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실물 ㄱ, ㄴ,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렸다

 

사내는 육 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동해바다와 청초호가 보이는 터에 집을 얻었다. 방 하나에 작은 거실이 딸린, 지붕 낮은 달방이었다. 집 앞 넓은 공터를 텃밭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의지'가 그를 이곳에 머물게 했다. 입주 조건은 보증금 없이 다달이 세를 내는 달방 계약이었으나 사내는 이 년치 세/貰'를 일시불로 지급했다. 그가 살아갈 날보다 많은 나날이었다.  그가 그 공터에서 처음 한 일은 돌을 고르는 일이었다. 온갖 채소를 길렀다. 하루가 다르게 밭은 푸르렀다. 내가 그 집을 보러 갔을 때, 텃밭은 온갖 풀이 웃자라 있었다. 집주인은 내게 육 개월 세를 일시불로 줄 것과 육 개월이 지나면 그때부터 다달이 세를 줄 것을 요구했다. 전세도 아니고 월세도 아니고, 그렇다고 달방 계약도 아니었다. 이상해서 캐물으니 주인은 이 집에 살았던 사내에 대해 털어놓았다. " 풀도 주인 손길 탄다는 거 아우 ? " 주인은 웃자란 풀을 보며 말했다. 사내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 머문 지 반년도 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내가 그 집을 갔을 때, 그 집은 아직도 그가 세를 내고 있는 기간이었다. 육 개월 일시불은 죽은 세입자 가족에게 전달할 모양이었다. 내가 그 집을 얻는다면 나는 죽은 자와 계약 잔류 기간 동안 동거를 해야 했다. 방은 아담했다. 쪽창은 해가 기우는 빛을 받아 바닥에 쏟아냈다. 붉은 기운이 돌았으나 온기는 없는 빛이었다. 망설이다가 끝내 돌아섰다. 어젯밤, 꿈에 그 집이 보였다. 텃밭은 작은 채소들이 가지런히 자라고 있었다. 텃밭을 가꾼 모양새로 보아 솜씨 좋은 농부 같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텃밭은 온통 돌밭이었다. 나는 그 집 앞에서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떴다.

 

 

 

 

사막 지역 농사 터는 대부분 돌이 많다. 그들은 돌을 고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돌은 그늘을 만들어 주고, 낮에는 태양열을 흡수했다가 밤이 되면 열을 내뿜었으며, 돌에 맺힌 이슬은 물을 공급하기 때문이다. 솜씨 좋은 농사꾼은 텃밭을 가꿀 때 모든 돌을 고르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는 배양토 같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돌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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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실물 , ㅋ, ㅌ

 

 

 

춥다

 

 

 

 

 

 

꽃샘잎샘하는 계절인지라 밤에는 의외로 춥다. 조그마한 샷시 창문 사이로 칼바람이 들어온다. 청색 테이프로 꼼꼼하게 막는다. 그래도 춥다. 방에 불을 피운다. 가장 좋은 솜이불을 깐다. 그래도 춥다. 엄마는 전기 장판 전원을 켜 온도를 높인다. 딸이 이내 전기장판 전원을 내리며 말한다. " 엄마.... 시체는 온도가 올라갈 수록 빨리 썩어. " 나란히 눕는다. 늙은 노모가 맵고 싸한 연기를 맡으며 말한다. " 그래도 번개탄이라도 피우니 조금은 훈훈하구나. " 딸이 죽음을 삼키며 말한다. " 잘 자요, 엄마 ! " 엄마는 아무 말이 없다가 가까스로 말한다. " 번개탄이라도 피우니 그래도 조금은 훈훈하구나, 잘 자라. 내 가여운 딸들아. "

 

 

 

 

 

 

