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푸코와 주체의 해석학

13년 전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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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몽상가들'과 '69 식스티나인'에 대하여

15년 전에 두 영화에 대해 쓰고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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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찰스 디킨스(1821-1870) 사후 150주년이 되는 해다. 딱히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디킨스 정도의 간판 작가라면 작품선집이야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이번에는 시공사에서 세권짜리 선집이 나왔는데, 첫 장편 <픽윅 클럽 여행기>(1836)가 들어 있어서 이 페이퍼를 적는다. 다른 두 작품, <올리버 트위스트>(1837), <두 도시 이야기>(1859)는 이미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는 상태. 















"<픽윅 클럽 여행기>는 국내 초역으로 소개되는 디킨스의 첫 장편소설이다. 대부분의 디킨스 작품이 그렇듯이, 이 작품 역시 1836년 4월부터 1837년 11월까지 신문에 연재 형식으로 발표되었다. '픽윅 클럽'의 설립자이자 종신 회장 새뮤얼 픽윅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충실한 회원 트레이시 터프먼, 너새니얼 윙클, 오거스터스 스노드그래스와 함께 런던에서 출발하여 외딴 전원으로 여행을 떠난다. 언뜻 보면 일련의 모험들을 나열한 이 평범한 여행기가 독자들을 매료시키고 디킨스를 본격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것은 단연 캐릭터의 힘이다."


이제야 첫 번역본이 나온 건 짐작할 수 있는 이유 때문이다. 방대한 분량. 번역본이 1268쪽(참고로 문학동네의 <안나 카레니나> 단권판이 1560쪽이다). 디킨스의 장편소설은 미완성작까지 포함해서 15편이다. 이 가운데 첫 스타트가 되는 작품. 물론 오리지널하게 디킨스표 소설의 출발점이 되는 건 <올리버 트위스트>다. 디킨스 강의에서는 그래서 주로 <올리버 트위스트>와 <위대한 유산>을 가장 많이 다루었다. <두 도시 이야기>와 <어려운 시절>이 이어서 다룬 작품들. 과제는 언젠가 <데이비드 코퍼필드>, <황폐한 집>, <작은 도릿> 등도 강의에서 읽어보는 것이다. 이 작품들의 새 번역본이 나오길 기대하는 이유.


참고로, 세계문학전집판으로 나와 있는 디킨스의 작품들이다. 대표작 가운데 하나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은 중편이다. 


<픽윅 클럽 여행기>: 시공사

<올리버 트위스트>: 민음사, 시공사

<크리스마스 캐럴>: 펭귄클래식

<데이비드 코퍼필드>: 동서문화사

<황폐한 집>: 동서문화사

<두 도시 이야기>: 동서문화사, 시공사, 펭귄클래식, 창비

<위대한 유산>: 동서문화사, 민음사,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판으로 한정하면 생각보다 많지 않은 작품이 소개돼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조금 특이 판본으로는 '비꽃 세계 고전문학'으로 나오는 디킨스다. 작품 편수로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포함하면) 7종으로 가장 많다.



비꽃판 디킨스는 1인 번역이라는 점도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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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랜드 2020-03-2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꽃출판사는 김옥수 역자의 1인출판사 입니다. 이양반이 영문학 전공에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번역했던 작가 입니다. 개인적으로 믿고 보는 역자중 한명이구요. 황폐한 집과 리틀 도릿 역시 올해 안으로 출간예정이라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로쟈 2020-03-27 23:32   좋아요 0 | URL
디테일한 문제인데, 번역이 좋아도 <데이비 코퍼필드> 같은 경우 3권짜리고 책값이 39,000원이에요(동서문화사 보급판은 2권짜리 18000원). 그러면 강의에서 쓰기가 어렵습니다. <작은 도릿>(한국문화사)도 마찬가지. 4권짜리에 6만원이면 ‘보급판‘이라고 할 수 없고, 강의 교재로 쓸 수 없지요...
 

