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 한주가 정말로 쏜살같이 지나가버린다. '작가와 문학사이' 연재를 매주 한번씩 옮겨놓는 것조차도 숨가쁠 정도이니! 써야 할 아이템들은 매주 서너 개씩 쌓이지만 정말 하나도 마무리짓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레이몬드 카버에 대해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도 풀어놓을 말들은 한 보따리씩 되지만 시간을 내는 일은 당분간 어려울 듯이 보인다(미친 척하지 않는 이상). '전업 글쟁이'로 나서지 않는 한 이런 푸념은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궂은 날씨를 핑계로 투덜거려본다. 정현종의 시구를 빌면, 아으 세월이여, 금강역사(金剛力士)여!..(너무 과장했나?)

경향신문(07. 04. 21) [작가와 문학사이](15)정이현-‘과장된 거짓’들춰내기

일찍이 니체는 ‘여성의 위대한 재능은 거짓말이고 최고의 관심사는 외모’라고 말했다. 이 말에는 분명 여성비하적인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모든 비난은 언제나 자기가 비난하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고 있다(*안 그래도 니체의 여성론에 대해서 다시 정리해보려고 최근에 <즐거운 학문>을 군데군데 뒤적거린 적이 있다). 거짓말하기와 외모 꾸미기가 여성의 본질이라는 비난 뒤에 있는 것은, 그래서 도대체 여자들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는 체념 섞인 두려움이다. 여성은 심지어 완전히 발가벗었을 때조차 언제나 무언가를 입고 있다. 그렇다면 그 무언가는 무엇인가? 그 무언가마저 끝내 벗긴다면, 그때 여성은 ‘본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까? 그래서 완전히 이해될 수 있을까?

정이현은 오래 전부터 남성 철학자와 예술가들을 매혹시킨 여성이라는 알 수 없는 물 자체에 대해 말해왔다. “아니, 20, 30대 싱글 여성들의 재치 발랄한 일상을 그린 트렌드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를 쓴 그 정이현이?”하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첫 단편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실린 단편들을 보자.

소설 속 여성인물들은 하나같이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순결한 처녀, 무지하고 가련한 가정주부, 깔끔하고 지적인 커리어우먼, 세련된 프리랜서, 발랄하고 순진한 소녀처럼 보인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녀들은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힌, 속물적 계산법에 철저한 존재들로 판명된다.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거짓말은 당연하고 심지어 살인과 시체유기까지 서슴지 않는다. 겉으로는 가부장제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연기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가장(假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발칙한 여성들. 한 마디로 그녀들은 배우다. 그녀들의 순진함, 순수함, 우아함, 섬약함, 섬세함 등이야말로 가장 그럴듯한 연기이자 가면이다. 그렇다면 여성다움이라는 가면 뒤에 가려진 것은 무엇인가? 거기에는 진실된 본질이라는 것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서둘러 말하면 ‘아니오’다.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찾아본 단서는 다음과 같다. “솔직히 나도 가끔씩 내가 ‘오은수’를 흉내내며 사는 건 아닐까 궁금해요. 내 이름이 오은수가 맞는지, 내 이름과 진짜 나 사이에 뭐가 있는지.” 가면을 벗긴다고 해서 그 속에 맨얼굴의 진실은 없는 것이다. 가면 속에는 또 다른 가면이 끝없이 포개져 있을 뿐이다. 소설 속 ‘오은수’가 평균적인 삼십 초반 싱글녀를 흉내 내며 사는 것처럼, 그러다가 실연한 여주인공을 흉내내기도 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흉내 내며 산다.

그렇다고 해서 어딘가에 본래의, 진실한 ‘오은수’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오은수’의 원본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특히 상품들이 내쏘는 인공조명으로만 간신히 자신을 비추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아란 바로 그렇게 조각난 상품의 그림자들로 이루어진 투명한 그림자일는지도 모른다. 그림자 바깥은 없다. 그러니 실체도 없다. ‘오은수’가 합리적인(?) 계산을 통해 “부유하는 먼지처럼 하찮은 자신을 가장 튼튼하고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줄” ‘기준점’으로 선택한 ‘김영수’가 사실은 실체 없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현실은 가장 진짜 같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정이현의 소설은 그런 진짜 거짓말의 세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컨대 번쩍거리는 상품들로 가득 찬 삼풍백화점이거나(‘삼풍백화점’), 거짓말로 꾸며낸 상품사용 후기로 도배된 인터넷쇼핑몰(‘1979년생’)과 같은 곳 말이다. 과장된 꾸밈과 거짓말로만 이루어진 바로 그곳, 영혼 없이 그림자놀이를 하는 그곳, 아케이드 서울이야말로 우리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달콤한 나의 도시’의 표지에 그려진 붕 뜬 싱글녀는 오늘도 아케이드 서울을 유영한다.(심진경|문학평론가)

07. 04. 21.

P.S. 작가는 한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장편소설을 펴냈다. 나는 단편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어봤지만 대중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이다. 평론가의 지적대로 자신을 가장하고 연출할 줄 아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그런 의미에서 올갈 데 없는 여성작가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남들이 척하는 것도 예리하게 간파해낸다. 일간지나 주간지 지면에 영화평도 자주 쓰는 그녀가 이번주 '씨네21'에서는 최근 개봉작 <우아한 세계>에 대해 꼬집었다: "이상하다. 아저씨는 왜 그렇게 불쌍한 척하는 걸까? 물론 먹고사는 거 힘들고 구차하지. 나도 안다. 나 역시 때론 힘들고 때론 구차하게 밥 벌어먹고 사는 생활인이니까.(...) 그런데 궁금하다. 보통의 중년사내들이 강인구처럼 진짜로 오로지, 처자식 먹여살리기 위해서만 사는 걸까? 손에 피 묻히고 등에 칼 맞고, 서로 물어뜯고 싸우면서. 글쎄다." 아무래도 아가씨를 속이긴 어렵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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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4-22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이현이다. 저 팬이에요. :) 저 사진보다 이쁜거 책 앞날개에 있는데.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4-22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세계>를 그렇게 프랙티컬하게만 보다니, 마지막 장면을 보면 굳이 저런 의문은 가질 필요가 없을 듯도 싶은데, 흠. 확실히 관점의 차이가 크긴 크군요.

2007-04-22 0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22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연재소설의 삽화를 그린 일러스트레이터 권신아씨입니다...
 

최근에 미국의 저명한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의 <영화의 내레이션1>(시각과언어, 2007)이 번역돼 나왔다. 원저는 'Narration in the Fiction Film'(1985)이고, 380여쪽 분량이다. 국역본은 분량상 두 권으로 나뉘어 출간된다고 하며 그 첫권이 얼마전 서점에 깔린 듯하다.

나는 주중에 교보에서 발견하고 바로 계산대로 갔다(러시아 영화이론서를 번역하고 있는 중이라 영화학 서적들을 챙겨두기 때문이다. 번역서는 짐작에 2009년에 나올 듯하다). '전문서'로 분류된 탓인지 이 책에 대해서는 관련리뷰들이 뜨지 않는다. '보드웰'을 검색해보다가 몇 년전 방한시에 홍상수 감독과 나눈 대담을 다시 읽게 되었다('씨네21'의 지면에서 당시에 읽었던 것 같다). 눈에 띈 김에 스크랩해놓는다(이창동, 허진호 감독들의 신작을 올해는 기대하게 되지만 내게 홍상수의 영화들은 언제나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다).

씨네21(02. 12.14) 보드웰, 홍상수를 만나다

<영화예술> <세계 영화사> <영화스타일의 역사> 등 영화 연구 입문서를 비롯한 다양한 저서를 내놓은 미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 교수가 한국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씨네21>은 모종의 ‘공작’에 착수했다. 그것은 보드웰 교수와 홍상수 감독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이었다. 영화의 언어구조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온 ‘구조주의자’ 보드웰 교수가 남달리 눈여겨본 영화인 목록에 홍상수 감독이 자리해 있다는 사실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는 홍상수 감독의 내러티브와 비주얼이 보여주는 미학적 특성이 허우샤오시엔과 차이밍량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미니멀리즘 유파에 속해 있는 동시에 그 이상의 개성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세계 영화사>의 개정판과 그의 새로운 저서에 이러한 연구내용을 담아낸 바 있다. 지난 9월 공항 검색 강화로 비행기를 놓쳐 USC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불참한 보드웰 교수가 발표하려던 주제 또한 “홍상수: 아시아의 미니멀리즘을 넘어서”였다. 세밀한 분석가로 이름난 세계적인 영화학자, 그로부터 ‘사랑의 메스’를 받은 감독은, 따라서 늦게나마 서로 만나야 하고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었다.

