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정국 속에서도 눈에 띄는 책들이 여럿 출간됐다(*이 글은 2004년 3월 중순에 씌어졌다). 저녁엔 시위에 나서더라도 책 읽을 시간은 충분하므로 여기에 몇 권을 소개한다. 아마도 당분간은 이 연재의 마지막일 듯싶다(*해서, 이 에피소드 시리즈의 마지막 글이다). (30)번을 채우지 못했지만, 사정이 그렇게 돼버렸다. 혹은 여운을 그렇게 남겨두기로 한다. 하긴, 누가 등떠미는 것도 아닌데...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작고한 철학자 박홍규 교수(법학자 박홍규 교수가 아니라)의 전집 3, 4권으로 각각 <형이상학강의2>(민음사)와 <플라톤 후기 철학강의>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이 전집의 1, 2권은 지난 95년에 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바 있는데, 정말 오랜만에 나머지 책들이 출간된 것이다(‘나오단 만 책들’의 대표적 사례의 하나였다). 10주기를 맞은 고인의 기일이 지난 14일이었다고 하는데, 이후에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다룬 강의록이 마저 출간된다면, 하나의 ‘철학사적 기념비’가 세워지는 것이 되리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바이지만, 박교수는 서양철학사 전체가 플라톤과 베르그송, 두 철학자에 의해 집약되는 것으로 보는데, 그의 철학관은 <형이상학강의1>에 실린 ‘고별강연’에 잘 드러나 있다. 고전철학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에게라도, 그 강연문은 일독을 권할 만하다(*<탐독>의 저자가 구상중인 책에는 <소은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도 포함돼 있다. 소은과의 만남에 대해서 한 장을 할애하고 있기도 하므로 박홍규 철학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라면 <탐독>을 슬쩍 참조할 수도 있겠다).

 

 

 


두 번째 책은 한나 아렌트의 <정신의 삶 - 사유>(푸른숲)이다. 원제가 'The Life of Mind'인 이 책은 아렌트 철학을 집약하고 있는 만년의 대표작인데, 그녀는 1권인 ‘사유(Thinking)’와 2권 ‘의지(willing)’까지를 완성하고, 3권 ‘판단(Judging)’은 첫 페이지만을 타자기에 끼워놓은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재작년쯤에 김선욱 교수의 번역으로 (흔히 3권 ‘판단’을 대신하는 것으로 일컬어지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푸른숲)이 소개된바 있는데, 오랜만에 아렌트의 주저가 번역되어 반갑다.

그해에는 김교수의 <한나 아렌트 정치판단이론>(푸른숲)까지 출간되어, 나로 하여금 (월드컵의 해였던) 2002년을 아렌트와 지젝의 해로 기억하게끔 했다. 그 ‘옛날’의 감흥이 약간은 되살아나는 듯하다. 정치의 계절에 20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자’ 중 한 사람인 아렌트의 주저를 읽어보는 일도 뜻 깊을 듯싶다(*<정신의 삶> 2권이 출간될 때도 되지 않았나? 또다시 월드컵의 해인 만큼).

 

 

 



<정신의 삶>의 역자는 홍원표 교수인데, <아렌트와 하이데거>(교보문고)를 번역한 서유경 박사, 김선욱 교수와 함께 ‘아렌트 3총사’로 불리는 이로서, 레오 스트라우스의 <자연권과 역사>(인간사랑), 로이 보인의 <데리다와 푸코>(인간사랑) 등의 역서를 갖고 있으며(후자는 평이 그다지 좋지 않지만), 주저인 <현대 정치철학의 지형>(인간사랑, 2002)에서도 아렌트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아렌트 전문가의 한 사람이다(*이후에 <혁명론>도 역간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렌트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모든 번역이 다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아렌트 번역의 최악으로 일컬어지는 책은 <폭력의 세기>(이후)이고, <인간의 조건>(한길사)도 평이 좋은 편은 아니다). 이미 국내에서도 여러 권 나와 있는 아렌트 입문서 가운데 (분량으로나 가격 면에서도)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은 김선욱의 <진리와 정치>(책세상, 2001)이다. 참고로, 김교수는 작년 지젝 방한시에 통역을 맡기도 했었다.

번역과 관련해서는 지난번에 소개한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도 좋은 평을 얻고 있다. 아직 완독하지 않았지만, 이 책은 “꼼꼼한 번역과 상세한 해설, 인물 소개 등 옮긴이의 성실함이 돋보”이는 번역서이다(그런 점에서 드물게 보는 ‘인문번역서’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앞으론 그런, 역자, 그런 책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여담이지만, 지난주 <한겨레>의 고명섭 기자는 이 책을 소개하면서 “그의 저작 가운데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책”이라고 잘못 소개했는데, 자신의 ‘감’에만 의존하는 건 기자로서 불성실한 일이며, ‘폭탄’맞을 일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정보과학의 폭탄>(울력)이 번역돼 있다.

 

 

 



세 번째 책은 냉전사 연구의 대가라는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개디스 교수의 <역사의 풍경>(에코리브르)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의 등장으로 위기에 몰린 역사학을 바라보는 현대적 해석을 담은 책.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과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뒤를 잇는 역사학 입문서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고 소개되는 이 책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복잡성이론이나 카오스이론 같은 비선형 과학의 통찰을 역사연구와 적극 접맥하고자 하는 시도 때문에 나의 눈길을 끌었다.

개디스 교수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 대학원을 옮기기까지 한 역자는 그의 세미나에 직접 참석한바 있는데, 첫 학기 내내 쟁쟁한 현역 과학자들로부터 새로운 과학이론 강의를 들어야 했다고(이건 부러운 일이다). 그런 역자의 번역인 만큼 신뢰감이 느껴진다. 개디스 교수의 주저 가운데는 <새로 쓰는 냉전의 역사>(사회평론, 2002)가 이미 번역돼 있는데(역사학쪽이라 나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지만), 680쪽이 넘는 분량이다.

