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 24 | 25 | 2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칼 포퍼 지음, 이상헌 옮김 / 생각의나무 / 2000년 1월
절판


소비에트가 쇠퇴한 이유들을 알아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일단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야겠습니다.(...) 물론 러시아에서는 권력을 가진 공산주의자들로 말미암아 모든 교육단계에 있는 학생들이 공산주의 교리를 배우는 체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 시대가 되었을 때, 공산주의 지도층에서는 어느 누구도 상황을 현상태로 유지하는 수단만 생각할 뿐, 달리 마르크스주의의 교의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것만 진지하게 취급되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는 틀림없이 붕괴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마르크스 이론의 나머지 부분은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이것만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73-74쪽

그 책(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은 20세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며, 특히 1962년 쿠바 위기로 대표되는 커다란 전환점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소련은 그 시점에서 냉전의 긴장감을 상실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때 소련은 미국을 멸망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건 마르크스 정권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상이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그 시점은 소련이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시초였으며 그후 전반적인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76쪽

소비에트는 러시아의 물리학자인 사하로프 박사가 회고록에서 말한 사하로프 폭탄을 가질 때까지는 역사가 그들에게 부과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희망을 갖지 못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사하로프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게 만든 계기가 된 책이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나는 한때 그에게 형법적 책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하로프의 문제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하로프는 베리아와 함께 합동으로 스탈린 통치하에서 오랫동안 연구를 했으며, 수소폭탄을 제조하는 것과 관련하여 베리아와 반복적으로 사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쨌든 수년간의 실험을 거쳐서 완성품 폭탄이 1961년에 실제로 만들어졌습니다.(...) 흐루시초프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미국이 모르게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할 생각이 떠오른 것은 불가리아를 방문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미국은 이미 때를 놓치게 될 것이었다."-77-79쪽

아인슈타인은 독일이 자체적으로 원자폭탄을 제조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폭탄의 사용을 지지하는 편지에 서명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을 방어하기 위해서 편지에 서명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하로프는,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시기에는, 흐루시초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직 자본주의의 '타파'를 원하는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공격적인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수동적인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그는 자본주의는 반드시 타도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폭탄을 실험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 살이었으며, 함대의 포민 소장을 만나러 갔을 때는 마흔 살이었습니다(*사하로프는 핵어뢰 프로젝트를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86쪽

사하로프는 그가 만든 초강력 폭탄을 실험할 때마다 방사능으로 인해서 수천 명이 암에 걸릴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고, 그래서 실험을 실시하지 않도록 흐루시초프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화를 내며 '정치적인 것'과 '과학적인 이슈'가 섞이게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내 의무를 다하겠습니다"라고 사하로프가 맹세한 것은 그때였습니다. 사하로프에 대해서 말할 것은 그 밖에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의 회고록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87쪽

나는 말년의 사하로프에 대해서는 여전히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꼭 수정되어야 합니다. 나는 그가 전범으로 생각되기 시작했다고 말해야 하며, 그가 말년에 한 일로 인해서 그의 죄가 완전히 용서를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이탈리아의 한 언론인과의 이 대담은 1991년에 이루어졌다.)-88-8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품절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는 아나키스트와 대립되는 국가사회주의자로 생각됩니다. 마르크스주의자 중에 그런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마르크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회주의이념은 명확히 프루동의 것입니다.(...) 프루동은 경제적 계급 대립을 해소하면, 그리고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면 국가는 소멸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 그 자체가 자립성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사고도 계승했습니다. 그가 일시적으로 국가권력을 잡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자본제경제와 계급사회를 지양한다는 블랑키의 전략을 승인했던 것은 국가주의적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결함은 국가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자립성을 보지 않은 아나키즘에 있는 것입니다. -24-25쪽

(1990년 이후) 국가사회주의가 쇠퇴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리버테리언 사회주의도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어소시에이션이즘)가 단순히 이념적이어서 현실적이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거기에 자본, 네이션,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소시에이션이즘은 자본, 네이션, 국가를 거절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만, 왜 그것이 존재하는가를 충분히 사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결국 그것들에 걸려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가령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와 같은 종류가 부활한다고 해도 자본, 네이션, 국가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입니다.-27쪽

