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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신간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를 '최근에 나온 책들'의 하나로 꼽았었는데, 나는 필요 때문에 다른 책들보다 먼저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이 논문선집의 요점 중의 하나는 라캉의 성구분 공식에 대한 독해/이해를 제공하는 것이고, 브루스 핑크의 서론격 글인 "성적 관계 같은 그런 것은 없다"(There's No Such Thing as a Sexual Relationship)은 그런 역할에 충실하다.

 

 

 

 

나는 이전에 같은 테마를 다룬 <라캉과 포스트페미니즘>(이제이북스)을 읽었더랬지만, 그 번역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대목들이 핑크의 글에서는 명쾌하게 정리/해명되고 있었다. 해서, 라캉 읽기의 '걸림돌'이라고 할 만한 몇몇 대목들, 가령 '욕망 그래프', '네 가지 담론', '성 구분 공식' 등에 대해서 이젠 편하게 참조할 수 있는 책들이 우리에겐 주어졌다(앞의 둘에 대해서는 지젝을 참조하면 된다).

 

 

 

 

핑크의 글에 대해서는 편역자 해제에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군말을 덧붙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해서 독자들은 그냥 읽어나가면 되는데, 여기선 내가 개인적으로 읽어나가다가 유려한 번역이지만 좀 미심쩍게 생각되는 몇몇 부분을 짚어보기로 한다. 옥의 티라고 할 만한 대목들이 몇 군데 있어서이다.

가벼운 것부터 지적하면, 64쪽에서 '사물'이 발견하는 기표의 예로 든 'art'는 '예술'이 아니라 '미술'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그러니까 '예술', '음악'이 아니라 '미술', '음악'이다).그건 67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74쪽에서, "적어도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로가는 저 오래된 형식과 질료의 은유"에서 '형식'은 물론 'form'의 번역이지만, 이 경우에는 '형상'이라고 번역하는 게 관례이다. 나는 '형식(형상)' 정도로 옮겨주는 게 나을 거 같다. 65쪽에서 "원인을 의미화하기"는 "subjectifying of the cause"의 번역인데, 역자가 "signifying of the cause" 정도로 잘못 본 것 같다. 다른 대목의 번역들을 보건대, "원인을 주체화하기"라고 옮겨져야 할 듯싶다. "그 자신의 원인이 되기"란 뜻이니까.

76쪽에서 "라캉은 S(빗금A)에 관해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은 "The little Lacan directly says about S(빗금A)"인데, 여기서 little은 형용사나 부사가 아니고 명사이며 (사전에 따르면) '적으나마 있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풀어서 얘기하자면, "라캉이 S(빗금A)에 대해서 직접 언급한 것은 얼마 안되지만, 그에 따르면"이란 뜻이다(요컨대,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이 아니라 "직접 언급한 것"이다).

78쪽에서 "왜냐하면 그 파트너는 '남자들'이란 범주에 들어가지 않고, 따라서 여자는 남자와 '관계하거나' 남자를 '따르기' 위해서 남자에게 호소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는 "S(빗금A), as that partner is not situated under 'Men' at all, and thus a woman need have no recourse to a man to 'relate' or 'accede' it."의 번역인데, 이건 내가 보기에 오역이다. 역자는 맨마지막에 나오는 it을 남자들(Men)으로 봤는데, 문맥상 '그 파트너'인 S(빗금A)이어야 한다. S(빗금A)는 '남자들'이란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당연히 S(빗금A)와의 관계에서 '남자들'은 불필요하다는 얘기이니까(남자를 따르기 위해서 남자에게 호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81쪽에서 "그것은 남근 경제나 단순한 구조주의 안으로 결코 만회될 수 없다"고 한 것은 "It can never be recuperated into a 'phallic economy' or simple structualism."의 번역인데, (오역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나라면 "그것은 남근경제나 단순한 구조로 결코 회복될 수 없다"라고 옮기고 싶다. 바로 위 문단에서는 'Sexual relationships'를 '성적 관계'라고 단수로 옮겼으므로 그것을 받는 'they'도 단수인 '그것은'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수의 일치상). 아니면, '성적 관계'를 '성적 관계들'로 옮기든가.

