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 음식문헌 연구자 고영이 읽고 먹고 생각한 것들
고영 지음 / 포도밭출판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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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근래 사람들은 더 이상 음식을 먹고() 마시기만() 하지 않는다. 이제 음식은 무엇보다 보고 듣는 무엇이다. 영세 유튜버에서 지상파까지, ‘매체를 자처하는 모든 이들이 이른바 먹방에 열을 올리는 탓이다. 카메라에 담아낸 음식의 맛깔스런 자태, 그리고 이를 게걸스레 해치우는 셀럽들의 짭짭대고 후루룩거리는 소리에 대중은 열광한다. 바야흐로 미각을 대신해 시각촉각이 음식을 느끼는 주된 감각으로 떠오른 시대다.

  먹고 마시라고 만들어놓은 음식을 보고 듣는 하 수상한 시절에, 음식문헌연구자 고영은 생뚱맞게도 음식을 읽는다.’ 읽는 감각, 굳이 한자로 옮기면 독각(讀覺)’ 정도 되려나. 그의 책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는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잔잔하게 음식을 읽어간 기록들의 모음이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카스테라를 본뜬 노란 표지인데, 매끄럽게 빤딱거리는 재질로 만들어서 카스테라보다는 커스터드 푸딩을 닮았다. 고전문학 전공자답게(?) 리듬감이 느껴지는 그의 글은 보드라운 카스테라보다는 탱글탱글한 커스터드 푸딩과 잘 어울린다는 점에서, 지금껏 접한 책 디자인 중 최고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오른쪽 아래에 떡하니 박힌 “2019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마크만 없었다면 말이다.

 

  앞서 언급했듯 고영은 음식문헌연구자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그의 이름만 뜨는 걸로 보아 스스로 만든 직함인 듯한데, 이만큼 고영의 정체성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말도 없으니 한 번 찬찬히 뜯어보자. 우선 그는 음식을 연구한다. 또한 문헌도 연구한다. 무엇보다 그는 문헌과 음식의 얽힘을 연구한다. 말장난 같다고? 조금만 더 읽어보시라.

  우리가 음식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기까지의 과정은 찰나에 비견될 정도로 짧다. 우리가 느낀 음식의 감촉과 맛을 어렵사리 말로 꺼내보기도 전에, 음식은 이미 꿀떡하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버리기 일쑤다.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표현을 찾아내는 일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그렇기에 형언(形言)할 수 없는그 맛을 어떻게든 형언해보려는 노력은, 동시에 언어를 가꾸고 그 경계를 넓히는 일이기도 했다. 음식은 언어를 북돋았고 언어는 음식을 증언했으므로, 음식의 역사는 곧 언어의 역사일 수밖에 없었다. 음식문헌연구자가 음식문헌을 기계적으로 이어붙인 직함이 아닌 이유다. 음식과 문헌의 복잡한 얽힘은 그 자체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

 

  조선시대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고영은 음식을 읽는 감각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살핀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땅의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또 그 맛을 적확히 표현하고자 고심해왔다. 희대의 이단아 허균은 1610, 유배지인 전라도 함열에서 읽는 먹방도문대작을 썼다. 혀로 느낄 수 없다면 글로라도 실컷 맛보자는 심보였다. ( 허균, ‘먹방의 추억)

  1720, 아버지를 따라 세계 최대의 도시인 북경을 방문한 멋쟁이 도련님 이기지는 보다 정교하고 관능적으로 음식을 감각했다. 총명함과 친화력으로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사로잡은 그는 유럽의 식사와 간식, 무엇보다 와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빛깔, 풍미, 촉감, 마시고 난 뒤의 감각까지, 이기지가 남긴 조선 최초의 와인 시음기는 오늘날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 이기지, 떠나고 먹고 감각하다) 다만 전근대의 기록이란 어디까지나 양반 엘리트가 한문으로 쓴 것이었기에, ‘읽는 먹방을 향유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상황이 달라진 건 이른바 근대(modern, 책에서는 현대라 표현)’라는 미증유의 시대를 맞이하고부터다. 아직까지 근대를 둘러싼 여러 정의들이 옥신각신하고 있지만,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한정한다면 근대란 무엇보다 사람들이 넘치는 활자에 둘러싸여 살아가게 된 시대다. 국가를 초월한 교양인의 보편언어를 저잣거리의 입말이 밀어냈고, 비밀스레 유통되던 필사본 대신 대량으로 찍어낸 활자본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유라시아 동쪽의 궁벽진 반도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제 한문이 아닌 언문으로 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몇몇은 이를 새로 주조한 활자에 찍어 널리 퍼뜨렸다. 그 결과, ‘한국어혹은 조선어라는 오래된 미래는 식민지라는 제약 속에서도 산업현장, 이주 노동, 분규, 쟁의, 파업, 민족 같은 근대의 개념들을 너끈히 품어낼 수 있게 되었다. ( 소금 한 톨에 깃든 사연)

 

  언어만 바뀐 게 아니었다. 음식 역시 근대라는 롤러코스터에 올라탔다. 은자의 나라 조선은 이웃한 청과 일본, 대만은 물론이고 저 멀리 서양까지 이어진 글로벌한 연결망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청의 호빵과 일본의 팥빵, 유럽의 맥주 등 새로운 음식들이 조선으로 물밀 듯 밀려왔다. ( 한국 빵 문화사의 원형/ 맥주나 한 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땅에 뿌리내려온 음식이라 해서 근대의 파고를 피해갈 순 없었다. 대표적으로 소금은 일본의 자본, 대만의 기술, 중국 산둥(山東)의 노동력이라는 트랜스내셔널한 조건에 놓이며 자염(煮鹽)에서 천일염(天日鹽)으로 새롭게 태어나다시피 했다. ( 소금 한 톨에 깃든 사연)

  이처럼 근대를 맞아 환골탈태한 음식을, 역시 환골탈태한 언어가 가만둘 리 없었다. 새로운 맛을 담아내려는 궁리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다. “전정(前程, 앞길)이 구만리라는 고리타분한 수사로 애써 주인공을 위로하던 무정속 하숙집 노파는, 어느새 조선중앙일보기자에게 우유 넣어드려요?” 하고 새침하게 물어보는 다방 마담으로 탈바꿈했다. 1917년에서 1936, 불과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 빙수 한 그릇/ 음식이 만든 풍경들)

 

  모름지기 냉면은 초여름에 먹어야 제맛이라는 조선중앙일보와 이에 질세라 냉면은 원래 겨울음식이라는 매일신보의 기싸움, 커피와 코코아를 선전하는 화려한 신문광고들, 퇴근길에 맥주잔을 기울이는 경성의 화이트컬러 남성까지, 정말이지 하지 아니할 수 없다. ( 냉면 먹방/ 음식이 만든 풍경들/ 맥주나 한 잔) 이게 바로 -이구나 싶어 그 흥취에 한껏 거나해지려는 찰나, 저자는 명랑하게 부글거리는 -의 거품을 슬그머니 걷어버린다. 거품이 사라지고 남은 건, 어느 하나 내 것 아닌 초라한 잡동사니뿐이다.

