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2117762)에서 수잔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성대출판부, 2008)을 언급한 바 있다. 독서 계획을 계속 미뤄둘 수만은 없어서 손에 들었는데, 책은 생각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물론 책에 실린 이미지들만 훑어보아도 공부가 되긴 한다). 찾아보니 부산일보에만 리뷰기사가 실린 듯하데, 참고삼아 미리 읽어보는 게 좋겠다(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8/0517/060020080517.1016090128.html). 지나가는 김에 지적하자면 국역본의 표지는 제목과 달리 너무 밋밋하다.

부산일보(08. 05. 17) 대중 유토피아의 꿈은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책 머리에 쥘 미슐레의 금언이 새겨져 있다. "모든 시대는 다음 시대를 꿈꾼다." 책을 다 훑고 나면 이 금언이 다시 떠오른다. 꿈은 으레 희망의 다른 표현일테다. '꿈의 세계와 파국'(수잔 벅-모스/윤일성·김주영 옮김/경성대출판부/3만원)은 냉전 이후를 어떻게 바라볼까에 대한 대중 통찰서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패배와 자본주의의 승리'로 쉽게 단정짓고 싶어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부한다. "20세기에 대한 평가는 승자의 손에 남겨져서는 안된다는 경고에 주목하라.(16쪽 '서문' 중에서)"

그 이유가 이렇다. "대중을 회유하는 '꿈의 세계'에 의해 초래된 위험들이 아니라, 지구적 권력의 현재 시스템에서 대중을 회유할 필요가 있다는 이념조차 유행에 뒤쳐진 것으로 던져버리는 사실에 의해 야기되는 '새로운' 위험들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320쪽 '삶의 시간, 역사적 시간' 중에서)"



책은 제목처럼 꿈을 다룬다. 하지만 일상의 꿈이 아니라 '대중'이라는 집단이 환각적으로 빠져든 공상에 대한 논의다. 물론 대중은 정치적 성향이 결여된 과거의 군중(mob)과 구분된다. 새로운 세상을 거침없이 지향하는 '강력한(?)' 집단이다. 그리고 그 대중의 꿈과 함께 20세기가 시작됐다고 책은 전제한다. 그 꿈의 실현이 대중 유토피아다.

하지만 정치 지형에 따라 선택된 도구는 달랐다. 대중 유토피아의 실천 도구로써 동구는 사회주의를, 서구는 자본주의를 채택했다. 100년의 실험(냉전)이 이뤄졌고, 그 실험이 끝날 무렵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실패,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성급히 결정했다.



그렇다면 '승자'로 분류된 자본주의 사회는 대중 유토피아를 실현시켰을까. 책은 이에대해 자본주의 사회에 유령처럼 떠도는 몇 개의 단어를 불쑥 들이댄다. '세계 전쟁… 대량 테러… 노동 착취…등…'. 누가 이런 단어에서 유토피아를 떠올릴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도 결국 예정된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반증일테다. "대중 유토피아의 꿈은 제2세계(사회주의)에서 실패한 것으로 선언됐고, 제1세계(자본주의)에서도 의도적으로 포기됐다.(321쪽)"

책은 이 같은 주장을 반증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굳어진 모스크바와 뉴욕을 부지런히 오가며 교차 분석한다. 그런 분석 틀의 상당수가 이미지다. 저자는 "그림과 사진, 영화 포스트 등이 20세기를 통찰하는 도구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사물이 실제로 어떠했는가보다 그 사물들이 과거와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더 유효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이 같은 이미지 분석을 통해 소비에트 모더니즘이 서구 모더니즘과 꾸준히 연결돼 있었다는 '예견된' 사실을 증명한다. 소련 중앙노동연구소의 핵심 연구 주제가 자본주의 상징이자 노동을 철저히 기계화한 미국 테일러 작업방식이었다(138쪽)는 것. 할리우드의 상징인 '영화 킹콩' 포스트와 거대한 레닌 동상이 올려진 모스크바 소비에트 궁전 설계안이 경악스러울만큼 닮았다(213쪽)는 것.

이쯤되면 그의 주장을 거부할 명분 찾기가 꽤 힘들어 진다. 저자는 결국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는 자본주의를 너무 충실히 모방했기 때문(16쪽 '서문' 중에서)"이라고 결론내린다. 사회주의를 망친 것은 사회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운용한 주체들의 자본주의화된 계산법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책은 사회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을, 자본주의에 대한 '최대한의' 경계를 전제로 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 하나! 우리의 미래는? 20세기 내내 견지해온 대중 유토피아의 꿈은 이제 포기해야 하나? "우리는 기존의 집단 정체성 대신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322쪽)" 꿈은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저자는 20세기 유럽 지성을 대표하는 발터 벤야민(마르크스 문학평론가 겸 철학자) 연구자로 최근 명성을 얻고 있는 미국의 프랑크푸르트학파 여성학자다. 지난 2004년에는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2004년/문학동네)가 국내 소개된 바 있다.(백현충 기자)

08. 06. 28.

