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랜드
제시카 브루더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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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은 얼굴의 집이다










< 장소 : 場所> 와 < 공간 : 空間  > 은 동의어처럼 보이지만 형질이 서로 다른 낱말에 가깝다. 공간이 비움이라면 장소는 채움이다. 여기서 채운다는 행위는 기억, 추억, 경험, 시간 따위'다. 그렇기에 장소는 공간보다 사적이며 은밀하다. 그런 점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장소에 대한 기억을 다룬 소설이다. 한때를 기억한다는 것은 곧 장소를 추모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場所(장소)에서 場은 때(시기)를 뜻하는 한자이다. 장소는 시간성이 지배하는 곳이다(공간은 말 그대로 공간성을 대표하는 곳이다). 


영화 << 노매드 랜드 >> 는 장소와 공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처럼 보인다. 주인공 펀(fern, 프랜시스 맥도먼드 분)은 " home ㅡ" 과 " house ㅡ" 의 차이를 강조한다. 친구 딸이 펀에게 홈리스냐고 묻자 펀은 자신이 home/less가 아니라 house/less라고 대답한다. 홈과 하우스의 차이는 분명하다. house는 텅빈 구멍이 크면 클수록 값이 비싼 상품이 되지만 home은 좋은 기억과 추억을 많이 채울수록 좋은 곳이 된다. 전자는 결핍과 여백(구멍)의 사이즈가 클수록 상품 가치가 높은 유형 자산에 속하지만 후자는 물물거래가 불가능한 무형 자산에 속한다. 


영화 << 노매드 랜드 >> 가 말하고 싶은 것은 유랑민은 매매할 수 있는 주택이 없을 뿐이지 가정이 해체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폭정 아래에서 소외된 그들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것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생존의 방식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은 정당한 것이다. 이 영화는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유랑인을 " 자발적 낭만 " 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 비참한 노숙 " 이라고 비하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미덕이다. 이 영화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 앞에서는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도, 자꾸 눈물이 난다. 


마크 로스코의 추상화를 감상했을 때 느꼈던 그런 슬픔이다1). 릴케는 노래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아름다움을 그토록 찬미함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이다. 무엇보다도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얼굴은 압도적이다. 화장을 지운 얼굴에서 드러난 주름 하나는 뛰어난 각본가가 공들여 작성한 훌륭한 대사보다 명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주름이야말로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집대성한 장소다. 실력이 뛰어난 목수가 좋은 집을 짓듯이 좋은 사람은 멋진 주름을 만든다. 주름은 얼굴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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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북사랑 2021-05-07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우스는 텅빈 구멍이 크면 클수록 값이 비싼 상품이 되지만 홈은 좋은 기억과 추억을 많이 채울수록 좋은 곳이 된다.˝ 와!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이 한문장만으로도!!!! 감이 확

얄라알라북사랑 2021-05-0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우스는 텅빈 구멍이 크면 클수록 값이 비싼 상품이 되지만 홈은 좋은 기억과 추억을 많이 채울수록 좋은 곳이 된다.˝ 와!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이 한문장만으로도!!!! 감이 확
 


























케빈에 대하여 










살인 사건이 발생했고 범인은 잡혔다. 형사는 묻는다. 왜 죽였어?  살인자는 why 라는 의문문에 대하여 because가 포함된 문장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이 진술을 토대로 기자는 기사를 작성한다. 강력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언론 기사는 대부분 가해자의 진술에 의존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언론에 공개된 서사는 대부분 가해자 중심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과연 이 서사는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 


죽은 자는 진실을 말할 수 없고 산 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변명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다면  :  언론에 유포된 가해자 중심의 서사는 믿을 것이 못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악한 영혼을 가진 범죄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강간 살해)라고 진술하거나, 아내가 시부모 욕을 해서 욱해서 살인을 저질렀다(가정폭력 살해)고 진술하거나,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피해자가 반항을 해서 죽였다(강도 살해)는 진술은 믿지 않는 것이 좋다. 이 모든 진술은 감형을 염두에 둔 변명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연쇄살인범에게 덧씌워진 서사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대부분 어릴 적에 강간을 당한 경험이 있고 어렸을 때 성질이 사나운 엄마와 아빠의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고 고백하지만 이 연쇄살인범들의 고백 또한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변명처럼 들린다. 강간을 당한 피해자였기에 나중에 강간 살해를 했고, 어릴 때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범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자기 내부의 사악한 본성보다는 외부의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범죄자의 고백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이 고백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묻고 싶다.  정말 그럴까 ? 


