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평점 :
마음이 뭉클했다. 쓸쓸했다. 슬펐다. 곧 담담해졌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나는 세상이 멈춘 것 같은 고요 속에 있었다. 정신없던 어느 날 보았던 거울 속 그 여자가 내게 와서 미래를 보여준 뒤 사라진 것 같았다.
7월, 세상의 한 귀퉁이는 여린 생명이 보여준 기적으로 희망이 만개했고 또 다른 세상의 한 귀퉁이는 분노와 살인으로 공포스러웠다.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시간의 물살 앞에서 나는 희망의 온기에 울고 내일의 두려움에 울었다. 비가 내리고 그치길 끝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내 마음도 기울었다 세워지길 반복했다. 곁엔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이 있었다.
지금 읽어야 할 책. 이 시간이 아니면 내게 아무것도 아닐 책. 최근에 한 권의 소설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들에 좀처럼 마음이 가지 않았다. 오랜만에 어두운 수면등에 바싹 붙어 페이지를 넘겼다. 읽을 수 있음이 행복했다. 내 마음이, 감정이, 정신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때로 책이 운명처럼, 삶의 일부처럼 내게 다가오는 것처럼,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은 어떤 약속처럼 찾아왔다는 느낌이었다.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곱씹어보았다. 단단하고 아름다운 문장 위로 삶의 모습이 여과 없이 지나갔다. 그 씁쓸함이 좋았다. 삶이 버거울 때, 그 씁쓸함을 기억할 수 있다면 조금은 담담하게 그 삶을 견딜 수 있지 않을까.
한살 한살을 먹으며 변하는 건 삶의 채찍 앞에 선뜻 몸을 내놓기도 하고 누군가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죽음이 더 이상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급격한 심리적 성숙과 변화를 겪으며 나는 많이 지쳤다. 가정을 꾸리는 일은 하나의 기업을 세우는 일이었다. 여자는 아이를 낳음과 동시에 총체적 책임자가 되어 모든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끊임없는 사회 변화에 적응하고 주변을 살펴야 하며 공격적인 세상과 타협할 줄도 알아야 했다. 사랑이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 기업은, 가정은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여자는 그제야 자신을 들여다본다. 삶은 균형 없이 나로부터 떨어진 것에 집중되어 있고 몸에는 군살이 붙었고 얼굴은 화장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반질반질하게 자라난 아이들이 엄마라고 불러줄 때에야 반짝, 자신이 빛났다. 그러나 곧 아이들은 떠날 준비를 할 것이다.
이 부부 사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제휴의 시간 속에서? 무엇이 길을 찾아가고, 무엇이 흘러가는가? -p.113
소설은 한 부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이를 낳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몸과 매력을 지닌 네드라와 건축가로 일하며 벽난로 곁에서 아이들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비리는 누가 보기에도 완벽한 부부이며 완벽한 가정이다. 부부는 아이들을 통해 행복을 느끼며 미래의 희망을 보았다. '아이들은 우리의 작물이고, 밭이고, 땅이다. 어둠 속에 풀려난 새들이다. 새로이 회복된 실수다. 그래도 아이들은 우리보다 삶을 조금 더 잘 알고 조금 더 성공적으로 그려나갈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다. 어떻게 해서 그들은 한 가지 일을 할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고, 정상을 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미래로부터, 우리가 보지 못할 날들로부터 흘러나오는 밝은 빛을. 아이들은 살아야 하고 승리해야 한다. (p.114) ' 기도문처럼 외웠던 말들의 균열은 아이들이 훌쩍 자라고 부부가 늙어가는 시점에서 조금씩 일어난다. 헐거워진 삶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공허함과 무의미함은 생활이 고요해질수록 더 큰 파도로 밀려왔다. 네드라와 비리는 가정 안에서 완벽한 모습으로 타인과 마주하고 술과 함께 유쾌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들의 내면엔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감정의 허기, 자괴감, 무의미한 현실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소설 속에는 그들을 뒤흔드는 욕망과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신랄하게 드러나고 그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인다. 현실에선 금기된 부분이 서슴없이 보여진다. 그와 동시에 인간의 채워지지 않는 감정의 그릇도 헛헛하게 드러난다. 제임스 설터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어느 부부의 모습 안에서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삶의 실상을 목도하게 한다. 우리 각자가 홀로 숨어 싸우던 실상이 누구나에게 있다는 사실은 작은 안도감을 준다.