P.S. 책이 더디게 읽히는 건 부자연스러운데다가 약간씩 핀트가 안 맞는 번역 때문이다. 가령 1장의 첫문장은 이렇다. "20세기 말이라는 전망에서 제기되는 하나의 역설은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대중의 이름으로 통치하기를 요구하는 - 즉, 급진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 정치체제는 대중의 통치를 넘어서는 권력의 행사가 이루어지는 지대를 합법적으로 구성하는데, 그곳에서 공중의 응시와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베일에 가려지게 되었다."(20쪽)

이것은 다음 문장을 옮긴 것이다. "From the perspective of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the paradox seems irrefutable that political regimes claiming to rule in the name of the masses - claiming, that is, to be radically democratic - construct, legimately, a terrain in which the exercise of power is out of control of the masses, veiled from public scrutiny, arbitrary and absolute."(2쪽)

요점을 간추리면, 대중에 의한 지배를 명분으로 내건 급진 민주주의적 정치제체가 정작 대중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권력을 낳았다는 것이고, 돌이켜보건대 이 점이 20세기의 역설이라는 것이다. 한데, "a terrain in which the exercise of power is out of control of the masses, veiled from public scrutiny, arbitrary and absolute."라는 문장 뒷부분에서 국역본은 'arbitrary and absolute'라는 보어가 모두 'veiled from'에 걸리는 것으로 잘못 보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공중의 응시와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베일에 가려지게 되었다"는 어색한 번역이 나오게 된 것('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원문에서 찾을 수 없다). 'veiled from public scrutiny'는 삽입구이므로 "a terrain in which the exercise of power is out of control of the masses, arbitrary and absolute." 라고 보는 게 편하겠다. 무소불위의 권력지대에서의 권력 행사는 대중의 통제를 벗어나서 자의적이고 절대적이었다는 것. 이 '권럭지대'를 저자는 'wild zone of power'라고 부른다(국역본은 '권력의 야만지역'이라고 옮겼다). 

저자는 그러한 경향이 자유민주주의에서건 사회주의에서건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결국 최고 주권의 권력 체제로서 그것들은 반드시 민주주의보다 벌써 훨씬 더 -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당히 나쁘게 된다." 이 또한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원문은 "Either way, as regimes of supreme, sovereign power, they are always, already more than a democracy - and consequently a good deal less."(3쪽)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어느 쪽이건 간에, 최고 주권의 권력체제로서 두 체제는 모두 이미, 언제나 민주주의를 뛰어넘었고, 결과적으론 민주주의에 훨씬 못 미쳤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다. 둘다 민주주의 그 이상이었고 동시에 그 이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과 소련의 '대중유토피아'를 비교해서 다루고 있는 만큼 러시아의 철학자들의 이름도 책에도 곧잘 등장하여 반갑다. '마마르다쉬빌리'(국역본은 '마마다쉬빌리'라고 표기했다)나 '발레리 포도로가' 같은 이름들이 그렇다. 그리스계 프랑스철학자 '카스토리아디스'의 이름도 오랜만에 볼 수 있는데, 책에는 '카스토리아스(Castoriades)'라고 오기돼 있다(23쪽). 찾아보니 벅 모스의 원서 자체에 그렇게 잘못 표기돼 있다. 카스토리아디스의 주저인 <사회의 상상적 제도1>(문예출판사, 1994)는 국내에 일부만 번역된 적이 있는데, 마저 다 번역될 수는 없는 것일까, 문득 유감스럽다. 아래는 러시아어본이다.

Корнелиус Касториадис Воображаемое установление общества L'institution imaginaire de la soci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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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7-0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bitrary snd absolute가 문법책에 나오는 유사보어(다른 용어도 있는 것 같은데)여서 권력행사에 연결되고 veiled from public scrutiny는 분사구문 삽입으로 보면 되겠죠?

로쟈 2008-07-02 00:11   좋아요 0 | URL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0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영어공부를 옹골차게 하게 됩니다.

로쟈 2008-07-02 23:27   좋아요 0 | URL
^^
 

이번주 한겨레21을 어제서야 손에 들었다. 배송 시간이 평소보다 좀 더 걸린 셈인데, 덕분에 경제학자 우석훈의 신간 리뷰도 좀 뒤늦게 읽었다(<촌놈들의 대한민국>은 그 전에 이미 읽은 것이니 나로선 책을 리뷰보다도 먼저 읽은 드문 사례다). "진중권이 경제학을 전공했다면 우석훈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시작하는 리뷰다(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8/06/021015000200806260716040.html). 어느새 두 사람은 우리시대 젊은 지식인의 확실한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다(진중권은 물론 진작부터 베스트셀러 저자였지만, 촛불집회에서의 '활약'은 그의 상징성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다). 신간소개라고 하기엔 너무 뒤늦은 기사이지만 '뒷북'으로 챙겨놓는다...

한겨레21(08. 06. 26) 불도저의 묵시록

진중권이 경제학을 전공했다면 우석훈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지금 교양과 재치로 무장하고 엄청나게 많은 글을 쏟아내는 경제학자를 보고 있다. 그의 펜끝은 늘 대중을 향해 있다. 주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를 보는 건 확실히 즐거운 일이다. ‘글 잘 쓰는 경제학자’는 멸종 위기의 희귀종에 가까우니까.