부산영화제가 한창이던 지난 11월17일, 서울에 이어 부산에서도 강연이 예정돼 있던 보드웰 교수, 그리고 뉴커런츠 부문의 심사위원을 맡은 홍상수 감독을 어렵사리 한자리에 모셨다. 마침 이들은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고, 이 사실을 먼저 알았던 보드웰 교수가 자신의 새 저서 <세계 영화사> 개정판을 홍 감독 방에 선물로 남긴 뒤였다. 이에 홍상수 감독은 조선시대 화가들의 그림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담긴 두권짜리 <화인열전>을 답례 선물로 준비해 들고 나타났다. 그는 보드웰 교수에게 자신이 특별히 좋아한다는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을 펼쳐 보여주며, 영화의 영감, 그 원천에 대한 힌트를 흘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한 시간 남짓 얼굴을 마주한 이들은 엄청난 속도와 밀도로, 영화 만들기와 영화 분석에 대한 속깊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보드웰 | 어제 강연에서 나는 ‘아시안 미니멀리즘’을 이야기했다. 롱테이크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이뤄진 어떤 미학적 경향은 아시아영화에서 매우 보편화돼 있다.당신 영화의 미니멀리즘적인 특성으로 <오! 수정>의 무대화 방식을 예로 들어보면, 한 여자와 두 남자가 함께 앉아 술 마시는 장면이 있다.재훈이 자리를 뜬 다음 수정이 그 자리로 옮겨 앉고 나서, 옆에 있던 두 남녀가 화면의 전면에 자리잡게 되는 상황부터가 흥미롭다. 그 남자와 여자는 메인 캐릭터들의 메아리처럼 그들의 행동을 모방해 보이고 있다.영수가 수정에게 술 마시기를 강권하고 있을 때 앞에 앉은 여자가 코냑병을 기울인다.난 늘 궁금했다.이런 장면을 구상할 때 사전에 얼마나 계획하고 또 얼마나 우연에 의존하는지.

홍상수 | 신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 중 몇개는 촬영 전에 이미 결정되고 나머지는 촬영 중에 현장에서 만들어진다.그리고 그렇게 의식적으로 선택된 요소와는 다른 종류의 요소들이 촬영 중에 만들어져 영화 속에서 어떤 일관성을 갖고 존재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은 촬영 직후에 모니터링과 편집 중에 발견하게 되고,그때 그곳에 놔두느냐 아니면 버리느냐, 하는 선택의 과정을 거친다. 이런 무의식적으로 컨트롤되는 요소들이 신 안으로 들어와 자기 자리를 잡게 되는 과정은 언제나 내게 약간은 신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그것은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우연보다 훨씬 많은 우연의 중첩과 깊은 저층에서 어떤 목적을 가진 힘이 요소들간의 연결을 의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현상이다. 어쩌면 이런 요소들이 의식적으로 집어넣는 요소들보다 내가 더 비밀스럽게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특히 배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런 종류의 요소들은 가장 가치있게 받아들여진다.

보드웰 | 숏을 어떤 순서로 구성하는지도 궁금하다.배우들의 위치를 정한 뒤에 카메라 포지션을 정하는 것인가, 아님 카메라 포지션을 정한 다음에 배우들의 위치를 정하는 것인가.

홍상수 | 카메라 포지션을 먼저 정하는 편이다.그런 다음에 연출부들이나 스탭들을 대역으로 해서 정확한 움직임을 결정한다.배우들은 다른 곳에서 리허설을 거의 마치고 마지막 순간에 카메라 앞으로 데리고 나온다.배우들이 카메라 앞에 섰을 때는 이 테이크가 단 한번의 테이크라는 느낌을 갖도록 최대한 배려하려고 한다.

보드웰 | 그러려면 테이크를 많이 가진 않겠다.두세 테이크 정도.

홍상수 | 일반적으로 서너번 정도의 테이크를 가고, 어떤 경우는 열번 넘게도 가는 것 같다.연기의 선도는 테이크가 갈수록 당연히 떨어진다.그러나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다른 요소들, 꼭 타이밍이 맞아야만 맛이 나는 요소들, 연기의 신선도와 상관없는 이런 요소들 때문에 테이크가 많아지는 경우가 꽤 많다.

보드웰 | 차이밍량이나 허우샤오시엔처럼 당신과 비슷한 감독들의 경우, 모두가 작은 디테일에 충실한 것 같다.이런 방식의 장점은 신을 리얼타임으로 전개해 나간다는 것인데, 그러고는 배우의 작은 제스처와 사물의 작은 디테일을 통해 이야기를 채워나간다.<강원도의 힘>의 금붕어 장면이나 서로 술을 따라주는 장면이 그렇다.당신은 캐릭터들의 상호관계를 통해 디테일을 풍부하게 발전시켜 나가는데, 그런 부분들은 아까 말한 리허설의 연장과도 같은 촬영 방식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인가.

홍상수 | 영화 만들기의 전 과정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작은 발견들이 이루어지고, 그것들이 계속 전체라는 구조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과정인 것 같다.

보드웰 | 당신은 배우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카메라를 고정해놓고 촬영하는 경우가 많다.이런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들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세밀히 관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교육적이라고 생각한다.미국영화, 심지어 유럽영화를 둘러봐도, 그렇게 배우들이 자신을 드러내도록 기다려줄 만큼의 인내심이 엿보이는 예는 없다.

홍상수 | 한신에 10가지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그중 적어도 3∼4가지는 모든 관객이 관람 중에 꼭 알아차려야 하는 요소일 것이다. 나머지는 관객이 누구냐, 그 한 관객의 그 순간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그러나 이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도 그런 관객의 의식의 필터를 피해서 스며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은 3∼4가지보다 많은 요소들이 다수의 관객에게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드웰 | 맞는 얘기다.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감독들은 모두가 알아볼 수 있도록 중요한 포인트는 명시하는 동시에 일부는 이해하고 또 다른 일부는 그렇지 못할 작은 디테일들을 함께 배치한다.내가 당신의 영화나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서너번씩 반복해 보길 즐기는 이유는 처음 볼 때 모르던 것들이 다시 볼 때는 보이기 때문이다.나는 이것이 시야를 넓게 잡은 화면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숏 속에 많은 것들을 담아내 단번에 볼 수 없는 요소들도 다시 보면 보이게 하는 그런 장치 말이다.

보드웰 | 당신의 영화는 많은 요소들로 꽉 차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매우 생략적이기도 하다.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부 보여주지 않으면서, 드라마틱 포인트를 넌지시 알려주는 식이다.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가 이런 갭을 채워주고 있다고 생각한다.최근의 아시아영화를 보면 미니멀리즘적 스타일로 접근하면서도 기본적인 것들을 채우지 않는다.당신 영화에서 보이는 것 같은 조밀함은 없다.

홍상수 | 언뜻 보면 단순한 이야기이고 어떻게 보면 단순한 상황 속에 다른 종류의 요소들이 중첩되고, 그런 요소들이 시간상의 연결을 만들어내는 것이 내가 스스로에게서 발견한 영화의 형태였던 것 같다. 맨 처음 영화를 만들 때 첫 촬영날부터 이런 식의 형태가 마치 내 속에 오래 존재했던 것처럼 나의 모든 영화적 결정들을 지배해왔다.

보드웰 | 영화학교 출신인 걸로 알고 있는데, 학교에서 콘티 그리는 법이나 스토리보드 작성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나.그리고 학교에서 만든 습작들은 어떤가. 장편영화와 유사한가.

홍상수 | 학교에서 실험영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스토리보드 같은 건 만들어본 적이 없다. (웃음) 2편인가 장편을 만들고 나서, 학교 때 만든 습작들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내가 장편에서 시도했던 거의 모든 것이 이미 그 단편들 속에 존재했다는 걸 알고 무척 놀랐다.

보드웰 | 그 작품들을 DVD에 넣을 생각은 없는지.

홍상수 |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다.(웃음)

보드웰 | 한국에 돌아와서 장편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홍상수 | 돌아왔을 때 나는 일단 생활을 위한 돈을 벌고 여유가 생기면 16mm 카메라를 사고, 그래서 최소한의 경비를 쓰는 단출한 독립적 형태로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다 4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그때 갑자기 충무로 안이건 밖이건 힘들 테니 일단 충무로쪽부터 시도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영화사를 찾아갔다.

“당신의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인터랙티브’하다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 게임처럼. 관객은 스토리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주어진 요소들을 통해 ‘문제 해결’에 도전하는 게이머의 자세를 갖추게 된다. 그런 효과는 다른 아시아영화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다.당신이 이런 문제를 다루기에 가장 적절한 모더니스트인 것 같다. 표면적인 장치들이 거대한 전체 구조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 둘 사이의 밸런스가 기막히다. ”

보드웰 | 매우 인상적인 데뷔였다.내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본 것이 96년 홍콩영화제에서였을 거다.그러니까 그뒤로 2년에 한편씩 작품을 만들어온 셈인데, 최근 <생활의 발견>을 보고 좀 놀랐다. 놀림당한 기분이랄까. (웃음) 이전 세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어떤 트릭 같은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그런데 이 영화는 뭐랄까, 소설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홍상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 교차 시점이 동원된 지점은 호수에서 오리배 타면서 라이터 빌리던 남자와 골목길에서 다시 마주치는 장면 정도인 것 같다.나머지 부분에선 다중 시점을 동원하진 않았다.이전 세 작품에서 당신은 다중 시점을 동원했고 시점의 변화 형태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했다.늘 궁금했는데, 당신은 왜 그런 방식에 관심을 갖는가.

