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아마존은 세계 최고 부자 회사입니다. 아마존 회장 제프 배조스 자산은 220조입니다. 그는 올해에만 80조를 벌었습니다. 주가가 껑충 올라서 하루에 11조를 벌기도 했죠. 코로나가 종식된다면 아쉬워서 눈물을 흘릴 사람은 제프 베조스입니다. 그가 돈을 하루에 " 백 억씩 죽을 때까지 ㅡ " 흥청망청 쓴다고 해서 그의 자산이 줄어드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시간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요, 화수분이죠. 


그가 잠을 자는 동안 자산은 100억씩 불어나 있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는 시간에 1억을 벌기도 했죠. 세계 최고 부자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편에는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저임금 노동으로 의료 시설 이용과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만든 메디케어와 푸드시스템(꿈나무 카드)이 있습니다. 이 혜택을 이용하는 노동자 중에서 대략 35%는 월마트, 아마존, 맥도날드에서 일하는 대기업 풀타임 노동자입니다. 풀타임으로 일을 하지만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마존 노동자 임금은 최저생계비를 밑도는 저임금입니다.


세계 1위 기업의 작업 환경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이상을 초월합니다.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발생한 재해발생률은 산업계 평균보다 2배 높습니다. 또한 결근은 말할 것도 없고 지각 한 번 하면 해고입니다. 이 물류창고에는 최소한의 냉난방 시설도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아마존 노동자는 여름에는 일사와 싸워야 하고 겨울에는 동사와 싸웁니다. 탈수나 일사병으로 쓰러진 직원이 속출하지만 아마존은 에어컨을 개선하는 대신에 밖에 구급차를 상주 대기하도록 했습니다. 결원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여 대기실에는 직원을 대신할 대기자도 있습니다. 시설 개선보다는 구급차를 상시 대기하는 비용이 저렴하거든요. 


아마존은 노조가 없습니다, 아마존은 최저 임금 정책을 고수합니다, 아마존은 해고가 자유롭습니다. 작업 도중 허락 없이 화장실에 갔다는 이유로 해고된 노동자도 있습니다. 배조스의 성공 스토리와 아마존 노동자의 노매드랜드 서사를 20자평으로 요약해 볼까요 ? 베조스는 돈벼락, 노동자는 날벼락 !  제프 베조스야말로 진정한 오징어 게임의 승자입니다. 그는 자유로운 해고를 통해 노동자가 받아야 할 정당한 노동 품삯을 줄여서 부를 축적한 인물입니다. 베조스에게 빼앗긴 노동자의 돈은 " 땀 흘려 번 돈 ㅡ" 이고 " 피 같은 돈 ㅡ" 이라는 점에서 제프 베조스는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는 드랴큘라입니다. 


어젯밤에 제임스 웨일의 << 프랑켄슈타인, 1931 >> 를 다시 봤습니다. 이 영화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대부호의 아들입니다. 명망 높은 정치인들도 그의 아버지 앞에서는 하수인처럼 쩔쩔 맵니다. 스탠포드 대학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프랑코 모레티가 쓴 << 공포의 변증법 >> 에서 그는 프랑켄슈타인 과 드라큘라 를 맑스 자본론'으로 풀어냅니다. 그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한 괴물은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한다고 지적합니다괴물은 이름이 없습니다(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든 박사 이름이지 괴물 이름이 아니다)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은 “ 그것 : it, thing ㅡ ” 이거나 “ 흉측스러운 것 ㅡ ” 으로 지시될 뿐입니다. 과학자인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은 특정한 용도를 위한 만든 전시품(things)에 불과하지요. 그것은 주인의 욕망에 따라서 언제든지 폐기처분될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기도 합니다. 모레티는 이렇게 말합니다.“ (괴물)는 전적으로 창조자에 속(屬 무리 속)한다프롤레타리아와 마찬가지로 그는 집단적이고 인공적인 피조물이다. (공포의 변증법, 23)” 괴물은 죽은 민중의 시체 파편들을 꿰매서 만든 복수형입니다. 