  요즘엔 흔히 도란스(ドランス, trans의 가타카나 표기)’란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된다만, 한국의 근대가 곧 일본과 미국을 짬뽕한 열화판이란 사실은 모두가 아는 비밀이다. 가령 오늘날 우리가 빵이라 부르지만 사실 빵도 과자도 아닌 그 무엇은, 일본식 제빵제과의 산물을 미국의 원조 밀가루와 옥수수가루로 찍어내 대량으로 유통함으로써 탄생했다. ( 한국 빵 문화사의 원형) 그 기원과 내력을 살피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은 결과, 이제 대부분의 한국인은 빵과 과자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한국 근대의 이러한 족보없음, 명실상부 1세계의 말석에 걸터앉은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하나의 족보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의지할 중심이 없으니 바깥에서 뭐가 유행한다 하면 앞뒤 가릴 것 없이 일단 들여오고 본다. 대만카스테라가 그렇게 한 차례 골목상권을 휩쓸고 지나갔고, 이제는 흑당버븥티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잘 되기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되기에만 치중한 결과는 이토록 아리고 쓰리다. ( 아리고 쓰린 카스테라 담론)

 

  저자는 힘주어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카스테라와 카스텔라의 사이를 느끼는 감각이라고 말이다. 일본의 카스테라(カステラ)16세기 말 포르투갈 사람들이 전해준 카스텔라(castella)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일본은 물론이고, 본고장인 유럽에서도 카스테라는 카스텔라와는 다른 일본의 전통과자로 받아들여진다. 일본식 달걀찜인 챠완무시(茶碗蒸) 조리법을 응용하여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카스테라와 카스텔라에 사이를 만들어주는 건, 내 입맛의 기호와 공동체의 선택을 동력삼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온 역사 그 자체다. (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되돌아본다. 한국이라는 공동체는 지금껏 어떠한 감각과 방법, 태도로 음식을 대해왔는지, 그리고 나는 내 입맛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우리 한국어 화자들은 옛 문헌을 뒤져가며 음식을 읽는감각을 기르기보다는 먹방에 탐닉하며 먹어보지 못한 음식에 대한 선망과 환상만 키워가진 않았던가. 혹은 조선의 선농제로부터 설렁탕이 시작됐다거나 커피를 처음 마신 사람이 고종이라는 흰소리를 주워듣곤 낭설 수집을 음식 문화사 공부로 착각하진 않았던가. ( 차례 앞두고 기억할 말, 가가례)

  또 나는 어떠했는가. 매 끼 식사를 제대로 챙겨먹기보다는 스누피 커피로 때우고’, 내 입맛을 섬세히 계발하기보다는 펄펄 끓는 마라탕을 조지고’,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분들에 대한 감사 없이 허겁지겁 해치우지않았던가. 저자는 온전한 밥그릇을 누리는 삶이야말로 진정 인간답다고 이야기한다. ( 온전한 밥그릇을 누리는 삶) 일단은 밥 먹을 때 락앤락 통에서 반찬을 꺼내 그릇에 옮겨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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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권력 도시 - 일본 식민 지배와 공공 공간의 생활 정치
토드 A. 헨리 지음, 김백영 외 옮김 / 산처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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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무라 아야코(島村文子),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조선철도국에 발령받은 오빠를 따라 식민지의 수부 게이죠(京城)에 자리 잡는다. 여성에게 현모양처나 교사 정도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꿈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 워낙에 총명했던지라 자신의 운명 정도는 진작 간파했던 그는 용산역 철도관사 근처 만철경성도서관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인다.

  그런데 갑자기, 칠흑같이 어두운 높은 벽이 그의 눈앞에 불쑥불쑥 나타난다. 오직 자신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성벽에 불길한 예감이 든 아야코는 서둘러 조선을 뜬다. 이윽고, 두 차례의 태풍이 철도의 중심이자 일본인의 새 수도 용산을 집어삼킨다. 19257월의 일이었다. 쑥대밭이 된 용산과 달리, 한때 아야코가 모든 물자를 수운으로 공급받는 주제에 왜 그리도 강에서 멀리 떨어져있느냐며 의아해했던 조선의 옛 수도는 너무나도 멀쩡했다.

 

  다들 눈치 챘겠지만, 아야코는 실존인물이 아니다. 배명훈의 소설 고고심령학자(2017)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로, 사건해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서울이란 도시에 빙의하려는 코끼리 혼령을 막아보고자 고군분투하는 고고심령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책의 제목이자 중심 소재인 고고심령학부터가 허구란 점에서 자칫 판타지로 비칠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지적인 작가답게 배명훈은 역사적 사실을 적절히 곁들임으로써 소설의 현실감과 몰입도를 높였는데, 이른바 이중도시역시 그러한 장치 중 하나다.

  이중도시란 간단히 말해 두 개의 심장을 가진 도시로, 원래의 중심 옆에 이민족의 정복이나 교통의 발전 등으로 또 하나의 중심이 생겨남으로써 만들어진다. 인도의 델리-뉴델리, 오키나와의 슈리-나하, 몽골의 카라코룸과 더불어 서울 역시 이러한 이중도시에 해당한다. 조선왕조 오백년의 중심이었던 한양(사대문 안) 남쪽에, 용산이라는 군사와 철도의 중심이 일제에 의해 하나 더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코끼리 혼령이 서울, 구체적으로는 용산에 빙의하려 드는 이유도 도시의 중심이 두 개인 꼴을 보지 못해서다.

 

  만약 역사학자 토드 A. 헨리가 고고심령학자를 읽었다면, ‘이중도시론이 문학적 알레고리로는 의미가 있을지언정 학문적으로는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한 개념이라고 단언할 것이다. 그가 바라본 식민지 경성은 지리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중심이 뚜렷하게 갈리는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헨리의 책 서울, 권력도시는 경성의 공공 공간을 중심으로, 총독부의 동화(同化, assimilation) 정책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반응한 다양한 인종과 계급의 사람들을 그려낸다. 역자들이 공들인 흔적이 역력함에도 결코 읽기 쉽지 않은 책이지만, 소위 식민지 근대뿐 아니라 권력과 개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만큼 도전할 가치가 있다.

 

  저자는 식민지 조선에서 이루어진 총독부(식민국가 혹은 식민정부)의 동화정책을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재구성한다. 첫째, 동화란 단순히 일본의 정신과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았다. 일본이 조선보다 훨씬 진보했다는 게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진 만큼, ‘일본인 되기는 곧 근면하고 청결한 근대인 되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동화를 정신적(spiritual), 물질적(material), 공중적(civic, 公衆的) 동화로 구분하여 그 외연을 넓힌다.

