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 읽기' 연재 원고를 쓰다가 새로운 글이 없나 검색해봤는데, 중앙대 대학원신문에 한보희 연세대 강사가 쓴 글이 올라와 있다(사실 내가 다리를 놓은 글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지젝 관련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중앙대 대학원신문(10. 09. 01) 진리의 심연을 떠안는 주체의 정치  

슬라보예 지젝의 첫 영문 저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1989년에 출간되었다. 1989년은 대단히 상징적인 해이다. 그 해 봄 중국 공산당은 천안문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인민들!―를 탱크로 깔아뭉갰고 가을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으며,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도미노처럼 잇달아 붕괴하더니 마침내 소련의 해체로 끝장을 보고 말았다. 오늘날 1989년은 ‘사회주의의 공식적 사망년도’로 통용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현실 사회주의와 운명을 같이하게 되리라는 게 모두에게 분명해 보였던 바로 그 무렵, 놀랍게도 지젝은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을 준비하는 책을 내놓으며 두더지처럼, 만장일치의 합의를 무너트릴 땅굴을 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놀라운 데뷔작 이후 상재된 일군의 초기 저작들은 지젝을 단박에 서구 인문학계의 스타로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지젝이 이때부터 구가해온 성공 가도에는 아주 기이한 면이 있다. 그것은 지난 20년 간 소위 대세라고 여겨지던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최종적 승리, “역사의 종언”,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냉소적 회의주의 등등의 주류적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며 성취된 것이니 말이다.

지젝의 책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된 1995년, 이 싱싱하고 매력적인 이론가가 방금 우리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변증법적 유물론’의 혁신적 계승자란 생각은 당시 누구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지금도 지젝을 대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중요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지젝의 ‘레닌론’은 그 시금석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2인 3각’
1989년 이래로 좌파와 우파가 공유한 불문율 중 하나는 ‘마르크스는 괜찮아. 그러나 레닌은 안 돼!’였다. 지젝이 이 불문율에 제기하는 반론은 우선 이런 것이다. “레닌에 관해 말하지 않으려면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어라!” 어째서? 레닌이라는 이름은 마르크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코뮤니즘이라는 잠재력의 현동화(actualization)를 표상한다. 그는 마르크스의 교양적 독자가 아니라 실천적 마르크스주의자,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였다. 실천(praxis)이라는 끈에 의해, 마르크스와 레닌은 ‘2인 3각’ 달리기에서처럼 하나가 된다.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말에는 언제나 주의가 필요하다. 경기를 해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2인 3각’은 둘이 하나가 되는 조화의 경험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기본적인 느낌은 ‘마음대로 되지 않음’과 ‘뒤뚱거림’이다.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란 표현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도 바로 그 대목이다. 살아있음의 구체적 체험들―예컨대 사랑―이 대개 그러하듯, 그것은 이질적인 타자와의 마찰, 부조화, 마치 장애물을 안고 뛰는 듯한 불편함을 선사한다. 물론 2인 3각의 묘미는 바로 그런 상호 타자성을 견디고 넘어설 때, 나의 다리도 너의 다리도 아닌 저 ‘세 번째의 다리’가 마치 내 다리인 것처럼, 보다 정확히 말해 내가 그 ‘타자의 다리’에 붙은 신체인 것처럼 움직일 때의 향락(juissance)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이라는 2인 3각에서 세 번째 다리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코뮤니즘’이다. 이 세 번째 다리―음탕한 농담에서 언제나 남근(phallus)을 가리키는―가 포퓰리즘적 지도자의 형상을 띠거나 파시즘적인 ‘우리’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는 점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 아니,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러한 위험을 과감히 가로질러가야 한다. 레닌의 위대함은 그가 (나중에 스탈린주의라 불리게 될) 그런 위험과 끝까지 투쟁하며 혁명적 실천을 거듭했다는 점에 있지, 애초 그런 위험을 멀리한 신중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레닌을 반복하자’는 지젝의 말
지젝이 강조하는 레닌은 1914년의 재난으로부터 1917년의 혁명에 이르기까지의 ‘불가해한 레닌’이다. 1914년 제2인터내셔널이 1차 대전을 용인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제까지의 사회주의 이념은 깡그리 무너져버렸다. 당시 레닌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엉뚱하게도 스위스 베른의 도서관에 처박혀 헤겔의 <논리학>을 정독했다. 지젝은 레닌이 헤겔 <논리학> 독해에서 통찰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큰 타자(Autre)는 없다’는 라캉의 명제와 연결시킨다. 그는 레닌이 그 큰 타자의 ‘빈자리’에서 허무가 아니라 주체의 자유를 실현할 장(場)을 발견하는, 혹은 바로 그 간극(빈자리)을 주체적으로 떠안는 '실재(the Real)의 행위'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지젝이 거듭 강조하는 것은 레닌의 바로 이 행위, 혁명에 대한 어떠한 전제나 보장도 사라진 큰 타자의 공백을 주체적으로 떠안는 몸짓(gesture)이다. 그것은 무조건적 의지주의가 아니며 레닌이 책에서 읽은 것을 현실에 과감하게 적용했다는 뜻도 물론 아니다. 마르크스라는 미완의 텍스트가 레닌이라는 ‘사라지는 매개자’를 통해 미완결의 현실이라는 텍스트와 조우한 이 사건의 변증법적 핵심은 사랑에 관한 라캉의 통찰―사랑은 두 개의 결핍이 만나 발생시키는 잉여이다―의 정치적 버전이라 할 만하다. 또한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자신의 간극을 열어 서로에게로 침투하는 사건이다. ‘역사의 종말’이라고 일컬어지는 후기 자본주의적 봉쇄와 교착상태 속에서 우리가 지금도 그런 주체와 객체의 동시적 ‘열림’을 경험할 수 있을까. 지젝은 이 물음을 화두삼아 1989년 이래로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적 상징계로 꽉 닫혀버린 우리시대에 꾸준히 ‘구멍’을 내왔고, 독자들은 그가 뚫는 구멍들을 해방의 가능성을 향한 ‘열림’으로 체험해왔다. 이것이 지젝의 기묘한 ‘반시대적’ 성공의 이유가 아닐까.

