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경영계'란 잡지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글을 청탁받고 쓴 것이다. 샌델에 대해선 조만간 더 긴 글도 쓸 예정이어서 지난주엔 그의 데뷔작인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도 입수했다. 이래저래 머리 한 구석은 샌델과 함께하는 만추가 될 듯싶다... 

 

경영계(10년 11월) 공동선의 가치와 정치를 논하다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란 문구와 함께 소개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가 인문서로는 8년 만에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도 하면서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고 있다. ‘정의’에 대한 이런 관심과 독서열이 어디에서 기원하며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를 계기로 이런 주제와 수준의 교양인문서 독자층이 확대된다면 긍정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어떤 내용의 강의를 우리에게 들려주는가? “정의를 다룬 뛰어난 철학서를 소개하고,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오늘날의 법적․정치적 논쟁을 다루는 수업”에서 샌델이 주요하게 다루는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밀, 롤스 등이다. 하지만 그는 이들을 연대순으로 다루지 않는다. ‘사상의 역사’를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철학적 사고’를 계발하는 데 더 큰 목적을 두어서다. 그가 강의하는 정의론의 전체적인 구도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이 어떤 것이고, 각각의 장단점은 무엇인가를 밝히는 쪽으로 짜여있다.

정의를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의 키워드는 행복 극대화, 자유 존중, 미덕 추구이다. 샌델은 먼저 시장 중심 사회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출발점이라는 이유로 ‘행복 극대화’를 주장하는 공리주의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이어서 정의를 자유와 연관짓는 이론을 살핀다. 자유를 통해서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 내에서도 의견은 갈려서 자유방임주의(자유지상주의)와 공평주의가 서로 경쟁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끝으로 정의가 미덕과 밀접히 연관된다고 보는 이론을 살펴보는데, 그러한 입장의 원조이자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리하여 샌델의 여정은 공리주의에서 시작하여 칸트의 도덕철학과 롤스의 정의론을 거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정의론으로 마무리된다. 중립적인 소개를 지향하지만, 이러한 여정 자체에 흔히 ‘공동체주의자’로 알려진 샌델 자신의 입장과 의도가 함축돼 있다.

공리주의자들에 따르면 옳은 행위란 공리(유용성)을 극대화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곧 공리란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하는 인간의 기본 성향을 도덕적․정치적 삶의 기초로 삼고자 한다. 벤담에게 공동체란 허구이며 존재하는 건 개인들의 총합이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이 정책에서 얻는 이익을 모두 더한 뒤에 총비용을 빼면, 다른 정책을 펼 때보다 더 많은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이렇듯 모든 사안에 대한 계산가능성을 전제로 함으로써 공리주의는 도덕철학보다는 ‘도덕과학’을 자임한다. 샌델은 이러한 입장에 대한 반박으로 모든 가치를 돈으로, 비용․편익 분석으로 환원할 수 있는가란 의문과 함께 공리주의가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가령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그리스도인을 사자 우리에 던져놓고 구경꾼들이 환호하며 쾌감을 느낀다면 공리주의자들은 어떤 근거로 그런 행위를 비난할 수 있을까.   

한편 자유지상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명분으로 모든 규제에 반대한다. 개인의 자유는 기본권으로 자신의 소유물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나는 나 자신과 나의 노동도 소유하며 이러한 권리는 아무도 간섭하거나 침해할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과세(내 수입을 가져가는 행위)에서 강제 노동(내 노동을 가져가는 행위)과 노예제(나는 나를 소유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행위) 사이에서 연속성을 발견한다. 즉 정부의 과세는 강제노동이나 노예제만큼이나 부도덕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대해 샌델은 안락사나 식인 행위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말한다. 실제로 2001년 독일의 한 남성이 먹힐 의향이 있는 사람을 찾는 광고를 낸 후 자원자 한 사람을 토막 살해하여 일부를 먹어치운 사건이 발생했다. 자유지상주의자는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식인 행위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간주하라고 주장하는 칸트는 행복 극대화나 미덕의 장려로서의 정의론에 반대한다. 칸트에게 도덕은 정언명령에 따른 자유로운 행동만을 가리킨다. 특정한 이익이나 욕구는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를 계승하여 롤스는 기본적인 자유가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평등원칙과 소득과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그 이익이 사회적․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쪽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차등원칙을 사회적 정의를 위한 기본원칙으로 제시한다. 롤스는 분배의 정의가 미덕이나 도덕적 자격을 포상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노력하고 도전해서 소위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려는 의지조차도 행복한 가정과 사회적 환경의 영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성공도 스스로의 공으로 돌릴 수 없게 되며, 이것이 롤스식 공평주의의 귀결이다.  

반면에 가장 오래 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다. 정치에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현대적 관점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정치공동체의 목적은 좋은 삶이며 사회생활의 여러 제도는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시민적 자질이 가장 뛰어나고 무엇이 공동선인지 가장 잘 파악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공직과 영광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란 어느 정도는 시민의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주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칸트나 롤스는 무엇이 선이고 좋은 삶인지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중립을 지키는 국가’와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자아’를 지지한다. 하지만 샌델이 보기에 그렇듯 선택의 자유만 확보하는 것으로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는 노력이 거기에 덧붙여져야 한다. 도덕을 회피하는 정치보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를 그가 더 옹호하는 이유다. 물론 이러한 결론보다 중요한 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시민의 미덕은 그러한 여정을 통해 길러지고 단련될 것이다.  

