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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의 하나는 로베르 플라실리에르의 <고대 그리스의 일상생활>(우물이있는집, 2004)이다. '사라진 책들'이란 카테고리에 올려놓은 걸로 짐작하겠지만 절판도서다(알라딘엔 '품절'로 뜨지만 짐작엔 그렇다).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고, 헬레니즘 관련서들을 찾다가 눈에 띈 것인데, 내가 모르는 책의 8할이 그렇듯이, 2004년에 나왔다(나는 러시아 체류중이었다).

 

 

저자는 파리대학에서 그리스어문학 학과장과 고등사범 교장을 지낸 걸로 돼 있다. 정확하게 원제는 '페리클레스 시대 그리스의 일상생활'이어서 번역본 부제가 '페리클레스 시대'다. 1959년에 원서가 나왔지만 목차를 보니 내용을 꽤 알차게 구성돼 있다. 비슷한 컨셉의 책이 드문 듯싶어 소장하려고 했지만 책은 중고로도 나와 있지 않다.

 

찾아보니 출판사에선 몇권을 시리즈로 냈다. 가장 먼저 나온 건 제롬 카르코피노의 <고대 로마의 일상생활>(우물이있는집, 2003), 그리고 자닌 오브와예의 <고대 인도의 일상생활>(우물이있는집, 2004)가 마지막으로 나왔다. 표지로 보아 <고대 로마의 일상생활>은 단발성으로 나온 것이고, <고대 그리스의 일상생활>부터 '시리즈' 컨셉으로 간 듯싶다. 반응이 없었는지, 지금은 <고대 인도의 일생생활>만 절판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판매량은 저조하다).

 

 

 

그리스에 관한 프랑스 학자의 책으론 자클린 드 로미이의 <왜 그리스인가?>(후마니타스, 2010)가 떠오른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그리스 고전한 담당 교수였다.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이레, 2008)의 저자 피에르 아도도 빼놓을 수 없는데, 역시나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를 역임했다. 프랑스에선 나름 최고 석학으로 인정받은 학자들이다. 이 책들은 아직 살아있다.

 

 

 

<폴리테이아>(아르케, 2000)의 저자 자클린 보르드나 <고대 그리스의 시민>(동문선, 2002)의 저자 클로드 모세도 프랑스 학자인 듯싶지만 책을 안 갖고 있어서 구체적인 저자 정보는 모르겠다. <폴리테이아>는 절판된 상태이고, <고대 그리스의 시민>이나마 챙겨놓아야겠다.

 

 

 

고대 그리스, 하니까 또 생각나는 학자는 모시스 핀리(모제스 핀레이)다. <고대 세계의 정치>(동문선, 2003)의 저자인데(번역이 좋지 않다), 나머지 책들이 대개 절판본이다. 특히 <고대 노예제도와 모던 이데올로기>(민음사, 1998)는 여러 번 구하려고 애썼던 책이다. 제목에 '고대'가 들어간다고 해서 반드시 구하기 어려워야 할 필요는 없을 텐데, 현실은 일단 그렇다. 눈 밝은 독자들이 많아지거나 출판사가 계산에 어두워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인지. 막상 구하려고 하니 안 보이는 책들이 있어서 몇자 적었다... 

 

12. 02. 07.

 

 

P.S. 프랑스 학자 얘기가 나온 김에 중국학자 앙리 마스페로도 언급하고 싶다. <고대중국>(까치글방, 1995)이 절판이어서 못 구하고 있는데, <도교>(까치글방, 1999)와 <불사의 추구>(동방미디어, 2000)까지 모두 절판된 상태다. <도쿄>만 하더라도 예전에 서점을 오가며 보던 책인데, 이제서야 관심을 갖게 되는 건 모슨 조화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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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배송받은 원서 가운데 하나는 C. B. 맥퍼슨의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옥스포드대출판부, 2011)이다. 원래는 1962년에 출간된 책인데, 반세기가 지나서도 다시 출간된 걸 보면 고전으로서의 의의를 인정받는 듯싶다. 페이퍼백치곤 좀 비싼 게 흠이지만... 

