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종로에 있는 서점에 들러 손에 든 책은 김삼웅의 <리영희 평전>(책보세, 2010)이다. 책은 발행일이 12월 10일자인 1쇄였는데, 어느새 3쇄에 들어간다고 한다(오늘이 11일인데!). 서거와 맞물려 다시금 선생의 삶과 역정이 주목받는 듯하다. 일부의 냉대와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단연 '이주의 책'이라고 해야겠기에 서평기사와 칼럼을 옮겨놓는다. 그리고 '사회적 독서'로 분류해놓는다.  

서울신문(10. 12. 11) 권력 앞 독야청청했던 리영희의 삶과 글  

기자로서 펜을 빼앗겼지만, 그럴수록 진실을 토하는 사자후는 더욱 커져갔던 참언론인이었고, 강단 바깥으로 내쳐짐으로써 비로소 만인의 스승이 될 수 있었던 이였다. 야만과 광기가 몰아치던 시대의 한 줄기 등불 역할을 했던 이였다. 불이면서 또한 얼음이었고, 엄혹한 시절 많은 이들의 전위면서 또한 후방이었던 이였다. 



무릇 평전이라는 것이 흔히 빠지는 오류가 ‘주례사식 찬사’다. 하지만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이 쓴 ‘리영희 평전’(책보세 펴냄)은 이러한 것들과 본질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리영희라는 인물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의 삶에서 흠결을 찾아내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엄혹한 시절이었기에, 오히려 조금만 타협했다면 남부럽지 않은 권력과 부를 누리는 삶도 가능했겠지만 그는 언론사와 대학에서 네 차례나 내쫓기는 삶을 회피하지 않았다. 또한 세계사적인 대변화의 시기, 외로운 섬처럼 고립된 한국사회의 미숙한 이성들에게 명징한 시대정신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펜을 앞세운 이성의 목소리는 물론 투쟁의 거리와 감옥도 그는 기꺼이 마주했다.

1989년 한국기자협회보에 남긴 그의 글은 당시에나 지금이나 후배 기자들의 얼굴을 새삼 홧홧거리게 만든다. ‘내게 신문지는 있어도 신문은 없었다. 신문지의 소식들은 하나같이 권력을 두둔하는 낡은 내용, 권력에 아부하는 구린내 나는 내용’이라면서 ‘그따위 신문종이를 만들어내는 신문인들이 감히 언론인을 참칭할 때 나는 그들을 언롱인(言弄人)이라는 호칭으로 경멸해 왔다.’고 호되게 질타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모든 정부의 결정, 정책, 행동을 국가의 이름으로 대치해 놓고 그런 것에 대한 외부의 비판을 반박하는 것이 애국심이라고 직결해 버리는 사고방식이 과연 애국심이겠는가를 생각해 본다.’

1970년 리영희 명예교수가 언론계를 향해 토해낸 사자후는 40년이 지난 지금의 기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초강대국과 굴욕적인 외교 협상을 맺어도, 진실 찾기는 애써 외면한 채 그저 정부의 발표 중심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국익으로 생각하는 기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리영희의 모습 전부는 아니다.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인 듯싶은 이미지로 비쳐지지만 기자 시절 동료들과 놀러 가서 배갈을 잔뜩 마시고 보트를 타려다 물에 빠지거나 코트를 잃어버리고 돌아온 이야기며, 백범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를 테러했던 생면부지의 의혈청년을 불러 저녁밥과 술을 사주며 의기를 칭찬했다는 일화 등은 그의 인간적 면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리영희의 정신을 일찌감치 몸으로 받아 실천한 후배 언론인이자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인물의 현재적 의미를 되살려내는 평전 작업에 매진해 오고 있는 김삼웅이기에 명쾌하고 엄정한 펜끝은 절로 리영희를 닮았다.

지난 8월 27일. 1시간 30분에 걸쳐 생애 마지막 인터뷰를 가진 것을 포함해 모두 150시간에 이르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또한 자서전 ‘역정’, ‘대화’ 등 그의 십수권에 이르는 저서를 모두 아울렀고, 그동안 리영희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남긴 짧고 긴 글을 모두 모아 정리했다. 김삼웅은 리영희의 81세 생일이자 병세가 완연했던 지난 2일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을 찾아 책을 바쳤다.