85쪽에서 "프로이트는 여자는 법에 대해서 이와는 다른 관계를 맺는다고 제안하는데, 그는 그 관계를 아직 덜 고도로 발달된 자아-이상이나 초자아와 관계지었다."는 "Freud suggests that women have a different relation to the law, which he correlates with a less highly developed ego-ideal or superego"의 번역인데, 역자는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를 relation으로 보았다. 나는 그게 law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지젝이 다른 자리에서 지적하는 바이지만(144쪽) 라캉에게서 법은 상징적 자아-이상으로서의 법과 초자아 차원에서의 법이라는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  

근간으로 돼 있는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The Lacanian Subject)>는 몇 차례 언급한바 있지만, 가장 명쾌한 라캉 입문서이다. 좋은 번역서가 조만간 나온다면, 라캉에 대한 많은 오해와 갈증이 해소될 걸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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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이후 이런저런 알레르기성 질환에 시달리고 이런저런 일에 치이면서 모스크바 후일담이 자꾸 늦춰졌다. 이젠 타이밍도 좀 놓친 감이 없지 않다. 그간에 읽은 이런 저런 글/책들에 대한 이야기 거리들도 분량으론 상당하지만, 그걸 늘어놓을 만한 이런저런 여건이 또한 안되기에 참아 두기로 한다. 아마도 '우편적 불안에 대하여'나 '문학철학에 대하여' 혹은 (여전히) 지젝과 데리다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회를 봐서 씌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그 '기회'가 아니다(박자 타령만 늘어놓다가 음정마저 다 잊어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대신에 막간을 이용해서 (한동안) 이전에 해온 일을 이어서 해본다. 어차피 저녁을 먹은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곧장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해서... 

 

 

 

 

사실 최근에 나온 책들보다 최근에 '다시' 나온 책들이 더 눈길을 끌기도 한다. 가령, 다시 나온 <코스모스>, 다시 나온 <정신현상학>, 다시 나온 <창조적 진화>, 다시 나온 <유한계급론>, 다시 나온 <최초의 3분> 등은 (다시) 읽어볼 만한 고전들이지만, 현재로선 (다시) 책을 살 만한 형편도 아니어서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걔 중 가장 중요한 책은 물론 그간에 절판되었던 <정신현상학>이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같은 역자의 번역이어서 어떨까 싶긴 하다. 적어도 '한글세대'의 새로운 번역을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와 관련하여 내가 고대하는 것은 박홍규 교수의 강의록인데, 이건 언제나 정리돼 나올는지. 참고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러시아에서도 작년에 최초의 번역본이 나왔었다(우리의 경우는 지난 81년에 처음 책이 나왔었고, 나는 84년에 이 책을 용돈을 주고 사서 읽었더랬다).  

 

 

 

 

그런 걸 제외하고 나온 책으로 제일 첫손에 꼽을 만한 건 말라르메의 <시집>(문학과지성사)이다. 대산세계문학총서의 하나로 나온 이 책은 황현산 교수의 번역인데, 원문과 (216쪽에 달하는) 자세한 주석이 붙어 있다(이런 것이 내가 기대하는 번역 시집의 모양새이다). 해서 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가를 이제는 우리말로 인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내가 이 책을 대하는 감회이다. 기존의 번역 시집들이 있긴 하지만, 랭보나 로트레아몽의 경우에도 이런 식의 주석 시집이 나오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물론 다른 언어권의 대표적 시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문학에서 또 손꼽을 만한 건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 <드리나강의 다리>(문학과지성사). 역시나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나왔다. 지난 196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이보 안드리치는 (언젠가 소개한바 있듯이) 같은 유고 출신의 영화감독 쿠스투리치가 가장 존경하며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더불어, 나는 모스크바에서 (좀 무게가 나가는) 러시아어본을 샀었기 때문에, 이 책의 한국어본 출간이 더 반갑다.  