영화 << 케빈에 대하여,2012 >> 는 가해자 케빈이 진술한 드라마를 재현하지 않고 철저하게 피해자(케빈의 어머니)의 시선으로 재현한 드라마'다. 영화는 관객에게 이제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해 봅시다,  라고 제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에바에 대한 이야기다.  집단 학살 가해자의 어머니이기에 겪어야 하는 수난극은 성서의 욥 이야기를 닮았다.  신이 욥에게 내리는 "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불행 " 에는 이유가 없다.  케빈은 신의 명령으로 욥에게 온갖 종류의 고통을 주는 사탄을 닮았다.  이 사탄은 신의 대리자라는 점에서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니다. 


케빈도 그렇다. 그는 에바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신의 대리자'이다. 관객은 끊임없이 케빈이 대량 학살을 저지는 이유를 밝히려고 노력한다. 한쪽은 케빈의 본성 탓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은 에바의 잘못된 양육 탓이라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관객의 포지션이다. 케빈이 신의 대리자(사탄)이고 에바가 욥이라면 관객은 욥의 세 친구 역할을 한다.  빌닷, 엘리바스, 소발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그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욥의 고통은 커진다.  결국 세 친구가 내린 결론은 이 고통은 그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  신이 내린 형벌에는 나름의 논리와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럴수록 욥은 자신의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 "  이때 신이 나타난다. 욥은 신에게 자신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묻지만 신은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에바는 교도소에 수감 중인 케빈에게 찾아가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왜, 그랬니 ?  이제는 말할 수 있잖아(" I want you to tell me, why? ") ? " 하지만 케빈은 끝끝내 그 의문문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I used to think I knew, but now I’m not so sure ")


케빈은 신의 대리자일 뿐이고 에바는 신에 의해 선택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케빈의 본성 탓도 아니고 에바의 양육 탓도 아니다. 누군가가 겪는 고통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고 믿는 관객은 진짜 가해자를 찾기 위해 설왕설래하지만 어쩌면 에바를 정말 힘들게 하는 가해자는 관객일지도 모른다. 고통의 책임 사유를 욥에게 전가하는 세 친구에게 신은 이 우주가 얼마나 경이롭고 복잡하냐고 꾸짖는다. 이와 똑같은 대답을 나도 관객들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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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3-26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동안 정말 멍~ 해지는 영화입니다.
계속 생각나는 불편한 영화, 그래서 잘 만든 영화라고 기억됩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21-04-02 19:27   좋아요 0 | URL
불편한 영화가 좋은 영화죠...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는 증거이니 말입니다.
 















                              


영화 < 조제 > 에  대하여   :










위스키의 바디감










내가 싫어하는 영화 부류는 슬픈 장면에서 슬픈 배경음악을 과도하게 삽입한 경우다. 이런 영화는 십중팔구 배경음악이 전체 사운드를 잡아먹는다. 감독의 의도는 명확하다. 음악을 활용하여 관객 몰입도를 최대한 끌어올리고자 하는 수작이다. 감독은 슬픈 표정을 짓는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은 후 슬픈 음악의 볼륨을 점점 높이면서 관객과 밀당을 펼친다. " 자, 이제 울어 ! 안 울어 ?  이래도 안 울래 ? " 관객이 울지 않으면 주인공을 더욱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넣겠다는 태도다. 이것은 감독이 슬픔을 볼모로 관객을 협박하는 것이다.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격렬비열도에서 태어난 죽방멸치 새끼라면 콧방귀도 안 뀌겠지만, 관객 대부분은 그 장면에서 가거도 우럭도 아니면서 울컥하게 된다. 타인의 비참에 대하여 슬픈 마음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이니깐 말이다. 하지만 관객이 눈물을 보였다고 해서 그 장면(그 영화)이 작품성을 갖췄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관객이 꼴렸다고 해서 그 영화가 반드시 훌륭한 에로 영화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마찬가지로 관객이 크게 웃었다고 해서 그 영화가 반드시 훌륭한 코미디 영화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작품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영화적 재현의 윤리이다. 


