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텍스트) 2차분이 출간됐다(http://www.aladin.co.kr/search/wsearchresult.aspx?PublisherSearch=%c5%d8%bd%ba%c6%ae@32997&BranchType=1). 이 시리즈의 필자로 일찌감치 낙점된 터여서 나도 비슷한 형식(분량)의 자서전을 조만간 쓰게 될지 모른다('젊은 만인보'의 유효기한이 내 경우는 올해까지라 한다). 사실 시집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과거에 자전적인 단장을 책으로 여러 차례 묶은 적이 있지만(이 서재에도 그 흔적이 일부 옮겨져 있다) 정색하고 '자서전'을 쓰는 건 내키지 않을 뿐더러 흥미로운 일도 아니어서(나는 '흥미로운 삶'을 살지 않았다, 혹은 살고 있지 않다!) 주로 내가 읽은 책, 내지는 나를 만든 책들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겠다고 했다. 적어도 그쪽으로는 나도 어떤 책을 쓰게 될지 궁금하다(얼추 윤곽은 잡고 있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는 얘기). 

 

원래 이 얘기를 꺼내려던 것은 아닌데, 오래전 파일들을 뒤적이다가 김용익의 <프란츠 카프카 연구>(삼영사, 1984)를 읽으면서 적은 메모가 눈에 띄기에 덩달아 적어보았다. 카프카에게서 내가 가장 흥미를 갖는 부분이 바로 '자서전으로서의 소설', 혹은 '자서전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곧 소설이고, 나의 이야기는 곧 나다.Der Roman bin ich, meine Geschichten sind ich”(<펠리체에게 보내는 편지>) 혹은 “나는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쓰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 적은 대로,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가 카프카를 읽는 '열쇠'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얼추 10년쯤 전에 읽은 <프란츠 카프카 연구>도 그런 관점에서 읽었고, 내게 보탬이 된다고 생각한 몇 대목을 옮겨적었는데, 여기에 다시 옮겨놓는다.



- 수수께끼같은 신비한 표현세계에 압도된 나머지, 카프카를 필요 이상으로 지고한 차원의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확대 해석하는 일은 오류이기 쉽다. 카프카는 제시의 작가이지 해결의 작가가 아니다. 해석이 해석을 낳는 일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그는 개인적으로 제한된 유태인적 사고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본 적이 없는 작가일 수도 있으며, 부친과의 갈등, 직업과 가정이라는 좁은 세계를 초탈하지 못한 채 폐결핵으로 쓰러진 가련한 인간일 수도 있다. 다만 그에게 문학이 있었을 뿐이다...  

-카프카의 평자들은 항상 작품 위주의 비평이냐 아니면 작품과 더불어 작가 자신의 생의 기록물(일기, 서간)을 비평의 증거로 제시하느냐의 기본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그러나 카프카만큼 문학과 삶을 만족할 만한 동시에 수용하여, 양자의 의미를 진지하게 구명하려던 작가도 드물다. 그는 약혼자에게 “소설은 곧 나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전기적 평자들은 카프카의 문학을 “자기분석과 자기판결로서의 예술”로 판정한다. 카프카를 자서전적 작가로 규정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우리는 그의 일기문과 서간문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카프카는 작품활동 초기부터 그의 문학이 자기에게로 방향이 고정되어 있음을 천명한다. “매일같이 최소한 한줄의 글이 나에게로 향해 쓰여져야 한다. 마치 망원경이 혜성에로 향해지듯이”(1911) 확실히 카프카의 모든 기록은 “그로부터 나오고” “그 자신에게 말을 걸고” “그를 세계의 모든 방향으로 확장하고” “그를 위해 하소연하고” “그와 만나야만 하는” 그의 전체이다.  

