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미움 받았던 민족
유대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면서도 역사상 가장 미움 받았던 민족’이 아닐까 싶다. 인류최초로 유일신교를 만들고, 예수, 마르크스, 프로이트, 스피노자, 하이네, 말러, 쇤베르크, 샤갈, 아인슈타인, 로자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벤야민 등 학문, 종교, 예술, 경제, 과학, 정치 곳곳에서 인류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위대한 인물들을 배출해낸 민족이자, 록펠러, 모건, 뒤퐁, 로열더치, GE, ATT, IBM, 보잉, US 스틸, 제록스 등 굴지의 기업들을 일궈낸 사업가들을 배출한 민족이 바로 유대민족이다. 그런 한편으로 2천년이 넘게 나라를 잃고 떠돌아야 했으며 어디를 가든 박해를 받아야 했고 20세기 초반에는 나치에 의해 600만 명 이상의 무고한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민족이 또한 유대민족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무엇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아브라함 이후로 4천여 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전 세계 각지에서 고통과 핍박을 견디며 저 나름의 위대한 정신적 성취를 거둘 수 있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뜻밖에도 너무 무지하거나 피상적인 이해에 머물고 있지 않나 싶다. 도대체 2천년이 넘도록 국가를 잃고 아무런 현실적인 힘없이 세상을 떠돌면서도 어떻게 오늘날까지 자신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 대답을 영국의 지성 폴 존슨의 <<유대인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을 듯 하다.
유대교의 탄생: 고통 속에서 빛을 찾아낸 유대인들
폴 존슨에 따르면 유대인의 역사는 아주 특별한 세계사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언제나 끊임없이 무시무시한 적대자들을 만났으면서도 자신들만의 고유한 동질성을 유지하며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이스라엘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4천년에 걸친 이들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조망되는” 새로운 시각의 세계사를 만나게 된다. 즉, 1942년 나치의 한 감옥에서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세계사의 위대한 사건들을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의심받으며 학대당하는 힘없는 이들, 압제당하고 모욕 받는 이들, 한마디로 고난 받는 이들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폴 존슨은 다음과 같은 아브라함의 고백으로부터 <<유대인의 역사>>를 시작한다. “나는 여러분들 가운데서 나그네로, 떠돌이로 살고 있습니다.” 이 이후로 4천여 년의 유대인의 역사는 한마디로 유랑의 역사였다. 모세의 지도로 이집트에서 탈출했던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보내야 했던 40여년의 세월이 그러했고, 앗시리아와 바빌론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겼던 포로기 시대가 또 그러했다. 그리고 결국 로마 제국에 의해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진 2천여년의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유랑과 핍박의 역사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고통 속에서 빛을 발견할 줄 아는 민족이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과는 달리 인류 최초로 인격적인 신을 발견했던 유대인들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게 되고 그 후 광야에서의 40년 동안의 고통스런 현실의 과정을 이야기로 기록하고 관념화함으로써 유대교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인류에게 지성의 빛을 선물하다
폴 존슨은 유대인들이 인류에게 건네준 가장 큰 선물은 인격적인 유일신론으로부터 비롯된 지성과 윤리의식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인격적인 유일신을 믿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신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지성을 사용하게 되는 한편 신이 내려주는 계명을 통해서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윤리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유대인들은 국가나 군사력 또는 넓은 영토를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지성과 합리적인 사고라는 무기를 갖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야만적이며 비합리적인 세상을 합리적이고 하나님에게 순응하는 세상으로 바꾸는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그들에게 맡겨진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지성을 더욱 더 강화해나가야 했다.
그러한 유대인들의 지적인 통찰은 하나님에 대한 사상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유대교에서는 유대인공동체와 인류를 위해 헌신하라고 권면했다. 특히 디아스포라 시대부터 시작된 중세 유대의 학문은 통치와 지식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교권통치체제, 즉 학자들인 랍비가 지배하는 사회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에 의해 고향을 떠난 유대인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를 떠돌아다니게 되었는데, 그들은 어디를 가던 공동체를 만들어 정착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공동체는 다른 이방세계와는 다르게 학자들에 의해 다스려졌던 것이다.
중세 유대 합리주의의 표상 - 마이모니데스
중세 유대의 학문이 지녔던 특징은 교권통치의 원형이자 그 분야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던 마이모니데스에게서 잘 드러난다. 그는 유대교와 율법뿐만 아니라 의학에도 능한 박학한 학자였다. 그는 다가올 메시아의 시대가 불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합리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범한 발전, 즉 진보의 결과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는 현세에서 인간의 상황을 증진시킬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이성을 통해 세상을 더 문명화된 장소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독교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신앙에서 미신적인 부분을 제거하고 그렇게 비워진 부분을 이성으로 보강함으로써 유대교를 이성적인 기반위에 세웠다.