홍상수 | 내게는 어떤 상황이나 아주 구체적인 대사나 신이 먼저 떠오르고 그것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영화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의 과정이 뒤따랐다. 그건 보통의 형태나 논리로는 끼워넣어지지 않는 것들이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 형태가 만들어진 것 같다. 그러나 어쩌면 그런 형태가 먼저 내 속에 존재해 있었고, 그런 형태가 그런 상황이나 대사나 신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생활의 발견>에서는 그전의 영화 속에서 구조가 하던 기능을 인물 행위 속의 작은 디테일을 통해서, 그러니까 반복과 모방의 모티브를 통해서 나타내려고 했다.

보드웰 | 요즘 아시아영화들은 지나치게 생략적이라 때론 그 스토리가 공허하게 느껴질 정도다. 드라마의 단계를 무시하고, 캐릭터의 백그라운드에 침묵하며, 개개의 에피소드가 자기충족적이다. 결정적인 문제는 내러티브의 역할이 적다는 것이다. 당신의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인터랙티브’하다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 게임처럼. (웃음) 관객은 스토리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주어진 요소들을 통해 ‘문제 해결’에 도전하는 게이머의 자세를 갖추게 된다. 그런 효과는 다른 아시아영화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다.당신이 이런 문제를 다루기에 가장 적절한 모더니스트인 것 같다. 표면적인 장치들이 거대한 전체 구조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 둘 사이의 밸런스가 기막히다. 개개의 신에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찾아내게 할 뿐 아니라, 신과 신 사이의 연결점도 생각하게 한다. 이런 식의 영화 만들기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매우 신선하다. 그런데 혹시 <생활의 발견>을 만들 때 관객이 당신의 전작들을 다 봤을 거라는 가정을 했나.

홍상수 | 그런 가정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하지 않는다. 매번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에 내게는 다른 종류의 동기가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아주 막연한 영화에 대한 느낌과 구체적인 형식에 대한 실험 욕구 같은 것이다. 인물 전반에 대한 느낌도 나이가 들수록 천천히 변해가는 것 같다. 전작보다 가벼운 느낌을 생각했던 것 같고, 좀전에 말한 구성의 기능을 모티브화한다는 것 정도가 처음에 있었던 것 같다.

보드웰 | 당신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캐릭터들이 미디어와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생활의 발견>의 남자 주인공은 영화배우이고, <오! 수정>의 인물들은 TV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나는 이것이 당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 영화 만들기의 자기 반영적 작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홍상수 | 지금까지는,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공간이건 상황이건 직업이건 간에,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선택한 것 같다. 그것은 영화를 만들면서 해야 하는 수많은 결정들이 어떻게 잘못돼 갈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익숙함이 판단에 어떤 직감적 레퍼런스로 존재하길 바랐기 때문인 것 같다.

보드웰 | 혹시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옛날 문화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역사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아님 다른 장르영화라도.

홍상수 | 많은 다른 가능성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지금까지 내 안의 영화적 욕망은 두 가지로 나뉜다.한쪽 욕망은 지금까지 해온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 어떤 정수에 도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머티리얼(material)이나 틀 속에 나를 집어넣고 어떤 것이 나올까를 보고 싶은 욕망이다.이 두 욕망은 계속해서 공존해왔다.

보드웰 | 당신 세대 감독들의 작품을 보면, 다른 영화를 참조하거나 언급하는 경향들이 있다. 그런데 당신 영화는 그렇지 않다.시네필적인 요소나 분위기가 없다고 할까.

홍상수 |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영화 중 그대로 따라하고 싶은 영화는 거의 없는 것 같다.내가 대가들로부터 따라하고 싶고 실제로 배웠으면 하는 것은 그들의 밸런스 감각이고, 어떤 최선의 의미의 진정성이고, 자신의 삶과 영화, 그리고 영화 작업의 현실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능력이었던 것 같다.대가의 영화에서 어느 부분을 선호하게 되는 건, 거기서 바로 그런 능력을 확인했거나 아니면 내 속에 이미 있는 어떤 경향을 표현해내는 훌륭한 예가 되었기 때문인데, 그런 선호가 나를 틀로서 기억으로서 억압하게 하지는 않았다.

보드웰 | 브라이언 드 팔마의 <팜므파탈>을 보면, 자신의 영화를 비롯한 다른 영화에 대한 인용으로 가득하다.흥미롭긴 하지만, 섞어놓기 게임 같다고나 할까. 다른 영화를 인용하지만 정작 자기 이야기가 없는 영화들이, 이젠 지겹다.당신이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 건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홍상수식 영화구조와 보드웰식 영화 분석 ‥‥‥‥‥‥‥‥‥‥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영화 중 그대로 따라하고 싶은 영화는 거의 없는 것 같다.내가 대가들로부터 따라하고 싶고 실제로 배웠으면 하는 것은 그들의 밸런스 감각이고, 어떤 최선의 의미의 진정성이고, 자신의 삶과 영화, 그리고 영화 작업의 현실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능력이었던 것 같다.”

홍상수 | 내 영화 속의 여러 요소 중 특히 집중하는 요소들이 있고, 다른 요소들은 따라오게만 하는 식인데, 그런 다른 요소들이 어떤 때는 집중해온 요소들을 질적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그런 변화가 일어날 때 가장 큰 만족감을 느낀다.나는 모르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 같고, 호기심만이 진정한 진정성의 근거라고 생각한다.나는 영화작업의 과정에서 많은 것을 모른 채 시작하고 미리 정해두지 않는다.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보드웰 | 사람들은 일정 부분은 의식적으로, 또 일정 부분은 직관을 통해 영화를 만든다.계획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섞여 있게 마련이고, 이들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이런 것들이 결국엔 영화‘구조’라는 결과물로 나타난다.무엇이 계획된 바고 무엇이 우연한 결과인지 정확히 가를 순 없겠지만, 내가 영화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이것이 하나의 패턴으로서 관객에게 매우 강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홍상수 |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것이 일어나건 그건 결국 나의 선택인 것이다.그것이 계획을 통해서 일어났건 발견을 통해서 일어났건.그리고 그런 두 종류의 선택이 내 영화의 두 동력을 이루는 것 같다.

보드웰 | 영화를 컨트롤하는 일은 꽤 다층적이다.이거냐 아니냐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들을 끊임없이 마주치게 된다.그 선택의 결과가 풍부한 구조로 형상화되고 분석할 수 있는 것이 된다.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다고 해도, 우연히 얻은 효과라고 해도, 어쨌든 자의에 의해 선택됐고 영화로 남겨졌기 때문이다.

홍상수 | 어떤 영화감독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내가 영화를 만들기 전에 모든 걸 계획하고 준비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면, 더이상 영화를 만들고 싶어지지 않을 것 같다.

보드웰 | 흥미로운 생각이다. 히치콕은 스크립트와 스토리보드를 준비하는 것이 한편의 영화에 대한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에 멍청한 배우들이 대사를 버벅거리고 카메라가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촬영 현장이 지겨워진다고 말하곤 했다.그는 완벽한 통제를 원했고 그런 욕망을 과장한 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당신 생각에 동의한다.많은 영화감독들이 영화 만드는 과정을 ‘계획’은 물론 ‘발견’에도 비유한다.

홍상수 | 그 두 단어를 좋아한다.나는 영화 만들기의 모든 단계에서 ‘과정’을 믿고, ‘발견’을 믿는다.

보드웰 | <오! 수정>을 흑백으로 찍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

홍상수 | 무엇보다 내가 흑백 시절의 고전영화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꼭 한번은 흑백을 찍고 싶었고, 촬영 시간대인 겨울과 흑백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또 다른 이유는 흑백이라는, 컬러보다 조금 더 단순한 자극체 속에서 영화 속에서 필요로 하는 작은 디테일간의 비교가 좀더 쉽게 이루어졌으면 했다.

보드웰 | 당신의 영화를 보면 매번 전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는 네 사람의 시점을 서로 다르게 교차시키고 있고, <강원도의 힘>에서는 두 사람의 시점으로 전개하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는 점에서 좀더 복잡한 시도를 하고 있다.<오! 수정>은 또 다르다. 두 사람이 겪은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르게 표현해낸 것이다.한 버전은 마일드하게 또 다른 버전은 터프하게 담아냈는데, 관객은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워진다.양립 불가능한 신을 통해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 저의는 무엇이었나.

홍상수 | 그런 혼란을 통해서 관객을 매혹시키는 동시에 그 혼란이 바로 영화가 중심으로 삼은 질문을 관객에게 체험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드웰 | 경이로운 시도라고 생각한다.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혹시 릴을 잘못 끼운 건 아닌지, 아까 제대로 못 본 것인지, 못 볼 걸 본 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둘 중 어느 것이 맞는 버전이라고 단정하지 않은 것 또한 신선한 시도였다.40년대 미국영화를 보면 이른바 착각을 유도하는 플래시백이 유행했었다.플래시백을 두어번 동원하는데, 대개 나중 버전이 ‘맞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장치였다.유명한 예로 <크로스 파이어>를 들 수 있다.살인 용의자의 증언에 따라 상황이 재연되고 나서 같은 상황을 다른 시점으로 다시 보여주는데, 이전과는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라쇼몽>도 마찬가지다.플래시백이 동원될 때마다 이전 버전을 수정하는 경향이 있고, 결국엔 마지막 버전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곤 하는 것이다.당신의 영화에선 플래시백이 아니라 시점의 교차라고 해야 맞겠지만 말이다.