대중적 설득력을 갖춘 경제학자를 꼽아본다면(잘 안 꼽아지겠지만), 엄지손가락은 장하준 교수 차지일 것이다. 장하준의 글은 매우 우아하면서도 교양과 풍부한 논거들로 무장돼 있다. 장하준과 우석훈의 차이는 밀도와 면적에 있다. 장하준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성장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 경제학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다. 그의 글은 매우 밀도가 높다. 우석훈은 틈만 나면 경제학을 벗어나서 세상만사에 끼어든다. 그의 글은 면적이 넓다.



청계천, 거대한 어항
우석훈, 이 놀라운 에너지를 가진 경제학자가 거의 동시에 두 권의 책을 냈다. 일종의 시평집인 <직선들의 대한민국>(웅진지식하우스 펴냄, 1만2천원)과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인 <촌놈들의 제국주의>(개마고원 펴냄, 1만2천원)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에서 ‘직선’은 불도저로 상징되는 건설공화국이다. 이는 청계천을 거대한 어항으로 만들어놓고 생태 복원이라 부르는 우리 마음의 구조와 맞닿아 있다. 전기로 모터를 돌려 끌어온 물을 다시 한강으로 흘려보내는 청계천은 비만 오면 오염물질이 한꺼번에 청계천으로 흐르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다. 그러면 죽은 물고기들을 걷어내고 또다시 물고기들을 방류한다. 청계천이 제대로 복원될 때까지 끝없이 반복될 숨바꼭질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외형적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직선’의 단면을 더 살펴보자. 집 없는 사람들이 집값이 오르면 환호한다. 뉴타운은 현재까지의 경향으로 보면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의 10% 정도만 다시 입주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도심에서 더 먼 곳이나 주거환경이 더 나쁜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뉴타운 계획이 알려지면 모두들 기뻐 날뛴다. 신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토호들의 놀이터’가 돼버린 지방을 보면 더 심각하다. 이장한테 도장을 맡겨놓고 사는 순박한 주민들은 토호들의 이익을 위해 토지를 팔아치우는 데 동의한다. 한국의 도시화율은 이미 선진국을 뛰어넘었고,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수도권에 모든 재화를 집중시키고 있다. 이런 ‘직선’적인 힘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운하 발상에서 정점을 이룬다.

왜 이런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이 땅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선택은 경제적 합리성으로 설명될 수 없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우석훈은 경제학자의 영토를 뛰쳐나간다. 그는 건설공화국이 유지·강화되는 원인을 시대 정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즉, ‘건설 미학’이 한국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청계천을 찬양하거나 집 없는 사람들이 뉴타운 건설을 환영하는 이유는 경제적 합리성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미학이 투기와 결합되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파천황’이 된다. 그러므로 ‘건설 미학’을 ‘생태 미학’으로 대체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대안이다. 그는 건설 미학이 한반도 대운하 발상에서 정점에 이르렀지만, 그 때문에 새로운 사유를 할 공간이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 생태도시로의 전환, 생협 네트워크 등은 진행 중인 움직임이다. 그는 “주제넘은 이야기를 하는 김에” 건축·문학·음악·영화의 ‘생태 미학’까지 참견한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수출 지향, 에너지 소비 지향, 건설 지향의 한국 경제가 내적 불균형 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국익’을 앞세운 이라크 파병에서 보듯, 이제 한국 경제는 해외 영토를 갈망하고 있다. 즉, 제국주의의 길로 나서고 있다. 이게 ‘촌놈들의 제국주의’인 이유는 식민지도 없고 식민지를 거느릴 능력도 없으면서 끊임없는 정복욕과 증오를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징후들의 집합이다. 우석훈은 우리 사회·경제 내부에서 제국주의의 징후들을 계속 끄집어낸다. 제국주의의 문화적 형태는 ‘수출주의’인데 한류 열풍을 지나 황우석 사건에서 절정을 맞는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미 제국주의의 등에 올라타 영토를 확장하려는 사람들의 욕망도 읽는다. 또 촌스런 제국주의는 북한을 내부 식민화하려 한다. 한국 자본주의는 북한을 값싼 노동력의 공급처나 부동산 개발의 요람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경제 통합 과정에서 북방 진출을 향한 야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중·일의 증오는 더 커져가고 있다. 이들 국가의 소득 분포도는 중산층이 두터운 마름모꼴에서 중산층이 붕괴되는 8자형으로 바뀌고 있다. 에너지와 자원을 둘러싼 각축은 계속 치열해진다. 3국의 산업구조는 전쟁에서 이득을 볼 에너지산업과 건설산업의 비중이 크다. “결론적으로 한·중·일 세 나라가 30년이라는 시간 지평에서 전쟁을 피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우석훈은 이 끔찍한 미래를 막기 위해 평화라는 ‘공공재’의 가치를 되새기고 한·중·일 경제 통합의 밑그림을 그려본다. 무엇보다, 미래의 전쟁을 막는 일은 10대의 손에 있기 때문에 이들의 감성을 죽이는 ‘교육 파시즘’을 반드시 철폐해야 한다.