포퓰리즘을 넘어서
오늘날 파시즘의 유사 버전으로 도처에서 자라나고 있는 좌파적, 우파적 포퓰리즘들은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형식으로 봉합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간극의 실재를 감지하기 시작했다는 표지이다. 비록 그것이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지도자와 대중들의 무분별한 요구가 직접적으로 결합하는 형태로 나타기는 하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치안이나 행정서비스로 환원되지 않는 본래적 ‘정치’가 여전히 가능하다는 긍정적 표식이 들어있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포퓰리즘을 돌출적인 악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 구성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라클라우에 동의한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주체(대중)가 자신의 수치와 대면해야 할 사회적 적대의 심연을 사이비 적대―이른바 좌빨과 촛불좀비에서부터, 열폭하는 찌질이와 쥐박이에 이르는 온갖 혐오의 형상들―를 통해 회피하고 기성의 욕망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요구만을 계속하는 ‘증상’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비판받아야 할 무책임과 비진리, 그리고 비주체의 정치이다. 포퓰리즘의 문제는 그것이 인민의 열망과 불만을 정치적 비전으로 발언하지 못하고 번역하지 못한 (정치 엘리트만이 아니라) 인민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기념비라는 데 있다.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이론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결국 이 주체의 간극과 그것을 떠안는 ‘행위’의 문제로 집약된다. 포퓰리즘 정치에서 대중은 여전히 지도자와 구분되는 객체(대상)의 자리에 머문다. 거기에는 (상상적, 상징적) 자기를 부정할 때 비로소 생성되는 ‘실재의 주체’로서의 대중 자신이 결여돼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포퓰리즘에 대한 라클라우의 담론에도 이 ‘실체이자 주체’로 도약하는 대중의 ‘행위’, 한마디로 ‘레닌적 제스처’가 결여돼 있다.

