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아지똥
유은실 지음, 박세영 그림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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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똥이다. ‘

이 첫 문장부터 코끝이 시큰거렸다.
마지막 장을 읽을 때는 아예 울어버렸다.
’강아지똥/ 권정생’이 처연하면서 감동적이라면
’송아지똥/ 유은실’은 아름다우면서 숭고했다.
이 동화책은
살아 있는 시간이 그렇게 짧은데
나이를 따지는 건 불공평하다며
말놓기를 청하는 스웩 충만한 감나무, 리듬감과
평화를 사랑하는 질경이,
평이가 있는 마당에서 ‘태어난’ 송아지똥 이야기이다.

송아지똥은 스스로를 똥또로똥이라고 이름붙이고
자신의 짧은 똥생을 생각하며
세상을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철학적인 똥이다.
이름은 부르기에 좋은 고유명사의 역할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존재’함을 선포하고 알리는 수단이기도 하다.
한 예로 인디언들은 스스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스스로가 알아낸 자신의 정체성,
‘나’라는 존재에 대한 선언,
그것이 바로 이름인 것이다.
그런데 똥또로똥이라니...
이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걸까.

그것을 알기 위해 우선 똥또로똥의 출생을 알아봐야 한다.
똥또로똥은 도망나온 송아지가 잡혀가기 전에 ’낳은’ 똥이다.
도망쳤다는 것은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아야 일어나는 행동이다.
아마도 이 송아지는 갇혀있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자유를 꿈꾸었을 것이다.
송아지가 속박을 벗어나 도망칠 때
몸속에 희망과 함께 품고 있었던
똥이 철학적이고 순수한 똥또로똥으로 태어난 것이다.
다시 잡혀가는 송아지가 남긴 희망의 한 조각이자
한 덩이 자유로 말이다.

-난 왜 여기서 태어났어?
-음 저 아랫마을 축사에 사는 송아지가
고삐가 풀린 틈에 도망쳤대.
여기까지 와서 너를 낳고는 저기로 다시 잡혀갔지.
-잡혀가는 건 슬퍼.
-똥또로똥. 그래도 도망쳐 봤잖아.
도망쳤으니까 잡힐 수도 있는거야.

어느 날, 똥또로똥은
강아지똥(권정생)이야기를 듣고
강아지똥처럼 쓸모 있는 삶을 꿈꾸게 된다.
하지만 시멘트 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쓰이지 못하고 굳어 죽는다.
그런 똥오로똥의 삶이
헛되고 쓸모 없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꼭 무엇이 되어서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송아지똥, 똥또로똥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왔던 그대로도 충분하다고 위로한다.
한 점의 덜함도 더함도 없이 세상을 사랑하고
흐림없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속삭여준다.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어른이 위안받는 동화책이랄까.
그런 점에서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에게는
너희는 있는 그대로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알려주고
이야기를 읽어주는 어른에게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고,
잘 하고 있다고 가르쳐 주는 참 고마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의미없는 ‘똥또로똥’이라는 이름에도
이런 철학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거창하고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그냥 똥또로똥하게 태어나서
똥또로똥하게 살다
똥또로똥으로 죽는다는 것.
참으로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마지막으로 나는
빌런 역할을 맡은 참새를 보며 악플러들을 떠올렸다.
날카로운 부리로
그저 상처를 주기 위해 쪼아대는 나쁜 존재.
그로써 상처받고 무너져 가는 피해자들..
몇 달내 있었던 안타까운 일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작가는
이 책에서 참새의 날카로운 부리를 이겨내는 방법을
알려 준다.
바로 주변의 공감과 용기가 그것이다.

-몰랐어?나, 주인인데.
이 마당에서는 여기 깃들어 사는 모두가 주인이야.
마당 주인들아. 모두 일어나!!
마당법을 어긴 참새를 쫓아내자.