 

 

 

 

두번째로 꼽고 싶은 것은 하이데거. 그의 <이정표>(한길사)가 최근에 출간됐다.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의 65권, 66권으로 나왔는데, 이 시리즈가 이미 그만한 규모의 책들을 역간해 낸 것이 대견스럽다. 한 200권까지 가게 되면 제법 장관을 이룰 수 있으리라(물론 벌써부터 품절된 책들이 없지 않지만). 하이데거의 다른 책으론 작년에 나온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까치글방)도 눈길을 끈다. <이정표>의 경우 나는 오래전에 교보문고에서 구한 영어본을 갖고 있다. 러시아어본도 몇 권 구했지만, 하이데거만큼은 한국어본이 더 많이 나와 있으며 번역 또한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아주 양호한 편이다. 개인적으로 하이데거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책이 지난 94년에 나온 <형이상학 입문>(문예출판사)인데, 검색해보니 품절로 뜬다. 다시 나와도 좋을 만한 책인데.. 

 

 

 

 

교양과학쪽 신간으로는 에드워드 윌슨의 <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바다출판사)가 눈에 띈다. 윌슨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소개가 필요하지 않으리라(그의 책으론 <사회생물학>, <생명의 다양성>,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그리고 자서전 <자연주의자> 등이 번역돼 있다). 책의 원제는 'In Search of Nature'(1996)이고, 윌슨의 제자이기도 한 최재천 교수가 번역에 참여했다. 비교적 짧은 분량(204쪽)이니까 단숨에 읽어볼 만한다. 도킨스의 책에 견주자면, <에덴 밖의 강>(동아출판사) 정도가 여기에 대응할 만하겠다. 각각 <인간본성에 대하여>와 <이기적 유전자>에 대해서.  

 

 

 

 

정신분석쪽 신간으로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가 출간됐다. '러시아문학과 정신분석'이라는 게 이번 학기의 관심주제이기도 해서, 성/성차에 대한 라캉주의 이론을 소개/해명하고 있는 논문모음집인 이 책이 나에겐 아주 요긴하다. 모두 6편의 논문을 싣고 있는데(내가 애초에 기대했던 것보다는 소략한 분량이다), 내가 읽은 대목들에서 번역도 나쁘지 않다. 아마도 그 일부가 이 책에 수록돼 있는,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도 곧 출간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게 되면 아쉬운 대로나마 '라캉 입문'의 길이 좀 트이게 될 것이다. 기간된 책들 가운데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는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라캉과 포스트페미니즘>(이제이북스)이 있다. 몇 년 전 작고한 라이트 여사의 책은 <정신분석비평>(문예출판사)과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 사전>(한신문화사)를 비롯해서 여러 권 된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블랙웰출판사에서 나온 <지젝 선집(The Zizek Reader)>을 편집하기도 했다.  

 

 

 

 

끝으로 역사분야의 책 가운데에서는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생각의 나무)를 언급해두고 싶다(서점에서 이 책을 보자마자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의 저자로서 국내에도 여러 권의 책이 소개돼 있는 하비는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이다. 나로선 이 분야에 문외한인바, 한 추천사를 옮겨오면 "데이비드 하비는 아마 영어권에서 활동하는 도시학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일 것이며, 그러한 그의 역량이 이 책에서 최고도로 발휘되어 있다." 그러니 한번 읽어봄 직하지 않겠는가? 물론 543쪽의 분량이나 28,000원의 가격 모두 만만치는 않다.  

 

 

 

 

최근에 나온 인문서들 가운데는 기획출판들이 자주 눈에 띈다. 살림출판사에서 낸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같은 출판사의 '살림클래식'에서도 최근에 프랑스의 저명한 중국학자 마르셀 그라네의 책을 냈다)나 그린비의 '세계를 뒤흔든 선언' 같은 게 그런 사례이다. 4권이 한꺼번에 나온 후자의 시리즈 중에서는 <세계를 뒤흔든 독립선언서> 같은 걸 가장 먼저 읽고 싶은데, 그건 <공산당선언>이나 <시민불복종>, <침묵의 봄>보다 우리에게 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에 실린, 데리다의 이 선언문 독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테러시대의 철학>, <환대에 대하여>,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등을 나는 두서없이 읽어보고 있는데, 조만간 독후감을 쓸 수 있기를 희망한다. 물론 요즘 같아서는 그저 희망으로 그칠 수도 있고, '희망에 대하여'로 땜질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러다가 망할... 

