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의 불황 국면을 맞이하여 미국 경제의 추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대선도 앞두고 있기에 미국 정치도 연일 기사화되고 있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떠올리게 된 책은 모리스 버만의 <미국 문화의 몰락>(황금가지, 2002)이다. 책을 읽어서가 아니라 이 참에 읽어볼 마음이 생겨서이다(알라딘에는 품절로 뜬다). 리뷰기사를 찾으니 생각보다 오래전에 나온 책이다.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미국 문화의 몰락'이 결코 남의 나라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모르겠다. 미국식이라면 몰락마저도 황홀해 할 한국인들도 있지 않을까?). 오래전 기사 두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오마이뉴스(02. 09. 05) 미국문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나

80년대 초 나는 원로시인 고은 선생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은 미국에 다녀온 경험을 토대로 "미국은 머지않아 멸망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선생은 주로 도덕의 붕괴에 따른 미국의 멸망을 말씀하시는 듯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올해 나는 저명한 미국의 문화역사학자 모리스 버만(Morris Berman)이 쓴 <미국문화의 몰락(The Twilight of American Culture/심현식 옮김/황금가지 펴냄)>을 읽게 된다. 미국은 고은 선생이 멸망할 것이라고 진단한 이후 20년이나 버텼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의 학자가 자기 나라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미국은 지금 세계를 점령할 듯이 호령한다. 테러분자들을 소탕한다고 아프가니스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이라크 대통령 후세인을 축출하겠다고 을러댄다. 여중생들을 장갑차로 깔아 죽인 미군을 내놓으라고 하면 죄가 없다고 강변하고, 우리나라, 우리 문화의 상징인 덕수궁터를 짓밟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배 정도나 되는 규모로 대사관과 아파트를 짓겠다고 으르렁거린다.

더구나 미국기업인 맥도날드, 코카콜라는 상품으로 세계를 평정한다. 세계 어디나 맥도날드의 햄버거로 도배하여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를 이룩하며,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까지 '가구가락(可口可樂:cocacola)'을 마구 뿌려댄다. 미국이 생산한 군수물자 등 미국의 상품을 사주지 않으면 미국정부의 압력에 당해낼 국가가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21세기는 미국의 독무대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리스 버만의 지적처럼 미국문화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지 않을까? 글쓴이는 미국문화가 멸망할 거라는 정황으로 다음의 4가지를 들고 있다.

1.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즉, 부익부 빈익빈은 극에 달해 있으며, 미국의 중산층은 붕괴됐다. 2. 사회보장제도가 위기에 빠져 있다. 3. 반지성주의에 따른 지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문맹률은 급증한다. 4. 상업주의 문화가 지배하는데 따른 정신적 황폐함이 극심하다.

중산층은 전체 사회의 허리 구실을 한다. 이 허리가 붕괴됐으니 사회 전체가 온전할 리 없다. 글쓴이는 말한다. 고대 로마 시민들이 검투경기와 서커스에 넋이 나가 있었던 이후 고대로마제국의 멸망이 온 것처럼 오늘날 미국 시민들이 할리우드가 만든 블록버스터 영화에 열광하는 것은 미국 멸망의 징조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대중들이 지엽적인 문제에 온통 정신이 팔리거나 문화적인 삶이 끊임없는 오락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된다면, 그 국가는 분명히 문화적인 죽음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버만이 진단한 말이다. 미국 문화는 엉망진창으로 죽어간다고 판단한다. 겉보기에는 활력이 넘치고 경제도 호황을 누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책의 부제로 '기업의 문화 지배와 교양 문화의 종말'이라고 한 것처럼 기업이 지배하는 상업주의 문화에 목적의식도 창조력도 매몰되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미국 사회의 활력은 상업주의 문화의 광란일 뿐이다.

물론 그는 이 멸망을 해결할 방법으로 수도사적 해법을 제시한다. 수도사적 해법이란 어떤 조직적 운동이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생활방식을 뜻한다. 즉 거창하거나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 대신 미술관이나 음악회를 찾고, 베스트셀러 대신 고전을 읽는 등의 작지만 의식있는 실천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문화의 몰락이 아니라 한국문화의 몰락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버만이 지적하는 미국문화 멸망의 정황 4가지는 한국의 사회에서 드러나는 정황 그대로이다. 특히 IMF 이후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모두가 이 책을 읽은 다음 경각심을 갖고 한국문화의 몰락을 방지할 수도사적 해법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할 일이다. 미국문화의 몰락은 미국만이 걱정할 일이 아니라 바로 한국의 우리 자신들도 걱정해야할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김영조 기자)

주간동아(02. 07. 04) "미국, 지금 너 떨고 있니?”