포퓰리즘을 넘어서는 레닌적 ‘진리의 정치학’은 진리를 소유한 자―그는 언제나 물화된 진리의 소유물이 될 수밖에 없다―의 독단적 통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타자를 향한 우리 자신의 물음(問)이 열리는 구멍(口)에 뛰어들어 자신을 새로운 역사적 형세(constellation)를 여는 문(門)으로 변화시키는, 실체이자 주체인 진리가 되어가는, 우리 삶의 과정 자체이다. 지젝은 이를 “생성 중인 레닌”이라 불렀다. 우리가 지젝의 텍스트와 ‘2인 3각’ 달리기를 해야 할 운동장도 그 주체적 생성의 시공간으로서의 ‘삶-정치’이다.(한보희/ 연세대 강사)  

10.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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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예고한 대로 '로쟈의 책읽기 2000-2010'이란 부제를 단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가 이번주에 출간된다. 인쇄소에서 금요일에 나오는 걸로 아는데, 일반 서점에는 내주쯤 풀릴 듯싶다. 알라딘에도 예약주문을 하면 14일에 받을 수 있는 걸로 뜬다. 단독 저서로는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에 이어서 두번째 책이지만, 공저와 공역서까지 포함하면 몇 권 더 되길래 겸사겸사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지난 10년간 로쟈가 살아온 '흔적'이라고 해도 좋겠다. 세월이 지나면 다 바래게 되겠지만, 그래도 연이어 책들이 나오는 향후 몇년간은 더 진해질 것이다. 그간에 격려해주신 분들과 보람을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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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자유- 로쟈의 책읽기 2000-2010
이현우(로쟈) 지음 / 현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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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인문학 서재-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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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재장전-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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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08 19:11   좋아요 0 | URL
땡스투는 누구에게 하고 사야하죠?ㅋㅋㅋ
아는 분께서 리뷰를 써주시면 꼭 추천 누르고 구입해야겠슴돠^^

로쟈 2010-09-08 19: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마기님이 리뷰를 일착으로 써주시죠.^^

비로그인 2010-09-09 09:27   좋아요 0 | URL
ㅎㅎ후와님이나 파란여우님께서 증말 믓지게 써주실텐데요~
솔직히 그 두 분의 리뷰도 이 책 만큼이나 기다려집니다.^^

로쟈 2010-09-10 07:19   좋아요 0 | URL
파란여우님이야 원래 그랬지만 후와님도 어느새 팬들이 많아졌네요.^^

2010-09-08 1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8 1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8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8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ecatfull 2010-09-08 20:49   좋아요 0 | URL
이르면 일요일 와우북 행사에 가서도 책을 만날 수 있는 건가요? ^^;

로쟈 2010-09-08 20:49   좋아요 0 | URL
네, 와우북 행사때는 아마 현장판매를 할 거 같습니다...

2010-09-09 0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9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쉽싸리 2010-09-09 08:29   좋아요 0 | URL
두툼하니, 좋네요.

로쟈 2010-09-09 09:06   좋아요 0 | URL
600쪽이 마지노선이었습니다.^^

람혼 2010-09-09 22:43   좋아요 0 | URL
두 번째 책의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잘 챙겨서 꼼꼼히 읽어보겠습니다.^^

로쟈 2010-09-10 07:18   좋아요 0 | URL
감사. 통독할 책은 아니고 서재를 즐겨찾는 분들에겐 '기념품' 정도일 거예요. 람혼님도 곧 나오지 않나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루체오페르 2010-09-09 23:18   좋아요 0 | URL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로쟈 2010-09-10 07:1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2010-09-11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1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9-11 18:45   좋아요 0 | URL
<로쟈의 인문학 서재> 로 이 블로그를 알게 되었는데, 두번째 저서 <책을 읽을 자유>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로쟈 2010-09-13 08: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우상규 2010-09-13 09:44   좋아요 0 | URL
두번째 저서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로쟈님의 팬 중 한 사람으로서,
책이 많이 팔려서, 책사시느라고 쓴 금액을 훌~쩍 넘어갔으면 하네요^^

jeounju 2010-09-15 14:15   좋아요 0 | URL
축하드립니다~~~ 로쟈님의 블로그 늘 애독하고 있습니다. 알라딘에서 지금 주문. ㅎㅎㅎ 기다려지네요. 책, 정말 좋죠? 읽는 속도가 욕망을 따라가지 못해 늘 책상 위에 쌓여 있지만
왜 이렇게 책만 보면 행복한지... 로쟈님 책 만날 생각하니 아, 마구마구 행복해 집니다~~~