내가 이 책에서 생각하고 싶은 것은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는 길, 바꿔 말하면 '세계공화국'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 네이션, 국가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 네이션, 국가는 각기 간단히 부정할 수 없는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지양하려고 한다면 먼저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인식해야 합니다. 단순히 그것들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자본이나 국가의 현실성을 승인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이념'을 조소하게 될 뿐입니다.-27-28쪽

내가 가장 공감하는 사람은 칸트와 프로이트다. <실천이성비판>이든 <쾌락원칙을 넘어서>든 모두 60살이 지나서 이루어진 훌륭한 작업들이다. 나도 내 생각이 정리된 것은 60살을 먹은 이후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극이 된다. 그들은 80살 정도까지 살았다. 나는 100살까지 하고 싶다. 내 작업은 이제부터다.('옮긴이 후기'에서 재인용)-235-23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셸 푸코,죽음의 빛
자네트 콜롱벨 지음 / 인간사랑 / 199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2년 겨울에 몇 자 적어둔 게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책을 완독하지 않았기에 리뷰랄 것도 없지만, 완독할 수 없는 이유는 대고 있으므로 정상은 참작될 수 있겠다...

책머리에 실린 들뢰즈의 말. "내가 사랑하는 한 저자에 관해서만 말한다는 내 이상은, 그를 슬프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며, 그가 더 이상 대상이 될 수 없도록, 사람들이 그와 동일시 되지 않도록 충분히 그를 생각하는 것이리라." 이 정도면 대단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프롤로그인 '여정과 추억'은 아주 사적인 성격을 지닌 부분이어서 프랑스 지성사에 '과도한' 관심을 가진 독자가 아니라면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푸코에 대한 번역 전기 중에서 가장 읽을 만한 것이라면 디디에 에리봉의 것을 꼽겠다. 그리고 읽은 것은 1장 "불확실성과 유한성". 정독해야 할 만큼 무게 있는 내용도 아니고 정확한 번역도 아니어서 대충 훑어본다. 번역이 부정확하다는 것은, 먼저 "(...) 경기장 안에 나 혼자 있음을 알았을 때 다시금 푸코가 현재해 있었다."(51) '현재[現在]하다'와 '있다'를 나란히 병치시켜 놓는 것은 좋은 번역이 아니다. "푸코가 곁에 있었다" 정도의 뜻이지 싶다.



그리고 <말과 사물>에 나오는 벨라스케즈의 그림 '시녀들(Les Menines)'를 '귀족의 딸들'(78)이라고 번역해 놓은 것. 역자가 <말과 사물> 읽지 않았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그러니 번역 전체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사랑'에서 나온 프랑스 철학 관련서들의 번역이 대체로 믿을 만하지 못하다. 역자 선정과 교정 등에서 좀더 많은 주의가 기울어져야 하리라고 본다.

다음으로, 나에게 유의미한 부분. "어떤 말들은 생각할 수 없다. 시간성에 대하여 잘 몰랐던 고전주의 시대의 '삶'이란 말처럼. 각 시대는 여러 상이한 영역에서의 교응을 필요로 한다."(77) 이건 푸코와의 관련 없이도 흥미를 끄는 내용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삶'이라, 생각할 수 없는! 그리고 푸코의 말 인용. "생각하는 내가, 나의 사고의 내가 내가 생각하지 않는 어떤 것이 되려면, 또 나의 사고가 내가 아닌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는 도대체 나는 무엇이어야만 하는가?"(90) 이건 <말과 사물>의 "코기토와 사고되지 않은 것(Le Cogito et l'impense)"에 나오는 부분이다.

