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빌을 떠난 버스는 1시간 10분쯤 뒤에 에트르타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해안쪽으로 10여분 걸어들어가니 이윽고 바다와 함께 익숙한 해안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한바탕 비가 내린 뒤여서인지 바람도 불고 파도도 거센 편이었다. 유명한 코끼리바위를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고 일행은 이동로를 따라서 반대편 절벽으로 올라갔다. 영화 <여자의 일생>에서 본 풍광이 그대로 재연되었다.

에트르타는 모네와 부댕, 쿠르베 등 화가들의 그림으로 유명하고 많은 작가들에게도 영감을 준 곳이다. 그럼에도 문학과 미술에서 한명씩 꼽자면 모파상과 모네를 들겠다(안 그래도 해변 산책로에는 모네가 에트르타의 절벽을 그린 장소가 표시돼 있었다). 모파상은 에트르타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을 뿐 아니라 노르망디 지역을 배경으로 한 첫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1883)에서 에트르타의 풍광을 섬세하게 잘 묘사했다. 앞서 에트르타로 이동하는 중에 모파상의 작품세계와 <여자의 일생>에 대해서 짧은 강의를 진행한 이유였다(에트르타를 배경으로 한 모리스 르블랑의 <기암성>이 강력한 경쟁자다. 에트르타에는 르블랑의 집도 있는데 닫혀 있었다).

영국문학기행 때 하워스의 폭풍의 언덕에서 맞았던 바람을 연상시키는 에트르타의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엉뚱하게도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발레리의 시구를 떠올렸다. 엉뚱하게라고 적은 건 남불 출신의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에서 바다는 대서양이 아니라 지중해일 것이기 때문이다(남프랑스 문학기행은 별도로 꾸려야 한다). 그렇지만 에트르타의 바다도, 살갗에 와닿는 공기의 타격도 발레리의 바다 못지않게 삶의 의지를 환기시켜주었다.

에트르타의 해안과 절벽에서 시간을 보낸 뒤 일행을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버스에 올라 르아브로로 항했다. 40분쯤 소요되는 거리. 모처럼 현지식에서 벗어나 인도식당에서 푸짐하게 차려진 인도음식을 먹었다.

어제 점심 먹은 얘기를 적으려고 하니 벌써 조식을 먹을 시간이다. 르아브르에서의 일정은 따로 적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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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문학기행도 후반기로 접어들었다(시차에 적응하면 어느새 그렇다). 그제 옹플뢰르를 떠나 오늘까지 이틀 숙박한 곳은 트루빌이다. 역시나 노르망디의 해안도시. 해안을 따라서 카부르-도빌-트루빌-옹플뢰르-르아브르-에트르타로 올라가게 되는데, 그제 루앙에서 카부르로 이동해서 옹플뢰로 올라갔다가 다시 숙박을 위해 조금 내려온 게 된다.

파리를 기준으로 하면 카부르와 옹플뢰르까지는 3시간 남짓, 에르트타는 3시간 20분쯤 소요되는 것으로 나온다. 우리로 치면 서울에서 강원도 해안도시(강릉, 양양, 속초 등)로 가는 거리에 견줄 수 있겠다.

어제의 동선은 숙소 트루빌에서 해안절벽의 절경으로 유명한 에트르타에 들르고 르아브르로 내려와 점심을 먹고 르아브르미술관을 관람한 뒤에 다시 트루빌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번 여행의 날씨는 매일 비가 조금 내리고 갠 뒤 햇빛이 나는 식이다. 하늘도 절반은 파랗고 절반은 먹구름이 끼어 있어서 자기들도 헷갈릴 거라는 농담을 했다.

어제 에트르타로 막 출발하는 참에 가이드가 호텔 바로 인근에 세워져 있는 플로베르 동상을 소개해주었다. 루앙에 있는 것과 비슷한 동상인데 트루빌에 세워져 있는 건 플로베르의 첫사랑이자 인생의 뮤즈였던 엘리자 슐레쟁제(슐레징거)와의 인연이 처음 시작된 곳이어서다(동상까지 세워져 있을 줄은 몰랐다). 때는 1836년, 플로베르의 나이 열다섯 살, 슐레쟁제는 스물여섯 살의 유부녀이자 한 아이의 엄마였다.