산그늘 2010-10-01 10:04   좋아요 0 | URL
득템했습니다. 펼쳐보니 니시카와 나가오의 책도 보이더군요.반가운 마음에...^^ 건필하십시오.

로쟈 2010-10-21 08: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은도끼 2010-10-20 16:29   좋아요 0 | URL
어찌 어찌 하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알게되어 읽고, 가끔 기웃거리다 두번째 책'책을 읽을 자유'를 읽었습니다(저한테는 분야도 생소하고 어려운 부분이 많아 그냥 숨 한번 들이마시면서 통과된 부분이 많습니다^^) 읽어보고 싶은 욕망과 어차피 사고 못읽으리라는 현실에 매번 고민입니다.......'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을 구매 클릭해서 왔는데 과연 펴 보고 진도가 나갈련지........^^ 건강하세요~~^^

로쟈 2010-10-21 08:23   좋아요 0 | URL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겁게 읽으시길 바래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9회

제목에서 이미 눈치챈 분들이 많을 텐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9회를 발췌해놓는다. 연재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됐지만, 아직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의 첫 장도 다 읽지 못했다. 예상보다 진도가 더딘 편인데, 초반에 개념 설명이 좀 들어가서 그런 걸로 봐주셔야겠다. 그렇다고 이후엔 진도가 더 빨라질지 아직은 장담할 수 없다. 아무튼 다음주까지는 1장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재계의 사막>은 총 5개의 장으로 돼 있다. 

  

다시 반복해보자. “소위 근본주의자의 테러라는 것도 실재계에 대한 열정의 표현이 아닐까?”(<실재계의 사막>, 35쪽)라는 것이 지젝의 물음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는 많은 사례들을 동원하여 따져본다. 지젝의 주된 방식이지만 안팎을 뒤집어가면서.  

 

영화 <바더 마인호프>(2008)를 통해서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풍경이지만 지젝은 먼저 1970년대 초 독일의 적군파(Red Army Faction) 테러의 배경에 주목한다. 신좌파 학생운동이 붕괴된 뒤 곁가지로 빠져나온 것이 적군파였는데, 그들은 학생운동 실패의 교훈을 이렇게 짚었다. (1)대중들이 비정치적 소비주의에 너무 깊이 침윤돼 있다. (2)통상적인 정치교육과 의식화로는 그들을 각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3)따라서 그들을 이데올로기적 무감각과 최면 상태에서 흔들어 깨우려면 더 폭력적인 개입이 필요하다(슈퍼마켓 폭파 같은). 이와 동일한 논리가 오늘날의 근본주의적 테러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이 역시도 일상적 이데올로기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서방 시민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지젝이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실재에 대한 열정’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역설이다. 그러한 열정은 그 정반대적인 ‘연극적 스펙터클’에서 절정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인데, 바로 그런 맥락에서 ‘실재에 대한 열정’은 ‘가상(semblance)에 대한 열정’이기도 하다(<실재계의 사막>에서는 ‘모사에 대한 열정’으로 옮겨졌다). 실재=가상? 그래서 역설이다. 지젝은 이렇게 정리한다.

만일 실재계에 대한 열정이 극적인 실재계 효과의 순수한 외관으로 끝난다면, 그와는 정반대로 외관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열정은 실재계에 대한 열정으로의 맹렬한 회귀로 끝나게 된다.(<실재계의 사막>, 37쪽)

(...)

