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저명한 이론가였던 베른슈타인에 의해 이른바 '수정주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쟁에는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과 국제 사회주의 운동 이론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중에서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이 글은 바로 그 수정주의를 논박한 대표적인 글이다.
이 글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의 기초가 되는 경제적 관점, 정치적 구상, 사회주의 전망 등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그 논의의 기초를 허물고자 한다. 그녀는 우선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을 것이라는 베른슈타인의 자본주의 발전 전망을 비판한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모순과 위기에 가득 차 있는 체제라고 본다.
다음으로 그녀는 의회와 노동조합 등에 큰 기대를 거는 베른슈타인의 정치 개혁 전략을 비판한다. 의회주의, 민주주의의 역사적인 중요성과 의의를 인정하지만, 의회주의적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이라는 베른슈타인의 핵심 주장에 대해서는 명백히 반대한다. 노동조합도 마찬가지다. 노동조합의 역할은 분명히 있지만, 그 활동은 결국 '시지포스의 노동' 같은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늘 혁명을 부르짖으며 몸소 혁명을 주도하고 참여했던 진정한 혁명가였다. 그는 사회주의를 진전시키고 실현할 주체는 오직 대중뿐이며, 대중이 주도하는 혁명을 통해서만 진정한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기조에서 씌어진 이 책에는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진실한 사회주의를 향한 깊은 열망이 담겨 있다. 과연 우리는 사회주의의 꿈을 여전히 간직해도 되는 것일까. 이 고전적 저작은 이 문제에 대한 일정한 답을 제시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유년기에서 최후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적인 면모와 공적인 면모를 따라가면서, 그녀의 삶과 사상과 행동을 상세하게 그려낸 전기이다. 간결한 문체, 현재 시제를 구사하면서 저자는 애증이 교차한 연인이며 동지인 레오 요기헤스와의 관계, 여류 동지들인 루이제 카우츠키나 클라라 체트킨과의 우정,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과의 이념 논쟁, 카를 카우츠키와의 친교와 갈등, 레닌과의 교류와 비판 등을 생동감있게 묘사하였다.
저자는 로자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도 주저하지 않는다. 로자가 지하와 주변에만 머무르려는 인간인 레오 요기헤스의 그늘에서 감정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에는 순교자의 운명을 맞게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또 로자가 당시 모든 식민 국가들처럼 민족 독립과 민주화라는 두가지 과제를 안고 있던 폴란드의 현실을 무시한 채, 인터내셔널을 중심으로 한 국제주의 노선을 고집하는 이론적 오류를 범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폴란드 사회주의 진영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로 양분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1차 대전 직후 '베를린 코뮌'에서 취한 로자의 애매한 선택을 비판한다. 당시 사민당 우파와 결탁한 군부는 사민당 좌파이 혁명으로 붕괴될 위기로까지 내몰린다. 그러나 로자는 명령을 기다리는 수만 명의 군중에게 시민혁명의 길보다는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권고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회주의 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던 당시 로자가 레닌에 필적할만한 인물이었음을 강조한다. 개인적인 친분에도 불구하로 로자는 레닌의 관료주의와 공포정치를 끊임없이 비판했다. 레닌주의 대비되는 로자의 사상은 '룩셈부르키즘'이라 부르며 혁명과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화해와 공존, 대중의 의지에 대한 존중으로 요약된다.
이 책은 로자가 경험했던 사랑의 갈등, 그녀의 인간적 고뇌들, 예술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미시적으로 포착해내면서 그녀의 삶은 결코 무자비한 권력 장악이 아닌, 인류의 진정한 자유와 진실과 해방을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이 책에는 저자의 방대한 시각과 통찰력에 의해 파리 코뮌 이후 1차대전에 이르는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역사, 독일의 급속한 제국주의 노선과 저항운동이 펼쳐진다. 그래서 로자와 동시대를 살았고 유럽 전지역에서 활약했던 걸출한 사회주의 혁명가들과도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 20세기 최고의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누릴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다”
‘자유로운 영혼’, ‘붉은 장미’, ‘혁명의 불꽃’ 등으로 불리는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20세기 가장 위대한 혁명가다. 당시 유럽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회주의 이론이 퍼져 나가면서 억압받고 차별받던 노동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 술렁이고 있었고, 세계 대전이 발발할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무척 혼란스러웠다. 로자는 당시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폴란드 국민이었고, 남녀 차별이 심하던 시대의 여성이었고, 유럽 사회에서도 차별을 받던 유태인이었다. 그리고 평생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다. 어려서부터 주장이 강하고 독립적이며 열정이 넘쳤던 로자는 열여덟 살에 고향을 떠나 스위스로 망명했다. 로자는 평생 독일과 스위스, 프랑스 등 전 유럽을 오가며 탁월한 글솜씨와 뛰어난 연설로 사회주의 이론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더 살기 좋은 사회, 자유로운 사회,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자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혁명을 선동했다.
