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명철 교수의 프랑스혁명사 10부작이 완결되었다. 2015년말에 청 두 권으로 발을 뗀 여정이 최근 마지막 두 권이 추가되면서 만 4년이 되기 전에 마무리되었다. 9권 <공포정으로 가는 길>(여문책)과 10권 <반동의 시대>가 그 마지막 두 권이다. 프랑스문학을 강의하면서 아무래도 자주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 프랑스혁명의 경과와 의의인데 이만한 규모의 국내서가 나온 것은 이례적이면서 반가운 일이다. 게다가 무탈하게 완간되어 다행스럽다. 출간의 의의는 이렇게 소개된다.

˝세계 모든 혁명의 맏형 격이자 민주주의의 첫 실험장이었던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역사적 의미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양의 피를 뿌리며 진행된 프랑스 혁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반면 230년이나 흐른 현재 우리 민주주의의 수준이야말로 가히 세계 제일이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민주시민이 프랑스 혁명의 실패 요인을 밑거름 삼아 세계사에 길이 남을 ‘촛불혁명’을 완수하는 데 매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한국형 혁명의 여정을 나는 민주주의 제도의 도입(1948)부터 지난 촛불혁명(2016)까지 장기적인 과정으로 본다. 프랑스혁명에서라면 대혁명(1789)부터 제3공화정 수립(1870)까지의 여정이다. 대락 80년 안팎의 스케일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하나의 표준형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 사이 각 국면에 대해서도 비교해볼 수 있는데 향후 그런 비교에 도움이 될 만한 책도 나오면 좋겠다. 프랑스혁명사와 관련하여 이 10부작 외에 요긴하게 참고할 수 있는 책은 가와노 겐지의 <짧게 쓴 프랑스혁명사>(두레)다. 분량 대비 가성비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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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10년 전에 쓴 글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책들에 대해 적었는데 그 사이에 에코는 유명을 달리했다. 지난봄 밀라노에 있는 그의 자택 건물 앞에 갔던 일이 떠오른다. 이미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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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350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푸시킨(푸슈킨)의 유일한 장편소설 <대위의 딸>이 역사소설로 갖는 의미에 대해서 적었다. 리뷰에서 언급한 <푸가초프의 역사>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는데, <대위의 딸>과 합본된 형태로 나온다면 가장 이상적이겠다. 지면에 나간 마지막 문장의 오타는 수정했다. 

















주간경향(19. 11. 04) 역사를 보충하는 문학적 진실


제정 러시아 시기 최대 농민반란이었던 푸가초프의 반란(1773~1775)을 소재로 푸시킨은 두 편의 작품을 쓴다. 하나는 역사서 <푸가초프의 역사>(1834)이고(황제 니콜라이 1세의 명령에 따라 <푸가초프 반란사>로 출간된다), 다른 하나가 역사소설 <대위의 딸>(1836)이다. 똑같은 역사적 사건을 각기 다른 두 장르의 글로 다룬 것은 역사와 문학, 어느 한쪽의 진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푸가초프의 역사>에 이어 쓴 <대위의 딸>을 통해서 푸시킨은 무엇을 보충하려고 한 것일까. 혹은 역사적 진실은 어떤 문학적 진실에 의해서 보충되어야 할까. <대위의 딸>을 읽을 때마다 염두에 두게 되는 질문이다.


문학과 역사의 상호 보완관계는 <대위의 딸>에서 ‘역사’와 ‘가족연대기’의 대립구도로 설정된다. 화자이자 수기의 저자인 그리뇨프는 푸가초프 반란의 한 격전지를 둘러보고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렌부르크 봉쇄를 묘사하지 않으련다. 이는 역사의 영역이지 가족연대기의 영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뇨프의 이런 구분법은 그대로 푸시킨의 구분법으로 보아도 좋겠다. 푸시킨 자신이 푸가초프 반란의 격전지를 직접 답사하고 관련자료를 두루 열람하였기에 당시의 참담한 상황과 농민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위의 딸>의 이야기는 그리뇨프의 개인적 경험에 한정된다.

가족연대기이자 한 개인의 수기로 범위가 축소되는 대신에 소설의 방점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귀족 출신의 장교로 지방의 한 요새에 배속되는 그리뇨프는 근무지로 가던 중에 눈보라를 만난다. 다행히 한 농부를 길 안내인으로 만나서 도움을 받고 그에게 답례로 토끼가죽 외투를 건넨다. 이 농부가 정부군을 피해 은신 중이던 푸가초프였다는 사실을 그리뇨프는 나중에야 알게 된다. 자신의 요새가 반란군에 의해 함락되고 체포돼 농민 황제를 자처한 푸가초프의 면전에 나가서다. 푸가초프는 적군의 장교지만 그리뇨프의 후의를 상기하고 자비를 베푼다. 두 사람은 각각 반란군 수괴와 제국의 장교지만 서로 우정을 나눈다.


