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임 Blame! 3
니헤이 츠토무 지음 / 세주문화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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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네트 단말자 유전자라니... 이제 인간의 유전자가 컴퓨터 네트워크화된다는 말인지... 이 말만으로도 참 거북해지는 작품이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윌리엄 깁슨의 사이버 펑크 SF를 만화로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에서처럼 인간과 컴퓨터의 세상이 공존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 키리이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왜 중요한 지 이해하기 쉽다. 또한 우리는 영화 <매트릭스>를 봤다. 매트릭스의 세계를 키리이가 있는 세계라 생각하면 이 작품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많은 SF 작가들은 미래를 컴퓨터나 기계 인간이 지배하는 세계로 그리고 있다. 그 가운데 인간이 설 자리는 점점 작아질 것이라 예견하거나 그들에게 위협 당할 것이라 예견한다.

이 작품에서 키리이가 있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이 책에서 말하는 블레임이란 공간을 나누는 단위인가, 아니면 현실과 컴퓨터가 만든 가상 공간을 나누는 단위인가... 아직 그것은 모르겠지만 만화로 만든 사이버 펑크 계열의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키리이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는 과연 어느 쪽 사람인가... 점점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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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의적 2004-10-10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레임... 알라딘에 올라온 리뷰를 보고 읽었습니다. 처음에 등장하는 장면은 암물한 현실을 암시하는 듯한 강한 인상을 받았죠. 하지만 스토리 구성이 단선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반 정도를 읽었는데... 작가가 무엇을 말할려고 하는지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시 쉬는 중....^^;

물만두 2004-10-11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기까지 잘 보고 뒤에서 이상해지는 것 같은 생각에 그만 접었다는^^
 
야쿠자 파파 3
OKITA RYUJI 지음 / 닉스미디어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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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식을 사랑한다. 그 사랑을 실천한다. 어떤 식으로??? 이 물음에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뼈빠지게 일해서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주고 공부시킨다고...

그런 말을 하는 남자들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내와 자식 없이 독신이었다면 그들은 놀고먹을 수 있는 존재들인가... 아니다. 남자들에게 있어 직장을 통한 사회 생활은 자신의 원동력이다. 그들에게 가정과 자식은 두 번째다. 마치 아내와 자식 위해 고생한다고 착각하지만 그것은 진짜 착각이고 자기 합리화다.

이 작품의 몬마 쇼고를 보라... 당신은 이 사람처럼 자신의 자식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아이를 위해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이 작품을 보면서 보통 사람들의 착각을 고쳐 주고 싶다. 야쿠자도 이 정도는 한다. 사람 죽이는 것을 밥먹듯 하는 야쿠자도 딸을 위해,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한다. 자신의 본분을 망각할 정도로...

이 작품은 과장이 심한 픽션이다. 픽션이지만 와 닿는 부분이 너무 많다. 이제부터 자식에게 사랑을 내 보이지 않는 아빠들을 이 야쿠자만도 못한 아빠야... 하고 말해도 될 듯 싶다. 재미있고 사랑과 가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제목과는 다른 아주 좋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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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천사 쿠루미 1
카이사쿠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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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천사와 강철이라는 전혀 안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이라니...

이 제목은 분명한 것을 의미한다. 로봇, 천사처럼 아름다운 여자, 미소녀의 모습을 한 로봇이 등장할 것임을... 그 강철 천사의 이름은 쿠루미... 그녀를 다시 부활하게 만드는 나카모토... 그리고 그들을 노리는 강철 천사 계획을 수립한 집단에서 만든 또 다른 강철 천사... 한 남자와 비록 로봇이기는 하나 한 여자가 등장한다.

비디오 속의 존재하지 않는 인몰과의 사랑도 이루어냈으니 만약 이들이 사랑하게 된다면 이루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니라면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의 안드로이드가 꿈꾸지 않은 전기양이 되는 것이리라...

갑자기 영화에서의 숀 영의 모습과 쿠루미의 모습이 겹쳐진다. 괴물 로봇은 거대하고 많은 다양한 기능을 부여하여 남성적으로 만들고 같은 로봇이라도 쿠루미같은 로봇에게는 여성적인 모습을 부여하는 것은 일본인의 교묘한 이중성이 깃들여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자는 무조건 강해야 하고 여자는 무조건 예뻐야 한다는 논리는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로봇도 미소녀 타입의 섹시와 귀여움을 담았다는 것이 참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든다. 역시 인간은 아직도 그림 동화의 잔인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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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그 여자! 18
츠다 마사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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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 가족에서의 레이지의 위치와 그가 처한 상황이 전개되는 내용이다. 아리마의 아버지지만 아리마의 친아버지 레이지의 형이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는 다음 권인 19권에도 이어질 듯 하다.

처음에는 그저 아리마와 유키노의 즐거운 학창 생활과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호러물적으로 아리마의 마성을 보여주더니 그것도 흐지부지되고 이제는 아리마 아버지를 등장시켜 한 가족의 가족사로 넘어가고 있다. 마치 염상섭의 <삼대>처럼...  어떻게 끝을 맺을지 정말 궁금하다...