로자는 평생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인정받을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라는 신념을 붙잡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쓴 강하고 혁명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작은 곤충의 죽음에도 민감하고 감옥 안에 있을 때 오히려 감옥 밖 동지들을 더 챙기는 가슴 따뜻한 휴머니스트였다. 그래서 로자는 자신이 가진 불리한 조건을 비관하지 않고, 죽는 그 순간까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은 사회주의가 이상적인 사회 제도가 아니었고, 사회주의 사회가 유토피아가 아니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미 사회주의를 선택해 그 길을 걸어온 많은 국가들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돌아오면서 역사적으로 사회주의의 실패가 증명되었다. 그런데도 사회주의 8·사상에 한평생을 바쳤던 로자 룩셈부르크가 실패한 이상이나 ?는 실패한 인물이 아니라 우리가 되새기고 기억해야 하는 인물인 까닭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본주의를 택했지만 자본주의도 완벽한 제도는 아니다. 빈익빈 부익부, 부의 되물림 등으로 가난하고 억압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그래서 서구 선진국에서는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되, 좀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복지 제도를 만들고 강화하는 등 자본주의를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회주의가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춰 가고 있지만 그 기본 취지만은 되새길 만하다. 비록 그 이론과 제도 자체는 실패했지만 차별 없는 사회, 가난하고 억압 받는 사람들도 살아 갈 만한 사회, 그것은 인간이 꿈꾸는 보편적 이상이고, 옳다고 여기는 정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 없는 세상,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불꽃같이 열정적으로 산 20세기 진정 위대한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신념과 삶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한양대학교 사학과 임지현 교수가 본 「영원한 소녀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식민지에서 태어난 똑똑한 소녀 로자 룩셈부르크의 어린 시절, 당시 혼란했던 유럽의 정세, 그 안에서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힘겨웠지만 찬란하게 살았던 로자의 삶,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바친 그녀의 한평생을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는 글로 실었다. 또한 강철 같은 의지 속에 섬세한 감성을 지닌 휴머니스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인간적인 면모를 사진, 지도 자료와 함께 일목요연하게 담았다. 그 뒤에는 인명, 용어 풀이를 두어서 실존 인물,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들의 투쟁으로 인해 우리가 꿈꿨던 세상은 현실로 다가왔다. 체 게바라, 말콤 X, 그리고 『백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까지. 책에는 인류를 억누르던 억압과 정면으로 맞서 싸운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25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남미 정글에서 게릴라 전을 펼쳤던 체 게바라와 세상의 자비를 외치는 달라이 라마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저자들은 세상의 억압에 맞서는 혁명가의 모습이 그것이라고 말한다.
역사라는 시계의 추는 우측에서 좌측으로 기울기도 하고, 좌측에서 우측으로 기울기도 한다. 그 시계 추가 바삐 움직일 때, 그리고 우리가 그 시계추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을 때, 우리는 현기증을 느낀다.
이런 현기증에 부채질을 해대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시계추를 해석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시계추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시계추를 따라 그들의 ‘해석’이 끝없는 부침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진전은 시계추를 보고 해석할 수 없다. 역사가 진전하고 있는지는 시계의 시침과 분침으로 시선을 돌려야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시계의 시침과 분침을 보지 않은 채 시계추만을 해석하는 게 요즘 무척 유행이다. 시계추를 해석하는 이들이 요즘 만들어낸, 그리고 즐겨 쓰는 말은 ‘노마드’다. 역설적이게도 ‘유목’이나 ‘유랑’을 뜻하는 이 단어만큼 이들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것도 없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까지, 그리고 엄연히 모나드적이다. 우린 쉽게 유랑하거나 부유할 수 없다. 그만큼 삶과 존재의 무게는 육중하다. 그리고 이런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도.