김삼웅은 “평전을 쓰면서 솔직히 후회했다. 그의 청렬한 생애와 넓고 깊은 사유·지식의 세계를 가늠하는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리영희에 대한 김삼웅의 존경심이 뚝뚝 묻어난다. 하지만 필체는 이성을 가뜩 갖춘 ‘리영희체’다.(박록삼기자)  

경향신문(10. 12. 11) [책동네 산책]리영희처럼 읽고 생각하기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셨다. ‘1970년대 젊은이들의 사상적 은사’ 또는 ‘의식화의 원흉’이 그에게 상투적으로 따라붙었던 수식어다. 정반대의 뉘앙스이지만 이런 수식어는 대체로 그가 쓰고 말한 것들에서 유래한다. 기자로서, 학자로서, 저술가로서 선생은 참 많은 글을 썼다. 그래서 우리는 선생이 남긴 글들만 생각하기 쉽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글을 쓰기 위해 그가 누구보다 많은 것을 읽고, 궁리했다는 사실은 잊기 쉽다는 것이다. 



선생은 환갑을 몇 년 앞둔 88년 <역정>(창비)이라는 자전적 에세이집을 출간했는데 오래전 읽는 이 책에서 내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모두 ‘읽기’에 대한 선생의 집념에 관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나던 시절 선생은 안동공립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중이었다. 선생은 집에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있다가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언제인가 징역을 살 때는 학창시절에 하다 만 프랑스어 공부도 할 겸 가족에게 <레 미제라블> 원서를 넣어달라고 해서 읽었다는 대목도 나온다.

내가 기자가 된 것은 그가 현직기자에서 물러난 지 30년 가까이 흐른 뒤이지만 ‘기자 리영희’가 남긴 전설은 여전히 언론계에 남아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통일원 자료실’ 얘기일 것이다. 지금도 완전히 자유로운 편은 아니지만 과거엔 기자 또는 학자라고 해도 북한 또는 공산권에서 나온 자료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느 북한 관련 연구자가 통일원 자료실을 자주 이용했는데 자기가 열람하는 자료마다 ‘리영희’란 사람이 앞서 열람했다는 기록이 있기에 유심히 봤더니 거의 모든 자료의 열람카드에 리영희라는 이름이 써 있었다고 한다. <리영희 평전>(책보세)을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자신이 그간 쓴 현대사 인물에 관한 10여권의 평전을 선생이 모두 꼼꼼히 읽고 잘못된 부분까지 지적한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에피소드들은 글을 쓰거나 말하기에 앞서 ‘팩트(fact)’부터 챙기는 선생의 습성을 보여준다. 선생의 평론집 <스핑크스의 코>(까치)에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바쁘다’란 제목의 칼럼이 실려 있다. 96년에 쓴 글인데 젊은 여성들이 소비주의에 휘둘리는 세태를 꼬집는 내용이다. 선생은 그 해 겨울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가죽부츠가 크게 유행한다는 얘기를 매스컴에서 들었다는 말로 글을 시작했다. 결혼식 참석차 명동에 나간 김에 가죽부츠의 인기가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기 위해 길 한쪽에 서서 지나가는 여성 20명의 구두를 살폈다고 했다. 그 결과 8명이 가죽장화를 신었더라면서 40%라는 수치를 도출한다. 이처럼 세태를 풍자하기 위한 글에서조차 선생은 근거를 제시하고 싶어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선생의 글들은 차분한 분석적 논조를 유지할 수 있었고, 웅변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시사평론집은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오래됐다는 인상을 받기 쉬운데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 <스핑크스의 코>처럼 십수년 전 나온 선생의 평론집은 지금 읽어도 시의성이 느껴지는 글들이 많다. 우리가 선생에게서 ‘리영희처럼 쓰기’뿐 아니라 ‘리영희처럼 읽기’와 ‘리영희처럼 생각하기’도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김재중 기자) 

10.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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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당의 새해 예산안 날치기 처리로 정국이 경색돼 있는데,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연평도 포격 때문에 묻힌 감이 있는) '민간인 사찰'이 뇌관이 아닌가 싶다. 두 가지 사안을 연결시켜서 짚고 있는 칼럼이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대표적인 보수논객인 이상돈 교수의 시론이다. '비판적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필자는 4대강 사업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반대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열혈 보수주의자가 보기에도 '정권의 말로'는 이미 시작됐다... 

