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동물원
츠츠이 야스다카 지음, 양억관 옮김 / 북스토리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츠츠이 야스다카는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일본 SF 작가다. 그의 작품은 신선하다. 그러면서 색다른 차별성이 있다. 서양의 많은 SF 작품들과. 예전의 제목보다 지금의 제목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단편 하나 하나를 읽고 나면 인간 동물원의 각양각색의 군상들을 구경한 느낌을 받는 동시에 누군가 나를 가둬 두고 구경하는 느낌이 들게 된다. '인간 동물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작품들이다. 마치 SF 드라마에서 예전에 봤던 인간을 동물원 같은 곳에 가두고 아이에게 부모를 고르게 하던 장면이 생각나는 제목이기도 하다.

처음 접하는 작품 <나르시즘>과 <사디즘>은 마누엘 반 로겜의 <짝 인형>을 연상시키는 작품이지만 그것보다 좀 더 일본식의 적나라한 섹스의 표현을 가미해서 제목인 <인간 동물원>에 어울리는 작품을 만들었다. <욕구불만>도 마찬가의 작품이기는 하나 이 작품도 라쿠나 셀던의 <째째파리의 비법>이 연상되면서 한편으로는 팻 머피의 <채소 마누라>의 느낌도 들었다. 우월한 남성주의의 표현이 반감을 갖게 하는 점에서 말이다.

가장 흥미로운 작품은 <게마인사프트>와 <원시공산제>였다. 이것은 인간의 상상력과 잔인함, 그러면서 변하지 않는 본성에의 표현이 들어 있는 작품이다. <게마인샤프트>는 gemeinschaft로 사회시간에도 배운 용어다. 사회 집단, 이익을 위한 사회집단을 말하는 이 말은 인간의 이기주의와 그것을 위해 인간이 어떠한 일을 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와 반대로 <게셀샤프트>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뭉친 집단이다. 이 또한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서슴없이 행동한다. 지금의 우리 모습 그대로다. 이 작품의 원제목을 가장 잘 나타낸 작품은 <게셀샤프트>와 <게마인샤프트>라고 할 수 있다.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것을 꿈꾼다. 사람이기에.  

<원시공산제>는 1860년대 학생운동이 극렬하던 시기 동경대를 폐쇄해 버려 그곳에서 남은 사람들의 자손들이 집단으로 고립된 채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것은 작가가 지금의 동경대의 폐쇄성을 꼬집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인간의 사회성을 SF 소설 형식을 빌어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는 작품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단편 단편마다 새롭게 조명하는 작가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작품을 통해 알리려고 하는 것 같다. 모두 공감할 만한 작품들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마치 우리가 장난으로 얘기하던 '투명 인간이 된다면?'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것은 난폭함, 성적 분방함, 이기심, 외부에의 막연한 호기심 등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것들을 한 작품 한 작품에 잘 녹여 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회를 고발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그것도 직설적이 아닌 은유적으로.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츠츠이 야스다카의 작품을 읽고 싶었던 것은 그의 단편 <멈추어 선 사람들>을 읽고 나서다. 그 작품이 너무 강렬해 꼭 한번 그의 작품집을 읽고 싶었던 소원을 이루었다. 원제목이 <心理學 社怪學>이다. 인간 심리와 군중 심리의 괴상함에 대한 작가의 고찰이라고 말하고 싶은 작품들이다. 재미있다. 웃음이 나오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단편집이다. 서양 SF 작가와는 또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생각과 깨달음의 기회를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SF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작가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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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로봇 필립 K. 딕의 SF걸작선 3
필립 K. 딕 지음, 어윤금 외 옮김 / 집사재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출판사의 얍삽함을 말해 무엇하랴마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무리 출판사도 이익을 창출해야 하는 기업, 책도 장사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지켜야만 하는 선이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선이 무너지면 책이라는 것도 한낱 물건으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책이 물건일 수 있을까... 이건 참으로 씁쓸한 일이다. 그러니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이 단편집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단편은 <전쟁 놀이>다. 아이들 장난감을 만드는 회사가 배경이고 그 사원들의 새로운 장난감을 만드는 이야기인데 마지막이 너무 놀랍다. 블루 마블 같은 게임이 있다. 그런데 룰이 모든 것을 고의적으로 잃어야만 이기는 게임이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전쟁이란 하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모두 잃게 되는 게임이란 뜻일까... 이 책 부시가 좀 읽지 않으려나... 하긴 그가 이런 것을 이해할 리가 없지...