‘멍청한 백인들’(나무와 숲 펴냄)에서 마이클 무어가 미국 사회의 제도적 부조리와 정경유착 문제를 통렬히 비판한 데 이어, 문화역사학자 모리스 버만은 ‘미국 문화의 몰락’을 예고한다. 4~5세기경 로마제국처럼 미국은 화려했던 전성기를 뒤로하고 몰락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버만은 ‘미국 문화의 몰락’에서 얼핏 보기에 미국이 에너지와 활력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활력이 상품 구매와 소유 이상의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혼란스러움에 불과한 이런 에너지가 미국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공허함을 숨기는 구실을 해서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고 경고했다.

사실 미국 지식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비슷한 경고를 했다.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은 “미국이 겉으로는 민주주의라는 화려한 장식을 했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몇몇 기업이 권력을 휘두르는 과두정치 체제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했고, 사회비평가인 토머스 프랭크는 “인간 의식에 대한 시장의 화려한 승리”라며 ‘암흑시대’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버만이 “미국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독일 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저서 ‘서구의 몰락’에서 찾을 수 있다. 슈펭글러의 종말론적 역사관에 근거해 저자는 미국 몰락의 징후를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가속화, 둘째 사회·경제적 문제를 사회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한 비용투자에 따른 한계이익 감소, 셋째 비판적 사고 및 지적 의식수준 등의 급격한 저하와 문맹률의 확산, 넷째 정신적인 죽음(문화의 저급화). 21세기 미국은 이미 이 네 가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둔재 생산국 미국’의 현실은 참담하다. 미국 성인의 42%가 세계지도에서 일본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15%는 미국조차 찾지 못한다. 1996년 10월 설문조사에서 대통령 후보가 누구인지 모르는 유권자가 10명 중 1명. 저자는 과거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의 정신병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대통령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을 상기시켰다. 그 밖에도 한 토크쇼에서 미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무작위 인터뷰를 한 결과, 지구에 달이 몇 개 있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한 학생(천문학 수업은 A학점이었다고 함)이 있는가 하면, 3의 제곱을 6 혹은 27이라고 대답한 경우도 있다. 일본의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도 ‘도쿄대생은 바보가 됐는가’라는 책에서 일본 대학생들의 무식함을 개탄한 적이 있는데, 일본의 추락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미국 문화의 몰락’은 역설적으로 몰락을 막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기서 저자는 ‘수도사적 해법’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문화를 지키기 위한 역사적 선례를 보면 로마제국의 혼란기에 그리스 로마가 남긴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 앞장선 것은 수도사들이었다. 이들은 그리스 로마시대의 책과 필사본을 모으고 베껴 600년 후 새로운 유럽 문화 태동에 쓰일 수 있도록 했다.

현대의 정신적 수도사들은 상업주의 광고에서 거짓과 진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으며, 컴퓨터와 인터넷을 유용한 도구로 활용하지만 삶과 도구를 바꿀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이들은 다니엘 스틸 대신 호머를 읽고, 자녀를 데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러 가는 대신 캠핑이나 박물관을 찾는다. 진리의 탐구, 예술의 함양, 비판적 사고방식은 바로 이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즉 쇼핑이라는 오락에 빠져 있는 98%를 제외한 나머지 2%가 미국 사회를 구해낼 정신적 수도사가 될 것이다.

‘미국 문화의 몰락’은 미국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문화비평서이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드러난다. 먼저 저자는 미국이 직면한 문화적 위기를 경고하는 데 급급해 정작 지켜야만 하는 ‘미국 문화’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또 ‘수도사적 해법’이 담고 있는 엘리트주의나 지나친 고급문화 취향은 거부감을 준다. 그러나 ‘지구를 살리자’ 유의 구호성 문화운동이 지닌 한계를 감안하면 소수가 조용히, 그렇지만 맡은 소임을 다하자는 ‘게릴라성 문화재건 운동’에 기대를 걸어봄직하다. 세계화 과정에서 더 이상 ‘미국 문화’가 미국만의 것이 아니듯, ‘미국 문화의 몰락’은 한가한 남의 나라 걱정거리로만 읽히지 않는다.

08. 10. 11.