이러한 전통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격리시키기 위해 만든 게토(유대인 강제거주지구) 안에서 거주할 때에도, 오히려 자신들의 신앙과 전통을 지켜가며 합리주의적인 성향을 더욱 키워갈 수 있었다. 세계 역사의 주류에서 사라졌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지성의 탑을 쌓고 있었고, 19세기에 마침내 게토에서 해방되자 그 동안 쌓아왔던 정신적인 역량을 인류에게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사례가 스피노자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스피노자는 유대교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스피노자의 작품과 사상 속에는 유대적인 전통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그의 사상은 합리주의적인 유대 전통 한 가지를 탁월하게 발달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다. 가령, 이성을 온전히 발전시키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 스피노자의 주장은 이미 이전에 유대인 랍비 마이모니데스의 사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론도 유대사상의 변주이다
19세기 게토에서의 해방 이후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지성의 거인들을 쏟아냈다. 마르크스가 그러했고,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이 그러했다. 인간을 바라보는 인류의 시각을 전복시켰던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론들도 사실은 천재들의 독창적인 사유라기보다는 유대적 전통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폴 존슨은 말한다.
가령, 마르크스의 경우 진보에 관한 그의 개념은 헤겔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그의 역사관은 기본적으로 유대적인 것이었고, 그가 주장했던 공산주의의 천년왕국론은 유대인의 종말론과 메시아주의의 변주였다. 또 그가 말한 통치 개념 또한 유대사회의 교권통치체제와 다를 게 없었다.
또 프로이트 역시 유대교로부터 많은 요소들을 취했다. 꿈을 해석하는 테크닉은 유대교의 신비주의 계통의 책 <<조하르>>에서 사용된 방법과 유사했고, 이야기를 통해 하나의 이론을 제시하는 기술은 유대 랍비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프로이트는 출애굽을 이끌었던 모세처럼 종교 지도자 같은 모습을 보이며 그의 연구 분위기는 마치 종교의 창설과 같아 그의 학설에 대한 반대는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폴 존슨은 다소 비판적인 목소리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학문방법이 공히 17세기에 활동했던 유대인 나탄의 방식과 유사함을 지적한다. 나탄은 샤베타이 즈비라는 인물을 유대인의 메시아로 추앙하고자 했다. 그러나 즈비는 터키에서 심한 고문 끝에 어이없이 이슬람교로 개종해버렸는데, 이때 나탄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배교는 어쩔 수 없는 역설이므로, 배신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개종은 이슬람 세계를 해방시키려는 메시아의 새로운 사명이자 마지막 희생이기 때문이다. 그는 원수의 진영에 들어간 트로이의 목마와 같다.”며 자신의 이론을 지켜냈다. 일종의 신념을 합리화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2백년이 지난 19세기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이와 같은 나탄의 방식, 즉 신념을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나갔다는 것이다. 이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종교적 신념과 유사한 이론을 유대 특유의 방식으로 합리화했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아인슈타인은 프로이트의 경우와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유대교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는 합리주의자이면서도 신비적인 영역을 인정했는데, 이는 진리를 인식하는데 있어 이성과 계시라는 두 가지의 상호보충적인 방법이 있다는 유대인 랍비 마이모니데스를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거칠게 설명해보면, 아인슈타인은 우주가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고 있고, 인간은 지성을 통해 그 법칙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마이모니데스가 신앙에서 신비주의적 요소를 제거하고 그 부분을 이성을 통해 채우고자 했던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은 혁신하는 민족이었다
유대인들은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가난함을 부유함으로, 그들에게 닥친 불운을 축복으로 바꾸어내는 민족이었다. 유대인들은 괴로움과 박해를 피해 여러 차례 이주를 해야 했다. 늘 그들의 공동체는 깨어졌고 사람들은 사방팔방 흩어져야 했지만, 그들은 거의 예외 없이 마지막 정착지에서 번영을 일궈냈다.
그 같은 번영이 가능했던 것을 폴 존슨은 ‘장소의 이동’이 주는 혜택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이주에 있어서 전문가들이었는데, 그 와중에서 그들은 특히 부에 집중하는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어떠한 불행에 처하더라도 항상 새로운 유동자산을 얻을 수 있었고 어디서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불리한 상황을 긍정적인 측면으로 바꾸어 놓은 다양한 사례를 접하게 된다. 중세와 근대 초기 유대인 소유의 자산들은 항상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다. 언제 공동체로부터 추방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런 상황에서 유가증권, 무기명 채권 등의 새로운 방식의 제도들을 만들어냄으로써 그런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현대 자본주의에 가장 쉽게 적응해갈 수 있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유럽 기독교 사회의 반유대주의로 인해 중세 유럽의 상업에 있어서 핵심적이었던 ‘길드’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중세 상업의 기반인 고정된 봉급과 가격이라는 체제를 뒤흔들어 놓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즉, 관습적으로 이어지던 상품가격과 판매 이익을 근본적으로 해체시켜 버렸던 것이다. 상품을 보다 잘 진열하는 방식으로 고객을 확보했고, 상품광고를 고안해내어 물건을 살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또 경제규모가 지닌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낮은 가격으로 많이 팔아서 큰 이익을 남기는 방식으로 대처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늘 혁신을 지지했다. 대표적인 예로 주식시장의 창출을 들 수 있다. 주식시장은 가장 효율적인 생산현장에 자본을 투자할 수 있도록 만든 능률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이었다. 18세기까지 이 주식시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만들어낸 경제적인 혁신은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19세기부터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은 상업정보를 수집하고 사용하는데 능통했다. 시장이 모든 유형의 상거래에서 주도적인 요소가 되어가고 동시에 일련의 세계적인 체제로 확장되어 감에 따라 정보는 최고의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는데, 유럽 각처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네트워크가 무역과 경제적인 성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기존의 경제체제보다 낫고, 보다 용이하며, 보다 저렴하고, 보다 신속한 방식들을 만들어내는 합리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유대인 출신의 경제인들이 놀라운 부를 축적한 배경에는 이처럼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았던 역사적인 배경이 바탕이 되어 있다.