실제 현실에서는 벌어지기 어려운 이러한 장면은 소설의 말미에서 한 번 더 연출된다. 푸가초프의 반란이 진압되고 그리뇨프는 푸가초프와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아 체포돼 반역죄로 처형당할 상황에 처한다. 이때 마샤가 그리뇨프의 구명을 위해 황실을 찾아가 한 귀부인과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나중에 그녀가 여제 예카테리나 2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푸가초프가 그랬듯이 여제 역시도 그리뇨프에게 선처를 베푼다. 푸가초프의 환대와 예카테리나 여제의 자비는 실제 역사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비현실적 설정이다.


그렇지만 <대위의 딸>에 나타나는 자비라는 주제는 <푸가초프의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제대로 음미될 수 있다. 그리뇨프의 수기가 끝나자 덧붙여진 발행인의 말에는 푸가초프의 처형 장면이 들어가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반란의 경과도, 진압과정도, 그리고 최후의 처분도 모두 참혹했다. <대위의 딸>에서 푸시킨은 참혹했던 실제 역사를 최소화하는 대신에 가상의 환대와 자비를 집어넣는다. 미적 가상으로서 문학적 진실이란 냉혹한 역사적 진실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역사와 화해하려는 시도라는 것을 <대위의 딸>은 보여준다.


19.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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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266 2019-10-30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에 절절히 와 닿는 리뷰입니다 냉혹한 역사와 따듯한 인간영혼이 깃든 문학이 서로 조우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문학은 이런 면에서 실제적인 효용은 아니라도 인류가 나가야 할 방향을 가리켜줄 수 있다는 면에서 그래도.... 근데 좀 마음이 아프네요 우리 지금의 현실도 푸슈킨의 문학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면....

빵굽는건축가 2019-10-31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의 연대기와 가족의 연대기 사이에 있는 리뷰처럼 읽었어요.

모맘 2019-10-31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를 보충하는‘ 문학적 진실.
보충하고 싶은 역사가 많았다면,
보충하고 싶은 생각이 덜 드는 세상을 만들어야될텐데 참 쉽지가
않네요...
 
 전출처 : 로쟈 > 랑시에르의 가장자리에서

11년 전에 쓴 리뷰다. 랑시에르의 책은 최근에 나온(영어판) 소설론까지 구입해둔 터이지만 좀처럼 읽을 여유를 못 갖고 있다. 이런 리뷰를 쓴 지도 정말 오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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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다시 읽기‘에서 <데미안>을 다시 강의하면서 헤세 문학의 경로를 다시 생각한다. 알려진 대로 <데미안>(1919)은 헤세의 새로운 출발점이 된 작품. 당초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만약 신인문학상(폰타네상) 수상자로 지명되면서 커밍아웃하지 않았더라면 로맹 가리가 나중에 그랬듯이 에밀 싱클레어의 커리어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주로 <데미안> 이후 1920년대 작품들부터 강의에서 다루다 보니 헤세의 1910년대 작품이 강의목록에서는 빠지게 된다. 초기작 <페터 카멘친트>(1904)나 <수레바퀴 아래서>(1906)에서 곧장 <데미안>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보니 <게르트루트>(1910)와 <로스할데>(1914) 같은 예술가소설과 <크눌프>(1915) 같은 방랑자 소설을 정확하게 자리매김할 수 없었다(보통 주요작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분명 대표작을 다섯 편 이내로 한정하면 빠지게 되겠지먄 헤세 소설의 진화과정을 짚어보려고 하니 필히 검토가 필요하다.

<게르트루트>는 오래전에 <사랑의 삼중주>라는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중학생 때니까 대략 37년 전이다.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손에 들었던 것 같은데 음악 연주 장면이 나온다는 것 정도가 기억에 남아 있다. <로스할데>는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작품이고. <요양객>과 <동방순례>까지 포함하면 내게 헤세 읽기의 남은 과제목록이다. 요즘 교양소설이 어떻게 예술가소설로 전화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강의하다 보니 <게르트루트>와 <로스할데>의 자리도 새롭게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게는 헤세 읽기의 마지막 퍼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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