 

 

 



네 번째 책은 개이비 우드의 <살아있는 인형>(이제이북스)이다. 이 책은 영감을 주는 책이라기보다는 정보를 주는 책으로 분류될 만한데, ‘살아있는 인형’을 만들고자 했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호프만의 <모래인간> 때문에 이 주제에 나는 더 흥미를 갖게 됐는데, 인간과 인형(기계)란 주제에 관해서 한번 숙고해 보고자 할 때 아주 요긴한 참고문헌이 되어줄 만한 책이다(그러니까 책을 쓸 때 필요한 책이기도 하다).

 

 

 



다섯 번째는 몰아서 얘기하도록 한다. 버지니아울프학회에서 단편집 <유산>(솔)을 번역 출간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사실 이 번역서나 버지니아울프도 아니라, 이런 작업을 꾸준히 ‘책임감 있게’ 해내고 있는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이다. 아마도 가장 단합이 잘되는 학회인 듯싶다. 유사한 사례로 한국카프카학회에서 (역시 솔출판사를 통해서) 카프카전집을 펴내고 있지만, 일부 번역의 수준이 들쭉날쭉이어서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버지니아울프전집은 안정감을 준다. 곧 버지니아울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을 날이 올 것 같다.

그리고, 폴 오스터 입문서로 인터뷰와 그의 작품세계를 다룬 <폴 오스터>(열린책들)가 번역돼 나왔다. 편저자들은 일본의 소장학자들이고, 역자는 고진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산)의 역자이다. 별다른 이유없이 '감'으로 내가 오스터과로 분류하고 있는 윤대녕의 작품집 <누가 걸어간다>(문학동네)도 이번에 나온 신간이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찔레꽃 기념관> 외 5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그러나저러나 오스터과에 속하는 작가/작품들을 내가 당장에 읽을 계획이 없으므로, 이들과의 본격적인 조우는 순전히 미래의 것이다.

 

 

 



끝으로, 정진홍 교수의 <잃어버린 언어들>(당대)을 지난주의 산문집으로 꼽을 만하다. 저자의 말을 잠시 빌면, “삶은 학문보다 큽니다. 잊어 잃어버린 언어들에 대한 회상은 그렇다고 하는 것을 제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새 언어를 낳는 학문하는 자리를 버리거나 그런 삶을 의도적으로 낯가림할 필요는 없습니다. 차디찬 이성으로 그 자리는 그렇게 완성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바탕은 아무래도 잃어버린 언어들에 대한 향수가 낳는 새로운 현실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삶은 학문보다 크며, 당연히 책보다 넓다. 하지만, 그걸 아는 건 책을 통해서이다. 불행히도 나의 경우엔 그렇다. 이건 고질일까, 불운일까? 그 고질을 떨치지 못하고, 그 불운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할 운명이라면(혹은 팔자라면) 나는 (당신이 지겨워하더라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I'll be back!(나는 당신의 등짝이 되겠습니다!)...

2004. 0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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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들에 치이다보니, 새로 나온 책들을 몇 권 사두고도 눈길 한번 주기 어렵다(*이 글은 2004년 3월 초순에 씌어졌다). 계획상으론 이 연재도 3번을 마저 채워야 하는데(*나는 러시아로 떠나기 전에 30회를 채우고자 했었다), 이래저래 더 바쁘게 됐다. 막간을 이용하여, 몇 권의 책을 소개하기로 한다.

 

 

 



지난주간에 나온 책들 가운데, 내가 가장 읽고 싶은 책은, 그리고 아마도 당분간은 읽기 힘든 책은, 조지 존슨의 <스트레인지 뷰티>(승산)이다. 물리학자 ‘머리 겔만과 20세기 물리학 혁명’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간단히 말해서, 겔만의 전기이다. 지난 주말 이전에 나는 이 책을 첫손에 꼽을 작정이었지만, 이미 여러 지면에 크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때를 좀 놓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이 책을 언급하는 것은 이런 류의 책이 나에겐 ‘휴식’ 같기 때문이다.

같은 출판사에선 나온 <뷰티풀 마인드>(2002)와 마치 시리즈처럼 보이는 이 책은 칼텍(캘리포니아공대)의 동료이자 ‘적대자’ 리처드 파인만의 인기 덕에 좀더 빨리 소개된 감이 없지 않다. 이미 여러 권의 물리학 강의가 번역돼 있는 파인만이 ‘유쾌한 천재’의 전형이라면, ‘쿼크’(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 따온 말)의 '아버지' 겔만은 ‘괴팍한 천재’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사실 겔만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복잡성 과학을 소개하는 책들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복잡성 연구의 메카인 산타페 연구소의 ‘대부’로 자주 소개되었다(‘머레이 겔만’이라고 보통 표기되었다). 이 연구소와 관련된 내용도 신간의 마지막 부분에는 실려 있다. 바로 그 겔만이 어떤 인물이었고, 무슨 일을 한 것인지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라 할 만하다. 물론 부제처럼 ‘20세기 물리학’의 현장을 둘러보는 재미도 겸할 수 있겠고. 내가 ‘휴식 같은 책’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문학이나 철학쪽 책들을 읽는 게 내겐 ‘일’이라면, 교양과학서나 과학자들의 전기를 읽는 건 ‘휴식’이다. 여름에 휴양지에서 읽으면 더더욱 제 맛인!...

 

 

 



두 번째 책은 다른 지면들에선 아직 소개되지 않은(아마도 이번 주말 리뷰들에선 다루어질)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그린비)이다. 그간에 <정보과학의 폭탄>(울력, 2002)이 소개된바 있지만, 이번에 나온 신간을 통해서 이 ‘신형’ 사상가 비릴리오는 비로소 그 이름을 우리에게 각인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언젠가 잡지 <문화과학>에 비릴리오를 소개하는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알라딘의 소개글에 의하면, “비릴리오는 속도가 전쟁과 권력, 정치와 문화에 끼친 변화를 면밀히 추적했다. 여기에는 속도의 가속화에 의한 변질 과정과 권력과의 상관관계도 포함된다. 인류는 속도를 통해 그들의 존재의의를 높여왔다. 그리고 서구인들은 생체속도(달리기, 돌격)와 동물적 속도(말, 코끼리, 연락용 비둘기)를 거쳐 기계적 속도(함대, 자동차, 탱크)를 선점함으로써 동양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속도는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서구의 악몽이 됐다.” 등등의 내용이 다루어진다고(*그의 인터뷰집 등이 먼저 소개된다면 그의 책을 읽는 어려움이 좀 덜어지지 않을까?).