P.S. <미국 문화의 몰락>(2000)에 이어지는 버만의 책은 <미국의 암흑시대: 제국의 마지막 국면>(2006)이다. 타이틀로 보아 '속편'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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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ol 2008-10-11 21:05   좋아요 0 | URL
'미국 문화의 몰락'이라는 제목이 섹시하군요. 그런데 미국 문화의 흥성한 시절을 언제로 보는가에 따라 얘기가 달라지겟죠. 아마도 이 책과 저자는 미국에서 신보수주의의 등장과 함께 벌이진 '문화 전쟁'의 맥락에서 읽지 않으면 위에 소개 기사처럼 헛다리만 짚게 될 것 같습니다. 사회의 자유주의 분위기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광범위한 신보수주의 운동의 차원에서 말이죠 -- 동성애, 낙태 등을 둘러싼 논쟁, 대중문화의 폭력성 논쟁, 교회가 미국인의 삶에서 점점 덜 중요해짐 등등. 점점 도덕과 규율과 종교와 '가족의 가치' 같은 것을 내세우면서 대중 문화에 대한 검열 같은걸 확대하려고 하는 이 운동의 맥락에서 놓고 읽어야 할 책인거 같습니다.

로쟈 2008-10-11 21:10   좋아요 0 | URL
버만의 입장이 앨런 블륨류의 보수주의와 비슷한 입장인지, 좀 다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위키에 나오는 모리스 버만에 대한 소개가 너무 간략해서요.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는 비슷한 면도 있는 거 같고...

cretois 2008-10-12 00:43   좋아요 0 | URL
앨런 블룸이나 사무엘 헌팅턴처럼 노골적이진 않습니다. 제목처럼 미국의 패권과 그 몰락에 대해서가 아니라 '건강한 나라'라는 미국의 이미지의 상실에 대한 '통분'에 가깝습니다. 물론 그 통분이 이문열 따위처럼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문화적'이고 '학술적'인 비판에 근거하지요.
기본적으로 버먼은 퓨리터니즘에 대한 향수가 깊습니다. 부제처럼 기업(자본)의 지배 아래 놓은 미국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스탠스를 취하지만, 그에 대한 해결책은 아마도 좀 몽상적이었던 듯(읽은지 오래돼서).
evol님의 지적, 적절합니다.

로쟈 2008-10-12 10:28   좋아요 0 | URL
부제만으로도 내용 정리가 되는 책이라 제쳐두었다가 다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유익한 코멘트 감사.^^

노이에자이트 2008-10-12 16:04   좋아요 0 | URL
토마스 카알라일이 <과거와 현재>에서 당시 영국의 속물성을 지적한 것과 비슷하군요.상업성과 속물성은 사이가 좋은가 봐요.

로쟈 2008-10-12 19:42   좋아요 0 | URL
속물성을 이용할 줄 알아야 팔리니까요...
 

주기적인 경제변동만큼이나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미국발 금융위기와 그에 따른 세계 경제 침체 국면과 관련하여 대공황을 다룬 책들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최소한 몇달 전부터는 이런 주제의 책들이 기획됐다는 얘기다. 어려운 주머니 사정에(더 어려운 건 여유시간을 내는 일이지만) 이 주제의 책들을 읽을 여유는 없을 듯싶다(혹 도서관에서라면 모아놓고 훑어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한 '지표'로서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경제가 어디까지 추락하는 것인지는 그냥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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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체인지- 20세기 미국의 정체성을 결정한 몇 가지 중대한 변화들
프레드릭 루이스 알렌 지음, 박진빈 옮김 / 앨피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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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아메리카- 미 역사상 가장 특별했던 시대에 대한 비공식 기록
F. L. 알렌 지음, 박진빈 옮김 / 앨피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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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공황- 80년 전에도 이렇게 시작됐다
진 스마일리 지음, 유왕진 옮김 / 지상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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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공황 전후 세계경제
찰스 페인스틴 외 지음, 김영완 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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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신간 가운데는 마이클 하트의 <네그리 사상의 진화>(갈무리, 2008)도 들어 있다. 저자나 제목이나 그다지 새로워 보이지 않아서 들춰보지도 않았는데(게다가 요즘 나오는 좌파 사상서들에는 왜 다들 '우파적 책값'이 붙어있는지!), 리뷰를 읽어보니 나름대로 흥미를 끄는 책이다. 가령 출판사측의 이런 책소개는 어떤가.