 

 

맥퍼슨의 책은 두 종의 번역본이 나왔었지만 현재 모두 절판된 상태다. 먼저 나온 것은 황경식, 강유원 공역의 <홉스와 로크의 사회철학>(박영사, 1990)이다(존 롤스를 전공한 황경식 교수는 서울대 이전에 동국대에 재직한 적이 있고, 강유원 씨는 대학원생이었다. 역자 서문을 보면, 이 책은 대학원 강독이 계기가 돼 번역됐다). 원제인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은 부제로 붙어 있다. 원서의 부제가 '홉스에서 로크까지'인 걸 고려하면 바뀐 제목이 이상한 건 아니다. 하지만 17세기 영국의 정치이론을 다루면서 책은 로크와 홉스의 정치이론 외에 '수평파'와 '해링턴'에게도 한 장씩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이듬해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인간사랑, 1991)이라는 원래 제목으로도 나왔다. 당시엔 저작권 같은 게 없을 때여서 두 종의 책이 같이 서점에 깔릴 수 있었다.

 

나는 <홉스와 로크의 사회철학>을 갖고 있지만, 따로 보관중인 책이어서 엊그제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원서를 이번에 구한 김에 읽어보려는 생각에서다. 사실은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책이지만 원서와 함께 읽어보려고 미뤄둔 참이었는데, 마침 작년에 원서가 재출간된 걸 얼마전에 알았다.

 

단행본으론 60년대초에 나왔지만, 맥퍼슨이 자신의 주장을 개진한 건 50년대 초부터이다. 그 주장의 핵심은 17세기부터 19세기 영국 정치사상의 저변에 흐르는, 즉 여러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홉스부터 로크까지를 관통하는 통일적인 아이디어가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자유민주주의 이론의 뿌리라고 말한다. 만약 현대의 자유민주주의에 어떤 난점이 있다면, 그 기원은 '소유적 개인주의'에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동시에 그러한 사상이 복잡해진 20세기(즉 오늘날)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 즉 자유주의적 전통을 오늘의 현실에 맞게 계승하기 위해서는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가정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교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개인적으론 이 책을 홉스와 로크를 읽기 위한 가이드북으로 선택했다. 정치의 해를 맞아 몇권의 정치철학 고전을 읽어볼 계획을 하고 있는데,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나남출판, 2008)도 그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존 로크의 <통치론>(까치글방, 1996) 등도 보탤 수 있을 것이다.

 

 

 

저명한 러시아사가인 리처드 파이프스의 <소유와 자유>(나남출판, 2008)도 그런 맥락에서 읽어보려는 책이다(너무 오랫동안 책장에 꽂아두기만 했다). 덧붙여 국내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어떤 전제하에 그런 얘기를 하는지 살펴보는 데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설사 한국식 자유민주주의란 따로 있는 거라 할지라도 '본토'의 사상을 무시할 수는 없을 터이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폴리테이아, 2011)를 깊이 읽을 때도 필요하겠다 싶었다. 여하튼 이런 다양한 용도로 활용될 수 있는 책이기에, 재출간되면 좋겠다...

 

12. 0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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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절판됐기에 지난주에 중고로 구입한 책의 하나는 이한우의 <우리의 학맥과 학풍>(문예출판사, 1995)이다. 구입하고 보니 아주 새책이었는데, 저자가 한 선배기자에게 준 증정본이었다. 책을 열어본 흔적도 없는 걸로 보아 곱게 책장에 모셔두었다가 내놓은 듯싶다. 오래전 대학원시절에 서점에서 좀 읽어보다가 책값이 비싸 구입은 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정가 8,000원이면 지금 체감으로 20,000원은 되지 않을까. 대학원생의 호주머니가 그리 넉넉지 않았던 시절이다.