얼핏, 보드리야르를 연상케 하는데(키워드가 ‘시뮬라크르’에서 ‘속도’로 달라졌을 뿐?), <정보과학의 폭탄>의 역자가 보드리야르 전문 번역자인 배영달 교수인 것도 그러 심증을 갖게 한다. 다행스러운 건 이번 신간의 역자가 배영달 교수가 아니라, 수잔 손택 전문 번역자로 나서고 있는 이재원씨인 것. 자신의 출판사 ‘이후’에서 책을 내지 않은 것은 ‘판권’ 때문으로 보이지만, 기간된 번역서들을 볼 때, 비릴리오로선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대개의 저자들은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이런 ‘운’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세 번째 책은 서정남 교수의 <영화서사학>(생각의 나무). 저자는 '영화 제임스 본드 007 시리즈의 서사체계 연구'란 논문으로 프랑스에서 학위를 한 ‘정통’ 영화서사학자이다. 이번에 두툼하게 나온 신간은 이미 예고돼 있었기 때문에 언제쯤 나오는지 궁금했었는데, 생각보단 빨리 출간됐다. 덕분에, 이 분야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수고가 많이 덜어지게 됐다.

이 책은 그동안에 나온 이 분야의 역서들,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민음사, 1999),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동국대출판부, 2001), <영화서술학>(동문선, 2001), <영화와 문학의 서술학>(동문선, 2003) 등이 갖는 불편함을 한꺼번에 해소시켜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특히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은 믿기지 않는 오역들이 수시로 출몰하기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말’ 입문서의 강점일 텐데, 다루어지는 내용도 기대보다 충실해 보인다.

영화이론 분야에서 국내 필자의 저작으로 내가 기억하는 건, 김용수, <영화에서의 몽타주이론>(열화당, 1996) 이후 처음이 아닐까 싶다. 박성수의 <디지털 영화의 미학>(문화과학사, 2001) 정도까지 더 끼워줄 수 있을까? 한국의 영화학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네 번째 책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도서출판b)이다. 살레츨(살레클)의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에 이어서 ‘슬로베이나학파 총서2’로 나온 이 책은 거의 ‘번역-기계’를 자처하는 역자의 땀과 자부심이 배어 있는 듯한 책이다. 신간은 살레클의 책보다 더 매끈하게 번역돼 있기 때문에, 역자 특유의 ‘기계적인’ 번역(모든 universe는 ‘우주’로, articulate는 무조건 ‘조음하다’로 등등)과 몇 개 번역어에 대한 ‘습관’ 혹은 ‘고집’을 감안하면서 읽는다면(predemocratic을 ‘선-민주주의적’이라고 옮기는 식), 쉽게 보조비치의 통찰과 통할 수 있다.
내가 모든 번역서를 꼼꼼하게 읽는 건 아니지만(<스트레인지 뷰티> 같이 ‘휴식 같은 책’들은 발장난 치면서 읽는다), ‘일’로 읽는 책들은 ‘시’처럼 느리게 음미하면서 읽는다. (하도 얘기를 들어서인지) 이미 읽은 걸 또 읽는 듯한 기분으로 나는 지젝이 서문과, 벤담(벤섬)의 판옵티콘론을 다루고 있으면서 표제가 된 6장 ‘암흑지점’을 읽었는데, 옥의 티처럼 눈에 띈 오역/오타 두 가지를 지적해둔다.

(1)7쪽에서 ‘(절제되지 않은) 나체의 이와 같은 외양’ ‘이와 같은 나체의 외양’은 ‘this appearance of the (unmutilated) naked body’를 옮긴 것으로 ‘나체의 이 같은 출현’의 오역이다. 이미 6쪽에서 “‘자연적인’ 그 나체가 오로지 데카르트적 근대성의 공간 내부에서 출현했다”고 지젝은 지적하며, 그것을 부연하는 내용에서 나오는 부분인데, 역자는 ‘외양’에만 너무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2)190쪽, 중간에 ‘지각가능한 실재적 신체들’은 ‘perceptible real entities’를 옮긴 것인데, ‘지각가능한 실재적 실체들’로 옮기든가 (앞에서 entity를 ‘존재자’로 옮겼으므로) ‘지각가능한 실재적 존재자들’로 옮겨야 한다. 아마도 오타인 듯싶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이건 궁금한 것이기도 해서) 6쪽의 3행에서 역자가 “유사-여성주의적 주장을 때마침 생각해볼 때”라고 옮긴 대목에서 ‘때마침’은 (지젝이 즐겨쓰는) apropos of의 apropos를 옮긴 것인데, 이건 굳이 옮기지 않아도 되는 단어이다. 이후에 나오는 apropos를 역자가 굳이 옮기지 않은 것처럼. 유독 이 대목만 ‘때마침’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본 것일까?

또, 188쪽. “행동이 사고를 따르는 속도라고 해도, 여기서 실행이 명령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 속도에 비해 가까스로 더 빠를까말까 하다”라는 벤섬 인용문은 “action scarcely follows thought quicker than execution might here be made to follow command.”를 옮긴 것인데, 일반적으로 scarcely나 hardly 같은 부정 부사어는 ‘거의 -않다’나 ‘결코 -않다’란 뜻이다(물론 ‘가까스로 -하다’란 뜻도 있다). 내 짐작에 이 문장이 번역과제로 주어진다면, 열에 아홉은 “사고에 뒤따르는 행동이라도 여기서 명령에 따르는 실행의 속도보다 결코 빠르지 않다.”라는 식으로 옮길 것 같다. 역자의 유머일까?