<사기꾼 로봇>은 말할 필요도 없는 필립 K. 딕의 대표적인 단편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나를 돌아본다. 과연 내가 나를 증명할 것이 무엇인가...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해야 하는 걸까...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당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당신의 기억이 입력된 것이 아닌 자신만의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정말 인간은 어떤 존재여야 하고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 지 다시 생각해 보는 요즘이다. 요즘 같아서는 차라리 사기꾼 로봇이 더 인간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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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타이거! 그리폰 북스 9
알프레드 베스터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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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나 보고 싶었던 작품인가... 얼마나 출판되기를 원하던 작품인가... 아무런 작품에 대한 부연 설명이나 이해해야 할 만한 지식도 가지지 않고 내 느낌만을 가지기 위해 읽었다.

우선 궁금했던 점은 제목이 왜 <타이거 타이거>일까 였다. 이건 책을 보면 금방 알게 된다. 작품의 구성은 <파괴된 사나이>와 다른 듯 하지만 비슷하다. <파괴된 사나이>에서는 초능력자들의 텔레파시가 등장했고 이 작품에서는 공간 이동인 존트가 등장한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인간의 나약함과 그 나약함에 대한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비슷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 같다. 우리식의 제목이었던 <암굴왕>이라고 다 비슷한 것은 아니니까.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마지막에 마치 <매트릭스>처럼 끝나는 부분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이가 나온다는 말, 어디선가 들은 듯 한데 그것이 이 작품의 요지인지...

개인적으로는 <파괴된 사나이>가 더 깔끔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사상적, 종교적 관점이 너무 많이 삽입되어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를 연상시킨다. 물론 그 작품보다는 월등하지만. 한 남자의 복수에서 시작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넘어가더니 급박하게 사회적 억압을 문제 삼고 마지막에는 종교적 성인으로 거듭나는 마무리...

371쪽에 있는

"인간들은 모두 기형아입니다, 선생님.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기형이었습니다. 삶은 기형입니다. 그것이 삶의 희망이며 영광입니다.”

라는 로봇의 말이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깨달음은 얻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성과 자신의 경멸과 멸시, 그리고 자신을 낮춤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이루지 못하기에 우린 인간이며 우주로 존트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파괴하려 애쓰는 것인지도. 하지만 그것이 인간이 살아야만 하는 삶이라면 그리 살아야 하리라. 인간의 목적지가 별인 까닭에...

읽고 나서 평을 쓰고 나니 역시 난 글재주가 없다. 하지만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왜냐하면 언젠가 이 책을 안 읽었다는 사실을 후회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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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코트 심해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7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이수현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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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도 코넌 도일의 챌린저 교수 시리즈인 줄 알았더니 주인공이 마라코트 교수다. 흠... 그러니까 지상에서는 챌린저, 바다에서는 마라코트라는 얘긴가... 마라코트 교수가 등장하는 작품은 <마라코트 심해>뿐이다.