반유대주의의 전통
한편으로 이 유대교는 유대인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반유대주의를 낳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세상을 떠도는 이주자들이 아니라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이방인들과 스스로를 구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거꾸로 이방인들로부터 격리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선택한 신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주변의 다른 민족들은 이미 버렸던 고대의 관습과 사회적인 금기를 여전히 유지하거나 오히려 강화시켰다.할례나 식사법과 정렬법 등 독특한 유대교의 율법은 점차 이민족들에게 이상함이라는 느낌을 넘어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세계 각지를 떠돌게 되는 디아스포라의 시작도 이 유대교에서 비롯하게 된다. 2세기 경 로마제국에 복속된 민족 중 유대인만이 유일하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참하게 패배한 후 유대인들은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는데, 그 밑바탕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다. 복합적인 인종과 민족들로 구성된 사회를 중시했던 그리스인들에게 자신들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유대인들은 ‘사람을 싫어하는’ 민족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최초의 반유대주의가 시작되었고, 당나귀를 숭배하여 성전에 당나귀 머리를 두었다는 전설이나 성전에서 몰래 인신 희생제사를 드린다는 전설 등이 나돌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의 지성인들은 소문만을 퍼뜨리는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에 직접적으로 반유대주의를 부추기기도 했다.
중세 시대에 접어들면 기독교인들의 반유대주의가 나타난다. 중세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민족으로서, 기독교의 진리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악의를 갖고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이러한 생각에다가 음식과 도살, 요리와 할례 등에 관한 율법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비정상적인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꼬리를 감춘 채 살아가고 있다든지, 하혈로 고생을 한다던지, 악마를 섬긴다든지 하는 루머가 퍼져나갔다.
그 중에서 중세 내내 유대인들을 괴롭혔던 것은 유대인들이 부활절마다 그리스도의 대역으로 기독교인을 살해하고 있다는 ‘의식용 살인’이라는 루머였다. 반유대주의의 전설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라고 외친 이후 그들에게 치질이 생겨났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이 병의 치료에 효험이 있는 유월절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매년 한 명의 그리스도 대역을 죽여 그 피를 섞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흑사병은 유대인들이 마실 물에다 독을 풀어서 생겨난 병이라는 루머도 떠돌았다. 뒷날, 셰익스피어 작품에서의 반유대주의도 이런 역사적 배경을 수용한 것이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시온 의정서’ 음모
이렇게 오랜 기간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반유대주의가 절정에 이른 것이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일 것이다. 나치는 6백만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무고한 유대인들을 학살했는데, 이때 히틀러는 사이비 과학을 이용해서 유대인들을 인간 이하의 종족으로 몰아가는 반유대주의를 유포했던 것이다.
20세기에 있었던 유대인들을 향한 최고의 음모는 <<시온 의정서>>로 대표되는 시온주의와 관련된 것일 것이다. 유대인들이 세계정복을 계획하고 있다는 내용의 <<시온 의정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반유대주의를 유발시켰는데, 가령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는 가난한 유대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유대인들과 나치들이 함께 꾸민 음모였으며 시온주의자들이야말로 나치 민족차별주의의 후계자라는 흑색선전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하지만 실제로는 세계정복을 꿈꾸었던 나폴레옹 3세의 작품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러시아 비밀경찰들에 의해 위조된 문서에 불과했을 뿐이다.