유머라고 하기엔 좀 썰렁한 대목도 있다. 160쪽에서, “벤섬이 ‘철학의 위대한 개혁가’였음을, 하지만 밀(J. S. Mill)의 견해와는 달리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했음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판옵티콘과 허구이론이다.” 우리말로도 어색한데, 그건 ‘하지만’이란 접속사 때문이다. 원문은 “It is the panopticon and the theory of fictions that prove Bentham was not only 'a great reformer in philosophy' but, contrary to the opinion of J. S. Mill, also 'a great philosopher'."이다. 말 그대로 not only A but (also) B("A뿐만 아니라 B이다”) 구문인데, 거기서 but을 ‘하지만’이라고 굳이 번역하는 건 상당히 특이하다. 단순한 실수일까 싶었는데, 내가 읽은 대목 중 다른 한 곳에서도 이런 번역이 나오기 때문에, 나름대로 역자의 ‘지론’ 혹은 ‘노하우’인 것인지 궁금하다...

 

 

 

 
다섯 번째 책은 지난 연말에 나왔지만, 최근에 눈에 띈 이정호 교수의 <텍스트의 욕망>(서울대출판부, 2003)이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텍스트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읽기’를 표방하는데, 주로 영문학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여, 저자 나름의 정신분석학적 독해를 시도하고 있다. 편저를 포함해 10여권 남짓한 저자의 책들이 대부분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데서 알 수 있듯이(대학출판부 ‘단골저자’이다), 신간은 교양서라기보다는 교양학술서로 분류됨 직하다. 문학을 전공하는 학부 3.4학년이나 대학원생들에게 적합하다는 뜻이다. 저자의 책들을 여러 권 갖고는 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읽지는 못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읽기에의 동기를 충분히 자극한다.

 

 

 



그밖에 미술 관련서들이 최근 1-2년 사이에 강세를 보이면서 국내 필자들의 수준있는 교양(학술)서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나, 나의 안목은 첫눈에 그 질을 판가름할 만한 수준에 있지 않다. 최근에 신준형의 <파노프스키와 뒤러>(시공사)를 구입했는데, 전재국(전두환의 장남)이 운영하는 시공사의 책들도 요즘은 간간이 사는 걸 보면 책에 대한 욕심은 나의 정치의식을 능가한다(한동안 나는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도 사지 않았었다). 존 쿳시의 신간 <철의 시대>(들녘)를 비롯하여 문학 신간들도 여럿 나왔지만, 현재로선 내가 카바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쿳시의 책은 왕은철 교수의 번역으로 이후에도 여러 권이 더 출간됐다. 그의 최신간은 얼마전에 나온 <어둠의 땅>이다).

 

 

 

 

한국소설로는 김종호의 <검은 소설이 보내다>(열림원)에 대해서도 아직 할말이 없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저 인상만을 적자면, 김종호는 ‘베게트과’에 속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영문과 경쟁하고 이인성과 경쟁한다. 그러니까 그의 이름 혹은 개성이 남기 위해서는, 정영문보다, 그리고 이인성보다 잘 써야 하며, 더 멀리가야 한다. 내 관심은 그것이다. 과연, 그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라는 것(누군가 읽으신 분이 답해주시면 좋겠다). 그나저나, 다들 어디쯤 가고 계시는 걸까?..

2004.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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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책은 나올 만큼 나오기 때문에(*이 글은 2004년 2월말에 씌어졌다), 시시콜콜히 한두 마디씩 소개하자면, 일주일에 50권쯤은 카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일을 하는 데에는 순위란 게 필요하다. 나름의 잣대를 가지고, 커트라인을 만들고 개인적인 관심과 흥미에 따라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선정된 책들은 대개 두 부류이다. 내가 읽고 싶은 책과 (소장/출판)가치가 있는 책. 그렇더라도, 나의 기준과 판단은 모든 책에 두루 미치지 않는다. 대개 역사서들이나 소설류들이 많이 빠져나가는데, 이런 분야의 책들이 다른 분들에 의해서 보충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나는 언제나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실현되고 있지는 않다.

내가 내 돈 주고 책을 사서 읽은 건 아마도 중학교때부터인 듯한데, 이후로 서점순례는 내가 돈주고 고른, 혹은 돈주면서 유지하는 '직업' 같은 것이 돼 버렸다. 지방의 소도시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기 때문에, 다행히(?) 살 책이 그리많지 않았지만, 나는 하루에도 여러 곳의 서점을 돌아다니는 일을 수고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대학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고, 2-3년 전부터는 인터넷 검색이 그런 수고를 대행하게 되었다. 그간에 서점이나 서점에 깔린 책들의 풍경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은 새로나온 책의 표지와 질감, 그리고 부피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흥분이다. 그 흥분이 나의 삶을 결정했고, 아직도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이지만...

물론 나의 관심이 물리적인 책에 국한되었다면, 나는 장서가에 만족했을 것이다. 나를 흥분시키는 것은 책이라는 어떤 물리적 부피 안에 있는 영혼, 혹은 살아있는 정신이다. 그런데, 이 영혼이라거나 정신은 책에 들어있는 글자들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글자들 자체이다(정신은 뼈다!). 나는 위대하고 박식하고 영민하고 섬세하며 투쟁적인 영혼들을 사랑하며, 바로 그 글자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다 읽은 책이라도 읽을 만한 책은 버리지 않으며(나는 책을 이용해먹는 걸 혐오하며, 실용서들을 폄하한다), 빌려 읽었더라도 읽을 만한 책은 내돈 주고 다시 산다. 유감스러운 건, 이 책들을 살돈을 벌기 위해 책읽을 시간에 일해야 했다는 것. 그리고 막상 책을 읽으려고 하면, 책살 돈이 없다는 것. 이 궁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얼른 '책읽는 게 돈버는' 직업을 구해야겠다!..

물론 책을 읽는 한편으로 나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쓰고 싶고, 또 쓴다. 그건 순전히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누군가 대신 써주지 않아서 쓰는 책이다(그런 책이 아직 여러 권 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내가 써보고 싶지만 쓸 수 없는 걸 누군가 대신 써준 책이고, 내가 싫어하는 책들은 나보다 못쓴 책이다(나보다 번역을 못한 책들을 나는 혐오한다).

어쩌다 넋두리가 돼 버렸는데, 그래서 어쨌든 나보다 잘 쓴 책, 혹은 잘 쓴 것처럼 보이는 책 몇 권을 더 소개한다(사실, 이런 연재야 혼자 기분내는 거에 불과하지만, 혹 한두 명이라도 정보나 자극을 받을 수 있다면 한 후배 말대로 '쓸데없는 짓'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한번 더 '쓸데없는 짓'과 경쟁해 보기로 한다). 

