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책 삼인 시집선 1
유진목 지음 / 삼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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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참으로 망개떡을 먹으며 오늘 배송된 유진목의 <연애의 책>(삼인, 2016)을 읽는다. 쭉 훑으며 마음에 드는 시를 먼저 찾는 게 나의 시집 독법이다. 그렇게 한두 편이라도 일단 건지면 '본전'은 된다. 이건 독법이 아니라 셈법인가. 여하튼 '미선나무'란 시에서 눈길이 멎었고, 나는 이걸로 본전은 챙겼다고 생각하면서 여기에 옮겨놓기로 했다. 그 사이에 망개떡은 사라지고 망개잎만 몇 장 그릇에 남았다. 시집의 제목은 '연애의 책' 대신에 '사후의 시'여도 무방했겠다 싶다. '미선나무'도 그 편을 들어주지 않을까. 미선나무는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핀다는군...

 

미선나무 기슭에서 나는 벌거벗은 채로 발견되었다

겨울이었고
차라리 땅에 묻히기를 바랐다

이걸 알면 슬퍼할 사람을 떠올렸다

맨 처음 너가 울었다

그러면 너를 안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살아 있어서 많이 힘들지

너는 더 크게 울고

지금은 미선나무를 헤치고 바람이 분다

해가 지고 멀리 불빛이 보인다

가보면 사람들이 문을 닫고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무섭다고 그랬다

그런데 사실은 그럴 줄 알았다고도 했다
예감이란 게 있었다고

그들은 틀린 적이 별로 없다고 한다

나는 죽어서도 사람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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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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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소설'이라는 부제가 붙은 <흰>(난다, 2016)을 읽는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언니에 대한 애도의 글들이다(한강 문학의 밑자리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애도'라는 장르가 낯설겠다고 여겨서였는지 '소설'이라고 붙였다. 소설 아닌 소설의 '작별' 장.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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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아직 그 달이다 창비시선 398
이상국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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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봄이 되어도 마당의 철쭉이 피지 않는다

집을 팔고 이사 가자는 말을 들은 모양이다

꽃의 그늘을 내가 흔든 것이다

 

몸이 있는 것들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아내는 집이 좁으니 책을 버리자고 한다

그동안 집을 너무 믿었다

그들은 내가 갈 데가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옛 시인들은 아내를 버렸을 것이나

저 문자들의 경멸을 뒤집어쓰며

나는 나의 그늘을 버렸다

 

나도 한때는 꽃그늘에 앉아

서정시를 쓰기도 했으나

나의 시에는 먼 데가 없었다

 

이 집에 너무 오래 살았다

머잖아 집은 나를 모른다 할 것이고

철쭉은 꽃을 버리더라도 마당을 지킬 것이다

 

언젠가 모르는 집에 말을 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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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의 산수 민음의 시 222
강정 지음 / 민음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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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 속에는 광부가 산다

죽음 속에 삶이 살고

증오 속에 사랑이 살듯

오래전 무너져 내려 석탄도 금도 없는 폐광 속에는

검은 공기만 마시며 더 깊은 어둠이 되어 가는 광부가 산다

광부니까,

빛도 어둠도 분간 못하는 장님이 되었으니까,

무엇 하나 캐낼 것도 살아남을 것도 없는 어둠과 함께

오로지 자신의 몸만 스스로 썩히며 폐광 속에는 산다

(...)

캐낼 아무런 보석이 없어도 폐광 속에서만 산다

폐광에서 혼자 죽으려는 게  아니라,

이미 스스로 폐광이 되어

마음 안의 모든 보석들을 지상으로 퍼 올리고

그러고도 남아 있는 삶이 더 깊은 어둠 속에서

여전히 용을 쓰며 견디고 있다는 게 스스로 대견스러워서가 아니라,

오로지 광부니까 폐광 속에 산다

무너졌든 번창하든 광부는 광 속에 살아야 한다는 몽매의 신념 따위 없다

쥐와 두더지 들을 다스려 지하의 왕이 되겠다는 야망도 없다

광부는 광부니까

폐광 속에서 산다

삶이 결국 죽음을 부르고

사랑이 마침내 증오의 싹으로 자라

한순간의 빛을 어둠의 칼날로 바꾸듯

광부는 광부니까

모든 게 없어지고 무너져 내린 폐광에 산다

(...)

 

-'광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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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브라더
코리 닥터로우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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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 정국에서 가장 화제가 된 책은 코리 닥터로우의 <리틀 브라더>(아작, 2016)다. 제목만 보고 주목하지 않았던 이 책을 들고와서 국회에서도 낭독된 '한국어판 서문'을 읽었다. '리틀 브라더'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를 염두에 둔 제목이란 걸 비로소 알았다. 이종회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는 추천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지난 여름 국가정보원이 휴대폰을 원격으로 통제할 수 있는 스파이웨어를 구매해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전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감시 사회는 더 이상 소설이 아니다. <리틀 브라더>는 태평양 너머 미국의 픽션이 아니라, 2015년 대한민국의 논픽션이다.

물론 2016년에도 진행중인 논픽션이다. 더불어 섬뜩하게도 우리에게 최악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서문 일부에 밑줄을 그어놓는다...

안녕하세요, 한국 독자 여러분.
서구에 사는 저 같은 사람들에게 한국은 100메가 광케이블과 PC방, 프로게이머가 넘치는 약속의 땅입니다. 한국은 인터넷으로 연결된 미래를 서구보다 앞서 나갔지만, 그와 동시에 디스토피아적인 감시 역시 선두에 서 있습니다.

2015년 `해킹팀`이라는 악명 높은 이탈리아 사이버무기 판매업체가 해킹을 당해 업체의 이메일과 고객파일이 인터넷에 공개됐습니다. 공개된 파일을 통해 이 업체가 그동안 오랜 기간 잔혹하게 인권 침해를 해온 에티오피아 같은 정부들에게 감시도구를 제공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업체의 최상위 고객의 명단에는 놀랍게도 `한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정부가 `해킹팀`에서 감시용 도구를 구입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어쩌면 여러분은 영화에서 스파이들이 사용하는 정교한 접시형 마이크나 싸구려 잡지의 광고에 나오는 바늘구멍만한 몰래카메라처럼 고도로 전문화된 장비를 상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이버 감시용 도구는 그렇게 멋진 장비가 아닙니다. 그건 착각입니다.

설령 여러분이 정부가 어떤 사람들을 훔쳐보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소프타웨어의 약점을 이용해서 `나쁜 녀석들`을 훔쳐보는 것은 마이크를 몰래 설치해서 도청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한국의 국정원과 미국의 국가안전국(NSA), 영국의 정보통신본부는 자신들이 마치 첩보영화에 나오는 스파이 대 스파이 전쟁을 벌이는 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들이 사용하는 모든 무기는 컴퓨터 안에 살고, 컴퓨터로 몸을 채우고 있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의지하는 자료와 통신, 그리고 우리의 삶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을 악화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컴퓨터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지난 시대의 거친 꿈을 넘어 다른 세계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들은 컴퓨터를 수수께끼투성이의 취약한 블랙박스로 바꿔놓고 우리에게 죄를 물으며 인터넷 접속을 검열하면서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정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책입니다. 이 책은 컴퓨터가 우리를 어떻게 감시할 수 있는지 경고하는 책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컴퓨터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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