 

 경향신문(10. 12. 10) [시론]정권의 말로 예고하는 ‘민간인 사찰’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과 관련이 있는 국무총리실 내의 한 조직이 정권에 걸림돌이 될 만한 사람들을 은밀하게 사찰했다는 의혹이 점차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 의해 임명된 공기업 임원 등 구 여권 인사뿐 아니라 한나라당의 비주류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원 여러 명도 사찰 대상이었음이 거의 확인되어 있고, 박근혜 전 대표도 사찰을 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직계이지만 이상득 의원과 대립각을 세웠던 정두언 의원이 사찰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나선 대목은 특히 곱씹어볼 만하다.

사찰 대상의 동향을 파악하는 수준이 아니라 휴대폰을 상시적으로 도청했다는 의혹마저 제기되어 있어 사찰의 배후가 간단치 않으며, 사찰의 규모 또한 알려진 것보다 더 광범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 사찰의 초점이 구 정권 인물에서 한나라당 의원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이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한나라당 의원들도 사찰 대상이었다는 부분은 현 집권세력이 여당 의원들의 이탈을 무엇보다 경계하고 있을 것이라는 그간의 가정(假定)을 확인시켜 준다. 국회가 미디어법과 세종시 문제를 처리할 때 여당 내 반대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집권세력이 임기말의 ‘권력 누수’를 막기 위해 사찰이란 불법수단을 동원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4대강 사업 등과 관련해서 정권에 비판적이던 몇몇 한나라당 의원과 박근혜 전 대표가 사찰 대상이었다는 의혹은 그런 점에서 납득이 간다.

대통령의 큰형과 관련 조직 윤곽
엊그제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당 단독으로 예산안과 문제 법안들을 통과시킨 데서 보듯이, 집권세력은 대화와 타협이란 정치를 포기한 지 오래다. 간혹 쓴소리를 했던 한나라당 의원들도 꼼짝 못하고 이런 폭거에 동참한 것을 보니 사찰이 갖고 있는 ‘위협적 효과(chilling effect)’를 알 수 있다. 박연차와 연루되었다고 보도된 의원들이 기소되어 곤욕을 치른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의원들은 ‘보이지 않는 손’의 뜻을 알아서 새길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도 사찰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검찰이 수사를 덮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는 점에서 ‘민간인 사찰’은 닉슨 대통령을 사임으로 몰고 간 워터게이트보다 훨씬 심각하다. 워터게이트는 일과성 사건이었지만 ‘민간인 사찰’은 정권 초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권 내 비선조직이 정권 반대세력과 여당 의원을 불법으로 사찰했다면 그 나라는 ‘독재국가’다. ‘독재정권’이 ‘국격’을 논하고 ‘G20’ 운운하고 있는 만화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상황이 이렇지만 의석수가 부족한 야당은 탄핵은커녕 국정조사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런 수모를 당한 여당 의원들이 먼저 들고 일어나서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검찰에 수사를 요청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들은 돌부처처럼 얼어붙어 있으니, 측은한 생각이 들 뿐이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이러고도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를 하겠다는 집권세력과, 자신들은 비주류라서 현 정권의 실정(失政)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한나라당 내의 일부 세력이다. 이런 난정(亂政)을 하고도 훗날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집권세력도 한심하고, 침묵으로 동조함으로써 침몰하고 있는 배에서 탈출할 수 있는 구명정을 차버린 비주류도 한심하다. 하도 한심해서 이들이 혹시 영구집권을 할 묘책이라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여당의원까지 포함, 독재의 상황
이제 공은 ‘국민’에게 넘어왔다. ‘민간인 사찰’은 물론 ‘4대강’, 종편 배정 등 이 정권이 벌이고 있는 일은 목적과 내용은 물론 방법과 절차에서도 올바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국회는 마비되어 있고, 검찰이나 감사원 등에도 믿을 구석이 없으니 불법을 바로잡을 장치가 완전히 망가져 있는 형국이다. 내년에는 선거가 없어서 민의를 밝힐 기회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민주주의를 이룩하고 또 그 열매를 향유했던 우리 국민이 이러한 독재상황을 감수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1987년 6월혁명 때도 그러했고, 1960년 4월혁명 때도 그러했다. 그만큼 민심은 무서운 것이니, 집권세력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이상돈 |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0.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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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0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0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통 12월 중순이 넘어가면 출판계는 대작이나 문제작을 내놓지 않는다. 연말연시에 책 선물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독서할 시간은 많지 않고 그만큼 책을 찾는 발길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12월에 나오는 책들은 대개 '밀어내기용'이 많다. 해를 넘기지 않기 위해 애를 쓴 결과다. 하지만 간혹 '통념'을 건너뛰는 책들도 나온다. 

