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블로그에 '로쟈의 스페큘럼'을 연재하게 됐다(http://cafe.naver.com/mhdn/15320). 오늘 실은 첫회에서는 '스페큘럼'이란 말이 떠올려주는 것들에 대해 적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들러보시길. 연재는 한달에 3-4회 정도 진행될 예정이다. 여기서는 일부만 발췌해놓는다.   

 

‘당신 서재의 나침반’이 내가 처음에 제안 받은 연재 타이틀이다. 하지만, 책으로 어지럽게 둘러싸인 서재에서 나조차도 ‘책과 책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을 때가 많다. 필요한 책을 제때 찾지 못하는 것도 비일비재한 일이다. ‘당신 서재의 나침반’이 돼주기는커녕 나야말로 그런 나침반이 필요한 처지다. 그런 이유에서 타이틀이 조금 부담스럽다는 의견을 피력했더니, 이런, 이번엔 ‘로쟈의 스페큘럼’이다. 스, 페, 큘, 럼.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라서, 한 자씩 써봤다.(...)   

하여간에 ‘나침반’ 대신에 ‘스페큘럼’ 역할을 주문받고서 내가 연상할 수밖에 없었던 건 이런 도구와 그림이다. 그런 연상을 배경으로 둔다면, 이제 ‘책과 책 사이’란 말이 조금 은밀하고도 외설적인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으신지? 조금 감이 둔한 분들을 위해 한 번 더 말하자면 ‘책과 책 사이’란 ‘무릎과 무릎 사이’이기도 하다. 나침반은 손바닥에 올려놓지만, 검시경은 무릎과 무릎 사이에 끼워 넣는다. 나침반은 방향만 가리키지만, 검시경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뭔가를 들여다보게 한다. ‘로쟈의 스페큘럼’이 로쟈가 갖고 있는 ‘스페큘럼’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로쟈라는 스페큘럼’을 뜻하는 것인지 모호하지만 여하튼 앞으로 뭔가를 잘 들여다볼 수 있도록 ‘스페큘럼-되기’를 시도해보겠다.(...) 

10. 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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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6-1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가 갖고 있는 스페큘럼'이 독자에게는 '로쟈라는 스페큘럼'이 되리라 생각되는걸요. 기대합니다.

로쟈 2010-06-12 09:22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런가요?^^

2010-06-10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2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dora 2010-06-10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연재부터 챙겨볼수 있게되어 기쁩니다ㅎㅎ

로쟈 2010-06-12 09:25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연재 마지막을 무사히 끝내면 기쁠 거 같습니다.^^;

비로그인 2010-06-1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부인과 개업(?) 축하드립니다. 여기저기 '로쟈 바람'이 부는군요.

로쟈 2010-06-20 23:01   좋아요 0 | URL
네, 별걸 다해봅니다.^^;
 

프레시안에서 '6.15공동선언 10주년 연속인터뷰' 가운데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의 인터뷰 한 대목을 옮겨놓는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00609123820&section=05). 인터뷰기사의 타이틀이 "천안함 진실규명, 민주회복-남북관계 개선의 결정적 고리"라고 돼 있는데, 바로 천안함 진실규명과 관련한 백낙청 교수의 견해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프레시안 : 중국이 남·북·미·중 4개국 공동조사를 하자고 제안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백낙청 : 공동조사는 바람직하다. 북에서 검열단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검열단이라는 게 그쪽 문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참 적절치 않은 표현이었다. 어쨌든 검열단 제안이 왔을 때 우리 정부는 유엔사령부 조사결과를 가지고 군사정전위원회를 소집할 테니 거기 나오라고 역제의를 했다. 군사정전위는 지금 거의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인데 그걸 되살리겠다고 하니까 북에서는 '이제 와서 무슨 정전위냐'고 하면서 안 받았다.

그런데 남·북·미·중 4개국의 공동조사를 하자는 중국의 일종의 수정제안은 정전위 기구를 재활용하자는 남쪽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유엔사가 일방적으로 조사한 것을 갖고 와서 심문을 받아라, 야단 좀 맞고 가라는 게 아니라, 조사 자체를 4개국이 하자는 거니까 북은 마다할 이유가 없고 남쪽 정부도 자신 있으면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는 제안이다.