 

 

 

 

05. 03. 10 

P.S. 굳이 덧붙여 이야기할 만한 책이 출간됐다. 몽테뉴(1533-1592)의 <엣세>가 완역돼 나온 것. <몽테뉴 인생 에세이>(동서문화사)가 그 책이며, 역자는 손우성 교수이다. 프랑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모랄리스트인 몽테뉴의 책은 그간에 <수상록>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왔지만, 신간은 전 3권 107장의 원서를 최초로 완역한 책이다. 분량은 1294쪽(물론 상당한 분량이긴 하지만 놀라운 분량은 아니다. 내가 갖고 있는 2권 짜리 러시아어 완역본은 그 이상의 쪽수이기 때문이다. 해서 '정말' 완역인지는 실물을 보고 확인해봐야겠다). 올해 나온 고전 번역으로서는 가장 반가운 책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중3 때 한 라디오 방송에서 여성 작가가 소개하는 걸 듣고 구입해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새삼 그 책을 떠올리고 재평가하게 된 건 내가 전공으로 하는 러시아 작가 푸슈킨이 인생관에 있어서 몽테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부터이다. 내가 푸슈킨의 '성숙성'이라고 생각해던 대목들이 몽테뉴의  영향, 혹은 몽테뉴로부터의 감화에 많은 걸 빚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것. 그래서 다시금 몽테뉴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마침 우리말 완역본이 출간된 것이다.  

더불어 파스칼 전문가인 이환 (전)교수의 <몽테뉴의 엣세>(서울대출판부)도 작년말에 출간됐다. 그 전 가을에는 박홍규 교수의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청어람미디어)가 출간됐었고. 신뢰할 만한 저자들이기에 두루 참조할 만하다. 그리고 몽테뉴와 그의 시대에 대해서는 홋타 요시에의 3권 짜리 전기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한길사)를 참조할 수 있다. 이만하면 몽테뉴는 성찬으로서 모자람이 없다. 남은 건 그 성찬에 초대받는 것이다...  

05.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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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5-03-10 23:34   좋아요 0 | URL
코스모스가 '사이언스 클래식' 시리즈로, 그야말로 고전으로 나온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출간된 지 20년도 더 됐기 때문에 내용중 상당 부분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맞지 않습니다. 천문학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몰라도 물리학의 관점에서는 의미가 없는 책입니다. 그보다는 '엘러건트 유니버스(승산)'을 추천하고 싶네요.

가을산 2005-03-11 00:23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코스모스는 칼 세이건의 전공인 천문학이 중심이에요.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새 세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는 면에서 아직도 코스모스의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

비로그인 2005-03-11 09:05   좋아요 0 | URL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 재출간 저도 반갑군요. 옛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울집을 좀 뒤져봐야겠습니다. 아무래도 분실한것 같아요...

로쟈 2005-03-11 11:53   좋아요 0 | URL
사놓고 읽진 못했지만, <엘러건트 유니버스>가 '새로운' 클래식이 될 거라는 건 예상해볼 만합니다(새로 나온 <코스모스>는 사진도판이 들어간 게 장점이라더군요). <드리나강의 다리>가 옛날 어느 전집에 들어 있었나요? 저도 본 것 같기도 한데, 갖고 있지 않은 책이라 긴가민가 합니다...

바람구두 2005-03-11 12:30   좋아요 0 | URL
오호... 추천합니다.

비로그인 2005-03-11 13:01   좋아요 0 | URL
전집에 들어있었던 건 아닙니다. 단행본이었죠.일테면 삼중당문고등의 전집류가 나오기도 훨씬전의 책입니다. 아무래도 잃버렸다고 단정을 지었지만 뒤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말에..그리고, 러시아어를 알지도 못하면서 러시아본을 갖고계신것에 샘을 내봅니다^^

비연 2005-03-11 13:47   좋아요 0 | URL
추천합니다^^

udeis 2006-01-17 02:18   좋아요 0 | URL
<형이상학 입문>은... 기왕 절판된 마당에 새로운 번역이 나오길 바랍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침 1교시에 강의를 위해서 만원버스와 지하철을 연거푸 타고 출근한다.  시간강사로서 주제넘게 '시간표'를 탓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9시 '문학'수업을 비인간적이라고 내내 툴툴거리면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1시간 반을 보내게 된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언제나 그렇듯이 조간신문을 읽어나가는데, 오늘자 한겨레의 키워드는 '커밍아웃'인 모양이다. 19면의 기명칼럼 제목이 '커밍아웃'이고, 같은 면의 두번째 사설에도 '커밍아웃'이란  말이 들어가 있다.