메리 셀리가 묘사한 괴물은 정확히 태양 아래 검게 그을린 육체 노동자-들에 대한 표현입니다 

 

누런 살갗은 아래 비치는 근육과 혈관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했다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흑발은 출렁거렸고 이빨은 진주처럼 희었지만 이런 화려한 외모는 허여멀건 눈구멍과 별로 색깔 차이가 없는 희번덕거리는 두 눈쭈글쭈글한 얼굴 살갗그리고 일자로 다문 시커먼 입술과 대조되어 오히려 더 끔찍할 뿐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육체 노동자를 대표한다면 드라큘라는 독점 자본가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 작품에서 피 는 화폐 에 대한 은유이지요그러니까 드라큘라는 “ 피 를 빠는 것이 아니라 호주머니에서 “ 화폐 를 빼앗는 것입니다드라큘라는 사람 목숨을 빼앗는 데는 관심 없습니다그는 인간을 자신의 노예로 부리기 위해 이용할 뿐이죠그는 필요한 만큼만 빨아먹습니다그가 치사량에 가까운 피를 흡혈하지 않고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소량의 피)만 흡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그들을 살려두어야지만 피(화폐)를 계속 공급받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최저 생계비만 지급하는 제프 베조스의 경영 전략을 닮지 않았습니까 ? 프랑코 모레티가 << 드라큘라 >> 텍스트에서 피 > 를 화폐 로 치환한 데에는 마르크스 자본론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자본 1 >> 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본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 있는 노동을 빨아먹어야 살 수 있으며더 많은 노동을 빨아먹을수록 더 오래 사는 죽은 노동이다.

- << 자본 상 >> , 비봉출판사 296  


넷플렉스 드라마 << 오징어 게임 >> 에서 오일남은 이렇게 말합니다. "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공통점이 무엇인 줄 아나 ?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거야 ! "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드라마의 명대사로 뽑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투자의 다른 이름은 도박입니다.  투자는 합법적 노름이죠.  세계적 거부들은 모두 다 도박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정 ?  도박 습관의 대표적인 요인은 행운에 대한 믿음입니다. 자신의 선택이 맞아떨어졌을 때 느끼는 희열은 상상을 초월하는 오르가슴입니다.  아흥, 야메떼구다사이 !!! 


행운의 여신이 자기 편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는 신이 내 곁에 머물고 있다는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도박에 중독된 사람은 오함마로 손모가지가 부서지기 전까지 도박을 합니다. 그들에게는 천문학적인 돈은 도박 자금에 불과합니다. 내기에 건 돈이 클수록 짜릿하죠.  그래서 부자들은 사는 게 재미있습니다. 돈 버는 재미만큼 짜릿한 재미가 어디 있나요 ?  코로나 여파로 제프 베조스 같은 부자들은 천문학적인 재미를 보았죠. 오일남은 사는 게 재미가 없어서 오징어 게임에 참여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 나이에도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는 것을 보면, 


그는 도박에 중독된 인물입니다. 사는 게 즐거우니까 놀이에 탐닉하는 겁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사람에게는 한가하게 재미를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다른 이에게는 생존 게임이지만 오일남 같은 노인에게는 한갓 유한 계급의 레크레이션(여가 활동)일 뿐입니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보다 불행할 것이라는 신파적 맹신은 지나가는 봉천동 방동사니에게나 주세요. 이재용은 당신보다 안락하고 평온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새끼, 사는 게 존나 마음에 들걸요 ?  가난한 자와 부자의 공통점은 별거 없습니다. 언젠가는 죽습니다. 신이 가난한 인간에게 하사한 유일한 선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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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오르페와 백인 조르바











모든 단어에는 기본값이 정해져 있습니다. " 의사 ㅡ " 라는 단어의 기본값은 무엇일까요 ? 남성입니다. 이 단어에는 의사'는 남성이다 는 전제가 깔려 있죠. 남자 의사를 두고 남의사'라고는 하지 않잖아요. 반면에 여자가 의사인 경우에는 < 여의사 >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표준 국어 사전에 등재된 단어죠. < 여기자 > 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 남기자 > 라는 단어 들어보셨습니까 ? 젊었을 때 여기자로 활동했던 사람이 나중에 소설가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되돌아온 응답은 < 여류 작가 > 였습니다, 응 ?


