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를 인양하다 창비시선 391
백무산 지음 / 창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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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그 일로 후회하고 수시로

후회한 일 한 가지는

부산 제3부두 파나마 선적 살물선

떠나는 그 배에 손을 흔들었던 일

 

약속을 하고도 떠나지 않았던 일

그때 떠났더라면 뱃놈으로 늙어갔을지도

남태평양 적도 부근에서 섬 여자 얻어 어부가 되었을지도

그때 떠났더라면

그단스끄 함부르크 조선소 불법체류 노동자가 되었을지도

잠자는 나를 반쯤 겁탈했던

삼등항해사 게이 녀석과 사랑에 빠졌을지도

항구를 그리며 떠도는 삼류 화가가 되었을지도

 

그때 떠났더라면

시베리아 순록 몰이꾼이 되었을지도

볼리비아의 무장 게릴라가 되었을지도

안데스의 목동 가우초가 되었을지도

그때 떠났더라면

이곳에 없는 나 때문에

이렇게 변두리에서 가슴 치는 일로 나이 먹진 않았을지도

 

내게 많던 나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내가 아니므로

나는 내가 꾸는 꿈보다 더 가짜일지도 모르지

실현되지 못하고 떠나버린 내가 더 나다울지도 모르지

그런 내가 떠난 곳도 저 먼 변두리

 

세계의 모든 변두리에서 나는 나를 만져볼 수 있네

세계의 변두리를 떠돌고 있는 수많은 나를

 

-84-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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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말 - 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윌리스 반스톤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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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말>(마음산책, 2015)은 보르헤스 여든의 인터뷰집이다(그는 여든 여섯에 세상을 떠났다). <수전 손택의 말>(마음산책, 2015)에 이어서 나온 걸 보면 작가 인터뷰가 시리즈로 나오는 듯싶어 기대가 된다. 인터뷰집을 이곳저곳 읽다가 '딱 보르헤스!'다 싶은 곳이 있어서 밑줄긋기를 해놓는다. 원서는 보르헤스의 다른 인터뷰집, 강연집과 함께 바로 주문을 했다. 퇴원 이후 첫 책주문이다...

 

나는 인생이, 세계가 악몽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서 탈출할 수 없고 그저 꿈만 꾸는 거죠.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없어요. 구원은 우리에게서 차단되어 있지요. 그럼에도 나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나의 구원은 글을 쓰는 데 있다고, 꽤나 가망 없는 방식이지만 글쓰기에 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계속해서 꿈을 꾸고, 글을 쓰고, 그 글들을 아버지가 나에게 해주셨던 충고와 달리 무모하게 출판하는 일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그게 내 운명인걸요.

내 운명은 모든 것이, 모든 경험이, 아름다움을 빚어낼 목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실패했고, 실패할 것을 알지만, 그것이 내 삶을 정당화할 유일한 행위니까요. 끊임없이 경험하고 행복하고 슬퍼하고 당황하고 어리둥절하는 수밖에요. 나는 늘 이러저런 일들에 어리둥절해하고, 그러고 나서는 그 경험으로부터 시를 지으려고 노력한답니다.

많은 경험 가운데 가장 행복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에요. 아, 책읽기보다 훨씬 더 좋은 게 있어요.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인데, 이미 읽었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답니다. 나는 새 책을 적게 읽고,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건 많이 하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군요. -15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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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 - 국제노동기구(ILO) 이코노미스트 이상헌이 전하는 사람, 노동, 경제학의 풍경
이상헌 지음 / 생각의힘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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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도 최저임금이 고시됐다. 시간당 6천30원이다. "시간급을 일급(8시간) 기준으로 환산하면 4만 8천240원이며, 월급으로는 주 40시간제의 경우(유급 주휴 포함, 209시간 기준) 126만 270원이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임금이 오르는 저임금 근로자는 전체 임금 근로자의 18.2%인 342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올해 최저임금 대비 인상률은 8.1%다."(연합뉴스) 국제노동기구 사무차장 정책특보 이상헌의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생각의힘, 2015)의 한 꼭지가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최저임금제만 갖고 다툴 게 아니라 최고소득제도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 아니, 이건 상상이 아니라 실제 역사다. 다만 어느 사이엔가 잊혀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딜의 기치 아래 전레 없는 토목공사만으로 대공황을 극복한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대대적인 정책 조치도 취했다. 1937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시간 규제, 아동노동 철폐, 노조 결성권 등을 도입했다. 최저임금을 도입한 이도 루즈벨트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 처음 최저임금이 도입된 지 50여 년이 된 때였으니, 미국은 `지각생` 신세였다. 하지만 덕분에 미국 노동시장은 오랜 방임주의 `방황`을 끝내고 멸실상부한 노동법의 기본 골격이 갖추어져서 제법 모범생다운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155-156쪽

하지만 루즈벨트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최저임금으로 소득 최저선을 구성하는 것은 당연지사고, 아랫선이 그려졌으니 윗선도 그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역사적으로 최악에 달한 소득 불평등을 염려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이 항탕 고조돼 가던 1942년, 루브젤트는 `소득상한제`를 도입하려 한다. 당시 소득 2만 5,000달러(현재 가치로는 약 100만 달러)를 소득 상한선으로 설정하고 그 이상의 소득분은 100% 과세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불평등 해소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당시 더 정치적으로 설득력이 있었던 `전쟁에 대한 기여`와 `국가에 대한 봉사`를 주요 이유로 삼았다. 모든 자원을 동원해 전쟁을 하고 있는 국가 총력전에서 고액 소득자가 마땅히 더 기여해야 한다고 했다. -156쪽