사랑 없는 결혼으로 얻은 자식은 사랑하지 않는 아내처럼 밉지만 사랑하는 여자가 낳은 아이는 예뻐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니까... 부모는 자식에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부모를 더 닮은 자식을 더 예뻐하게 마련이다. 아니면 못나서 더 축은 해 예뻐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든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식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나를 낳아 준 부모조차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모든 남인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 생각은 아이를 비틀리게 만들고 만다. 한번 비틀린 생각과 마음은 바로 잡히지 못한다.

이 작품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랑하지 못할 바에는 아이를 낳지 말기를... 사랑은 노력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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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4-08-15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마가 유키노를 통해 구원받는다로 끝이었으면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용이 너무 무거워 진짜 '그 남자 그여자' 맞아? 할 때가 많아요.

마냐 2004-08-15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아리마와 유키노의 해피엔딩을 너무나 간절히 원합니다...그나저나...작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쩝.

sooninara 2004-08-16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키노는 한번 나오다니..임신했다고 말이 많았는데..어떻게 된건지..
18편보고나니 맘이 무겁습니다..언제 끝날까요..

물만두 2004-08-16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결혼하는 걸로 끝나지 않을까 싶네요...

IshaGreen 2004-08-19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이 추억의 만화!! 아직도 연재되고 있었군요...^^;

물만두 2004-08-19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의... 추억은 캔디정도는 되야 하는데...
 
야만, 다섯 손가락에게 - 벼룩만화 총서 8
토마스 오뜨 지음 / 현실문화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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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만화를 보고 아, 만화가 이렇게 그려질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감탄했었다. 이 만화에는 단 한 줄의 대사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얼굴도 보여지지 않는다. 다만 손만이 보일 뿐이다. 수갑이 채워지는 손과 수갑을 채우는 손, 전기 스위치를 내리는 손, 마지막에 서로 악수를 하는 마주 잡은 두 손... 그런 단순함으로 사형 제도의 야만성을 나타내고 있다. 작품만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세상이 떠들썩하다. 연쇄 살인범으로 인해서 다시 사형 제도 존속이냐 폐지냐가 토론되고 있다. 어쩌면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떤 것에 대해 늦게 나마 생각하고 토론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

나는 원칙적으로는 사형 반대론자다. 사형 제도는 궁극적으로 폐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존 그리샴의 <가스실>을 보면서도 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은 다른 이유로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사형 제도를 폐지할 경우 그들은 감형 없는 종신형을 살게 될 것이다. 요즘은 범죄자의 인권도 중요하다는 세상이다. 그러니 그들은 평생 국민의 세금으로 먹여 살려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왜 그래야 하는가를 생각 중이다. 왜 우리가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가...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 때문에? 다른 나라도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추세니까? 인간이 법이라는 이름으로 범죄자를 사형하는 것도 다른 의미의 살인이기 때문에? 나는 마지막 생각 때문에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밖에 죄를 짓지 않으면서도 하루 세끼 먹기도 힘든 사람들이 있다. 라면만 먹으며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 이들의 인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기초 생활 보장 제도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빗 좋은 개살구임을 우리는 안다.

딱 두 가지만 놓고 생각해 보자. 살인자의 인권과 가난한 자의 인권 중 우리가 더 존중해야 하는 인권은 어떤 것인가? 만약 살인자를 평생 먹여 살리는 돈으로 가난하지만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단 한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면 난 우리가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언제나 불합리하다. 하지만 적어도 살인자를 먹여 살리는데 내가 낸 세금이 쓰이기보다는 가난한 우리의 이웃에게 쓰이기를 바란다.

스물에 이유 없이 스무 명을 연쇄 살인한 살인범이 있다고 치자. 사형 제도를 폐지해서 그를 죽을 때까지 감방에 가두고 먹여야 한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생각해 보면 적어도 50년은 그를 먹여 살려야 한다. 얼마나 들까. 최저 생계비로 따져 한달 25만원이라고 치면 1년이면 3백 만원, 50년이면 1억5천 만원이라는 어설픈 계산이 나온다. 이건 순전히 내 계산이다. 그 돈이면 죄 짓지 않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돈이 없어 죽어 가는 병든 이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내 논리는 이렇게 비교해서는 안 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인자에게 희생되지 않았다면 잘 살았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그저 그들의 운명으로 생각해야 할까... 우리는 흔히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란 말을 한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다면 그에게 인권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는 것 아닐까... 인권이 없는 자에게 우리가 왜 연연해야 하는가.

1명을 죽이면 범죄자가 되지만 천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말이 있다. 전쟁에 대한 말이다. 이 말도 옳지 않다. 어떤 경우도 살인은 안 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생명 는 모든 것을 존중하고 있는가... 우리는 짐승만도 못한 자는 살리려 하고 짐승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잡아 먹는다. 채식주의자들은 채소는 소리도 못 내므로 생명이 아니라 생각하고 잡식주의자들을 비웃는다.

인간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마는 적어도 죄지은 자보다 죄짓지 않는 자들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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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yo12 2004-07-31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고등학교 떄 성경수업 가르쳐주시던 분이 그러시더라구요.
그런데 죄를 지었다는 것과 죄를 짓지 않았다는 건 누가 판별하지?
정말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유영철(?) 그런 인간 보면 당장 저자거리에 죽여도 시원치 않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가끔 죽기 전에 회개하는 인간들을 보면 사람이란 다 똑같지 그런 생각도 든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