홍상수 | 기억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그 상황에 따라그 사람의 욕망에 따라 변질되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따라서 의문을 남기는 것이어야지, 무엇이 ‘진실’인지를 판정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보드웰 | <롤라 런>의 경우는 서로 다른 미래 상황들을 나열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SF적이라고 볼 수 있다.그 작품에선 앞의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버전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에피소드간의 상관관계가 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반면 당신의 영화는 두 상황이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모호한 느낌을 준다.그런 의미에서 매우 소설적이라고 느껴지는데, 혹시 문학 작품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나.

홍상수 | 영화만큼이나 문학과 미술 작품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문학이나 미술을 정식으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많이 좋아하니까,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는 것 같다.

보드웰 | 최근에 롱테이크를 즐겨 쓰고 화면의 심도를 중요시하는 감독들에 대한 연구서를 집필했다.루이 푀이야드, 미조구치 겐지, 테오 앙겔로풀로스, 허우샤오시엔 등이 주된 연구 대상이다.당신도 해당되는데, 첫 번째 챕터에서 <오! 수정>의 화면 구성을 분석했고, 마지막 챕터에서 <생활의 발견>에 대해 썼다.다른 유럽 감독들과 비교해 보이기도 했다. 오타르 요셀리아니(<월요일 아침>) 같은 감독.요셀리아니가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건 유감이다.그 역시 롱테이크를 좋아하고 독특한 코미디를 구사한다.캐릭터도 당신 맘에 들 거다.만날 술 마시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웃음)사회의 낙오자들이랄까.그를 비롯한 몇몇 유럽 감독들을 당신과 비교해봤는데, 모두 느리고 사려 깊고 심미적인 영화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이 저서는 말하자면, 최근의 영화들이 무작정 컷 수를 늘려가고 있는 데 대한 저항인 셈이다. 당신도 당분간은 갑자기 컷 수를 엄청나게 늘린다든지 하는 변화는 시도하지 않길 바란다. (웃음) 당신의 영화를 언급할 수 있어서 기뻤다.특히 나는 <오! 수정>의 먹는 신을 언급했는데, 당신 영화엔 특히 먹고 마시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그것은 다른 아시아영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허우샤오시엔도 그렇고, 홍콩영화를 봐도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오지만, 감독 개인의 스타일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재미난 것은 기타노 다케시의 예다.그의 영화엔 먹고 마시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데, 그건 그가 그런 장면들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이란다.<하나비>에서 사내의 눈에 젓가락을 꽂는 장면은, 먹고 마시는 장면에 대한 혐오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웃음)세상엔 두 종류의 감독이 있는 것 같다.오즈나 브레송처럼 비슷한 걸 시도하면서 그 안에서 정련의 과정을 거치는 쪽과 오시마 나기사처럼 매번 전혀 다른 작품을 내놓는 쪽.당신은 어느 쪽을 지향한다고 생각하나.

홍상수 | 막연하게 느끼는 것은 한시적으로는 당신이 말한 오즈 식의 파고듦과 정련을 해나갈 것 같다.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만든 틀이라고 생각드는 것이 억압적으로 작용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그런 경우를 사실 많이 상상하곤 한다.서서히, 그렇지만 같은 강도를 가진 움직임으로 변해나가고 싶다.

보드웰 | 오즈는 닫힌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영화를 다듬었지만, 서서히 벗어나는 것 역시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아주 좋은 생각이다.

07. 04. 21.

P.S. 번역돼 나온 보드웰의 책을 나는 모두 갖고 있는데, 이번에 나온 <영화의 내레이션> 외에도 몇 권의 책이 더 번역/소개됨 직하다.

그 중에서도 현대 영화에서의 이야기와 스타일을 다룬 <헐리우드가 말하는 방법(The Way Hollywood Tells It)>(2006)이 가장 최신작이면서 가장 흥미를 끄는 책이다(<제리 맥과이어>의 한 장면이 표지로 쓰였군). 번역을 기다리느니 그냥 원서를 읽는 게 더 빠른 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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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에 잠시 읽어본 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버지니아대 총기난사 사건의 의미를 일본만화 <몬스터>의 내용과 연관지어 좇고 있다. 기사가 눈에 띈 건 이 만화 때문. 그렇다고 내가 읽은 건 아니고(나는 만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강풀 만화조차도 읽은 적이 없다), 다만 이 만화를 좋아하는 한 후배가 한동안 만날 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적이 있어서 친숙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조승희는 '몬스터'인가?... 

오마이뉴스(07. 04. 20) 우리 안에 똬리 튼 '버지니아 몬스터'

일본 만화 가운데 <몬스터>라는 작품이 있다. <마스터 키튼> 등으로 우리나라에도 상당수의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우라사와 나오키(浦澤直樹)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일본에서만 2000만부 이상 팔렸으며,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인터넷을 뒤지면 몬스터 마니아 클럽을 꽤 찾아볼 수 있다(*관련기사는 http://payopen.scout.co.kr/bookclub/review/SN056/default.asp?action=view&id=2222&page=1&field=1&keyword=).

<몬스터>는 만화 제목 그대로 '절대 악'의 화신과 같은 '요한'이라는 몬스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스릴러물이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양부와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준 의료진들을 살해한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의 심리와 약점을 꿰뚫어 보고 이를 이용해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 특별한 능력을 유감없이 활용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이 만화는 그러나 몬스터의 '연쇄 살인'이나 '대량 학살'이 주된 줄거리가 아니다. 작가 우라사와 나오키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고 줄곧 쫓고 있는 것은 냉혈한 살인마 요한, 즉 몬스터의 뿌리와 그 본성에 관한 탐사다. 그 추적을 통해 놀라운 사실들이 하나 둘 드러난다.

몬스터의 살인 권능은 '상처'에서 싹튼다

구동독 시절 특별한 능력이 있어 보이는 고아들을 모아놓고 실시한 '인간병기' 프로젝트에서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본인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몬스터가 돼 버린 요한. 쌍둥이 자매 가운데 한 명의 아이만 남기도록 강요당한 어머니한테서 결국 버림받은 요한.

자신의 쌍둥이 남매인 '안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는 절대 고독한 존재로서의 요한. 결국 안나에게 자신을 쏘도록 해 죽음을 선택한 요한, 그러나 만화 '몬스터'의 또 다른 주인공인 '닥터 덴마'에 의해 기적적으로 살아나 청년 몬스터가 된 요한….

유럽 전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짜임새 있는 긴박한 이야기 전개와 독특하고 다양한 캐릭터 이외에도 만화 <몬스터>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내 안의 몬스터'에 대한 깊이있는 천착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이 살려놓은 몬스터를 없애기 위해 요한을 쫓는 닥터 덴마,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쌍둥이 오빠 요한을 죽이기 위해 역시 그를 쫓는 안나를 통해서 작가는 몬스터가 이 세상과는 물론 바로 이들 추적자들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요한이라는 몬스터의 탄생도 그렇지만 그가 초인적인 '살인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들 내면의 '깊은 상처'나 '공포' 혹은 '끝없는 욕망'의 뇌관을 적시에 조작할 수 있었기 때문임을 장면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선과 악이 교차하고,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말한다.

"몬스터는 바로 당신, 그리고 우리 안에 있다."

만화 <몬스터>의 가장 큰 미덕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연쇄 살인마 요한을 쫓아가면서 닥터 덴마나 그의 쌍둥이 누이 안나는 몬스터 요한에 대한 연민을 버리지 못한다. 몬스터의 뿌리와 그의 실체에 접근할수록 이 두 사람의 연민은 더욱 커진다. 끝내는 치명상을 입은 몬스터를 닥터 덴마가 살리기 위해 다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몬스터에 대한 공포와 증오, 적대는 연민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용서까지는 아닐지언정, 어느 정도는 화해하는 것으로 이 만화는 대미를 장식한다.



버지니아 몬스터는 결말이 달랐다

어디까지나 만화 이야기다. 버지니아 공대의 '몬스터'는 결코 그런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없었다. 피의 살육이라는 끔찍한 최후를 선택한 버지니아 몬스터는 숨가쁜 언어와 공격적인 포즈, 혹은 절망적인 제스처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지만 그것은 제정신이 아닌 외톨이의 '광기어린 독백'이 되고 말았다.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미국 사회에 있어서 그는 진즉 격리됐어야 했을 '미친 놈(mad man)'에 불과할 뿐이다.