유대인의 역사 또는 인류의 전형
유대인의 역사를 보면 아이러니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유대인들이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신의 힘으로 국가를 통치할 때는 오히려 종교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반면, 그들이 고난과 역경에 처할 때 그들은 단호하게 자신들의 원칙을 고수하며 그들 특유의 종교적 경건성 아래에서 자신들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국가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 급속히 부패하기 시작했고, 위대한 솔로몬왕 시대에 또다시 부패했다. 부유하고 강력한 왕이 통치하게 되거나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여지없이 이교숭배와 부패가 반복되어 나타났다. 독립적인 통치기구를 갖고 번영을 누릴 때마다 기묘하게도 유대인들은 주변민족의 종교에 이끌려 종교적으로 타락해갔던 것이다. 반면, 신비스럽게도 그들이 국가를 잃거나 외세의 지배를 받았을 때마다 그들은 보다 더 율법에 순종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종교적 경건성 아래에서 자신들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어느 사회든 현세적인 힘과 권력은 그 자체로 악한 성향을 가지게 되고 부패하며 그래서 쇠퇴하는 반면 힘이 없거나 그 힘을 포기했을 때 선함을 획득하고 놀라운 정신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또한 개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늘 ‘힘-악함-육체성’과 ‘선-허약함-정신성’의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패배한 민족이 그 패배한 경험을 인류보편을 위한 경험으로 바꾸어놓은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럴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직 유대인만이 유랑과 핍박으로 점철된 그들의 특정한 운명을 기록하고 각색함으로써 인류에게 하나의 보편적인 도덕과 삶의 가치, 그리고 그 깊이를 선사할 수 있었다.
저자의 안내를 따라 오다보면, <<유대인의 역사>>를 통해 폴 존슨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역사는 어쩌면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 삶의 모범이자 전형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들 유대인들은 집 없고 약한 인간으로 세상을 늘 떠돌아다녀야 하는 방랑자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모든 인간에게 세계는 일시적인 숙소에 불과하고 우리 또한 일정한 수명을 받고 사는 단순한 임차인과 같은 존재이지 않은가. 그리고 또 우리는 모두 예루살렘을 세우길 원하는 한편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표류하고 있지 않은가. - 비밀경찰인 오크라나(Okhrana)는 차르가 유대인의 음모를 주도면밀하게 억누르지... 있도록 문서를 위조하라는 명령이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오크라나의 한...
전세계 노동자와 민중의 희망으로, 가혹하고 신랄한 독재자로, 강철과도 같은 영웅으로, 20세기 마지막 위협의 상징으로, 끝내는 박제된 시신으로써 세계사에 화인을 새긴 거인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전기. 저자는 레닌에 대한 기존의 관점·분석들과 명백한 결별을 고한 뒤 새로 공개된 문헌과 자료들을 자신의 연구 주제에 포함시켜 세심하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레닌의 삶과 그의 혁명을 다루고 있다.
러시아, 악명 높은 짜르 체제 하에서 중산 계급으로 태어나 세상을 뒤집어 놓은 혁명가의 삶을 찬찬히 따라가 보자. 그의 삶과 사상, 강렬했던 그의 시대를 통해 '레닌'이라는 이름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떠올릴 수 있다면 이 책은 제 역할을 다하는 셈이리라.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학자들은 레닌을 냉혹한 독재자로 묘사해왔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이 냉혹한 독재자가 실재로는 따뜻한 피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혁명 초기의 혹독한 겨울, 한 번은 노동자들이 국가소유의 주택에서 목재를 훔쳐 갔을 때 아내인 크루프스카야는 레닌에게 왜 그들을 고발하지 않느냐고 비판했다. 그러자 레닌은 그녀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춥고 무지한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들은 얼어죽을 것이다.' 또 한 번은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이 병든 레닌을 위하여 전동휠체어를 보낸 일이 있었다. 이 때도 레닌은 한사코 타기를 거부하며 그것이 붉은 군대에서 부상당한 노동자에게 전해져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런 에피소드들은 레닌과 그의 프롤레타리아독재가 부르주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냉혹한 것이었지만 노동자를 향해서는 결코 따뜻한 애정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점이 당과 맑스주의와 사회주의혁명의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려는 사람들이 레닌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받아들였던 이유 중 하나였다.
레닌은 분명 정치적 야심가였다. 그는 치밀한 정치적 계산 하에서 자신의 당을 장악하고 러시아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개인적 야심가는 아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 권력을 휘두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사랑했던 것들,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권력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철권정치를 자랑하던 짜르체제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 세계에 포위된 상황에서 최초의 사회주의국가를 형성한 러시아혁명이 어떻게 레닌이라는 단 한 사람의 이름으로 대표될 수 있었던 것일까? 당시 멘셰비키였던 페도르 단의 말은 이 의문을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아, 그건 하루 24시간을 혁명에 몰두하고 오직 혁명만을 생각하며 자면서도 혁명에 대한 꿈을 꾸는 사람이 그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오. 당신이 그렇게 노력해서 그를 극복해보도록 하시오!"
말 그대로 레닌은 혁명가로 살았고 혁명가로 죽었다. 가정은 그에게 혁명의 안식처였고 대학의 교정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감옥과 시베리아의 유배지는 혁명의 학교였으며 파리와 뮌헨, 취리히, 런던을 비롯한 유럽 곳곳의 망명지에 혁명을 향한 그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곳은 없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도 식을 줄 몰랐던 열정, 이것이 없었다면 척박한 러시아에서 어떻게 혁명이 가능했을 것인가.