  

이번주부터 나오기 시작한 <루쉰 전집>(그린비)이 그렇다. 1, 2, 7권이 선보였는데(더 나왔나?) 장서가들의 '책탐'을 부추길 만하다. 15권짜리 장정에 들어간 김영수의 완역본 <사기>도 <로마제국쇠망사> 완역본을 능가하는 대사업이 될 듯하다. <사기 본기1>(알마, 2010)이 이번주에 나왔다.   

전집이 아닌 단행본에 시선을 맞추자면 <문학카페에서 철학읽기>(웅진지식하우스, 2006)의 저자, 아니 내게는 <데칼로그>(바다출판사, 2002)의 저자 김용규의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휴머니스트, 2010)이 출간됐다. 아니 이것도 '순수' 단행본은 아니군.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시리즈라 한다. 당초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 저자의 '야심작'이라 할 만한데, 860쪽이 넘는 분량은 조철수의 <예수 평전>(김영사, 2010)을 떠올려준다. '대작'에 값하는 책들이다.   

개인적으론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 '신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이 흥미롭다.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거기에서 하나의 선택과 방향, 물음 등이 읽히기 때문이다. 방대한 여정도 시작은 첫걸음부터다. '신이란 무엇인가'란 형이상학 고유의 물음형식이 이 책의 첫걸음인 것이다. 그래서 떠올린 책은 잭 마일스의 <신의 전기>(지호, 1997)다. 퓰리처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몇년전에 구해놓았는데, 현재는 절판중인 책이다(소장도서라곤 하지만 항상 어디에 두었는지가 문제다). 얼마전에 나온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웅진지식하우스, 2010)까지 포함하면 얼추 신에 대한, 신을 위한 '종합선물세트'가 될 만하다. 그런데, 왜 하필 신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가? 저자가 길잡이로 삼은 것은 <팡세>의 한 구절이다.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로 '신'에 이어지는 것은 '이성'이라 한다. 언제쯤 출간되는지 모르겠지만 볼프강 벨슈의 <이성1>(이학사, 2010)과 같이 읽어봄직하다. 이 또한 제1부만 번역돼 나온 상태인데, 원서의 부제는 '우리시대의 이성비판과 횡단이성'이다. 절반만 번역되었기에 번역본 부제는 '우리시대의 이성비판'이 됐다. 저자의 색깔이 더 강하게 드러날 '횡단이성'이 마저, 얼른 출간되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시대'가 언제부터인지 궁금하신가? <계몽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2001)부터다. 거기서 알 수 있지만 제목의 '이성비판'에서 '이성'은 '비판'의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다. 저자는 데리다와 들뢰즈, 리처드 로티와 넬슨 굿맨 등 프랑스와 미국철학의 '이성비판' 사례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볼프강 벨슈의 전작으론 <미학의 경계를 넘어>(향연, 2005)가 소개돼 있다. 몇년 전 세미나에서 읽었는데, '미학의 해체'란 주제가 흥미롭지만 번역은 좀 아쉬웠다.    

그리고, 아감벤 독자들에겐 반가운 소식인데, <호모 사케르>를 기준으로 하자면 초기 저작인 <유아기와 역사>(새물결, 2010)가 번역돼 나왔다. 부제는 '경험의 파괴와 역사의 근원'.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이탈리아어판 벤야민 전집 편집자로 명성을 얻었는데, 그의 벤야민관을 엿보게 해주는 책이다. '벤야민 르네상스를 불러온 문제작'이란 뒷표지의 문구가 그래서 나온다. 덧붙이자면, "프랑크푸르트학파-아도르노의 연장선상에 있던 벤야민을 20세기 지성사의 전혀 새로운 성좌 속에 배치시키고 있는 역작"이다. 개인적으론 <장치란 무엇인가?>(난장, 2010), <세속화 예찬>(난장, 2010)과 함께 연말에 읽을 '아감벤 3종세트'다.   