동아시아 3국의 전쟁이라고?
한국의 제국주의에서 시작해 3국의 전쟁 가능성까지 짚어보는 작업은 좀더 섬세하게 토론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매우 대담한 가설이다. 기본적으로 한국 자본주의가 성장 동력을 잃고 있으며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제국주의로의 전화에 대해 논의하려면 현재의 제국주의 개념에 대한 규정부터 시작해서 그것이 19세기 제국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또 제국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은 무엇인지 설명돼야 한다. 어쨌든 우석훈의 목표는 세밀한 개념 규정이 아니라 레모니 스니켓의 ‘불행 시리즈’ 같은 묵시록을 던져놓고 대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로 미래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는 또 경제학자의 영토를 벗어난다.

두 권의 책은 계속 어떤 이름 하나를 호출하고 있다. 이미 용서받은, 잊혀진, 심지어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이름, 노무현이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김대중 시대를 완화된 신자유주의로, 노무현 시대를 강화된 신자유주의로 규정한다. 두 시대를 거쳐오면서 건설 미학이 강화됐다.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노무현과 이명박 정권은 정책적으로 거의 비슷하다. 진보세력으로 분류됐던 강금실은 서울시장 선거 때 한강 하구 개발을 얘기했고, 정동영은 새만금 개발을 떠들었으며, 손학규는 경기도의 전면적 개발 붐을 주도했다. 우석훈은 노무현 지지세력 중 최악의 인물로 미학적 고민을 해야 할 임무를 방기해버린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을 들었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아예 한국의 제국주의적 욕망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노무현을 꼽고, 노무현 정권의 기반이 극우민족주의와 맞닿아 있었다고 주장한다.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정치·경제의 새로운 국면들을 이명박 대통령의 개성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은 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건 이명박 정권에 대한 과소평가다. 우석훈의 두 책은 한국의 불도저 정신과 제국주의가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현재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우리 사회를 묵시록으로 이끄는 힘의 봉인을 푸는 과정이었다. 이 힘의 해체를 위해선 이명박 개인의 독특한 인성만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유현산기자)

08. 06. 28.

P.S.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두 권 모두 문제제기적이면서 시의성이 돋보이는 책이다. 단, 약간의 아쉬움을 적자면, 먼저 "장하준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성장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 경제학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다. 그의 글은 매우 밀도가 높다. 우석훈은 틈만 나면 경제학을 벗어나서 세상만사에 끼어든다. 그의 글은 면적이 넓다."란 지적이 거꾸로 짚어주는 대로 우석훈의 글은 넓지만 밀도가 좀 약하다.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도 '평화경제학'이 필요하다는 제안에서 많이 나가지 않는다('전쟁산업'과 '평화산업'이란 그의 이분법이 얼마나 확실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평화에만 쓰이고 전쟁에는 쓰일 수 없는 물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는지?).

역시나 기자의 지적대로 "우석훈의 목표는 세밀한 개념 규정이 아니라 레모니 스니켓의 ‘불행 시리즈’ 같은 묵시록을 던져놓고 대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로 미래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는 또 경제학자의 영토를 벗어난다." 어쩌면 그는 새로운 경제학을 발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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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6-28 14:51   좋아요 0 | URL
<직선들의 대한민국>만 먼저 샀는데 기대됩니다. 카피가... ^^ 불도저 어쩌구.

로쟈 2008-06-29 10:37   좋아요 0 | URL
단숨에 읽히는 책들입니다.^^

biosculp 2008-06-28 18:02   좋아요 0 | URL
저자가 고딩까지 읽을수 있게 대상을 잡고 쓰던데요.
고진의 책도 고딩이 읽어주길 바란다고 번역본에서본것같으데,
촛불에서도 고딩여학생들의 힘이 컸고, 이명박 자율화된 교육체계에서
더 건강한 학생들이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한겨레 21에서는 촛불에 참여한
학생들 인터뷰도 뜨던데요.

로쟈 2008-06-29 10:38   좋아요 0 | URL
네, 저자가 희망을 다음 세대에(나) 거는 것 같습니다...
 

어젯밤에 약간 과음(?)을 한 탓에 오늘이 주말이란 걸 좀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봐야 '열심히 일한 당신, 주말엔 더 열심히!'족에 속하는지라(나름 천민이군!) 별로 득이 될 만한 깨달음은 아니지만, 덕분에 주말 북리뷰들을 다소 뒤늦게 둘러보았다. 정신이 확 깨게 하는 책은, 이번주에도 없었다. 나올 만한 책들이 계속 나오고 있을 뿐이고, 덕분에 안 읽은 책들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갈 따름. 책마다 사정은 다 달라서 별로 읽을 일이 없어보이는 책이지만 그래도 리뷰는 챙겨두고 싶은 책도 있다. 이번주에는 김석수 교수의 <한국 현대 실천철학>(돌베개, 2008) 같은 책이 그렇다. 한겨레에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95808.html). 