"우리에게 혁명가조직을 달라. 그러면 우리는 러시아를 뒤집어엎을 것이다."
레닌은 이렇게 말하고 일생에 걸쳐 이 말을 실천했던 사람이었다. - 오크라나는 재빨리 스탈린을 구속했다. 그리고 1913년 5월... 그러나 체르노마조프가 레닌주의자로 행동한 것은 그가 오크라나의 스파이였고...
유년기에서 최후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적인 면모와 공적인 면모를 따라가면서, 그녀의 삶과 사상과 행동을 상세하게 그려낸 전기이다. 간결한 문체, 현재 시제를 구사하면서 저자는 애증이 교차한 연인이며 동지인 레오 요기헤스와의 관계, 여류 동지들인 루이제 카우츠키나 클라라 체트킨과의 우정,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과의 이념 논쟁, 카를 카우츠키와의 친교와 갈등, 레닌과의 교류와 비판 등을 생동감있게 묘사하였다.
저자는 로자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도 주저하지 않는다. 로자가 지하와 주변에만 머무르려는 인간인 레오 요기헤스의 그늘에서 감정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에는 순교자의 운명을 맞게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또 로자가 당시 모든 식민 국가들처럼 민족 독립과 민주화라는 두가지 과제를 안고 있던 폴란드의 현실을 무시한 채, 인터내셔널을 중심으로 한 국제주의 노선을 고집하는 이론적 오류를 범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폴란드 사회주의 진영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로 양분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1차 대전 직후 '베를린 코뮌'에서 취한 로자의 애매한 선택을 비판한다. 당시 사민당 우파와 결탁한 군부는 사민당 좌파이 혁명으로 붕괴될 위기로까지 내몰린다. 그러나 로자는 명령을 기다리는 수만 명의 군중에게 시민혁명의 길보다는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권고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회주의 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던 당시 로자가 레닌에 필적할만한 인물이었음을 강조한다. 개인적인 친분에도 불구하로 로자는 레닌의 관료주의와 공포정치를 끊임없이 비판했다. 레닌주의 대비되는 로자의 사상은 '룩셈부르키즘'이라 부르며 혁명과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화해와 공존, 대중의 의지에 대한 존중으로 요약된다.
이 책은 로자가 경험했던 사랑의 갈등, 그녀의 인간적 고뇌들, 예술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미시적으로 포착해내면서 그녀의 삶은 결코 무자비한 권력 장악이 아닌, 인류의 진정한 자유와 진실과 해방을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이 책에는 저자의 방대한 시각과 통찰력에 의해 파리 코뮌 이후 1차대전에 이르는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역사, 독일의 급속한 제국주의 노선과 저항운동이 펼쳐진다. 그래서 로자와 동시대를 살았고 유럽 전지역에서 활약했던 걸출한 사회주의 혁명가들과도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 동지인 아돌프 바르사프스키가 러시아 비밀경찰인 '오크라나'의 첩자라는 엉뚱한 소문을 퍼뜨렸다. 당시 '오크라나'는 정보원과 도발분자를 혁명 정당 내부로...
19세기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혁명가, 이론가 그리고 지리학자로 알려진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1842-1921)의 자신의 57세까지의 생을 회고하며 쓴 자전적 기록. 아우구스티누스 <참회록>, 루소 <고백록>, 괴테의 <시와 진실>, 안데르센 <내 생애의 이야기>와 더불어 세계 5대 자서전의 하나로 전세계 필독서가 되고 있는 책.
19세기의 관료적인 러시아, 그 통치하에 있는 민중, 고뇌하며 전진하는 러시아와 퇴행하는 러시아의 비극적 사(史)와 더불어 과시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성찰, 동시대인의 삶까지 읽을 수 있다. 유럽 노동운동사와 19세기의 러시아 역사, 특히 러시아 혁명의 열기와 시대상을 폭넓게 드러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이 책은 1898년 9월에서 1899년 9월까지 <한 혁명가의 회상>이라는 제목으로 연재, 단행본으로 만든 책을 번역한 것이다.
세계 5대 자서전 중의 하나
이 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루소의 『고백록』, 괴테의 『시와 진실』,
안데르센의 『내 생애의 이야기』와 더불어 세계 5대 자서전 중의 하나이다.
위인들의 자서전은 대체로 세 가지 중 하나다. “이제까지 나는 길을 잃고 헤매었다. 그러다 마침내 참다운 길을 발견했다.”(아우구스티누스)이거나, “나는 정말로 나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나보다 낫다고 감히 나설 수 있는 자가 누구냐.”(루소)이거나, “천재는 바로 이런 좋은 환경에서 내면으로부터 서서히 발전해왔다.”(괴테)이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크로포트킨은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지 않고, 남의 인정을 받아 보겠다고 고군분투하지도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자신보다는 동시대인의 심리를 묘사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19세기의 대표적 아나키스트이자 혁명가
크로포트킨은 19세기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혁명가이자 지리학자이다. 아나키스트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로 분류되는데 그는 푸르동, 바쿠닌과 함께 후자에 속한다. 그는 주옥같은 문헌들을 집필하여 유럽의 혁명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에서 활동하며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한 국가사회주의자들의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운동방식을 비판했다. 바쿠닌과 함께, 탈옥에 성공한 국제적인 혁명가로도 유명하다.