  둘째, 동화는 총독부가 일방적으로 내리꽂듯이이뤄지지 않았다. 근래 한국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나오는 이야기지만, 총독부는 결코 전능하지 않았다. 늘 돈에 쪼들리며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요구를 고려해야만 하는, 강력하지만 한계가 뚜렷한 정부야말로 총독부의 실상에 가까웠다. 지배의 대상인 조선인과 일본인 역시 단일한 정체성을 지닌 인구집단이 아니었다. 경성에 언제 터를 잡았는지, 사는 곳은 어디였는지, 얼마나 부유했는지 등은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 인종만큼이나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총독부도 동화를 적극적으로 강요할 수 없었고, 다종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경성부민들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만큼, 엘리트들의 논쟁이나 국가정책을 통해 동화의 실상을 파악하기엔 한계가 뚜렷하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가 주목하는 건 경성의 공공 공간이다. 총독부와 경성부민들이 일상적으로 얼굴을 맞대는 이곳 접촉 지대야말로 동화의 너른 스펙트럼을 남김없이 펼쳐 보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남산의 경성신사와 조선신궁,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에서 개최된 두 차례의 공진회와 박람회, 도시 곳곳에서 이루어진 위생검사와 캠페인을 각각 정신적 동화, 물질적 동화, 공중적 동화를 분석하는 공공 공간으로 설정한다. ‘시간의 구분 역시 공간만큼이나 신박한데, ‘무단통치-문화통치-민족말살통치라는 기존의 도식을 묘하게 비틀어버리기 때문이다. 저자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불만세력을 평정1(1910~1915), 통치방식의 전환이 모색되었으나 여전히 갈팡질팡하던 전환기(1915~1925), 명실상부 문화통치의 시대로 접어든 2(1925~1937), 총력전과 함께 내밀한 사상통제가 시작된 3(1937~1945)라는 새로운 시대구분을 제시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인종/계급/젠더/거주지에 따라 총독부(사실은 총독부조차 단일한 실체가 아니었다!)가 제시한 동화라는 약속을 전유해간 양상은 굉장히 혼란스럽지만, 그만큼 흥미진진하다. 가령 1898년 세워진 남산의 경성신사는 총독부가 명실상부 조선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등극한 뒤에도 경성의 일본 거류민을 위한 신사라는 본연의 정체성을 고집스레 이어갔다. 총독부는 1914년 일본 거류민단을 해체하고 1916년에는 마침내 단일한 도시 행정체계를 확립했지만, 경성신사만은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그저 각 지구의 제사를 주관하는 씨자총대((氏子總代)의 일부를 조선인이 맡게끔 강제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1925년 전 조선의 제의(祭儀)를 주관하는 매머드급 규모의 조선신궁이 완공되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똑같이 남산에 자리한 저 거대한 라이벌과 맞서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1919년 터져 나온 엄청난 저항의 에너지를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인들을 경성신사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마침 조선신궁이 오로지 일본의 신과 천황만을 모시겠다며 자민족중심주의를 대놓고 선언하자, 잇속 바른 신사의 지도자들은 재빨리 단군을 비롯한 조선의 토착신을 경성신사에 합사(合祀)해버렸다. 1929년에는 아예 단군을 위한 별도의 신전(神殿)까지 만드는 등, 경성신사는 차츰 일본 거류민만의 신사에서 경성부민의 신사로 바뀌어갔다.

  급기야, 1931년에는 조선인 씨자총대들이 대제행렬을 총괄하기에 이르렀다. 주체만 바뀐 게 아니었다. 모자와 바지는 신토 스타일로, 그 외에는 흰색 깃과 검정색 두루마기로 맞춘 퓨전의복이 처음 등장했다. 신여(神輿)를 진 일본인들이 외치는 왓쇼이(わっしょい)”에 조선인 구경꾼들은 얼싸둥둥으로 화답했다. 식민통치도 어느덧 20, 구호에 불과한 줄로만 알았던 내선일체(內鮮一體)’가 드디어 이루어지기 시작한 걸까.

  안타깝게도(?) 이는 몽상에 불과했다. 대제행렬의 총책임자인 전성욱은 스스로를 문외한이라 낮추며 자기 대신 더 부유하고 저명한 일본인이 이 일을 맡아야한다고 제안했다. 오랫동안 씨자조직에서 활동해온 지역 명망가인 그조차도 외부의 권위를 빌려오지 않고서는 자신의 일본인됨을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최고의 엘리트조차 이러했을진대, 보다 아래에 위치한 조선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그저 신사 주위를 어슬렁거리거나, 기생과 게이샤에 열광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참배객들의 지갑을 슬쩍했다. 이들에게 경성신사는 경건한 참배의 공간이라기보다는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유원지에 가까웠다. 앞서 언급한 조선인 구경꾼들의 얼싸둥둥역시, 신사의 제전행렬을 나름의 방식으로 전유한 것일 수 있다고 저자는 추측한다.

 

  물질적 동화 역시 마찬가지 결과를 낳았다. 1929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박람회는 내지관광객에겐 조선의 이국적인 흥취를 맛볼 수 있는 관광코스였으나, 조선인 민족주의자에겐 식민지 수탈의 적나라한 전시장이었다. 조선인이 3분의 2 가량을 차지한 여성 안내원에겐 키스 비즈니스를 통해 돈은 물론이고 모던 보이와의 연애까지 노려볼 수 있는 기회였으며, 시골의 농민들에겐 강요에 떠밀려 큰돈을 내고 참석당한 관제행사였다.

  공중적 동화의 일환인 위생 캠페인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총독부와 조선인 엘리트들은 경성이 똥의 수도혹은 제국의 병든 도시로 불릴 만큼 위생수준이 열악하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했다. 하지만 전자는 이를 조선민족의 열등성을 보여주는 근거로 삼은 반면, 후자는 공공자원을 충분히 확충하지 않는 총독부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 삼았다. 말하자면 이들은 같은 침대(同床) 위에서 다른 꿈(異夢)을 꾼 셈이다. 물론 열악한 위생시설의 최대 피해자인 대다수 조선인 하층민들은 침대에 걸터앉을 수조차 없었다.

 

  이처럼 식민지의 수부 경성의 공공 공간에서 펼쳐진 동화의 동역학(動力學)은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고, 사람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기에 하나의 정연한 흐름으로 정리하기 어렵다. (그것이 아마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복잡한 메커니즘 속에서 유달리 두드러지는 움직임을 찾을 수 있다면, 그건 아마 웃음 혹은 오락이 갖는 고유한 힘일 것이다.

  오락은 흔히 선전에 곁들여지는 양념 정도로 폄하되곤 한다. 권력에 대한 불만을 웃음으로 무마할 뿐 아니라, 그 속에 특정한 메시지를 녹여냄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중을 권력이 원하는 대로 길들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부터 혐오를 농담화하는 일베의 전략에 이르기까지, 오락을 통한 선전의 효력은 지금껏 한국사회에서 여러 차례 입증된 바 있다.

 