10. 1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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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동선의 정치'는 정의로운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1-14 14:19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전문가 서평'을 옮겨놓는다. 필자는 정치철학 전공자인 서울대의 유홍림 교수다. 전공 학자의 서평을 애타게 찾던 분들의 갈증이 해갈이 좀 되지 않을까 한다. 대학신문(10. 11. 07) '공동선의 정치'는 정의로운가?   우리는 얼마나 정의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가? 정의의 기준에 대한 합의는 가능한가? 정의에 대한 관심과 열망은 공동체적 삶의 역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이다. 정
 
 
philom 2010-11-09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학교에서 성에 대한 도덕 혹은 윤리를 정치 철학의 관점에서 배우고 있는 학생인데, 제가 배우고 있는 것과 이 책의 내용이 담고 있는 것이 맞닿아 있어 즐거움을 느낍니다. 이제 스스로 '습'을 해야 할 차례입니다.^^

로쟈 2010-11-09 08:12   좋아요 0 | URL
네, 그런 게 학-습이죠...

mirror 2010-11-09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생도 높은 점수 받기 힘들 정도의 단순한 요약이로군요? 이런 것이 학자가 쓰는 서평인지 모르겠습니다. 선생께서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책의 서평을 한다면, 이렇게 대학생조차 할 수 있는 단순한 요약만 하셨을까요? 전문적 지식이 없다면, 이런 평은 자제하는 것이 학자의 자세인 줄 압니다. 선생은 스스로 잘 알다시피 러시아문학 전공자이자 문학의 전문가이지, 윤리학이나 정치철학에 대해서 거의 공부를 하지 않은 분 아니던가요?
한국사회가 부박해서 한번 뜨면, 오만가지에 발을 디딜 수 있습니다만, 학자로서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간강사로서 유행의 흐름을 타면서 호구지책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금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한권밖에 읽지 않은 문학의 아마추어가 토스토예프스키의 입문서에 대해서 단순히 책을 거칠게 요약하는데 그치는 서평을 쓴다면, 선생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비로그인 2010-11-09 05:55   좋아요 0 | URL
문학을 전공한 사람은 문학에 대해서만 써야 한다는 생각... 음, 정치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은 정치에 대해 닥치고 있으라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한국사회가 부박하다는 데 동감하지 않을 수 없네요...

mirror 2010-11-09 07:30   좋아요 0 | URL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군요. 이현우 선생의 전공을 문제삼고 있지 않고, 이현우선생이 윤리학과 정치철학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으므로, 이런 글은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윤리학에 대한 학식이 깊은 러시아문학자가 이런 서평을 훌륭하게 쓴다면, 이런 비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이조부 2010-11-09 07:37   좋아요 0 | URL

정말 대학생이 이런 요약을 하면 높은 점수를 받기 힘들까요?

님이 언제 대학을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대학생들 수준을 너무 높게

보는건 아닐까요?

댓글에서 그건 지엽적인거니까 넘어간다고 해도, 시간강사로서 유행의

흐름을 타면서 호구지책 어쩌구 저쩌구 하는것은 상당히 불쾌하군요.

누구든 비판할 수 있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못한 저런 표현은

본인의 비판에 집중하게 하지 못하고 거부감과 편견을 갖게 하네요.

로쟈 2010-11-09 08:33   좋아요 0 | URL
윤리학과 정치철학 전공이 아니므로 이런 서평은 자제해야 한다는 말씀 같습니다. 깊은 학식은 님이 따로 보여주시면 될 거 같고, 서평에 관한 제 생각은 여러 번 밝혔지만 아마 참고하지 않은 탓에 오해(?)하신 모양입니다. 제 서평쓰기는 책을 읽지 않은 독자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이 책이 읽을 만한가, 관심을 끌 만한가 판단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제 견해를 살짝 입히는 식입니다. 이런 서평은 업계용어로는 '중3' 독자를 염두에 두고 씁니다. 실제적으론 대학 1학년생. 무엇이 불만인 건가요? 더불어, <정의란 무엇인가>는 학술서가 아니고 교양서이며, 저자 자신이 전공자(동업자)를 상대로 쓴 책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 서평은 학술지에 실은 것도 아니고 사보 형식의 잡지의 청탁을 받아쓴 것입니다. '전문적인' 서평을 원했다면, 다른 필자를 찾았겠지요. 님이 말하는 공부란 게 남들이 범접하지 못할 '전문가'가 되는 걸 목표로 하는 거라면, 제가 줄곧 지양해온 공부입니다. 그런 걸 의도했다면 이런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고 넌센스죠. 도스토예프스키가 연구자들을 위해서 소설을 쓴 것 아닙니다. 연구자들의 리그는 대학이란 제도가 만들어낸 생태계일 뿐이에요. '유행의 흐름을 타면서 호구지책'을 한다는 식의 비난은 역겹네요(서평쓰기와 블로거 노릇으로 한번 호구지책을 해보시렵니까?)...

자꾸때리다 2010-11-09 08:51   좋아요 0 | URL
님하 나와바리 다툼도 아니고 별것도 아닌 걸로 트집잡네혀. 그럼 님하도 전공한 정치철학 분야 말고는 글도 쓰지 마세효.