<마라코트 심해>는 미지의 바다에 대한 이야기다. 챌린저 교수가 어쩌면 사라지지 않고 있을 지 모르는 고대 공룡이 살던 세계를 다녀 온 사람이라면 마라코트 교수는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가 바다 밑에 가라앉아 그들이 아직도 바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설정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작가의 해석도 몇몇 군데 눈에 띄지만 어차피 역사란 자신들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니 논하지 않기로 한다. 참신한 작품이었다. 지하 바다 밑으로 내려가는 과정과 다시 바다 위로 떠오르는 장면, 아틀란티스인들의 멸망과 어떻게 바다 속에서도 생활이 가능한가에 대한 작가적 상상력은 높이 살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외에 수록된 두 편의 단편 <독가스대>와 <하늘의 공포>가 있다. <독가스대>는 챌린저 교수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좀 황당한 작품이다. 우주에서 독가스가 날아와 지구가 멸망한다는 다소 황당한 코미디다.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지만 그것에 대한 과학자들의 공포는 봐줄만 하다. <하늘의 공포>는 사실 어떤 작품인지 잘 모르겠다. 하늘에 괴물이 있어 동료 비행사를 죽게 만든다는 생각으로 괴물을 찾아 비행을 하는 비행사의 이야기는 무슨 허풍선이 남작의 동화를 연상시킬 뿐 작가가 어떤 의도로 썼는지도 모르겠고 이해도 잘 안 되는 작품이다.

결국 표제가 된 <마라코트 심해>가 가장 볼 만한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홈즈로 대변되는 그의 추리 소설도 재미있지만 챌린저 교수로 대변되는 SF 작품이 더 볼만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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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6-16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 돼지와 천공의 섬 라퓨타를 염두에 두시면 "하늘의 공포"는 그 무렵 사람들에게
바다, 즉 심해의 공포와 흡사했었다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텐데요.
코난 도일이 살았던 시대를 염두에 두시면 더 재미있답니다. 클래식 SF는 그런 재미가 있지요.

물만두 2004-06-16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 돼지, 천공의 라퓨타 못 봤습니다. 사실 이 쪽은 제 분야가 아니라 남동생 분야라서... 전 마라코트 심해가 제일 좋았고 <하늘의 공포>는 가물가물합니다. 기억력 3초라...

sayonara 2004-06-23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정말 바람구두님의 시각이 놀랍습니다. 제가 마이클 크라이튼의 초기작들을 읽고 너무 케케묵은 구닥다리 SF다.라고 비웃었는데 30년 전의 세상을 모르고 지껄였었습니다. 앞으로 바람구두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SF를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만두 2004-06-24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을 읽으셨나보군요. 토넌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가 훨 나은 작품입니다. 안 읽으셨다면 읽어보세요...

sayonara 2004-06-24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라기 공원' 정도면 최신간이죠. 저는 우주의 바이러스가 침입한 '안드로메다 스트레인'을 읽고 하는 말이었는데... -_-;;; 어쨌든 작가가 작품을 쓴 시기를 생각하면서 읽으면 참 좋을듯 싶습니다.

물만두 2004-06-24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드로메다 스트레인은 못 읽었네요...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지음, 오숙은 옮김 / 미래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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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여, 제가 부탁했습니까, 진흙에서 저를 빚어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절 끌어내 달라고?" 밀턴의 실낙원에 나오는 말이다. 또한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 낸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 하는 말이다.  

자신이 만들고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적반하장격으로 괴물을 몰아세우는 프랑켄슈타인의 작태는 정말 역겹기 그지없다. 같은 종족의 여인 한 명만 만들어 달라는 그 부탁도 거절하고 그의 복수로 인해 자신이 불행해짐만을 비통해 하고 복수를 다짐하다니.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인류를 위해 괴물의 여인을 만들지 않았다고? 조금의 자비심도 없는 서양인의 모습, 아니 인간들 모두의 모습을 프랑켄슈타인에게서 본다.  