언젠가, 아이들을 챙기며 정신없이 집 안을 다니다 거울 속 나를 마주하고 가만히 섰던 때가 있다. 몹시 피곤해 보이는, 생기 잃은 한 여자의 낯빛이 슬펐다. 화장을 한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한 얼굴. 짙은 그림자. 시간이 새겨놓은 쓸쓸함이 현현했다. 무엇을 위해 이 자리를 선택했을까. 의미 없는 물음표가 나를 허공에 매달았다. 아이들 챙기며 집안일을 하며 정신없이 돌아다닐 때, 거울엔 그 여자가 안타깝게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뒤로도 여러 번 나는 내가 아닌 나를 보았다.
공감과 동요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며 책을 읽었다. 주부가 되어 느끼는 삶의 나른함은 한가함과 게으름과는 달랐다. 그것은 황폐이고 온기의 결핍이었다. 내 안을 혼란스럽게 채우던 감정들, 헛것 같고 무의미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던 그 감정들의 선명한 모습들을 보았다. 네드라가 겪고 있는 삶의 혼돈들. 그 한 귀퉁이가 내게도 있었다. 그녀가 결국 남편과 이혼을 택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와 나누는 마음 앞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처연했고 쓸쓸했다. 발버둥처럼 보였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견딘 거센 시간의 물살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지성을 유지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늙고 연약해 보이던 순간이었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일었다. 모든 삶의 끝이 이러할까. 어느 날 부턴가 나는 행복은 불행의 전조 같은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왔다. 마냥 좋아할 수 없고 마냥 슬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었다.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중요한 깨달음 중 하나는 꿈꾼 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p.325
작가는 이 소설을 왜 썼을까. 그것은 이러한 삶을 왜 부득부득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었다. 좀처럼 요약할 수 없는 책의 여운 속에서 신형철 평론가님의 추천사를 읽으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러므로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는 것임을 입증하는데 성공한다.
소설 속에서 흔들리고 사랑하고 위로받고 나니 조금은 내 삶에 너그러워진다.
곁에 있는 나의 아이들에게 좀 더 따뜻해지는 마음, 이것이 진짜 자신을 채울 수 있는 사랑이라고 설터는 말했었다. 그 누구와의 관계로도 채워지지 않던 네드라의 마음이 아이들 곁에서 평온하게 채워지던 모습. 그녀가 죽음 앞에서 딸아이에게 건네는 마지막 애정 어린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왜 사는 것일까, 에 대한 답을 갖는 일보다 지금 이 순간이 있다는 사실에 의미를 갖는 것이 중요했다. 삶은 그 무엇으로도 완벽하게, 영원히, 채워질 수 없다. 끊임없이 시간을 아끼고 노력하는 이에게만 겨우 잠시 아주 작은 의미를 느끼게 할 뿐이다.
시간은 거대한 파도로 끊임없이 다가오지만 결코 내게 머무르진 않는다. 시간이 나를 거대한 파도의 끝에 올렸을 때 눈을 질끈 감지 않고 볼 수 있는 많은 것을 가슴에 담아보려 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시간의 열차를 타고 선택 없이 시야를 파고드는 어지러운 풍경들을 견디며 늙고 병들어 간다. 성장한다. 열차 밖으로 내던져지는 상상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코 불행의 다른 이름이 되지는 못했다. 다만 끝까지 견뎌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일 지언정 종착역에서 삶의 끝을 마주하는 일이 아름다울 것이다. 휘리릭 넘겨지는 페이지엔 여운이 없다. 기다릴 줄 아는 자가 더 많은 것을 겪고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계절이 순환하여 우리의 생활을 긴장하게 하고, 견디게 하고, 이기게 하는 것처럼...... 이 책은 셔터를 누르고 싶은 순간이며 사방으로 내리는 빗방울처럼 가볍고 흔한 기억이기도 하고 상처였던 자리가 아무는 시간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지나와 추억하고 누군가는 곧 마주하게 될 삶의 정거장, 그 앞에 선 내게 설터가 소설을 빌어 건넨 담담한 고백은 꽤 오랫동안 내 가슴 속, 창문에 매달린 빗방울 같은 것들이 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