이번주 한겨레에 실을 '언어의 경계에서' 꼭지를 옮겨놓는다. 새로 번역돼 나온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도서출판b)에 대해 적었다. 세번째 번역본인데, 자세한 주석과 해제를 통해서 이 문제적인 16세기 저작의 의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겨레(20. 03. 27) 노예는 스스로 노예다움을 포기할 수 있는가


16세기 프랑스의 젊은 인문주의자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이 한차례 더 번역되었다. ‘젊은’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그가 33살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29편의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했지만 오늘날 라 보에시라는 이름은 그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쓰고 사후에야 간행된 <자발적 복종에 대한 논설>을 통해 기억된다. ‘격문’으로도 일컬어지는 짧은 책자가 여러 차례 번역된 것은 이 저작의 특이한 현재성 덕분이다.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수용되고 해석된 <자발적 복종>의 운명이 한국어판에도 반영되었다고 할까.


사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라 보에시는 당대의 인문주의자로 세 살 아래였던 몽테뉴와 절친했고(몽테뉴는 그를 ‘영혼의 형제’라고 불렀다),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고들은 몽테뉴에게 넘겨진다. 몽테뉴는 <자발적 복종>을 자신의 <에세>에 포함하여 출간하겠다고 공언하지만 끝내 생전에는 출간하지 않는다. ‘자발적 복종’의 내용이 외부에 미리 알려지면서 군주제의 폭정에 맞서 선동을 촉구하는 불온한 책자로 간주돼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실상 몽테뉴는 군주제에 반대하지 않았고 <자발적 복종>도 군주제보다는 폭정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군주제에 대한 라 보에시의 태도는 모호하다.


하지만 그와 무관하게 <자발적 복종>은 민중봉기를 촉구하는 작품으로 수용되었고 이러한 위상은 18세기 프랑스혁명기에 더 강화되었다. 독재에 대한 증오를 담은 저작으로 읽히면서 라 보에시는 급기야 급진적 혁명주의자로까지 치켜세워진다. 이러한 이미지는 20세기에도 이어져서 <자발적 복종>은 프랑스 공산당의 ‘민중의 총서’에 실리고 젊은 인문주의자는 노동해방의 주창자이자 민중의 구원자로까지 격상되었다. <자발적 복종>의 앞선 번역본들이 우리에게 소개한 라 보에시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사실 <자발적 복종>의 몇몇 대목은 그런 이미지에 부합한다. “한 사람이 수십만의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들에게서 자유를 약탈하는 일은 도처에서 그리고 매일같이 벌어진다”는 진단에서 “나라 전체가 그에 대한 복종에 동의하지만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 무너지게 된다”는 처방까지 고려하면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도 간단해 보이는 처방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폭군에 맞서 그들을 떠받드는 것을 멈추기만 하면 민중은 자유를 쟁취할 수 있지만 “그들은 자유를 물리치고 굴레를 찬다.” 바로 이러한 현상을 라 보에시는 ‘자발적 복종’이라고 부른다. 자발적 복종 체제에서 스스로를 학대하는 자 역시 민중이다. 역설적이게도 민중은 폭정의 협력자가 되는 것이다.


적어도 라 보에시는 민중이 자발적 복종의 굴레를 걷어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낙관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첫째,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자랐기 때문이다. 복종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폭군의 통치를 받으며 비겁하고 유약해지기 때문이다. 폭군은 민중을 속이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떤 미끼들이 있었던가. “연극, 놀이, 익살극, 공연, 검투경기, 신기한 동물들, 그림들, 그리고 그러그러한 다른 마약들”이 복종의 미끼였고 자유의 대가였다. 라 보에시의 이러한 분석은 근대 이데올로기론을 선취하는 것이면서 <자발적 복종>의 현재성을 새로 음미하게 해준다. <자발적 복종>은 해방의 가능성을 선동하기보다는 그 어려움을 숙고하게 해준다는 데서 새롭게 의의를 찾아야 할 듯싶다.
