-요컨대 저술은 카프카에게 있어 자기 반영과 자기성찰로서의 행위이며 자기(das Selbst)는 저술의 주체이자 객체이다. 이와 같이 자서전적이고 자기분석적인 저술은 카프카의 자기인식인 바, 이때 카프카의 삶은 그의 문학을 위한 인식의 수단이 되어 준다.(pp.17-19)    

-카프카의 작품은 다만 자서전이 아닌 자서전소설일 뿐이다. 자서전은 저술자 자신의 체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서전소설에서는 예술지향적인 순수한 창조로서의 허구성에 작가의 실제 경험이 가미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카프카의 자서전소설은 자서전과 순수예술로부터 구분된다. 그의 자서전적인 기록은 그의 자기묘사와 자기성찰의 결과이다. 자기묘사와 자기성찰의 욕구는 어디까지나 자기인식을 목표로 한다...  

-카프카가 직업을 포기하고 창작에만 전념코자한 욕구도 실은 자기인식 내지 자기확인의 시간을 확보하려는 노력이다. 그가 펠리체 양에게 “나의 장단편 소설은 바로 나다”라고 작품과 자신을 동일시한 것도 자기인식을 위한 집념의 표현인 것이다.(p.27) 

09.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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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7-12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아 의식이나 업등이 의식은 성장과정에서 격게 되는 내면의 상처에 다름 아니다. 가족으로부터 받게 되는 절망과 좌절, 주변으로부터 받게 되는 상처와 고통이 결국 현실 바깥에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게 만드는 것이다. 절망이 없다면 어떻게 희망의 개념을 알고, 슬픔이 없다면 어떻게 기쁨의 개념을 알겠는가. 인간이기 때문에 대체상황을 꿈꿀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현실의 고통과 절망을 승화시켜 미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상처 속에서 진주가 자라는 이치와 하등 다를 게 없다. - 작가(박상우,시작), 26쪽 -

이 세상에 완벽한 픽션, 완벽한 허구란 없다. 인간의 두뇌에서 일어나는 경험과 상상 사이의 미묘한 화학작용과 삼투작용이 모든 걸 결정한다. 그것을 분해했다는 학자를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 작가(박상우,시작), 111쪽 -

로쟈 2009-07-12 21:15   좋아요 0 | URL
요즘 나온 뇌과학서인 <세컨드 네이처>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stella.K 2009-07-1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들이 보통은 습작 시절이나 작가 초기 시절에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한 소설을 많이
쓰잖아요. 저도 경험삼아 시도를 해 보곤하는데 할 때마다 좌절을 많이하게 되더라구요.
너무 힘들어서...ㅠ
자기 속 얘기 소설로 쓴다는 건 확실히 힘든 일 같아요. 신내림이라도 받아야하는 건 아닌지.

펠릭스 2009-07-12 19:28   좋아요 0 | URL
음~ 저는 풍경이나 사물을 사진처럼 글로 옮기려는 습관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독자의 상상력를 뺏는 경우가 있더군요.

로쟈 2009-07-12 21:15   좋아요 0 | URL
그게 이야기에 적합한 형식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한 듯해요...
 

지난주에 출간된 책 가운데 빼먹은 것이 하나 있다.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견문록>(마음산책, 2009). 추천사를 쓰기 위해서 미리 읽어본 책인데(<올가의 반어법>에 이어 두번째다), 처음 제목은 '여행자의 아침식사'였다. 출간본의 제목이 <미식견문록>이고 부제가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이다. 러시아어 전문 통역사였던 까닭에 러시아 관련 읽을 거리가 풍부하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그녀의 글을 즐겨 읽게 되는 이유이지만(더불어 고유명사 표기 등의 '감수'도 맡는 이유이지만), 그녀의 글은 그런 사정과 무관하게 유익하다. '영양가'가 있다. 이미 '요네하라 마리의 모든 책'이라고 진작에 못박아놓은 만큼 군말은 필요없을 터이고, 내가 이 책에 대해 적은 추천사는 이렇다.  

