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의 말년작들을 읽으며 자연스레 노년과 늙어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10년 뒤 이야기들임에도 그렇다). 더이상 노년이 강건너 일만은 아닌 나이가 되니 늙어감을 주제로 한 책들에까지 눈길이 멈춘다(늙어감 혹은 죽어감).

최근에 영어판으로 첫 비평판이 나왔기에 톨스토이의 <인생론>을 다시 구입했는데, 그가 58세에 쓴 책이다. 노년의 문턱에서 쓴 것이라고 할까. 인생론을 쓰고픈 충동을 느낀다면 그때가 바로 노년의 기점인지도 모른다.

노년 역시 죽음과 마찬가지로 다섯 단계의 반응태도를 갖게 하는지. 부정과 거부에서 체념과 수용까지 말이다. 죽음과의 차이라면 어떤 포즈(허세)가 그래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꽤 유지될 수 있다는 점. 물론 방심은 금물이고 언제든지 탈락자의 대열로 옮겨갈 수 있다.

책을 읽는 독서가들에게는 아마도 노안이 충격의 시작이리라. 나는 아직 시력에 불편을 느끼지는 않지만 조만간 시력이 아니더라도 지력이나 체력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그런 게 늙어감의 문제다).

방과 현관에 쌓여있는 책들을 보다가 이제는 정말다 읽을 수 없겠다는 실감이 들었다. 갑자기 무연한 상태가 된 것. 책을 읽는 게 문제가 아니라 찾는 게 더 큰 문제가 된 이후로 책과의 관계도 많이 데면데면해졌다. 책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고 관계의 문제다.

늙어감을 주제로 한 책 몇 권도 찾아서 모아두어야겠다.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도 않지만 자진해서 노년의 수감생활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 묘한 선택장애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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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한 상태에서 하루를 보내다(요즘 흔히 말하는 남성 갱년기에 접어든 것인지도) 요시모토 다카아키(책에는 ‘타카아키‘로 표기. 여성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버지다)의 신간을 펼쳤다. <진짜와 가짜>(서커스). 일본의 대표 사상가의 한 명으로 꼽히지만 주저들은 번역되지 않았고 이번 책처럼 몆 권의 가벼운 책만 소개되었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일본 근대명작 24>(새물결) 정도.

첫 머리에 실린 글이 ‘선악 이원론의 한계‘인데 다자이 오사무 얘기여서 눈길을 끈다. 밝음과 어두움의 이분법에 대해서 재고해봐야 한다면서 다자이의 예민한 통찰을 예로 든다. 단편 ‘우대신 사네모토‘에 나오는 사네모토의 대사를 가장 좋아한다고 밝히는데 이런 대사다. ˝헤이케는 밝다. (중략) 밝음은 스러짐의 모습일까. 사람도 집안도 어두울 때는 아직 멸망하지 않는다.˝

이 역설적인 표현에서 다자이다운 감각을 읽어내는데, 알려진 대로 그것은 다자이의 불행한 유년기에서 왔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하녀와 유모 슬하에서 자란 과정에 그런 날카로운 감각이 몸에 배었다는 것. ˝하지만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에게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그만한 작품을 쓸 감성이 갖춰지지 않았을 거라는 견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강의에서 주로 <인간실격>과 <사양>을 읽기에 다자이의 단편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단펀집 <만년>은 강의에서 읽은 적이 있다) 다카아키 덕분에 ‘우대신 사네모토‘에도 흥미가 생겼다. 찾아보니 도서출판b의 다자이 전집 가운데 <인간실격>에 수록되어 있다(유일한 수록본 같다). 소장도서이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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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7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버트런트 러셀의 <결혼과 도덕>(1929)을 서평 강의에서 읽었다. 그러고 보니 러셀을 강의에서 다룬 건 처음이지 싶다. 195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여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강의 때 다룰 수도 있었지만(윈스턴 처칠과 함께) 기획했던 강의가 폐강되어 무산됐었다. 그때도 읽으려고 한 것이 <결혼과 도덕>인데 몆 종의 번역본이 나와있고 나는 대부분 갖고 있었다(과거형으로 쓴 건 현재 행방을 찾을 수 없어서다).