한겨레(08. 06. 28) 우리들의 일그러진 실천철학

“우리의 철학은 우리의 현실 속에도 없었고,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철학 속에도 없었다.” 조선의 신문학사는 이식문화의 역사라는 임화의 주장이 숱한 문학연구가들을 번민케 한 것처럼, 한국 현대철학사도 그렇다. 서양철학이 한반도에 들어온 지 100여년이 지났거니와, 그 시발점이 되는 기간이 일제 강점기였다는 것은 문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통의 단절이라는 ‘사상의 크레바스’를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폭압적 제국주의에 맞서야 한다는 당위는 “혁명하는 심장과 개혁하는 두뇌”를 필요로 했으므로 현실-이론의 거리를 좁혀 치열한 성찰을 하도록 사유의 형식을 빚어냈으나, 민족주의에 과도한 부하를 얹게 됨으로써 수입된 서구 이론에다 작위적으로 당대 현실을 끼워 맞추게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것은 철학의 근본 정신인 자유가 훼손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며 “현실의 한을 푸는 일에 철학이 동원되어 버리게 되면, 철학은 그 본래의 고유한 비판적 기능을 상실하기가 십상이다.” 자유와 비판 정신을 잃은 실천철학이 철학적 실천에 나설 때 어떤 결과를 불러들이는가. 지은이가 꼽은 문제적 인물은 열암 박종홍(1903~76)이다.

박종홍은 한국 실존주의의 효시라고 평가받는바 “어중간한 철학은 현실을 떠나버리지만 완전한 철학은 현실을 인도한다”라는 카를 야스퍼스의 문장을 인용하며 현실 참여를 부르짖었다. 6·25라는 참혹한 전쟁을 겪은 한국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으로 그는 실존주의를 끌어왔다. 그는 무엇보다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종홍이 내세운 ‘힘 있는 철학’은 현실의 모순을 관념적·주관적으로 극복해선 안 되며 ‘신체적 노작(勞作)’을 통해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실존철학의 주관성을 비판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를 개념화한 것이 향내·향외(내향·외향)이며 “향내적인 자각을 통하여 무(無)에 부딪쳐 다시 향외적으로 돌아오는 창조의 길”을 제시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 실용주의, 실존주의의 한계를 긋고 이것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에 섰다.

원전 분석을 통한 문헌학적 전문연구가 미흡했고, 학문의 본질에 대한 반성적 탐구에다 인접 학문과의 유대도 부족했다는 등의 한계가 있음에도 당대의 철학자들은 빈곤한 현실에 맞서 고군분투한 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 박종홍이 서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박종홍의 철학적 행보는 자율이 아니라 억압, 활력이 아니라 권력, 개인이 아니라 국가를 앞세우는 데 다다랐다. “눈물 바가지를 부숴버리고 열등감을 벗어나, 새날을 위해 싸워야 하며, 전진해야 한다”면서 ‘유신은 민족 중흥을 실현하려는 과제’라고 서슴없이 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철학적 파탄은 그가 제출한 ‘힘 있는 철학’에서 도출된 것으로 건설·창조의 논리가 민족주의·반공주의·국가주의와 궤도를 같이한 점에 원인이 있다.

극도로 가난하고 불안에 처한 조국을 근대화하려면 힘이 필요하며 그것은 국민의 의식을 ‘개조’해야 한다는 정열은 그 자체 현실 부정의 논리이지만, 이를 추동했던 박정희 정권의 정책과 부신(符信)처럼 들어맞으면서 역설적으로 유신의 정신적 토양에 밑거름이 돼 버린 것이다. 그 극단에 국민교육헌장이 있는바, 현실의 모순을 혁파해야 한다는 부정과 창조의 정신이 “새로운 사회적 인간 형성, 새로운 민족의 창조”로 굴절되고 만다. 이를 이어받은 것이 전두환 정권 아래서 “우리에게는 저항해야 할 체제가 없고 다 함께 옹립해나가야 할 국가가 있을 뿐”이라며 국민윤리 교육론을 부르짖은 이규호와, 북한이라는 미친개를 때려잡기 위해 몽둥이(무력)를 준비해야 한다며 새마을 운동을 공산주의에 맞서는 상응혁명으로 일컬은 김형효다.

1·2부 가운데 앞부분이 이와 같은 한국 현대철학자들의 서구 실천철학 수용 양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글들이다. 개인이 국가에 포섭돼 ‘자기 보존’(conatus essendi)을 위협받는 상황의 극명한 사례로 박종홍을 지목한 지은이는 그 대안으로 자율·인정·연대·자치의 개념을 제시한다. 칸트 전공자답게 그는 자신의 의지가 세운 주관적 원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도록 하고 그 법칙을 존경하며 지키는 ‘자율’(autonomy)의 원리를 거듭 강조한다. “스스로 법칙을 세워 그 법칙을 스스로 수행하는 자율의 세계야말로 인간의 자유와 평등 및 자립이 확보되는 사회”라는 믿음 때문이다. 박종홍이 멸사봉공을 말했다면 칸트는 개인의 사적 영역이 살아나 공론장을 만들어내는 활사개공(活私開公)을 지지한 셈이다. 지은이는 이 밖에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스피노자의 재해석, 신합리주의 등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철학 사조들을 줄줄이 불러들여 80년대 이후 한국의 현실에 대입해 보는 글들을 2부에 모았다.(전진식 기자)

08. 06. 28.