루딘 2010-11-09 09:16   좋아요 0 | URL
로쟈를 단지 러시아문학 전공자 내지 문학전문가 이전에 지식인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사르트르나 조정래 선생님이 역설하던 지식인의 책무에 어울리는 역할을 그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로쟈가 이 블로그나 여타의 매체를 이용하여 서평을 하는 본래의 의도를 먼저 이해하심이 순서일 듯 합니다.

mirror 2010-11-09 19:09   좋아요 0 | URL
1. 진심으로 선생의 글이 대학 1년생 또는 윤리학이나 정치철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또 그 책을 읽을 마음을 갖게 하는 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과연 샌들의 책에 대한 적절한 소개가 될 수 있나요? 이런 내용은 다른 규범 윤리학이나 영미정치철학 개론서에 대한 소개라고 해도 될 정도인걸요? 책의 핵심 내용만을 요약한 이 글을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 분야에 대한 기본지식 있는 사람들이나 또는 이미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일 겁니다.
2. 만약 선생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훌륭하고 쉬운 입문서를 일반 독자에게 소개한다해도, 이렇게 책 내용을 요약만 하실겁니까? 지하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내용을 단순하게 요약하실건가요? 선생이 이런 책에 대한 소개보다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책의 소개를 훨씬 잘할 수 있다면, 이 책에 대한 소개도 선생보다는 다른 전문가가 그만큼 더 훌륭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대중과 친해지려는 시도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각 테마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은 갖추어야죠. 선생의 샌들의 책에 대한 글과 말은 다른 문학에 대한 글보다 훨씬 질이 떨어집니다. 대학 1년생이 독자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말이죠.
"어제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릴케에 관해서도 언급할 일이 있었다. 그건 자서전에도 나오지만 파스테르나크가 어린시절에 릴케를 직접 본 적이 있어서다. 1910년 릴케는 연인 루 살로메와 함께 두번째 러시아 여행에서 톨스토이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파스테르나크는 그때 두 사람이 기차에 오르는 모습을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했다. 그의 나이 열살 때이다." 선생이 쓴 글입니다. 릴케에 대해서도 파스테르나크에 대해서도 아주 인상깊죠. 이렇게 롤즈와 칸트에 대해서도 쓸 수 있습니까?
4. 선생의 서재를 오랜기간 드나들었고, 도움도 받은 적 있습니다. 그런데 영미정치철학이나 윤리학은 선생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샌들의 책이 나오고서야 선생의 관심이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 형성된 관심이 얼마나 좋은 대중적 글쓰기로 이어질까요? 적절한 준비를 하시고 글을 쓰라고 권하고 싶군요.

대구문화예술리뷰 2010-11-09 17:36   좋아요 0 | URL
거울님!!의 댓글 내용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로쟈님을 지지합니다. 로쟈님 화이팅 !! 여기지나시는 분들도 로쟈님께 응원메시지 한줄씩 올려주세요.

comorin 2010-11-09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학술지에 서평을 거재한 것도 아니고, 경영계라는 잡지(사보)에 책 소개 정도로 기고한 것인데, 저도 mirror님의 딴지는 조금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2010-11-09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9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울프심 2010-11-09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반인으로서 mirror님에게 몇 자 묻고자 합니다. 우선, 제가 로쟈님의 서평 방식을 꼭 좋다고만 얘기하지 않는 것임을 먼저 말합니다. 그의 서평은 적어도 일반인이 제가 보기에는 그런 책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과 다른 책들과 이렇게도 연관성을 가질 수 있겠구나 하는 측면에서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위의 많은 댓글을 읽으면서 의문이 생긴게 있어서 여쭤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본인이 생각하시는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요약이란 무엇인지요?

둘째로, 학자가 할 수 있는 서평이라는 것은 무엇인지요?

세째로, 전문가인 학자만이 샌들에 대해, 아니 정치철학에 대한 서평을 쓸 수 있다면, 그 서평은 어떤 것이 있나요? 말씀해주시면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무수히 쏟아지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기 위해서는 그 분야의 전문가 리스트를 갖고 있어야 된다는 얘기가 되는 것인지요?

네째로, 이 서재는 모든 칭찬과 비난이 교차하는 속에서 운영되고 있지만, 비난은 그 글과 관련된 것에서 끝나야 하는 것이지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가 꼭 언급되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섯째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문가가 그리 특출한 사람들인가요? 그러면 아이폰에 왜 샌델의 강의가 다 수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럴순 있게네요! 다 영어로 말하니까 영어 전문가만 들어야 겠네요! 하긴 우리나라에는 영어전문가들이 많이 있긴 하죠!!

여섯째로, 본인께서 생각하시는 샌델의 평을 한 번 써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면 확실히 앞서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명쾌히 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평에 대한 이 서재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본인은 혹시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고 쓰지 않을 것인가요? 저는 mirror님이 전문가인지 아니면 저 같은 일반인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본인의 서재에 한 번 가보았습니다. 어떻게 평을 쓰고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많이 작용하였습니다. 하지만, 볼 수가 없었습니다. 비공개라서 그런가요?

마지막으로, 저는 저희나라 대학 1학년생들이 위의 로쟈님 정도의 서평을 이해하고 쓸 수 있는 실력을 가졌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굉장히 밝을거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공부하라는 말과 책을 읽는다가 다른 의미로 쓰이는 우리나라에서 고등학생의 학식이 그렇게 풍부해졌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으니까요? 그건 저의 오판이자 오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저의 자식들을 다시 평가해야 할 것 같군요..

mirror님이 어떤 답을 하시질 기대가 됩니다. 하지만, 답변이 앞서의 호구지책 같은 단어가 언급이 않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봅니다.