 

 

 


성석제의 산문집 <즐겁게 춤을 추다가>(강) 그대로 멈춘 것이 아니라, 출간됐다. 우리시대의 이야기꾼이라고 할 만한, 가히 '성구라'라고 할 만한 이 작가는 사실 소설을 쓴다기보다는 이야기를 쓴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그도 친구들 사이에선 이야기를 재미없게 한다고 구박만 받았다는데, 그 친구들이 그를 그나마 인정해준건 '말은 못해도 글로 쓰면 가끔 재미있더라'는 이유 때문이라고(*그가 글로 쓴 책들은 이후에도 <재미나는 인생>, <아름다운 날들>, <소풍> 등이 더 출간됐다).

신간은 한국일보에 연재됐던 '길위의 이야기'나 <씨네21>에 연재됐던 글들을 모은 것이라는데(*작가 이순원도 연재를 얼마전 <길 위에 쓴 편지>란 책으로 묶어냈다), 그의 다른 책들이 그러하듯이 사읽어서 밑지지 않을 만큼의 재미로 충전돼 있다(내가 읽은 몇 토막 글로 판단하건대). 그는 아마도 재미있는 작가, 즐거운 작가로 얼마간/오래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들 수 있을까? 10년쯤 더 살아봐야겠다.

 

 

 



이에 뒤질세라 김영하의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창비)도 나왔다. 문학동네로 등단한 작가가 문지에서 책을 내더니 이번엔 창비다(아주 돈독한 '문학동네'가 아닐 수 없다). 작가 신경숙이 그러했는데, 이건 또 무슨 시스템인지 모르겠다. 성석제보다 8년쯤 아래 연배인 김영하는 40대 작가 성구라와 마찬가지로 30대 작가를 평정할 만한 재간둥이이다.

자신도 고백하듯이 그는 마치 시험 답안지를 쓰듯이 소설을 쓰는데, 압축된 분량일수록 그의 장기가 살아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그는 성석제의 뒤를 이어서 한국일보의 같은 연재를 떠맡은 적이 있다. 그러고보니 <씨네21>에도 연재했군). 그는 매일 오후 6시까지 소설을 쓰고, 저녁엔 맥주를 마시면서 티브이를 본다고 한다. 요컨대, 그는 직업/전업작가인 것이고, 그런 생활은 아마도 정년까지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이 재치있는 작가가 생업을 해결한는 데에서 더 나아가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들 수 있을까? 20년쯤 더 살아보면 알 수 있을까?

참고로, 이미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바 있는 김영하의 단편들 가운데, <사진관 살인사건> 등이 영화화된다고 한다(작가도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그 영화가 <주홍글씨>였다). 사실 그 단편에서도 잘 드러나는 바이지만(화자는 강력반 형사이다), 김영하의 문체는 '조서체'인데, 그건 그의 헌병대 군복무 경력과 관련이 깊다. 우리 작가들 가운데는 해병대 출신이 여럿 있어서 작년엔가는 해병대 출신 문집까지 낸바 있는데, 그런 출신으로 따진다면, 김영하는 헌병대 출신중 가장 잘 나가는 작가이다.

 

 

 



일본 작가 와타야 리사의 2004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황매)이 신속하게 번역돼 나왔다. 나는 만 20세의 작가가 어떻게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수상했는지 신기하고 의아스럽지만(귀여니가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해보라), 외모로 상을 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나름대로 내공이 있을 터이다(*그녀의 책으론 <인스톨>이 더 출간돼 있다). 리뷰로 보건대는 또래의 이야기인 소설의 감각적이고 섬세한 묘사(문체)가 높은 평을 얻은 모양이다. 그건 귀여니가 보고 배울 만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 곧 문체는 그 작가이다. 재미있는 건, 황매라는 출판사가 귀여니의 <그놈은 멋있었다>를 출간한 출판사라는 것. 일찍부터 필자 확보 차원에서 선계약을 했던 출판사로선 횡재한 경우이다(이 출판사의 편집주간이 이산하씨인데, 설마 시인 이산하씨일까?).

 

 

 



네번째 책은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전기 <글로리아 스타이넘>(해냄)이다. '아름다운 페미니스트'라고 반페미니즘적인 부제를 달고 출간된 이 책은, 이 세계적인 여성운동가의 삶과 실천을 충실하게 담고 있다고 한다. 한 서평에선 그녀가 '66세에 다섯살 연하의 남편과 결혼, 할머니들에게 희망을 던져주기도 했다'고 적는다. 페미니스트도 예뻐야 이름이 남는 것인지(일부에선 그녀의 업적이 외모 때문에 가려졌다고 평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녀의 책들은 <여성망명정부에 대한 공상>(현실문화연구) 등 여러 권이 번역돼 있다. 개인적으론 프랑스식 페미니즘(이론)에 더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스타이넘의 책은 읽은바 없지만, 한 사상가/운동가의 전기가 그의 저작들과 함께 소개되는 것은 바람직하다.

 

 

 



끝으로, 이론서 한권. 사실 이반 일리히의 <병원이 병을 만든다>(미토)도 95년판이 박홍규 교수의 재번역으로 나왔지만(이전 것은 76년판), 일리히의 전집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언급하도록 한다(일리히 책 몇 권을 아직 안 읽기도 했고. *일리히의 책은 도서출판 미토에서 계속 출간되고 있다. 그의 최신간은 <그림자 노동>이다).