내가 장애인을 다루는 한국 영화를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장르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들에게 장애인은 웃음 코드와 감동 코드로 활용할 수 있는 캐릭터에 불과하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프레임에는 동물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저변이 깔려 있듯이 장애인보다도 못한 비장애인이라는 프레임은 장애인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차별이 깔려 있는 태도'다. 그리고 이성애를 다루는 사랑 영화 속에서 여성은 " 여자에게는 사랑이 전부 " 로 등장하지만  현실 속에서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여성은 없다. 가난을 다루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상을 타자화할 때 발생하는 오류이다. 이런 오류들이 발생하는 영화는 대부분은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다루고, 남성 감독이 여성을 재현하고, 가난한 적이 없는 자가 가난을 병풍처럼 활용할 때 발생한다.  무지할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다. 영화 << 조제 >> 는 이 오류와 기만과 무지가 만든 최악의 영화'다. 관객들은 프라이팬 대신 다리미로 스팸을 굽는 조제의 장면이 등장할 때 웃었지만 나는 그 장면이 빈곤에 대한 무지와 조롱처럼 보여서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가난이 결핍의 세계라 해도, 낯선 남자 앞에서 다리미 위에서 스팸을 굽는 궁상을 보여주고 싶은 여자가 있을까 ?  


감독은 그것이 꽤나 신선한 영화적 상상력이라며 낄낄거렸겠지만 재현에도 윤리가 있는 법이다. 감독은 가난을 병풍처럼 세워놓고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분야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감독이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위스키의 바디감과 커피의 바디감1)을 남발할 때마다 나는 그 옛날 박근혜 정권 때 워싱턴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윤창중의 그립감 발언이 떠올랐다. 영화는 조제의 빈곤과 비참과는 다르게 아름다운 화면으로 모든 장면을 채웠지만 그것은 마치 6성급 호텔 만찬회에서 산해진미를 맛보며 세계의 가난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가난과 장애와 여성을 병풍처럼 세워놓고는 정작 위스키와 커피의 바디감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낮게 속삭였다. " 아이, 시발. 격렬비열도의 죽방멸치만도 못한...... " 




​                               


1)    위스키와 커피의 공통점은 살롱 문화의 오브제라는 점이다. 위스키가 중산층 남성의 (룸)살롱 문화를 대표하는 오브제라면 커피는 중산층 여성의 살롱 문화를 대표한다. 감독이 위스키와 커피의 바디감을 소재로 다양한 에피소드를 구성했다는 것은 그가 살롱 문화에 익숙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장르는 멜로가 아니라 살롱 영화'다. 살롱에 모인, 먹고살 만한 사람들이 위스키와 커피의 바디감을 즐기며 문학을 이야기하며 예술을 논하는 것은 얼마든지 좋다만 다리미 위에서 스팸 굽는 여자를 안줏거리로 사용하지는 말자. 부탁이다. 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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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12-31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곰발님 벌써 2020년이 다 지나가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한 한 해 되세요!^^:)

곰곰생각하는발 2020-12-31 21:34   좋아요 1 | URL
겨호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고양이도 건강히 잘 지내고, 따님도 항상 신나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han22598 2021-01-02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생각을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고선 했어요. 죽었다 깨어나도 비장애인인 나는 장애인을 대변할 수 없다고....거의 불가능한일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더라고요.

곰곰생각하는발 2021-01-02 20:49   좋아요 0 | URL
실격..... 이 책이 아마 작년에 나온 책이죠 ? 인상 깊은 책이었습니다.
 
야구소녀 파랑새 영어덜트 1
변은비 지음, 최윤태 원작 / 파랑새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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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능하다고 믿어지지 않는 것보다는 불가능하지만 있음직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         아리스토텔레스가 << 시학 >> 에서 한 말이다. 사실, 두 개의 전제는 모두 가능하지 않는 가능성을 말하고 있지만 접근 방식은 사뭇 다르다. 


