리안 불알후드로 호명할 생각이다. 혓바닥 긴 자는 나에게 돌을 던져라 ! 한국 사회는 유독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보이지만 삐딱한 시선으로 그 현상을 응시하다 보면 오히려 한국 남성 사회의 동성애적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남이가 _ 라는 독특한 한국 남성의 의리는 동료애와 동성애가 뒤섞여 있다. 다만, 성관계만 없을 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남성과 여성을 분리한 데서 발생한 습속의 잔재처럼 여겨진다. 남중/남고를 거쳐 군대에서 청춘을 바친 남성은 직장인이 되어 부장의 시다바리를 위해 밤문화에 청춘을 바친다. 


그리고 중년이 되면 조기 축구회로 다시 뭉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남성 혈맹이 이루어진다. << 내부자들 >> 을 거쳐 << 마약왕 >> 과 << 남산의 부장들 >> 에 다다른 우민호 감독의 영화들은 명백하게 동성애적 코드로 이루어진 서사-들이다. 우민호 영화는 의리와 배신이라는 주제를 끝까지 밀어붙인 것처럼 보이지만 뒤집어보면 사랑과 질투라는 코드를 의리와 배신으로 변주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은폐를 통한 은유의 방식인 것이다. 영화 << 남산의 부장들 >> 은 왕의 남자들이 벌이는 치정 드라마'다. 


그것은 마치 남성판 후궁들이 펼치는 궁정극처럼 보인다. 알함불알 궁전의 추억이라고나 할까 ?  " 내가 조선의 국모다 ! " 또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왕자들의 난처럼 보이기도 한다. 팔루스적 인간 박통(이성민 분)은 왕자들에게 묻는다. 누가 왕자지 ?  영화는 훌륭한 배우들의 좋은 연기에 힘입어 어느 정도 완성도를 갖췄으나 힘만 주다고 허무하게 끝난 변비 환자의 초라한 결말은 아쉽다.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한 시도는 좋으나 아쉽게도 넓게 파는 데 그쳤다(대표적인 영화가 << 마약왕 >> 이다)


그것은 인물을 깊이 있게 파고들지 못하는 우민호 감독의 단점이다. 그가 좋은 감독이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산의 부장들, 나쁘지는 않으나 좋은 영화도 아니다. 기억에 오래 남는 영화가 아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수다맨 2020-03-13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를 보지는 않았는데 곰곰발님 평을 읽고 나니 예전에 나왔던 ˝그때 그사람들˝이 ˝남산의 부장들˝보다는 더 괜찮은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리나 비장미 같은 요소들은 없고, 권력은 가졌으되 자신들 앞날이 어떻게 될지 한치 앞도 몰랐던 천박한 인간들의 코미디를 저는 꽤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03-14 13:36   좋아요 0 | URL
저도 그때 그 사람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훨씬 좋죠. 그때 그사람이 말입니다..
 










■ 영화 << 기생충 >> 에서의 근세에 대하여







                                                               영화에서 " 지하실 : 지하 공간 " 은 대부분 은폐된 악덕이 사는 공간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 사이코 >> 에서 지하실은 아들이 죽은 어머니의 백골을 숨긴 장소이다. 배우 안소니 퍼킨스이 연기한 나약한 아들은 죽은 어머니의 목소리(죽은 망령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한 채 살인을 대리하는 캐릭터다. 그는 어머니라는 타자의 욕망을 실천하는 집행자'이다. 하지만 죽은 어머니라는 망령의 명령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환청이기에 결국은 아들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아들은 어머니라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영화 << 기생충 >> 에서도 지하 공간은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이 영화에서 지하 인간, 근세(박명훈 분)는 박사장이 지하실에 가둔 자신의 원초적 욕망, id(이드)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이다.  박사장이 사회화 과정에 성공한 " 부르주아-자아 " 라면 근세는 구순기 이후의 사회화 과정에 실패한 " 원초적 본능(무의식의 욕망) " 에 가깝다(구순기 고착).  공갈 젖꼭지를 물고 바나나를 주식으로 삼는다는 캐릭터 설정은 그가 이유식에 머무는 갓난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퇴행이 아니라 고착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박사장이 사회에서 성공한 자아를 대표한다면 근세는 성공한 자아의 이드'이다. 자아와 이드의 대립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투쟁이다. 영화 << 기생충 >> 은 그것을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시각화했을 뿐이다. 근세라는 캐릭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은 부호의 사용이다. 모스 부호는 점과 선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언어의 기표라기보다는 약호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라캉의 사유를 빌리자면 근세는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 진입에 실패한 채 상상계에 머문다. 이 영화가 인디언 패티쉬에 집착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인디언은 문자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 