'요네하라 마리 컬렉션’에 한 권을 더 추가하게 됐다. ‘프라하 생활’이나 ‘통역사 생활’에 더하여 이번에는 이 재치 넘치고 다정다감한 문필가가 자신의 ‘식생활’을 다루었다. 속담과 유머에 대한 책도 낸 만큼 놀랍진 않다. 하지만 그녀가 튼튼한 위를 가진 ‘냠냠공주’이기도 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자신을 ‘먹기 위해 사는 타입’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식도락가나 푸드파이터는 아니다. 일용할 빵과 감자와 무와 양배추, 그리고 보드카 따위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게 마음에 든다. ‘읽기 위해 사는 타입’인 나로선 ‘먹는 것과 산다는 것’에 대한 이 유머러스한 성찰의 기록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서가에 바로 올려놓는다. 

학교가 공사중이어서 출판사에서 보내온 택배 꾸러미를 열어보지 못해 책의 실물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일단은 소개기사만이라도 늦게나마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9. 07. 04) 배꼽잡는 유머로 감칠맛 나는 세계음식 기행 

요네하라 마리(1950~2006)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제법 많을 테지만, 그 기억은 제각각일 가능성이 높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로 그를 만났다면 빼어난 논픽션 작가로, <올가의 반어법>에 반했다면 재능있는 소설가로, <대단한 책>을 읽고 감탄했다면 하루에 7권씩 읽어치우는 '독서 폭식가'로 그를 떠올릴 것이다. 공산당 간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체코 프라하로 이주, 그곳의 국제학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 일급의 일본인 러시아어 통역사는 그 화려한 프로필에 또 하나의 이력을 추가했다. 바로 '미식 에세이스트'다.

<미식견문록>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갖가지 음식을 접해본 저자가 자신의 경험은 물론 동화, 민담, 전설, 문화사 등을 총동원해 음식에 관해 풀어놓은 37편의 유쾌한 음식론이다.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하며 풀어놓는 해박한 지식도 그만이지만, "맛있는 것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대식가 가문"의 적통다운 배꼽 빼는 유머가 새콤달콤한 소스처럼 읽는 이를 톡 쏜다.

책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대부분 그가 어린시절 경험했던 것들이다. 표트르 바일과 알렉산드르 게니스의 <망명 러시아 요리>에 따르면, "사람을 고향과 이어주는 끈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질긴 끈은 위(胃)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우메보시(매실장아찌)가 들어간 주먹밥. 어린 입맛에 제 존재를 강렬하게 새겨넣은 이 고향의 음식에서 그는 "몇 번이나 절망을 추슬러 살아갈 용기와 힘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우메보시와 쌀밥은 저자가 1986년 라식 수술을 받기 위해 러시아로 온 일본인 여성을 통역했을 때도 괴력을 발휘했다. 수술 후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절규하던 그 여성은 저자가 마련한 우메보시를 먹은 후 "어머, 중학교 이후 이렇게 잘 보이긴 처음이네" 하며 번쩍 눈을 떴다고.

고국의 맛을 잊지 못한 병사들로 인해 전력 약화로 고전했던 전쟁들의 역사를 훑으면서는 "맛없는 음식을 인내한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식민지에 오래 주둔하려면 본국 음식이 매력 없을수록 유리하기 때문. 오늘날 세계사의 비극은 고로 영국과 미국의 음식이 맛이 없는 탓이기도 하다.

저자는 "최근 지구의 급속한 인구증가와 함께 식량위기가 문제가 되어도 괜한 걱정이 아닐까 싶다"고 낙관하는데 그 근거가 재미나다. "먹을거리의 범위를 넓혀가는 인간의 능력은 그리 얕볼 게 아니"기 때문. 저자는 "바퀴벌레나 까마귀, 쥐새끼 같은 걸 맛있게 먹을 수만 있다면 식량문제는 단번에 해소될 것"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제안한다. 서양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자가 악마의 식량으로 배척되다가 18세기 이후에야 '시민권'을 얻었다는 문화사적 추적이 덧붙는 걸 보면 진담 쪽에 좀 더 무게가 실리지만.(박선영기자)  

09. 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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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1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1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9-07-12 11:35   좋아요 0 | URL
이 사람 유명한 줄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한 권도 읽은 책이 없네요.
하루에 7권이라! 정말 독서 폭식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겠군요.
이 책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7-12 13:59   좋아요 0 | URL
고종석 씨도 열혈 독자랍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7-12 14:44   좋아요 0 | URL
로쟈 님이 좋아하겠군요.요네하라 누나의 책이 계속 나오니까요...살아 있었으면 왕성하게 활동할텐데,아쉽죠...