2004년 9월 호주 시드니에서 개최된 대규모 포럼에서 ‘이탈리아 효과’가 진지하게 검토되었다. 이 포럼의 주요 내용은 철학의 주도권이 이전의 영미철학에서 1990년대에는 프랑스철학으로, 21세기의 벽두인 2000년대에는 이탈리아 철학으로 옮겨갔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1968혁명의 철학자들인 프랑스의 들뢰즈, 기 드보르, 푸꼬 등이 모두 사망한 후 안또니오 네그리, 빠올로 비르노(<다중>), 조르조 아감벤(<호모 사케르>), 마우리찌오 랏짜랏또(<비물질노동과 다중>), 프랑꼬 베라르디 등 이탈리아 철학의 흥기 현상을 주목하였다. 최근 한국에도 ‘이탈리아 효과’가 거세지고 있으며, 이 뿌리에는 안또니오 네그리의 사상이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그간의 한국 내 논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네그리 사상의 진화』는 이러한 네그리 사상을 한눈에 밝혀주는 입체적 조감도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요점은 '이탈리아 효과'의 한 기원인 네그리 사상의 입체적 조감도를 제시해준다는 것이 <네그리 사상의 진화>가 갖는 의의이겠다.

겨레(08. 10. 11) 참한 학자, 성난 전복자…젊은 네그리의 두 얼굴

마이클 하트(미국 듀크대 교수)는 아우토노미아(자율) 이론가 안토니오 네그리와의 공동작업으로 유명해진 사람이다. 1990년대 이후 그의 지적 동지이자 스승인 네그리와 함께 <디오니소스의 노동> <제국> <다중>을 집필함으로써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네그리 사상의 진화>는 하트가 93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 가운데 후반부를 번역한 책이다. 6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젊은 네그리의 이론적·실천적 투쟁을 추적한 것이 이 책이다.

하트의 박사학위 논문 전반부는 <들뢰즈 사상의 진화>(갈무리)라는 이름으로 먼저 번역돼 나온 책에 소개됐다. 이 부분도 역시 질 들뢰즈 사상의 형성 과정을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의 박사학위 논문이 두 권의 책으로 나뉘어 나온 셈인데, 그런 만큼 두 책을 묶어 함께 읽는 것이 하트의 문제의식을 이해하는 데 더 유용하다.

하트가 들뢰즈와 네그리의 초기 작업에 공통으로 주목한 것은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헤겔 변증법’에 대항할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니체를 통해서, 네그리는 레닌을 통해서 헤겔 변증법 극복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왜 이들이 반헤겔·반변증법의 기치를 올렸는지는 <들뢰즈 사상의 진화> 서론에 간명하게 서술돼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어떤 ‘부정’도 부정 자체로 놔두지 않고 지양을 통해 종합에 합류시켜 버리는데, 이 사실이 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지배체제를 부정해도 결국에 또다른 지배체제로 포섭되고 마는 변증법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 변증법적 부정에 맞서 들뢰즈와 네그리가 공히 내세우는 것이 ‘비변증법적 부정’이다. “비변증법적 부정은 더 단순하고 더 절대적이다.” 이 비변증법적 부정을 하트는 ‘절대적 부정’ ‘총체적 부정’ ‘근원적 부정’이라고 부른다. 종합으로 지양되지 않고 부정 그 자체로 끝나는 부정, 완전한 파괴·소멸·폐허만 남기는 부정, 그리하여 그 빈터에서 새로운 존재의 구성으로 이어지는 부정이 네그리와 들뢰즈가 말한 부정이다.

<네그리 사상의 진화>는 말하자면, 이 비변증법적 절대 부정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트는 먼저 1960년대의 네그리가 이론과 실천에서 보였던 내적 긴장에 주목한다. 오페라이스모(노동자주의)라는 이탈리아 이론운동에 몸담았던 당시의 네그리는 흔히 ‘두 명의 네그리’ 혹은 ‘분열된 인격’으로 묘사된다. 이론의 영역에서 네그리는 지적이고도 성실한 학자였다. “지적 도야와 사상의 모험에 매료된 순수한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동시에 네그리는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학습하고 그들의 사보타주를 선동하는 “전의에 찬 성난 전복자”였다. ‘훌륭한 교수’와 ‘사악한 교사’ 라는 두 얼굴 사이에서 네그리는 찢겨 있었다.

이론의 영역에서 네그리는 자본주의 체제를 단숨에 극복할 방안을 찾지 못했지만, 실천의 영역에서는 노동자들의 전복적 투쟁을 옹호했다. 둘 사이의 분열과 긴장은, 그람시의 용어로 말하자면, ‘지성의 비관주의’ 대 ‘의지의 낙관주의’의 갈등이었다. 하트는 이 긴장이 1970년대에 들어와 극도로 커진 뒤 파열·폭발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그 폭발이란 노동자들의 힘에 입각한 실천을 통해 ‘자본의 변증법’을 깨뜨리는 길로 나아간 것을 말한다. 노동자들을 포섭하여 그 힘의 분출을 봉쇄하는 자본의 변증법적 운동을 폐지해버리고, 노동자들의 실천적 힘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때 네그리는 선언했다. “변증법은 끝났다. 헤겔은 죽었다.”