P.S. 서점에서 잠깐 책의 목차를 볼 때도 든 생각인데, '한국의 실천철학'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감이 오지 않는다. 리뷰를 읽고나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대표적인 '실천철학자'들에 대한 소개/비판과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스피노자의 재해석, 신합리주의 등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철학 사조들을 줄줄이 불러들여 80년대 이후 한국의 현실에 대입해 보는" 것이 어떻게 병치될 수 있을까?(그런 대입도 '실천철학'인가?) 교재형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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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정홍수의 첫 평론집 <소설의 고독>(창비, 2008)이 신간으로 올라와 있다. 등단 이후 12만에 묶은 것이라고 하니 과작의 소산에 가깝다. 덕분에 떠올리게 된 것이 지난 봄부터 출간된 몇 권의 평론집들이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뛰어난 감식안과 유려한 문체를 자랑하는 평론집들이 출간되어도 주목의 대상이 되는 일은 거의 없는 듯하다(하긴 '쇠고기' 탓으로 대부분의 문학/인문서들이 불황을 겪고 있다). 그런 탓인지 중견 비평가들의 평론집이 나오는 일도 점점 뜸해지고 있다. '근대문학의 종언'론에 대한 반론은 만만찮게 제시되었지만, 최근 몇 년간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 2006)보다 더 많이 팔린/읽힌 국내 비평서가 있는지 궁금하다. 이래저래 고독은 소설만의 것이 아니다. '비평의 소외'라고도 부름직한 이러한 고독이 말년의 증상인지 신생의 진통인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그럼에도 몇 권의 평론집은 기억해두면서...   

P.S. 관련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95813.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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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2008-06-28 10:32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경향신문 출연(?)을 축하드려요. 아는 분을 신문지면에서 만나니 반갑더라구요.

로쟈 2008-06-28 11:20   좋아요 0 | URL
무슨 기사인가 했네요.^^;
 

지난주 시사인의 칼럼이 문득 생각이 나서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10). '에세이스트' 김현진씨의 연재칼럼인데, '우리 안의 이명박'을 먼저 퇴진시키지 않는 한 '촛불 투쟁'은 승산이 없다고 주장한다. 시각 자체가 젊은 논객답지 않게 노숙(?)하다. 오래전에 읽은 칼럼마저 생각나게 한다(그래서 같이 옮겨놓는다).

시사인(08. 06. 17) '우리 안의 이명박’부터 몰아내자

청계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노래 부르고 자유롭게 발언을 하는 촛불 ‘문화제’ 때는 두세 번 참석했을 뿐이다. 부끄럽지만 광우병에 대한 위협을 피부로 실감하지 못했고, 내 이웃과 가족이 뇌에 구멍이 송송 뚫려 쓰러지게 될 거라는 상상은 SF영화처럼 낯설었다. 거리로 본격 뛰쳐나가기 시작한 것은 결국 5월24일 이후였다. 처음에 거리로 나섰을 때는 어리둥절했다. 8차선, 4차선 도로를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는 것이 현실 같지 않았다. 함께 걷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놀라워하면서도 불안해하고, 또 무슨 일이 생겨날지 몰라 두려워했다. 그렇게 강제 진압이 닥쳐왔다. 바로 그날 이후부터, 퇴근 후 물먹은 솜 같은 몸을 말 그대로 질질 끌어서라도 광화문에 갖다두게 되었다. 그래야 직성이 풀렸다. 광우병은 멀었으나 물대포는 가까웠으므로.

처음에 구호는 “고시 철회 협상 무효” “너나 먹어 미친 소”가 대부분이었지만, 폭력 진압이 거듭될수록 군중은 “이명박은 퇴진하라”를 외치기 시작했다. 배후세력이나 지도부 없이 비폭력을 외치며 거리로 나선 사람들이지만 이들을 공통으로 묶어주는 분모는 분명히 존재한다. 먹을거리에 대한 근심, 국민의 말을 듣지 않는 정부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강렬한 증오심이다. 그에게 표를 주지 않은 사람은 억울한 마음으로, 표를 주었거나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고해성사에 참여하듯 촛불을 켰다.

그는 2008년의 대한민국에서 실로 운명적인 대통령이다. 온갖 불가사의한 어두운 그림자를 끌어안은 그에게 너끈히 대통령 자리를 넘겨준 것은 진짜로 경제를 살릴 줄 믿었던 국민도 아니고, 극렬 보수 지역 사람도 아니고, 그날 나 몰라라 투표 용지를 외면하고 놀러 가버린 사람도 아니다. 그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준 범인은 우리 안의 속물성이다. ‘내 아파트 값도 좀 확 뛰었으면’ ‘우리 아이는 자립형 사립고에 가고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으면’ ‘나도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이명박처럼 한가락하고 싶다, 아니면 내 자식이라도’ 하는 속물스러운 욕심, 저마다의 속물성이 이명박 대통령이 갖춘 온갖 속물성에 감응한 것이다. 그는 남녀노소 전 국민의 속물성을 자극할 만한 속물 판타지의 종합 선물세트와도 같았다.