 

 

머리말에 따르면 책은 92년 말부터 94년 7월까지 문화일보에 연재한 '한국의 학맥-학풍-학파' 시리즈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저자는 94년 12월부터 조선일보에 몸담고 있다). 1961년생이니가 30대 초반 기자의 패기와 호기의 산물이었다. 학부에선 영문학을, 대학원에선 철학을 전공하여 박사과정까지 마친 특이한 이력 때문에 저자는 본격 학술기사를 쓸 수 있었다(저자가 옮긴 책으로 리차드 팔머의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조지아 윈키의 <가다머> 등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제 어느덧 20년 전 얘기니 '우리의 학맥과 학풍'이 그간에 얼마나 달라졌는지, 좀 나아졌는지 다시 점검해보는 책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에 일요일 아침에 이 책 얘기를 꺼낸다.

 

한데 쉽지는 않을 듯싶다. 20년 전보다 분야도 많아지고 규모도 훨씬 커진 학계를 한 사람이 총체적으로 다룬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학계 내부에서 이런 반성적 점검이 이루어지길 기대할 수도 없다. 보통 자화자찬으로 끝날 테니까. 저자가 20년 전에 취재를 하기 위해 학자들을 만나면서 느낀 소감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 학계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당시 상황이지만 저자의 진단으론 이런 이유들이 끼어든다.

여기에는 각종 문제들이 뒤얽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우리나라에는 힘들여 학문적 업적을 남겨도 누구 하나 제대로 평가해 주는 매체가 없다는 것이다.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학회지에서도 그런 기능을 전혀 못하고 있다. 동시에 학문적 열정은 고사하고 별다른 연구성과가 없어도 우리 학계는 대충 지낼 수 있게 돼 있다. 뛰어난 학자든 사이비 학자든 회갑이나 정년퇴직 때 '기념논문집' 하나씩 받기는 매한가지다. 옥석을 가리는 일이 시급한 것이다.

당시엔 시급하다고는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듯싶다. 제도로서의 학계는 사회와 무관하게 돌아가고 그에 대한 문제제기도 별반 없어 보이니까. 교수신문 정도가 통로 역할을 해주는데, 그걸 구독하는 일반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현실에 대해 새삼스런 유감을 표할 일은 아니고, 나의 관심은 '부록' 정도에 머문다. 예전에 서점에서 읽을 때도 통독한 건 부록이었다. 번역과 표절에 대한 고발을 담고 있는데, 지금 다시 읽어도 아주 신랄하다.

 

저자는 "이 글은 한국 학계의 실상을 실례로 들어 고발한 내용으로, 지은이가 <신동아> 1993년 12월호, 1994년 2월호에 각각 발표했던 글들을 전재한 것임."이라고 설명해놓았다. 거의 '나꼼수' 수준의 폭로여서(실명 대신에 이니셜로 거명하고는 있지만 거론된 책들을 검색하면 저자나 번역자를 알 수 있는 수준이다) 당시에도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싶다. 번역에 관한 글 제목은 '번역, 제발 제대로 합시다!'이고 표절에 관한 글은 '베끼기에서 시각 도용까지, 한국 학계의 표절 백태(百態)'이다. 기성의 교수들에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테지만 지금 대학원생이나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부생이라면 일독해보면 좋겠다. '우리의 학풍과 학맥'에 대해서.