전자( : 가능하다고 믿어지지 않는 것)는 논리적 검증의 영역에 속하지만,  후자( : 불가능하지만 있음직한 것)는 텍스트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허구를 신뢰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는 태도에 방점이 찍힌다. 중요한 것은 신뢰감과 설득력이다. 핍진성에 대한 문학적 장치는 영화에도 적용된다.  내가 영화 << # 살 아 있 다 >> 를 시간 날 때마다 물고-뜯고-씹는 이유는 감독이 불가능하지만 있음직한 서사를 버리고 가능하다고 믿어지지 않는 서사를 연출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길이가 24미터나 되는 로프를 이용하여 A동 4층과 맞은편 B동 4층을 수평으로 연결했을 때 동력 장치가 없는,  


로프에 매달린 식량 가방이 무서운 속도로 미끌어져 내려갈 때 관객은 영화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는다.  자전거 패달을 밟지 않고서 오르막을 신나게 내달렸다는 신소리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  그것은 곧 생산자가 수용자에게 보내는 설득력에 균열이 발생했다는 뜻이고, 동시에 수용자가 생산자에게 보내는 신뢰감이 깨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영화사가 많은 제작비(순제작비 70억)를 투입하여 분장과 특수효과로 좀비의 핍진성을 살렸다고 해도 한 번 깨진 믿음과 신용은 복원되기 쉽지 않다. 관객은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이 충무로 놈들아.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             


영화진흥공사에서 지원하는 제작비(1억 2천)로 만든 저예산 독립 영화 << 야구소녀 >> 는 아마추어 운동선수가 프로야구 구단 팀에 문을 두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아마추어 야구선수가 프로 구단 2군 육성 선수로 구단에 입단할 가능성은 대략 4%라고 한다. 이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프로 2군 팀 육성 선수가 프로 1군에 진입하는 경우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결국 1%의 선수가 프로 무대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의 도장 깨기'가 앞날에 대한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프로 무대에서 주전이 된다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희박한 확률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이 모든 가능성은 야구 소년'에 국한된 데이터이다.  야구 소년이 아니라 야구 소녀라면 가능성의 가능성의 가능성에 대한 데이터는 아무 소용이 없다.  에둘러 말할 필요 없이, 여성 운동선수가 프로야구 선수가 될 가능은 없다.  여자 프로야구 선수가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 프로야구 구단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불가능한 설정을 " 그럴듯하고 있음직한 이야기 " 로 관객을 납득시키려고 노력한다. 이 영화는 야구 소녀가 프로 구단에 입단하여 한국 시리즈 마지막 경기 9회말 2아웃 상황에 등장하여 상대 팀을 제압하는, 


가능하다고 믿어지지 않는 서사를 버리는 대신에 불가능하지만 있음직한 서사를 선택한다. 감독이 이 영화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 도전과 성공 > 이 아니라 < 도전과 성장 > 이었다. 성공담 대신 성장담을 선택한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 입봉(데뷔)한 감독은 적은 제작비로 효율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종종 어디선 본 듯한 장면과 몇몇 오글거리는 대사가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어디서 개수작이야 _ 라는 태도로 일관했던 관객은 어느덧 정자세를 하고 소녀를 응원하게 된다. 빅토리 ! 빅토리 !!  븨, 아이, 씨이, 티이, 오, 알, 와이 !!! 주수인 퐈이팅 ~ 



+

야구보다 재미없는 스포츠가 있을까 ?  3시간짜리 스포츠를 관람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연장전이 이어지면 6시간 동안 혈투를 펼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된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스포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야구를 보는 이유는 " 욕하면서 보는 재미 " 를 버릴 수가 없다는 데 있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팬이라면 자신이 응원하는 팀 선수에게는 격려와 칭찬을, 반대로 상대 팀에게는 욕과 저주를 퍼붓기 마련이지만 엘지 팬인 나는 주로 앨지 선수들을 욕한다. 반대로 상태 팀 선수를 욕한 기억은 거의 없다. 류현진의 체인지업은 황홀했고 타자 앞에서 빠르게 휘는 김광현의 슬라이더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곤 했다. 욕하면서 보다 보니 염장이 터지는 일이 종종 발생하게 된다. 엘지는 천국이자 지옥이었으며 빛이자 그림자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야구라는 스포츠의 최대 장점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저주를 퍼붓는 잦은 경험을 통해서 내 자신이 얼마나 쪼잔한 인간인가라는 사실을 각인하게 만드는 재주가 아닌가 싶다.  나는 야구를 볼 때마다 속 좁은 내 인성에 종종 놀라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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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와 화폐