하지만 어쩐 이유에서인지 원제와는 다른 제목들이 붙어 있어서 강의에서는 사회평론판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내가 처음 읽은 건 박영문고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상에 남는 대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읽다가 만 듯싶은데 이번에 읽으면서 꽤 유익한 책이어서 놀랐다. 낡은 구석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러셀은 인구의 증가가 제한적일 거라고 보았지만 우리가 아는 대로 20세기에 세계인구는 두 배 이상 폭증했다), 결혼에 대한 새로운 도덕의 제안과 요청은 지금 시점에서도 충분히 음미해볼 만하다.

게다가 부수적으로는 낭만적 사랑의 탄생과 그 역사에 대한 잘 정리된 설명을 제공하고 있어서 좋았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명쾌하게 정리해주면 반가운 것. 특히 낭만적 사랑에 대한 정의. ˝낭만적 사랑의 핵심은 상대를 손에 넣기 어려운 귀한 존재로 여기는 데 있다.˝ ˝상대방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는 그 여성을 손에 넣기 어려운 데서 오는 심리적 효과다... 그 사랑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여성, 도덕과 인습이라는 드높은 장벽 너머에 있는 여성이 대상이었다.˝

이러한 대상에 대한 구애의 노래가 바로 연애시다. 때문에 ˝예술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성을 쉽게 손에 넣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여성을 손에 넣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고 어려운 경우다.˝ 정리하자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손에 넣기 어려운 대상이 사랑의 대상이고 이 대상을 향한 정념의 운동이 사랑이라고 불린다. 사랑에 관한 많은 정의가 있지만 적당한 크기의 가장 합당한 정의라고 생각된다. 더불어서 사랑이 왜 중세 유럽(궁정사회)에서 탄생했는지도 이해하게 해준다.

사회평론판은 원서의 장제목들을 편의적으로 수정했는데 장수도 원저와는 차이가 있어서 완역본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확인해보기 위해서 원서도 오늘 주문했다(나는 갖고 있는 줄 알았다). 온라인에서 다운받아놓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종이책이 편해서 주문했고, 배송된 이후에야 살펴보려 한다. 러셀에 대해선 그때 다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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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9-06-03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자식에 관한 언급이 좀 의외다 했는데
강의에서 궁금증 해소~
그래도 러셀의 두가지 차원의 결혼관에 자식이 변수라는건
여전히 의외~~
러셀의 성장과정이 어땠는지가 새로운 궁금증.

로쟈 2019-06-03 23:34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저도 조사해본 거였어요. 자녀들이 언제 태어났는지. 러셀은 자서전이 번역돼 있어서 참고하실 수 있음.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 두 권을 지난 두달간 강의에서 읽었다. <사회주의, 생동하는 유토피아>(1976)를 오늘까지 읽었고 지난달에 먼저 읽은 건 <레트로토피아>(2016). 국내에 소개된 바우만의 책 가운데서는 가장 먼저 쓰인 책과 가장 나중에 쓰인 책이다. 바우만의 시작과 끝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예상보다도 배울 점이 많았고 기대보다는 번역이 안 좋았다.

특히 <사회주의>는 내가 읽은 범위에서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주제로 한 최고의 책이다. 문제는 바우만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잘 읽히지 않는 문장들로 쓰였다는 점. 바우만식 영어를 통상적인 영어로 번역하거나 번역문을 통상적인 한국어로 재번역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바우만의 깊은 통찰과 비판을 어림해서 읽으며 ‘역시 바운만!‘이라고 경탄할 수 있었다.

덕분에 사회주의를 주제로 한 다른 책들에도 눈길을 주게 되는데 라클라우와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후마니타스)은 예전 번역으로 흥미롭게 읽었지만 재독하고 싶고, 악셀 호네트의 <사회주의 재발명>(사월의책)은 바우만의 책과 비교해서 읽어보고 싶다.