또 푸코가 한 대담에서 한 말. "삶은 죽게 마련이기 때문에 예술작품이어야 하며..." 이건 니체의 미학주의와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앨런 맥길의 <극단의 예언자들>(새물결)에서 푸코에 대한 부분을 참조해야겠다. 끝으로 재미있는 건 앙겔로플로스('안젤로포울로스'로 번역 돼 있다)의 영화 <황새의 멈추어진 걸음(Le Pas suspendu de la cigogne)>에 관해서 언급되고 있다는 점.(113)

책은 반납했다. 너무도 프랑스적인 책이다. 푸코를 읽는 일도 버겁지만 그걸 '프랑스적'으로 읽을 만한 여유를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01-06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놔키스트 2007-01-06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이 엉망인 건 잘 알겠습니다만.. '프랑스적'이라는 의미는 썩 잘 모르겠군요..^^

로쟈 2007-01-06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너무 짤막하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서두의 '여정과 추억' 같은 대목이 제겐 좀 이질적이었습니다. 기억에 그 나라 사람들의 회고담 같은 식이라. '그러니까 제가 프랑스적이라고 한 건 저자가 푸코를 다루는 시각을 가리킵니다. 푸코의 생각 자체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벌거벗은 해 열림원 이삭줍기 5
보리스 필냐크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1921년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그것이 곧바로 사회주의 러시아의 안정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20-21년 사이에 볼가강 지역을 휩쓴 가뭄으로 오백만 명 이상의 농민이 죽었다. B. 필냑/필냐크(1894-1937)의 표현을 빌면 말 그대로 ‘벌거벗은 해’였고, “죽음이 삶이나 출생보다도 더 자연스러운” 시절이었다. 필냑의 <벌거벗은 해>(1921)는 흔히 소비에트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즉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산문문학은 일단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않은 벌거숭이 상태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벌거벗은 해>는 1917년 혁명이 가져온 사회적/문화적 혼돈(카오스)과 에네르기를 문학적으로 육화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혁명 직후 러시아의 사회현실적 삶과 정신적 삶의 현실이 문학텍스트 속으로 수축되어 들어간 것이 바로 <벌거벗은 해>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작가 필냑의 고유한 현실관(혹은 세계관)이다. 무엇이 진정 현실적인 것이냐라는 문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식의 헤겔의 말을 비틀자면, 필냑에게선 “반복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은 반복적인 것이다.” 예컨대, “아들아, 너는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포기하지 말아라. 결혼해서 아이들을 갖도록 해라, 아들아……” “이렇게 하여 집과 가게와 성경과 매질과 마누라와 마슈라 사이에서 4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매일매일이 그런 식이었고, 40년이 한결같이 그런 식이었다.”라거나 “인생의 모든 것은 바로 부메랑과도 같아... 내가 저지른 모든 일이 나에게 되돌아올 거야.” “백만 년 전에도 밤은 있었어. 지금도 밤이 있고 백만 년 후에도 밤이 있을 거야.” “나는 지금의 당신이었고 당신은 지금의 나일 것이다.” 등등의 구절들.

필냑에게서 ‘고대적인 것’이란 테마는 이때 반복적인 것, 반복할 수 있고 반복되어야 하는 것에 해당한다. 표트르 대제의 유럽화(18세기) 이전의 러시아, 반(半)아시아적이고, 야만적인 러시아가 바로 그것이다. 한 문학사가의 지적에 의하면, 필냑은 인간은 환경에 의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인간 본질의 불변의 요소>에 대해 항상 언급했다. “그는 단지 출생, 사랑, 죽음이라는 기본적인 과정에 관심을 두었고, 그의 탁월한 작품은 고독, 이성, 절망의 슬픔과 공포, 자연과의 일체감을 다루고 있다. 인간의 마음에는 사회의 대변혁을 초월하는 고정된 불변의 요소가 있어서 제국의 몰락, 군중의 폭동, 사회개혁이 인간의 근본적인 고통이나 혼란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필냑은 항상 암시하였다.”(마르크 슬로님)