함부로 타인을 쪼아서도 안되지만,
당하고 있는 피해자를 위해 용기를 내어야 한다는 것.
약한 여럿이 모이면 큰 힘이 된다는 것.
무명, 무면의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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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똥
유은실 지음, 박세영 그림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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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똥이다. ‘

이 첫 문장부터 코끝이 시큰거렸다.
마지막 장을 읽을 때는 아예 울어버렸다. 
’강아지똥/ 권정생’이 처연하면서 감동적이라면
’송아지똥/ 유은실’은  아름다우면서 숭고했다. 
이 동화책은 
살아 있는 시간이 그렇게 짧은데 나이를 따지는 건 불공편하다며 
말놓기를 청하는 스웩 충만한 감나무, 리듬감과 
평화를 사랑하는 질경이, 평이가 있는 마당에서 ‘태어난’ 송아지똥 이야기이다. 

송아지똥은 스스로를 똥또로똥이라고 이름붙이고
자신의 짧은 똥생을 생각하며 세상을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철학적인 똥이다.
이름은 부르기에 좋은 고유명사의 역할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존재’함을 선포하고 알리는 수단이기도 하다. 
인디언들은 스스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스스로가 알아낸 자신의 정체성, ‘나’라는 존재에 대한 선언, 
그것이 바로 이름인 것이다.
그런데 똥또로똥이라니...이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걸까. 
그것을 알기 위해 우선 똥또로똥의 출생을 알아봐야 한다. 
똥또로똥은 도망나온 송아지가 잡혀가기 전에 ’낳은’ 똥이다. 
도망쳤다는 것은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아야 일어나는 행동이다. 
아마도 이 송아지는 갇혀있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자유를 꿈꾸었을 것이다.  
송아지가 속박을 벗어나 도망칠 때 
몸속에 희밍과 함께 품고 있었던 똥이 철학적이고 순수한 똥또로똥으로 태어난 것이다.
다시 잡혀가는 송아지가 남긴 희망의 한 조각이자 
한 덩이 자유로 말이다. 

-난 왜 여기서 태어났어?
-음 저 아랫마을 축사에,사는 송아지가 고삐가 풀린 틈에 도망쳤대. 
  여기까지 와서 너를 낳고는 저기로 다시 잡혀갔지. 
-잡혀가는 건 슬퍼. 
-똥또로똥. 그래도 도망쳐 봤잖아. 도망쳤으니까 잡힐 수도 있는거야. 

어느 날, 똥또로똥은 강아지똥(권정생)이야기를 듣고 강아지똥처럼 쓸모 있는 삶을 꿈꾸게 된다. 
하지만 시멘트 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쓰이지 못하고 굳어 죽는다.
그런 똥오로똥의 삶이 헛되고 쓸모 없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꼭 무엇이 되어서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송아지똥, 똥또로똥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왔던 그대로도 충분하다고 위로한다. 
한 점의 덜함도 더함도 없이 세상을 사랑하고 
흐림없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속삭여준다.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어른이 위안받는 동화책이랄까. 
그런 점에서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에게는 
너희는 있는 그대로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알려주고
이야기를 읽어주는 어른에게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고, 잘 하고 있다고 가르쳐 주는 참 고마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의미없는 ‘똥또로똥’이라는 이름에도 이런 철학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거창하고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그냥 똥또로똥하게 태어나서 똥또로똥하게 살다 똥또로똥으로 죽는다는 것. 
참으로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마지막으로 나는 빌런 역할을 맡은 참새를 보며 악플러들을 떠올렸다. 
날카로운 부리로 그저 상처를 주기 위해 쪼아대는 나쁜 존재. 
그로써 상처받고 무너져 가는 피해자들..
몇 달내 있었던 안타까운 일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작가는 이 책에서 참새의 날카로운 부리를 이겨내는 방법을 알려 준다. 
바로 주변의 공감과 용기가 그것이다. 

-몰랐어?나, 주인인데. 이 마당에서는 여기 깃들어 사는 모두가 주인이야. 
  마당 주인들아. 모두 일어나!! 마당법을 어간 참새를 쫓아내자.