하트는 네그리가 이 비변증법적 부정의 지평을 발견한 것이 레닌을 재해석한 결과라고 말한다. 새롭게 해석된 레닌은 이론 자체보다 혁명 주체의 실천을 앞세우는 레닌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때의 레닌이 니체와 다르지 않다는 하트의 해석이다. “니체와 레닌 사이의 유사성은 주체의 힘이 모든 논점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점에 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모든 것은 주관적일 뿐이다’라는 초라한 표현을 쓰지 말고, ‘그것은 또한 우리의 작품이다’라고 하자.” 주체가 기존의 세계를 없애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니체와 레닌은 “파괴적 계기, 곧 그 파괴적 힘이 너무나 격렬하여 사물의 현재 상태를 완전히 깨부수면서 현재의 지평 전체를 무너뜨리는 힘”을 제시한다. 이런 레닌적 국면을 거쳐 네그리는 이후 아우토노미아 운동으로 나아간다.(고명섭 기자)

08. 10. 10.

P.S. 기사에서 "<네그리 사상의 진화>는 하트가 93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 가운데 후반부를 번역한 책이다."라고 했는데 착오이다. 93년은 학위논문의 일부를 발전시킨 <들뢰즈 사상의 진화>가 출간된 해이고, 하트의 박사학위논문은 1990년에 나왔다. 그 제목이 <조직화의 예술: 질 들뢰즈와 안토니오 네그리에서 정치적 존재론의 기초(The Art of Organization: Foundations of a Political Ontology in Gilles Deleuze and Antonio Negri)>(워싱턴대학, 1990)이다. 철학박사논문이 아니라 문학박사, 비교문학박사논문이다(그러니까 들뢰즈와 네그리를 '비교'한 논문인 것). 하트는 듀크대학의 이탈리아어문학과 소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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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이니만큼 관련기사를 하나 스크랩해놓는다. '한글날 영문학자 도정일을 만나다'가 기사의 컨셉이다(웁스, '컨셉'이라니!). 대부분 지당한 말씀이며 몇 가지 지적은 곱씹어볼 만하다...

한겨레(08. 10. 10) 도정일 “영어 몰입교육은 사고력 부족한 반거충이 만들 뿐”

영문학자인 도정일(67) 경희대 명예교수는 한국인 가운데 ‘서구 계몽주의 지식인’의 전형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평을 듣는다. 지난 7일 그를 만나 모국어에 대한 철학과 최근의 영어교육 논란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9일 한글날이 계기가 됐다. 영문학자와 웬 한국어? 얼핏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이런 이유에서다. 우선 그는 ‘가장 정확하고 유려한 우리 문장을 구사한다’는 찬사를 들을 만큼 모국어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각별하기로 유명하다. 다른 한편으론 이명박 정부의 ‘영어 몰입교육’ 파동으로 우리말을 둘러싼 논의 지형의 한가운데에 영어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국어학 권위자들께서 말씀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도 교수는 조심스러워 했다. 그러나 이 비상한 ‘국어 위기 상황’을 헤쳐나갈 지혜를 구하는 데 관할구역을 따질 여유가 어디 있을까. ‘영어로 초래된 지금의 혼미 상황에선 영문학자이면서도 모국어로 글을 써 문필가의 명성을 얻은 선생께서, 더 냉철한 진단과 대안을 제시할 적임자인지 모른다’는 요청에 그가 입을 열었다. 영문학자인 자신에게 모국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서부터 그는 시작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생각하고 표현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실현 행위 그 자체입니다. 40년 넘게 영문학을 해 왔지만 저에게 ‘제1의 언어’는 한국어입니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체득했고 나이 들어 치매가 와도 망실되지 않을 언어가 한국어니까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도정일의 집’은 한국어인 셈입니다.”

