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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 다섯 손가락에게 - 벼룩만화 총서 8
토마스 오뜨 지음 / 현실문화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이 만화를 보고 아, 만화가 이렇게 그려질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감탄했었다. 이 만화에는 단 한 줄의 대사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얼굴도 보여지지 않는다. 다만 손만이 보일 뿐이다. 수갑이 채워지는 손과 수갑을 채우는 손, 전기 스위치를 내리는 손, 마지막에 서로 악수를 하는 마주 잡은 두 손... 그런 단순함으로 사형 제도의 야만성을 나타내고 있다. 작품만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세상이 떠들썩하다. 연쇄 살인범으로 인해서 다시 사형 제도 존속이냐 폐지냐가 토론되고 있다. 어쩌면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떤 것에 대해 늦게 나마 생각하고 토론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
나는 원칙적으로는 사형 반대론자다. 사형 제도는 궁극적으로 폐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존 그리샴의 <가스실>을 보면서도 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은 다른 이유로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사형 제도를 폐지할 경우 그들은 감형 없는 종신형을 살게 될 것이다. 요즘은 범죄자의 인권도 중요하다는 세상이다. 그러니 그들은 평생 국민의 세금으로 먹여 살려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왜 그래야 하는가를 생각 중이다. 왜 우리가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가...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 때문에? 다른 나라도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추세니까? 인간이 법이라는 이름으로 범죄자를 사형하는 것도 다른 의미의 살인이기 때문에? 나는 마지막 생각 때문에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밖에 죄를 짓지 않으면서도 하루 세끼 먹기도 힘든 사람들이 있다. 라면만 먹으며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 이들의 인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기초 생활 보장 제도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빗 좋은 개살구임을 우리는 안다.
딱 두 가지만 놓고 생각해 보자. 살인자의 인권과 가난한 자의 인권 중 우리가 더 존중해야 하는 인권은 어떤 것인가? 만약 살인자를 평생 먹여 살리는 돈으로 가난하지만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단 한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면 난 우리가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언제나 불합리하다. 하지만 적어도 살인자를 먹여 살리는데 내가 낸 세금이 쓰이기보다는 가난한 우리의 이웃에게 쓰이기를 바란다.
스물에 이유 없이 스무 명을 연쇄 살인한 살인범이 있다고 치자. 사형 제도를 폐지해서 그를 죽을 때까지 감방에 가두고 먹여야 한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생각해 보면 적어도 50년은 그를 먹여 살려야 한다. 얼마나 들까. 최저 생계비로 따져 한달 25만원이라고 치면 1년이면 3백 만원, 50년이면 1억5천 만원이라는 어설픈 계산이 나온다. 이건 순전히 내 계산이다. 그 돈이면 죄 짓지 않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돈이 없어 죽어 가는 병든 이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내 논리는 이렇게 비교해서는 안 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인자에게 희생되지 않았다면 잘 살았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그저 그들의 운명으로 생각해야 할까... 우리는 흔히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란 말을 한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다면 그에게 인권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는 것 아닐까... 인권이 없는 자에게 우리가 왜 연연해야 하는가.
1명을 죽이면 범죄자가 되지만 천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말이 있다. 전쟁에 대한 말이다. 이 말도 옳지 않다. 어떤 경우도 살인은 안 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생명 는 모든 것을 존중하고 있는가... 우리는 짐승만도 못한 자는 살리려 하고 짐승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잡아 먹는다. 채식주의자들은 채소는 소리도 못 내므로 생명이 아니라 생각하고 잡식주의자들을 비웃는다.
인간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마는 적어도 죄지은 자보다 죄짓지 않는 자들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