그를 미치도록 외롭게 하거나 혹은 좌절케 했을지 모를 '한국인'이라는 핏줄과 국적마저 몬스터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무늬만 '한국인'일 뿐이다. 미국에서 자라 '사실상 미국인'인 그는 '미국판 몬스터'일 수는 있어도, 한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게들 믿고 싶어한다. 그가 한국 핏줄이어서, 한국인이어서, 동양인이어서, 백인이 아니어서 미국 사회에서 겪었을 갈등과 좌절, 혹은 분노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 아니, 그런 몬스터가 '내 안'에, 혹은 '우리 안'에 똬리 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니까.(백병규 기자)

07. 04. 20.

P.S. "그가 한국 핏줄이어서, 한국인이어서, 동양인이어서, 백인이 아니어서 미국 사회에서 겪었을 갈등과 좌절, 혹은 분노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란 대목은 이해되지 않는다(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의 '순교자'들은 백인 학생들이었다). 버지니아 공대에는 수백 명의 한국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다. 그들 모두가 "한국인이어서, 동양인이어서, 백인이 아니어서 미국 사회에서 겪었을 갈등과 좌절, 혹은 분노"로 인하여 제2, 제3의 '버지니아 몬스터'가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인가? 아무래도 '만화적인'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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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0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20 21:04   좋아요 0 | URL
**님/ 음주시에만 댓글을 다시는 건 아니구요?^^

소경 2007-04-21 13:55   좋아요 0 | URL
두건의 페이퍼 잘 참고했어요..^^. 반면 에드게인이나 찰스맨슨과 같은 이들과 함께 두는 '한국인'이라 기분이 묘하군요. 결코 이 반도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라고는 생각했는데.....그리고 이 나라에 따를 총기허용시 반향에 대해서 숙고하신 점은 서득력있게 들리네요. 그러한 사람(살인자)들은 결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 생각한다면 생각은 달라지겠지만요.

딸기 2007-04-21 22:13   좋아요 0 | URL
제가 보기엔 조승희는 정신분열 같습니다. 우울증 같은 거랑은 전혀 다르지요;;
문제는 그것이 치료가 되지 않고 방치됐다는 점, 그리고 총을 손에 넣었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로쟈 2007-04-22 10:08   좋아요 0 | URL
소경님/ 다른 선택은 없다고 스스로를 몰아가는 '성향'과 '과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이죠...
딸기님/ 경계성 장애니, 자기애 장애니 하는 진단들도 나오더군요. 우울증보다는 증상이 더 악화된 경우겠지요...

딸기 2007-04-23 16:41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조승희 같은 경우에 대해 진단을 잘 내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우울증이라고 해버리면-- '우리 모두 다 죄인' '이민 1.5세대의 비극'이 되어버려요. 그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이 문제는 '정신병자가 총을 살 수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미국 사회의 병리라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고요. 누군가가 옆에서 좀 잘 다독여줬더라면? 그렇다면 약물을 투입해 폭력성을 좀 억누를 수 있었겠지요.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거기까지... 암튼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로쟈 2007-04-23 16:53   좋아요 0 | URL
가해자-피해자를 전치시키는 논리에 대해서는 저도 반대합니다. 범행동기에 대해서는 그쪽 경찰에서 실마리를 잡았다고 하니까 곧 발표될 수도 있겠지요. 총기는 보도에 따르면 2억 5천만정이 퍼져 있다고 하니까 '근절'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고, 자체적으로 '제한' 정도가 시도될 수 있지 않을까(그것도 잘해야) 싶네요...
 

이번주 한겨레의 북리뷰에서 눈에 띄는 건 문학관련서들이고, 리뷰 밖에서 내가 주목한 건 영화관련서이지만(이 책들에 대해선 조만간 다룰 예정이다), 리뷰로서 처음 읽어본 건 물리학책에 관한 것이다. '거울 속의 물리학'이란 책제목도 평균점 이상이지만 '물리학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란 리뷰 타이틀은 (따로 참조한 게 없다면) 이 주의 카피로 꼽을 만하다. 이래저래 심란하고 착잡한 일들이 많은 차에 제목만으로도 잠시 위안을 얻게 된다. '거울 속' 세상이 그립다...

한겨레(07. 04. 20) 물리학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그리스의 마그네시아 지방에서 쇳조각을 끌어당기는 이상한 광석이 발견됐고, 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거기에 마그넷(자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인들은 또 모피에 문지른 호박이 목재나 천 조각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힘은 2000년 동안이나 이름이 없었는데, 1600년 영국 과학자 길버트가 호박을 뜻하는 그리스어 엘렉트럼이라 명명했고 그게 오늘날 전기를 뜻하는 일렉트릭이 됐다. 이 보이지 않는 두 힘이 근대 과학혁명과 함께 세상을 바꾸고 인류의 인식 차원을 흔들었고 인간 자체를 바꿨다. 현대문명은 거기서 시작됐다. 물리학 혁명은 곧 철학의 혁명이다.

1786년 이탈리아 과학자 갈바니는 죽은 개구리 다리에 두 개의 금속판을 접촉시키면 다리가 경련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금속판이 개구리 다리에 있던 전기를 방전시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볼타는 전기는 개구리 다리에 있는 게 아니라 두 금속판 접촉으로 생긴 것이고 그것이 개구리 다리를 움직이게 했다는 걸 증명했다. 이것은 전지의 발명으로도 이어졌다. 덴마크 물리학자 외르스테드는 1820년께 전류가 흐르는 도선 가까이에 있는 나침반은 바늘방향이 바뀐다고 밝혔다. 전류가 흐르면 자기가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의 논문은 유럽을 흥분시켰다. 25년 뒤 이 논문이 “굳게 닫혀 어두웠던 과학의 문을 활짝 열어 빛으로 가득차게 했다”고 회상한 영국인 페러데이는 지금까지 상업적 전기생산의 원리가 된 전자기 유도현상을 정립했다. 이런 전자기역학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공식화한 사람은 맥스웰이었다.

맥스웰은 전자기파의 속도가 빛의 속도와 같다는 계산을 해냄으로써 전자기파가 빛 자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전자기의 수학적 형식은 강력과 약력의 신비를 해결할 수 있게 했으며,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4차원 외의 다른 차원이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최초의 중대한 과학적 제안으로 이어졌다. 1910년대에 이뤄진 이런 발견은 아인슈타인과 민코프스키가 제안한 시공간 4차원 연속체 개념의 원동력이 됐다.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중력이라 부르는 힘을 시공간의 곡률로 이해할 수 있다는 놀라운 발견을 해냈으며, 이를 설명하는 일반상대성이론의 등장은 중력과 전자기력의 통합 움직임을 낳았다.

중력이 4차원 공간 곡률에 의한 것이라면 전자기력은 어떤 차원의 곡률이 만들어낸 것일까? 이 두 힘의 통합시도가 중력장에 시간차원이 합쳐진 5차원이론으로 나아갔다. 1960년대에 양성자, 쿼크 등 미립자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한 끈이론이 등장했다. 미립자 세계에선 입자들이 끈으로 존재한다는 끈이론은 끈이 진동하는 방법에 따라 각기 다른 무수한 물리적 성질을 지닌 입자로 나타난다고 보는데, 우리가 사는 4차원 공간에서의 진동만으로는 입자들의 물리적 성질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고차원 공간을 상정하게 된다. 끈이론엔 수십차원까지 등장한다.

‘입자물리학과 우주론을 연결하는 대표적 이론물리학자’라는 로렌스 크라우스의 <거울 속의 물리학(HIDING IN THE MIRROR)>(영림카디널)은 ‘여분의 차원들(extra dimensions)이 내뿜는 신비로운 매력- 플라톤에서 끈이론, 그리고 그 너머까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을 왜 썼나. “나는 우리가 어디어 왔으며 밤의 장막 저쪽에는 무엇이 있는지와 같이, 물리학이 밝혀낸 신비에 대한 인류의 통찰력을 담은 책을 쓰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은 영혼을 통해 위안을 얻지만 어떤 사람들은 지식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요컨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존재를 가능케 한, 극미세계에서 초거대 우주세계까지 관통하는 원리를 알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를 불안과 미망에서 해방시키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겁내지 말고 상상력을 총동원하라.(한승동 기자)

07. 04. 20.

P.S. 저자 크라우스 교수의 책은 <스타트렉의 물리학>(영림카디널, 1996)을 필두로 하여 <스타트렉을 넘어서>(영림카디널, 1998), <외로운 산소 원자의 여행>(이지북, 2005) 등이 번역/소개돼 있다. 지난 2005년에 출간된 <거울 속의 물리학>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스타트렉의 물리학>, <물리학의 공포>, <제5의 원소>등의 책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이자 물리학자인 크라우스는 이 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고차원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인류사에 등장했던 고차원 탐구의 연대기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고차원 세계의 찬란한 유혹'이란 부제답게 고차원 세계와 그에 대한 탐구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한번쯤 또다른 세계로의 '점핑'을 꿈꾸어본 독자들이라면 입맛을 다시며 읽을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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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7-04-20 10:17   좋아요 0 | URL
좋은 책소개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혼을 통해 위안을 얻지만 어떤 사람들은 지식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멋진 말이네요.............공감...공감...

수유 2007-04-20 17:51   좋아요 0 | URL
입맛이 다셔지네요. :) 여분의 차원.