그런데 만약 사실무근을 가지고 정부가 이렇게 해놨다면 어떠한 공정한 조사 제의도 받기 어려운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은 것이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5월 11일 시점에서 '북한-어뢰 프레임'에 갇히지 말자고 말할 때만 해도 나는 정부가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고 일종의 영구미제(永久未濟) 상태로 끌고 가면서 북의 소행이라는 냄새만 잔뜩 피우다가 선거가 끝나면 적당히 물러설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어찌 보면 우리 정부의 과감성이랄까 저돌성을 내가 과소평가 했다. 스스로 반성하고 있다.(웃음)

그러니까 나쁘게 보자면 적당히 장난치려고 했는데 장난이 너무 심해서 장난이 아니게 돼버린 것이다. 이제 정부는 추가자료를 제시해서 국민과 국제사회를 납득시키거나, 아니면 대한민국 역사에 유례가 없는 망신을 당하거나 둘 중의 하나밖에 길이 없어졌다.

대한민국 국민 치고 나라가 망신을 당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나. 적어도 나는 안 그렇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통킹만 사건처럼 오랫동안 진실을 묻어놓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국내외 전문가들이나 네티즌들이 문제제기하는 걸 봐라.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가. 뚜껑을 눌러놓고 무한정 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정부가 어떻게 수습을 할지 모르겠다. 국제사회가 정말로 납득할 만한 자료를 제시해야 하는데 과거 김일성 주석이 김신조 사건에 대해 '나는 몰랐다'고 했듯 대통령이 '나는 몰랐다. 허위보고에 속았다'고 할 것인가? 그것도 간단치 않다. 우리는 북한 체제와 다르다. 정말 걱정이 되지만 어쨌든 진실에 입각해서 수습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시민사회는 진실과 원칙에 입각한 대응을 해야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가령 선거를 앞둔 야당 같으면 '북한 소행이라는데 정부는 뭐하고 있었냐. 안보무능 아니냐. 차라리 참여정부가 안보에 유능했다'는 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정부가 진실을 말한다는 확신이 없을 때는 계속 의문을 제기하고 진실에 입각해 문제를 풀어 나가자, 아무리 힘들어도 그 외엔 길이 없다고 계속 얘기해야 한다

10. 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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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0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2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지 2010-06-13 01:42   좋아요 0 | URL
민주당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대립보충으로서 톡톡히 덕을 보았는데 역시 대립보충이기 때문에 그 덕을 다시 한나라당에게 돌려주고 서로 공생의 쳇바퀴를 계속 돌지 어쩔지 아연합니다.
지방선거 결과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민주당류를 생각하면 한없이 '불안'합니다만...
천안함 사건은 계속 의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대강과 천안함 문제는 한국 현대사를 통해 누적되어 온 강한 폭발력을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전에 말씀하신 지젝의 분노자본 같은 것...

로쟈 2010-06-13 21:06   좋아요 0 | URL
사필귀정의 역사를 믿어보지만,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지요.--;
 

오전에 안과에 가면서 손에 들었던 책은 이택광의 <영단어 인문학 산책>(난장이, 2010)이다. TV를 잘 보지 않아서 EBS의 '이택광의 어휘로 본 영미문화'란 프로그램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책은 방송내용을 바탕으로 엮은 것이다.  

  

영어에 관한 '수다'라면 단연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 선생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거기에 덧붙이자면 소설가이자 언론인 고종석의 '영어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저자 또한 서문에서 한 차례 언급한다.  

"우리는 영어책을 '독해'하려고 덤비지만,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의 말처럼, 영어책은 해석하지 말고 읽어야한다. 그러면 처음에 힘들지만 나중에 영어책도 한국어책처럼 술술 읽을 수 있다." 

물론 번역은 또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덧붙이고는 있지만, 젊은 학생들은 시도해 봄직하다. 그렇게 '독해'에서 해방된 영어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주는가? 