지리학자로서의 면모도 출중해서 훔볼트의 북아시아에 대한 지리적 오류를 교정하고 북극해 군도의 존재를 예측하는 등 많은 연구성과를 거두었다.
차르의 시종무관, 혁명가 되다
역사적으로 크로포트킨만큼 극적인 반전의 인생을 산 사람도 드물 것이다. 모스크바 명문귀족 출신으로 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창창한 출세길이 보장된, 러시아의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으로 말하자면 대통령 경호원이자 비서격인 ‘시종무관’이 되었다. 시종무관으로 근무할 당시에는 ‘농노해방령’을 발표한 황제 알렉산드르2세의 개혁정책에 기대를 했으나 그의 기만적이고 반동적인 성격을 파악한 크포포트킨은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혁명가가 되어 차르 타도에 앞장섰던 것이다. 이 책에는 알렉산드르2세에 대한 그의 다층적인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차르에 대해 증오뿐 아니라 인간적인 연민의 감정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도되어야 할 역사적 필요성을 절감하는 객관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뜻밖의 ‘인터내셔널’의 역사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근대 유럽 혁명사에서도 이러한 법칙은 관통된다.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본거지는 잘 알다시피 ‘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이었다. 초기 인터내셔널은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한 국가사회주의자들과 푸르동을 중심으로 한 비국가사회주의자들(아나키스트)이 섞여있었다.
마르크스는 기존의 ‘국가’의 틀을 유지한 채로 노동자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하자는 입장이었고 푸르동과 바쿠닌은 노동자들이 억압받는 것은 ‘국가’의 존재 때문이므로 ‘국가의 틀을 해체’하는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국가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 사이에는 혁명이론의 차이 뿐 아니라 문화적 차이도 있었다. 국가사회주의는 독선적이고 권위적이며 중앙집중적이었고 아나키즘에는 노동자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반권위적이며 교조적이지 않았다.
초기 인터내셔널에서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아나키즘을 지지했다. 이러한 사실은 인터내셔널하면 ‘마르크스’가 절대적 지지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금의 상식과는 다른 것이다. 마르크스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바쿠닌을 인터내셔널에서 제명한 후에도, 인터내셔널의 본부를 런던에서 미국 뉴욕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인터내셔널이 아나키스트 진영에게 장악되는 것을 염려할 정도로 노동자들의 아나키스트 진영에 대한 지지가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회원이 거의 없는 미국으로 본부를 옮긴 것은 사실상 도피였다. 이 책에는 지금은 비주류로 여겨지는 아나키즘이 19세기 말 얼마나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는지를 증언한다.
러시아 혁명이 볼세비키에 의해 성공했다고?
러시아 혁명도 마찬가지다. 흔히 러시아 혁명은 볼세비키에 의해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나키스트들의 헌신적 투쟁이 있었다.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혁명관이 서로 달랐으나,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적 대의를 실현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작은 견해 차이로 망칠 수 없다는 견해에서 볼세비키와 적극 협력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한마디로 러시아 혁명은 볼세비키와 아나키스트들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세를 장악한 후 볼세비키는 자신들의 권위적 정권창출에 걸림돌이 되는 아나키스트 진영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숙청을 단행했다. 그 전부터 크로포트킨은 레닌에게 권위적 권력이 갖는 폐해에 대한 항의와 염려를 전달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러시아에서 아나키스트 진영은 볼세비키에게 궤멸되고, 크로포트킨은 사망했다. 직접적인 사인은 폐렴이었지만 아나키스트 진영의 비극적 말로를 전해들은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던 것이다.
그가 죽은 지 70년 후 소련연방은 해체되었다. 크로포트킨이 염려했던 차르시대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권위주의적 중앙집중적 권력화로 인한 관료화, 창의성의 결여, 비민주주의, 자유의 결핍, 경제적 비효율성 등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권위적 사회주의 정권의 몰락을 예견했다고 할 수 있다.
