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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올여름 결국 에어컨을 들여놓았다. 작년 무더위에 밤잠을 설치고 땀을 매단 채 놀던 아이들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20개월 할부로 들인 스탠드 에어컨은 현관을 넘기도 전에 거대함으로 나를 압도했다. 또 하나의 빚이, 내 것이 되는 순간이었다. 거실 벽을 뚫고 팔뚝만 한 선뭉치가 힘겹게 빠져나갔다. 마음대로 바깥에 거치대를 매달 수 없는 임대 아파트의 비좁은 베란다엔 거대한 실외기가 낯선 곳에 입양된 동물처럼, 웅웅거렸다.
설치기사가 떠난 후 어질러진 집을 정리하는데 불안했던 마음은 옅어지고 피식 웃음이 세어 나왔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숨바꼭질을 하고 뛰어다니는데 어쩐지 나는 고요해져 엎질러진 모든 슬픔을 감당할 용기가 생겼다. 아이들 소리에 아랫집에서 올라올까 전전긍긍하던 마음도, 오시면 사정을 잘 말씀드려야지 하는 여유로 바뀌어 있었다. 이 기적 같은 마음들이 숨 막히는 더위를 걷어내는 에어컨 바람 때문이란걸, 나는 알았다. 신이 나 연신 웃고 떠들던 6살 작은 아이가 내 마음을 읽었는지 한 마디를 던졌다. "엄마, 우리 에어컨 사길 정말 잘했다, 그치?"
점점 슬픔에 무뎌지는 나를 본다. 삶에 냉정해지고 냉철해지는 건 좋은 걸까. 나는 내 아이의 울음도 안아주지 않고 방에 들어가 스스로 견디길 명령했다. 아버지의 입원도, 누군가의 사정도 슬퍼하기 전에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을 먼저 찾았다. 일이 손에 잘 안 잡힌다는 남편에게 속 끓이는 걱정이 없어서라고 마음이 편해 괜한 불만이 생기는 거라 재촉했다. 다독이기 전에 먼저 잘못을 짚었다. 그래서 따라온 결과는 네가 감당해야 할 몫이고, 그러니 견디라고. 스스로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려 애썼다. 나는 요즘, 어느 날의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입은 내가 울지 않을까 봐, 그게 가장 두렵다.
그런 내가 그들 부부의 대화를 읽다 무너질 뻔했다.
평범한 가정에 불시에 일어난 상실과 그 거대한 부재에 몸을 던지려는 부부를 막은 건 곁을 지켜주려 애쓴 부모가 아니었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길 두려워 않는 마음을 붙잡아 앉힌 건, 안타까워 하던 이웃의 시선이 자식을 잃은 그들을 피하며 수군거림으로 변해가는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건, 떨어진 집값 때문이었다. '절벽처럼 가파른 이 벽' 아래서 그들을 붙잡고 있는 건, 빚이었다.
욕심부리지 말고 감사하며 살자고 다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영우가 떠난 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조용해진 이 집에서 아내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도배지를 들고 있자니 결국 그렇게 도착한 곳이 '여기였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p.33, 「입동」 부분
가족을 위해, 아이를 위해 애써 이곳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이유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살아야 할 이유는 남아 나를 면죄했다. 스스로 끝낼 수 없는 삶. 그렇게 빚을 지고 빚을 갚느라 아등바등 살면서도 남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은 '그러나'를 자꾸 생각나게 했다. 부부는 아이를 잃었으나(「입동」), 찬성은 에반을 잃었으나(「노찬성과 에반」), 도화는 이수와 헤어졌으나(「건너편」), 나는 교수 임용에 떨어졌으나(「풍경의 쓸모」), 억울한 오해를 받게 되었으나(「가리는 손」), 남편을 잃었으나(「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바깥은 여름이나 저마다의 부재를 견디며 다른 계절을 사는 이들. 살아내야 할 시간은 이어졌고 그것은 온전히 스스로의 몫이었다.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어찌될까. -p.145
「침묵의 미래」 속 '나'는 '뚜렷한 얼굴도 몸통도 없이' 모호하면서도 어쩐지 현실이란 박물관에 전시되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헤어짐을 불사하며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박물관에서 자신들의 아이를 빼돌리고, 도망쳤으나 누구도 그의 언어를 이해해주지 못해 다시 박물관으로 돌아와야 했던 사내와, 죽으며 '온전한 문장 하나 완성 못하고 숨을 거두' 었으나 그 모든 것을 아무 일 없듯 덮어버리는 고요를 나는 어딘가에서 본 것처럼 익숙하게, 그러나 눈은 마주치지 못한 채 마주하고 있었다.
'공짜를 바란 적 없'지만 삶은 늘 서운하고 서럽게 흘러갔다. '다른 사람들은 모'를 저마다의 비명을 지르며, 우리는 떠밀려갔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면서. 그것을 어쩔 수 없었던 나의 피해로 덮으면서. 시간이 지나면 다 견딜만해진다는 그 말을 구명튜브처럼 붙잡고 외로움을 견뎠다.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p.142, 「풍경의 쓸모」 부분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기를, 옳은 것을 옳다고 이야기하기를 점점 주저하게 된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을 견디는 이들을 보면서 그 고통이 내게로 옮겨붙을까, 내게 일어나면 어땠을까 두려워 잠을 설치는 날들. 부끄럽게도 나는 그렇게 나이를 먹고 있다. 몸을 숨긴 채. 내가 지켜야 할 두 아이들을 품고.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만은 곁을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절박하지만 여유로운 척 가끔 사람들과 차를 마시며, 어제의 일과 내일의 일 들을 나눴다. 그 대화들은 저마다의 부재 속으로 어지럽게 빨려 들어가 치유가 되거나 상처가 되었다.
담담하게 읽어가던 소설에서 내가 흔들렸던 건 그들이 누군가로부터 이해를 받던 순간이었다. 부부가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학생을 구하려다 함께 떠나버린 남편에 대한 원망이 그리움으로 바뀌고, 다문화가정의 아이란 이름표로 스스로 치러야 했을 비용과 그런 아이의 마음을 가만히 덮는 엄마의 나지막한 목소리 속에서 힘겨웠던 한 계절이 애써 닫히고 또 다른 한 계절이 열리려 하는 것을 보았다. 고된 더위를 뚫고 다가오는 한 줄기 찬 바람처럼, 숨 막히는 삶 속에 맡아지는 위안.
그 또한 ''삶'이 '삶'에 뛰어드는 행위'가 아닐까.
나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뛰어들 수 있을까.
사는 일은 누군가에게 빚을 지는 일이라는 걸, 그 빚을 누군가에게 갚으려 애쓰고 그러다 불쑥 누군가가 내게 갚기도 한다는 걸. 그렇게 내 삶을 빚이 붙들어준다는 아이러니 속에서, 그 마저도 빚이 되는가 싶은 슬픔 속에서 나는 가만히 내 생에 쌓인 빚의 쓸모를 생각해본다. 돈과 생과 타인과 시대에 진 빚들이 움직여가는 나의 삶을. 저마다의 빚을 갚으려 애쓰는 사람들이 만드는 슬프면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생을. 한 권의 책이 내게 가져온 잠시 뜨거웠던 눈물을. 나는 이 여름과 함께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