이렇게 육중한 현실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에게 우린 ‘헌사(獻辭)’를 바쳐야 한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모자랄 지도 모른다. 오직 한길을 걸었고, 그것 때문에 조롱과 대립, 그리고 폭력적인 반대에 부딪힌 사람들에게 헌사만으로는 웬지 부족하다.
하지만 시계추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런 헌사에 인색하다. 오히려 그들은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던졌던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준비한 비수를 하나씩 등 뒤에 꽂는다. ‘살인’의 이유는 그들은 결코 ‘유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때로는 상업적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역사 속에 자신을 던진 사람들은 시계추 같은 삶을 살지 않았다. 그들을 시계추의 흐름 속에서 해석하는 건 실례다. 때문에 그들이 ‘해석가’들의 잣대 위에 놓여 마름질 당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그리고 우리도 시계추에 고정됐던 눈을 떼고, 역사라는 시계의 시침과 분침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현기증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던진 사람들로 인해 역사가 한걸음씩 전진했다고 믿는다면 말이다.
Revolutionaries/행복한 시대에는 혁명이 없다
이 책에는 억압과 정면으로 맞서 싸운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25인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들은 조롱과 대립, 때로는 폭력적인 반대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냈고, 이러한 정신으로 인해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 이들을 온전히 바라보는 방법은 이들을 시계추처럼 보지 말고 시계추를 지렛대로 시침과 분침을 옮겨놓은 이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다.
이념적으로는 좌와 우가 망라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사람도 여럿 있다. 한 시대를 살았지만 부득이하게 총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도 있고 그 수단마저 포기했던 사람도 있다. 민족을 위한다는 똑같은 목표를 가졌지만 그 때문에 독립 포기를 주장했던 사람도 있고 반대로 독립을 지상명령으로 생각했던 사람도 있다.
남미의 정글에서 게랄라전을 펼쳤던 체 게바라와 이국의 땅에서 자비를 말하는 달라이 라마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똑같이 소설을 썼지만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는 인민의 자유라는 이유로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에 열광했으며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똑같은 이유로 사회주의에 저항했다.
인도차이나 반도라는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베트남인들은 사회주의와 자유를 위해 호 치 민이라는 인물을 선택했고, 미얀마인들은 26년간 집권한 사회주의 정부를 끝장내기 위해 아웅 산 수 지를 선택했다. 이념적으로는 정반대이지만 공히 그들은 이 ‘영웅’들에게 열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마이클 콜린스는 일국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똑같이 무력에 호소했다. 양국의 대중은 또 공히 이들의 깃발에 따라 목숨을 걸고 사선에 나섰다.
이들은 과연 시대가 부른 탕아, 혹은 시대가 만들어낸 영웅일 뿐일까? 그렇다면 그 시대라는 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25명 모두 … 행복한 시대에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행복한 시대에는 혁명이 필요 없으니까 … 그리고 혁명가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깐 …
헌사(獻辭)가 모자란 시절/혁명가가 혁명가에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고스란히 25명의 혁명가에게 바치는 헌사다.(단순한 인물의 정의가 아니라 오히려 ‘문학’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이 헌사를 쓴 이들은 또 다른 혁명가이기도 하다. 그리도 이 혁명가들은 대부분 그들과 친분이 있거나 그들의 전기를 쓰기 위해 혹은 신문기사로 만들어내기 위해 접촉했던 작가나 기자들이다.
말콤 X를 쓴 알렉스 헤일리는 그의 전기를 대필하기 위해 여러 차례 말콤 X와 접촉한다. 이 때문에 그는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방향전환을 경험한다. 말콤 X에게 가졌던 관심은 자연히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로 천착된다. 이를 계기로 알렉스 헤일리는 노예로 처음 잡혀온 쿤타킨테 이래 6대에 걸친 모계(母系)의 내력을 추적한 일생의 역작 『뿌리』를 완성하게 된다. 이 작품은 1977년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체 게바라에 대해서 쓴 피델 카스트로는 또 어떤가. 카스트로는 체와 함께 풀켄시오 바티스타 대통령 정권이 점령한 쿠바를 탈환하기 위해 3년간 끈질긴 게릴라전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체와 카스트로는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혁명’의 짜릿함을 공유했던 ‘전우’다.