"영어를 실용적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인문학적 능력으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세계에서 출간되는 인쇄물의 절반 이상이 영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만큼 많은 지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무서운 건 강조한 대목이다. 무섭기도 하지만 그만큼 엄연한 현실. 이러한 현실에 비하면 '회화'는 비교적 사소한 문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지식을 아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의 현실에 접목해서 독특한 지식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 급선무이다. 피겨스케이팅을 한국이 발명하진 않았지만, 김연아는 그 피겨스케이팅으로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다. 특수한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 인문학의 법칙이라면, 영어도 한국이라는 영토에 터 잡아 깃들 인문학의 보편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연아(=특수한 것)가 피켜스케이팅을 매개로 보편적인 것(=세계적인 선수)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 인문학(=특수한 것)도 보편적인 것(=세계적인 인문학)으로 나가는 데 영어를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읽힌다. 하지만 그때의 인문학은 '영어로 하는 한국 인문학' 혹은 '영어로 논문 쓰는 인문학'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란 의문을 갖게 된다. '한국이라는 영토'가 단서일까? 한국에서 한국인이 생산하되 '영어로 하는' 세계 수준의 인문학? 김연아의 경우는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수사적 차원에서 도입한 사례일 테지만, 아무래도 '세계적인 인문학'과는 그림이 잘 맞지 않는 듯싶다. 영어를 피겨스케이팅에 견주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건 그렇고, 저자가 염두에 두었을 법한 또 다른 '산책자'는 빌 브라이슨이다. <발칙한 영어산책>(살림, 2009)을 덕분에 책장에서 빼왔다.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학고재, 2010)도 비슷한 두께를 자랑하는데, 영단어에 대한 이해와 영국과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상호작용하는 거라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해 봄직하다. '미국인 발견'은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미국학>(21세기북스, 009)로 대체하고. 더 좋은 책을 아시는 분을 알려주시길...  

10. 06.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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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6-10 01:31   좋아요 0 | URL
제 경우 한글로 된 책도 머리 싸매고 읽어야 독해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더구나 영어나 한문은... 머리 뽀개집니다...
전 좀 재능은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술술 읽기는 언어적 재능이 있거나 영미권에서 생활할 기회가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방식이겠죠.. 재능 없고 기회 없는 이들은 그냥 우울해지죠... 그러다 영어 공부!라는 것에 빠지게 되는 거겠죠... 자본의 소유 유무가 계급갈등을 낳는다면, 재능의 소유 유무도 또다른 계급갈등을 낳겠죠 아마...

얼그레이효과 2010-06-10 01:53   좋아요 0 | URL
특수한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 인문학의 법칙이라면, 영어도 한국이라는 영토에 터 잡아 깃들 인문학의 보편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예전에 경향신문 칼럼이었나, 김우창 선생님이 하신 말씀과 유사한 시선이네요.^^

미지 2010-06-10 10:20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현재 지구상에서 영어는 제국의 언어이고 서양수학은 제국의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보편성은 이미 강제되어 있다는 것이죠...

알케 2010-06-10 11:32   좋아요 0 | URL
요즘 이택광교수 책많이 내는군요. 스펙트럼이 넓은 연구자라는 생각.
 

기획회의(273호)에 실은 인문분야 전문가리뷰를 옮겨놓는다. 시몬느 코르프-소스의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해피스토리, 2010)를 다루면서 필리프 쥘리앵의 <노아의 외투>(한길사, 2000)의 내용을 곁들였다. 원고를 펑크낸 지난 5월 초에 나왔으면 더 '시의성'이 있을 뻔했다. 하지만 그땐 영화 <하녀> 얘기로 서두를 떼진 못했겠다... 

기획회의(10. 06. 05) 아버지의 역사

“장모님 질문은 제가 합니다. 제 애라고 하던데요. 이봐요. 당신 딸이 낳아야만 내 애인 것 같습니까?”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에서 재벌 사위 훈(이정재)이 장모에게 던지는 말이다. 말 그대로 ‘훈훈한’ 분위기가 물씬 배어나온다. 비록 아내의 ‘빤스나 빠는’ 여자가 가진 아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애라면 다른 사람들이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침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하는 부드러운 남자로 묘사되지만, 장모를 면박하는 그의 대사는 그가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가부장적 권위의식 또한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 경우엔 근육질 몸매가 뿜어내는 남성적 권위가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권위’다.   