20년대에 비교적 평탄했던 필냑과 당국의 관계(필냑에겐 자동차가 2대 있었다)가 30년대에 접어들면서 냉각되고 급기야는 숙청당하게 되는 사정의 밑바탕에는 그의 이런 세계관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벌거벗은 해>에서 ‘볼셰비키’와 ‘코뮤니스트’의 차이. “니체, 로자노프의 사상 및 슬라브주의적 영감을 민족주의적 볼셰비즘의 특이한 향취와 혼합한 필냑은 혁명을 부자연스런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대의 종말 및 17세기 모스크바 시대의 부활로 보고 환영하였다. (그에게서) 혁명적 폭발의 거친 원시주의는 단순하게는 일종의 스키타이인과 같은 삶의 방식의 재개를 선언하는 민족적 에너지의 방출이었다. 야만적인 러시아, 스텐카 라진과 푸가초프의 러시아, 필냑은 성적인 열정이나 순수한 애정적 환락의 장면에서 이러한 러시아인의 육체적인 힘을 찬양하고 무력하고 위선적인 유럽과 대비시켰다”(마르크 슬로님) 대략 이런 것들이 필냑이 가졌던 아이디어이다. 그리고 <벌거벗은 해> 등의 나타나는 특징적인 기교들과 기법들은 모두 이런 아이디어의 형식적 등가물이 될 것이다.

<벌거벗은 해>에 등장하는 고대성의 특징적인 발현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인물의 상징성, 알레고리성. 이야기 서술의 주체로서의 근대적 개인이란 것은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과 맞물린 근대소설의 발명이다. 근대소설은 이 문제적인 개인의 ‘내면’과 ‘심리’에 대한 묘사를 득의의 영역으로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서양 소설의 전통과 엄격하게 단절하고자 했던 필냑은 그의 인물들에게서 심리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인물들에 ‘고대성’을 부여한다. 즉 인물들은 자신의 내적 동기화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입장이나 신념, 관점, 주의, 주장들을 대표하는 자로서 선택된다. ‘누구누구의 눈으로’라는 식의 이야기 토막들이 들어가게 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따라서 <벌거벗은 해>에는 고유명사가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상황이나 모티브가 반복되는 것처럼 인물의 형상 또한 반복된다. 오르드이닌가의 보리스와 글렙이 성자 보리스와 글렙의 이름을 가지는 것처럼.

둘째로, 이야기의 메시지나 이념적 논쟁이 주로 인물들간의 대화를 통해서 표출된다는 점. 이것은 알레고리적인 인물이 선택될 경우 당연한 귀결이다. 인물에 성격화가 부여되지 않을 경우 상황묘사를 통한 메시지의 전달은 빈약해질 수밖에 없고 이것은 보완하는 것이 바로 대화인 셈이다. <벌거벗은 해>에서 혁명에 대한 인물들의 입장이나 태도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가령, 1917년의 혁명에 대해서 그것이 마르크스(=유럽)의 유물사관에 입각한 과학적 사회주의의 공식을 보여주는 것이냐, 아니면 러시아 민중에게 잠재되어 있는 천년 동안의 믿음이 현실화된 것이냐에 대한 논의. 근대소설의 경우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이런 류의 교술성을 또한 고대문학적 특성과 연관지어 이해할 수 있겠다.

셋째로, 의인화되는 자연. 이 또한 눈에 두드러지는 것이지만, 가령 <이고르 원정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해>에서의 자연(특히 눈보라)는 이야기 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발언한다. 그래서 마치 희랍비극에서의 코러스처럼 여기저기 참견하듯이 으르렁거리고 울부짖으며 “비유비유가가 샤샤샥”거리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전범이 되는 것은 동화(=옛이야기)의 세계이다.

넷째로, 연대기적 구성. 사제 실베스트르가 연대기 편찬자로 나오지만, 이미 ‘벌거벗은 해’라는 제목 자체가 연대기적이고 구성 또한 ‘서문’ ‘서술’ ‘결론’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 바, 이 또한 연대기의 구성을 모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해>의 작가 필냑은 근대소설의 작가와는 다른 작가적 위치와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인데, 연대기 편찬자로서의 필냑은 재료(material)의 편집자(editor)로서만 이야기 속에 개입하는 것이다. 때문에 혁명에 대한 필냑 자신의 태도는 상대적으로 모호하다.