P.S. '자발적 복종'으로부터의 해방은 홍세화 선생의 책들에서 반복되는 주제다. 더 자세히 적지 않았지만 <자발적 복종>에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민중에 대한 라 보에시의 인식은 <1984>에서 프롤(무산계급)에 대한 조지 오웰의 인식과 닮았다. 말미에서 라 보에시는 배움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열린책들)은 그런 맥락에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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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의 서평집이 오랜만에 출간되었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라티오). '책읽기가 지식이 되기까지'가 부제인데, 제목과 부제가 겨냥하는 것이 모두 서평이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이 서평에 대한 정의이며 책읽기를 지식으로 만들어주어야 하는 게 또한 서평의 역할이다. '오랜만'이라고 적었는데, 서평집으로는 <책과 세계>(2004)와 <주제>(2005) 이후 15년간 강의와 방송활동을 하면서 쓴 책이라고 소개된다. 그 사이에는 강의책들이 있었다. 
















"서평집이지만 서평집 그 이상이기도 하다. 단지 서평들을 모아 놓은 서평집은 하나의 주제로 일관하기가 어려워 읽고 나면 읽어야 할 책 목록만 남기 쉬운데, 이 책은 내용과 형식에 따라 주제를 일관하고 있어 부제처럼 ‘책읽기가 지식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인용이 풍부한 서평, 수준(초급, 중급, 고급)에 따라 작성된 서평, 논고, 논문, 역자 후기 등 다양한 형식의 서평을 포괄하고 있어서, 글을 쓰고자 하는 목적에 따라 참조할 수 있는 일종의 ‘책에 관한 글 쓰기’ 안내서이기도 하다."
















'책에 관한 글쓰기' 안내서를 자임하는 일종의 전략적인 서평책이다. 더 간단히는 강유원식 서평쓰기 책이라고 해도 되겠다. 강유원의 저작으로 검색되는 첫 책은 <근대실천철학연구>(1998)인데, 짐작에 학위논문과 연관돼 보이지만 나는 실물로 보지 못했고, <인터넷으로 떠나는 철학여행1>(1998)도 시리즈로 기획됐던 것 같은데 역시 보지 못했다. 내가 처음 접한 건 <책>(2003)이라는 제목의 첫 서평집. 나대로의 분류에 따르면 <책>과 <주제>에 이어지는 것이 <책읽기의 끝과 시작>이다. 아마도 <책>이 절판된 상태라 그보다 널리 알려진 <책과 세계>를 언급한 것이리라. 거기에 <몸으로 하는 공부>(2005)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들이 강유원의 서평관과 공부관을 미리 엿보게 해준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은 그의 책을 읽어온 독자에게는 그 종합판으로 여겨진다. 


그의 공부관과 서평관은 <책읽기의 끝과 시작> 서문에 잘 정리돼 있다. 책읽기의 본래 목적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다,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한 입력이 아니라 자기화이다, 책읽기를 자기화하는 필수적인 방법이 서평쓰기다, 라는 것. 책은 자기화의 '단계'(레벨)를 실제 서평과 함께 제시하고 있다. 비유컨대 '책읽기로 몸만들기' 같은 과정이다. 독서를 섭식에 비유하자면 지식의 자기화는 음식을 근육으로 만드는 일에 해당한다. 그렇게 하기 위한 근육운동이 서평쓰기이고, 이 일련의 프로세스가 공부다. 


이번 서평집에서 특이하게 생각한 건 부록인데, '아주 긴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장미의 이름> 읽기'가 들어가 있다. 절판됐던 <장미의 이름 읽기>(2004)을 그대로 되살려놓았는데, 원래 제목도 그렇지만 작품에 대한 자세한 '읽기'에 해당한다. '아주 긴 서평'이라는 작명은 강유원식 유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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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브로긴 2020-03-28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유원 책은 책과 세계 한권 읽었는데, 추종자들이 많은 작가더군요.
약간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호르헤 수도사 느낌도 나는 것 같습니다. ‘장미의 이름 읽기‘도 궁금하네요...

로쟈 2020-03-28 15:48   좋아요 0 | URL
방송의 영향인지도.. <장미의 이름 읽기>는 말 그대로 충실히 읽기입니다. 해석이나 평가는 최대한 배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