간디에 헌사를 바친 토마스 머튼은 간디만큼 유명한 정치가는 아니다. 하지만 토마스 머튼은 간디보다 더 유명한 종교지도자가 되었다.
에바 페론에 대해 슨 네이폴 역시 에바 페론만큼 유명한 정치인은 아니다. 하지만 제3세계 문학의 기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문학계의 거장으로 성장했다. 그는 200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혁명을 지도했지만 그녀에 대해 헌사를 바친 스티븐 에릭 브로너는 또 다른 세계 혁명을 꿈꾸고 있는 사람이다.
베트남전 종군기자였다가 그곳의 참상을 보고 반전활동가가 된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당시 미국 대통령 케니디로부터 ‘현재 가장 위험한 미국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그는 베트남전의 영웅 호 치 민에게 헌사를 바쳤다. 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피델 카스트로에게, 조이 제임스는 안젤라 데이비스에게, 앙드레 브링크는 넬슨 만델라에게 각각 헌사를 바쳤다. 이들 각자는 모두 ‘혁명가’들이다.
이들 혁명가가 혁명가에게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그들의 투쟁이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었으며 우리는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의 한쪽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헌사의 이유는 충분하다.
영국의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지도적 활동가였던 토니 클리프의 저작.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혁명적 천재이자 투사이며 사상가였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을 개괄적으로 재조명해보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과 트로츠키와 함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전통에 있는 핵심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로자 룩셈부르크. 저자는 사회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나 사회민주주의에 의지해 온 사람들이 범한 오류를 피할 수 있게 해줄 명확한 이론적 무장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로자 룩셈부르크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이야기한다. 스탈린주의가 사멸한 지금, 더욱 그 빛을 발하고 있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을 함께 만나보자.
『여성 철학자』는 고대 그리스에서 현재까지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여성 철학자들이 철학사에서 갖는 의미와 가치를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소개한 철학 입문서이다. 시대 구분에 따라 9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의 도입부는 당시의 시대 상황과 철학 사조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 시기에 활동한 여성 철학자들의 삶과 업적을 연대순으로 소개한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지만, 철학사이 중요한 전환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여성 철학자들의 활약이 다양한 자료와 문헌 연구를 통해 복원되었다. 남성 위주의 철학과 그 밑바닥에 깔린 가부장적 가치를 비판하면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또 하나의 철학사를 제시한다.
1. 개요 및 특징
잊혀진 여성 철학자들이 되살아난다.
철학하면 뭔가 딱딱한 강의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마리트 룰만의 이 책은 정반대다. 룰만은 이 책에서고대 이래로 정치, 과학, 철학 분야에서 활동하고 상당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그에 어울리는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여성들을 그려내고 있다. 막연하게 그러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드디어 여성들이 철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브리기테 Brigitte>
중요한 책 한 권을 소개한다. 잊혀진 여성 철학자들이 다시 되살아난다. ‘여성 철학자들’이라는 제목은 다소 소박하지만, 이 책은 불손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쥐트 도이체차이퉁 Su?ddeutsche Zeitung>
이 책은 고대 그리스에서 현재까지 철학사의 뒤편에 머물러 있던 여성 철학자들을 발굴해내어, 그들이 철학사에서 갖는 의미와 가치를‘의식적으로 페미니즘적인 시각’을 견지하며 소개한 철학 인문서이다. 이를 통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여성적인 철학함에도 오랜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테아노와 히파티아, 레온티온과 라이스, 하케보른의 메히트힐트와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트힐트, 이소타 노가롤라와 라우라 체레타, 안나 마리아 폰 슈르만과 마리 르 자르 드 구르네, 올림프 드 구주와 해리엇 테일러밀, 클레르 데마와 메리 아스텔 등등. 왜 우리는 이들의 이름과 작품을 철학사에서 보지 못하는가? 최근 몇 십 년간 많은 변화와 진전이 있기는 했지만, 철학사의 대부분의 시대에 여성은 철학의 주체로서도, 철학의 대상으로서도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다. 여러 저명한 철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종류의 철학사가 집필되었지만, 그 누구도 이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말해지고, 쓰이지 않은 역사는 정녕 역사가 아닌가? 여성 철학자들의 활약과 업적은 지금껏 역사가 되지 못한 채 시간 속에 흩어져 있었다. 마리트 룰만 등 8명의 저자는 이 잊혀진 여성 철학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며, 그들이 본래 있어야 할 ‘올바른’ 자리를 찾아주고 있다.
