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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실물 ㄹ,ㅁ,

 

 

 

 

 

 

 

 

배추

 

엄마, 배를 가르니 이렇게 예쁜 속'이 나와. 내 배'를 갈라도 요렇게 노랗고 아삭아삭'한 속살이 나올까. 배추의 속'을 가르자, 볕'을 채우지 못한 하얀 속살'이 뱃속에서 잠을 자고 있다. 배를 갈라서 속이 예쁜 짐승'은 배추'가 유일하단다. 아니구나. 이 엄마'도 속이 예쁜 배추'란다. 내 배'를 갈라서 너처럼 예쁜 딸을 낳았으니, 나도 속이 예쁜 배추'로구나. 스물셋의 딸'은 고개를 돌린다. 육개월 시한부 선고' 받고 고향 찾아 내려온 몸. 엄마에게 미안하다. 배추'의 몸 어딘가에는 한 마리 푸른 새'가 숨어 있다. 벼린 칼로 배추 밑둥'에 살짝 생채기'를 내고  손으로 틈'을 벌리면 푸드득 푸드득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신기하다, 너. 식물의 몸'으로 알을 품어 새'를 낳다니. 신기하다 어미. 남부시장'에서 고사리'를 팔던 엄마'가 붉은 배춧속'을 하얀 배추 속'에 넣는다. 엄마, 매운 배춧속' 넣지 마. 엄마 속 버려. 딸 서러워서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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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실물 ㄹ,,ㅂ

 

 

 

목 련

 

 

 

속초시 조양동 하이마트 건물과 농협 5층 건물 사이'에 볕을 받지 못한 앙상한 나무'가 있다. 고사목인 줄 알고 가지 하나를 꺾으니 새빨간 피'가 흐른다. 살아 있는 목련 나무였다. 이 화창한 봄날에, 왜 이 목련은 꽃을 피우지 못했을까 ? 나무가 앞과 뒤가 어디 있겠는가마는 내가 보기에는 꼭 등돌린 나무 같았다. 건물 사람에게 물어보니 건물 대들보를 올릴 때 주인이 기념식수'로 심은 나무인데 단 한 번'도 꽃을 피운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오래 전 처녀의 몸으로 씨앗을 품고 죽은 먼 친척이 생각났다. 양잿물 덩어리'를 풀잎에 싸서 먹고 죽은. 나는 이 길목을 지나칠 때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영혼에 가슴이 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강대나무였던 목련 가지에 하얀 꽃송이가 만개한 것이 아닌가 ? 그것도 가지마다 흐드러진 풍경'이었다. 기쁜 마음에 달려가니 가지 위엔 목련꽃이 아니라 하얀 새가 내려앉았다. 어머, 나무가 꽃 대신 날짐승을 낳았다.

 

 

 

 

 

먼 친척 중에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죽은 누이가 있었다. 떠돌이 풍각쟁이'에게 마음을 빼앗긴 누이는 그 사내의 씨를 뱄고, 당시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던 딸은 혼자 끙끙 앓다가 양잿물 덩어리'를 넓은 파초에 싸서 삼켰다. 꽃 피기 전에 떨어진 도사리 같은 누이. 속초 조양동에는 꽃 피우지 못하고 죽은 앙상한 고사목 하나 있다.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도사리 같은 누이'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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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령

 

 

나 죽어도 당신은 파릇파릇 꽃 피울 것이다 실뿌리 내리고 잎잎이 이슬 받으면 꽃 피어 열매 맺을 것이다 비록 손가락 걸며 맺은 사랑의 약속은 비열했으나 시계추처럼 당신에게 매달린 나의 신파를 비웃지는 마라 사람은 누구나 탯줄에 매달려 사랑을 구걸하던 生이 아니었더냐 어쩌면 미시령 고개 너머에 눈처럼 하얀 젖가슴을 가진 당신을 닮은 여자가 나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둠에서 절망을 읽으나 또 누군가는 어둠에서 낭만을 읽을 것이다 철없는 녀자 하나 있어 그 옛날의 당신처럼 내 옷자락 끝을 잡고 애원할 것이다 아, 이 세상 모든 꽃들이 시든다 해도 미시령 고개 아래 벌거숭이 빈집에서 병들어 죽어도 눈이 감기는 그 순간까지도 나의 검은 망막 속에 당신의 고운 얼굴 새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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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실물 ㅅ,,ㅈ 

 

 

2

 

속초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던 때가 2월이었다. 국번이 없거나 결번이어서 당신 안부를 물을 수가 없던 나는 미시령을 넘었다. 안개주의보, 짙은 안개주의보 ! 잠에서 깨어 창밖을 보니 밖은 온통 안개로 인하여 한 치 앞이 어둠이었다. 하얀 어둠 사이로 점멸하는 빨간 신호봉'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 교통사고'가 났다고 알려주었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안개 탓이었을까, 그 남자의 얼굴. 견인차'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가장 높은 미시령 꼭대기'에 갇혔다. 기다리다가 지친 사람들은 밖에 나와서 오줌을 누었다. 잠시 생각에 빠졌다. 부모 고향이 전라도 해남이라고 했던가 ? 모르겠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난 전라도 여자'를 생각했다. 국번이 없거나 결번이어서 안부를 물을 수 없는 당신'을 생각했다. 2월에 여자와 헤어졌고, 2월에 속초를 향했고, 2월에 폭설이 내렸고, 2월에 실패에 감긴 실정맥을 풀었다. 푹 푹 빠지는 새벽 눈길을 걸었다. 그때였다. 우레 우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쌓인 눈을 견디지 못한 늙은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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