여하튼 우리 주변에서도 면도날이나 담뱃불로 자해하는 경우를 아주 드물지는 않게 볼 수 있다. 그건 어떤 의도에서인가? ‘현실 자체’를 주장하기 위해서, 단언하기 위해서다. 거꾸로 말하면, 뭔가 사는 것 같지 않고, 현실이란 실감이 나지 않아서다. 자해는 그런 가운데 자아를 신체적 현실 안에 확고하게 근거지우기 위한 시도이다. “면도칼 자해자들에 대한 표준적인 보고에 따르면, 스스로 자해한 상처에서 붉고 따듯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나면 느낌이 다시 살아나고 현실에 확고히 뿌리내린 기분이라는 것이다.”(<탈이데올로기>, 19쪽) 물론 이러한 자해행위는 병리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떤 정상성을 회복하고, 완전한 정신병적 붕괴를 피하기 위한 병리적 시도이다 즉 자해자는 정신병자가 아니라, 정신병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는 자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해 현상과 상관적인 것이 바로 우리 주변 환경의 ‘가상화(virtualization)’이다. 실체가 제거됨으로써 현실이 점점 더 가상현실화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예컨대, 카페인 없는 커피, 지방을 뺀 크림, 알코올 없는 맥주 등등. 섹스 없는 섹스로서 가상섹스(혹은 사이버섹스)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고, 전쟁 없는 전쟁, 곧 아군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는 전쟁에 대한 콜린 파월의 독트린도 추가할 수 있다(<실재계의 사막>에서 ‘아무런 인관관계도 없는 전쟁’은 ‘아무런 아군 사상자도 없는 전쟁(warfare with no casualties)’의 오역이다). 거기에 정치를 행정으로 대체한 ‘정치 없는 정치’와 타자성이 제거된 타자 경험으로서 관용적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까지 ‘가상화’는 전면적이다. 여기서 ‘타자성이 제거된 타자의 경험(experience of the Other deprived of its Otherness)’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두 가지 번역본이 모두 잘못 옮기고 있어서 잠시 짚고 넘어간다. 원문과 그에 대한 두 번역이다.   

"the idealized Other who dances fascinating dances and has an ecologically sound holistic approach to reality, while practices like wife beating remain out of sight."

“매혹적인 춤을 추고 현실에 대해 생태학적으로 건전한 심신상관학설의 접근방법을 보이면서도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고... 그러한 이상화된 대타”(<실재계의 사막>, 38쪽)

“그 타자는 매혹적인 춤을 추고 생태학적으로 건전하고 유기체적인 접근법을 통해 현실에 접근하지만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 등과 같은 모습에는 눈감고 있는 이상화된 타자다.”(<탈이데올로기>, 20쪽)

인용문 전체는 ‘타자성(Otherness)’이란 말 뒤에 괄호로 묶여서 등장한다. 그 타자성이란 어떤 타자성인가? ‘매혹적인 춤’을 춘다고 할 때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서남아시아나 동남아의 춤이다. 뭔가 이국적인 춤. 동아시아의 춤이어도 무방하겠다. 그리고 ‘holistic approach’을 ‘심신상관학설의 접근방법’이나 ‘유기체적인 접근법’이라고 옮긴 건 좀 한정적이다. 전체론적 접근, 전일론적 접근을 뜻하는데, 분리적 접근과 반대되는 의미다.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사고하지 않으며, 부분과 전체를 분리시켜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도 포함하지만. 간단한 예를 들자면 수지침 같은 것이다. 손바닥에 전신의 부위에 해당하는 대응점이 있어서 여기에 자극을 주어 질병을 치료한다는 원리다. 발 마사지도 마찬가지다. 손이나 발은 몸의 일부이지만 전체를 반영한다는 것이 ‘전일론적 접근’이다. 서양의 기계론적, 분리론적 접근과는 다르기에 낯설고 ‘타자적’이다. 이 정도 타자성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다.  