나비가 된 시지프스 2010-11-10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공비행이 이런것이군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즐기는 고공비행으로 조종대를 운전할까 걱정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블로그의 의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오직 공개된 한사람 식은땀나게 저공비행하는 조종사~ 지상에서 편안하게 멋드러진 가명들을 사용하며 가까이에서 비행기를 볼 수 있다는 만족감에 박수치는 대부분의 구경꾼들, 그 멋드러진 저공비행을 위해 세월과 고통 집념 용기가 수반되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특히나 조종간을 제대로 한번이라도 잡은 사람이라면 그 심정을 더 잘 알기에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 칠 것이고 눈가에는 찔끔 눈물이 고일 수도 있다. 저는 이 블로그의 존재만으로도, 그리고 로쟈님의 존재로 인해 지식들이 몰려들어 그 지식의 향연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행복을 느낍니다. 여하튼 거울님의 견해에 100% 동의하지 않지만, 가끔 토론에서 논의의 활성화 차원으로 일부러 대립각을 만드는 총대매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거기까지가 그의 역할이죠. 일부러 그러신 것 같기도 하고^^ 대부분은 자신의 지식이 뽀록날까 망설이거나 적극적이지 않은데 말입니다. 바로 드러나잖아요^^ 여하튼 거울님도 용기있네요~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없는(?) 관람료도 없는^-^ 저공비행에 그래도 예의는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머리위를 스칠 듯 지나가는 푸른 창공의 신나는 저공비행을 꾸준히 보기 원하는 구경꾼들이 사뭇 많습니다. 저공비행 쉽게 아무나 할 수 있는거 아닙니다. 이후 구경꾼 거울님의 저공비행에 대한 시의적절한 환호성과 혹은 야유(?)를 기대합니다. 어찌보면 댓글을 달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유행의 흐름', '호구지책', '최소한의 부끄러움', 정말 그에 대해 알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깊은 사색 부탁드립니다.

yoonta 2010-11-1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irror라는 분 본인 스스로 "금도"에 어울릴 만한 글이 무엇인지 전혀 보여주지 않으면서 대뜸 "호구지책"이 어쩌고 저쩌고 망언을 쏟아내셨군요. "금도"를 지키면서 제대로된 비판을 하려면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상식도 모르시나요?

본인이야말로 "부끄러움을 알아야"할 것 같아보이는군요.

토토랑 2010-11-10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결국은 샌들은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아는데~
왜 이런 글을 당신이 쓰느냐는 얘기 같다는...

아니면 열심히 글을 쓰던 당신이.. 책 제목만 나열한거 같다. 슬퍼요~ 이런건지??

저기요.. 무식한 독자도 있어서요.. 너무 어려운말 말고 쉬운말 부탁드려요
플리즈~

Daniel 2010-11-11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마지막학기 다니고 있는 학부생입니다.

대학생들도 자기 전공 아니면 저렇게 쓰기도 힘들어 할 겁니다. 아니 자기 전공도 소홀히 하는 세상이죠... 요즘 대학생이란 존재는 시험공부하느라 바쁘지 정의란 무엇인가도 아직 읽지 않은 친구들이 상당합니다.
뭐 저도 시험공부에 치이는 것은 예외가 아니죠;;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라는 건 알겠지만... 막상 취업에 시험준비에 목매달다 보면 엄두 못내는 것이 대학생들 현실입니다. 그리고 타 전공 책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도 하구요.

논란을 일으키신 분께서는 현 대학생들의 수준을 정말 높게 잡으신 것 같군요.

그리고 '호구지책'이라... 이거 속된 말로 아마추어같이 왜 그런 어휘를 택하신건가요? 여기 블로그 열심히 해주시면 누가 상주나요? 블로그 운영하신다고 로쟈님 쓰신 책이 몇십만권 팔리기라도 하나요? 예전에 도올 김용옥 선생님 관련 글 읽어본 적 있는데 그리 유명하신 분도 글과 강연만으로는 쉽지 않다고 하시더군요. 왜죠? 한국사회는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으니깐요!!! 술먹고 노래방가고 게임방가고 당구치고 룸가고... 유흥에는 돈 잘만 써도 책 사는 건 아까워하죠. 빌려보면 된다나... 하더군요.

여기에 이렇게 고생고생하시면서 블로그 운영하시는데... 거기에 대놓고 호구지책이라고 하시다니... 참 보기 그렇습니다.

혹시 문제되면 삭제하겠습니다만... 한번쯤 댓글 쓰실 때도 생각해보시고 글 쓰셨음 합니다.

알로하 2010-11-11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식의 딴지걸기는 정말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슨 학술지에 게재한 글도 아니고 사보, 개인블로그에 올린 글에 '뭘 좀 알고써라'이런 식의 댓글은 왜 다시는지? 다른 의견이 있으시면 그 의견을 적으면 될일을...

INFPER 2010-11-12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요약 중심적인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mirror님이 대학생 운운 하신 것도 그런 맥락에서 한 말이 아닌가 생각하고요. mirror님의 댓글이 예의에 어긋나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한명을 다굴;하는 분위기는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로쟈님의 홈이고 팬이 많다 하더라도(저도 그 중 한사람입니다만) 같은 말을 굳이 여러명이서 쏟아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방적인 분위기를 희석?시켜보고자 mirror님의 견해를 좀 옹호하자면, 제가 이해하기에 mirror님이 말씀하신 '자격'이라는 것도 학위같은 공식적인 성격의 타이틀을 의미하는 건 아닌 듯 하고, 다만 어느 주제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는 정도의 글을 쓰는 위치에 있으려면 어느 정도 이상의 숙성된 공부와 관련지식은 갖춘 후여야 되지 않겠느냐 정도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꼭 전공분야의 공인된 전문가들만 글을 쓰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mirror님이 말씀하신 그런 자격을 갖춘 이들중엔 정작 대중적인 글쓰기에 적극적인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는건 아닐까요?)