그런가 하면 '이글턴 3종세트'도 있다(연말이라 독서도 '묶어서' 한다). 오랫동안 대기중이던 <이론 이후>(길, 2010)가 출간됐기 때문이다. 소개는 이렇다. "이론의 중요성을 각인시키고자 하는 테리 이글턴의 문제작. 인간은 결국 '이론'을 통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로소 자신을 성찰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논리를 치밀한 문화이론을 바탕으로 제시함과 동시에 그 굴곡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생각난 김에 연말에 읽을 '이론서'가 필요하신 분은 지젝 등이 편집한 <공산주의 이념>(Verso, 2010)이 어떨까 싶다(어제 배송받은 책이다). 알랭 바디우의 <공산주의 가설>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공산주의 가설>은 특이하게도 알라딘에서는 판매하지 않는다. 나는 교보에서 구입했다). 같이 읽을 만한 책은 바디우의 <철학을 위한 선언>(길, 2010)과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 <공산주의 가설>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소개를 받고 구입한 책이다.  



문학분야를 건너뛰면 관심도서 가운데 남는 건 로저 펜로즈의 <실체에 이르는 길>(승산, 2010)이다.  

 

"세계적인 석학 로저 펜로즈의 8년 만의 역작. 스티븐 호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목이 창조해 낸 ‘현대물리학의 집대성’"이라고 소개되는 책. 난이도가 있는 책이어서 '독서'가 될지 '구경'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우주의 법칙으로 인도하는 완벽한 안내서'라는 홍보문구는 유혹적이다. 하지만 어제 두 군데 서점에 들렀을 때는 구할 수 없었다... 

10. 12. 10.  

P.S. 원래는 '이주의 관심도서' 리스트를 만들어놓으려고 했으나 얘기가 길어져서 페이퍼로 돌리고, 제목을 따로 붙여놓는다. 파스칼의 단장을 약간 비틀어놓으면서...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책을 읽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책을 읽지 않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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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2-10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reality라는 말은 철학에서는 주로 '실재'로 번역하지 않나요? '실체'라는 말은 substance의 번역어로 사용하고요...

로쟈 2010-12-10 09:17   좋아요 0 | URL
정신분석에선 '현실'이니 다 제각각입니다. 물리학에선 '실체'라고 옮기나 봅니다...

비로그인 2010-12-10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책을 읽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책을 읽지 않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이 문장이 파스칼의 문장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오네요. 신은 멀고 책은 가까워서 그런가요? ㅎㅎ 연말에도 여전히 바쁘시겠죠? 날이 본격적으로 추워질 모양인데 감기 조심하시구요^^

로쟈 2010-12-11 10:2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신은 멀고 책은 가깝지요.^^ 연말에도 바쁘긴 한데, 그래도 최악은 넘긴 듯합니다.^^;

2011-01-06 1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11-01-06 18:49   좋아요 0 | URL
가끔씩 들르셔서 그런 모양입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귀족온달 2011-02-05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신을 위한 변론>과 <신을 올호하다>를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 대한 반론으로 쓴 책들이었는데요, 로쟈님의 서평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학에 무지한 저로서는 이글턴이 말하는, 히치킨스는 신학을 모르면서 종교를 무신론적 관점에서 공격한다는 지적이, 좀 마뜩잖았습니다. 게다가 이글턴은 히치킨스의 계급적인 문제를 거론하면서 왜 사회적인 문제에는 입을 닫으면서 종교를 공격하느냐고 일침을 놓는데, 이 수준이 되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사회주의적 신앙인 vs 자유주의적 무신론자....예전에 <종교전쟁>이라는 책에서도 신학자분의 대담을 통해서도 시원하지 않았는데요, 과학을 기반으로 한 무신론에 대한 신학의 답변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혹은 그것에 대해서 탐독할만 한 다른 책들은 머가 있을까요? 두서 없는 댓글 죄송하고요 ㅠㅠ 앞으로도 좋은 서평 부탁드립니다^^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촘스키와 푸코의 인간 본성 논쟁

기획회의(285호)에 실은 리뷰를 오타를 교정하여 옮겨놓는다.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시대의창, 2010)을 서평감으로 골랐는데, 두 사람의 견해를 대조하는 방향으로 쓰다 보니 막상 자세히 못 다룬 대목도 많다. 정의와 권력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차 등은 따로 정리해보고픈 생각이 든다.  