‘광풍’으로까지 불리는 영어교육 이상열기에 대해 그는 거침이 없었다. 몰입교육 같은 섣부른 시도가 ‘반거충이’(무엇을 배우다 중도에 그만두어 다 이루지 못한 사람)를 양산해낼 뿐이라는 쓴소리가 이어졌다. “요즘 대학의 공통된 고민이 이른바 ‘국제화’ 한답시고 경쟁적으로 받아들인 특례 입학생들입니다. 어린 시절 외국에 건너가 살다가 특별 전형으로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인데, 이들 상당수가 한국어는 물론 외국어 실력에서도 실용 회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생각하고 개념화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성장기에 하나의 언어에 깊이 몰입해볼 기회를 갖지 못했으니 읽고, 쓰고, 사고하고, 표현하는 고등의 언어 활동이 취약한 게 당연하죠. 몰입교육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교육에 모든 교육자원을 집중시키는 초·중·고등학교의 풍토도 도마에 올랐다. 영어교육도 좋지만 모국어와 비판적 사고력을 키워주는 인문 교육을 희생시켜선 안 된다는 지적이었다. “지금 초·중·고등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교육청의 지원을 받기 위해 기존의 도서관이나 학생 자치공간에 영어학습 시설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도서관 사서도 없는 학교에 한 해 1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들여 원어민 교사를 초빙하겠다는 겁니다. 통탄스런 일입니다.”

영어 광풍의 배후로 그는 지난 10여년 새 우리 사회에 견고하게 뿌리내린 ‘시장전체주의’를 지목했다. 그가 볼 때 교육은 시장이 요구하는 ‘맞춤형 인간’을 양성하는 것으로 목적이 변질된 지 오래다. 학교에서 국어보다 영어가, 읽고 생각하는 영어보다 듣고 소통하는 실용 영어가 강조되는 것도 ‘시장의 언어’가 ‘삶의 언어’를 압도하면서 빚어진 현상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습니다. 영어를 못하면 깡통 차고 지하도에 나앉아야 할 것처럼 협박하는데, 이것을 견뎌낼 간 큰 국민이 얼마나 있겠어요. 공포에 나포된 국민들이 영어라는 ‘생존 복음’에 너 나 없이 매달리는 형국입니다.”

영어 문제에 대처하는 진보진영의 자세에도 일침을 놓았다. “1980년대 ‘반제투쟁’하듯” 해선 안 된다는 충고였다. “영어가 지배적 언어가 된 데는 정치·경제적 이유도 있지만, 영어 자체가 갖는 포용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시대에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가 필요한 법입니다. 영어를 인류의 소통을 가능케 한 공유자산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그의 ‘영어론’은 국어학계의 폐쇄성에 대한 지적으로 귀결됐다. “우리말 우리글이 최고라는 자만은 버려야지요. 우리말의 표현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컨대 우리말에는 영어의 룩(look)이나 심(seem)처럼 ‘~인 것처럼 보인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속된 말로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사물의 거죽과 속알맹이가 같을 수 있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현상과 비가시적 본질을 구분하는 표현법이 불가피한데도, 이를 무조건 ‘영어식’이라 배척해선 곤란합니다.”

누구보다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기로 정평이 난 그였지만, 우리말의 문장구조에 한계를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고백도 들을 수 있었다. 한때 영어의 관계대명사가 가능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전개되는 논법 구조를 부러워한 적이 있다는 얘기였다. “학자나 작가 등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우리말이 갖는 표현의 한계를 돌파하는 방법을 고민해야지요. 이웃 언어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자기갱신하는 노력을 방기하는 것도 일종의 직무유기입니다.”

이날 도 교수는 책읽기 운동을 위한 협약 체결 문제로 경남 김해를 방문했다 막 상경한 터였다. (그는 독서 활성화와 공공도서관 확충운동을 벌이는 ‘책읽는 사회 만들기’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출장의 피로가 덜 풀렸을 법한데도 한마디 한마디 공들여 풀어놓는 말을 옮기니 곧 글이 되었다.(이세영기자)

08.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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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스 2008-10-10 09:12   좋아요 0 | URL
"서구 계몽주의 지식인의 전형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도정일선생은 이 표현을 좋아하실지 모르겠네요.

로쟈 2008-10-10 22:52   좋아요 0 | URL
'계몽주의'란 말도 스펙트럼이 넓으니까요. '가장 정확하고 유려한 우리 문장을 구사한다'는 평도 인용해놓았기 때문에 '손해'는 아닐 듯싶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0 15:58   좋아요 0 | URL
국어라든가 국사라든가 하는 단어도 이제 버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이상한 게 고대부터 현대까지를 다루면 국사인데 한국 근현대사는 국사 근현대사라고 하지 않더러구요.