플로베르는 이때의 경험을 2년 뒤 <미치광이의 수기>(1838)로 적는데(작가 사후에 출간된다), 이는 <감정교육>(1869)의 모태가 된다(<감정교육>이 30년에 걸쳐 쓰인 작품이라고 말하는 근거다). 아무튼 플로베르가 루앙에서 트루빌까지 우리를 동행해온 느낌이 들어 반가웠다.

엊저녁에 찍은 동상 사진을 넣기 위해 여행기는 여기서 한차례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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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보다 두시간 더 잠을 잔 탓에 여행기를 적을 시간이 부족해서 옹플뢰르에서 찾았던 부댕박물관과 사티박물관 얘기는 생략하고 보들레르에 대해서만 적는다. 사실 보들레르의 옹플뢰르에 대해서 이번 문학기행을 준비하던 중에야 알게 되었다.

사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의 작품에는 나오지 않는 지명이니까. <악의 꽃>(1857)을 출간하고 보들레르는 1859년 계부가 옹플뢰르에 구입한 저택에서 체류했다(계부는 1857년 사망).

보들레르가 ‘장난감 집‘이라고 부르며 사랑했던 이 저택은 현재 철거되고 남아있지 않다. 건물이 있던 자리에 그 역사만 기록돼 있다. 보존되었다면 아마도 번듯한 보들레르박물관으로 꾸며져도 좋았겠다. 안내판만으로는 부족했는데 저택이 있던 자리에 ‘보들레르거리‘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는데 실제로 찾아가보니 ‘보들레르 골목‘이라고 번역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옹플뢰르 시절에 보들레르는 <악의 꽃> 2판(1861)에 수록될 대표작 ‘알바트로스‘를 완성하는데, 이 시에 옹플뢰르의 기여분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유작으로 나올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에 실린 ‘항구‘는 옹플뢰르를 묘사하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그밖에 여행을 모티브로 한 몇편의 시들이 그 영감을 옹플뢰르에 빚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보들레르의 옹플뢰르를 상기시켜주는 장소나 기념물은 제한적이었지만(옹플뢰르의 우울?) 문학기행의 의미는 찾을 수 있었던 방문이었다... 조식을 먹을 시간이어서 급하게 마무리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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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에서의 하룻밤을 뒤로 하고 일행은 카부르로 향했다. 버스로 한시간반쯤 소요되는 거리. 휴양도시로 조성된 카부르는 비수기라 한산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찾은 이유는 순전히 프루스트 때문. 프루스트가 즐겨찾았던 숙소 그랜드호텔과 해변의 프루스트 산책로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카부르는 발베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카부르에 도착하여 해변 방향으로 조금 걸어보니 사진으로 익숙한(영화 <되찾은 시간>에도 등장한다) 건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목적지 그랜드호텔. 호텔앞 정원에 있어야 할 프루스트 동상은 자리에 없었지만(벨에포크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호텔 내부에는 프루스트와 관련한 사진과 그림이 잔뜩 진열돼 있었다. 프루스트 호텔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수도 있을 정도로. 호텔로비를 통과하면 바로 해변이 펼쳐졌고 역시나 사진으로 보았던 산책로가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레 영화속 스크린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유 인 더 픽처?˝(영화 <바톤 핑크>의 대사)