mirror 2010-11-12 17:53   좋아요 0 | URL
전문가들이 이런 책에 대한 서평을 쓰고 싶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문이든, 사보든, 우리나라의 언론매체가 서평자로 누굴 선택하느냐가 중요하죠. 우리나라 언론들은 특이하게도 그 책에 맞는 전문가를 찾아서 서평을 맡기기보다는 기자가 아는 사람, 또는 유명한 사람들에게 맡기는 경향이 강하죠. 샌들의 책에 대해서도 신문사나 매체들이 각 대학의 철학과에만 전화해도 이 책에 대해서 적절하게 서평해주는 교수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철학과에는 윤리학 전공 교수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윤리학 교수들은 샌들의 책에서 다루는 철학자들의 중요 저서들을 읽고 어느 정도 정확한 지식을 가졌을 가능성이 매우 많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격이 없는 교수겠죠. 이와 같은 문제들은 단순히 청탁받아서 글 쓰는 사람들만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게으른 언론매체 담당자들의 멍청한 습관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블로그로 그런 일을 할 수도 있는데, 왜 안 하느냐는 반론이 가능한데, 우리나라의 학자들이 게으른 것은 사실이죠. 그런 면에서 욕먹어도 할말 없습니다.

쉽싸리 2010-11-13 16:26   좋아요 0 | URL
"게으른 언론매체 담당자들의 멍청한 습관"이 전문가의 서평이 나오지 않는 제일 큰 이유인가요? 우리나라 학자들이 게으른것이 다음 이유이고요?
이런 와중에 요만큼이라도 고군분투?하는 로쟈님에게 오히려 격려를 주는게 타당하지 않을까요? 님의 말씀이 납득이 안되네요.

페크pek0501 2010-11-15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시는군요. 이런 경우를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늘 이것이 궁금했습니다.
저는 그런 유명세가 싫어서 아주 유명한 필자가 되고 싶진 않아요(제 능력으로 될 수도 없지만ㅋ). 상처 받기 싫은 거죠. 그저 안티팬 없이 제 글을 좋아하는 소규모의 팬만 있길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시죠? 누구나 어떤 면에서 탁월함을 인정 받기 시작하면 안티팬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건 대통령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이것으로 위안 받으시길...
로쟈님, 힘내세요!!!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말한 분도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분도 우리 사회엔 필요한 법이니까요, 우리 생각의 균형을 위해서요.
우리 인간은 누구나 완성의 길을 향해 가는, 그러나 아직은 미완의 길을 가고 있는 나그네입니다.
이것이 일이 있고 난 뒤인 지금 이 시간, 양쪽 서로가 너그러워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두괴즐 2010-11-18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irror 분의 문제제기도 일각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저도 지나치게 내용 요약적이라는 생각을 했었기에)만, 로쟈님께서 위에서 해명했듯이 자신의 서평작성의 취지를 분명히 밝히셨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mirror님은 아쉬움을 거칠게 표현하신 것 같고요. 저도 로쟈님 블로그를 즐겨 찾는 사람입니다만 모든 글을 꼼꼼히 읽어 보지는 않습니다. 이런 서평은 대충 훑고 지나가지요. 반면 저의 관심사에 부합하고 또 로쟈님의 견해가 빛이 날 때는 프린팅해서 꼼꼼히 읽어보기도 하지요. 저는 공부하는 학생인데,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면서 앎이 늘 때면 '나 혼자 이렇게 공부하고 알아봤자 무슨 소용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서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보고 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로쟈님의 블로그 운영이 상당히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에드워드 윌슨의 <바이오필리아>(사이언스북스, 2010)에 실린 최재천 교수의 추천사('생명도 알아야 사랑한다')를 읽다가 멸종된 '황금두꺼비'가 궁금해 찾아봤다. 최교수가 코스타리카 고산지대에서 아스텍개미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하던 시절 보았다는 두꺼비다.  

어느 날 밤 숲속에서 나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오렌지색의 황금두꺼비를 보았다. 어른 한 사람이 제대로 들어앉기도 비좁을 정도의 물웅덩이에 언뜻 세어 봐도 족히 스무 마리는 넘을 듯한 수컷 두꺼비들이 마치 우리 옛이야기 '선녀와 나무꾼'에 나오는 선녀들처럼 멱을 감고 있었다. 그들에게 방해가 될까 두려워 숨소리마저 죽인 채 나무 뒤에 숨어 그들을 관찰하는 내 모습은 영락없는 나무꾼이었다. 다만 그들이 수컷 선녀들이란 게 아쉬울 뿐이었다. 그들은 고혹적인 몸매를 뽐내려는 듯 다리를 길게 뻗기도 하고 물웅덩이에 첨벙 뛰어들어 헤엄을 치기도 했다. 그 해 1986년 나는 그들을 딱 두 번 보았고 그게 내가 그들을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이렇게 생긴 두꺼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60년내 중반에 처음 이들을 발견한 미국의 양서파충류학자는 "온몸이 거의 형광에 가까운 오렌지색으로 뒤덮인 작고 섬세한 두꺼비를 보고 누군가가 그 두꺼비를 통째로 오렌지색 에나멜 페인트 통에 담갔다 꺼낸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을 과학자들이 마지막으로 본 게 1989년 5월 15일이고, 국제자연보호연맹은 2004년 그들이 완전히 절멸한 것으로 보고했다고 한다.  

이 황금두꺼비 이야기는 최 교수의 에세이집 <열대예찬>에도 나온다고 하므로("이럴 줄 알았으면 그들이 벗어놓은 옷가지라도 한두 개 숨겨 둘 걸"이란 한탄을 적어놓았다) 나도 한번 읽었을 텐데, 잊고 있었다. 생명사랑을 주제로 한 책의 서두에서 다시 읽게 되니까 느낌이 또 다르다. 지구상에서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두꺼비라니! 