하여간에 이렇듯 나이브한 상태의 재료들이 텍스트에 편입됨으로써(텍스트는 ‘잡화상’이 된다) 야기되는 결과는 현실과 허구간의 경계가 흐리마리해지는 것이다. “빵도 없고, 철제물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기아와 죽음과 공포와 두려움”뿐인 1919년, 동시대의 상황, 즉 혁명 이후의 2-3년간의 기간은 일종의 무중력적 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배적인 체제와 가치의 붕괴가 동반하는 이러한 혼란과 아노미 상태, 카오스모스적인 상태는 일시적으로 역사가 정지된 상태이다. 즉 역사서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역사를 꿰뚫어 서술할 수 있는 단일한 시각적 입지(=퍼스펙티브)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해>에 등장하는 볼셰비키, 아나키스트, 분리파교도, 수구세력 등은 저마다의 시각과 가치관의 코드를 통해 혁명과 당대의 현실을 해석하려고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결정적이지는 못하다. 따라서 모든 현실의 파편들, 재료들을 자신의 단일한 코드로 편집, 재구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허구적 장르의 지배력은 거의 무력화되는데, 이러한 사정은 작가 필냑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연대기라는 형식이 어떤 의미에선 그에게 강요된 형식일 것이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벌거벗은 해>의 고대성의 모티브들이 암묵적으로 제시하는바, 혁명의 눈보라가 몰아친 후 드러나게 될 17세기 이전의 러시아, 아시아적 러시아상은 텍스트 속에서 반복되는 여러 가지 모티브들에도 불구하고 명료하게 정식화되거나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비에트 문학 중에서 혁명과 혁명에 참가한 주인공을 서사적인 형식으로 그리고 새로운 소설을 창조하려 한 최초의 시도가 B. 필냑의 소설 <벌거벗은 해>였다. 그러나 새로운 형식과 문체로 있지도 않은 현실을 재현하려고 한 바람에 작가는 인간과 사건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고, 혼란스럽고 절충주의적인 관점만 드러내고 말았다.”(V. 부즈닉, L. 에르쇼프) 이러한 관점은 한편으로 정당하기 짝이 없는데, 소비에트 문학사는 소비에트의 승리, 볼셰비키의 승리라는 역사적 결과를 전제로 하여 서술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괭이 2006-08-23 0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20년대 자체가 러시아문학에서 그야말로 '문제적인 시대'로 기록될 만하지만, 쟈마친, 올례샤, 필냑, 플라토노프 등의 유수한 작품 중 필냑의 [벌거벗은 해]가 역시나 가장 문제적인 듯. 하지만 이 소설의 온갖 난해성도 늙은 아르히포프가 임종시 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인 "“아들아, 너는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포기하지 말아라. 결혼해서 아이들을 갖도록 해라, 아들아……”(로쟈님이 인용한 부분)를 되새기면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싶네요. 실상, 저 말 때문에 이른바 "가죽 재킷"(=공산주의자) 아르히포프가 결혼을 택하는 것이기도 한데... 겸사겸사, 골룹코프 교수의 책도 1920년대 문학의 틀을 잡는 데 아주 유용함.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까치글방 145
리처드 로티 / 까치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미국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이 주저는 꽤 오래전에 번역된 책이지만, 그다지 많이 읽히지는 않은 듯하다(꽤 오래전에 써두었던 리뷰를 다시 옮겨오는 이유이다). 사실 로티가 철학자로 분류되긴 하지만, 한 철학교수의 말을 빌면, 문학이 철학에 맞먹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우수한 장르라고 치켜세우는 '反철학자'이다. 때문에 미국 본토에서는 "전문적 철학훈련이나 철학적 지식은 부족하면서 막연히 철학이라는 것에 흥미를 표시하는" 각종 문학자나 문학 교수들간에서 더 인기가 있다고. 

굳이 분류하자면 (한때) 로티의 애독자로서 나 또한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것이니 이런 식의 '뒷북치는' 리뷰가 흠이 되지는 않겠다. 좋아하는 걸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몇년 전 그의 내한 강연에도 나는 기꺼이 참석했었다). 한편, 기존 철학 패러다임의 종언을 주장하여 직업철학자 동료들의 미움을 산 로티 자신은 프린스턴 대학의 철학교수 자리를 내놓고 버지니아 대학의 인문학교수로 옮겨갔다가 현재는 스탠포드대학 비교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걸로 안다(이젠 '비교문학자'라고 불러줘야 할까?).  