늙은 여자라는 뜻을 가진 < 노파 > 라는 말도 꽤 웃깁니다. 노인이라는 단어는 가치 중립적이어서 모든 성별에 사용할 수 있지만 애써 노파라는 특수 상황을 만듭니다. 모든 디폴트가 남성에 맞춰진 것은 아닙니다. < 무당 > 의 기본값은 여자'이지요. 여자가 주로 무당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남자가 무당이 되면 " 남무당 " 이 될까요 ?  그럴 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남성 무당을 < 박수무당 > 이라고 하죠. 박수가 무슨 뜻일까요 ?  박수의 어원은 몽골어로 박시'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열된 사례들을 살펴보면 단어를 만든 주체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차이를 부각하려는 의도는 명백합니다. 차별입니다. 마르셸 까뮈 감독이 연출한 << 흑인 오르페 Orfeu Negro, 1959 >>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훌륭한 영화죠. 그런데 영화 제목이 이상합니다. 굳이 오르페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오르페가 백인이었다면 영화 제목이 << 백인 오르페 >> 가 되었을까요 ? 매우 이상한 강조법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그리스인 백인 조르바'라고 하지 않잖아요. 두 여성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한 명은 백인이고 다른 한 명은 흑인입니다. 흑인 여성이 백인 여성에게 묻습니다. 


" 너는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뭐가 보이니 ? " 백인 여성이 대답합니다. " 여자가 보이지 ! " 그러자 흑인 여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 나는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 여자 > 가 아니라 < 흑인 여자 > 가 보여. 너에게 피부 색깔은 보이지 않아. 너는 그것을 보지 않아. 그럴 필요가 없거든. 그것이 바로 특권이 작동하는 방식이거든.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지. " 그렇다면 남자는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볼 때 무엇을 볼까요 ?  남자는 거울을 볼 때 " 인간 " 을 봅니다. 


제가 이 자리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은 그 특권을 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특권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먼저 차별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차별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차이가 강조되어야 합니다. 특권을 가진 사람은 차별이 보이지 않죠.  보편성이라는 말도 사실은 굉장히 폭력적인 개념입니다.  보편성의 핵심은 다수이고 다수는 주류를 형성합니다.  사회적 디폴트 값이라는 것도 사실은 보편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인지 영하팽뢴과인지 하는 사람이 영화 << 캐롤 >> 을 본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제가 느끼기엔, 테레즈한테는 동성애적인 사랑이 필요한 게 아니라 캐롤이 필요한 겁니다. 근데 하필이면 캐롤이 여자였을 뿐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동성애를 다루는 영화에서는 상대방이 여자라는 게 핵심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성애적인 정체성에서 내가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라는 것이 그 사람을 말하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최근에 개봉을 앞두고 있는 < 대니쉬걸 > 같은 바로 그 영화가 그런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아닌 것 같아요. "  이동진은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뭐가 보일까요 ? 당연히 휴먼이 보일 겁니다. 


네에, 그레이트 휴먼이 보일 거예요.  이동진은 캐롤을 여성이라는 소수성을 가진 인물이라기보다는 그냥 단순히 보편적 인간으로 바라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성애적 사랑을 보편적 사랑으로 전환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거울을 통해 보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보편적 기본값이거든요. 이 영화는 이됭진 영하팽뢴가의 주장과는 달리 캐롤이 여성이어야지만 성립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상업 영화는 이성애 중심 서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동성애를 다루는 소수의 영화가 인디 영화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동진은 그 꼴조차 보기가 싫었던 모양입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도 없고 소수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인간이 영하팽론과랍시고 설치고 다니는 꼴을 보면 한숨이 나옵니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은 차별도 없고 그레이트 휴먼만 존나 넘치는 세상이 보입니다. 아름답죠. 참, 아름다운 세상이에요. 니미 조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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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19: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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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1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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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1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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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2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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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20: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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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2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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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소리도 없이
홍의정 감독, 유아인 외 출연 / SM LDG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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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도 없이1)










초희는 몇 짤 ? 네에, 11살입니다. 어린 남동생도 있죠. 한국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이라는 4인 가족입니다. 경제적 상황도 나쁘지 않은 모양입니다. 실수가 아니라면 유괴범이 가난한 집 아이를 납치할 리는 없으니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납치되었으니 아버지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이 영화는 아버지가 인질범에게 복수를 하는, 그렇고 그런 << 테이큰 >> 유형의 아버지 복수극'일까요 ?  이 영화의 묘미는 장르적 클리셰를 비틀어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좌회전 깜빡이 켜 놓고 우회전 하는 경우죠. 