 

 

 

 

물론 둘다 최근 '물의'를 일으킨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의 '망언'에 대한 것인바, "이번에 친일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한승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의 충격적인 글은 전국민의 비상한 관심 속에 다시 한번 커미아웃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황대권칼럼>); "그런 그의 주장은 한 개인의 갑작스런 돌출 의견일 수 없다. 그는 이른바 '친일파 세력'이 공유해온 논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아닌 그들의 '커밍아웃'인 셈이다. "(<사설>) 종합하면, 이번 한교수의 기고발언은 친일파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 논리를 대변하고 있는 '커밍아웃'이다.

영한사전에서 coming out은 '데뷔'란 뜻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어쨌든 지난 주말 이후 '한승조'란 이름은 전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으므로  데뷔로서 화려하고 성공적이다. 더구나 그는 반일 민족감정/정서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용기있게 자신의 주장을 드러냈고, 끄집어냈다. 나는 그의 발언이 몰고온 물의와 파문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러한 자세 자체는 지극히 치하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라는 정신분석의 윤리에 기대자면, 그는 그야말로 자신의 거의 본능적인 욕망(기득권 보존욕과 일본에 대한 충실성)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 것이니, 이 얼마나 윤리적인 것인가!

 

 

 

 

정신분석의 윤리란 무엇인가? “Wo es war, soll ich werden; Where it was, I shall come into being.” 즉, 보통은 “이드가 있었던 곳에 자아가 생성되어야 합니다.”(프로이트, <새로운 정신분석강의>, 열린책들)로 해석되는 이 문구는 보통 '이드의 자리를 대체하는 자아'로 해석되는데, 라캉/지젝은 뒤집어서 '이드의 자리에서 이드화되는 자아' 쯤으로 해석한다. 이드, 그러니까 '그거' 혹은 '거시기'에의 충실성이 정신분석의 윤리가 되는 것. 이전에 이런 류의 윤리를 십분 발휘했다가 고초를 겪은 이로 마광수 교수를 떠올려볼 수 있다(아마도 그는 원조 '커밍아웃'이라 할 만하다. '커밍아웃'의 유사-저작권은 홍석천에게 있지만). '즐거운 사라'에의 충실성을 모토로 하여 그는 뭐라고 공언했던가? "가자, 장미여관으로!" 자신의 거시기를 드러내기, 그것이 바로 커밍아웃이며, 그것은 전적으로 (정신분석적인 의미에서) '윤리적인' 행위이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는 축복"이라는 한승조 교수의 발언 또한 그러한 윤리적 사명감에 들려 있는 건 아닐까? 대낮에 자신의 거시기를 드러내기, 혹은 "일본 만세!". 나는 이런 류의 윤리적 행위가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생각하며(우리는 '하나된 한국인'이란 환상을 '횡단'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전선은 보다 분명해지고 대오는 보다 정연해질 것이라 기대해 마지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 점잖은 체하면서, 민족주의자 행세를 하면서 친일파 이상으로 남들을 등쳐먹고, 나라를 말아먹는 쪽들보다는 얼마나 고마운가!(심지어 아름답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사꾸라꽃처럼 말이다.)  해서, 한 교수의 망언에 대해 여기저기서 모욕하고 규탄하는 태도는 좀 삼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장려까지는 못하더라도, 좀 참아두어야, 나머지 '친일파'들도 모조리 '커밍아웃'을 할 것 아닌가? 그래야 이 '두더지'들의 면면을 제대로 다 확인할 수 있을 거 아닌가?  

하여간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간신문의 다른 면에서는(물론 어제 TV뉴스에 이미 보도된바 있다) 그가 "적절치 못한 단어와 표현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힌 걸로 돼 있다. 여론에 떠밀려 슬쩍 꼬리를 내린 셈인데, 한 교수에 대한 나의 비판은 그의 친일 망언이 아니라 이 사과성명에 두어진다. 그런 성명이란, 자신의 윤리(커밍아웃)를 한갓 해프닝 정도를 격하시키는 비윤리적인 행위 아닌가? 안티고네의 고전적인 예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 그것이 그에게 요구되었던 '윤리'가 아니었을까? 흔한 말로, 이게 뭐하자는 플레이인가?