  하지만 서울, 권력도시에서 보여주는 건 이와는 정반대의 양상, 그러니까 선전이 오히려 그 오락적 요소에 의해 무력화되는 모습이다. 경성신사는 게이샤와 기생을 불러 모으고, 아마추어 스모 대회를 개최하는 등 오락을 통한 은밀한 정신적 동화를 도모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일본 정신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경성신사를 유원지로 단정지어버림으로써 역으로 신사의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크게 해쳤다.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에서도 선전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기생에 열광했고, 최첨단 물 펌프를 폭포물 놀이시설로 착각했으며, 잔망스런 원숭이에 매료되었다. 망해버린 왕조의 유적과 국적불명의 -한 전시관을 대비시킴으로써 조선인들을 물질적으로 동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던 총독부의 바람은, 경성 사쿠라이 소학교 학생들이 남긴 피상적인 감상 앞에서 보기 좋게 무너져 내렸다. 일본인 소학생들에게도 공진회는 그저 이상하고, 놀랍고, 아름다운 체험이었을 뿐이다. 심지어는 가장 계몽적이고 엄숙해야 마땅할 공중적 동화조차 기생과 활동사진, 바이올린 연주에 의존함으로써 흥미 위주의 오락거리로 전락했다.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공략하기보다는 낙후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총독부의 동화정책에 성공적으로 저항한 경성의 조선인들은 식민지 근대를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수탈론과 근대화론, 근대성론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한반도의 근대를 설명하는 유력한 이론들은 하나같이 그 압도적인 무게에 짓눌려있었다. 다만 근대가 조선을 철저히 털어먹었는지, 발전시켰는지, 아니면 규율권력을 창출했는지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반면 저자는 정교한 선전을 오락으로 만들어버린 조선인들을 통해 근대란 기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대담한 생각을 내비친다. 조선인들은 그 안에 담긴 총독부의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오락을 오락으로 즐겼으며, 총력전이라는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신사 앞에서 조선식 큰절을 했다. 그들은 근대의 폭력에 저항해야겠다는 거창한 사명감으로 움직인 게 아니다. 그저 근대를 의식조차 하지 않고 평소처럼 생활했을 뿐이다. 어쩌면 카터 에커트(Carter Eckert)가 말한 제국의 후예(Offspring of Empire), 강력한 발전국가나 이에 기생하는 재벌 따위가 아니라 이처럼 권력의 선전에 웃음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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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
오수창 지음 / 일조각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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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엔 북조선의 본진이자 냉면의 고장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못하는 평안도는, 사실 한반도의 근대를 선도한 지역이었다. 안창호, 이승훈, 김동인, 이광수, 조만식 등 개화기와 식민지기의 지식계와 언론계를 이끈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모두 평안도에서 나고 자랐다. 해방 후에도 장준하, 김준엽, 서영훈, 백낙준을 비롯한 평안도 출신 월남민들은 동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리버럴 우파로 자리 잡았다. 2017년 출간돼 소소한 반향을 일으킨 김건우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기실 이들 서북 리버럴에 바치는 헌사에 다름 아니다. (물론 난 이들이 대한민국을 정말로 설계했다기보다는, 설계했다면 좋았을이들이라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설계자는 박정희를 위시한 영남 국가사회주의자가 아니었을까?)

  비단 몇몇 인물만의 활약상만이 돋보인 게 아니다. 20세기 초 평안도는 조선의 어느 지역보다도 교육열이 높았다. 있는 집 자식들은 앞다투어 일본으로 떠났고, 평양의 고등보통학교나 사립 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많았다. 여학생의 비율 역시 다른 곳보다 높았다. 경제적으로도 평양은 조선의 오사카’, ‘조선의 기타큐슈로 불릴 만큼 공업이 흥기했다. 총독부의 정책적 배려도 있었겠지만, 평양의 기업인들이 일본 기업과 당당히 경쟁해서 얻어낸 결과였다. (김두얼, 한국경제사의 재해석참고)

 

  20세기 초반 평안도가 이토록 눈부신 활약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그네들이 조선 왕조 오백년간 아웃사이더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오랜 세월 야만의 땅으로 멸시받아온 만큼, 옛 질서를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새 질서에 재빠르게 올라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정치적, 문화적 주변부라는 점만으로는 평안도의 번영을 설명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똑같이 소외받았던 함경도나 강원도, 제주도는 근대가 도래한 뒤에도 여전히 변방이었다. 서울을 위시한 근기(近畿)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었던 지역은, 오로지 평안도뿐이었다.

  왜 이런 차이가 벌어졌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근대 이전부터 평안도에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변방이 언제나 다음 시대의 중심으로 등극하는 건 아니다. 새 시대의 중심을 꿰차는 건 어디까지나 옛 시대의 슈퍼루키다.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쓰마와 조슈 역시 열도 서남부의 변방이었지만 그 위세는 가히 웅번(雄藩)이라 불릴 정도로 어마어마했고, 막부 역시 이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평안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차별받았던들 이들에겐 돈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다. 18세기 평안도의 인구는 전통의 강호 경상도에 이은 2위였다. (물론 평안도의 면적이 인구밀집지대인 전라도와 충청도를 합친 것보다도 넓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평양은 한성, 개성과 더불어 물류와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으로 이름을 날렸다. 요컨대, 평안도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소외되었을 뿐 근대 이전에도 충분히 잘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평안도의 번영은, 그러나 한 가지 사실 앞에서 의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바로 평안도가 논농사에 극히 불리한 환경만을 그러모은 지역이라는 사실이다. 저번 서평에서 다루었듯, 논농사는 가히 원예에 비견될 만큼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이 요구된다. 기술만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지리적, 기후적 조건 역시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동아시아의 논농사는 온난하고 비가 많이 오는 산간지대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의 강남, 일본의 간사이, 한국의 영남 모두 위의 세 조건을 만족하기에 논농사 최선진지대가 될 수 있었다.

  반면 평안도는 일부러 이렇게 만들기도 어렵겠다 싶을 정도로 논농사에 불리한 환경만 갖추고 있다. 우선 평안도는 춥다. 평안도 최남단의 평양만 해도 최한월 평균기온이 영하 6도까지 내려간다. 매스컴이 한겨울의 평양을 취재할 때면 으레 등장하는, 너도나도 푹 눌러쓴 러시아 털모자는 결코 패션이 아니다.

  다음으로 평안도 남부(평안남도)는 너른 평야와 구릉이 펼쳐져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기상이 웅대하다며 추켜세운 이 평야지대는, 그러나 논농사에는 극히 불리하다. 간단한 천방(川防)만 만들면 되는 산간지대에 비해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규모 수리시설을 축조·관리하지 않는 이상, 넘실대는 대동강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범람해서 농작물을 쓸어가지나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마지막으로 평안도 남부는 가뜩이나 비 안 오는 한반도에서도 손꼽히는 소우지다. 사실 이는 평야지대라는 지형적 조건의 결과이기도 하다. 산이 없으니 구름이 턱 부딪혀 비를 뿌리지 않고 그대로 통과해버리기 때문이다. 오죽 물이 귀했으면 봄철 토양의 수분 증발을 막기 위해 발로 꼭꼭 눌러주는 진압농법(鎭壓農法)이 등장했을까.

 

  이처럼 평안도, 그중에서도 평양이 위치한 남부는 한랭/평야/소우라는, 논농사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많은 문헌기록이 보여주듯 조선후기 평안도는 분명 발전했다. 여타 작물에 비해 압도적인 생산량을 자랑하는 벼가 쉬이 자랄 수 없는 환경임에도 인구가 증가하고 번영을 구가한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오수창의 조선후기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를 읽은 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조선후기 평안도의 번영은 근대 이후 이 지역 엘리트들의 약진이 빚어낸 일종의 착시가 아닐까하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였다. 저자의 박사논문을 보완한 이 책은 평안도라는 창을 통해 당대의 조선사회를 근사하게 조망한다. 서울중심주의와 지역차별, ()에 매우 의존적이었던 상업의 발전, 백성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한 당근으로서 무과의 빈번한 시행 등, 나온 지 18년이 되어가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지금도 조선시대사 연구의 핫한 주제들이다.