함부로 타인을 쪼아서도 안되지만,
당하고 있는 피해자를 위해 용기를 내어야 한다는 것.
약한 여럿이 모이면 큰 힘이 된다는 것. 
무명, 무면의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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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승의 하루 - 모든 순간이 행복해
동자승 이찬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서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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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람은 어디서든 환대받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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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 부근에서 하나로 섞인 강은 이제 백강도 흑강도 아니다.
또다른 강력한 강으로 재탄생하여 빵을 만들기 위해 곡물을 빻는 물레방아를 거뜬히 돌린다.
방앗간 기슭에서 흑강과 백강이 합쳐진 세번째 강은 ‘강’이라 불린다. - P7

널 용서하마,이 늙은 멍청이야. - P138

시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 P98

거대한 여인의 손길이 닿는
크워스카의 몸 구석구석은 신성해졌고, 불멸이 되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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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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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p. 98-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지는
이 소설은 가상의 공간 태고에 살며
그곳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 유령, 무생물들의 이야기다.
방앗간을 운영하는
미하우의 아내 게노베파와 그녀의 딸 미시아,
미시아의 딸 아델카를 중심으로
태고를 관통하여 흐르는 시간들을
영화처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
내가 이 책에서 크게 감동하고 빠져들었던 부분은
개성 있고 흡입력 있는 스토리 아래로 묵묵히 흐르는
저자의 삶에 대한 철학이다.

방앗간 부근에서 하나로 섞인 강은
이제 백강도 흑강도 아니다.
또다른 강력한 강으로 재탄생하여
빵을 만들기 위해 곡물을 빻는 물레방아를 거뜬히 돌린다.
방앗간 기슭에서
흑강과 백강이 합쳐진 세번째 강은 ‘강’이라 불린다.
-p. 7-

소설이 시작되는 곳에서 만난 이 문장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태고에는 선악, 남녀, 혹은 옳고 그름의 메타포인
흑강과 백강이 있다.
그리고
그 강이 합쳐져 흐르는 3번째 강은
이름도 없이
본질에 충실하게 그저 흐르며 ‘방앗간‘을 돌린다.
나는 이 문장에서 세상의 그 어떤 고귀한 개념도,
신이 정한 질서도,
사람이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할 수 없고,
결국은
사람이 먹고 사는 일에 소요된다는 귀한 통찰을 얻었다.

이 외에도 소설에는 신과 인간,
삶과 죽음등에 대한 수많은 메타포가 숨어 있다.
등장 인물 중 한 명인 ‘상속자 포피엘스키’는
어느 날 랍비로부터 게임판을 받게 된다.
함께 받은 게임설명서는 난해하고 심오했다.
하지만 포피엘스키는
재산과 건강을 다 잃을 정도로 게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 게임은 탈출을 위한 지도이다.
게임의 목적은
모든 영역을 통과하여
여덟개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p. 112-

인간세상의 축소판 같은 게임판을 받고
게임에 심취하게 되는 포피엘스키는 왜 ‘상속자‘일까.
무엇을 누구로부터 상속 받는다는 것일까.
그는, 신은 왜 게임을 통해 ‘탈출’하려고 하는 것일까.
내가 이해하기로는 저자의 대답이 책 끝부분에 있다.
직접 읽고 감동받는 즐거움을 방해할 수 없으니
이 부분은 여기까지만 언급하겠다.

내가 반한 또다른 등장인물은 ‘크워스카‘다.
크워스카는
동양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여신을 몸주로 삼은 영매다.

이제 세상은
서로 나란히 존재하는 물체와 사물,
현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크워스카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하나의 덩어리였다.
-p. 25-

남성이 정해 놓은 규칙 안에서의
순종적인 ‘여성상’을 저멀리 벗어던진 그녀,
속박하고 줄세우는 남성적 질서 앞에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
크워스카의 자유분방한 행동과 생각에서
반듯하거나 계획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분출하는 생명의 힘,
키워내고 번성시키는 여신의 힘,
비온 뒤 걷잡을 수 없이 자라는 덩굴식물의 생명력을 느꼈다.
그리고 이 덩굴식물같은 생명력과 상속자의 게임판은
저자의 삶에 대한 태도,
신을 바라보는 관점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태고의 시간들을 통해
절대적인 선악의 구분,
일직선으로 흐르는 시간의 질서,
단 하나의 신,
단 하나의 진리는 없다고 말한다.
(만약 그것이 있다면
시공간을 사는 사람의 입과 말이 만들어 낸 것이리라.)
내가 느낀 것은
삶과 신에 대해
심각하고 무거워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시간과 삶은 3번째 ‘강’처럼
‘합쳐져‘ 고요하고 충만하게 흐르고 흘러
‘방앗간’을 돌리니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 뿐이니까.
-2019, 10월 글월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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