로쟈 2009-07-12 21:13   좋아요 0 | URL
일본에 번역된 러시아책들 정보에 대해서는 거의 독보적이에요...

베토벤 2009-07-12 15:37   좋아요 0 | URL
ㄴ 60이 안되어서 '요절'하셨더군요. 책 잘 읽고 있다가 다음을 기다리던 기억이 나네요.

로쟈 2009-07-12 21:12   좋아요 0 | URL
네, 암으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죠. 유머가 아주 풍부한 분인데...

2009-07-12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2 2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09-07-14 01:45   좋아요 0 | URL
저도 여기 저기 많이 다니게 되다 보니 다양한 음식에 접하게 되고 새로운 음식에 대한 과감한(?) 도전도 해보게 되는데 음식이라는 게 결국 습관이어서 어릴 때부터 익숙하던 음식에서 느껴지는 편안한 맛을 능가하는 새로운 음식은 맛보기 힘들더군요^^ 특히 한국 음식의 중독성은 좀 독특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7-14 08:04   좋아요 0 | URL
파리에서 돌아오셨나요?^^

2009-07-15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6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브뤼노 라투르의 정치생태학

이번주 관심도서의 하나는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무리, 2009)인데, 서평을 쓰게 될 수도 있어서 리뷰기사를 찾아보았다. 참고삼아 스크랩해놓는다.

 

세계일보(09. 07. 11) "근대성의 큰 문제는 비대칭성 '우리는 근대인' 관념을 버려야" 

근대인은 전근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끝없는 단절을 시도했다. 그 일정한 성과를 바탕으로 태동한 용어가 ‘근대성’이다. 근대성은 사실과 가치, 주체와 대상, 자연과 사회, 야만과 문명을 분리하며 전 시대와 차별을 이뤄냈다.

학계를 중심으로 반성의 계기가 작동된 때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일련의 국제환경회의 등이 열리면서 근대성에 대한 재고의 시각이 싹텄다. 사회의 단절적 진보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 등으로 근대성이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하면서 나타난 흐름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근대성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는 반근대주의적 입장과 근대성의 위기를 냉소적 관점에서 관조하는 탈근대주의적 시각이 분출했다.

하버드 대학 교수를 지낸 브뤼노 라투르(62) 프랑스 파리정치대학 교수는 ‘인류의 근대성’에 대한 자부심에 의문을 품은 대표적인 학자다. 반근대주의와 탈근대주의 모두를 극복해 근대 세계와 비근대 세계의 입장 절충을 시도해 왔다. 그의 이론은 일명 ‘근대성 없는 계몽주의’나 ‘사물로 확장된 민주주의’라고 할 만하다. 



이런 시각이 담긴 그의 역서 ‘근대성에 관한 성찰과 비판’(갈무리)이 최근 국내에서 출간됐다. 1990년대 출간 이후 24개 나라에서 번역된 책이다. 근대성 관련 저서로는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것에 비하면 국내 번역은 꽤 늦었다.  

라투르 교수는 근대인의 성공을 이끌었던 ‘비대칭성’이 위기도 불렀다고 주장한다. 비대칭성은 ‘이것’과 ‘저것’을 가르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말한다. 라투르 교수가 지적하는 ‘근대성의 비대칭성’의 문제점은 더 있다.

“이분법적인 사고도 물론 문제가 됩니다. 더 나아가 이분법이 분할한 세계의 두 부분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시도도 비대칭성으로 볼 수 있어요. 그 절정은 마르크스주의에서 경험했지요. 마르크스주의에서 과학과 이념의 구분은 근대성 내부의 자연과 사회, 사실과 가치, 대상과 주체를 분할하면서 비대칭성을 드러냈지요.”