 

어제 읽다가 웃음을 터뜨린 에피소드 하나. 학계에 표절에 관대한 전통이 생긴 건 50-60년대 표절이 마구잡이로 이루어지면서부터라는데, 서울대 사대 교수로 재직했던 K교수는 평소의 이런 말을 자기 말처럼 자주 들먹였다고 한다. "철학자는 지금까지 세계를 해석만 해왔다. 철학자의 본령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의 말이다. 하지만 한동안 우리 지식인 사회에서는 그 구절을 인용할 때 출처를 K교수로 밝혔다고. "다소 과장된 얘기지만 50-60년대 우리 학계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쓴웃음을 짓게 하지만, 그렇다고 웃음을 터뜨릴 만한 대목은 아니다. 나를 웃게 만든 건, 오타이다. 마르크스 인용 구절이 실제 책에는 이렇게 돼 있다. "철학자는 지금까지 세계를 해석만 해왔다. 철학자의 본령은 세계를 번역하는 것이다." '변혁'이 '번역'으로 바뀌어 있는 것. K교수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면, 표절이 아니라 패러디, 나름 독창적인 문제의식을 담은 패러디다. 하지만 짐작엔 오타로 보인다. 오타라도 매우 교훈적이고 계발적이어서, 의도된 오타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렇다, "철학자의 본령은 세계를 번역하는 것이다!"

 

그렇게 달라진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우리 학계는 '본령'에서 좀 벗어나 있다. 세계를 번역하는 일에도, 서양고전이나 문제적인 저작을 번역하는 일에도 굼뜨기 때문이다. '2013년 체제'가 되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을까. 좀 나아질 수 있을까. 절반의 의심을 섞어서 기대해본다...

 

12. 01. 29.

 

 

 

P.S. <우리 학맥과 학풍>을 떠올린 건 지난 연말쯤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의 회고록 <역경의 행운>(다므기, 2011)을 읽었기 때문이다(저자는 한국 사회사가 주전공 분야다). 완독한 건 아니고 몇 대목을 읽었는데(특히 5부 '상식을 초월한 학계의 부조리: 내가 겪은 역경과 고난'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기억에 남는 인물'을 꼽은 2부에서 '<우리의 학맥과 학풍>의 저자 이한우 논설위원'도 거명하고 있다. 책의 요지를 간추리고 있는데, 먼저 책소개.

이한우 논설위원은 그의 저서 <우리의 학맥과 학풍>(문예출판사, 1995)에서 자신의 학문 이력을 먼저 소개한 후 동양철학, 서양철학,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법학 등 6개 학문 분야가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연구됐으며 그 성과와 반성할 점과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는 학계에 몸담고 있지 않으므로 공평하고 객관적인 관찰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학계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고 할 수 있겠다.(53쪽)

저자는 말미에서 이 책 이후에 학계의 실상과 성과를 점검하고 비판한 책이 더 나오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지적도 보탠다. 동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는 동서양의 책들을 많이 읽었으며 박학할 뿐 아니라 학계에 몸담은 사람은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도저히 할 수 없는 객관적이고도 정확한 학문적 평론을 하였는데, 가까운 장래에 이러한 평론은 나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어 안타깝다. 그가 말했듯이, 그가 1990년대 초까지 우리 학계의 연구 성과를 비판한 이후 2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의 연구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그의 비판은 여전히 타당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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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책들'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어놓고 곧 후회했다. 아니 난감했다. 가끔씩 실종된다면 모르겠지만, 이건 부지기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책도 절판이군', '이 책도 사라졌네', '이것도 곧 절판되겠구만', 속으로 중얼거린다. 가끔씩 쓸 거리가 생기는 게 아니라 매일같이 '청원'에 시달려야 한다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온갖 변명거리를 찾아서(숙달된 일인지라 어렵진 않지만) 왜 당장은 페이퍼를 쓸 수 없는지 해명해야 한다. 대개는 두 종류다. '알잖아, 내가 그럴 기분이 아니거든.', '잊었어? 그럴 처지가 아니란 걸?'

 

 

 

그러다 딱 걸렸다 싶은 책이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책세상, 2000)이다. 오늘 아침에 보니 페렉의 신작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문학동네, 2012)이 출간됐고(당일배송이 아니어서 일단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어제 펼친 책 찰스 파스테르나크(생화학자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조카다)의 <호모 쿠아에렌스>(길, 2005)의 서문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기 때문이다.

