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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있는 책 몇 권 책장에 꽂다가
시집 한 권 빼냈다 그늘과 사귀다
시집 있는 자리가 아니어서
(그런 자리가 따로 없지만)
빼내는 건 일도 아닌데
시집 속에 껴 있던 영수증이
난데없는 일거리를 만든다
빛바랜 영수증에 찍힌 행적이
나를 닦아세운다
2007년 9월 13일 아무 기억도 없는 날짜에
경인문고 송내점에서
저녁 9시 34분 53초
고작 시집 한 권 구입하다니
쿠폰 700원에 현금결제 5300원
(어려운 시절이었나?)
그늘과 사귀다
시인의 이름은 기억해도
읽은 기억이 없는 시집이건만
사귄 기억이 전혀 없다고 부인해도
명백한 물증이라며 몰아세운다
아 그때는 아직 삼십대였고
아직 젊었구나
해도
딴소리하지 말라고
하필 그늘을 사귀겠느냐고
해도
그건 중요치 않다고
하는 수 없이 진술서를 쓴다
시집에서 베껴 적는다

폭설 이쪽의 세상이 바로 저 세상이란 걸
저 세상일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라는 듯 귀소하는
하늘의 젖은 새, 하나
어떤 풍경도 풍경의 안에 숨졌을 뿐

그렇다, 오늘 나는 연락을 받았다
다시는 사랑하지 말아요
늦어버린 너무 늦어버린

식은 풍경의 마지막 두 연을 옮겨 적고
그늘과의 관계를 청산한다
다시는 사랑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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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5-07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or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는듯
그친구랑 놀지마!
다행히 관계를 청산하셨다니 잔소리 들을일은 없을듯ㅎㅎ

로쟈 2018-05-07 12:19   좋아요 0 | URL
요즘 쓰고 있는 독서시의 변형입니다.~

모맘 2018-05-09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습니다! 좋습니다라고 쓰고싶지 않은데 다른 말이 안 떠올라요ㅋ

로쟈 2018-05-09 23:30   좋아요 0 | URL
감사.~
 

여주인공이 되는 법은 내가
읽을 책은 아니군 아니 누구를 위해서는
읽어도 되겠어 여주인공들을 위해서
혹은 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친구 에마와 함께 요크셔의 황야로 갔어
폭풍의 언덕의 바람을 맞으러
아니 여느 바람이면 안 되겠군
폭풍이어야지 폭풍의 언덕 뺨치는
히스클리프를 잠 못 들게 하는
요크셔 황야에서
저자는 여주인공 캐시 언쇼를 떠올리지만
에마는 제인 에어 편이야
캐시는 부잣집 아들과 결혼한 속물이라고
대신에 제인은 못 생겼어도 독립적이고
자기 원칙을 지켰던 여자라고
둘은 제인과 캐시를 두고 의견이 갈렸어
여자도 여자를 이해 못하지
˝그냥 그런 결혼을 안 하면 되잖아˝
저자는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를 다시
읽어 보기로 하지
남자들만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되는 건 아냐
여자에게도 여주인공이 되는 여로가 필요해
(캠벨은 여자에게는 필요없다고 했다지)
천의 얼굴을 가진 여주인공
책에는 인어공주부터 셰에라자드까지
열한 명이 나오니 열한 명의 얼굴이네
열한 명의 여주인공이 되는 법
나는 옆에서 곁눈질만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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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5-06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목은 읽고 싶은 맘을 접게 만드는~
OOO되는 법~이련 제목의 책들~
전혀 끌리지가 않아서요.
(자기계발서 냄새를 풍기는)

로쟈 2018-05-06 14:10   좋아요 0 | URL
원제가 그렇고 책은 독서에세이입니다. <빨래하는 페미니즘>과 비슷한 종류.

로제트50 2018-05-06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고 되고싶은 캐릭터는
미스 마플_ 아가사 크리스티.
세상을 관조하는 갈등없는 생활.
미래 저의 워너비~~

로쟈 2018-05-06 16:25   좋아요 0 | URL
아하 크리스티 애독자시군요.~

서생 2024-02-04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조사를 다룬 책들에 여왕의 이야기는 거의 없죠. 역사가들이 마초가 아니라 지난 역사가 남성중심의 역사였기 때뮨입니다. 영웅 신화도 왜곡된 인류의 역사에서 영웅담이 남성 위주로 만들어진 탓이지 그러한 영웅서사를 연구한 작가의 잘 못은 아나라고 봅니다.
 