공갈 젖꼭지, 바나나 이유식, 언어 습득 실패(옹알이)의 상징성을 종합하면 근세는 생후 6개월~18개월 사이의 어린아이'이다. 상상계가 언어와 주체가 형성되기 이전 무질서하고 불안정한 욕망이 들끓는 무의식의 세계이자 법과 규범의 지배에서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단계적으로 사회화 과정을 학습하지 못한 채, 판도라 상자가 열리자마자 용수철처럼, 불쑥 야외 파티장에 튀어나온 근세에게 성문법의 질서에 순응하라는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부르주아적 애티튜드에 익숙한 박사장에게 있어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근세는 자신의 쌍생아이자 


지킬 박사의 하이드이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nothing 이다. 근세는 인식의 세계로 뛰쳐나와 칼을 휘두른다. 물론 이 학살은 계획에 없는 일이다. 무의식의 다른 이름은 무계획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씨네21 No.1243 : 2020.02.25 - <기생충> 스페셜 에디션
씨네21 편집부 지음 / 씨네21(주간지)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기  생  충  과    화  엄   :










시각적 쾌락 너머 











- < 화엄 Majestic Splendor, 1997 > 이불









기 98마리의 물고기가 투명 비닐백에 담겨 미술관 전시실 벽에 걸려 있다. 바늘 달린 비즈 구슬( and 스팽글)이 물고기 몸에 촘촘히 박혀 있다.  그 무엇보다 화려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전시된 생선은 썩기 시작하고 이내 악취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어제보다는 오늘의 전시가 더욱 고약한 악취를 발산한다.  설상가상 미술관은 악취를 감추기 위해 방향제와 탈취제와 향수를 살포한다.  악취와 향수가 겹쳐지는 순간,  더욱 고약한 악취로 되돌아온다.  은폐가 오히려 확산의 주범이 된다. 전시의 종착역은 명약관화하다.  생선의 몸은 결국 물과 휘발성 기체로 변하고 결국에는 뼈와 싸구려 인조 장식품들만 남는다. 설치 미술 작가 이불(LEE BUL)의 의도는 분명하다. 플라스틱 꽃으로 화장한 물고기의 시각적 쾌락 너머 썩어가는 몸의 후각적 본질을 보라 !  1997년 뉴욕현대미술관에 전시되었다가 악취로 인해 며칠 만에 강제 철거된 설치 미술 작품 << 화엄 Majestic Splendor >> 이야기'다1)


작가의 고백에 따르면   :    비즈 공예에 사용되는 구슬은 작가가 어릴 때 어머니가 부업으로 구슬백 만드는 일을 한 것에서 출발했다. 이 작품에 사용된 " 구슬 " 이라는 오브제는 가난한 여성에게는 생계 수단이지만 부유층에게는 부의 표식이었다. 또한 그것은 살의 비천함을 감추기 위한 코르셋이기도 하다. 영화 << 기생충 >> 을 다루면서 이불의 << 화엄 >> 을 소환하는 이유는 냄새라는 키워드로 매우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 작품이라는 공통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 작품은 욕망과 억압 그리고 폭로'라는 구조의 유사성 때문이기도 하다. 