 

  그러나 정작 내 눈길이 머문 곳은 따로 있었다. 바로 정조가 함경도(關北) 백성들에게 윤음을 내리며 너희는 삼남(三南)과 같은 아름다운 벼와 솜이 나지 않고 또한 양서(兩西, 평안도와 황해도)와 같은 풍요(豊饒)한 재화(財貨)가 있지도 않다고 어르는 대목이었다. (정조실록, 정조 710월 정해) 삼남의 벼와 평안도의 재화를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정조가 함경도 백성을 달래기 위해 생각 없이 던진 말이 아니다. 영조~순조 대 남부지방의 곡식과 평안도의 재화를 대비시키는 언사는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일성록등에서 꾸준히 등장한다. 가령 영조 대 평안감사를 역임하고 영의정에 오른 김상철은 양남(경상도와 전라도)은 전적으로 곡식에, 서로(西路, 평안도)는 전적으로 목면과 돈에 의지한다고 이야기했다. 정조 대 부수찬이었던 한광근 또한 과거 삼남에는 곡식을 저축한 사람이, 양서에는 돈을 저축한 사람이 많았으나 지금은 아무도 없다며 사치로 인한 국가의 빈곤을 책망했다.

  ‘삼남양서의 이러한 대비는, 적어도 두 가지 추론을 가능케 한다. 첫째, 조선후기 평안도는 무엇보다도 부유한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둘째, 평안도의 부는 남부지방과 달리 논농사를 통해 일군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평안도의 번영을 이끌었던 것은 무엇인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20세기 초 유럽 역사학계를 풍미한 앙리 피렌의 주장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앙리 피렌, 벨기에 출신의 역사가로 유럽중세사 연구에서 괄목할 업적을 남긴 학계의 거인이다. 그가 제시한 이른바 피렌 테제는 중세 유럽을 연구한다면 좋든 싫든 한 번은 거쳐야 할 관문으로, 사실상 폐기된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재밌는 통찰을 안겨준다.

  ‘피렌 테제의 핵심은, 유럽을 농업에나 종사하는 프롤레타리아 대륙으로 전락시킨 건 게르만이 아닌 이슬람이라는 주장이다. 게르만 용병들이 로마를 접수한 뒤에도,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어진 광대한 무역 네트워크와 도시문명은 여전히 번성했다. 그러나 예언자 마호메트의 등장 이후 이슬람이 급속도로 세를 불려나가 8세기에 전 지중해를 장악했고, 바다를 잃어버린 유럽은 급속도로 가난해졌다. 물론 도시문명에서 농업문명으로 퇴보한 이 시기의 유럽에도 도시 비스무리한 인구밀집지대인 키비타스(civitas)와 부르구스(burgus)가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이는 도시라기보다는 각각 종교중심지와 정치·군사중심지에 가까웠다.

  가난한 암흑의 대륙 유럽에 한 줄기 서광이 비친 건 10세기에 이르러서다. 대륙 동남부의 베네치아, 그리고 서북부의 플랑드르에서 상업이 흥기하고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도시를 견인한 게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자극이라는 사실이다. 베네치아는 당대 세계 최고의 대도시인 콘스탄티노플과, 플랑드르는 온 유럽의 바다를 휘젓고 다니던 노르만과 거래를 틈으로써 부를 거머쥐었다. 실제로 이들 지역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뻘밭으로, 결코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었다. 피렌의 말마따나, “상업부활은 외부자극의 결과였다.” (앙리 피렌, 중세유럽의 도시, p.75.)

 

  조선후기 평안도의 번영 역시 외부와의 교역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실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평안도는 상업조차 별 볼 일 없는,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낙후한 동네였다. 대표적으로 이 시기 상업발달의 지표라 할 수 있는 장시의 수와 규모에서 평안도는 삼남에 크게 뒤졌다. 변경의 군사지대라는 성격 역시 사람과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17세기 초 조선과 청이 벌인 두 차례의 전쟁은 평안도를 아예 초토화시켜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1683년 청의 대만 정복을 끝으로 동아시아에서 100년 가까이 이어진 전쟁의 시대가 일단락되며, 평안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긴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며 나라와 나라 사이에 총알과 대포가 아니라 사람과 물자가 오고가게 된 것이다. 조선은 세계 2위의 은 생산국인 일본과 세계 최대의 은 수입국인 청을 잇는 물류의 허브로 부상했다. 조선에서 중계무역을 통한 이익을 가장 많이 누리는 지역은, 단연 평안도였다.

  마치 콘스탄티노플과의 교역을 통해 급성장한 뻘밭베네치아처럼, 평안도 역시 당대 최대의 도시인 북경을 등에 업고 조선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거듭났다. 요컨대, 평안도에서 상업의 발전은 농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약간의 비약을 감수해보자면, 오히려 상업이 농업을 견인했다고 볼 여지도 있다. 오랜 번영이 끝나갈 무렵인 18세기 말에 이르면 평안도의 토지가 비옥하고 농민이 근면하다는, 이전까진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수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무렵엔 평양의 선상(船商)들이 바다가 험하기로 악명 높은 황해도의 장산곶을 가뿐히 넘어 일상적으로 삼남을 왕래하는 등, 국내교역 역시 활성화되었다. (승정원일기, 영조 47514일 갑인)

  물론 평안도의 사례가 피렌의 가설에 완전히 들어맞는 건 아니다. 가령 평안도의 상업발전에서 유달리 부각되는 ()’의 존재는, 상업 고유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피렌이 보기엔 영 마뜩찮을 것이다. 그럼에도 농업 없는 상업이 가능하며 그렇게 성장한 지역의 분위기는 확실히 다르다는 피렌의 주장은, 조선후기 평안도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유용한 통찰을 제공한다.

 

  오늘날 특정 지역을 희화화하거나 비하하는 지역드립, 이른바 문명인이라면 입에 담지 말아야 할 금기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지역드립에 대한 강력한 제재는, 역으로 그것이 얼마나 일상화되어있고 또 나름의 설득력을 갖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여전히 술자리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곳 사람들은 어떠어떠하다고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정교한 통계나 방대한 문헌자료로 증명할 수는 없을지언정, 특정 지역의 성격 비스무리한 것을 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역드립을 완전히 틀어막기보다는, 한 번 제대로 밀고 나가보는 것은 어떨까? 가령 콜린 우다드는 분열하는 제국(원제는 American Nations)에서 미국이 서로 다른 11개의 민족(nation)’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주장하며 그 기원과 성격을 규명한 바 있다. 엄밀히 따지고 들어가면 문제될 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나름의 설명력과 재미를 갖고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역사도 몇 개의 작은 민족들이 벌이는 각축전으로 이해해볼 여지는 없을까? 앞서 살펴보았듯 경상도와 평안도는 지형과 기후가 달랐고, 이로 인해 주요 산업 역시 달라졌으며, 끝내는 사람들의 기질마저 달라졌다. 20세기 한반도를 풍미한 서북 리버럴영남 국가사회주의자의 뿌리는, 어쩌면 조선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다른 지역은 어떨까? 가령 함경도나 전라도, 혹은 남한강 유역의 사람들 말이다. 이들 지역의 역사를 엮어 Korean Nations라는 풍요로운 오류를 빚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일단 재밌는 망상으로 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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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도의 권력중심이동 태학총서 36
김성우 지음 / 태학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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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순우리말에 대한 집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한자와 그다지 친하지 않다. 알파벳은 술술 읽어도 한자 앞에서는 숨이 턱 막혀버리는 사람은 별나다기보다는 차라리 평범하다. 하지만 자기 이름 하나 한자로 못 쓰는 한자 까막눈일지라도 자신 있게 끼적일 수 있는 한자가 몇 있으니, ‘밭 전()’ 역시 그 중 하나다. 역시 먹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는 걸까.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바로 한국인의 주식인 쌀()은 밭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을 대지 않는 작물, 가령 밀이나 보리, 메밀 등을 재배하는 경지가 밭이다. 그럼 쌀은 어디서 나느냐, 바로 논이다. 한자로는 ()’이라 한다. ‘()’ 위에 ()’을 올린 모양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다. 하나, 오늘날과 달리 과거, 최소한 한자가 등장했을 무렵의 동아시아에선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일반적이었다. , 논농사의 성패는 전적으로 물에 달렸다.

