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실존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의미가 부여되지 아니하고 오직 존재할 뿐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의지할 수 없게 된 개인의 괴로운 현존 상태이다. 막다른 골목에 선 개인이 이미 존재하는 모든 가치를 믿을 수 없어 홀로 절대자나 신 앞에 서는 고독과 절망의 모습이 실존이다.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의 절망은 그것이 참다운 존재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실존철학은 현실 세계에서 힘을 잃고 문학 속으로 빠져들어가 사르트르와 같은 대변자를 발견한다.
이 책은 실존주의의 도덕관으로 행동이란 무엇인가를 사르트르의 독특한 입장에서 논하면서 그것과 관련해서 자유와 책임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실존주의의 본질을 평가하고 명쾌하게 표명함으로써 실존주의 해설서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데 내가 정작 놀란 것은 실존주의가 휴머니즘이라는 제목때문이다.
그리고 사르트르가 휴머니스트였던가를 알지도 못하면서 생각해본다.
실존주의란
20세기 전반(前半)에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생(生)의 철학’이나 현상학의 계보를 잇는 이 철학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문학이나 예술의 분야에까지 확대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한 유행사조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 성립 당초의 실존주의의 주장 내용이 희미해져 실존이란 말뜻도 애매해진 감이 없지 않다. 실존주의 철학을 초기에 수립한 야스퍼스나 하이데거를 오늘날 실존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실존이란 말은 원래 철학용어로서 어떤 것의 본질이 그것의 일반적 본성을 의미하는 데 대하여, 그것이 개별자(個別者)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여, 옛날에는 모든 것에 관해 그 본질과 실존(존재)이 구별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나 야스퍼스에서는 실존이란 특히 인간의 존재를 나타내는 술어로 사용된다. 그것은 인간의 일반적 본질보다도 개개의 인간의 실존, 특히 타자(他者)와 대치(代置)할 수 없는 자기 독자의 실존을 강조하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경향의 선구자로서는 키르케고르나 포이어바흐를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헤겔이 주장하는 보편적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 정신을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으로 보아 개인의 주체성이 진리임을 주장하고(키르케고르), 따라서 인류는 개별적인 ‘나’와 ‘너’로 형성되어 있음을 주장했으며(포이어바흐),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이 실존주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야스퍼스의 ‘실존’을 예로 들면, 실존이란 ‘내가 그것에 바탕을 두고 사유(思惟)하고 행동하는 근원’이며, ‘자기 자신에 관계되면서 또한 그 가운데 초월자(超越者)와 관계되는 것’이지만, 한편 그러한 실존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존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의 진리는 ‘좌절하는 실존이 초월자의 다의적(多義的)인 언어를 지극히 간결한 존재확신으로 번역할 수 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분류에 따르면 이와 같은 초월자 또는 신(神)의 존재를 인정하는 야스퍼스나 마르셀은 ‘유신론적(有神論的) 실존주의자’이고, 사르트르 자신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임을 주장한다. 즉 사르트르의 생각으로는, 인간에게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先行)하며,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결정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은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스스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선택하게끔 운명지어져 있다. 만약 인간의 본질이 결정되어 있다면 개인은 다만 그 결정에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되지만, 본질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 한사람 한사람의 자각적인 생활방식이 실로 중요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짐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생긴, 자유와 니힐리즘을 표방하는 실존주의의 한 파(派)는 사르트르의 아류(亞流)로서, 사르트르의 자유에 관한 사상을 오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로는 이 밖에 L.셰스토프, N.A.베르자예프, 부버를 들 수 있고, 문학자로는 사르트르 이외에 카뮈, 카프카 등을 들 수 있으며, 실존주의의 시조(始祖)로서는 F.W.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 나아가서는 B.파스칼까지도 거론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바르트나 불트만 등의 변증법 신학자가 실존주의 신학자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들에게 공통되는 것은 개인의 실존을 중시한다는 점일 뿐, 그 사상 내용에는 상당한 차가 있음에 주의하여야 한다.
휴머니즘이라는 것이 풍속 ·습관 ·사상이 자기들과 같은 인간만을 인간다운 인간이라 생각하고, 그 밖의 인간을 모두 인간의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독단적인 사고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휴머니즘의 본질은 그러한 자기중심주의 ·자국중심주의(自國中心主義)에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해나가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휴머니즘 자체를 초월한다’는 것이 바로 휴머니즘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두가지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가 맞는 것 같다. 뭐 내가 사르트르의 생각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저 미야베 미유키의 <대답은 필요 없어>에 나왔길래 찾아봤다. 사르트르 대답할 필요없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