과학자들은 지금과 같은 수준의 환경 파괴가 지속된다면 2030년경에는 현존 동식물의 2퍼센트가 절멸하거나 조기 절멸할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금 세기말에는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들의 빈 자리를 아마도 늘어만 가는 '인구'가 채울 것이다. 쓰레기들과 함께. 생명사랑에는 동의하지만, 인간사랑에는 조금 머뭇거리게 되는 일요일 밤이다... 

10. 1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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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7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9 0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업권력의 시대와 멍텅구리들

'삼성 문제'에 대한 책들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일반화해서 말하면, 기업이 권력화된 시대이고, 자본의 국가지배가 더 강화된 시대로 접어들어서이다. 자본과 국가권력의 '전략적 접속'의 결과 국가가 기업에 대한 제어능력, 혹은 제어의사를 상실했다면, 남은 것은 시민사회인가? 조정래의 <허수아비춤>(문학의문학, 2010)의 결론도 그렇고, 최근의 초점은 시민사회 역할론으로 모아지는 듯싶다. 학술적인/이론적인 언어로 이 문제를 짚은 책의 제목이 <민주주의 체체하 '자본의 국가지배'에 관한 연구>(한울, 2010)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자본은 민주주의의 형식을 전멸시킬 수 없고, 민주주의의 형식만으로는 자본을 해체할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은 통상의 '민주주의 강화론'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생각된다.   

 

한겨레(10. 11. 05) 민주주의 체제에서 기업은 어떻게 권력을 키웠나

민주주의 체제가 이뤄진 뒤 우리나라 상황에 대한 주된 분석은 “절차적 민주화는 이뤘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못 이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전망들은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왜 못 이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또렷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최근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의 이종보 박사(사회학)가 써낸 <민주주의 체제하 ‘자본의 국가 지배’에 관한 연구>는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자본이 어떤 방식으로 권력 지배를 심화해왔는지 분석한 책이다. 삼성그룹으로 대표되는 자본세력이 민주주의를 형식화시키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전략을 썼는지 세밀하게 밝혀, 앞선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출발점은 “왜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기업권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느냐”는, ‘민주주의의 역설’에 대한 의문이다. 이를 풀기 위해 지은이는 ‘복합관계론적 계급지배론’을 우선 제시한다.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벌어지는 세력 사이의 경쟁을 본질적으로 불균형적인 계급 적대라고 파악하면서도, 이를 단지 경제적인 관계로만 보지 않고 복합적이고 다양한 관계들을 함께 살핀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렇게 볼 때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는 민주주의 체제를 ‘형식화’하려는 전략과 ‘실질화’하려는 전략의 각축이 존재한다고 설정했다. “민주주의 체제를 형식화해 최종적으로 사회와 국가를 식민화하려는 자본 분파 등 지배블록을 구성하는 다양한 분파들의 실천과, 그에 맞서 민주주의의 수준을 심화해 실질화하려는 시민사회 운동세력 사이의 각축”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각축장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넘어오며 열린 공간들, 곧 국가기구·제도정치·시민사회 등이다.

그러나 이런 각축은 불균형적이다. 자본세력이 불평등한 현실 권력을 활용해 민주주의 체제에 전략적으로 접속하려 들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곧 “정부가 주도하는 정책 협상 테이블에 저항 세력들이 초대되는 것을 거부할 순 없지만, 협상 결과는 자본에 이익이 되는 정책이 산출되게 하는 것”이다. 연구대상인 삼성그룹의 전략을 살펴보면, 이런 전략적 접속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주요 각축장인 제도정치에서 삼성은 전체 정당체제를 아우르며 엄청난 규모의 정치자금을 폭넓게 제공했고 이는 선거경쟁에서 시민사회 운동세력의 전략을 압도했다. 행정·사법 관료에 대한 매수·포획 등의 방법으로 국가기구내에서도 기업권력의 거점을 만들었다. 



저항세력의 근거지인 시민사회도 예외가 없었다. 삼성은 자본의 주요 대립축인 노동조합을 애초부터 배척하고, 언론과 대학·지식인 등 가능한 많은 자원들을 동원해 시민사회로부터 ‘지지·동의’를 조직해내는 전략을 썼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등의 친기업 담론의 유포나 대규모 사회공헌활동 등도 이런 전략의 일환이다. 



물론 자본세력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전략을 관철하기만 하지는 못했다. 엑스(X)파일 공개,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 등을 계기로 시민사회 운동세력의 저항 역시 꾸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사회적 위기를 돌파하는 삼성의 전략은 되레 자본의 전략적 접속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보여줬다고 본다. 각종 문제 제기가 이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삼성은 삼성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 기업의 문제로 치환하는 등 ‘분산 파편화 전략’을 썼고, 불법 경영권 승계 문제 등에 대해서는 기업권력으로 기울어진 사법부를 활용한 ‘사법 적극주의’를 써서 저항 세력의 발목을 잡았다. 또 대국민 사과 등으로 시민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을 능동적으로 끌어안으려는 시도도 벌였다. 반면 시민사회 운동세력은 비대중적 수단인 사법부의 결정에만 기대는 등 한계를 드러냈다. 지은이는 이를 두고 “대자본 헤게모니와 공존하는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라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체제의 결말은 비극인가? 지은이는 “자본은 민주주의의 형식을 전멸시킬 수 없고, 민주주의의 형식만으로는 자본을 해체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계급 지배가 계속되지만, 그것은 분명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실질화 전략은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저항 세력으로 하여금 사법 영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사법관료의 자본 편향적 판결 앞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한 ‘정치’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민주주의의 실질화는 운동정치와 제도정치의 효과적인 결합으로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 맞서는 ‘대중적 헤게모니 담론’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시민사회 운동세력들이 ‘정체성 구분하기’에서 벗어나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대안적 전략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최원형 기자) 

10. 11. 07.  