 

 

 

 

대신에 오랜만에 나온 문학이론서로 꼽을 수 있는 <문학해석학이란 무엇인가>(아카넷)의출간소식을 전한다. 저자는 피터 손디(Peter Szondi). '쏜디'로 더 많이 읽히는 손디는 사실 <현대 드라마의 이론 1880-1950>(탐구당, 1983)의 저자로 더 유명하다. 지난달에 해석학 책을 모으면서 영역본인 <문학해석학 입문 Introduction to literary hermeneutics>(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를 복사한 적이 있는데, 신간은 그 원저를 옮긴 것이다. 이 책의 최대 장점은 분량이 얇다는 것인데(영역본은 140쪽 가량, 국역본은 230쪽 가량이다), 그만한 분량으로 문학해석학에 입문할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입문서는 아니지만, 문학해석학과 관련하여 내가 추천할 수 있는 책은 짱 롱시의 <도와 로고스>(강, 1997)이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2004. 0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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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책들을 다시 들먹이게 된 건(*이 글은 2004년 2월말에 씌어졌다), 순전히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 Blank Slate>(사이언스북스) 때문이다. 무려 900쪽에 이르는 이 신간은 로버트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에 이어지는 책인데, 아침에 어제일자 문화일보를 보고 오늘 서점에서 실물을 확인했다.

 

 

 

 

촘스키만큼 유명한 이 언어학자 혹은 인지과학자의 책들은 <언어 본능>(그린비, 1998)이 번역돼 있지만(*2004년 소소에서 재출간됐다), 더 많이 번역소개되어야 한다. 다니엘 데넷과 함께 '핀커의 모든 책'이라 할 만큼 그의 책들은 수준있는 지식과 교양, 그리고 유익한 문제의식으로 넘쳐난다. 이런 교양서들은 우리를 똑똑하게 만들거나, 적어도 똑똑해진 것 같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러니 읽을 도리밖에(물론 분량에 대해선 할말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예전에 어느 분이 번역중이라는 정보를 알려주신바 있기 때문에 책의 출간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출간소식이 반갑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좀 찜찜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건 책값(40,000원)보다는 책제목 때문이다. 물론 책값이 원서보다 두배 가까이 비싼 건 부담스럽지만(원서의 경우 핀커의 모든 책은 염가본이 나와 있고, 또 중고로는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로크의 'tabula rasa'를 의역했다는 'blank slate'를 꼭 '빈 서판'으로 옮겨야 했는지는 아쉬움이 남는다(제목은 책의 얼굴이거늘). 잘 아는 바대로, '타불라 라사'(혹은 창비식 표기로 '타불라 라싸')는 '백지(상태)'란 뜻이고, 모든 철학교양서 및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다. 그러니 그냥 '타불라 라사'라고 하든가(이게 차라리 '서판'이란 말보다는 친숙하다), '백지(상태)'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서판'이란 말은 글씨를 쓰는 판이 아니라, 글씨를 쓸 종이를 깔아놓기 위한 판을 말한다. 이게 원의에 맞는 것인지도 좀 의심스럽지만, 그럴 경우에라도 '글씨판' 같은 말 대신에, 잘 쓰지 않는 '서판'을 번역어로 선택한 것은 아쉽다. 영한사전에 'slate'는 글쓰기용 '석판'으로 돼 있는데, 이럴 경우 이 '석판'은 '서판'과는 다른 것이다(전자는 글씨를 쓰는 판이고, 후자는 글씨를 쓰기 위한 판이다). 이것이 내가 이 제목에 대해 찜찜해 하는 이유이다. 앞으로 이 책을 거명할 때 매번 '빈 서판'이라고 해야 하다니...

 

 

 



두번째 책은 (다빈치)이다. 네덜란드의 판화가 에셔(1898-1972)의 선집으로 그의 판화작품들과 글, 그리고 해설을 모은 책이다. 사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겨지게 된 계기는 호프스테터의 출세작 <괴델, 에셔, 바흐>(까치글방, 1999) 덕분이 아닌가 싶다(적어도 내 경우엔 그렇다). 호프스태터의 책은 1980년 퓰리처상 수상작인데, 과감한 가설과 흥미로운 논증으로 이루어진 수준급의 교양서이며, 사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의 에셔 파트는 거의 전적으로 이 책에 의존하고 있다(초판에서 진중권은 참고문헌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었다). 어쨌든 그런 에셔의 책으로 이 신간은 국내에서 유일하다.



 

 

 

세번째 책은 베른하르트 타우렉의 <레비나스>(인간사랑)인데, 제목대로 독일에서 나온 레비나스 입문서이다. 나는 이런 류의 독일산 입문서에서 별로 재미를 못봤기 때문에, 이 책의 경우도 적극 추천하는 입장은 아니다. 먼저 읽는 분의 소감을 기다린 연후에야 구입을 하든지 말든지 할 생각이다(*나중에 리뷰를 쓰기도 했지만, 역시나 별로 읽을 만하지 않은 책이었다). 사실 레비나스 입문서로 더 권장할 만한 것은 언젠가도 언급한바 있지만, 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다산글방, 2001)와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이다(*레비나스에 대해서는 '지겨울 만큼' 언급했다!). 참, 내가 재미를 못본 책은 D. 호르스터의 <로티>(인간사랑, 2000)와 키멜레의 <데리다>(서광사, 1996)이다. 번역이 부실한 탓도 있겠지만, 원저도 그다지 신통찮아 보인다.

 

 

 



네번째 책은 서강대 영문과 신경원 교수의 <니체, 데리다, 이리가레의 여성>(소나무)이다(저자는 여러 논문에서 '이리가라이'라고 표기해왔는데, 단행본에서는 불어식으로 '이리가레'라고 표기했다. 국내에서는 '이리가레이'까지 세 가지가 혼용되고 있는데, 좀 통일되었으면 싶다). 이 책을 소개한 건 순전히 그 희귀성 때문이다(*나로선 그 이상의 장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리가레의 책들이 여러 권 소개되고 있지만, 크리스테바에 비추어 그의 지명도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하지만, 라캉 정신분석학을 독톡하게 착취/전유한 그의 페미니즘적 정신분석이론은 오히려 크리스테바보다 더 틈실해 보이며, 페미니즘 이론가들의 필수 코스가 되고 있다. 그래서, 바람직한 건 이런 논문집보다는 그녀의 주저인 <반사경> 같은 책이 번역되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이 두 사람과 함께 프랑스 페미니즘 3인방이라 불리는 엘런 식수의 <메두사의 웃음/출구>(동문선)도 번역돼 나왔다(*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페미니즘과 문학>(문예출판사, 1990)에 식수의 글 일부가 번역소개된 거 같은데, 번역이 아주 부실한 책의 하나이기에 잊혀질 만하고, 이번이 본격적인 소개라고 해야 할 듯싶다. 역자는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책세상)과 푸코의 <정신병과 심리학>(문학동네)을 번역한 바 있는 박혜영 교수. 아마도 크리스테바의, 얼만전에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신간 <검은 태양>(동문선)보다는 번역이 나을 성싶다. 번역은 역시나 불만스럽다. 프로이트의 '사물'(영어로는 Thing)을 아예 불어 '사물'의 음역인 '쇼즈(Chose)'로 번역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혹시나 싶어 영역본까지 있는 이 비싼 책을 산 나 자신이 한심하다...