작가의 장소, 작품의 공간을 찾는 일은 프루스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서의 시간을 되찾는 경험이다. 카부르는 프루스트 독자들에게 자연스레 그 시간을 되돌려주었다. 프루스트 독자들답게 우리는 호텔로비에서 마들렌 과자를 곁들여 차와 커피를 마셨다. (비싸고 맛없는 커피였다는 후문이 있었지만) 프루스트의 마법에 그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카부르 방문을 마친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라 인상파의 항구로 불리는 예향 옹플뢰르로 향했다(가이드는 한국의 예향으로 통영에 견주었다) 역시나 노르망디의 해안도시인 옹플뢰르는 미술에선 모네의 스승, 외젠 부댕의 도시이고, 음악에선 에릭 사티의 도시다. 그리고 문학독자들에겐 보들레르의 도시가 될 수 있다. 카부르에서는 40분정도 소요되는 거리. 옹플뢰르 초입의 식당에서 프랑스식 정식으로 맛있고 배부른 점심식사를 하고(생굴과 가오리, 치즈와 디저트로 이어졌다) 그림같은 항구와 명소를 둘러보았다. 이어진 동선은 외젠 부댕박물관과 보들레르거리, 그리고 에릭 사티박물관으로 이어졌다. 보들레르의 옹플뢰르에 대해선 따로 적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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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문학기행 3일차 행선지는 루앙이었다.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100킬로쯤 떨어진 센강 하구의 도시로 문학에서는 플로베르의 도시, 미술에서는 모네의 도시(대성당 연작),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잔다르크의 도시(1431년 잔다르크가화형을 당한 곳)다. 관광객이 루앙을 찾는다면 대개는 이 세가지 의미 때문이리라.

파리에서 버스로 한시간반쯤 이동하여 루앙에 도착했다. 숙소가 있는 구도심 안쪽으로는 대형버스가 진입할 수 없어서 인근에서 하차했고 도보로 투어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둘러본 곳은 루앙의 랜드마크인 대성당이다. 후기고딕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교회건축물(이런 대성당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중세 루앙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노르망디의 중심지이자 파리에 뒤이어 프랑스 제2의 도시가 루앙이었다).

앞서도 적었지만 루앙 대성당은 인상파의 대가 클로드 모네가 30여점의 연작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이 가운데 20여점이 여러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듯싶은데, 오후에 들른 루앙미술관에도 한 점이 있었다). 마침 주일 오전이어서 성당에서는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성당 내부를 조용히 둘러보면서 아름다운 성가대합창과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덤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이어서 일행은 플로베르박물관을 찾았다. 플로베르의 생가이기도 한 이 곳은 현재 플로베르박물관이면서 의학사박물관을 겸하고 있다. 플로베르의 아버지와 형이 루앙의 손꼽히는 외과의사였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데 당시의 의약재부터 여러 진찰과 수술기구, 인체모형, 심지어 미이라까지도 전시하고 있었다. 플로베르의 방에서는 줄리언 반스의 소설로 유명해진 ‘플로베르의 앵무새‘도 볼 수 있었다. 플로베르문학에서 의학과 의학적 관점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 새삼 음미해보게 되었다.

플로베르의 방 진열장에는 <마담 보바리>(1857) 초판도 놓여 있었지만 아무래도 생가박물관적 성격을 띠고 있어서 플로베르의 전모를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독신의 플로베르가 어머니와 조카와 함께 살면서 대표작들을 집필한 인근 크루아세의 저택은 현재 본체는 보존되지 않고 별관만 남아있다. 전날 방문한 졸라의 집이 유족에 의해 기증, 보존돼 나중에 복원될 기회를 얻었던 것과 비교된다. 따로 후손을 남기지 않은 작가로선 감수해야 할 운명인 것인지.

하지만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니다. 역시나 독신으로, 그리고 플로베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무명으로 생을 마친 카프카에 대한 프라하의 예우를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최근에 플로베르 문학호텔도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나로선 루앙시와 시민들의 무심함이 느껴진다. 인간혐오적인(어제 버스 이동중 강의에서 내가 쓴 표현이다) 작가 플로베르라면 개의치않을 듯싶지만.

루앙에서 오후 일정은 구도심과 잔다르크성당을 둘러보고 루앙미술관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지방미술관으로서는 손꼽힐 정도로 좋은 컬렉션을 갖추고 있다는 곳이다(카라바조와 벨라스케스의 작품도 있어서 이채로웠다). 주로 인상파와 모네의 작품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자유시간을 가졌는데 오전부터 도보 투어를 진행해온 탓에 피로감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루앙에서 주어진 단 하루였기에(오늘 아침에는 루앙을 떠나 노르망디의 다른 도시로 향한다) 저녁은 일행 몇분과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에 나왔다는 유명식당에서 졸음을 참으면서. 루앙의 밤길을 언제 또 걷겠는가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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