 

기획회의(10. 12. 05) 동일한 산을 정반대로 오르는 두 사람

노엄 촘스키와 미셸 푸코의 대담? 개요는 이렇다. 대담은 1971년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졌는데, “노엄 촘스키는 영어로, 푸코는 프랑스어로 말했고 이들의 대담은 네덜란드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다. 그것은 네덜란드의 사상가 폰스 엘더르스가 사회를 맡고, 서로 다르거나 대립되는 사상을 지닌 20세기 철학자 두 명이 초대되어 토론을 벌이며 때로는 격돌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었다.” 말하자면 ‘촘스키 VS 푸코’를 내건 프로그램에서 두 사람이 격돌한 것이다.

1971년이면 두 사람 모두 40대 초중반의 나이로, 문제적인 저작을 내놓긴 했지만 절정의 명성을 누리기 이전 시점이다. 하지만 세월은 세월인지라 책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지금 푸코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촘스키는 80을 넘긴 노구의 몸이 됐다. 그들이 39년 전에 나눈 대담 또한 역사의 먼지를 덮어쓰고 있지 않을까. 마치 ‘회고대담’을 읽는 듯한 기분으로 책을 펼쳤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오히려 대담은 ‘생방송’의 실감과 열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인간의 본성 문제에 대하여 그들은 어떤 대담을 나누었나. 촘스키와 푸코의 대담을 1장에서 ‘메인’으로 다루고 있지만 책에는 이후에 두 사람의 인터뷰와 강연 등이 추가로 실려 있다. 그중 1976년에 언어철학을 주제로 한 프랑스의 언어학자와의 인터뷰에서 촘스키는 푸코와의 1971년 대담을 나름대로 정리해주고 있어서 유익하다. 일단 “우리는 ‘인간의 본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합의를 보았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별로 합의를 보지 못했어요.”라는 게 그의 총평이다. 대담 사회자의 표현대로라면 두 사람은 동일한 산을 정반대 방향으로 오르고 있었는데,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창조성 개념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달랐다. 촘스키가 말하는 창조성은 인간과 앵무새를 구별해주는 범주로서의 ‘평범한 창조성’이었지만, 푸코는 뉴턴의 업적 같은 것을 생각했다. 누구나 다 그런 업적을 낼 수 있는 건 아니므로 푸코가 보기에 창조성은 인간의 내재적 특성보다는 사회적․지적 조합과 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푸코는 사회적․역사적 조건들과 무관한 생물학적 개념으로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반면에 촘스키는 최소한 언어학에서만큼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미심장한 개념을 구성하기 시작했다고 믿었다.

촘스키는 언어능력이 인간 본성의 일부라는 점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인간은 어떤 도식체계를 갖고 있어서 제한된 정보로부터 고도로 복잡하고 조직된 지식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자 확고한 믿음이다. 가령 어린아이가 복잡한 언어체계를 습득하게 해주는 인지구조적 특성은 인간성의 구성요소이며 이것은 ‘생물학적 소여’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지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촘스키의 이러한 인간 본성론은 그의 정치철학 내지는 정치적 비평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는 실천적 차원에서 두 가지 지적인 과제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인간의 본질 혹은 본성에 맞는 인본주의적 사회이론을 창조하는 것이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사회 내 권력과 억압과 테러와 파괴의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촘스키는 인간 본성의 개념과 사회구조의 문제를 연결하는 과제를 도외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과연 긍정적이기만 한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데 촘스키의 해법은 간단하다. 인간에게는 좋은 본능과 나쁜 본능이 있다는 것. 정치적 입장으로서 아나키즘을 지지하는 그의 판단에 따르면, 권력의 탈중심화와 자유 결사는 인간의 정의로운 본능을 더 잘 구현하며, 반대로 집중된 권력은 인간의 나쁜 본능, 곧 탐욕과 공격성, 권력 축적, 타인 파괴 등을 더 부추긴다. 촘스키가 보기에 모든 어린아이는 블록을 가지고 뭔가 만들려 하거나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즉 창조와 놀이의 충동은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이자 인간적 본성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그런 충동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억압됐기 때문이다. 촘스키는 인간이 근본욕구에 따라 자기의 개성을 표현하고 창의적이고 탐구적이며 진취적인 일을 해낼 수 있는 사회가 바람직하며 마땅히 그렇게 돼야 한다고 믿는다. 그의 정치비평은 그러한 인식의 사회적 실천이다.