 

 

 

 

귀국해서 지난 달에 빌려다 본 비디오들 중에는 <바람의 검 - 신선조>와 <라스트 사무라이>도 들어있었는데,  일본사에 무지한 나로서는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둘 다 사무라이 시대가 마감되는 시기의 '마지막 사무라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판단에 연민을 느끼면서도(그들은 인문학 시간강사를 좀 닮았다) 그들의 사무라이다운 고집에 눈물을 흘렸다(가령, <바람의 검>에서 주인공이 할복하기 전날 밤에 자신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회한의 말들을 읊조리는 장면 등).

물론 요새 내가 눈물이 좀 많아지긴 했지만, 사무라이의 윤리로서의 고집(충실성)은 숭고한 여운을 님긴다. 그리고 그건 정신분석의 윤리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미시마 유키오의 자살에 대한 가라타니 고진의 해석에도 그런 게 좀 들어가 있다. 미시마의 죽음은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지만, 그건 '윤리적인 죽음'이기도 하다. 죽음 충동의 붙들린. 명분이 아무리 시대착오적이더라도. 물론 그런 죽음은 실용주의자들이 보기에 '개죽음'에 지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조금 돌려서 말했지만, 요컨대 한 교수가 진정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감사하고 그 정신에 감화받은바 있다면, 마땅히 할복함으로써 자신의 고집/의지를 표명할 일이다. 자신의 발언을 사과하고 수습할 요량이었다면, 애당초 그의 신념이란 것은 사꾸라꽃만도 못한 것이다. 야쿠자는커녕 양아치 수준밖에는 안되는 것. 한국 친일파의 수준이 고작 그 정도인가?(적어도 반세기 이상 이 남한 땅에서 떵떵거리며 기득권을 누려온 이들의 기개와 윤리가 그 정도라면 창피하고 남세스러운 일이다.) 바라건대, 이제라도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기를.  명예교수직에서 사퇴하는 불명예를 감수함으로써 꼬리를 빼지 말고 '명예'교수로서 당당하게 처신하기를, 스스로 결정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한 교수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한국' 친일파를 위해서라도(이들도 동족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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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야놀러가자 2005-03-07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이 글을 제 홈페이지에 좀 퍼가도 될까요?

종이 2005-03-08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교수 건에 대해 이처럼 명확하게 정리된 글을 보니 시원합니다. 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로쟈 2005-03-08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물론입니다... 종이님/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시아일합운빈현(?)님/환경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한 것 같습니다.^^
 

지난 주말에 집으로 택배 하나가 왔는데, 바로 열린책들에서 보낸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의 마지막 권이었습니다. 전집의 번역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 여러분도 다 아실 겁니다. 출판사측에서 이 문제에 성의껏 대응하여 누락된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책을 새로 찍고, 교열지까지 만든 것은 다행스런 일이라 생각됩니다. 차후에 다른 출판사례들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좋은 책만들기의 기본은 저자와 역자의 몫이겠지만, 책'만들기'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중 초고를 교정하는 일이야말로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게 평소 제 생각인데, 우리의 출판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래 전에 나온 책들을 보면, 맨 뒷면에 저자/역자와 함께 교정자의 이름이 표기된 걸 보곤 하는데, 어느샌가 그런 전통(?)은 없어져 버리고, 교정일이 마치 허드렛일처럼 돼 버렸습니다. 일단 교정일에 대한 품삯이 기대 이하인 까닭에 유능한 인력들을 끌어들이기 어렵고 또 제대로 된 교정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대충 오타나 고치고 마는 것인데(요즘 나오는 책들은 그것도 제대로 돼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좀 무성의하게 나온 책들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책이나 저자에 대한, 또 출판사에 대한 경의의 마음이 사그라들게 마련입니다.