창복(유재명 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초희 아버지는 납치범의 실수로 3대 독자인 막내아들 대신 딸이 납치된 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가부장 중에서도 진짜 가부장이죠.  그는 딸의 몸값이 너무 비싸다며 인질범과 가격을 놓고 흥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초희가 인질범에게서 풀려나는 일도 차일피일 미루어지지요.  납치 사건에서 시간이야말로 납치된 아이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골든 타임'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버지는 납치된 딸을 방치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볼 때 아버지는 딸에 대하여 그닥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초희는 어떤 아이일까요 ?  인질로 잡힌 아이는 눈치가 빠릅니다. 눈치가 빠르다기보다는 눈치를 본다는 표현이 적확할 겁니다. 초희는 평소에 어른의 눈치를 보는 것에 익숙한 아이입니다. 눈치를 < 보다 > 라는 사동사는 눈치가 < 보이다 > 는 피동사의 결과입니다. 눈치가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눈치를 봅니까 ?  그렇다면 피동사의 주체는 누구죠 ?  당연히 그 주체는 부모일 겁니다. " 눈치가 없는 아이 ㅡ " 가 사랑받는 아이일 수는 있으나 " 눈치를 보는 아이 ㅡ " 가 사랑을 받는 아이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초희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입니다. 


초희는 인질범의 마음에 쏙 들도록 " 예쁜 짓 " 을 하죠.  예쁜 짓 ?!  예쁜 짓을 나열해 봅시다  :  방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고 문주(유아인의 어린 여동생)를 보살핍니다. 이 모든 행동은 진심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연극에 가깝죠. 이 연극은 소꿉놀이와 유사합니다. 역할 놀이'를 하는 것이죠. 초희는 어머니 역할이고 태인은 아버지 역할입니다. 그리고 문주는 가짜 딸이죠. 초희는 밥상을 차려놓습니다. 문주가 제일 먼저 음식에 손을 대려고 하자 초희는 문주에게 밥상머리 교육을 합니다. " 오빠가 먼저 먹고 나서 먹자 ! " 우리가 이 장면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여성 차별의 교육화'입니다. 


딸보다 아들이 귀한 대접을 받는 가정에서 자란 딸은 성차를 재현함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차일피일 연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딸이라는 잰더에게 부여되는 예쁜 짓의 정체죠.  이 영화는 얼핏 보기에는 태인이 중심이 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초희가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 별주부전 > 이 아니라 < 토끼전 > 인 것이죠.  이 영화에 대한 수많은 논평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태인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이해합니다.  길티플레져 ?  참, 이상하지요. 별주부전에서 악당은 토끼를 납치한 별주부인데 우리는 오히려 토끼를 얄미운 캐릭터로 인식하고 있으니까요.  


이처럼 어느 쪽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해석은 180도 달라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프레임이자 이데올로기입니다. < 별주부전 > 에서 우리가 별주부에게 동조하는 이유는 가부장 사회에 길들여진 가해자(이거나 가해자의 서사에 익숙한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가해자 중심 서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그 텍스트를 해석하면 토끼가 얄미운 녀석이 되죠.  이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태인은 순수를 잃지 않은 어른으로 묘사되고 초희는 영악한 아이로 묘사가 됩니다. 초희가 배반한 것은 우정이 아니라 가부장의 통념입니다. 아이는 우여곡절 끝에 용궁을 빠져나옵니다. 


하지만 아이의 표정은 밝지 않습니다2). 아이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죠. 이 영화는 놀라울 만한, 번개처럼 느닷없이 출몰한 훌륭한 데뷔작'입니다. 놓치면 후회합니다. 





                                      


1)  < 소리도 없이 > 무슨 뜻일까요 ?  영화 속 태인(유아인)은 듣기와 읽기가 가능하지만 말은 하지 못한다는 설정을 가진 캐릭터입니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 구순기 고착 " 인 캐릭터입니다. 유아인은 누가 봐도 어른이 아니라 아이'입니다. 몸만 어른일 뿐이지요(반면에 눈치 백 단 아이는 일찍 철이 든 어른 같습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유형을 구순기라고 말하고 라캉은 이것을 " 상상계 " 라고 명명합니다. 상상계란 언어의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말을 배우고 언어에 대한 감각을 익히기 전이죠. 그래서 제목이 < 소리도 없이 >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 말도 없이 > 죠. 이 작품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대립을 다룬 영화입니다. 상징계에 속한 아이는 상상계에 머무르는 어른을 속이고 무사히 학교로 귀환하죠.