덧붙이자면, 바우만에게 큰 영향을 미친 그람시의 책들도(안 그래도 이탈리아 여행시 그의 무덤을 찾은 걸 계기로 책을 몇 권 구입해놓은 터이다) 읽어보려 한다. 이 주제의 책들을 좀더 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해볼까 하는 욕심도 있다. 당장에 밀린 일들이 많지만 욕심은 그렇다는 얘기다. 하기야 바우만의 책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이 밀려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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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gles 2019-05-27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의 책 욕심은 끝이 없군요^^

로쟈 2019-05-29 17:41   좋아요 0 | URL
네 아직은요.^^;

two0sun 2019-05-2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강의도 너무 좋았습니다.
사회주의에 관해, 바우만에 대해
많이 알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샘의 인문학 강의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19-05-29 17:42   좋아요 0 | URL
기대를갖고 들어주셔서. 인문학강의의 수요가 많지는 않아서요.^^;

모맘 2019-05-28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욕심나는 듣고 싶은 강의네요 언제쯤~

로쟈 2019-05-29 17:42   좋아요 0 | URL
대구에선 가끔.^^

소창다명 2019-05-2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책 추천 또 해 주시면 안 되나요?

로쟈 2019-05-29 17:42   좋아요 0 | URL
안식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되는 날도 있고 반대로 안 되는 날도 있다. 이번주는 모든 것이 안 돼 보이는 주였는데 (아직 주말의 지방강의가 남았지만) 지나고 나니 또 그럭저럭 선방한 한 주로 여겨진다(이주의 강의책 가운데 네 권을 다시 구입해야 했다). 휴일까지 강의가 있지만 내주엔 원고가 없다는 게 위안이 된다(매달 3개의 원고가 있어서 나는 한주 쉬어 간다). 네 권의 책을(이번 휴일강의까지 포함하면 여섯 권) 새로 강의해야 한다는 부담은 있지만 자주 겪다 보니 못 버틸 정도는 아니다. 다만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뿐이다.

강의의 보람으로 치는 건 스스로에 대한 격려 차원에서 관런서를 구입하는 것이다. 오늘은 서평강의에서 부르디외의 대담집을 다룬 김에 그의 마네론과 정치평른을 주문했다(영어본이다). 로제 샤르티에와의 대담집 <사회학자와 역사학자>(킹콩북) 마지막 장에서 부르디외는 마네와 플로베르의 미술사적/문학사적 의의를 자신의 사회학 이론에 맞춰서 설명하는데 이 두 사람에 관한 논의는 각각 <마네>와 <예술의 규칙>으로 출간되었다. <예술의 규칙>(동문선)은 번역돼 있지만 <마네>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한때 부르디외의 장이론을 1920년대 러시아문학사에 적용해보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는데 돌이켜보면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런 책을 누군가 써준다면 고마운 일이고 얼마든지 읽어줄 용의가 있다. 그때까지는 부르디외의 플로베르론을 꼼꼼하게 읽어보는 수밖에. 대담자인 샤르티에는 확인해보니 2006년부터 콜레주드프랑스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출판의 역사에 관한 한 프랑스 최고의 권위자라는 뜻이겠다. 그의 <읽는다는 것의 역사>(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도 생각난 김에 읽어봐야겠다(예전에 일부만 읽었는데 그 사이에 영어판도 구했다). 이렇게 한주가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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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9-05-1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강의 못들어서 너무 아쉽네요.
샘의 부르디외에 강의를 또 들을수 있는게 아니라서.

로쟈 2019-05-18 07:42   좋아요 0 | URL
적당한 책이 나오면 다시 다룰수도.~

wingles 2019-05-18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나 불어로 읽을 여력은 없어서 번역된 ‘예술의 규칙’을 찾아봤더니 절판이더군요..ㅠㅠ

로쟈 2019-05-18 07:42   좋아요 0 | URL
네 주요 저작들이 절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