세 모녀의 죽음은 개인적 빈곤 때문이 아니라 빈곤을 개인의 무능과 실패로 규정하는 집단적 인식과 복지를 구걸'이라고 선동했던 정치가의 더러운 입이 원인'이다. 세 모녀가 절박한 상황에 대해 구원 요청을 하지 않은 까닭은 사회구성원으로써 당연히 행사해야 할 권리를 스스로 구걸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다음 생은 창문 열면 발뒤꿈치가 보이는 곳이 아니라 키 큰 나무 우듬지 보이는 높은 곳에서 사시길 바란다. 그날 밤, 그 일들을 복기하면 슬픔이 몰려온다. 청색 테이프로 바람을 막고, 편지봉투에 밀린 월세와 공과금을 담고, 번개탄을 피우고.... 이 모든 광경을 세 사람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란히 누워서 캄캄한 밤을 보냈을 것이다. 잠이 올 리 없다. 마지막 작별 인사는 했을까 ? 잘 자요, 엄마 ! 잘 자라, 내 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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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실물 , , ㅂ

 

 

 

 

 

 

 

물방울

 

가장 낮고 먼 곳에 고인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떨어지는 낙과(落果)처럼 보다 낮은 곳에 모여 물때를 기다리다 물오르는 시간이 오면 스스로 몸을 던진다 비록 자신이 머물렀던 끝이 좁고 날카로운 끝이었다 해도 그 角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항상 둥글다 유리는 유리에서 분리되는 순간 날카로운 끝으로 본색을 드러내지만 물은 물에서 분리되는 순간에도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채 즐겁게 추락한다 천상의 피조물이었던 당신 낮은 곳으로 내려와 티끌과 뒹굴며 처마 끝에 고이듯, 본디 물방울에서 태어난 물방울 또한 그 성정을 닮아 보다 낮은 곳으로 떨어져 흙과 뒹군다 아, 이토록 즐거운 추락 아아, 이토록 아찔한 수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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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실물 , ㅇ, ㅈ 

 

 

 

 

 

소설 小雪

 

11월 22일이나, 혹은 23일경

 

http://blog.naver.com/selve82/190089594

 

그녀는 외투를 걸치지 않은 채 낡은 스웨터'만 입고 있었다. 외투를 걸치기엔 춥지 않은 날씨였으나 그렇다고 스웨터만 입기에는 추운 날씨였다. 11월은 무엇을 하기에는 늦거나 이른 오후 3시처럼 어정쩡한 달'이었다. 그녀의 첫인상은 평범해서 눈에 띄는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서서 나갈 때, 나는 느닷없이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다. 며칠 후 눈이 내렸다. 첫눈이었다. 창문을 열어 눈 오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우연히 그 길을 지나가기를 기다렸으나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첫눈 오는 날은 종종 내 생일과 김장하는 날이 겹치고는 했다. 마당에서는 개가 컹컹 짖었고, 붉은 배춧속 위로 흰 눈'이 내려앉았다가 사르르 녹았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결국에는 헤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 나는 낡은 하늘색 스웨터의 올을 풀듯 실정맥을 풀었다. 파란 실이 붉게 물들었다. 병원을 퇴원하고 나서, 첫 번째로 간 곳은 도어즈'였다. 그 이후로도 술에 취하면 종종 그녀와 함께 가던 성대 도어즈'를 찾고는 했다. 낡은 철문과 좁은 계단을 보면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첫눈이 오면 늦은 밤 성대 도어즈'에서 레코드판으로 전송하는 들국화 노래를 듣고 싶다. 병맥주에 소박한 강냉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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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실물 ,

 

 

 

 

 

 

 

" 시작 " 의 반대말은 " 끝 " 이지만 " 첫- " 의 반대말은 " 헛- " 이었다. 그러므로 내 첫사랑은 헛사랑으로 끝났다. 사람들은 " 첫- " 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지만 내게 있어서 " 첫 - " 은 늘 헛것이었다. 새옷은 형이 차지했고 내 몫은 색은 바래고 모서리는 둥굴게 깎인 헌옷이 전부였다. 새옷은 내 것이 아니므로 욕심 내지 않았다. 그것은 모래알을 힘껏 움켜쥐는 일.  부질없는 짓.  세월이 흘러, 모서리가 둥근 여자'를 만났다.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사랑이었다. 여자의 옷소매 끝은 낡고, 낡고, 낡아서 보기에 안쓰러웠다. 어쩌면 나는 그 여자가 가지고 있던, 낡고 헤진 끝을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새옷 같던 첫사랑을 잊은 지는 이미 오래. 나는 첫사랑을 그리워했던 것이 아니라 끝사랑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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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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