드라큘라는 독점 자본가'를 대표한다피 는 화폐 에 대한 은유다그러니까 드라큘라는 “ 피 를 빠는 것이 아니라 호주머니에서 “ 화폐 를 뺏는 것이다드라큘라는 사람 목숨을 빼앗는 데는 관심 없다그는 인간을 자신의 노예로 부리기 위해 이용할 뿐이다그는 필요한 만큼만 빨아먹는다그가 치사량에 가까운 피를 흡혈하지 않고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소량의 피)만 흡혈하는 이유는 그들을 살려두어야지만 피(화폐)를 계속 공급받을 수 있다는 데 있다

드라큘라가 귀족 계급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금을 투자하는 사업가로 소개된다. 그뿐이 아니다. 하수인으로 등장하는 조나단 하커는 부동산업자이고, 인격화된 자본인 드라큘라 백작이 즐겨 읽은 책은 애덤 스미스의 << 국부론 >> 이다.  피를 훔친다(착취한다,강탈한다)는 점에서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인 셈이다.  또한 흡혈귀가 강할수록 살아 있는 사람은 약해진다는 설정은 독점 자본이 강할수록 서민은 생활고에 시달린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 자본론 >> 에서 맑스는 " 자본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 있는 노동을 빨아먹어야 살 수 있으며

더 많은 노동을 빨아먹을수록 더 오래 사는 죽은 노동이다 " 라고 지적한다. 드라큘라가 자본가를 대표한다면 좀비는 노동자 계급을 대표한다. 그들은 죽은 자'이기에 더 이상 자본 상품을 구매할 능력이 없는 소비자일 뿐만 아니라 노동력을 생산할 수도 없는 노동자이기도 해서 무능자이기도 하다. 강신주가 중앙일보 칼럼에서 서울역 노숙자를 향해  "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어 있는 좀비처럼 보인다 ㅡ " 라고 지적한 것은 평소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그가 철저하게 자본주의 입장에서 화폐 경쟁에서 밀려난 노동자를 좀비로 취급했다는 점에서 논리 모순이다.

좀비 떼의 출현은 경제 공황에 따른 기층민의 폭동을 연상하게 만든다. 소비 능력과 생산 능력이 모두 전무한 좀비는 주권자로서 국가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그러니까 좀비 영화 장르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욕망을 따른다. 이처럼 좀비 영화 장르는 프로이드 정신분석학보다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에 가깝다. 좀비물이 전무했던 한국 영화'에서 연상호 감독의 << 부산행, 2016 >> 이 천만 관객이라는 기적을 연출한 것은 동시대적 불안이 반영된 탓이다. 1%의 독점 자본이 99%의 노동자를 지배하는 " 헬조선 " 이라는 신조어가 2014년에 탄생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좀비 바이러스가 서울역 노숙자 집단에서 발생했다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연상호 감독의 영화 << 서울역 >> 은 강신주의 서울역 노숙자 발언과 일맥상통한다. 좀비는 독점 자본의 축적 위기로 인한 불황이  주기적으로 발생한 2000년대 이후  되살아난다. 주로 미국에서 생산하던 좀비물이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현상은 자본주의의 파국이 전지구적 위기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가의 송곳니에 피(화폐)를 빨린 기층민은 좀비가 되어 신선한 피와 살점을 찾아 어슬렁거린다. 좀비는 살아 있으나 죽은 목숨이거나 혹은 죽은 거나 다름없지만 마지 못해 사는 불가촉천민이면서 동시에 파산자'이다. 

연상호 감독의 좀비 3부작 마지막 편인 << 반도, 2020 >> 가 1000만 달러가 든 트럭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 또한 정신분석학보다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욕망으로 읽힌다. 좀비는 자본의 노예라기보다는 자본의 독점에 희생된 사람들이다. 반면에 헬조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는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돈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영화는 그들이 금융 자본 천국이자 심장인 미국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들은 반도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것이 성공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좀비 아포칼립스는 다중 채무자의 몰락 때문에 다다르게 되는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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