2) 초희는 집이 아니라 학교로 귀환합니다. 대부분의 유괴 영화에서 납치된 아이들은 결국에는 집으로 귀환하는 결말을 가졌는데 왜 이 영화에서 초희는 집이 아니라 학교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끝이 날까요 ?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언어)에 진입하는 행위는 " 아버지의 말과 법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언어는 남성 중심적 사고에 기반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남성적인 것은 좋은 의미로 사용되고 여성적인 것은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하죠. 한자를 보세요. 부수가 女인 한자치고 좋은 의미를 가진 한자는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남성 명사와 여성 명사로 구분되는 언어를 가진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배운다는 것부터가 이미 잰더 차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배우는 학교는 그 시작점입니다. 이 영화에서 초희는 남자 동생 대신 실수로 납치된 누나'입니다. 초희의 아버지는 딸의 몸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거래를 차일피일 미루죠. 사실상,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만약에 납치된 아이가 남자 아이였다면 몸값을 가지고 흥정을 할까요 ? 우여곡절 끝에 아이는 살아서 학교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죠. 이 영화는 납치된 여자 아이의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푸코에 의하면 학교는 아버지의 법을 강제로 가르치는 훈육 장치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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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랜드
제시카 브루더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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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은 얼굴의 집이다










< 장소 : 場所> 와 < 공간 : 空間  > 은 동의어처럼 보이지만 형질이 서로 다른 낱말에 가깝다. 공간이 비움이라면 장소는 채움이다. 여기서 채운다는 행위는 기억, 추억, 경험, 시간 따위'다. 그렇기에 장소는 공간보다 사적이며 은밀하다. 그런 점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장소에 대한 기억을 다룬 소설이다. 한때를 기억한다는 것은 곧 장소를 추모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場所(장소)에서 場은 때(시기)를 뜻하는 한자이다. 장소는 시간성이 지배하는 곳이다(공간은 말 그대로 공간성을 대표하는 곳이다). 


영화 << 노매드 랜드 >> 는 장소와 공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처럼 보인다. 주인공 펀(fern, 프랜시스 맥도먼드 분)은 " home ㅡ" 과 " house ㅡ" 의 차이를 강조한다. 친구 딸이 펀에게 홈리스냐고 묻자 펀은 자신이 home/less가 아니라 house/less라고 대답한다. 홈과 하우스의 차이는 분명하다. house는 텅빈 구멍이 크면 클수록 값이 비싼 상품이 되지만 home은 좋은 기억과 추억을 많이 채울수록 좋은 곳이 된다. 전자는 결핍과 여백(구멍)의 사이즈가 클수록 상품 가치가 높은 유형 자산에 속하지만 후자는 물물거래가 불가능한 무형 자산에 속한다. 


영화 << 노매드 랜드 >> 가 말하고 싶은 것은 유랑민은 매매할 수 있는 주택이 없을 뿐이지 가정이 해체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폭정 아래에서 소외된 그들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것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생존의 방식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은 정당한 것이다. 이 영화는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유랑인을 " 자발적 낭만 " 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 비참한 노숙 " 이라고 비하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미덕이다. 이 영화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 앞에서는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도, 자꾸 눈물이 난다. 


마크 로스코의 추상화를 감상했을 때 느꼈던 그런 슬픔이다1). 릴케는 노래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아름다움을 그토록 찬미함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이다. 무엇보다도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얼굴은 압도적이다. 화장을 지운 얼굴에서 드러난 주름 하나는 뛰어난 각본가가 공들여 작성한 훌륭한 대사보다 명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주름이야말로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집대성한 장소다. 실력이 뛰어난 목수가 좋은 집을 짓듯이 좋은 사람은 멋진 주름을 만든다. 주름은 얼굴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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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북사랑 2021-05-07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우스는 텅빈 구멍이 크면 클수록 값이 비싼 상품이 되지만 홈은 좋은 기억과 추억을 많이 채울수록 좋은 곳이 된다.˝ 와!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이 한문장만으로도!!!! 감이 확