잊혀진 여성 철학자들의 철학적 성취와 잘못된 서술들의 목록을 열거하자면 한참 이어질 것이다. 그 목록은 아스파시아가 기초를 만든 ‘소크라테스적’인 대화법에서 시작해 라이프니츠가 발표한 단자론의 진정한 뿌리인 앤 콘웨이를 거쳐, 몽테뉴의 『수상록』보다 20여 년이나 앞서 최초의 철학적이면서도 문학적인 에세이를 쓴 아빌라의 테레사에 이르기까지 철학사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이처럼 이 책은 남성 중심의 철학사에서 배제되고 왜곡되어온 여성 철학자들을 찾아내어 여성적인 주제의 추가라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확장이 아니라, 남성들이 지배하고 있는 철학과 그 바탕에 깔린 가부장적인 가치와 규범들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들어가는 말〉과 함께 시대 구분에 따라 총 9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의 도입부에서는 시대별 사회상과 그 위에서 발전한 철학 사조들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지고, 이어 그 사조들과 더불어 혹은 그 안에서 함께 활동했던 여성 철학자들의 삶과 업적이 연대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철학사의 중요한 전환기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여성 철학자들의 활약이 다양한 자료 조사와 문헌 연구를 통해 치밀하게 복원되었다. 이로써 철학사의 이음매가 보다 촘촘하고, 단단해진 것이다.
2. 출간 의의
철학사의 잃어버린 성취들에 대한 치밀한 복원
철학(philosophy)의 어원은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o)이다. 고대의 문헌 속에서 전쟁과 지식, 기술을 관장하던 지혜의 덕목은 여신(女神)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고고학의 다양한 발굴 성과들은 모계 혹은 모권 사회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한 서양철학의 전통에서는 여성을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인 결여체(缺如體)이자 “훼손된 남성”이라 여기며 그들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여성은 글을 읽고, 쓰고, 토론하는 등의 일에는 적합하지 않은 존재이고, 여성적인 것은 모두 무질서하고, 본능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재능 있는 여성들이 그 재능을 억누르거나 안락하고 평온한 삶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했다.
『여성 철학자』는 철학사의 전개에서 뚜렷한 기여를 했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망각되거나 의도적으로 지워진 이들을 발굴해 내고, 복권시켜 주려는 의미 있는 시도이다. 철학사를 읽다보면 여성 철학자들은 마치 20세기 이후에나 등장한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우리가 철학이라는 말과 더불어 떠올릴 수 있는 여성이라고는 고작 한나 아렌트, 줄리아 크리스테바, 시몬 드 보부아르 정도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두꺼운 책으로 묶여 나오고도 한참이나 모자랄 만큼 역사 속에는 수많은 여성 철학자들이 존재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우리는 반쪽짜리 철학사를 읽어왔던 것이다. 이 책은 그 숨겨진 반쪽에서 역사의 두꺼운 먼지를 털어내고, 하나의 철학사를 향해 가는 길목으로서의 ‘또 하나의 철학사’를 제시한다. 온갖 차별과 모욕을 감수하며, 철학적 사유와 함께 정체성의 고민도 놓지 않아야 했던 이 잊혀진 이름들을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불러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의 철학을 하는 여성들은 이미 역사를 쓸 수 있는 펜을 쥐고 있다. 학문의 세계에도 여전히 성 차별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행스럽게도 펜조차 빼앗아버리는 시대는 지나갔다. 여성들도 이제 그들의 역사를 쓸 수 있고, 나아가 그것을 포함하는 ‘역사(History)'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서양의 여성 철학자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이 책이 담지 못한 철학사의 또 다른 일면이 우리의 철학계와 여성학계에, 나아가 학문 전반에 미뤄오기만 했던 어떤 의무를 상기시켜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3. 왜 ‘여성 철학사’가 아니고 ‘여성 철학자’인가?