근대성의 문제는 자본주의나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잘 드러난다. 근대성의 문제는 전근대인(과거)과 근대인(현재)을 나누고, 근대 문명 외부의 ‘그들’과 ‘우리 현대인’을 나누는 데서도 확인된다. 인류학은 이런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학문분과이다.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를 연구할 때, 인류학자의 태도는 일관적이지 못하다.

“인류학자들이 전통사회를 연구할 때는 관습과 문화 등을 고려해 통합적으로 접근합니다. 근대사회를 연구할 때는 문화의 지엽적이고 주변적인 것에 중점을 두는 연구방법과는 차이가 있지요. 인류학자가 원시부족의 주술사를 연구하듯이, 똑같은 방식으로 현대사회 실험실의 공학자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근대와 비근대의 절충인 하이브리드 방식. 하이브리드 방식은 주체와 객체의 완전한 단절도 배격한다. 하이브리드 방식은 비대칭성 극복도 가능하게 한다. 하이브리드를 자유롭게 증식시킬 수 있는 근대인의 실천과 하이브리드의 연결망을 이용하는 비근대인의 실천이 결합할 때 가능하다. 그래서 라투르 교수는 선언한다.

“근대성의 가장 큰 문제인 비대칭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근대인이었다는 관념을 폐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박종현 기자) 

09. 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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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는 근대인인가 중국인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7-20 01:21 
    저녁에 버스를 타고 전철역까지 가서 '한겨레21'을 사들고 왔다. 엊그제 퇴고도 못한 원고를 워낙에 황급하게 보낸 탓에 '오류'는 없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무리, 2009)를 서평대상으로 삼았지만 코드를 잘 맞추지 못해서 독서에 애를 먹었다. 기사를 확인해보니 크게 '실수'한 대목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필자가 담당인 구둘래기자의
 
 
evol 2009-07-11 10:13   좋아요 0 | URL
라투어 글은 프랑스 학자답지 않게(?) 어렵지 않고 영미식의 유머가 넘쳐서 재미잇게 읽엇던 걸로 생각합니다. 그의 사회학 입문서 Assembling the social도 번역된다고 소식 전해주셧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실 그는 사회학 sociology라는 개념에 반대하기 때문에 사회학 입문서라고 하면 좀 모순이긴 하죠. 대신 'i wish i could use the term associology' 같은 농담같은 문장이 잇엇는데, 그는 사회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대신 무한한 '연결 association'만이 잇다고 주장합니다. 사회과학의 주체와 구조를 뒤집는 주장입니다 (이것도 역시 이분법에 대한 일관된 반대의 연장선상입니다). 따라서 공부도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끝없이 기술 description만 하라고 주장합니다. 구조와 인과관계 같은 개념에 반대하니 설명도 반대하고... 그래서 안 읽어봣지만 실험실에 대한 그의 인류학적 작업은 끝없는 기술이 이어져서 읽기가 곤혹스럽다고 하더군요.

로쟈 2009-07-12 11:31   좋아요 0 | URL
영어로는 '라투어'라고 읽겠군요. 'associology'란 말이 그럴 듯합니다.^^

virtuepeak 2009-07-11 12:22   좋아요 0 | URL
소개 기사만 보니 언뜻 나카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이라든가 김상봉의 '서로주체성' 같은 개념들이 떠오르네요.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로쟈 2009-07-12 11:29   좋아요 0 | URL
저도 읽어봐야 알 듯합니다.^^;

코카추잉 2010-10-04 10:51   좋아요 0 | URL
나카자와 신이치는 <대칭성 인류학>의 '카이에 소바주에 대해서'라는 서문에 해당하는 글에서 라투르의 이 책이 끼친 영향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추구해온 것의 '이름'을 알게 되었노라면서. 그나저나 왜 이냐시오 마테-블랑코의 책이 번역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evol 2009-07-17 16:33   좋아요 0 | URL
제목이 Reassembling the social이군요. Re를 빼먹엇습니다 ㅋ
 

자작시 몇 편이 생각나서 옮겨놓는다. 모두 95년 여름에 쓴 것들이다. 아직 이파리였고 청춘이었다. 카뮈가 재혼을 하고 <이방인>을 쓴 나이였다. 나는 "한때는 모두 이파리였다"고 적었다. 지나고 보니 정말로 그렇다. "한때는 모두 이파리였다..."   