  먼 옛날에도 당연히 지금처럼 쌀로 지은 밥을 먹었으려니 했을 현대 한국인, 특히 도시생활자에게는 퍽 놀라운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논농사는 결코 쉽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괜히 프랑스 역사학자 브로델이 동아시아의 논농사를 정원 가꾸기에 비유하며 그 세심함과 정교함에 경탄한 게 아니다. 특히 여타 지역보다 겨울이 춥고 강수량이 고르지 못한 한반도에서 무사히 쌀을 길러내기란, 원예를 넘어 분재(盆栽)에 가까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학자 김성우의 의문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겨울이 길기에 파종 시기가 늦을 수밖에 없고, 비가 많이 오지 않아 제때 물을 대기 어려운 한반도에서 어떻게 쌀이 주식이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논농사가 보편으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에서 한반도의 풍경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의 책 조선시대 경상도의 권력중심이동은 조선전기의 최선진지대인 경상도를 중심으로 이 의문을 풀어나간다. 단순한 지역사라기보다 경상도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 조선시대사에 가까운 책으로, 문장 역시 명료하고 깔끔하다.

 

  앞서 이야기했듯, 한반도에 논농사가 뿌리내린 건 비교적 최근이다. 구체적으로 한반도에서 마른 땅(旱田)에서 띄엄띄엄(休耕) 짓던 농사를 물을 댄 땅(水田)에서 연이어(常耕) 짓게 된 건 13세기 후반이고, 지역적으로는 경상도가 시작이었다. 고려 말이나 되어서야, 그것도 경상도라는 좁은 공간에서만 겨우겨우 우리가 아는 형태의 논농사가 막 걸음마를 뗀 것이다.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은 이전의 그 어느 왕조보다 농업을 중시했고, 쌀의 놀라운 생산력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각종 농서 편찬, 저수지 조성 등 태종~성종 대까지 활발하게 실시된 각종 권농정책은 왕조가 논농사의 확산과 정착에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물론 노력을 쏟는다고 곧바로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 가령 세종 대 편찬된 농사직설(1429)이 전면에 내세운 조도(早稻)의 수경직파법(水耕直播法)이 이루어졌던 곳은 경상도, 그중에서도 일부 지역뿐이었다. 조선 농업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추켜세워졌던 농사직설, 사실 이렇게 되어야한다는 당위적 성격이 강한 이념형 농서에 가까웠던 셈이다.

 

  이처럼 논농사를 정착시키려는 왕조의 바람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머니 속 송곳처럼 홀로 치고 올라가는 지역이 있었으니, 바로 경상도다. 역대 국왕들이 유독 경상도를 아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미 기본기가 잘 갖춰진데다 경상도 출신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첨단 농법을 제 고향에 야무지게 적용한 결과라 하겠다. 실제 세종실록지리지(1432)에 기록된 전국의 저수지 43곳 중 무려 46.5%20곳의 저수지가 경상도에 설치되었다. 15세기 중반에 이르면 경상도의 저수지는 720, 몽리면적은 2300여 결로 급증했는데, 수리정책을 처음으로 시도한 태종 대로부터 각각 3500%, 1238% 증가한 수치다.

  당대의 최선진지역인 경상도에서도 가장 앞서나갔던 곳은 경상도 서북부, 당시 표현으로는 우상도(右上道)에 위치한 선산(善山, 오늘날의 구미)이었다. 영남대로와 낙동강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자 완만한 평야와 구릉이 펼쳐진 선산은 신생왕조의 권농정책을 실험할 최적의 장소였다. 지리적 이점과 국가의 지원이 맞물리며, 고려 말까지만 해도 한적한 속현(屬縣)이었던 선산은 상주나 성주와 같은 전통의 강호들과 어깨를 겨루는 슈퍼루키로 거듭났다. 길재, 김종직, 김굉필 같은 조선 성리학의 기라성은 물론이요, 정초, 박서생, 하위지처럼 국가의 권농정책을 입안한 테크노크라트 역시 선산 출신이었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15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선산의 선진적인 농법은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경상도 서남부, 그러니까 우하도(右下道)에도 수경직파법이 도입된 것이다. 낙동강 하류의 드넓은 평야가 밭에서 논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이제는 우하도가 경상도, 나아가 전 조선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임진전쟁 때 누구보다 맹렬하게 일본에 맞서 싸움으로써 권력을 틀어쥐었으나, 끝내 인조반정으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북인의 거점이 바로 이곳 우하도였다. 남명 조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이들의 거침없고 호방한 기질은, 어디까지나 곳간에 그득히 쌓인 쌀포대 덕에 가능한 것이었다.

  15~16세기의 선산과 16~17세기의 진주에 이어, 17세기 이후 경상도의 새로운 중심으로 등극한 곳은 안동이었다. 경상도 동북부인 좌상도(左上道)에 위치한 안동은, 그러나 이전까지의 중심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선산과 진주는 오늘날 사람들이 으레 떠올리곤 하는 농사짓기 좋은 땅의 전형으로, 큰 강을 끼고 너른 평야와 구릉이 펼쳐져있다. 반면 안동은 어떻게 이런 곳에서 먹고사나 싶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저 옛날 퇴계 선생이 고고히 리()와 기()의 오묘한 원리를 궁리하시기에나 알맞을 법한 이 궁벽진 동네가, 어떻게 경상도의 중심을 꿰찰 수 있었을까?

  원인은 15세기 후반 처음 시작되어 점차 퍼져나간 이앙법(移秧法, 모내기)에 있다. 일단 봄철 가뭄을 이겨내고 물만 잘 대면 잡초제거에 들어가는 노동력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는 건 이앙법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문제는 안정적으로 농업용수를 공급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통념과 달리, 하천 유역은 의외로 물을 대기 까다로웠다. 대규모 수리시설을 축조하고 꾸준히 관리하지 않는다면, 넘실대는 강물은 농사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상습적인 범람으로 애써 기른 작물을 휩쓸어갈 뿐이었다.

  모내기에 도전해보고 싶지만 대규모 제방이나 저수지를 세울 여력은 없었던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 게 바로 조선 땅에 널리고 널린 산골짜기였다. 계곡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물만 잘 받아도 모내기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곡물을 막는 작은 둑인 천방(川防)을 세우는데 들어가는 노동력은 저수지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마침 연산군-중종-명종으로 이어지는 암군의 시대에 접어들며 수리시설을 축조·관리하려는 국가의 의지와 역량이 쇠퇴한데다가, 인구는 인구대로 늘어났기에 사람들은 평야를 떠나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산투성이 안동이 경상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17세기 중반 이후 안동이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며, 경상도의 풍경 또한 크게 달라졌다. 교통의 요지였던 선산과 달리 첩첩산중인 안동은 외부와 문물을 주고받기가 훨씬 어려웠다. 자연히 안동은 퇴계의 학설을 종교 수준으로 추종하는 폐쇄적인 사회로 변해갔고, 이웃 지역들을 깔보기 시작했다. 물류의 중심인 한성에 자리한 만큼 나름의 포용력과 유연성을 보여준 근기(近畿)의 노론과 달리, 안동의 남인은 가뜩이나 조선의 섬이 돼버린 경상도 안에서도 섬처럼 고립되었다.