속물은 그 자신만 알 뿐 누구의 편도 아니다

고학생에서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성공한 기업인, 아들을 히딩크와 함께 사진 찍게 해주는 아버지, 딸에게 건물 하나 안겨서 월세 받아먹고 살게 해주는 자상한 친정 아버지, 아내가 몇 천만원짜리 핸드백을 들고 다니다 사진 찍혀서 구설에 오르게 할 수 있는 재력가 남편,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테니스를 즐길 수 있는 럭셔리한 취미생활. 우리는 이런 힘센 그와 한편이라 믿고 싶었고 그가 누리는 것을 누리고 싶었다. 그 소망이 마침내 그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잊고 있었다. 속물은 결코 누구의 편도 아니라는 것을, 속물은 오로지 그 자신만의 편이라는 것을.

거리에 나오는 것만으로는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이명박 퇴진을 외치기 전에 먼저 숨통을 끊어놓아야 할 것은 ‘우리 안의 이명박’이다. 우리 안에 한 명씩 가지고 있는 음습한 이명박, 그를 먼저 끝장내야 한다. 100만명 아니 1000만명이 촛불을 들더라도 우리 안에 있는 이명박을 먼저 퇴진시키지 않는 한, 저 컨테이너 철옹성 안에 있는 진짜 이명박이 퇴진할 확률은 제로다.

시사인(08. 05. 26) 그래도 우리는 MB와 대화해야 한다

새 정권이 들어선 지 겨우 3개월이지만 벌써 2~3년은 지난 것 같다. 대운하에 영어몰입교육에 0교시에 이중국적 허용에 쇠고기에…. 일 년에 한두 개 터져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만한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진다. 이명박 대통령이 잘한 일을 꼽아보자는 이야기에 “투표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같은 대답이 우스개로 나돌 정도니 국민이 느끼는 암담함을 짐작할 만하다.

이 정권의 가장 큰 문제는 정권을 이루는 이들이 부자라거나 아파트를 많이 가졌다거나 하는 따위가 아니다. 어느 나라에나 부자 정치인은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는 상식을 가진 사람이 나눌 수 있는 정상적인 대화의 틀에 진입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국민을 배제한 채 쇠고기 협상을 진행한 뒤 “싫으면 안 사 먹으면 된다”라거나, 국민을 향해 손자 대하듯 “떼쓴다고 다 되는 것 아니다”라고 말할 리가 없다. 대통령의 측근도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땅 투기 의혹에 “땅을 사랑했을 뿐이다”라거나 “내 나이 11세 때 내 계좌에 있던 돈으로 아버지가 땅을 샀다”느니, 스칼렛 오하라에 워런 버핏이 따로 없을 정도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상적인 패러다임 안에서 살았던 사람이 아니다. 시작은 고학생으로 미약했을지 모르나, 36세에 사장이 된 뒤 그의 인생은 심히 창대했다. 그는 자식을 위장 전입시켜 좋은 학교에 보냈고, 자기도 건축법 위반, 수뢰 의혹, 근로기준법 위반, 범인 도피, 사기 혐의 등으로 여러 사람 바쁘게 만들었다. 그는 또한 한 나라의 최고 공직자이자 동시에 아가씨 나오는 술집에 세를 준 건물 주인이며 교회 장로이기도 하다. 그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이런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세계에서 자식을 좋은 학교 보내고 싶은 것이야 애틋한 부정일 터이며, 건축법과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거나 사기 혐의를 받는 것쯤은 사업하다 보면 흔히 겪을 수 있고, 선거법 위반은 정치하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만한 일이리라.

자기가 하는 거짓말을 참말로 믿는 ‘그들’

훌륭한 거짓말쟁이가 되는 방법은 자신이 하는 거짓말을 참말로 믿는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에 사는 저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진실로 저들은 자기가 하는 말을 열렬히 믿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난 정말 땅을 사랑했다, 11세 때 내 계좌에는 정말로 돈이 많았다, 광우병 쇠고기가 무서우면 안 사먹으면 된다, 촛불 든 애들 공부하기 싫으니까 괜히 나와서 저런다, 집회 저거 배후 세력이 분명히 있다….

이 정권이 국민과 제대로 대화하지 못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자고로 사장과 직원 간 대화는 잘 안 된다. 사장은 직원을 끌어다 놓고 자기 이야기만 실컷 하고는 “아 오늘 정말 좋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라며 흐뭇해한다. 그런 사장 노릇을 몇 십년 한 이 대통령이 한순간에 그 습관을 버리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 습관을 반드시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한민국은 기업이 아니고 국민은 사원이 아니니까.