자, 이제 죽을 준비가 되었어요
이 책은 근대 유럽 혁명기를 실감할 수 있는 역사 기록의 보고(寶庫)이다. 농노들의 삶에서부터 귀족의 생활모습까지 모든 계층의 생활상이 망라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당시 각 유럽국가들의 정치 상황과 혁명가들의 실상이 눈 앞에 사실적으로 펼쳐진다. 특히 다음과 같은 대목은 우리에게 매우 감동을 준다. 역사적 격동기에 인간이 얼마나 숭고하고 순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파리코뮌 민중봉기 때의 일이다. 한 소년전사가 베르사유 군(軍) 장교에게 붙잡혔다. 소년은 총살당하기 전, 자기가 가지고 있던 은시계를 가까이에 살고 있는 가난한 어머니에게 갖다 주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순간 불쌍한 생각이 든 장교는 속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소년을 풀어주었다. 그런데 30분이 지난 후 되돌아온 소년은 돌담 밑에 이미 총살당해 쓰러져 있는 시체들 사이에 서서 “자, 이제 죽을 수 있어요.” 하고 말했다. 소년은 적과의 약속일망정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12발의 탄환은 어린 소년의 온몸을 관통했다. - 이 동맹은 여전히 '오크라나(방위국)'라는 이름 하에 더욱 공식화된 형태로 존재하면서 때때로 여러...
독일 역사상 최초의 통일된 민족국가였던 <독일제국>의 흥망성쇠를 기록한 대서사시!
독일사에 정통한 역사학자 미하엘 슈튀르머는 독일이 이런 복잡한 역사를 가진 이유를 지리적 조건을 들어 설명한다. 독일은 유럽 내 모든 육지와 반도가 유라시아와 연결되는 중심부에 위치한다. 따라서 좋든 나쁘든 유럽 내 대다수 나라들과 전략적, 문화적 상호 관련성을 가지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 매력적인 국가의 각별한 의미를 지닌 한 시기에 주목했다. 1871년부터 1919년까지 약 반세기 가까이 존속한 '독일제국'은 독일 역사상 최초의 통일된 민족 국가였다. 민족의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했다는 점에서 제국의 출현은 독일사의 일대 전환기였던 것이다.
이 책은 1871년 프로이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독일제국이 탄생하는 순간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베르사유 궁전을 장악하고 화려하게 치르는 제국 선포식의 풍경이 마치 눈앞에서 보이는 듯하다. 모두 8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어떻게 신생 민족국가인 독일이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대 변혁기에서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는지 설명하고, 독일 제국의 부상과몰락을 다방면으로 분석하고 있다. 방대하고 잘 정리된 정보는 전공자들에게 정치, 문화사적 교재로서 손색이 없으며, 인물과 사건들의 연계를 추적해 나가는 이야기 형식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친숙하게 다가간다. 한편의 대서사극을 읽는 듯, 대규모 역사 영화를 보는 듯 독자들을 매혹시킬 것이다.
극단적 민족주의가 패망의 역사 불러!
지나간 역사는 모두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교훈이 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독일제국의 발자취를 되짚으며, 단결된 민족주의의 부흥과 교육의 중요성, 문화와 과학의 발전이 가져오는 사회적 풍요 등에 먼저 눈길을 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극단적 민족주의에 치우쳐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패망의 역사를 거울 삼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독일과 역사적 유사점을 많이 지닌 우리 나라의 독자들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클 것으로 기대된다. 이 책은 짧은 한 시대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깊은 안목을 제공할 것이다. - 오스트리아군은 절망적인 양면전에 직면할 것이다. 러시아의 비밀경찰 오크라나는 사라예보에서의 암살 이후에 모든 슬라브 형제들은 이제 함께 일어서서 싸워야...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혁명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쓴 최고의 책으로 『카탈로니아 찬가』, 『중국의 붉은 별』과 함께 르포문학의 3대 걸작으로 꼽힌다. 이 책은 1980년대 군사 독재 정권의 검열 때문에 대폭 생략된 내용을 완전히 복원한 한국 최초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의 완역본이다.
기자인 존 리드는 존 리드는 혁명 러시아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와 그 주변 도시들, 혁명의 두 번째 격전지였던 모스크바까지 곳곳을 누비며 볼셰비키가 노동자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러시아의 국가권력을 장악해 소비에트로 넘기는 과정을 구석구석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은 본문을 완전히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포고문이나 명령문 등 귀중한 자료들이 수록된 90페이지에 가까운 부록과 후주도 모두 되살렸다. 독자들은 뜨거운 혁명의 현장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설레임과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이 책의 출간 의의
이 책은 미국의 진보적 언론인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완역한 책이다. 러시아 혁명을 다룬 이 책은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금서였다. 혁명 과정의 진실한 모습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혁명 과정에서 실제로 별로 한 게 없는 스탈린 자신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레닌이 추천한 이 책을 스탈린은 출판을 금지했었다. 한국에서도 과거 두레출판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었으나, 군사 독재 정권의 검열 때문에 많은 부분들을 생략한 채 출간할 수밖에 없었다. 12장 ‘농민대회’ 전체와 각 장에서 몇 단락이나 몇 페이지씩이 생략됐었다. 그러나 이번에 출간한 이 책에는 본문을 완전히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포고문이나 명령문 등 귀중한 자료들이 수록된 90페이지에 가까운 부록과 후주도 모두 되살렸다. 이로써 세계 3대 르포문학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고, 거장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영화화한 이 책의 완역판을 한국 독자들도 볼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러시아 혁명을 다룬 책들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러시아 혁명을 ‘피의 강물이 흘러넘친 소수의 쿠데타’라고 주장하거나, 볼셰비키라는 소수 지도자들에게만 주목함으로써 러시아 혁명의 진실을 올바르게 다루고 있지 못했다. 이 책은 기자인 저자가 러시아 혁명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직접 경험한 것을 생생하게 기록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사실대로 그려내고 있다. “인류가 시도한 가장 경이로운 모험”과 현장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고 싶은 독자라면 누구나 재밌게 읽을 수 있다. - 은밀하게, 또 활발하게 활동해 온 이른바 '어두운 세력들'이 있었다. 악명 높은 오흐라나[비밀경찰]의 요원들도 여전히 짜르를 위해서 혹은 그에 반대해서, 또...