로쟈 2008-10-10 22:54   좋아요 0 | URL
내부자, 외부자 시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일본에서는 자기들의 국사를 일본사라고 한다지만... 학교에서 '국어'를 배우는 것과 '한국어'를 배우는 건 감이 좀 다른데, 가령 '국어'가 필수과목이라면 '한국어'는 선택과목 아닐까요?^^;
 

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면에 실린 기사를 옮겨놓는다('로쟈의 인문학서재' 대신에 3주에 한번씩 출판면을 쓰게 됐다). 최근에 나온 앤드류 달비의 <언어의 종말>(작가정신, 2008)에 대한 리뷰인데(표기법상으론 '앤드루 달비'인 모양이다), '언어전쟁' '언어 제국주의' '영어 공용화론' 등의 쟁점들과 연관지어 다뤄보려고 했으나 시간과 분량의 제약상 마음뿐이었다. 책상에 잔뜩 쌓아놓은 관련서들만 미진한 독서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한겨레21(08. 10. 13) 거꾸로 바벨탑 이야기

“저들은 한 민족이며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저들이 이런 일을 시작하였으니 앞으로 마음만 먹으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가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잘 아는 대로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하늘에까지 닿을 탑을 쌓고자 했지만 이에 분노한 여호와께서 세상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 일은 무산됐다. 그렇게 ‘보편 언어’를 상실한 인류의 언어는 이후에 분화를 거듭했다. 가령 원시 인도-유럽어만 하더라도 사템어와 켄툼어로 분화되며, 켄툼어에 속하는 게르만어는 다시 서게르만어, 동게르만어, 북게르만어 등으로 분화됐다. 그리고 북게르만어는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페어로어, 아이슬란드어, 그리고 사어(死語)가 된 노른어 등으로 또다시 나뉘었다. 언어의 다양성은 이러한 분화과정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 분화는 무한정 계속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반대다. <언어의 종말>(작가정신 펴냄)의 저자 앤드루 달비에 따르면, 언어 분화의 역과정, 곧 언어의 통합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것이 현재 인류의 언어가 처해 있는 위험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통계를 보면, 현재 전세계에서 1언어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는 약 5천 개이며 이 중 21세기에만 2500개 가량의 언어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평균 2주에 1개꼴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200년 이내에 전세계적으로 200개 정도의 언어만 남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200이란 수는 국가의 수와 대략 일치한다. 곧  앞으로 국가어 외의 소수 언어들은 대부분 소실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단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은 국민이라고 여겨지며, 국민은 국가를 구성해야 한다.”는 언어 민족주의 명제가 이러한 통합과 소실 과정의 중요한 배후다.

그런데 언어의 운명이 이렇듯 국가권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면 국가어들의 운명조차 자신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정치적․경제적 세계화에 따라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소통될 수 있는 세계어 혹은 국제어에 대한 요구가 점차 강화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현실에서 영어는 많은 나라에서 국가어로, 또 전 세계적으로는 제2언어, 제3언어로 급속하게 확산돼가고 있다. 따라서 소수 언어 대부분이 사라진 이후에 벌어질 ‘언어전쟁’은 개별 국가어들과 영어와의 전쟁이 될 것이고 어쩌면 영어만이 사용되는 시점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언어 제국주의, 보다 구체적으로 '어 제국주의 시대' 도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세 때만 하더라도 앵글로색슨의 한 부족어였던 영어는 어떻게 세계적인 언어로 성장했을까? 앤드루 달비는 영어와 로마제국의 공용어였던 라틴어의 확산과정에 세 가지 경로의 유사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첫 번째 경로는 식민화이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걸친 방대한 식민지를 경영했고, 영어는 식민지 이주자들의 유일한 '링구아 프랑카'(공통언어)였다. 두 번째 경로는 제국과 속국 사이의 관계가 초래한 것으로 제국의 속국에서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자기 발전과 부를 얻는 최선의 경로는 영어를 아는 것이었다. 고위관리가 되거나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영어가 필수적이었고, 모든  고등교육은 영어로 이루어졌다. 세번째 경로는 원거리 교역, 특히 해상교역이다. 영어로 이루어지는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영어와 영어의 친척어인 피진어(상거래 과정에서 생겨난 간략화된 영어)가 점점 확산돼갔다.

그리하여 현재 영어 사용자는 ‘유창한’ 사용자를 기준으로 전세계적으로 7억 명에 이르며, ‘충분한 정도로 구사하는’ 영어 사용자는 18억 명을 넘어선다. 게다가 인도를 포함해 약 70개국에서 국가어 혹은 공용어로 쓰이고 있으며 영어학습자 수가 세계인구의 약 3분의 1에 육박하리라는 통계도 나온다. 그리고 이런 영어 집중화의 이면이 소수 언어의 소실과 언어적 다양성의 상실이다. 이것은 어떤 문제점을 낳는가?