 



 

 

끝으로, 두 주쯤 전에 나온 <들뢰즈>(이룸). 저자는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한 논문과 저서, 그리고 번역서까지 내고 있는 박성수 교수(*그의 최신간은 <애니메이션 미학>(향연, 2005)이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전공한 저자가 들뢰즈주의자로 전향(?)하게 된 동기야 알 수 없지만, 그런 대로 튼튼한 이론적 베이스를 갖추고 들뢰즈의 예술론을 소개하고 있기에 신뢰할 만하다... 이것이 책을 읽기 전까지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처음 1장을 읽고 좀 실망하게 되었다. 36쪽에 있는 이런 문장을 보라: '그(엡스텡)는 이러한 전적인 타자성, 낯설음을 숭고로 규정하면서, 칸트가 숭고에 대해 보다 높은 능력의 환기를 통해서 쾌감으로 전화되는 조화의 관점을 비판했다.' 뫼비우스처럼 꼬인 이 문장은 어떻게 읽어도 말이 안된다. 정확한 문장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정확한 사고를 할 거라고 기대하기는 무망하다. 이런 실수가 우연적/일회적인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우스개 하나. 동문선의 신간 중에는 건국대 영문과 김종갑 교수의 <문학과 문화 읽기>도 들어있는데(김교수는 에릭 매슈스의 <20세기 프랑스 철학>을 동문선에서 역간한바 있다), 이 번역본 전문 출판사는 책 겉표지에 '김종갑 지음'이 아니라 '김종갑 옮김'이라고 표기해 놓았다. 저자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겠지만, 아직 책을 회수한 기미는 안 보이므로 그대로 참아두기로 한 모양이다. 책이 재판을 찍으면서 수정할 가능성은 희박하므로, 저자는 역서 한권을 더 늘리는 데 만족해야 할 듯. 그런 동문선의 목표는 1년의 100권의 책을 내는 거라고 한다(물론 80% 이상이 번역서). 번역에의 그 '놀라운 열정'을 치하하면서, 번창을 기원한다...

2004. 0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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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에 나온 책으로 가장 꼽을 만한 건(* 이 글은 2004년 2월 하순에 씌어졌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이제이북스)이다. 리쾨르, 가다머에 이어서 한동안 또 헤겔 자료를 수집하는 우연히 겹쳐서 더 눈에 띄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아직 책을 통독하지는 못했지만, 이 신간은 헤겔과 스피노자의 이름이 들어간 책 가운데, 가장 장정이 유려하며 번역 또한 가장 신뢰할 만하다. 물론 방점이 더 들어가야 하는 쪽은 후자이다.

 

 

 

 

역자 진태원씨는 스피노자 전공자로서 데리다에 대해서도 상당한 조예를 갖고 있고, 곧 <법의 힘>을 역간할 예정으로 있다(*물론 <법의 힘>은 2004년 여름에 출간됐고, 이어서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도 작년에 역간됐다). 역자의 '자신감'은 상당한 분량의 해제와 역주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바디우의 <존재의 함성>(이학사) 정도가 이에 대적할 만하다(내가 요즘 한밤중에 몇 페이지씩 들춰보고 있는 책이다). 당분간은 스피노자보다는 데리다 번역에 더 전념할 계획인 것으로 보이는데, 언젠가는 <에티카>의 새로운 번역을 출간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발리바르와 함께 알튀세르 사단을 형성하고 있는 피에르 마슈레의 책들로는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백의, 1994)와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동문선, 2003)가 이미 번역돼 있는바, 두 권의 책은 문학론에서 마슈레의 주저일뿐만 아니라 알튀세르 사단의 문학론을 집약하고 있는 책이다. 특히 1970년대에 나온 전자는 진작에 영역되면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책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국역본은 그리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역자는 보드리야르 전문 번역자로 나서고 있는데, 보드리야르로서는 불운한 일이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론 레닌의 톨스토이론에 대한 비평문과 바르트의 구조주의 비판 등에 흥미를 갖고 있지만, 쥘 베른이나 미셸 투르니에에 관한 글들도 관심이 있는 독자의 흥미를 끌 만하다. 후자는 생각없는 책값 때문에 아직은 구매할 생각이 없는데, 뒤져보니까 영역본인 <문학의 대상>을 내가 이미 갖고 있었다. 나중에 '휴양지'에서나 한번 읽어볼 생각이다(*나중에 읽어본 바에 따르면,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는 무슨 생각으로 번역한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책이다).

 

 

 



마슈레의 책에 이어서 2월의 책으로 꼽을 만한 인문번역서는 부르디외의 <중간예술>(현실문화연구)이다. 지난주에 나온 이 책은 부르디외가 1/3 가량을 쓴, 사진에 관한 공동연구서이다. 부르디외의 책이야 간간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이 책이 유독 반가운 것은 먼저 동문선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단골' 번역자들이 번역하지 않았다는 점 등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진지하게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나 정말 그간의 사정이 그럴 만했다.