이파리들이 푸르다

이파리들이 이 여름 한껏 푸르다 한때는 모두 이파리였다 이파리 축에 끼여 한 시절이 좋았다 햇빛이 좋았고 꽃내음이 좋았고 바람둥이들이 좋았다 어디에 기대어도 모자람이 없어라 오죽하면 낯짝이 붉어지도록 지리멸렬하도록 죽어 백골난망(白骨難忘) 이 세상 거름이 되도록  

우리는 열매들이야

이 뙤약볕만으로 우리는 익어 더는 볼 것도 없이 오동나무 그늘이 아닌 데야 익어도 그만 아주 콱 익어버려 온통 열애의 날들이야 이렇듯 짱짱한 은총이야 낯뜨거움이야 더는 볼 것도 없이 눈먼 사랑이야 그리움의 허공이야 이 뙤약볕만으로 우리는 익어 바짝 마른 그리움이야 더는 태울 것도 없는 마음이야 아주 그만이야 


 
푸른 사과

나를 부드럽게 대해줘 푸른 사과는 꼭지를 따라 빙글빙글 돈다 빛과 그늘이 그렇게 세상을 싸고돈다 푸른 사과의 영토에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푸른 사과는 다만 그늘에서 익어간다 나를 부드럽게 안아줘 푸른 사과는 뛰어가고 싶고 날아가고 싶고 춤을 추고 싶다 푸른 사과는 당나귀가 되고 싶고 나팔꽃이 되고 싶다 나를 제발 부드럽게 대해줘 



꽃들이 비에 젖는다

비는 언제나 꽃을 들고 있다 꽃들은 언제나 종알댄다 비는 언제나 막연히 기다린다 꽃들이 비에 젖는다 비는 마른 꽃을 본 적이 없다 꽃들은 언제나 종알댄다 비는 언제나 그친다 꽃들은 언제나 다그친다 비는 푼돈을 벌러 다시 빗속으로 나간다 비는 언제나 꽃을 들고 있다 꽃들이 비에 젖는다 

 

09. 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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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7-12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매를 기대하기에는, 제 새순이 막 돋았거든요. 지금은 영토를 넓히는 중입니다. 가끔 종알대는 새들이 날아 들어 산만합니다. 저는 꽃을 향해 마음을 더 열어야 합니다.

로쟈 2009-07-11 09:01   좋아요 0 | URL
아직 한창이시군요.^^

콩세알 2009-07-1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좋으네요. 특히 첫번째 시가..이파리 사이로 바람이 선들하게 부는 듯한 리듬이 느껴져요.

로쟈 2009-07-12 11:29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시니 좋습니다.^^

Sati 2009-08-04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번째 사진 출처가 어딘가요? 훔쳐가도 되는 건지요?

로쟈 2009-08-04 23:0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다 훔쳐온 것들입니다.^^
 

내일자 한겨레에서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연재를 옮겨놓는다. <호모 사케르>로 소개된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을 다루고 있어서다. 필자는 <호모 사케르>(새물결, 2008)의 역자인 박진우 교수다. 아감벤의 이 연작은 국내에서도 완간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⑬ 조르조 아감벤 Giorgio Agamben

1942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로마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이후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의 정치사상을 주제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 간행된 발터 베냐민의 이탈리아어판 전집 편집자를 지낸 뒤 베로나대학과 유럽·미국의 주요 대학에서 미학과 철학을 강의했다. 현재 베네치아건축대의 철학 교수로 있다. 대표작인 <호모 사케르>(Homo Sacer)는 이후 <아우슈비츠에서 남은 것>(1998), <예외 상태>(2002), <군림과 영광>(2007)을 거치면서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한겨레(09. 07. 11) '벌거벗은 생명’의 영속화에 던지는 경고 