영화 마션을 보지 않았지
소설도 사두었는데 읽지 않았어
화성에 가볼 여유가 없었지
마크는 잘 있는지
마크 와트니라더군 화성에
홀로 남겨진 우주비행사
우주시대의 로빈슨 크루소지
프라이데이만 빠진
마크는 충분치 않은 식량과 보급품으로
적어도 4년을 기다려야 했다지
탐사선이 올 때까지 말이야
마크가 일하는 모습은 보았어
(근데 누가 찍은 거야?)
산소가 부족한 행성에서 마크는
과학과 기술만으로 살아남아야 했어
상상하자면
탐사선이 나타나는 걸로 영화는
끝나지 않을까 그래야
과학 만세, 마크 만세가 될 테지
아니면 카프카의 단식광대가 될 테니
그건 과학의 악몽일 테니
마크의 악몽일 테니
왜 인문학적 감각인가를 읽다가
마크 얘기가 나와서
상상해보았어
저자왈 인문학도는 지구에 남은 마크래
그래서 잘해봐야 한대
마크처럼
빌어먹을 인문학의 기술을 갖고서
인문학 만세 할 때까지

근데 탐사선은 언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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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5-05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구에 남은 마크가 되고싶지않은(절대로!)

인문학도가 되긴 글렀슴 ㅎㅎ

로쟈 2018-05-06 00:37   좋아요 0 | URL
인문학의 가치를 얘기하는 책인데 암튼 서두의 비유는 그렇습니다.~
 

이발을 하러 나왔다가 잠시 빵집에서
커피도 파는 빵집에서 공산당선언을 읽는다
올해는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공산당선언 170주년
강의 때마다 자주 입에 올린다 그러고는
읽는다 공산당선언을 다시 읽기로 한다
이번에는 강의를 하기 위해서
가늠해보기 위해서
공산주의 선언도 있지만 대개는
공산당선언 번역본도 하도 많아서
내가 읽어본 게 여러 종
읽다 만 것은 더 많다
안 읽어도 읽은 것 같은 공산당선언
막이 오르고 유럽에는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는
대사가 울려퍼지면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고
대꾸해야 할 것 같은
합창해야 할 것 같은
공산당선언
사회주의 국가 몰락과 함께 죽었다
다시 살아난 공산당선언
유령을 불러내는 건 민중이 아니라 반동들
신성한 반동의 연합이 다시금 일깨운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걸
공산당선언부터 러시아혁명까지는
몇 걸음이었나 지난해가
러시아혁명 100주년 시간은 거꾸로
1848년 원점으로 돌아간다
공산당선언에서 러시아혁명으로가 아니라
러시아혁명에서 공산당선언으로
하여 모스크바 한복판
마르크스 동상에 새겨진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끝이 아니라 시작
동상이 아니라 육성에서 다시 시작
프롤레타리아의 합창에서 다시 시작
죽은 마르크스 대신 살아있는 마르크스
죽은 개가 아니라 살아있는 동무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 올 때까지
갑질 오너들의 세상 대신에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하나의 새로운 연합체가 등장할 때까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연합체가
공산주의의 진짜 이름이 될 때까지
우리는 각자 공산당선언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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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무인 2018-05-05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소개가 좋네요 단문으로하니까요

로쟈 2018-05-05 14:35   좋아요 1 | URL
대중화를 고려합니다.
 

다른 주말처럼 늦게 일어나 커피
한 잔 마시다가 한순간 일요일로 착각
주5일제가 언제부터였는데
쉬는 날은 일요일 자동반사적으로
일요일이라는 착각
이게 몸의 관성, 몸에 밴 관성이구나
한순간이어도 아직 다 빠져나가지 못한
그래 휴일은 일요일이었고
일요일에도 학교에 나간 적이 있었지
그래도 평소보다 늦게 주말보다
늦게였으니 휴일 기분내면서
월요일이 코앞이던 일요일보다
토요일이 좋았고 그 토요일을 기다리는
금요일 저녁이 좋았지
(목요일까지는 아니야)
그랬었지
토요일에는 오전근무만
토요일에는 오전수업만
종례가 끝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귀갓길을 재촉했지 뛰면 안된다는 게 규칙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버스정류장까지
내달리고 제때 버스를 타야
시간단축
매주 기록을 재가면서
기록단축에 애를 썼지 아무도 모르는
나의 기록 주말 귀가 기록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기까지의 기록
자유에 도달하기까지의 숨가쁜 기록
아슬아슬한 기록
내게 토요일은 그런 날들이었지
지금은 그냥 휴일 잠시
일요일과 헷갈려서 적어보았네
토요일이란 말도 이젠 낯설어 적어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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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느티나무 2018-05-05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토요일은 하루의 반은 일상, 반은 휴가같은 특별한 날이었죠.

로쟈 2018-05-05 12:49   좋아요 0 | URL
네 그런 토요일은 이제 사라진 거죠.^^

two0sun 2018-05-05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시는 읽는 시가 아니라
보는 시?보이는 시?같은 느낌.
자유에 도달하기까지의 심장 박동수가 느껴지는~

로쟈 2018-05-05 13:48   좋아요 0 | URL
중학생 때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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