역자는 주형일씨이고, 그간에 <문화의 세계화>(한울, 2000), <소리없는 프로파간다>(상형문자, 2002) 등을 우리말로 옮긴바 있다(*이후에 <사회보장의 발명>, <섬광세계> 등이 역저로서 더 등장했다) . 재미있는 책들을 번역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공갈 번역자는 아니다. <중간예술>의 한 장은 이미 오래전에 <사진의 사회적 정의>(눈빛, 1989)로 번역 소개된바 있다(물론 영역본도 당연히 나와 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사진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을 사회학적 시각에서 보완해줄 수 있는 책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세번째 책은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도덕의 정치>(백성)이다. 레이코프는 마크 존슨과 함께 인지언어학 분야를 선도하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그의 저작은 우리말로도 여럿 번역/소개돼 있다. 대표작인 <삶으로서의 은유 Metaphors we live by>(서광사, 1995)를 비롯해서, <인지의미론 Women, fire, and dangerous things>(한국문화사, 1994), <시와 인지 More than cool reason>(한국문화사, 1996), <몸의 철학 Philosophy in the flesh>(박이정, 2002) 등이 그것이다. 아직 제대로 독파한 적은 없지만, 계속 관심을 갖고 그의 책들은 사모았었는데, 이번에 나온 이 '언어학자'의 '정치론'은 가장 뜻밖의 책이다(원저는 'Moral politics'이고,1996년에 출간됐다).

언론인인 역자도 그리고 두서없이 책을 내는 출판사도 모두 생소하지만, 저자의 지명도 때문에 서점에서 이 책을 주저없이 사들었다. 책의 부제는 '보수주의자들은 알고 있는데, 진보주의자들은 모르는 것들'인데, 보수와 진보의 논리를 인지언어학적인 논리에 따라 차별화시켜서 논하고 있다고. 방법론은 좀 단순해 보이지만 한번 시간을 내서 읽어봐야겠다(*알다시피, 최근에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가 출간됐고,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다룬 바 있다).

 

 



 

네번째 책은 권영민 교수의 <정지용 시 126편 다시 읽기>(민음사)이다. 거의 77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지용의 시 거의 전편을 다시 읽어나가는 책이다. 오래전 김학동 교수의 선구적인 <정지용 연구>(민음사, 1997) 이래로 1987년에 해금된 이 대표적 근대시인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축적돼 있는바, 신간은 그간의 성과를 집약하면서 지용시 연구와 해석의 새 단계를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 해설서의 저자가 전공이 한국근대소설인 것도 약간은 이채로운데, 서문을 잠깐 읽어보니까 지용시와의 인연은 학부시절 헌챙방에서 우연히/어렵게 구한 시집 <백록담>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고 있었다(*정지용 관련서들로는 최동호 교수의 <정지용 사전> 등이 필독서이다).

어쨌거나 시를 읽고 음미하는 일의 기본을 되새긴다는 의미에서 찬찬히 따라읽어봄 직하다. 그간에 표나게 지용주의자를 자처했던 비평가로 유종호 선생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번 저서에 대해서 어떻게 평할지 궁금하다. 아울러 다른 시인들에 대한 '자세히 읽기'도 이참에 더욱 활성화되었으면 싶다(나는 시를 여기저기 부분부분 인용하며 쓴 연구논문들보다는 이런 류의 전작 읽기를 더 선호하며 신뢰한다). 참고로, 문외한으로서 시를 한번 읽어볼까 하는 이들에겐 유종호의 <시란 무엇인가>(민음사, 1995)를 일독하고, 바로 이런 류의 책으로 돌진해보기를 권한다.

 

 

 



물론 시쓰기가 그렇듯이 시읽기에도 무슨 정도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이번에 문학동네에서 시 전집이 나온 김춘수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김춘수 전집은 예전에 문장사에서 오규원이 편집/기획하여 낸 데 이어 두번째인데, 시전집만을 놓고 보면 그간에 민음사에서 <김춘수시전집>(1994)이라고 한번 더 나온 적이 있다). 그의 무의미시와 무의미시론은 지용시와는 전혀 딴판이다(한국현대시론은 이 무의미시론과 김수영의 반시론, 딱 둘밖에 없다. 후배들이 분발할 일이다!) 그러니까 시 또한 단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들', 즉 복수로 존재한다고 봄이 옳다. 각자의 길은 각자가 내는 것이다. 참고로, 작년에 나온 이 분야의 성과로는 이남호가 엮은 <박목월 시전집>(민음사, 2003)과 대표시 해설서 <이 쓸쓸한 날에 저 어지러운 구름 그림자>(현대문학, 2003)가 있다.

 

 

 



다섯번째는 사전류이다. <이진영의 동시통역 기초사전>(이대출판부) 같은 것도 요긴해 보이지만,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개념 사전이다. 잘 알다시피, 사전은 그 나라 지식문화의 결산이면서 집약이다. 그런 의미에서 3권까지 출간된 <우리말 철학사전>(지식산업사, 2001-3)은 다소 미흡하더라도 적극 격려되어야 한다(*2005년에 4권이 나왔다).

 

 

 

 

이번에 나온 건 <우리말 철학사전> 같은 공동작업의 소산이 아니라 개인 저작인데, 하나는 박이문의 <사유의 열쇠 - 철학>(산처럼)이고, 다른 하나는 이정우의 강의록인 <개념-뿌리들>(철학아카데미)이다. 박이문 선생의 48번째 책이라는 신간은(나는 그의 책을 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20권이 안될 거 같다), 아마도 저자의 장점이 가장 잘 발휘된 책인 듯싶다. 그 장점이란 건, 사유의 시작단계에서 마치 농부가 밭을 고르듯이, 개념들을 잘 정돈해 줌으로써 옆길로 새거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걸 미리 방비해주는 것이다. 대학 신입생들에게 권할 만하지만, 그들이 이런 책의 재미를 음미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김성곤 교수의 <사유의 열쇠 - 문학>은 올초에 나왔다).

이정우의 신간 역시 서양 철학의 주요 개념들을 뿌리(그리스철학)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음미해본다(*2004년에 2권이 나왔다). 사실 하이데거-가다머 라인의 철학이란 그러한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기' 이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이런 작업의 의의는 강조되어야 한다. 이런 책들과 더불어서 사유의 기초가 되는 이 개념들과 그 번역의 문제에까지 일반의 관심이 확대/심화되기를 기대한다...

기타, 일본근대문학과 관련된 무게있는 저작들이 두어 권 더 나왔지만, 당장의 관심을 벗어나기에 제외한다. 전공인 분들의 '열렬한'소개가 더 나을 거 같기에...

2004. 0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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