얄라알라북사랑 2021-05-0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우스는 텅빈 구멍이 크면 클수록 값이 비싼 상품이 되지만 홈은 좋은 기억과 추억을 많이 채울수록 좋은 곳이 된다.˝ 와!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이 한문장만으로도!!!! 감이 확
 


























케빈에 대하여 










살인 사건이 발생했고 범인은 잡혔다. 형사는 묻는다. 왜 죽였어?  살인자는 why 라는 의문문에 대하여 because가 포함된 문장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이 진술을 토대로 기자는 기사를 작성한다. 강력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언론 기사는 대부분 가해자의 진술에 의존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언론에 공개된 서사는 대부분 가해자 중심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과연 이 서사는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 


죽은 자는 진실을 말할 수 없고 산 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변명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다면  :  언론에 유포된 가해자 중심의 서사는 믿을 것이 못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악한 영혼을 가진 범죄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강간 살해)라고 진술하거나, 아내가 시부모 욕을 해서 욱해서 살인을 저질렀다(가정폭력 살해)고 진술하거나,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피해자가 반항을 해서 죽였다(강도 살해)는 진술은 믿지 않는 것이 좋다. 이 모든 진술은 감형을 염두에 둔 변명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연쇄살인범에게 덧씌워진 서사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대부분 어릴 적에 강간을 당한 경험이 있고 어렸을 때 성질이 사나운 엄마와 아빠의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고 고백하지만 이 연쇄살인범들의 고백 또한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변명처럼 들린다. 강간을 당한 피해자였기에 나중에 강간 살해를 했고, 어릴 때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범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자기 내부의 사악한 본성보다는 외부의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범죄자의 고백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이 고백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묻고 싶다.  정말 그럴까 ? 


영화 << 케빈에 대하여,2012 >> 는 가해자 케빈이 진술한 드라마를 재현하지 않고 철저하게 피해자(케빈의 어머니)의 시선으로 재현한 드라마'다. 영화는 관객에게 이제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해 봅시다,  라고 제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에바에 대한 이야기다.  집단 학살 가해자의 어머니이기에 겪어야 하는 수난극은 성서의 욥 이야기를 닮았다.  신이 욥에게 내리는 "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불행 " 에는 이유가 없다.  케빈은 신의 명령으로 욥에게 온갖 종류의 고통을 주는 사탄을 닮았다.  이 사탄은 신의 대리자라는 점에서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니다. 


케빈도 그렇다. 그는 에바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신의 대리자'이다. 관객은 끊임없이 케빈이 대량 학살을 저지는 이유를 밝히려고 노력한다. 한쪽은 케빈의 본성 탓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은 에바의 잘못된 양육 탓이라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관객의 포지션이다. 케빈이 신의 대리자(사탄)이고 에바가 욥이라면 관객은 욥의 세 친구 역할을 한다.  빌닷, 엘리바스, 소발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그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욥의 고통은 커진다.  결국 세 친구가 내린 결론은 이 고통은 그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  신이 내린 형벌에는 나름의 논리와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럴수록 욥은 자신의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 "  이때 신이 나타난다. 욥은 신에게 자신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묻지만 신은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에바는 교도소에 수감 중인 케빈에게 찾아가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왜, 그랬니 ?  이제는 말할 수 있잖아(" I want you to tell me, why? ") ? " 하지만 케빈은 끝끝내 그 의문문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I used to think I knew, but now I’m not so sure ")


케빈은 신의 대리자일 뿐이고 에바는 신에 의해 선택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케빈의 본성 탓도 아니고 에바의 양육 탓도 아니다. 누군가가 겪는 고통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고 믿는 관객은 진짜 가해자를 찾기 위해 설왕설래하지만 어쩌면 에바를 정말 힘들게 하는 가해자는 관객일지도 모른다. 고통의 책임 사유를 욥에게 전가하는 세 친구에게 신은 이 우주가 얼마나 경이롭고 복잡하냐고 꾸짖는다. 이와 똑같은 대답을 나도 관객들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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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3-26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동안 정말 멍~ 해지는 영화입니다.
계속 생각나는 불편한 영화, 그래서 잘 만든 영화라고 기억됩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21-04-02 19:27   좋아요 0 | URL
불편한 영화가 좋은 영화죠...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는 증거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