P.S. 현단계 '자본의 국가지배'가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유구한 '전력'을 갖고 있다. 히로세 다카시는 기업권력이야말로 제1권력이라는 사실을 진즉에 폭로한 바 있다. 하지만, <기업권력의 시대>(난장이, 2009)의 저자에 따르면 기업권력이 오늘날만큼 극대화된 적은 없었다. '전면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거기에 상응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자기계발 담론이다.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 2009)는 기업권력의 시대가 곧 자기계발의 시대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2004년부터 국립국어원의 신조어로 등록되었다는 '스펙'은 그런 점에서 언제부턴가 통용어가 된, 그리고 장래희망의 대명사가 된 'CEO'와 함께 기업권력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징후적 키워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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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1-08 00:16   좋아요 0 | URL
자본에 지배된 현대 소비사회 대중들을 안타까워하며 댓글을 남깁니다.



11월 11일은 위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탄생일이다. 우리 솔로 부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한 문학 정신을 기리며 빼빼로데이니 뭐니 하는 커플들의 저급한 소비문화적 테러를 이겨낼지어다! 솔로 천국 커플 지옥

비로그인 2010-11-08 19:55   좋아요 0 | URL
이번 기회에 빼빼로데이 대신 도스토예프스키 탄생일 제대로 알고 가네요.^^

 
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

주말 북리뷰에서 새로운 관심도서가 눈에 띄지 않아서(리처드 슈스터만의 <몸의 의식>(북코리아, 2010) 같은 책을 나는 어제 손에 넣었다) 차라리 이번주 '장정일의 책속 이슈'를 스크랩해놓는다.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를 다루고 있어서다. 나도 '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란 서평을 쓴 적이 있지만, '책속 이슈' 곧 책의 핵심을 잘 짚어주고 있다.  

 

한겨레(10. 11. 05) '공갈 자본주의’ 대신 공산주의의 새출발을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2008년 금융위기의 해결책을 놓고 대립했다. 금융 파국을 방지하기 위해 연방준비은행이 7000억달러나 되는 구제금융을 민간 금융사에 지원하려 하자, 공화당 의원들이 구제금융은 금융사회주의이며 비미국적이라고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오바마와 민주당은 초당적 협력을 강조하며, 끝내 월스트리트에 세금을 쏟아부었다.

슬라보예 지젝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에서 그때 미국에서 벌어진 사회주의적 조처의 목적은 “빈자가 아닌 부자를, 돈을 빌리는 자들이 아니라 빌려주는 자들을 돕는 것”이었다면서, 자본가들이 그토록 질색을 하는 ‘사회화’가 어떻게 자본주의 시스템을 구원하는 일에 복무할 때는 아무 거리낌없이 용인되고, 또 어떻게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도 가능한지를 명료히 분석한다.

공화당 의원들이 구제금융을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맹비난했던 배면에는, 자본주의 체제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없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심리전적인 목적이 있다. 즉 그들은 구제금융을 극렬히 반대함으로써 금융위기는 체제의 근본적인 결함 때문이 아니라 그저 지나치게 느슨한 법적 규제와 거대 금융기관의 타락이었을 뿐이라는, 흠결 없는 자본주의 체제의 신화를 효과적으로 선전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이런 서사를 통해 점차 자연이 되어 간다.

반면 구제금융에 동조한 좌파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메인스트리트(중산층)의 복지는 번영하는 월스트리트(금융자산)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속수무책이었고, 월스트리트를 걷어차면 실제로 타격을 입을 사람들이 평범한 노동자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이런 사실이 가르쳐 주는 것은 자본주의를 살리기 위해 언제라도 사회주의 구원 투수를 투입할 수 있는 우파는 물론이고, 좌파마저 그런 자본주의의 공갈을 자연스러운 질서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압도적 자연화’가 이루어진 속에서는 투기로 무일푼이 된 은행을 국고로 지원하는 것을 당연시하면서, 수천 명의 노동자가 쫓겨나는 공장을 국영화하는 건 비합리적인 것으로 믿게 된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공황이 발생할 때마다 자기 이데올로기의 기본적 전제를 반성하기보다 금융 감독과 같은 ‘기본으로 돌아가기’로 강화되고, 매번의 공황을 통해 중산층은 자본주의 질서에 더욱 길들여진다. 이게 사실이라면, 시장에서 참패하고 악마화(강제수용소화)된 국가 악몽으로 막을 내린 공산주의는 왜 매번 기본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숱한 진보적 인사들은 이 시대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인 양 하지만, 현실은 사회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결이며, 진정한 진보인사는 공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지젝은 말한다. 오래전에 사회주의 정책의 기초를 완료한 서구 유럽은 물론이고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공공연히 사회주의 정책을 쓸 수 있는 미국의 예, 그리고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아시아적 온정주의’로 위장된 중국이 보여주듯이 전세계는 이미 사회주의화되었다. 그러나 기뻐할 이유가 없는 것은 그 사회주의가 자본을 위한 사회주의이며, 자본주의는 가중되는 심각한 체제 모순 때문에 그만큼 강력한 국가의 권위(법·경찰)와 민중을 달랠 사회주의 복지정책마저 수용해 나간다.