기택(송강호 분) 가족에게 있어서 박사장 가족은 자신들이 욕망(하는 판타지의 재현)의 투사'이다. 그러므로 기택 가족은 박사장 가족의 욕망을 욕망한다. 라캉의 말을 빌리자면 "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  7년 전 구상한 제목이 원래는 << 데칼코마니 >> 였다는 점은 " 나의 욕망은 곧 타자의 욕망 " 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영화에서 짜빠구리 못지않게 회자되었던 것은 박사장 집 인테리어 소품-들'이었다. 쓰레기통 가격은 250만 원이었고, 식탁 테이블 가격은 500만 원이었으며, 의자는 2500만 원짜리 소품이었다고 ??!!!!     바로 이 소품들은 << 화엄 >> 에서 죽은 물고기의 살을 파고들었던 바늘 달린 구슬이다. 


250만 원짜리 쓰레기통 소품은 시각적 쾌락을 극대화한 바늘 달린 플라스틱 오브제이면서 비천한 몸(본질)을 감추는 코르셋'이다. 우리는 흔히 지하실에 갇혀 사는 근세 가족과 기택 가족을 동일한 계급의 연장으로 보지만 사실 근세의 페르소나는 기택이 아니라 박사장'에 더 가깝다. 식구(食口)의 사전적 의미가 "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 이라는 점에서 근세는 박사장의 식구이자 동거인이며 불쑥 튀어나온 이드'이다. 그것은 박사장 집 지하실에 가둔 박사장의 리비도(무의식)'이다.  그렇다면 냄새의 주체는 누구인가 ?  당연히 그 냄새의 주체도 박사장이다. 


박사장은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코를 막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것이다. 냄새의 출현으로 인하여 기택이 깨닫는 것은 자신이 리스펙했던 타자의 정체다. 기택은 미쳐 날뛰는 근세의 사회화된 캐릭터가 박사장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                   



1)   화엄 , 1997  :  이 작품은 죽은 생선을 구슬과 시퀸(sequin) 등 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비닐에 담아 벽을 빽빽하게 채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물고기들이 부패하는 과정을 작업의 과정으로 삼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선들은 부패하였고 비닐 속에는 생선 썩은 물이 고였으며 썩는 냄새는 온 미술관을 덮었다. 뉴욕현대 미술관은 전위적인 작품의 경연장이라 할 만큼 엽기 적인 소재의 작품도 흔히 전시를 하는 곳이나 이불의 [화엄]만큼은 그들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급기야 작품은 전시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철거되었다. 현대 미술은 썩은 생선이든 그 어떤 재료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반증적으로 보여준 전시이기도 했다. 생선의 몸은 결국 물과 휘발성 기체로 변했고 싸구려 인조 장식품들만 남았는데, 생선은 여성의 육체를 장식품으로 간주되는 한국 문화에서의 여성성을 함축적으로 의미한다. 그녀가 생선을 화려하게 꾸며 작품을 제작한 모티브는 유년시절 어머니가 가내 수공업으로 시퀸을 붙여 장식하는 수출용 가방을 만들었던 기억으로부터 연유되었다. 시퀸은 경제 발전에 공헌한 한국 여성의 값싼 노동력의 상징이고, 썩어가 는 생선은 몸 바쳐 희생하는 여성의 미덕과 그를 당 연시하고 강요하는 사회적인 관습에 대한 반기로서 작용한다. 노동으로 장식된 생선을 통해서 계급과 젠더에 있어서의 한국 여성의 환상과 무상함을 표상하려 하였다(채드웍 2006). 하지만 정작 그녀에게 “페미니스트이냐?” 라고 질문 하면 “과거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페미니즘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 자신의 작품을 국한되고 한정되게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 음식을 소재로 한 현대 여성미술가의 작품 연구, 나정기 김형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