그럼, 로티의 어떤 주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또 통쾌하게 하는가? 전문철학자가 아닌 일개 문학도로서 이 점에 대해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제멋대로 말하자면, 그가 근대철학이 ‘가지 않은 길’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근대철학의 전통, 즉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이 걸어온 길은 근대의 철학적 이성이 ‘발명한’ 인간 '정신'이 '자연'이나 '실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거울로서의 특권적인 지위를 확보하면서 모든 지식의 기초나 바탕이 될 만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갈로 깔려 있는 길이다.

 

'인식론'에 정향되어 있는 그 길을 로티는 '토대주의'라고 부르고 그것을 일종의 병리적인 것으로 다룬다(로티는 자신의 철학이 ‘치료적’이라고 공표한다). 그것은 가지 않아도 될 길, 안 가면 더 좋았을 어떤 사유의 길이기에 그렇다. 이에 따라, 책의 대략적인 내용은 그 토대주의적 존재론 비판(1부), 토대주의적 인식론 비판(2부), 반토대주의적 철학관 제시(3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대안적 철학, 그러니까 근대철학이 ‘가지 않은 길’은 일종의 해석학으로서, 기존 철학이 누려왔던 제 1학문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한 '교화적 철학', 쉬운 말로 대화의 철학, 지혜의 철학이다.

 

이 새로운 철학, 제대로 된 철학은 다시금 과학이 아닌 우리의 일상적 삶을 철학의 중심적인 주제로 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주장과 입장은 그 자체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으로서 영미철학의 주류였던 분석철학의 종말뿐만 아니라 인식론 전반, 더 나아가 전통적인 철학 전반에 대한 거부와 해체를 뜻한다. 이에 대해서 많은 논란과 논쟁이 벌어진 것은 당연하며, 로티는 그를 통해 철학계의 문제적인 인물이면서 중심적인 인물로 부상한다.

 

일부 철학자들은 그의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을 표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적 주장에 대한 그의 논변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 이 또한 일개 문학도로서는 판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나의 판단은 다만 그것이 그의 문제의식과 논변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독자 개개인이 수고스럽게 숙고할 만한 문제라는 것 정도이다. 그 수고스러운 길에 들어서는 독자가 유의할 것은 로티가 주장하는 새로운 철학이 기존의 철학적 언어-게임의 어휘들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책의 독해에는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분석철학에 대한 예비지식이 어느 정도 요구된다. 비록 반(反)-철학, 탈(脫)-철학에 대한 일종의 선언적인 의미를 지니는 책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철학‘책이라는 걸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로티 자신은 철학적 논변에 대해서 매우 엄정한 태도를 갖고 있다. 그 자신 분석철학의 훈련을 받은 전도유망한 기대주이기도 했었고).

 

그럼에도 나로선 이 문제적인 저작을 많이들 사서 읽어보시든가, 책장에 모셔놓든가 하시라고 권유하고 싶다. 특히 대중적인 철학교양서로서 이름높은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은 필독할 만하다. 듀란트는 그 책의 저자의 말에서 이렇게 적어놓았었다: ”저자는 인식론이 근대철학을 납치해서 거의 파멸시켰다고 믿는다. 저자는 인식과정의 연구가 심리학의 과제로 인정되고 철학이 다시금 경험 자체의 방식과 과정의 분석적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경험의 종합적 해석으로 이해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분석은 과학에 속하고 지식을 제공한다. 철학은 지혜를 위한 종합을 마련해야 한다.“ 로티는 바로 이런 듀란트의 믿음을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실천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철학적 지식보다는 지혜를 좀더 필요로 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이 지혜에 대해서라면 문학이 철학에 전혀 뒤질 것이 없다. 헤르메스의 철학자 미셀 세르는 어느 대담에서 오직 과학만이 철학이 과학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라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걸 이런 식으로 고쳐 말해도 무방하리라 나는 믿는다: “오직 철학만이 문학이 철학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철학을 좋아하는 이유이고 로티를 반기는 이유이다.  