작은앵초꽃 2007-04-25 00:25   좋아요 0 | URL
물리학. 한 때 저의 로망이었는데.. ^^;;; 퍼가겠습니다.
 

그제부터 단연 화제가 되고 있는 뉴스는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사건이다. 볌인이 재미교포 한국인 학생이어서 특히나 충격을 주는데, 그가 언론사에 보낸 '선언문'과 사진, 동영상 등이 오늘(19일) 공개됨으로써 사건의 윤곽이 얼마간 밝혀졌다. 관련기사 두어 가지를 옮겨놓는다.

재작년 6월 전방 GP에서의 총기난사 사건에 대한 소감을 적으면서 '엘리펀트에 대하여'란 제목을 단 적이 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696609). 물론 그때의 '엘리펀트'란 말은 지난 1999년 미국 콜럼바인고교의 총기 난사사건을 다룬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엘리펀트>(2003)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같은 사건을 다룬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과 이 영화를 함께 묶어서 이번 사건의 의미를 조명하고 있는 프레시안의 기사를 먼저 옮겨놓았는데, (그 기사보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실제 범인 조승희의 '선언문'에서 콜럼바인 사건의 두 주모자 에릭과 딜란이 '순교자'처럼 언급되고 있다(그 자신은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했다). 그러니 이 두 사건은 동일한 맥락 속에 있는 것이다. 

예단이긴 했지만 그래서 '버지니아 엘리펀트'이다. 이미 너무 많은 말들과 분석들이 이 사건과 관련하에 제시된지라 따로 덧붙일 말은 없다(한가지, 이번 사건을 두고 "9.11 이후의 가장 통쾌한 사건'이라며 오버하는 반응은 한국인으로서 사죄해야 한다는 반응과 마찬가지로 꼴사납고 역겹다. 나 자신 '네티즌'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인터넷과 지적/인격적 성숙은 무관하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다. 내가 존경하는 이들이 대부분 인터넷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프레시안(07. 04. 18) 콜럼바인, 버지니아텍을 미리 보여주다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사건이 일어난지 8년만에, 이번에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교내 총기사건이라 불릴만한 사건이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났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 수만 33명. 게다가 범인은 한국계로 밝혀졌다. 도대체 이러한 비극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어떻게 총기를 난사해 그 많은 사람을 죽일 행동을 한 것인가? 왜 다른 나라 총기 소유 허가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미국에선 그토록 빈번한 것일까? 혹은, 20세 이상의 남자 성인이라면 누구나 군대에 가 사격술을 훈련 받아야 하고 비공식적인 밀수 총기가 퍼져있다고 하는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미국에서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100% 만족할 만한 답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답변을 주는 영화 두 편을 떠올릴 수 있다. 하나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고, 또 하나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이다. 두 영화 모두 둘 다 1999년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모티프로 삼고 있는 영화들로, 다큐멘터리인 <볼링 포 콜럼바인>은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계기로 총기난사 사건을 '부추기는' 미국의 사회 시스템을 분석하고, 극영화인 <엘리펀트>는 외롭고 상처입은 두 10대 소년의 일상을 건조하게 응시한다.

<엘리펀트>에서 구스 반 산트 감독은 분노와 외로움, 상처로 가득찬 두 소년의 황량한 내면과, 표면적으로는 남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이들의 일상을 그려낸다. 우리는 여전히, <엘리펀트>에서 그 평화롭고 따사롭던 오후에 두 주인공이 친구들을 향해 총질을 시작하는 명시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를 발견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상처입은 사람들이 모두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대지는 않는다.
  
마이클 무어가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듯, 미국은 개인의 총기 소유를 법적으로 보장하면서도 이에 대한 관리와 규제에는 매우 허술하며 총기 소지가 매우 쉽다. 물론 마이클 무어가 조롱했던 것처럼 은행에 계좌만 개설하면 사은품으로 총기를 주는 수준은 아니지만(이것은 총기 구입이 그만큼 쉽다는 마이클 무어식 비아냥일 뿐, 사실은 아니다.), 버지니아공대 사건의 범인 역시 학교 근처 총기상에서 신분증 세 개를 보이는 것만으로 아주 쉽게 범행 무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사용 용도가 무엇인지 설명하거나 신고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단순히 총기를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해서 그만큼 총기 난사 사건도 빈번히 일어나는 것일까? 역시 총기 소지가 법적으로 보장된 캐나다에서 연간 일어나는 총기난사 사건은 미국에 비하면 훨씬 적다. 마이클 무어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공포를 확대재생산하면서 공격이 최선의 방어임을 설파하는 시스템이라고 분석한다. 빈부의 격차가 크고 양극화된 사회 현상과 이로 인한 사회적 불만과 불안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약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복지와 이로 인한 최소한의 생활 안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미국 외부의 적을 규정하고 적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재생산함으로써 사회적 불만을 무마하는 것, 그리하여 미국이라는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 자체를 공포와 분노에 두고 있다는 것, 이른바 '공포로 통치하는 사회'라는 사실이 이러한 비극을 계속 발생케 한다는 것이다(*'공포로 통치하는 사회'가 미국에 국한되는 건 아니다).


  
  .
분열되고 파편화된 세상이 문제

만약 이번 사건이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우리는 주인공의 행동에 대한 심리적 개연성이 없다며 비판할 것이고, 혹자들은 하필 범인을 한국인으로 상정한 것에 대해 감독이 혹시 인종차별주의자인지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이것은 영화에 불과하다"며, 더욱이 "바다 건너 먼 나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며 안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이란 이성과 논리에 근거에 행동하려 하고,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우리와는 다른 매우 특수한 사람,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 믿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인간 고유의 의지가 아니라 악마가 들려서, 혹은 귀신이 씌여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라는 등등 수많은 바깥의 이유들을 찾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일지 모르며 내 자신조차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불신과 공포, 불안에 휩싸이기 때문이다(*기자는 '우리 모두가 조승희이다'라는 결론을 암시하려는 듯한데,  그건 과잉 일반화이며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다. 가해자-피해자의 관계를 그저 우연적인 것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조승희도 인간이다'에 나는 동의하지만 '모든 인간/한국인은 조승희다'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좀더 공포를 느끼지만 그것이 '총기 난사' 사건인 경우, 총기 소지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남의 나라 현실이라 믿으며 애써 무관심한 척할 수도 있다. 사실 총기가 엄격히 금지된 한국사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미국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총기난사 사건은 낯설고 두려운,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은 범인이 한국계로 밝혀지고 범행동기가 (누구나 평생 무수히 겪는) 여자친구와의 불화 때문인 듯하다는 잠정 수사결과가 전해지면서, 우리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총기난사 사고'에 무관심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두 번씩은 자신이 저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탈의 경험을 하고, 이에 대한 죄책감 한두 가지씩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일탈이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범죄'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들은 분명히 있다. 이런 비극은 분명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고, 그 사람은 그가 속한 사회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 우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러한 풍요는 모두에게 주어진 것도 아니며, 물질의 풍요로움이 마음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롭고 힘든, 분절되고 파편화된 세상, 각종 통신수단은 눈부시게 발달했지만 여전히 (혹은 오히려 더욱 심화된)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세상을 견디어나가고 있다.
  
이 고통을 타인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 탓으로 돌릴 때, 그리고 타인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사물'로 여겨질 때, 그 사회는 위험 수위로 가까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건에 정말로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한국사회를 포함해 전세계 거의 모든 사회가 이미 이런 위험 수위에 다달은 현대사회라는 점을 우리가 알고있기 때문이다(*이번 사건의 경우에 범인은 '외톨이'로서 갖는 사회적 적개심을 여러 차례 징후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만사지탄이지만 주변에서 그러한 '신호들'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유사한 '신호들'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친구의 자살을 막지 못했던 기억이 겹쳐진다).

그런 상황에서 오로지 생명을 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주변에 널려 있어 누구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런 비극은 몇번이고 반복해서 발생할 수 있다(*짐작에 한국에서 총기 소지가 허영된다면 미국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총기난사사건'과 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비극을 보며 지나치게 범인을 동정할 필요도, 그럼에도 그저 정신나간 특정인의 소행으로만 돌리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건으로 치부하고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먼 나라에서 벌어진 일일지라도 우리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김숙현 기자) 

경향신문(07. 04. 20) 고립된 자아·폭력문화가 빚은 ‘저주의 복수극’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 새로운 각도에서 주목 받고 있다. 조승희씨(23)가 NBC에 보낸 우편물에서 ‘콜롬바인 총기난사’ 등 과거 참사들과의 유사성이나 영화·게임 등 대중문화의 폭력적 요소들이 곳곳에서 감지되면서다. 미국 언론들은 조씨가 동영상·사진·텍스트 등 다양한 미디어를 동원한 점에서 ‘multimedia manifesto(복합미디어 선언문)’로 이름짓기도 했다. 고립된 자아와 폭력문화가 결합한 ‘병리(病理)적’ 모방범죄일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조씨의 ‘선언문’과 행적에서 드러난 4가지 모방성을 살펴봤다.