지금 상태에서 보면 그들을 정상적인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기가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향한 대화를 포기할 수 없다. 희망이 안 보이면 끈질기게 버티기라도 해야 한다. 그들이 정말로 바라는 것은 우리가 그들과 대화하기를 체념하고 “원래 그런 사람들인가 보다” 하며 그들을 포기해주는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사인(07. 11. 26) 아비 덕 못 본 자식의 부러운 눈빛

아버지와 대화하다 보면 과연 내가 이 사람의 직계비속이 맞는지 늘 의심하게 된다. 서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다투다가 같이 핏대 세우고 있는 얼굴이 내 얼굴과 판박이인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이 사람 딸 맞구나 싶다. 그와 나는 이렇듯 거의 모든 면에서 취향과 견해가 다르다. 그는 공부를 사랑하고 나는 먹물을 혐오하고, 그는 분명 내가 모든 선거 때마다 민노당에 투표한 걸 알면서도 걸핏하면 나를 ‘노사모’라고 부르니 이건 뭐 어디에서부터 평행선인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서도 또 어영부영 잘 지내곤 하는 우리의 이 위태로운 평화는 최근 주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탓에 와장창 깨진다. 그가 서울시장 시절 서울을 하나님께 화끈하게 봉헌했을 때다. 신실한 개신교 목사로서 당시 그 발언을 ‘용기 있는 발언’이라고 평했던 아버지를 비롯해 모조리 독실한 신자인 이모들은 새벽마다 그가 대통령이 되라고 모여서 기도한다. 그런데 나는 그토록 뜨거운 기도를 받는 장로님이 하필이면 무대 위에서 성경을 찢고 생닭을 잡는 록 가수와 왜 그렇게 닮았는지 실없이 웃지 않고는 못 배겼다. 그러면 또 그들은 나를 몹시 못마땅해했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웃기를 그칠 수 없어서 피차 매우 곤란했다.

이명박 후보는 이번에 자녀들 유령회사 직원 등록 건으로 또다시 나를 화끈하게 웃기고 말았다. 아들딸을 본인 사업체 관리인으로 위장 취업시켜 8800만원을 탈루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의 해명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딸이 결혼도 했는데 수입이 없어 집안 건물 관리나마 도우라 했고, 생활비에 보탬이 될 만큼 급료를 주었다”라는 것이다. 당신 일처럼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입을 꾹 다문 아버지 앞에 나는 그 집 자식들 부러워 죽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아버지, 좋은 학교” 하면 위장 전입을 해서라도 좋은 학교 보내주고, “아버지 히딩크” 하면 히딩크와 사진 찍어주고, “아버지 돈이 없어요” 하면 “아버지 건물 관리나 해” 하는 아버지라니, 대통령 후보 이전에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식이 바랄 수 있는 아버지의 최대치가 아닌가.

“옳지 못한 것 부러워하는 것도 죄다”

한참 웃다가 나는 문득 얼굴이 굳어졌다.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내가 방금 내뱉은 말은, 100% 진심이었다. 한화 김승연 회장 사건 때도 “아이고 우리 아버지면 얼마나 좋을까. 나한테 못되게 군 남자들은 죄다 야산에 묻혔을 텐데” 하고 농담 삼아 지껄인 것도 돌이켜보니 다 진심이었다. 정의가 실종된 부끄러운 아버지들의 제국을 만든 데 일조한 것은 뻔뻔한 자식들이었고, 그 아버지들의 힘을 더욱 강고히 만든 것은 ‘내게도 기회가 온다면 사양하지 않으리라’ 는 자세로 그것을 바라본 나와 같은 ‘없는 집’ 자식들이었다.

옳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는 것도 죄였다. 내가 이 후보의 자식 사랑을 비웃을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내 아버지에게 그와 같은 권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아버지가 너무 허약해서 기회가 없었을 뿐, 가능하기만 했다면 아버지가 먹여주는 단물을 얼마든지 빨았을 것이다. 제 가족, 제 집단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부끄러운 아버지와 그것을 얼른 받아 삼키는 뻔뻔한 자식이 이루는 부정한 톱니바퀴를 돌아가게 하는 근본에는 바로 나처럼 아비 덕 못 본 자식의 부러운 눈빛, 행여나 나에게도 콩고물이 떨어진다면 눈감아줄 준비가 언제라도 된 그 눈빛 역시 일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혁이란, 진보란, 좋은 날이란 이토록 호락호락한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올 리 없는 것인데도.

08. 0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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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8-06-23 08:54   좋아요 0 | URL
퍼 갈께요^^

로쟈 2008-06-23 23:33   좋아요 0 | URL
^^

BRINY 2008-06-23 10:55   좋아요 0 | URL
언제부터인가 '속물이 뭐가 어때서? 다 그렇게 사는거야'라는 사람들이 주위에 가득해진 거 같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일찍부터 그렇게 되어간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안그런 애들이 왕따 당하는 세상. 휴..

로쟈 2008-06-23 23:33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IMF가 결정타였다고 봐야겠죠...

기록인 2008-06-23 10:00   좋아요 0 | URL
우리안의 이명박...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정말 꼭 집어 쓴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로쟈 2008-06-23 23:34   좋아요 0 | URL
꽤 입소문이 나고 있습니다...

마립간 2008-06-23 18:11   좋아요 0 | URL
http://www.newstoon.net/sub_read.html?uid=9484§ion=section2
김진호 미친소시리즈9

로쟈 2008-06-23 23:34   좋아요 0 | URL
같은 컨셉이군요...

스위스 2008-06-27 15:27   좋아요 0 | URL
중간에 있는 딩크횽아 사진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