반면에 푸코는 인간 본성이란 개념 자체에 회의적이다. 푸코의 입장은 “우리가 현재 상상할 수 있는 것은 현대 세계의 부르주아 사회가 만들어낸 것뿐”이며 “정의와 ‘인간 본질의 실현’ 같은 개념은 우리 문명이 만들어낸 것이고, 우리의 계급 제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쪽이다. 촘스키는 모든 사회적 투쟁은 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지만, 푸코가 보기엔 ‘정의’라는 개념조차도 오염된 것이다. 권력을 잡은 계급 혹은 권력을 잡으려는 계급이 내놓은 구실에 불과하다는 것이 푸코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그럴 경우, 개혁이나 혁명에 대해서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국가가 전반적 권력관계를 집대성한 것이라면 혁명은 동일한 권력의 네트워크를 다른 유형으로 집대성한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이러한 회의주의의 젓줄을 그는 니체에게서 끌어오는데, 니체주의에 따르면 ‘진리’조차도 권력과 복합적으로 연루돼 있다. ‘진리와 권력’을 주제로 한 1976년의 인터뷰에서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는 이 세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합적인 형태의 제약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의 주기적인 효과를 유도합니다. 각 사회에는 진리의 체제가 있고, 진리의 ‘일반 정치학’이 있습니다.” 푸코는 진리 자체가 이미 권력이므로 권력의 체계로부터 진리를 해방시킨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촘스키와 푸코의 독자라면 이러한 서로의 관점과 의견 차이는 어느 정도 짐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담은 읽어볼 만한 흥밋거리를 더 제공하는데, 가령 전쟁 관련 연구를 수행하는 MIT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것이 자기모순 아닌가란 방청객의 질문에 대한 촘스키의 답변 같은 것이 그렇다. 그는 MIT에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하고 있으며 이런 문제에 대한 판단은 간단하지 않다고 답한다. 모든 억압적 기관과 절연해야 한다면 마르크스는 가장 사악한 제국주의의 상징인 대영박물관에서 공부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촘스키의 생각은 물론 다르다. “저는 카를 마르크스가 그곳에서 공부하기를 잘했다고 봅니다. 자원을 활용한 건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 문명의 자유주의 가치관을 활용하여 그 문명을 극복하려고 한 것이었지요. 제게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고 봅니다.” 

10.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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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7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8 0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

이미 예고돼 있었지만 톨스토이의 마지막 1년을 다룬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이 내주 개봉된다 한다. 지난달에 서거 100주년을 맞은 이 거장의 삶을 한번쯤 음미해보는 시간이 될 수 있을 듯하다. 덤으로 아내 소피야 역을 맡은 헬렌 미렌의 연기도 기대를 모은다.   

한겨레(10. 12. 07) 성자로 박제된 ‘소년’의 마지막 1년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명저를 남긴 19세기 러시아의 문호. 젊어서 자기 집 농노를 해방시켰으며 말년에 종교에 심취해 금욕과 청빈 공동체를 꾸렸던 인물. 20세기 초 한국의 문학청년들을 매료시키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사진)은 재산의 사회환원에 반대하는 아내 소피야의 극성을 피해 남부 러시아로 이동하다가 11월20일 아스타포보 역에서 객사하기까지 톨스토이의 마지막 1년을 따라간다. 톨스토이는 살아 있는 성자가 아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이었으며 소피야 역시 세간에 알려진 대로의 악처가 아니었다는 게 영화의 핵심이다. 



영화의 저본은 전기작가 제이 파리니의 소설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 소설은 지은이가 나폴리의 한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일기장에서 영감을 얻었다. 일기장의 주인은 톨스토이의 마지막 비서 발렌틴 불가코프. 그는 톨스토이와 마지막 1년을 함께하면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톨스토이와 그 주변인물의 모습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영화가 신화를 깨는 것은 그런 연유다.