 

  산으로, 산으로 농경지를 확대하다 끝내는 외부와 단절된 폐쇄적인 공동체로 전락한 안동은, 당시 조선에서 결코 특수한 사례가 아니었다. 오히려 저자는 안동이야말로 중국이나 일본과 구분되는, ‘한국식 지역개발의 전형이라고 이야기한다. 중국과 일본 역시 평야에서 논농사를 시작해 산으로 올라간 것까지는 비슷하지만, 끝내는 양쯔 델타와 간토로 내려와 뻘밭을 옥토로 가꾸었다. 반면 요즘말로 ‘K-지역개발이라 부름직한 조선의 개간은, 망국 직전까지 계속해서 위로만 올라갈 뿐이었다. 황해도와 전라도의 드넓은 평야가 비옥한 곡창지대로 거듭난 건 일제의 자본과 기술이 투입된 식민지시기에 이르러서다. (이와 관련해선 윤춘호의 봉인된 역사를 참고하라)

  산 속에 고립된 조선의 촌락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외부로부터 물자를 공급받기 극도로 어려운 환경인만큼, 자원은 한정된 것이기에 공동체 내의 누군가가 부를 일구면 이는 필시 다른 누군가의 몫을 뺏은 결과라는 생각이 자리 잡는다. 따라서 부자라 해도 주기적으로 큰 잔치를 열거나해서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당시 조선의 촌락을 움직인 것은 법이나 이기심이 아니라 체면과 위신, 도덕이었다. 19세기 초 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한목소리로 이야기하듯, 지구상에서 조선만큼 도덕경제가 잘 돌아가는 곳도 없었다. 호미 헐버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선은 봉건제적 공산주의사회나 다름없었다.

  양반과 상민이 도덕과 관습으로 얽혀 운명공동체를 이룬 19세기 조선의 촌락은 동시대 잉글랜드의 자본가와 노동자가 빚어낸 살풍경보다는 확실히 따뜻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강고한 도덕경제야말로 조선이 ‘19세기의 위기를 맞이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냉정히 지적한다. 아무리 가난하고, 또 부유할지언정 결국 도덕에 의해 평균으로 수렴하므로 빈자든 부자든 열심히 일할 인센티브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기력은 대부분의 촌락이 산간에 자리할 경우 더욱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산림을 공들여 가꾸지 않은 만큼 비가 조금만 내려도 온 마을이 떠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19세기의 조선이 그러했다.

 

  외부와의 교류가 극히 제한된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촌락들의 집합체라는 저자의 조선상(朝鮮像), 그 참신함만큼이나 아쉬움과 궁금증 역시 자아낸다. 우선 저자가 역사의 주요 행위자로 설정한 국가권력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계속해서 눈에 걸린다. 저자에 따르면 이른바 ‘K-지역개발이 경상도를 넘어 전국으로 확대되고, 끝내는 19세기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 건 일차적으로 국가권력의 부재 때문이었다. 16세기에 암군의 시대가 계속되며 국가가 더 이상 대규모 저수지를 축조·관리할 수 없었기에 농민들이 쉽게 물을 댈 수 있는 산골짜기로 향했으며, 19세기의 세도정치 역시 농민들을 한계지대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부재로 인해 결국 나라가 멸망에 이르렀을 정도로, 국가권력의 존재감이 컸던 것일까? 그렇게 전능한 국가였다면 지방의 촌락들이 중앙으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이뤄가는 걸 무려 60년 넘게 지켜보고만 있었을까? 애초에 저자는 조선중기 사족들이 혼인과 세습을 통해 강고한 카르텔을 구축하며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는 과정을 연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 19세기의 위기를 규명하는 데에도 단순히 국가권력, 구체적으로는 국왕의 역할 부재만을 내세우기보다는 사족 역시 중요한 변수로 고려해보면 좋을 듯싶다.

  저자가 제시한 ‘19세기 조선상은 그간 이 시기를 이해하는 유력한 관점이었던 소용돌이의 사회와 충돌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소용돌이의 사회20세기 중반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한 문정관 그레고리 헨더슨이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한국인은 정당이나 결사와 같은 중간단체를 거치지 않고 권력의 중심부를 향해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듯 곧바로 질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래저래 문제가 많지만 오늘날에도 조선후기 이래 형성된 한국인의 특질을 설명하기 위해 심심찮게 동원되곤 하는데, 저자의 주장은 이와는 영 딴판인 것이다.

  생각해보라,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자급자족하는 촌락의 농민들에게 중심부의 소식이 전해질 턱이 있겠는가? 만약 19세기 조선사회가 정말 저자의 생각과 같았다면 소용돌이는커녕 산들바람조차 살랑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용돌이의 사회가 현대 한국을 이해하는 데 꽤 유용하다고 여기고, 저자의 주장은 그것대로 설득력이 있어 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양자를 잘 버무려 또 하나의 테제를 만들어야만 할까?

  그보다는 조선후기부터 21세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줄곧 이러했다고 설명하려는 욕구를 버리는 게 나을 듯싶다. 개인적으론 소용돌이의 사회와 같은 그럴싸한 거대서사를 퍽 좋아한다만, 장기지속하는 한국인특질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자칫 매우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긴 시간에 걸쳐 한 사회의 성격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규명하고픈 욕구는 어쩔 수 없다. 따라서 약간 방향을 틀어, 다음 서평에서는 경상도와 더불어 조선에서 기호(畿湖)에 비벼볼 수 있는 둘 뿐인 지역이었으나, 지리적 위치부터 시작해 지형과 기후, 심지어는 사람들의 기질까지 경상도와는 정 반대였던 지역을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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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품격 - 과학의 의미를 묻는 시민들에게
강양구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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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하나. 오늘날 수많은 분과학문 중 유독 유사논쟁에 휘말리는 분야는 무엇일까? 바로 역사학과 (의학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과학이다. 한데 이 둘이 자신의 유사쌍둥이들에게 시달리는 이유는 좀 다르다. 역사학이 특유의 만만함때문에 이른바 재야 사학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면, 과학은 외려 그 어려움으로 인해 극렬한 반감의 대상이 된다.

  평범한 시민에게 과학은 막연한 동경과, 그만큼의 공포를 함께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일상 언어와는 몇 억 광년정도 떨어진 것만 같은 난해한 수식, 그걸 또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너디한 전문가, 그리고 이들이 내놓은 결과물의 가공할 파괴력까지! 시민 입장에서는 도저히 과학과 맞대결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여기에 근대문명 전반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반감까지 가미될 경우, 선량한 시민은 차라리 유사과학의 너른 품에 안기기를 선택하고 만다.