하지만 그 타자성에도 불편하고 께름칙한 게 있다. ‘아내 구타’ 같은 관습이다. ‘practices like wife beating remain out of sight’는 ‘아내 구타 같은 관습’은 ‘이상화된 타자’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관습은 배제된다.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고... 그러한 이상화된 대타”는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는 이상화된 타자”라는 식으로 이해되는데, ‘아내 구타’와 ‘이상화된 타자’는 서로 충돌한다.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 등과 같은 모습에는 눈감고 있는 이상화된 타자다”라는 번역도 ‘wife beating’이 어떻게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로 둔갑하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에 ‘눈감는’ 주체는 ‘이상화된 타자’가 아니라 ‘우리(서양인)’이다.  

‘아내 구타’는 빼놓고 매혹적인 춤과 전일론적 현실관 같은 타자성만을 수용하는 것, 그것이 ‘타자성 없는 타자’의 경험이다. 거기엔 카페인 없는 커피나 알코올 없는 맥주처럼, 우리식으론 ‘앙꼬 없는 찐빵’처럼 뭔가 실체가 빠져 있다. 그렇듯 뭔가 빠진 현실을 일반화한 것이 ‘가상현실’이다. “그것은 실체를 잃어버린 현실 그 자체를 제공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 실재계의 견고하고 저항적인 핵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 

10.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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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야 2010-09-09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눈팅만 하다가 이렇게 처음으로 댓글 올려봅니다. 그동안 로쟈님 블로그 통해서 좋은 책들 많이 알게 되어서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wife-beating이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로 번역되다니 정말 아연실색이네요..

Spidersens 2010-09-09 07:45   좋아요 0 | URL
>> 그나저나 wife-beating이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로 번역되다니 정말 아연실색이네요..

그렇게 놀라실 일은 아닙니다. 원문에서는 "-" 없이 "wife beating"으로 되어있는데요. 급히 지나가면서 보면 동명사 "beating"이 앞의 "wife"를 수식하는 현재분사처럼 보이고, 일반적으로 현재분사를 옮길 때 쓰는 "~하는"을 쓰다 보니 "(누군가를) 구타하는 아내"로 생각하게 되고, 생략된 구타의 대상을 당연히 남편이겠거니 하고 짐작하고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라고 옮겼을 겁니다.
또다른 예로 등장한 "casualties"의 경우도 빨리 지나가면서 보면 "causality"로 보일 수 있죠. 그러니 "인과관계"로 잘못 옮겼을 테고...
문제는 이런 실수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옮기고 나서 다른 사람의 책을 보듯 검토를 했어야 하는데, 역자가 그걸 하지 않은 듯 하다는 겁니다.

로쟈 2010-09-09 09:0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실수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인데, 문제는 걸러내는 사람이나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죠...
 

톨스토이 문학을 대표하는 건 물론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 같은 장편소설이지만(국내에선 <부활>도 포함되겠다) 그의 중단편 소설도 대가급이다. 교양강좌에서 이달에 <크로이체르 소나타>(펭귄클래식코리아, 2008)와 <이반 일리치의 죽음>(펭귄클래식코리아, 2009)에 실린 중단편들에 대해서 강의하게 됐는데, 이 참에 그의 중단편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작가정신판 전집으로도 두 권의 중단편집이 나왔고, 펭귄판으로도 <무도회가 끝난 뒤>(펭귄클래식코리아, 2010)가 추가됐다. 다른 번역본도 더 있지만, 이 정도면 초기부터 후기까지 그의 주요 중단편이 얼추 망라되는 듯하다(이번에 초역된 작품들도 있다). 한번 더 적자면, 올해는 톨스토이 서거 100주기가 되는 해이다.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톨스토이 중단편선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김성일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4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0년 09월 06일에 저장
품절
톨스토이 중단편선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김문황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7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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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가 끝난 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6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2010년 09월 06일에 저장
절판

크로이체르 소나타 (반양장)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2010년 09월 06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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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맨스필드의 단편 <차 한 잔>을 계속 다루고 있는데, 이번에도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다음에 한 차례 더 '읽기'를 덧붙일 계획이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7837  에서 읽으실 수 있다. 참고로, 이 작품의 번역본은 범우사판과 시사영어사판 대역본 두 종을 참고했는데, 대화 장면의 번역은 나대로 다시 옮겼다. 동서문화사판 <마지막 잎새/원유회>에도 번역돼 있다는 게 지금 생각났다. 참고한다고 책을 구해놓고는 어디에 두었는지 못 찾고 있다...  