왜 저자들은 이 책의 제목을 ‘여성 철학사’라고 하지 않고 ‘여성 철학자들(Philosophinnen)’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사실 이 질문은 번역을 끝낸 뒤에 억지로 만들어낸 물음이 아니다. 1996년 가을,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취재하러 갔다가 시내에 있는 대형 서점에서 철학 코너 서가에 꽂혀 있는 이 책을 처음 본 순간 무의식중에 들었던 느낌이 그것이었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랄까, 혹은 딱딱한 오만과 편견의 껍질이 깨지는 느낌이 이럴까? ……
이 책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또 하나의 철학사’가 있다, 혹은 있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여성 철학자들’이라는 제목 하나만으로 이미 강력하게 일깨워주었다. 정체성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야 하는 것임을 감안할 때 적어도 그때까지 내 머리(아니 가슴) 속에 ‘여성’은 전혀 없었고 정체성 정립의 차원에서 여성성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필요성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물론 처음에는 호기심도 있었고, 여성 철학사가 되지 못하고 그저 한 덩어리로 모아놓았을 뿐이라는 인상을 주는 ‘여성 철학자들’이라는 말에서 안쓰러움, 아니 안타까움마저 느껴졌다. 물론 ‘여성 철학사’란 제목의 책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용 자체에서 본다면 ‘여성 철학사’보다는 ‘여성 철학자들’이 지금의 시점에서는 좀더 적나라하게 실상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성 철학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 가족이 1874년에 이사를 간... 등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로자 룩셈부르크는 탁월한 언변을 가진 여성... 무참하게 살해된다. 감옥에 있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민당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신체에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군부 파시즘의 시대는 끝났는가? 감히 그렇다. 그렇다면 1990년대의 민주화와 군부 파시즘의 역사적 종말은, 파시즘의 역사적 청산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지난 해 『우리 안의 파시즘』을 통해 도발적으로 제기된 ''일상적 파시즘''이라는 입론을 좀더 심화ㆍ발전시킨 글들을 주축으로, 권력의 합리화란 또 다른 이면을 가진 민주화라는 부분과, 민족해방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민족주의 억압성, 해방의 역사학에 내장된 수많은 억압기제 등 역사학자로서의 오랜 고민과 성찰들을 논문을 비롯 자유로운 형식의 에세이와 작은 칼럼들로 엮었다.
저자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우리안의 파시즘』 등으로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임지현(한양대 사학과) 교수.
거대담론들에 가려 쉽게 묻혀 버렸던 우리안의 파시즘적 요소와 일상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폭력적 규범들을 오히려 인간을 해방시켜야 할 이념들이 그 근거가 되어주고 있음을 여전히 날카로운 시각으로 짚어냈다.
일상적 파시즘과 합의 독재, 민족 해방과 민중 동원, 인간의 이념 이념의 인간 등 총 4부로 구성해 이념의 속살을 드러내며, 제도나 체제로서의 파시즘은 정치 무대에서 종말을 고했지만, 은폐된 억압 구조로서의 파시즘은 일상 속에 살아 있으며, 따라서 "파시즘의 억압 기제를 청산하는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임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권력의 음산한 힘 앞에 선 이념의 찬연한 빛은 불 앞의 얼음이다. 해방의 이념을 굳게 견지하고 정치 권력을 장악하여 법과 제도, 경제 체제를 바꾸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도 순진한 것이었다. 끝난줄 알았던 구체제는 밑바닥에서 '혁명 후 사회'를 움직이는 결이었다. 이제 근대의 담 밖에서 근대를 성찰하는 계기를 가질 때, 근대적 과제를 수행해 나아가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탈근대의 문제의식을 급진적으로 전유함으로써, 근대의 해방 이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양'하자는 것이다 '이념의 속살'을 드러내려는 의도도 여기에 있다." - 사진뿐만 아니라... 사진이 주는 인상보다 훨씬 더 깊고 풍부한 인간 로자 룩셈부르크를 드러낸다. 그리고 여기 한국어로 번역된 로자 룩셈부르크의 편지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