별개의 과정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고, 전체 유기체가 그 많은 환경이나 마주치는 동종, 이종 생물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또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소설 <삶, 사용자의 매뉴얼(Life, A User's Manual)>(1988)에서 조르주 페렉은 지나치게 환원주의적인 과학의 맹점을 꼬집는 일종의 은유로 조각 그림 맞추기를 언급하고 있다. 퍼즐 한 조각을 아무리 살펴본들 전체 형태에 대한 실마리를 얻지는 못한다. 부분의 역할은 오로지 전체 형체를 알고 난 후에만 인식될 수 있다.

여기서 필시 <삶, 사용자의 매뉴얼>이라고 옮겨진 책(영역된 책)이 <인생사용법>일 터이다. 찾아보니 표지가 멋지다. 2009년에 나온 2판이다.

 

 

그래서 <인생사용법>을 영역본과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급하게 들었다. 사실 <인생사용법>은 소장도서이긴 하지만 읽지 않은 책이어서(두께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아는 체하기도 멋쩍다. 그 멋쩍음을 해소할 좋은 기회이지 싶지만, 문제는 책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른다는 것. '사용'을 좀 해보려고 하니 '인생'이 보이지 않는 격이라고 할까. 알라딘에선 '품절'로 뜨는 이 책이 다시 출간될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애서가들에게 '머스트해브 아이템'이란 사실만은 적시해둔다(읽는 건 나중 문제다).

 

 

조르주 페렉이란 이름을 떠올린 계기는 며칠 전에도 있었다. 최윤의 새 장편소설 <오릭맨스티>(자음과모음, 2011) 때문이다. 제목만 봐서는 번역소설과 분간이 안 되는데, 문장도 그렇다. 작가의 이름을 지우고 책장을 펼친 독자라면 '파리 바케트'풍의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계산이 맞지 않아 골치를 썩였던 하루의 근무, 퇴근 시간 버스 안의 격투를 치르며 겨우 유지되는 육체의 균형, 이름없는 이 카페까지 걸어오는 동안의 굽 높은 구두의 시련...(12쪽)

작가가 불문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데, 특별히 머릿속에서 호명되는 작가가 페렉이다. 그건 <사물들>(세계사, 1996)이 남긴 인상 때문인데, 읽은 지가 하도 오래 됐으니 주관적으로 각색되었을 수도 있다. 다른 프랑스 작가들을 더 많이 읽었다면 단서도 늘어났겠지만, 페렉만 읽었으니 페렉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뭔가 친근하다는 느낌만은 지울 수 없다. 확인해보려면 새로 번역돼 나온 <사물들>(펭귄클래식코리아, 2011)을 손에 드는 수밖에. 이 <사물들>의 영어판 표지는 이렇다. (펭귄클래식코리아, 2011)과 짝이다.

 

 

페렉의 작품은 그밖에 <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열린책들, 2010)이 더 소개돼 있다. 그의 많은 작품이 '실험적인' 것처럼 이 역시 그렇다. 제목에서부터 도발적이다.

 

 

사라진 책 한 권을 빌미로 조르주 페렉을 일람한 기분이 든다. 정리해보자. 당장 손에 든다면 <사물들>, 그리고 좀 티를 내고자 한다면 <인생사용법>이라는 것. 나는 잠시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 들어가볼 참이다...

 

12. 01. 07.

 

 

 

P.S. 사실 <인생사용법>을 떠올린 계기는 하나 더 있다. 엊그제 데리다의 마지막 인터뷰 <최종적으로 사는 법을 배우기>를 구해서이다. 책을 받아보니 '마지막 인터뷰' 시리즈의 하나인데, 커트 보네커트와 로베르토 볼라뇨의 인터뷰도 나와 있다. 언젠가 '마지막 시간들'이 우리에게도 도래할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가? 우리가 알아야 할 인생사용법이 따로 있는가?..  