역사는 상상력이고 가능성이며 쓰라린 교훈이다.
금세기 최고의 역사가 홉스봄이 말하는 '나를 만든 역사, 내가 만드는 역사'
<역사론>은 홉스봄이 평생을 바쳐온 역사 연구와 역사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적극적으고 미래 지향적인 역사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대화로 보는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뛰어넘는 책이다. 아울러 다른 역사 이론서와는 달리 대부분의 글이 원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홉스봄은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인근 사회 과학의 성과를 폭넓게 수용하며 미시적인 인간 경험에도 주목하는 등 대가다운 자세로 역사에 접근한다. 무엇보다 삶의 다양한 측면들을 아우르는 전체사에 대한 시도,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철저한 자기반성과 비판, 섣부른 포스트모던적 유행에 대한 경고, 현대사의 광기와 오류들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공감 등 역사가로서의 진지한 태도뿐만 아니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간 홉스봄의 진솔한 면들이 이 한 권에 모두 녹아 있다. 우리는 <역사론>을 통해 격동의 우리 세기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고,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올바르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 차르의 비밀경찰인 오흐라나(Okhrana) 같은 곳에서는 문명적인 방법의 사용이... 최대한 실행했다. 볼셰비키들은 자코뱅 당원들처럼 공식적으로는 오흐라나가 사용했던...
이 책은 네로, 이반, 스탈린, 히틀러, 후세인 등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다섯 폭군들의 사적이고 기이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대중들 앞에서는 막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절대 권력자로 군림했지만 대부분 평범한 시민들보다도 불행하고 특수한 환경에서 성장한 이들은 예외 없이 비뚤어진 성격이나 퇴폐적인 성적 취향, 혹은 가학적 피학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가히 성격파탄자라 불러 마땅한 이들은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며 지도자로 군림해왔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폭군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사적인 면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역사교과서를 통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었던 그들의 이면을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고대에서 오늘날까지 신의 권세와도 같은 절대 권력을 누려왔던 폭군들이 실제로는 어떤 인물들이었으며, 어떻게 권좌에 오를 수 있었고 또 무엇이 이들을 그토록 잔인하고 기이한 성격을 지닌 폭군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해 일말의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품위 있게 차려 입은 한 남자가 커튼을 쳤다. 그는 러시아 차르의 비밀경찰 오흐라나(Okhrana)의 국장을 지낸 스피리도비치 장군으로, 그곳이 파리임에도 몹시 주위를...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존재한 어떤 경제, 사회 체제보다도 훨씬 역동적인 체제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극단적 면모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두드러진다. 엄청난 부와 끔찍한 빈곤이 공존하고 있다. 위대한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인류가 직면한 선택이 '사회주의 아니면 야만주의'라고 말했다. 새 천년은 우리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동시에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극단적인 가능성과 극단적인 위험이 공존하는 극단의 시대다. 저자는 이 책에서 희망과 절망의 갈림길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 짜르의 비밀경찰 오흐라나의 옛 국장은 혁명이 "순전히 자생적인 현상이었으며, 정당이 선동해서 일어난 일은...
이 책은 레닌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이바지한 가장 중요한 사항들, 즉 사회주의 조직의 이론과 실천에 기여한 바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이 책의 목표는 레닌을 두 가지 종류의 왜곡―소위 ‘현존 사회주의’ 국가들(소련,동유럽,북한 등)에서 레닌 사후에 이루어졌던 왜곡, 그리고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흔히 있는 왜곡―에서 구해 내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길고 험난하며 굴곡이 심한 과정을 통해 볼셰비키당이 어떻게 건설됐는지를 매우 상세히 설명해 준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레닌의 사상의 진수들을 만날 수 있다.
스탈린주의 체제가 붕괴했다고 해서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무용지물이 된 것은 전혀 아니다. 경제위기와 대중의 빈곤, 전쟁, 대립이 지배하는 현재의 세계에서, 그리고 전쟁과 세계화에 맞선 거대한 전세계적 운동이 벌어지는 지금, 레닌의 당 건설 이론과 실천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 오흐라나가 거의 모든 당 조직에 침투했고 의심과... 어떤 활동가는 이렇게 썼다. "오흐라나의 이상이 실현되고 있다. 비밀 첩자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