현존하는 이탈리아의 대표적 철학자인 조르조 아감벤의 사유 세계 전모를 논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아감벤의 저술 활동, 특히 그의 주저는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권이 훨씬 넘는 저술들이 이미 세상이 나와 있으며, 한국 독자들도 지난 2년 사이에 두 권의 번역서를 접한 상황에서 그의 사유를 한층 상세히 재검토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다. <호모 사케르>라는 책, 그리고 이 책에 이르는 과정과 이후의 전개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동시대의 모든 사유와 고민들을 앞선 세기와는 단절된 형태로 근본적으로 되물어야 한다는 아감벤의 문제의식에 비춰 본다면, 또한 이를 통해 20세기가 결코 풀지 못한 과제들(여기에는 정치적 좌우의 대립, 계급과 인종의 대립, 법과 민주주의, 전체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과 같은 핵심적인 정치적 범주들이 포함된다)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사유를 모색하는 과제와 직접 마주친다면, <호모 사케르>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중요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아감벤은 원래 로마대학 출신의 법학도였다. 학창시절부터 이미 파졸리니, 모라비아 등이 주도한 지식인 서클에 적극 참여하면서 문학과 미학, 철학 분야로 사유 지평을 확대해 나갔다. 1970년대에 그는 자신에게 결정적인 흔적을 남긴 세 명의 사상가와 본격적으로 마주쳤다. 아비 바르부르크와 발터 베냐민, 마르틴 하이데거는 초기 아감벤의 문학적·미학적 사유뿐 아니라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정치철학적 사유의 핵심적 원천으로 기능하고 있다.  

1978년에 이탈리아어로 간행된 <발터 베냐민 전집>의 편집자로서 그의 이름이 유럽 지성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이래, 그가 직접 수집한 청년기 베냐민의 미발굴 서한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루어진 베냐민 사상 전체에 대한 급진적인 해석(그에 따르면 베냐민 사상의 진면목은 단순히 마르크스주의적 해석과 유대 신비주의적 해석의 자장 속에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기성 학계와의 갈등은 그의 명성을 유럽의 좁은 문학 연구자 서클의 범위를 넘어서게 만들었다. 이후 데리다·들뢰즈·낭시·바디우 등 프랑스 지식계의 지도자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면서 당시 프랑스 철학의 새로운 흐름을 자양분 삼아 자신의 사유를 한층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다. <아동기와 역사>에서 <산문의 이념>을 거쳐 <언어의 죽음>에 이르는 저술들은 이런 지적 여정과 편력을 반영한 중간 결과물이자, 동시에 다음 단계의 정치적 성찰을 탄생시킨 모태와도 같은 작품들이다.  