노년의 톨스토이는 후광으로 존재할 뿐. 낮에는 성자로 추앙을 받지만 저녁에는 43년을 해로한 아내 소피야와 침대에서 수탉울음 소리를 내며 장난하는 늙은 소년이다. 막내딸 사샤, 수제자 블라디미르, 주치의 마코비츠키 등 톨스토이의 낮을 관장하는 톨스토이주의자들은 알려진바 ‘성자’로 그를 박제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재산과 저작권 일체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내용의 유서에 서명을 받아내려 한다. 이를 안 소피야는 노발대발한다. 영화는 이 무렵 개인비서로 기용된 톨스토이 숭배자 발렌틴의 시각을 따라가면서 진실에 접근한다. 수제자 블라디미르는 발렌틴에게 소피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기록하라고 하지만, 발렌틴은 소피야가 말처럼 위험인물이 아니라 톨스토이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곳 공동체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마샤를 만나 뜨겁게 사랑하고 그들을 떼어놓는 톨스토이주의자들의 차가움을 동시에 경험했기 때문.

“죽어가고 있나요? 이미 죽었나요?” 마지막 정거장에 개떼처럼 몰려든 기자들이 끈질기게 묻는 질문이다. ‘살아 있는 성자 영면하다’라는 기사를 써놓고 그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 뚜껑이 닫히기 전까지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고 하지만, 뚜껑이 덮이고 나서 진실은커녕 왜곡이 시작된다. 영화는 그렇게 말한다. 소피야를 남편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악처에서 남편을 마지막까지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여인으로 탈바꿈시킨 헬렌 미렌의 연기가 압권. 그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됐으며, 로마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5일 개봉.(임종업 선임기자) 

10. 12. 06. 

P.S. 제이 파리니의 소설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은 어디에 두었는지 못 찾고 있지만,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앤드류 노먼 윌슨의 전기 <톨스토이>(책세상, 2010)가 서거 100주년의 의미를 좀 채워준다. 올해는 체호프(1860-1904)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한데, 한권으로 묶은 <체호프 희곡 전집>(시공사, 2010)이 김규종 교수의 번역으로 최근 출간됐다. '빈손'으로 한해를 보낼 뻔했는데, 역시 다행스럽다. 아래 사진은 생전에 두 사람이 함께 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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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러웨이부인 2010-12-0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눈물나는 장면 있습니다...

로쟈 2010-12-07 06:40   좋아요 0 | URL
벌써 보셨군요.^^

2010-12-07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7 0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0-12-07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톨스토이 서거 100주년이라고 하는데 러시아에선 너무 홀대하는 것 같군요.그의 청빈 사상이 현재 자본주의에 심하게 물든 러시아의 현실과 맞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오히려 유럽이나 미국에서 더 기리는것 같군요^^;;;;

로쟈 2010-12-07 06:40   좋아요 0 | URL
네, 그랬다는 기사가 뜨네요...

푸른바다 2010-12-07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톨스토이보담 체호프에 더 눈길이 가는군요.^^ 톨스토이가 위대한 작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도덕교사같은 어투가 그리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전 체호프 희곡들을 동완 번역 신원문화사 판본으로 그 많은 오탈자를 수정해가며 읽었고 그 후론 가장 좋아하는 러시아 작가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번역본은 전집이라는 점도 그렇고 가격도 그렇고 구매욕을 불러일으키네요.^^

로쟈 2010-12-08 08:17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어제 구입했습니다.^^

루쉰P 2010-12-07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보고 싶은 영화네요^^ 꼭 봐야 겠어요. 감사합니다.

로쟈 2010-12-08 08:1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보려고 합니다.^^

비로그인 2010-12-07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톨스토이 서거100주년을 기념하여 제 나름대로 기념행사(?!)를 하고 있어요. 러시아어 알파벳 암기를 하고 있습니다. B,H,P,C 가 헛갈리네요! 그 밖에 희한한 글자들도... // 영화도 꼭 보고 싶네요.

로쟈 2010-12-08 08:17   좋아요 0 | URL
흠, 전공자보다 열심이신데요.^^

2010-12-30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31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