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 논쟁이 가장 활발한 곳은 영국 같은데(런던의 서점에서 한 서가 전체가 무신론 코너였다) 도킨스와 히친스 같은 무신론의 맹렬한 사제들에 맞서온 존 레녹스의 책을 구입해봤다. ‘종교를 제거하려는 시도의 역설‘을 지적한 대목은 깨달음을 준다. 무엇이 진리인가는 많은 얘기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 자녀의 수를 비교해보자는 것. 종교의 진화적 우위성 논변에 해당하겠다...

신무신론자들이 신앙을 말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진화론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그러나 진화는 그들에게 협조적이지 않은 것 같다. 선데이 타임즈는 과학 편집인 존 리크가 쓴 "자연은 ‘신앙심이 있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은 죽어가고 있는 종족이다"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는 독일 예나 대학교의 마이클 블룸이 이끈 「종교성의 번식상 우위」(The Reproductive Advantage of Religiosity)라는 제목의 82개 국가에 대한 연구를 보도하는데, 이 연구는 최소 주 1회 예배하는 부부는 25명의 자녀를 둔 반면, 전혀 예배하지 않는 부부의 자녀는 1.7명으로 이는 자기들을 대체하기에도 불충분한 숫자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리크는 종교는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돈과 건강 리스크 측면에서 커다란 비용을 부과하는 정신적 바이러스와 같다는 도킨스의 주장과, 이와 반대로 진화는 신자들을 매우 선호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교적인 경향이 우리의유전자에 내면화되게 되었다는 블룸의 연구를 대조한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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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1784) 5막에 나오는 피가로의 독백이다. 보마르셰의 이런 작품에 와서 소위 ‘시민비극‘(부르주아 비극)은 ‘비극‘이란 딱지를 떼고 시민극으로 재탄생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바야흐로 프랑스대혁명 전야의 분위기를 <피가로의 결혼>은 전달한다...


귀족, 재산, 혈통, 지위, 뭐 이런 것들로 기고만장해진 거지! 그런 막대한 재산을 쌓는 데 당신이 무슨 노력을 했단 말입니까? 세상에 태어나는 수고야 했겠지만, 그 이상은 하나도 한 게 없죠. 되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위인 아닙니까. 반면, 나로 말하면, 젠장! 낯모를 사람들 속에 버려져서 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갖은수완과 술수를 부려야 했단 말입니다. 백 년 전 스페인 전역을 다스리는 데도 이만한 재주가 필요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런 나랑 한판 붙어보시겠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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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에 참고하려 비꽃에서 나온 <어려운 시절>도 구입했다(아직 2016년에 나온 초판 1쇄). 속지의 디킨스 프로필이 잘못돼 있어 확인해보니 부록(작품해설)에도 사망연도가 오기돼 있다. 디킨스는 1870년 6월 9일 사망. 1868년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수수께끼다. 디킨스 선집을 번역하고 출간하면서 작가의 생몰연대도 엉뚱하게 적다니. 사망의 정황까지 적으면서!..

1868년 6월 8일, 오십구 세 나이로 저택에서 소설 원고 ‘에드윈 드루드의 수수께끼‘를 온종일 쓰고 저녁 식사를 하다가 쓰러져 다음 날 세상을 떠난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시인의 묘역‘에 묻혀 묘비에 다음 같은글을 새긴다.
"가난하고 고통받고 박해받는 사람을 동정했다. 이 사람이 죽으면서 세상은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를 잃었다."
- 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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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모레티의 <멀리서 읽기>는 진작에 원서를 구입하고 번역본을 기다리던 책이다. 자세히 읽기(close reading)를 염두에 두면서 모레티는 멀리서 읽기(distant reading)를 제안하고 그 시범을 보인다. 세계문학과 세계문학사가 어떻게 서술될지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비껴갈 수 없는 책이다. 덕분에 나도 훨씬 용이하게 유럽문학사, 더 나아가 세계문학사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나의 방법론은 멀리서 읽으면서 몇 작품은 자세히 보는 식이다). 자세히 읽을 필독 작품의 목록을 마련해봐야겠다...

1991년 봄 카를로 긴즈부르그 Carlo Ginzisurg는 나에게 에이나우디Einaudi의 『유럽사 Storia d‘Eauropa』제1권에 들어갈 유럽 문학에 관한 글을 써줄 것으로 청탁했다. 나는 한동안 유럽 문학에 관해, 특히 역사적으로 독특한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온 유럽 문학의 능력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무렵 막 읽기를 끝낸 한 권의 책에서 나는 이 글을 위한 이론적 틀을 발견했다. 그것은 에른스트 마이어 Ernst Mayr의 『분류학과 종의 기원 Systematics and the Origin of Species」 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이소적 종 분화allopatric speciation‘ 개념은 특정 종이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종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나는 문학 형식을 종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여 유럽 지리학이 낳은 형태학적 변이들, 즉 17세기 비극의 분화, 18세기 소설의 발생, 19세기와 20세기 문학장literary field의 집중과 분산 등을 그려보았다. 유럽 문학‘이라는 단수형 개념은 서로 구분되면서 긴밀하게 연관된 민족문화들의 군도archipelago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이 군도에서는 문체와 이야기가 신속하게, 그리고 빈번하게 이동하며 온갖 종류의 변형들을 겪는다. 창조성은 그것을 인위적이지 않고 거의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설명을 찾아낸 데 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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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오츠가 1999년에 붙인 발문의 한 대목이다. 소설 <그들>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사르트르의 질문인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와 관련해서도 매우 유익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1969년에 이 소설이 발간된 뒤, 이 소설의 독자들 중에는 ‘그들‘이 거의 없었다. 계급으로서 ‘그들‘은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긴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아들딸이었다. 나는 나의 영적인 친척이라고 생각하는 이사람들을 여행하면서 자주 만난다. 나와 이 사람들은 가족들 중에서 처음으로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미국의 거대한 전문 직업인계급에 진입했으며, 이에 대해 깊은 양면적 감정을 자주 느꼈다. 우리를 구분해주는 것은 부모가 우리를 대견하게 생각하는지, 아니면 우리의 상승이 부모에게 상처를 주고 그들을 왜소하게 만드는지 여부뿐이다. ‘그들‘이었던 우리가 제대로 번창하는 미국인인 ‘우리‘로 자신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사실은 20세기 미국의 사회사가 지닌 아이러니다. - P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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