자, 캐서린 맨스필드의 「차 한 잔」 읽기도 이제 막바지 클라이맥스를 남겨놓고 있다. 어차피 ‘가엾은 여인(the poor little creature)’으로 판명된 이상 로즈머리로선 이제 아무 거리낌 없이 인도적 자선과 후의를 베풀면 될 터이다. 차 한 잔? 아니다. 샌드위치에다 버터 빵을 먹이고 찻잔이 빌 때마다 크림과 설탕을 잔뜩 넣어주었다. 사람들 말이 설탕에는 영양분이 많다는 걸 떠올려서다. 로즈머리는 물론 먹지 않았다. “그저 담배를 피우면서 상대가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일부러 딴 데를 쳐다보고 있었다.”(she smoked and looked away tactfully so that the other should not be shy.) 여기서 부사 ‘tactfully’(재치 있게)는 남의 마음을 잘 알고 대처하는 기지를 말한다. 로즈머리는 상대(the other)에 대한 에티켓을 나름 지켜주고 있는 셈. 그녀의 자선적 포즈는 세련된 매너도 잊지 않는다. 물론 두 사람이 차를 같이 마셨다고는 돼 있지 않다.  

간단한 식사, 조촐한 요기로 일단 허기는 면하게 하자 손님은 전혀 딴사람이 되었다. 기분 좋은 노곤함을 느끼며 커다란 등받이 의자에 기댄 채 벽난로를 응시할 정도가 됐다. 이제 남은 절차는 그녀의 처지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일 터이다. 그녀의 이야기에 동정을 표시하며 공감해주고, 궁극적으론 “나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란 물음에 대한 전폭적인 수긍을 얻어내는 일이 남았다. 자신의 친절한 배려와 후의에 또 한 번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로즈머리는 살짝 눈물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읽은 많은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그래, 마지막 식사는 언제 했어요?”라고 로즈머리는 상냥하게 물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문 손잡이가 돌아감과 동시에 들어가도 되느냐는 목소리가 들린다. 남편 필립이다. 낯선 여인이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다소 놀란 필립을 로즈머리가 괜찮다며 안심시킨다. 그리고 필립에게 손님을 처음 소개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이 여인의 이름이 ‘스미스’라는 걸 알게 된다. 필립은 벽난로 쪽으로 가 등을 지고서 아직도 맥이 풀려 있는 여인의 손과 신발을 뜯어보고 다시 로즈머리를 쳐다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를 파악해보려는 것이겠다. 필립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스미스 양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아내에게 서재에서 잠깐 보자고 이야기한다. 둘만 있게 되자 필립이 로즈머리에게 상황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로즈머리는 웃으면서 말한다. “내가 커어즌 가에서 데리고 왔어요. 정말로. 정말로 그냥 데려온 여자야. 차 한 잔 값만 적선해달라고 하길래 그냥 집으로 데리고 왔죠 뭐.”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필립의 물음에 로즈머리는 그저 그녀에게 친절하고 편하게 대해야 한다고만 말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신도 모른다고. 말한다.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도 안 해봤기에 그렇다. 과연 필립은 뭐라고 말했을까? “여보, 당신 정말 미쳤군그래. 그렇게 안 되는 거잖아.” 남편의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로즈머리의 응수를 보라.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왜 안 된다는 거예요? 난 그러고 싶어요. 그게 이유가 안 되나요? 그리고 게다가 이런 일은 책에서 늘 읽는 거구요. 난-”

여기서 로즈머리가 염두에 둔 책은 앞에서 나온 대로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같은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하는 대로 우리가 못할 건 또 뭐냐는 게 로즈머리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렇듯 당차게 자신의 결심을 밝히려는 순간, 필립이 말을 가로챈다. “하지만, 저 여잔 너무 놀랄 정도로 예쁘잖아.”(she's astonishingly pretty.) 필립의 이 예기치 않은 말에 정작 깜짝 놀라는 것은 로즈머리다. 낯선 여인을 집에까지 데려옴으로써 남편을 얼마간 의기양양하게 놀라게 한 로즈머리이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에 대한 수식어로 사용된 ‘예쁘다’는 형용사는 그녀의 ‘현실’을 뒤집어놓는다.