 

참고로, 이 번역서에 대한 나의 유일한 불만은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라는 제목에 놓인다. 원제인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를 그냥 '철학과 자연의 거울'이라고 옮기지 않은 것은 다소 중의적인 이 번역에서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이격시켜놓기 위함일 터이지만, 그런 노파심이 우리말로 다소 어색한 지금의 제목을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다(내가 아는한 로티를 언급하고 있는 국내의 어떤  학자도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란 제목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반증이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인 2006-03-26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로티를 좋아하시는군요.

로쟈 2006-03-2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로티가 문학 전공자들이 좋아할 만한 얘기들만 하거든요.^^

사량 2006-03-2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티의 책은 <실용주의의 결과>만 읽어보았는데, 저는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었더랬습니다. 로티는 문학이나 글쓰기라는 것에 꽤나 특권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정작 문학 작품들을 갖고 이야기하는 걸 보지 못했어요. 적어도 그 책에서는요. 나름대로 논리실증주의나 분석철학과 조금은 거리를 두고 '대륙철학자'들의 문제의식을 많이 수용하려 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야기하는 방식은 문학적 체취가 잘 맡아지지 않는 철저한 미국식 글쓰기였다고나 할까요...

로쟈 2006-03-27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서 저도 언급했지만 말씀대로 로티의 '문학적' 편향은 철학내에서의 입지입니다(더 좁히자면, 미국의 분석철학계 내에서이고, 그는 철학자에서 '대문자 진리'란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철학의 종언'을 고하는 철학자들 계보에 서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철학적 논변 방식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하이데거나 데리다를 진지한 철학자로 취급하지 않는 동네에서 (그가 '사적인 철학자'로 분류하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옹호/지지하는 예외적인 '철학자' 정도로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같은 책에는 오웰이나 나보코프 등의 작가들을 다루고 있는 장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비로그인 2006-03-2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유선 교수나 김동식 교수도 "철학과 자연의 거울" 이라고 하지요. 전 로티가 데리다 등과 비슷한 이야기를 함에도 그리 난해하지는 않은 (물론 비교적으로) 글쓰기를 해서 좋아합니다. 그런데 로자 님이 보시기에 이 책의 전반적인 번역 상태는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역자인 박지수 씨는 "그리 자신이 없다"라고 했는데... 저도 로티의 논변이나 문체에 흥미를 느끼는 터라 영문판도 구매해 뒀거든요.

로쟈 2006-03-2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도 원서를 갖고 있는데 대조해가며 완독하지는 않았(었)고, 중간 부분에서 대척인간(?)이 나오는 대목을 꽤 어려운 내용인 걸로 압니다. 한데, 제가 읽은 다른 글들을 고려해 본다면, 로티는 전혀 어려운 철학자가 아니죠. '그리 난해하지 않은'이 맞습니다(오역의 건덕지가 별로 없는 게 정상일 거 같구요)...

2006-03-28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3-28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철학의 거장들>은 아는 후배가 교정을 보기도 했었는데 번역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더군요. 그런데, 번역서들을 읽다 보면 그게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 지극히 일반적인 경우라는 걸 아시게 될 거 같습니다. '철학입문'에 대해서 제가 조언을 드릴 만한 처지는 못되고, 다만 제 경우엔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1학년때는 러셀의 <서양철학사> 같은 걸 추천받기도 했었지요. 아무거나 가급적이면 원서와 대조해가면서 한권 독파하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3794 2006-03-28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승주나무 2006-04-17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의 글을 읽으니 '인식론의 거미줄'이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개념조차 저에게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보다는 김수영의 '한꺼번에 혹은 동시에'론에 더 관심이 가네요^^
로티도 역시 이름만 아는 철학자였는데, 한 번 책을 살펴봐야겠습니다. 여기 오면 읽을 책이 자꾸 늘어서 큰일이에요^^;;

로쟈 2006-04-17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책 때문에 인생 허덕이고 있는 대표적인 케이스죠(^^;)...

자꾸때리다 2006-10-08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 부분 심리철학 부분을 자세하게 읽지 않아서 그럴 것입니다. 책의 후반부 번역은 괜찮지만 전반부 번역에는 상당히 많은 오역이 있습니다. - 김영건 박사의 코멘트더군요. 전반부 심리철학 부분이 오역이 상당히 많다고...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 24 | 25 | 2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