아버지란 무엇일까. 보통은 잊고 지내지만, 초등학교 4학년인 딸아이가 밤에 자기 전에 뜬금없이 “아빠는 왜 아빠야?”라고 물어올 때가 있다. “아빠니까 아빠지.”라고 대충 얼버무리는데, 막상 진지하게 “왜 아빠일까?”를 따져보려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러니 제목부터 눈길을 끈,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시몬느 코르프-소스의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를 손에 든 건 뭔가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에서였다. ‘찬사’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아버지란 존재가 혹 ‘부정적인 환각’이 아닌가란 질문부터 던진다. 프랑스도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듯한데, “아버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널리 퍼져 있지만 그건 과학적 기초가 결여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며 “나는 이런 호들갑스러운 견해들에 반대한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입장이다. 사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같은 노래가 아빠들을 힘나게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만큼 아버지의 위상과 권위가 예전 같지 않다는 뜻도 된다. 대략 IMF 이후라고 봐야 하나? 그 무렵 해서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이렇다.  

“오늘날 우리는 부성의 과거 모델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지만 새로운 모델을 찾아내지는 못한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부성은 재구성되고 있는 제도이다. 이것은 현재의 아버지들이 직면해야 하는 도전이다.” 

저자는 그런 관점에서 먼저 왜 아버지들이 ‘기능부전의 존재’가 되었는가를 살펴보는데, ‘부성의 과거 모델’이 어떤 것이었나를 알려면 역시나 프랑스의 정신분석가인 필리프 쥘리앵의 <노아의 외투>가 요긴하다. 부제가 ‘아버지에 관한 라캉의 세 가지 견해’인만큼 다소 딱딱한 저작이긴 하지만, ‘아버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책이다.  

쥘리앵에 따르면, 먼저 아버지는 ‘아이에 대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다. 원래 아버지로 불린 것은 한 여자의 남편이 아니라 지배자, 즉 국가를 이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즉 아버지의 일차적인 의미는 ‘정치적․종교적 아버지’였으며, 가족적 의미의 아버지는 그로부터 파생된 개념이다. 말하자면 정치적․종교적 지배자라는 것이 아버지가 갖는 권위의 기원이겠다. 이런 경우엔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아버지임’에 대한 이러한 정의에서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 즉 자녀를 살리거나 죽일 수 있고 벌하거나 가둘 수 있는 권리, 그들의 결혼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들이 따라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아버지’는 18세기에 커다란 전환을 맞는다. 루이 16세의 처형은 그러한 전환을 말해주는 사회적 증상이었다. 말 그대로 ‘부친살해’였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낳은 결과는 두 가지다. 첫째, 정치․종교․가족의 영역 모두를 포함하여 광범위하게 적용되던 아버지의 권위가 가족에 대한 권리로 축소되었다. 이제 아버지의 권리는 한 여자를 데려와 그녀를 통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남자의 권리일 뿐이다. 둘째, 절대왕정이 쇠퇴하면서 정치적 절대주의 및 ‘가정의 왕권’이 배척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만을 말하던 시기는 지나가고, ‘아이의 권리’라는 새로운 관심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모든 어린아이는 자신의 행복과 이익, 안락함을 위해 점점 더 많은, 그리고 세분화된 권리를 가지며 이로써 ‘아버지임’의 새로운 정의가 생겨난다. 곧, 아버지는 실제로 어린아이를 돌보는 사람, 즉 단지 삶을 보호해줄 뿐만 아니라 아이를 문화세계로 편입시킴으로써 어른들의 사회로 통합될 수 있는 권리를 충족시켜주어야 할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의 아버지가 19세기 도시에 거주하는 부르주아 핵가족 속에 뿌리를 내렸다. 이제 아버지는 어린아이가 직접 말을 걸고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이 되었다.  

문제는 ‘아이의 권리’로서의 아버지는 몰락하기 쉬운 아버지라는 점이다. 그때의 아버지란 어린아이에게 이익과 행복, 안락함을 제공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아버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쥘리앵은 아버지의 역할이 점점 약화되는 요인으로 두 가지를 덧붙인다. 첫째는 시민사회가 어린아이의 복지와 관련하여 아이와 아버지 사이에 끼어든다는 점이고, 둘째는 민법상 어머니의 권리가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정이 아버지의 사회적 몰락을 더 촉진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남은 건 정자 제공자로서의 생물학적 아버지뿐이다.  