“예쁘다고요?” 로즈머리는 너무 놀라서 얼굴이 붉어졌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난, 난 그렇게는 생각 못했는데.”

(...)

침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상황은 예측 가능하다. 로즈머리는 석 장의 지폐를 ‘손님’ 손에 쥐어주고는 조용히 집을 떠나도록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스미스 양’은 더 이상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로즈머리의 ‘시나리오’가 필립의 뜻밖의 반응 때문에 뒤엎어진 이상 그녀의 존재는 로즈머리에게 더 이상 환대의 대상이 아니라 분개의 대상이고, 지워야 할 악몽일 뿐이다. ‘사건’을 마무리한 다음에, 정확하게 말하면 다시 예전처럼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도록 방비한 다음에, 로즈머리는 남편의 서재로 다시 가서 스미스 양이 같이 식사를 못하게 됐다고 통지한다. 자꾸만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막을 수 없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물론 아주 상냥하게 부드러운 어조의 목소리로.

로즈머리는 방금 머리 손질을 다시 하고, 눈매를 더 짙게 하고, 진주 장식품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양손을 들어 필립의 두 볼에 갖다 댔다.
“당신 날 좋아해요?” 그녀가 말했고, 달콤하고 쉰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그를 당황하게 했다.

로즈머리는 잠시 낮에 들렀던 가게에서 보아둔 작은 상자 얘기를 꺼내며 28기니나 하지만 사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니었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다.

“필립,” 그녀는 소곤거리고는 남편의 머리를 자기 젖가슴에다 꼭 눌렀다. “나 예뻐?”(am I pretty?)

(...)

「차 한 잔」에서 로즈머리의 시나리오를 이끌고 나가는 것은 불우한 처지에 놓인 한 여인에게 특별한 환대를 베풀고자 하는 그녀의 자아도취적 욕구이다. 물론 이 욕구의 전제는 자기보다 못한 여인과 그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처지에 놓여 있는 자신과의 현격한 ‘차이’다. 두 사람의 온전한 소통과 교감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그 차이, 사회적 차이이면서 계급적 차이다. 여성이라는 동일한 성별이 이러한 차이를 극복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남편 필립은 ‘부조리하게도’(You absurd creature!) 두 여자를 똑같은 ‘여성’으로 놓고 심미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았다. ‘예쁘다’는 형용사가 뜻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것은 마치 ‘실재(the real)’처럼 로즈머리의 ‘현실(reality)’로 침범해 들어와 그녀가 짜놓은 시나리오를 교란시키고 무효화 했다. 그렇게 되면서 로즈머리의 관심사는 갑자기 이 침입에 대한 대응으로 전환된다.

(...) 

10. 09.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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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우북 2010-09-08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이 글 참 재미있습니다. ^^ 어머니들이 애청하시는 드라마에 나오는 여성 인물들(부잣집 아내, 시어머니, 약혼녀들)이 보여주는 행태가 로즈머리와 겹쳐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로쟈 2010-09-08 19:27   좋아요 0 | URL
네, 여성심리 묘사가 정확하다고 어느 여성 독자가 그러더군요...

비로그인 2010-09-08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 소설 꼭 구해봐야겠네요. 로쟈님의 설명을 들으니 아주 재미있는 내용 같아 끌리기도 하지만 과연 어떤 문체에 담겨 있을지 그것도 무척 궁금해서요ㅋㅋ^^

로쟈 2010-09-08 19:27   좋아요 0 | URL
대역본으로 읽으시는 게 좋을 듯해요. 번역에 가려지는 대목이 좀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