◇ 유나보머 테러…범죄 합리화 ‘우편물 발송’유사
조씨의 범행수법이 ‘유나보머(Unabomber) 테러’로 불리는 연쇄 편지폭탄 테러범 시어더 카진스키와 흡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버드대 출신의 수학 천재로 버클리대 교수였던 카진스키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16차례에 걸친 소포폭탄 테러로 3명을 숨지게 하고 23명에게 부상을 입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문명혐오주의자인 그는 ‘유나보머 선언문’으로 명명된 ‘산업 사회와 미래’라는 제목의 편지로 자신의 범행이 현대기술 문명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로 과학기술과 관련 있는 대학(University)과 항공사(Airline)에 폭탄을 보내 ‘유나보머’란 별명이 붙었다(*국내에는 '유나바머'라고 소개됐다).

조씨가 ‘선언문’에서 현대사회의 ‘물질만능’과 ‘탐욕’, ‘쾌락주의’에 대한 징벌을 범행의 명분으로 삼았다. 조씨는 “너는 벤츠로도 부족했지. 속물 덩어리 너는 금목걸이로도 만족하지 못했어. 보드카, 코냑도 충분하지 않았고 그 모든 향락에도 너는 만족하지 않았어. 이 모든 것이 너의 쾌락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거야”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너(You)’는 미국 사회를 지칭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조씨가 범행 전 언론 매체에 범행의 명분을 주장하는 ‘선언문’ 형태의 우편물을 보낸 수법도 유사하다. 그 점에서 전문가들은 “조씨가 오랫동안 고립된 채로 생활하면서 세상을 자신만의 좁은 시각에서 보는 편집증이 있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김광호기자)



◇ 영화 ‘올드보이’…증오찬 표정·망치 사진 흡사
‘복수’를 모티브로 한 한국영화 ‘올드 보이’ 장면들과의 유사성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18일 ‘조씨가 NBC에 보낸 사진 중 가장 불가해한 사진의 영감은 칸영화제 대상을 받은 한국영화에서 온 것 같다’고 전했다. 바로 조씨가 ‘망치’를 들고 위협하는 사진이다. 실제 조씨의 사진과 영화 속 주인공 대수(영화배우 최민식)의 사진은 망치를 치켜든 손의 위치와 방향, 팔의 각도, 증오가 가득 찬 표정 등이 놀랍도록 닮았다. 뉴욕타임스는 “두 사진의 포즈는 유사하고, 영화의 구성(plot)은 더 살펴볼 가치가 있을 만큼 음울하다”고 평가했다.

영화는 평범한 회사원 대수가 납치를 당해 15년간 감금당한 뒤 풀려나, 감금 당한 이유를 더듬어가면서 복수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조씨가 권총 자살을 암시한 사진처럼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 머리 관자놀이 부분에 권총을 쏘아 자살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뉴욕타임스는 평론가 마놀라 다기스의 말을 인용, “영화의 사망자 수와 가학적 폭력은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의 차이를 분간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컬트 영화광들에게 어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NBC는 조씨가 총을 겨누는 장면이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니로를 연상시킨다고 보도하는 등 미국 언론들은 조씨의 사진들이 대부분 각종 영화 장면을 모방한 것으로 분석했다. ‘택시 드라이버’는 외롭고 소외된 주인공이 결국 분노를 폭발시킨다는 내용이다(*조승희는 범행 몇 주 전부터 머리를 짧게 깎고 근육을 단련했다고 한다). 버지니아 공대 폴 해릴 교수는 두 장면의 유사성을 통해 조씨가 32명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도록 한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기를 바랐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김광호기자)



◇ 콜롬바인 총기사건…범행 당일 행동 태연
조씨는 ‘선언문’에서 1999년 4월 발생한 콜롬바인 고교 총기사건의 주범인 에릭 해리스와 딜란 클레볼드를 ‘순교자(martyr)’로 표현했다. 바로 오는 21일이 이 사건의 8주기 추모일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조씨의 범행은 계획적인 것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미국 콜로라도주 콜롬바인 고교에서 일어난 사건 당시 평범한 고교생이던 에릭과 딜란은 도서관에서 900여 발의 총알을 난사,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특별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조씨가 사건 당일 아침 평소처럼 평온한 일상을 시작한 것처럼 에릭과 딜란도 사건 당일 오전 태연하게 볼링 수업을 듣기도 했다.

영화 ‘화씨 9·11’의 감독 마이클 무어는 2002년 이 점에 착안, 다큐멘터리 영화 ‘볼링 포 콜롬바인’을 만들었다. 사건의 뿌리가 미국 정부의 느슨한 총기 규제에 있다는 점을 정면 비판하면서, 공포를 조장해 권력을 유지하는 미국 정치의 폭력성을 고발했다. 동영상 곳곳에서 조씨가 “너는 내 가슴을 짓밟고 영혼을 능욕했으며, 양심을 불로 지졌다”고 알 수 없는 폭력과 모욕, 고통을 호소한 대목과 묘하게 중첩된다. 따라서 조씨는 에릭과 딜란에 대한 언급을 통해 이들에 대한 정서적 공감을 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물론 영화의 프리즘을 통해 걸러진 관점에서다. 실제 조씨는 ‘선언문’에서 “나는 약자들과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는다”고 스스로를 순교자로 묘사했다.(김광호기자)



◇ 비디어 FPS게임…가상공간의 사격게임 하듯이 몰입

권총 두 자루를 휴대하고 눈에 띄는 대로 상대방을 살해한 조승희씨의 범행 방식은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FPS게임(First Point Shooting, 1인칭 사격 게임)과 유사하다. FPS게임이란 게이머가 주인공이 되어 화면에 나타나는 적을 제거하는 사격 게임의 일종으로 1인칭 시점으로 게임이 진행되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가상공간 안에서 직접 전투를 벌이는 듯한 몰입감이 특징이다.

미 경찰은 16일 오전 7시15분쯤 기숙사에서 두 사람을 살해한 조씨가 600여m 떨어진 노리스 홀(공학부 건물)에서 2차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오전 9시46분쯤 노리스 홀에 들어선 조씨는 206호 강의실을 시작으로 복도와 강의실을 휘저으며 30여분동안 동안 엄청난 양의 탄약을 쏟아부으며 기계적으로 발포했다. 목격자들은 조씨가 “탄창이 주렁주렁 매달린 조끼를 입고 있었으며 시종일관 침착하게 범행을 저질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번 사건이 미로처럼 굽어진 복도와 복잡한 방들을 지나 상대방을 ‘섬멸’하는 것이 목적인 FPS게임과 닮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장갑을 끼고 쉴 새 없이 탄창을 갈아끼워가며 권총을 난사하는 이른바 ‘쌍권총 모드(mode)’다. 공교롭게도 조씨가 범행에 사용한 글록 9㎜ 권총은 FPS게임에서 소(小)화기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모델이기도 하다. 범행 당일 NBC사에 보내진 조씨의 영상과 사진이 공개된 뒤 인터넷에서는 ‘유명 FPS게임의 테러범 복장과 유사하다’는 네티즌들의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이호준기자)

07. 04. 18-19.

P.S. 참고로, 조승희씨의 지도교수는 “그는 내게 너무 외롭다고 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0704/h2007041918355222470.htm). 그리고 한 정신과 의사의 분석은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5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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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7-04-19 00:21   좋아요 0 | URL
좋은 인용글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이 사건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로쟈 2007-04-19 08:21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아침뉴스를 보니까 또 NBC에 보냈다는 편지와 비디오테입 얘기가 나오네요. 사건 전모는 곧 밝혀지겠지만 더 두고봐야겠습니다...

비로그인 2007-04-19 09:16   좋아요 0 | URL
로쟈님, 잘 읽었습니다. 관련한 페이퍼도 더 올려주시길 기대합니다.

이네파벨 2007-04-19 12:00   좋아요 0 | URL
nature vs. nurture 논쟁이 생각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nature...범인이 기질적인 정신병질자(psychopath, sociopath)였다는데 한 표...입니다.
어릴때부터 자폐적인 성향이 있었다고 하고..환경이 아무리 힘들고 불우하다고 해서 정상적인 사람은 이런 행동을 할 수 없다고 믿어요.
사회구조적 문제..환경(크게 보아 nurture)의 문제도 물론 없지 않겠지요.
하지만 환경의 경우 "총기소유허용"이 단독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총기소유가 법적으로 허용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왜 미국에서 유독 이런 사건이 일어나느냐...?를 분석하려면 법적 허용여부뿐만 아니라 유통 상황, 접근의 용이성 여부 등 좀 더 심층적인 분석이 있어야 할 듯 하고요.
빈부격차, 불평등, 소외 등의 문제라면...솔직히 중국의 파렴치한 신흥부자들을 죄다 들고 일어나 처형하지 않는 중국의 가난한 인민들이 오히려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지요.(과장법인거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미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문제, 악덕 등을 모르는 것 아니지만...
지금 이 사건에 그걸 들이대서 마치 범인의 성명서의 주장에 동조하듯 빈부격차 등 "미국"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식으로 몰고가는 것은..
미국인들이 범인이 한국계라는걸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문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시각도 필요하겠지만 수십명이 무고하게 죽은 상황에서 말을 아껴야할 때가 아닌지................

pax 2007-04-19 13:43   좋아요 0 | URL
그렇다고 위 기사가 방정맞게 범인의 성명에 동조하며, 무고하게 죽은 수십명의 고인들에게 누를 끼치는 말을 막 해대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분석의 정확성에는 언제나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겠지만 말입니다.......