국민의 반응은 긍정적이었으나 의회에서는 난리가 났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살벌한 논쟁이 의회에서 벌어졌고 사실상 루즈벨트의 원안은 거부됐다. 다행히 국민적 지지가 높고 소득 불평등 해소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도 정치권에 제법 형성돼 있었기 때문에 의회는 공방 끝에 88% 최고세율이라는 타협안을 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천신만고 끝에 이 법은 통과된다. 루즈벨트가 생각했던 엄격한 의미의 최고소득제(소득상한제)는 아니지만 20만 달러는 `실질적` 소득 상한이 되었다. 이때부터 미국의 소득분배도 개선되기 시작한다. -156-157쪽

하지만 다시 한번 과거는 반복된다. 소득분배 개선이 눈에 띌 정도로 뚜렷해지고 경제도 제법 성장하게 되니 정책적 긴장이 자연스레 떨어졌다. 상황이 좋아졌으니, 부자를 야박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본격적인 로비도 생겨났다. 그 결과 90%에 육박했던 최고세율은 1960년대 후반 들어 70% 수준으로 떨어졌다. 세금 삭감을 공언한 레이거노빅스의 1980년대부터 최고세율은 30-40% 수준으로 반토막이 난다. 그리하여 세계 대공황 직전인 1920년대 수준의 세율로 돌아갔다. 소득분배는 급속도로 악화돼, 급기야 최상위 소득 1% 집단이 차지하는 소득비율도 1920년대 말 대공황 직전으로 치솟았다. 역사는 다시 반복돼 경기대침체 라는 세계경제 위기가 뒤따랐다.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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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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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몸에 이상한 일이 생겨도 놀라지도 않는다. 점점 잛아지는 보폭, 몸을 일으킬 때의 현기증, 굳어버린 무릎, 터지는 정맥, 또다시 비대해진 전립선, 쉰 목소리, 백내장 수술, 이명, 광시증, 자꾸만 헐어 달걀노른자처럼 돼버린 입술 가장자리, 바지 입을 때의 어설픈 동작, 자꾸만 잊고 잠그질 않는 바지 앞 지퍼, 갑작스런 피곤, 점점 잦아지더니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낮잠. -457쪽

내 몸과 나는 서로 상관없는 동거인으로서, 인생이라는 임대차 계약의 마지막 기간을 살아가고 있다. 양쪽 다 집을 돌볼 생각을 하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사는 것도 참 편안하고 좋다. 그러나 최근의 혈액검사 결과를 보며, 이젠 마지막으로 펜을 들 때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평생 자기 몸에 관해 일기를 써온 사람이 마지막 가는 길을 거부할 수는 없다. -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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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직업 - 고통에 대한 숙고
알렉상드르 졸리앵 지음, 임희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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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이 망할 직업! 즐거우면서도 엄격한 이 직업은 위험을 무릎쓰고 매 순간을 투자할 것을 요구한다. 나는 인간이라는 직업을 알량한 글 몇 줄로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 혹여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 물정 모르는 순진한 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듬더듬 전투의 무기를 찾으려고 노력은 했다. -125쪽

일상에서 감당하는 상처로부터 나타나는 싸움과 기쁨은 끊임없이 외친다. 다시 시작하라고, 노력을 계속하라고, 다시 행진하라고, 허약함 위에 뭔가 쌓아올리라고. 거듭거듭, 사람들은 그 상처가 극복되길 바란다. 사람들은 서두르고 싶고 어서 페이지를 넘겨 다음 장으로 가고 싶다. 그러나 상처는 다시 나타나 실존을 꿰뚫는다. 내면의 암적인 병은 아마 어떤 선례들을 따르고 싶어하리라. 그릇된 확신에 꽉 매달리고, 스스로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끝없는 전투가 일으키는 공포를 피하려 하리라. -126쪽

알량한 인간이라는 직업. 나는 기쁘게 싸우면서, 내 취약함도 내 조건의 지독한 허술함도 결코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주시해야만 한다. 한 걸음 한걸음을 만들어내야 하고, 내 취약함으로 강해져서 투쟁의 원천이 될 힘을 모든 것을 동원해 찾아내야 한다. 분명 예감컨대 이 싸움은 내게 버거운 싸움이다. 그러나 내가 싸우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126쪽.

궁극의 과감함인 웃음은 일상의 틀을 깨고 시련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한다. 장애인 시설에서는 부재의 중압감이 무겁게 내리누르고, 질문 또한 내리누른다. 그곳의 나날은 수많은 난관을 만나게 한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샹포르의 기준에 따르면 `망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삶은 유머 덕분에 달콤해진다. 웃음과 전투가 우리 삶을 구원한다. 만약 이 둘이 함께한다면, 둘이 서로 꼭 같이 간다면 어떻겠는가? -128쪽

모든 상황이 말도 안 되는 고역을 요구할 때, 노력 앞에서 지탱하는 것은 오직 확신뿐이다. 인간이라는 직업의 소명, 그것은 모든 것에 대적하여, 유머와 함께 집요해진다. 그러니 전투에 나서라. 가벼움과 기쁨으로 모든것을 쌓아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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