1995년에 처음 간행된 <호모 사케르>는 같은 이름으로 간행된 연작의 첫째 권에 해당하면서, 그의 사유의 전모를 밝히는 데서 반드시 거쳐야 할 대표작이다. 사회주의권 붕괴가 결코 ‘역사의 종언’일 수 없음을 증명했던 유고 내전의 쓰라린 경험은 그에게 정치를 본격적인 사유 대상으로 삼아야 할 필요성을 다시금 제기하였다. <호모 사케르>라는 이 낯선 제목은 원래 고대 로마법 전통 속에서 범죄자로 판정받은 자를 뜻하는데, 성스러운 자이자 저주받은 자여서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처벌 받지 않는 모순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저자는 이 용어를 통해 서양 정치철학의 근원적 패러다임을 재정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근대 이래의 정치이론이 오랫동안 주권자와 신민의 관계, 그리고 주권자와 법의 관계를 통해 정치의 본질을 규정해 왔던 것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라는 모순적인 존재를 통해 그는 정치를 궁극적으로 주권 권력과 ‘생명으로서의 삶’이 맺고 있는 ‘생명정치’의 관계로 재정의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니까 주권 권력에 의해 배제됨으로써 주권 속에 포함되는 이 모순적 존재, 즉 ‘벌거벗은 생명’의 존재는 법·주권·시민·인권처럼 오랫동안 서양 정치철학의 핵심 범주로 간주되었던 용어들을 의문에 부치게 만든다. 이 용어들은 결코 당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명정치의 맥락에서 그 의미가 재구성되어야 할 사유의 재료들인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처음 간행될 당시에는 아감벤의 필생의 사유가 응축된 ‘주저’로서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저자가 새롭게 시도한 정치철학적 사유의 단초들을 처음으로 대중 앞에 제기하는 사유 실험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파시즘의 역사적 경험과 기억, 나아가 아우슈비츠와 유대인 학살을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이 사회적 이슈로 변모할 때, <호모 사케르>가 제시했던 새로운 사유 모델은 한 차례 대중들의 충분한 시선을 끌 수 있었다. 복잡한 정치적·사회적 의미망 속에서 의미가 점차 모호해져 가던 기억·증언·재현 같은 주요 개념들에 대해 우리를 다시금 철학적 사유로 이끌어갔던 <아우슈비츠가 남긴 것 : 호모 사케르 3>이 대중적 성공을 거두면서, 그의 이름과 <호모 사케르>라는 저자의 패러다임은 새롭게 주목받은 것이다. 아울러 9·11 테러와 이어진 ‘테러와의 전쟁’은 <호모 사케르>가 언급했던 “예외 상태의 영속화”가 눈앞의 현실임을 역설함으로써, 그의 명성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가 볼 때 예외 상태란 법의 공백이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 시대 법질서의 핵심이기도 하다. 법보다 ‘법’의 ‘힘’이 우선하며, 그것은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라는 20세기 정치사의 양대 열쇳말이자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사유의 근본 단위를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호모 사케르>의 또다른 변용이자, 새로운 영역에서의 이론적 시도다. 2007년에 발표된 <군림과 영광>이라는 또 하나의 <호모 사케르> 연작은 ‘영광’의 스펙터클, 그것이 가리고 있는 경제 우선의 통치 메커니즘의 계보학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 경제가 정치를 압도하는 근대 생명정치의 특성을 너무나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한국 사회가 새롭게 발표되는 그의 저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이제는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제 우리 앞에는 마지막 질문이 놓여 있다. 과연 이처럼 주권 권력으로부터 배제됨으로써 공동체에 포함되어 있는 ‘호모 사케르’들의 사회, 혹은 ‘영속적인 예외 상태’ 속에서의 삶, 그리고 ‘군림과 영광’의 스펙터클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변화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는가. 과연 <호모 사케르> 속에서 지금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아니, <호모 사케르>가 전개한 수많은 논의들을 거치고 난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변화와 그 주체라는 오랜 패러다임을 오늘의 스펙터클 사회 속에서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호모 사케르> 연작이 진행되면서, 그가 가장 시달렸던 과제는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해답은 모호한 상황에서, 다행히도 저자는 우리에게 최종 답안을 전해 줄 것이라 약속한다. 그것이 바로 <호모 사케르> 연작이 도달할 최후의 종착점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가 여전히 ‘완성’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 거대한 연구 프로젝트의 종결을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는 셈이다.(박진우/연세대 연구교수) 

09. 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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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 2009-07-11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슈비츠가 남긴 것>의 "대중적 성공"이라고 하면 몇 부일까요? 이번 주 강연 때 로쟈 님 책이 5000부 팔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편으로는 '그래도 괜찮군'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로쟈인데'하는 아쉬움이 동시에 들었더랬습니다. 학계에서는 최신 정치 이론들의 보고로 주목되고 있는 이탈리아에서 대중적 성공이라고 하면 몇 부 정도 될지 궁금하군요.

로쟈 2009-07-12 11:28   좋아요 0 | URL
글쎄요, 이탈리아 사정은 저도 잘 모르겠지만 <말과 사물>처럼 팔려나갔을 수도 있지요. 수만 부씩. 한데, 이론서의 경우엔 번역시장이 또 있기 때문에 '올인'할 수도 있겠죠. 아감벤은 아주 적극적으로 저작권을 관리한다고 합니다...

2009-07-11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2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2 1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2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게슴츠레 2009-07-13 13:25   좋아요 0 | URL
흐흐 옙, 오히려 저한테는 좀 잘 된(?) 거 같군요. 다음에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