이런 식으로 쥘리앵이 ‘아버지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간추려준다면, 코르프-소스는 50년대에서부터 특히 70년대에 생겨난 변화에 주목한다. 양성평등, 동성애 운동, 감성적 결합에 입각한 부부, 자유로운 합의에 따른 공동보조를 취하는 탈제도화된 가족 등이 이 시기에 등장한 변화의 양상이다. 게다가 생물학적 부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면서 전통적인 모델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됐다. 전통적으로 어머니는 확실한 사람(Mama's baby)인 반면에 아버지는 항상 불확실한 사람(Papa's maybe)이었다. 모성은 물질적인 증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부성은 가설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DNA를 통한 친부확인검사가 가능해진 시대다. 아버지가 아니라는 생물학적 증거는 자연스레 법적인 부성을 제거하게끔 된 것이다. 이렇듯 평가절하된 ‘아버지’를 저자는 어떻게 구제하고자 하는가.

“가부장의 종말은 새로운 아버지의 행동이 광범위하게 등장한 다음 일어난 사회적 현상이다. 그것은 출산, 가계, 교육, 부부의 삶, 남성과 여성의 역할 등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다. 현재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부성의 영역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진화라기보다는 진정한 인류학적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결론이라면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는 대체 어떤 의미일까. 애초에 ‘찬사’란 말은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란 뜻이었을까. 

10. 06. 09. 

P.S. '기획회의'의 취지와 무관하게 서평감으로 잘 소개되지 않은 책을 주로 고르는데, 대개는 그럴 만한 이유가 한두 가지씩 있는 책이다.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도 저자명이 앞면에서는 '시몬느 코르프-소스', 저자 소개란에는 '시몬 코르크-소스', 그리고 판권면에는 시몬 코르프-소스'라고 기재돼 있다. 저자명만 세 가지 버전이 있는 셈인데(본문 각주의 '시몬느 코르프 소스'까지 포함하면 네 가지 표기방식이다), 한번이라도 교정을 본 것인지 의문스럽다. 교정을 안 보았다는 쪽에 내기를 걸 수 있는 건 이런 대목도 나오기 때문. 

"클라인의 오이디푸스가 위치하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보다 훨씬 이전의 심리적인 삶이다."(145쪽)

뭔가 빠져 있고, 띄어쓰기도 엉터리다. 이런 기본적인 교정도 안 돼 있다면, "남성은 아기를 분만해줄 수 없다. 그는 수태를 시킬 수는 있지만 나을 수는 없다."(134쪽)에서 '나을 수'는 '낳을 수'가 되어야 한다는 건 감히 지적할 수 없겠다. 과연 더 나은 책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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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미 2010-06-09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본적 교정도 안된 책 읽을 때... 정말 화 나지요... 그나 저나, 임상수의 <하녀>가 보고 싶네요. 여기서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봐야 할 듯...

로쟈 2010-06-09 08:49   좋아요 0 | URL
많이 팔리는 책도 아니어서 좀 안타까운 경우죠. 명분과 실리를 둘다 잃게 되는 거니까요...

2010-06-09 0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9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이 2010-06-09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기도/생식기도 아닌/비뇨기만 남았다.'는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나는 글이에요.

로쟈 2010-06-09 16:16   좋아요 0 | URL
음, 좀 '슬픈' 시네요.^^;

비로그인 2010-06-13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리/의무라는 법적 개념으로 축소된 친자 관계는 슬프네요.DNA로의 환원은 더욱 그렇고요. 저는 서로가 서로에게 다양한 의미로서 책임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게 모호하고 때론 이름뿐인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라고...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이단의 경제학>(시대의창, 2010)을 다루고 있는데, 책은 내가 아니라 편집부에서 고른 것이다. 마땅한 인문사회과학서가 드물게 나오고 있어서 선정에 애를 먹었다. 그런 이유에다 개인적인 피로감이 겹쳐서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한겨레21의 서평은 쉴 예정이다. 재충전을 위해서 다른 일들도 줄여갈 예정이다. 충전이 되긴 되려나...   