 

 

 
 

제가 근래에 읽은 책으로 민음사에서 나온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라는 대담집이 있습니다. 13개의 대담 중 7-8편을 읽었는데, 우리 시대 지성들의 열기가 느껴지는 좋은 책이지만(그래서 뛰어난 기획이라고 칭찬을 많이 들은 책이지만) 역시나 교정은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몇 가지를 지적하면, 김춘수의 데뷔시집 <구름과 장미>가 <죽음과 장미>로 표기된 것(233쪽, 226쪽에는 <구름과 장미>로 바로 표기돼 있음에도), 소설가 최인호의 약력에서 1945년생이 1954년생으로 표기된 것(115쪽),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표기하면서 '(집)가'자 대신에 '(거리)가'자를 쓴 것(312쪽, 카라마조프 거리의 사람들!) 등.

이런 실수들이 분명 '죽을 죄'는 아니나, 책의 만듦새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은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철학자 박이문 교수의 신간 <이성의 시련> 앞갈피에(저는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실린 저자의 약력과 저서에서 <자비의 윤리학>이란 책명이 <비애의 윤리학>이라 표기돼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이성의 시련'이자 '비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문학 출판사 두 곳과 두 권의 책에 대해서만 예를 들었지만, 이런 사례는 거의 모든 책에서 발견된다는 데 문제의 (사소하지 않은!) 심각성이 있습니다. 좋은 책은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만듦새에서도 정성이 느껴지는 책입니다. 제가 '교정'의 문제를 제일 먼저 꺼낸 것은 앞으로 더 많은 좋은 책들이 나왔으면, 그리고 더 좋은 책들을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 때문입니다. 거기엔 '감시'의 눈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10년 후가 될지 20년 후가 될지 모르겠지만, 보다 좋은, 보다 완벽한 우리말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꿈꿔 봅니다...

01.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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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러시아적이면서도 가장 유럽적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1866)은 이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80)에 이르는 위대한 작가적 여정의 첫 번째 이정표이다. 이미 작가는 중편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를 통해서, 당시 유럽과 러시아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공리적 사회주의의 이념을 공박하면서, 진정 '살아있는 삶'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바 있다. <죄와 벌>은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등장하는 2×2=4의 수학적 공리의 세계(합리적 이성의 세계)는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이론으로 변형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으로 나뉠 수 있고, 이때 비범인은 초법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는 역사상의 모든 입법자나 건설자들은 이와 같은 권리를 행사해왔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한다.

가난한 전직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자기 자신이 비범인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어로 '(범)죄'의 어원적인 뜻은 '한 발작 넘어섬'인데, 그는 자기 자신이 모든 장애를 딛고 한 발작 넘어설 수 있는가를 시험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전당포 노파에 대한 살인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한다. 하지만 살인 사건 이후에 그는 줄곧 혼미한 정신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데, 그것은 주로 자신이 한 발작 넘어서서 첫 번째 걸음을 옮기는 데 실패했다는 자책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일종의 정신분열이 일어나는데, 학대받는 늙은 말을 끌어안고 울던 유년시절의 라스콜리니코프와 유럽 합리주의의 세례를 받은 청년 라스콜니코프 사이의 분열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러시아와 유럽의 분열을 함축한다.

사실 주인공의 이름에서 '라스콜'은 러시아어로 분리/분열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리/분열이 해소되는 것은, 루터가 '악마의 창녀'라고 부른 이성의 대변자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수를 결심하고 성스런 창녀 소냐의 권유대로 광장에서 대지에 입을 맞추게 됨으로써이다. 하지만, 8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은 라스콜니코프가 진정한 갱생에 이르는 과정의 이야기는 작가의 말대로 이 작품의 주제가 아니다. 나폴레옹 모방이 아닌 그리스도 모방으로서의 진정한 인간의 삶, 혹은 위대한 죄인의 생애를 묘사하고, 고통과 수난을 통한 삶의 구원을 역설하고자 한 작가의 고투는 이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알료샤에 이르는 여정을 남겨놓고 있다.

<죄와 벌>의 현재적 의의란 어떤 것일까? 라스콜니코프의 이론과 그 실행을 소비에트 러시아(1917-1991)의 건설과 파산에 견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작가가 유난히 강조한 바, 결코 변증법으로 대체할 수 없는 '살아있는 삶'은, 모두가 합리적/계산적 이성에 근거한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새로운 정치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요구한다. 역사의 종언 이후에 우리에게 남겨진 삶은 바로 이 갱생의 삶이다.

20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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