이 작품이 발표된 시점에서 우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그 이전에도 변하지 않았고. 인간이란 어쩌면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이 전부일 것이다. 탐욕에 눈이 멀어 발명을 하고 그 발명이 싫어지자 내다 버리고 그것이 자신의 발목이라도 잡는다 싶으면 모든 원인을 그 발명에 돌리는. 정말 신이 있다면 묻고 싶다. 이런 인간이 무슨 필요가 있어 만들어 낸 것인지를. 지구 멸망을 원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인간의 과학에 대한 맹신을 비판한 작품이다. 또한 인간의 본성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모든 생물의 본성은 어떤 것인가. 얼마전 텔레비전에서 멧돼지가 자신이 낳은 부실한 새끼를 먹어 치우는 장면이 나왔었다. 모두들 경악했지만 그것이 생물의 본성이다. 멧돼지에게는 종족을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에 방해가 되는 것은 자신의 새끼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제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나머지 새끼와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이 새끼를 낳고 태반을 재빨리 먹는 이유, 어린 새끼 누와 얼룩말 등의 초식 동물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일어서고 걸어야 하는 이유, 물에 빠진 어미 원숭이가 다 자란 새끼와 갓난 새끼 중에 다 자란 새끼를 구하는 이유도 모두 같다.

종족 보존. 이런 의미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자신이 만든 괴물이 원하는 괴물의 반려자를 만들어 주지 않은 것도 본능에 의한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또한 괴물의 분노와 복수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다. 또한 이런 비유를 통해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이유를 정당화하려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거나 이 작품을 읽지 않았다면 후회할 뻔했다. 개인적 사사로운 감정을 떠나 꼭 읽어볼 필요가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으로 아동용이 아닌 원판의 번역 작품을 보니 그 다른 느낌에 이런 문학 작품의 아동용은 출판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 금서였던 <걸리버 여행기>를 버젓이 아동용으로 출판하거나 이런 어떤 의미에서는 깊은 인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작품에 대한 몰이해와 몰상식적인 축약과 축소는 앞으로 더 보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프랑켄슈타인이 이런 작품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어떤 분이 이 책에 대해 한 말을 듣고 사게 된 책이었는데 평소 우리가 알고 있던 아동판의 그 내용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아동판이 아닌 작품을 아동판으로 축약해 출판하는 일이다. 어떻게 이 작품을 아이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이 작품에 대한, 작가에 대한 모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작가가 나이 스물에 지은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작품임에 분명하지만 그도 코넌 도일과 마찬가지로 양심적인 지식인임네 하며 영국은 추켜세우고 남의 치부에는 가차없는 점을 보인다. 은연중 작품에서. 그것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괴물을 만들어 내고 몰인정하게 그를 버려 두었으며, 괴물의 복수에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과 괴물이 자신과 같은 짝을 만들어 달라고, 자신의 외로움을 덜어 달라는 그의 최소한의 바람마저도 저버리고 과학자의 양심과 인류에 대한 양심을 택한 척한 치졸한 면과 다르지 않다. 부모가 자식이 못났다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식을 버린다면 그를 부모라 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우리네 정서로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인물과 작가의 생각은 많은 거리가 있음을 느낀 가슴 아픈 작품이었다.  

지극히 서양적이며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작품이다. 제목이 왜 프랑켄슈타인이겠는가. 괴물이 더 잔인한 존재가 아니라 그 괴물을 만들고 방치하고 자신의 죄를 그 괴물에게 뒤집어씌우는 프랑켄슈타인이 더 잔인한 존재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메리 셀리라는 스무 살의 영국 여성이 이런 작품, 놀라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 안에 그 당시 영국의 죄악과 함께 영국의 찬란함과 아일랜드에 대한 비아냥거림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영국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유부남과의 바람으로 한 여자를 자살로 몰고 갔고 결국 행복을 잠시나마 만끽했으나 결국 평생이 불행했다고 하니 이 작품은 그녀의 미래에 대한 예견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프랑켄슈타인 푸드라는 유전자 변형물을 지칭하는 말이 있다 해도 과학은 우리 손을 이미 떠났다. 생각해서 뭐하랴. 흐름에 맞기고 자신의 죄를 남의 죄에 앞서 고해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길이 프랑켄슈타인의 교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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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4-06-12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축소와 축약..경악적이지요?
이런 원작은 안 읽어보았는데^^;;

물만두 2004-06-12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래서 일부러 아동용은 피하는 편입니다. 뭐 어려서도 아동판은 그다지 많이 읽지 않은 점도 도움이 되었구요. 읽어보세요. 의외로 괜찮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