한겨레21(10. 06. 14) 개도국 경제에 이단을 허하라 

<이단의 경제학>(시대의창 펴냄)은 저자가 ‘스티글리츠 외’로 표기돼 있지만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를 앞세우고 있지만 공저자 5명은 모두  '정책대화구상'(IPD: Initiative for Policy Dialogue) 회원들이다. IPD는 ‘워싱턴 합의’에 반대해 2000년대 중반 미국 워싱턴에서 출범한 단체로 경제학자, 정치학자, 정책입안자, 시민사회 대표 등으로 이루어진 인적 네트워크라고 한다. 이들이 반대하는 ‘워싱턴 합의’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이 20년 넘게 전 세계에 강요해온 정책을 말한다. 주로 낮은 인플레이션, 긴축재정, 민영화, 자유화를 강조하며 다른 견해들을 배제한 채 그동안 ‘주류경제학’으로 행세해왔다.   

선진국의 '완전고용'과 개도국의 '경제성장'
<이단의 경제학>은 이 주류경제학에 대한 비판과 함께 대안적 관점을 제시하려 한다. 비판의 빌미는 많은 개발도상국, 특히 라틴아메리카 경제의 침체다. 워싱턴 합의가 위세를 떨치던 지난 20년 동안 이 지역의 경제성장은 20세기 들어 최악을 기록했고 세계화와 워싱턴 합의에 대한 환멸을 키웠다. 대안적 이론과 정책의 모색이 필요한 건 당연한데, IPD의 초점은 주로 개발도상국의 거시경제학과 자본시장 자유화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두어진다.  

선진국 위주로 발전해온 거시경제학의 주된 관심사는 인플레이션 억제, 완전고용, 경제활동의 안정화를 위해서 어떤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써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경제이론상으로도 견해차가 적지 않다. 경제안정과 자본시장 자유화 등에 대해서 보수파(신고전파), 케인스학파, 비정통파의 입장이 각기 다른 것이다. 하지만 IMF를 비롯한 국제 금융기구들은 개발도상국에 ‘워싱턴 합의’에 따른 정책만을 강요했고, 이것이 오히려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경기침체를 가져오는 일이 잦았다. 경제정책의 목표와 상충관계 등에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차이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어떤 차이인가?  

선진국에서는 거시경제정책의 초점을 ‘물가안정을 동반하는 완전고용’에 맞추지만 개발도상국의 초점은 경제성장이다. 선진국은 인플레이션 억제에 많은 비중을 둔 정책을 쓰지만, 개발도상국에서는 인플레이션과 성장, 그리고 인플레이션과 실업 사이의 관계가 불확실하다. 사실 산업구조가 다르고 투자환경이 다르며 성장 동력에도 차이가 있는 두 그룹의 국가에 동일한 정책적 처방을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선진국에서는 교육비 지출이 줄면 학급 당 학생 수가 조금 많아지고 교직원 임금 인상률이 낮아지는 정도지만, 개발도상국에서는 아예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 수가 늘어나게 된다. 정책 효과가 그만큼 다르다는 얘기다.  

물론 경제법칙은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을 가리지 않고 적용된다. 재화의 희소성이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며 경쟁시장에서 균형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상호작용으로 결정된다는 법칙들 말이다. 덧붙여, 가장 보편적인 차원에서 경제정책의 목표가 ‘장기적인 사회적 후생을 공평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점에도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이 다르다면, 정책 또한 달라져야 하니까. 중요한 것은 경제정책의 선택이 순전히 경제학자나 경제 관료들만의 몫은 아니라는 점이다. “경제학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경제학자들은 가장 좋은 정책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직까지 합의를 보지 못했다.”는 고백을 유의미하게 수용할 필요가 있다.    

경제정책은 '정치과정'의 일부
따라서 경제정책은 본질적으로 ‘정치과정’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포함하여 IPD가 지향점이 대안적 견해를 설계하고 거시경제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제도 틀에 대한 민주적 토론을 활성화하는 데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안적 정책을 모색하고 제시하는 일은 경제학자들의 책무겠지만, 어떤 정책이든 장단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 그 선택은 정치적 선택이다. 그러니 ‘성장과 안정의 이분법’을 넘기 위해서도 문제는 다시, 민주주의다.  

10. 06.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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