언어학자로서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세계의 각 언어로 전승되고 보존되어온 지식을 우리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번역할 때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직접 건너갈 수 없으며 항상 현실 세계를 거쳐서 가야만 한다. 이때 각 언어는 세계를 보고 나누고 구분하는 각기 다른 관점을 갖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것이 그려내는 현실 세계의 지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즉, 각 언어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각기 다른 통찰력을 제공해주며 우리에겐 그러한 대안적인 세계관이 필요하다. 한 언어의 소실은 곧 인간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의 상실이다. 게다가 더 중요하게는 다른 언어와의 상호작용만이 우리 각자의 언어를 더욱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어준다. 영어만 하더라도 새로운 단어와 리듬과 생각들을 다른 언어들에서 얻어옴으로써 활력을 얻고 번영을 구가해왔다. 하지만 영어 제국주의와 함께 전체 언어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든다면 영어의 창조성과 유연성 또한 시들어버릴 것이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성서의 바벨탑 이야기를 우리는 어쩌면 거꾸로 읽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자, 우리가 가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는 신의 저주는 오히려 축복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언어적 혼잡성과 다양성 덕분에 인류는 바벨탑보다 더 높은 성공의 탑을 쌓아온 것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전세는 역전돼가고 있다. “처음에 세상에는 하나의 언어만 있었고, 단어도 몇 개 되지 않았다.”라고 바벨탑 이야기는 시작한다. 종말의 이야기는 이러할 것이다. “종말에 세상에는 하나의 언어밖에 없었다. 모두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서로 알아듣지 못했다.”

08. 10. 08.

P.S. 주제에 대한 관심 때문에 부랴부랴 훑어본 책이지만 <언어의 종말>은 내용에 비해 너무 두껍다는 인상을 준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다른 책들에 견주어도 그렇다. 게다가 뭔가 '한방'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내내 갖게 한다. 가령, 영어와 라틴어의 확산과정 사이의 세 가지 유사성을 지적한 대목에서 두 번째 경로를 '제국과 속국 사이의 관계가 초래한 것'이라고 나는 적었지만, 실제 책에는 달랑 '정부와 정부가 초래한 것'이라고만 돼 있다. 국내에는 지방대 도서관 두 곳에만 소장돼 있어서 미처 원문을 확인하지 못했는데, 설사 원문이 그렇게 돼 있더라도 너무 모호하고 뭉툭하다. 생각해보니 그런 모호함/뭉툭함이 책을 두루 관철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더불어 놀란 것이 있다면 이 주제분야의 책으로 국내에 소개된 몇몇 저자들이 서로에 대해 전혀 참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앤드류 달비를 비롯하여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이제이북스, 2003)의 공저자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수잔 로메인은 얼마전 방한한 바 있다), 그리고 <언어전쟁>(한국문화사, 2001)과 <언어와 식민주의>(유로서적, 2004)의 저자 루이-장 칼베, <언어 제국주의란 무엇인가>(돌베개, 2005)에 '영어 제국주의의 어제와 오늘'을 싣고 있는 로버트 필립슨 등은 서로 교차 참조할 법하지만, 서로에 대한 아무런 인용도 하고 있지 않았다(참고문헌에 나타나질 않는다). 마치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탓에 말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이 분야가 원래 그런 것인지, 단지 부분적인 우연일 뿐인지 의아하게 여겨졌다. 덧붙여, 참고문헌을 훑어보다가 관심을 갖게 됐는데, 로버트 필립슨의 <언어 제국주의>(1992) 같은 책은 다소 오래됐더라도 소개가 되면 좋겠다. 루이-장 칼베의 <세계 언어의 생태학>(2006) 같은 신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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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10-08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들, 거꾸로 읽는 바벨탑의 종말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가슴에 깊이 와 닿습니다. 하나라도 더 많은 언어를 배우고 또 익히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 듯한 기분입니다. 하나의 언어, 하나의 세계가 도래할 때 오히려 더욱 서로 알아듣지 못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며 서로 소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은 실로 '슬픈' 아이러니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성경 속 바베탑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하나의 언어가 도래한 '끔찍한' 상황에 대한 일종의 전복과 위반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08-10-09 22:59   좋아요 0 | URL
그게 참 많이 줄어들어도 5천개라고 하니 말이 통하는 게 오히려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요...

딸기 2008-10-08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꾸란에서는 알라가 사람들이 서로를 알고 이해하기 위해 애쓰라는 뜻으로 일부러 언어를 다르게 했다고 돼 있다더군요.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

로쟈 2008-10-09 23:00   좋아요 0 | URL
<언어전쟁>은 꾸란 얘기도 좀 나오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