  하지만 아무리 무섭고 싫어도 과학에 등을 돌리면 안 된다. 시민과 과학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과학을 악용해 제 잇속을 채우려는 이들이 활개칠 공간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의 시민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덕목은, 과학에 대한 숭배나 혐오, 혹은 무관심이 아니다. 과학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자 진지하게 고민하고 또 노력하는 자세다. 과학 전문 기자이자 지식 큐레이터인 강양구가 꾸준히 시민과 과학의 만남을 주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강양구의 책 과학의 품격역시 과학 전문가가 아닌,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과학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가 담겼다. 서점에 깔리기 훨씬 전부터 저자가 외국의 이름난 언론에 실린 과학 기술 에세이와 비교해도 정보의 넓이, 고민의 깊이, 해석의 참신함 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p.16.) 장담한 책인데, 읽다보면 괜히 표지에 얼굴을 내건 게 아니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한 사회의 지적 역량은 모어로 쓰인 교양서의 수준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교양의 품격’, 나아가 저자의 품격을 보여준 이 책이 매우 반갑다.

 

  미리 경고부터 해두자. 만일 놀랍고도 경이로운 과학의 원리와 자연의 신비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책을 읽고 실망할 수도 있다. 강양구의 관심은 과학이 이렇게나 대단하다고, 혹은 자연이 이렇게나 아름답다고 열을 올리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이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체계라는 근대 이래의 오래된 믿음에 도전하며,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을 흩뜨려놓는다. 강양구가 고민하는 건 과학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회 속의 과학이다.

  그렇게 강양구가 그려낸 사회 속 과학의 풍경은, 안타깝게도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연결 사회(hyper-connected society)’가 도래했음에도 사람들은 집단 지성을 발휘하여 슬기로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 집단 바보가 되어갈 뿐이다. (집단 지성인가, ‘집단 바보인가)

  기술의 발전이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자유케 하리라는 전망 역시 빗나갔다. 세탁기나 청소기처럼 가사노동을 수월케 해주는 기계가 도입됨에 따라 이전까지 남편이나 아들의 몫이었던 힘든 일역시 여성에게 떠넘겨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계의 도움은 여성으로 하여금 가사노동을 더욱 자주, 꼼꼼하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았다. 끝없는 가사노동에 시달리다 끝내 손목이 망가져 병원을 찾은 김지영이 의사에게 집안일은 기계가 다 해주는데 요즘 여자들은 힘들게 뭐냐는 모욕을 받은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은, 그래서 더 아프다. (지영 씨, 세탁기 때문에 행복하세요?)

 그래, 과학기술의 진보가 꼭 사회의 진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건 인정한다.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이기도 하고. 하지만 강양구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는 과학탐구의 대상이자 사회와는 별개라고 여겨지던 자연의 존재마저 의심한다.

  책 맨 앞에 실린 추천의 글에서, 물리학자 김상욱은 자연에 인간이 만든 어떤 의미나 품격은 없다고 일갈한다.(p.7.) 하지만 글쎄, 지금 당장 인간이 멸종한다면 고양이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동물들이(심지어 쥐나 바퀴벌레까지도!) 도시에서 사라지고(인간 없는 도시의 주인), 강제로 국립공원을 지정해 원주민을 몰아내고 반달곰을 복원하는 상황에서(설악산은 자연이 아니다), 자연을 인간과는 완전히 무관한 그 무엇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자연을 스스로() 그러한() 것으로 여김으로써 결과적으로 파국을 막기 위한 아무런 인위적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숙명론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강양구가 진정 경계하는 일이 아닐까?

 

  이처럼 과학 기술은 그 자체로 문화.”(p.14.) 뿐만 아니라 지구에서 인류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커져버린 결과, 사회와 자연은 서로를 분간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얽혀 들어갔다. 이제 인간과는 무관한 순수한자연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이 과학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나아가 과학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강양구 본인이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행간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해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과학 기술에 대한 꾸준한 감시와 비판, 그리고 윤리에 대한 고민이다. 저자가 책 1부를 통째로 할애한, 이른바 황우석 사태를 둘러싼 치열한 투쟁이 대표적이다. 강양구가 들려주는 사건의 전모는 이를 모티브 삼아 만든 임순례 감독의 영화 제보자처럼 극적이진 않다. 하지만 합리적인 의심을 시작으로 기자와 과학자, 평범한 시민들이 힘을 합쳐 끝내 진실을 밝혀내기까지의 과정은 한 편의 두툼한 사회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무려 20년간 과학 기술의 민주화를 위해 성실하게 논리를 개발하고 제도를 제안해온 시민 과학 센터 역시 좋은 사례다.(시민 과학 센터, 너의 이름을 기억할게!)

 

  둘째, 과학을 품은 사회 자체의 개혁이다.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들, 사회가 여전히 정체해있다면 세상은 좋아지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세탁기와 청소기라는 새로운 기술이 가부장제라는 기존의 억압을 더욱 강화시킨 사례 역시 얼마든 찾을 수 있다.

  심지어 과학은 이제 사람들이 당연히 과학의 문제라 여기는 것들에서조차 맥을 못 추고 있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기만 하는 기후변화가 대표적으로, 과학은 이 희대의 난제 앞에서 자신의 전매특허인 확실성을 포기해야만 했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이 심화됨에 따라, 안 그래도 복잡한 기후 과학의 불확실성이 더욱 증폭됐기 때문이다.(기후 변화, 과학이 정치를 만날 때)

  인간으로 인해 자연은 점점 더 변덕스러워지고 끝내는 병들고 말았지만, 강양구는 여기서도 희망을 본다. 어쨌든 인간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니만큼, 자연을 충분히 덜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25000만 년인 고생대 페름기에 일어난 다섯 번째 대멸종 전문가 더그 어윈(Doug Erwin) 역시 아직 여섯 번째 대멸종이 시작하지 않았기에 지금 우리의 고민과 선택, 행동이 의미를 갖는다고 이야기한다.(여섯 번째 대멸종)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과학의 품격이라기보다는, 과학을 품은 사회의 품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품격을 갖춘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 강양구는 이에 대해선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 않는다. 햇볕과 바람, 심지어는 유기물을 태워 에너지를 얻는 바이오매스까지 포함해 다양한 에너지원이 섞인 모자이크 에너지모델을 상상하자거나(에너지, 슈퍼 히어로는 없다) 환경이 유전자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보다 따뜻하고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자는 등(행복했던 마을의 몰락), 단편적인 대책만을 제시할 뿐이다.

  그렇다고 강양구가 사회의 품격에 대한 아무런 비전도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글을 꾸준히 찾아 읽는 독자로서 미루어보건대, 아마도 강양구는 생태주의를 (유일하지는 않을지언정) 유력한 대안 중 하나로 여기는 듯하다. 실제로 그는 녹색평론편집자문위원이며, 동 잡지의 발행인인 김종철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기도 하다.

  누구보다 명민하고 까칠한 과학전문 기자인 강양구가 한국에서 가장 강경하고 전면적인 ()근대문명론을 설파하는 녹색평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롭게 다가오는 동시에, 여러 생각을 안기기도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강양구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근대문명 자체에 정말로 어떤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과연 지금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지 한 번쯤 회의가 드는 것이다.

  지금껏 내가 읽은 강양구의 글들은 전부 짤막한 칼럼이거나, 그 모음집이었다. 안 그래도 감질나던 차에, 그가 과학 전문 기자가 본 생태주의를 주제로 한 권의 완결된 책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사회의 품격이라는 제목이 붙어도 좋을 그 책에서, 지금껏 세상을 향해 던진 번뜩이는 질문들을 갈무리해 멋진 대답을 마련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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