세계는 영구혁명의 혼이 제거된 사회주의와 재장전된 공산주의의 싸움이라고 단정하는 이 책은, 공황과 재출발 사이를 왕복달리기 하는 자본주의의 희극적인 반복을 보면서 공산주의의 새 출발을 촉구한다. 그게 내가 읽은 이 책의 핵심이다. 지젝이라는 성체(聖體)를 뜯어 먹는 방법은 제각기이겠지만, 지젝의 거시기를 뽑아 내시로 만들고 비역까지 하는 일은 아주 손쉽다. 그의 급진주의적 정치이론은 모르쇠 하면서, 정신분석이나 문화이론의 가두리에 그를 감금하는 것이다.(장정일_소설가) 

10. 11. 06. 

 

P.S. '공갈 자본주의'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한 독자라면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살림, 2008)과 홍기빈의 <자본주의>(책세상, 2010),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부키, 2010)를 참고해볼 수 있겠다. 장하준 교수의 책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유시장'을 문제(불행)의 원인으로 지목한다는 점에서 지젝과는 관점이 다르지만, 신자유주의 비판서로서 여전히 계몽적 가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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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1-06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작가 고어 비달이 미국 경제 체제를
"가난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 기업,
부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주의" 라고 했다는데,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라는 것도 있군요!


로쟈 2010-11-07 20:47   좋아요 0 | URL
'그들만의 사회주의'(자기들끼리 해먹기)라서 문제인 것이죠...

2010-11-06 1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7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관심도서는 어제 구입한 W.J.T. 미첼의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그린비, 2010)이다. 부제는 '이미지의 삶과 사랑'. 저자는 시카고대학에서 영문학과 미술사를 동시에 강의하고 있는 드문 경력의 소유자로 대학원 시절 내러티브 이론에 관한 편저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이다. 국내에는 <아이코놀로지: 이미지, 텍스트, 이데올로기>(시지락, 2005)가 소개됐었다.

 

두번째 관심도서는 에드워드 윌슨의 <바이오필리아>(사이언스북스, 2010). 저명한 개미학자이자 사회생물학의 창시자가 펼치는 '생명사랑'론이다. <생명의 편지>(사이언스북스, 2007), <생명의 다양성>(까치글방, 2005)과 같이 '세트'로 묶을 만하다. 바이오필리아 3종 세트다.

 

역사분야쪽으론 앙리 피렌의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삼천리, 2010)가 있다. 소개에 따르면, "유럽 중세의 개막을 아주 새롭고 독창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책이다. 일반적으로 '서로마제국의 몰락과 게르만의 침입'을 통해 5세기 무렵 고대에서 중세로 이행했다고 보고, 유럽의 기원을 실질적으로 게르만족의 이동과 로마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생겨난 개념으로 본다. 이런 관점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저작이 바로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이다."   

역자는 이렇게 거든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의 역사학적 가치는 '폭발적인 연구를 유발한' 점에 있다. “피렌이 없었더라면 중세 초기의 경제사와 관련된 역사서술은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는 과장된 것이 아니다. 피렌 이후의 연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책은 필독서이다. 중세 초기의 많은 연구서들이 피렌의 저서를 출발점으로 한다." 즉 중세초기 연구의 기폭제가 된 저작이라는 것. 그 성격이 문제적인 것인지, 고전적인 것인지는 좀더 확인해봐야 알겠다. 앙리 피렌(피렌느)의 책으론 <중세 유럽의 도시>(신서원, 1997)이 출간됐었다. 샤를마뉴에 대해선 발췌역이지만 아인하르트의 <샤를마뉴의 생애>(지만지, 2008) 등도 소개돼 있다.  

 

끝으로 남성중심적 고고학의 편견을 깨는 책, <누가 베이컨을 식탁으로 가져왔을까>(알마, 2010). 원제는 '보이지 않는 성'이다. 그건 물론 여성을 가리킨다. "선사시대 사냥은 남자들만의 세계이며 여자들은 기껏해야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식물을 채집했을 것이라는 게 그동안의 통념"이었고 저자들은 그걸 깨뜨리고자 한다고. 덕분에 떠올리게 된 책은 로잘린드 마일스의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동녘, 2005). "최초의 여성이 등장한 때부터 현대까지 세계의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여성의 시각으로 다시 쓴 세계사."이다. '보이지 않는 성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까... 

지방으로 강연을 가기 전에 급하게 몇 자 적는다. 몇 권만 꼽았을 뿐이지만, '전업'이 아닌 이상 이 책들을 다 읽을 순 없고, 일부는 눈요기로 때워야 할 형편이다(<바이오필리아>와 <마호메트와 샤를마뉴>는 아직 구입하지 못했다). '식탁'으로 가져온 책이라고 해서 다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다... 

10. 1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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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케빈 2010-11-05 11:04   좋아요 0 | URL
에드워드 윌슨의 바이오필리아 발행연도가 오기되었어요. 2010년인데..

로쟈 2010-11-05 11:11   좋아요 0 | URL
네, 수정했습니다.

무이 2010-11-05 11:10   좋아요 0 | URL
앙리 피렌은 임지현 선생이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의 맺음말에서 언급하며 역사적 시각을 호평했던 학자였고 그 인상이 강해서 관심을 갖게 된 저자인데, <중세 유럽의 도시>와 같은 역자의 번역으로 주요 저작이 한권 더 나왔군요.. 소식 감사합니다^^

로쟈 2010-11-05 11:11   좋아요 0 | URL
어디서 이름을 들어봤다 했더니 그 책에서 읽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