로쟈 2007-04-19 23:51   좋아요 0 | URL
체셔고양2님/ 이미 심층분석기사들이 넘쳐나기에 제가 더 보탤 말은 없습니다...
이네파벨님/ 공감합니다. 자폐적 우울증자의 공격성이 밖으로 표출된 게 아닌가 싶어요...
paxwonik님/ 기사의 대체적인 논조에 저는 동의합니다. 다만, 우리의 책임을 '잠재적 가해자'로서의 죄의식/동류의식에서 찾는 건 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부 2007-04-20 03:57   좋아요 0 | URL
음 선뜻 '동의한다' 고 말하기 망설여지는게 있는데요.. 이네파벨님 입장을 읽으니까 이건 마치 데칼코마니적인 난감함이 어지럽게 만드는 군요.
이네파벨님 생각을 반대로 대칭시켜도 똑같이 적용되고 말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기질적인 정신병자들이라고 해서 어느 곳에서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고는 못믿겠습니다.개인적 기질의 문제도 물론 없지 않겠지만, 우울증자가 공격적 성향이 무시무시한 폭력성으로 표출될 가능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사건에 정신병자의 병리적 행위라는 임상적 측면만을 강조해서 비 이성적 개인의 광기가 결정적 원인이라고 몰고가 버리는 것은
역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또한 수십명이 무고하게 죽은 상황에서 우리의 책임은 없고 단지 광기에 빠진 개인때문에 벌어진 비운의 사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 될테니 그런 주장 또한 말을 아껴야 하지 않을까요. 라는,

어부 2007-04-20 03:43   좋아요 0 | URL
이것도 저것도 결국 같은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까 한다는 거죠. 이런 일이 있을때마다 원인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려는 태도가 그렇습니다. 사후에 원인을 규명하려는 매체들의 법석들은 꼭 사건의 생명은 사라진 사체의 고깃점들을 하나씩 물어뜯으며 게걸스럽게 각자 뜯은 부위를 들이미는 까마귀떼들 같습니다. 이런 원인분석의 태도는 결국 말하고 있는 우리들을 괄호치기 위해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정신병자의 비 이성적 광기의 결과라는 식의 결론. 결국 '타자'의 행위라는.. 이곳에 대한 알리바이 들이대기. 뭐, 그렇다고 마이클 무어식의 침튀기기가 뭔가 뾰족한 결론을 불러온다고도 생각 안합니다.

어부 2007-04-20 03:58   좋아요 0 | URL
<엘리펀트>는 좀 다르게 생각해보려 했던것 같은데요. 진실은 알 수 없다, 뭐 그런 라쇼몽 스토리로 읽는다면 중요한 어떤 것을 놓치지 않을까 싶네요. 이 비극에 대해 윤리적으로 접근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를 붙들고 고민하려는.. 그건 어떤 '원인으로 사태의 전체를 환하게 만들기'를 지양하는게 아닐까 하는 건데요. 그거야말로 그 사건으로부터 우리, 혹은 나를 안전지대로 데리고 오려는 의도일 수도 있을테니까요. 인과논리 뒤에서 실은 그냥 안심하기.
저한테 아직도 정말 서늘하게 남아 있던건 인터넷 초기화면 주요 뉴스에 올라온 조씨의 증명사진 이미지였는데 그건 9.11 테러 무역센터 건물 이미지처럼 늘 본 이미지에 실재가 딱 침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곧바로 그를 드라마틱하게 비일상적 타자로 밝혀 내는 다른 이미지들에 그 구멍은 금방 메꿔지긴 했지만..
이 익숙한 낯섬을 다시 낯선 익숙함으로 되돌리는 태도가 필요한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윤리21>을 좀 다시 읽어 봐야 하겠네요. 중반 이후에 건성으로 읽고 넘어갔는데, 원인과 책임의 윤리에 대해 아주 좋은 지침을 줬던걸로 기억하거든요..-_-

이네파벨 2007-04-20 07:26   좋아요 0 | URL

좋은 논의, 반론 감사합니다.

같은 사건을 보아도...평소 알 던 대로..평소 관심사대로 해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분명 그런 쪽으로 치우쳤을 거구요....

거기에는 예전에 읽은 두 권의 책 (번역자가 지인이라 선물받아 읽은 책이죠.)도 무관치 않을거예요.

  요 두 권의 책을 보면......대량살인이나 연쇄살인 등을 저지른 범인들은 보통사람들과 절대로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행동에 들이대는 잣대를 들이대서 인과관계를 해석할 수 없다는 확신을 주지요.....

저 역시 예전에는 이런 현실에 대해 믿고싶지도 믿지도 않았는데...세상을 살면 살수록 심각한 정신적 불구로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르는 "괴물"같은 사람들이 있다는데 공감하게 됩니다.  예전에 유영철 사건도 그렇구요...

꼭 살인자, 방화자 등 엄청난 파괴와 폭력을 가져오는 범인들뿐만 아니라 (이들은 어쩌면 자기파괴적이라는 면에서 일말의 동정심을 사기도 하지요.) 다른 이들을 교묘하게 착취와 이용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도...정도는 다르지만 기질적 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쿠야마의 이 책을 보면 인간의 여러 특성 (키나 체중 등 신체적 특성, 운동능력, 지능 등등 정도를 따질 수 있는 속성들)을 통계적으로 분석하는 이야기가 나왔던걸로 기억해요. (하도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예컨대 사람의 키를 보자면...성인을 기준으로 2m가 넘는 사람도 있고 140cm가 안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균적인 키의 수치에 분포하겠지요. 이걸 그래프로 나타내자면 종형곡선(벨커브)을 나타내게 될 거구요.

 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속성들도 통계적으로 이런 분포를 나타내겠지요...(벨커브 하니 우생학 논란을 연상시킬까봐 두렵네요. 그 주장의 모순과 무관하다는건 이해하시겠죠? 인종차가 문제의 핵심이었던 것이지요.)

아무튼...겉으로 드러나는 특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적 기질(성격)이나 특성에도 이런 통계적 분포를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감정이입 능력, 공감 능력, 타인에 대한 배려, 이타심 (또는 자기중심성, 폭력성, 이기심...) 등을 가설적으로 수치화해서 그래프로 나타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정도...벨 커브의 불룩한 산 아래 분포하겠지만 일부 사람들은 양끝에 위치할 겁니다. 한쪽 끝에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감정이입이 지나쳐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던 고타마 싯다르타, 시몬느 베이유, 테레사 수녀 등이 있을거고 다른쪽 끝에는 유명한 연쇄살인범들, 히틀러 폴포트 등이 있겠지요. (결국 도덕은 동기나 원인보다는 그 사람의 "행위"와 그 결과로 판단해야 한다는게 제 생각이구요. 그렇지 않다면 판단 자체가 불가능해질거구요...)

이런 통계적 상황은 어쩌면..........환경적인 측면만으로 개선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현대과학이 nature vs, nurture의 논쟁에서 nature쪽으로 무게추가 기울어진다는 느낌을 숨길 수 없고 설사 중간 어느 지점에서 만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기질적, 선천적 문제적 인간들은 존재할 겁니다. 또한 인간의 형성에 환경적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구요............(물론 노력은 해야되겠지요.)

이런 인식이 저만의 것은 아닐진대....저는 오히려 그에 대한 심각한 부작용...이를테면 반사회적 정신병질자(psychopath)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우리가 상상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 (감시의 강화 사생활의 축소 유전자 검사 및 라벨링 등등)를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고민이 떠오릅니다.

제가 너무 앞서가나요? 그럴 수도 있죠. 가장 먼저 해야될, 할 수 있는 조치 (총기규제)도 안이루어지는 판에 말입니다.....^^

아무튼...제가 꼴통같은 얘기를 늘어놓았는지도 모르겠는데요....나이 드니까..애 키우니까..점점 보수적이고 현실적으로 변해가는걸 느낍니다. 이를테면 유괴범들 (이놈들도 양심과 감정이입이 결여된 괴물들이죠.) 어린이 성범죄자들 (ditto) 유영철 등등은 네거리에 잡아놓고 돌팔매질을 해야된다고 생각하는........

벨 커브의 중간쯤에 위치한 평범한 인간인 저로서는 범죄자들에게까지 감정이입이나 동정의 시선을 보낼만한 인격은 안되구요...그저 "tit for tat",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도덕률을 신봉하게 됩니다.


다락방 2007-04-21 23:33   좋아요 0 | URL
이 사건을 접하고 [엘리펀트]를 떠올렸던건 저 뿐만이 아니었군요. 흐음.

로쟈 2007-04-21 23:51   좋아요 0 | URL
사실 조승희 자신이 떠올린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