 

 

 

P.S.2. <인생 사용법>(문학동네, 2012)이 '인문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의 하나로 재출간됐다. <잠자는 남자>(문학동네, 2013)도 연이어 나왔다. 페렉의 서가도 자못 채워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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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여러 기획독서를 구상하다가 마이페이퍼의 카테고리를 하나 늘리기로 하고 '사라진 책들'이라 이름붙인다. '오래된 새책'이 절판됐다가 다시 나온 책들을 위한 카테고리라면 그와 짝을 이루는 '사라진 책들'은 절판돼 가는 책, 혹은 절판됐지만 감감 무소식인 책들을 위한 카테고리다. 사실 해마다 많은 책들이 쏟아지는 이면에서 소리없이 사라지는 책들도 드물지 않다. 그런 게 출판생태계라면 할 수 없지만, 의미있는 책들이 그렇게 묻힌다면 아쉬운 일이다. 그걸 좀 더디게 해보자는 게 의도다. 간혹 사라진 책들에 대한 관심을 부추겨서 되살리는 방도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많이 기대할 수는 없지만 포부는 그렇다.

 

 

제일 먼저 소개할 책은 '고대사회의 이상과 질서'란 부제의 <의례 1,2,3>(쳥계, 2000)이다. 세 권 가운데 2,3권이 간혹 남아 있지만, 어차피 1권이 절판된 상태라 짝을 맞추기 어렵다. 2000년에 2만원 안팎의 책값이었다면 체감으로는 지금의 4만원에 육박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책이 세 권이었으니 나부터도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만, 막상 사라져간다고 생각하니 어떻게든 구해보고픈 마음도 생긴다. 책소개는 이렇다.

중국의 핵심 고전인 <儀禮>(十三經注疏本)를 국내 최초로 완역한 것. 굳이 조선시대의 예송 논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禮는 조선시대에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의 질서틀이었다. 따라서 '禮'의 개념은 단순히 개인적인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통과의례는 물론이고 국가 의례를 비롯한 정치사회제도 일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역자는 이 책을 자세히 번역·해설하면서, 동한(東漢)의 대유학자였던 정현(鄭玄)의 주석을 모두 번역해 실고, 唐나라 가공언(賈公彦)의 주석도 첨가했다. 이와 함께 중국 현지에서 수집한 <의례>에 등장하는 주요 문물, 제도 등의 그림을 삽입했다.

 

예와 예치에 대한 관심은 최근에 <예, 3천년 동양을 지배하다>(글항아리, 2011)에 빚진 것도 있다. 악명 높은 예송논쟁에 대해선 <역주 예송논쟁1,2>(학고방, 2009)도 출간돼 있다. 우리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예의 원조가 어떠했는지는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따지면 사서오경의 하나인 <예기>까지 들먹여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예기>에 대해선 무엇이 정본에 해당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몇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역주 예기집설대전>(학고방) 시리즈까지 가면 나로서도 감당이 곤란하다. 다이제스트판과 <주자가례>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싶다.

 

 

알다시피 예는 공자와 관련이 있다. 그가 당대에 스승으로 인정받았던 것도 주나라의 예법에 가장 정통하다고 해서였다. 주나라가 몰락하고 춘추시대에 접어들면서 군자의 도가 사라지고 예가 문란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과거의 예를 복원하고자 했던 것이 공자의 열망이고 기획이었다. 그런 점에서 <논어>의 핵심은 '인'이 아니라 '예'라고 보기도 한다.

 

 

이런 관점은 <동양을 만든 13권의 고전>(글항아리, 2011)에서 읽을 수 있다. 공자가 알았던 예가 어떤 것이었는지 <의례>를 보면 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의례>를 구하려다가 구할 수 없게 됐기에 몇자 적었다...

 

12.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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