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고위급 회담'에서의 담판만을 남겨놓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 이달의 '사회적 독서'에 관련서들을 올려놓긴 했는데,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사실 각종 언론의 분석/비판 기사들만으로도 여러 권의 책이 묶일 정도이다. 오늘자 프레시안에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의 글이 재수록되었기에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스크랩을 공개하는 건, 그래야지 내가 미루지 않고 읽어보게 되기 때문이다).

프레시안(07. 03. 14) "지금, 민주주의의 적은 무엇인가"

노무현 정부 5년, 실패의 경험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인가?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은 최근 발행된 이 잡지 2007년 3~4월호(제93호)에 실린 '한미 FTA, 경제성장, 민주주의'에서 "오늘날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은 정치적 독재가 아니라 경제성장"이라고 지적한다. 성장이 계속될수록 더 많은 사람이 불행해지는 오늘날의 현실이 그 방증이라는 것이다.

김종철 발행인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그것의 추진 배경에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고 '성공'을 해야 한다는 한국 사회에 팽배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김 발행인은 또 "빈부 격차야말로 계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 토대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경제 발전으로 빈곤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김종철 발행인은 "민주주의가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폭군적인' 경제 권력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영국의 경제학자 R. H. 토니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직면한 온갖 문제들이 무분별한 생산력 증대를 부추기는 경제 성장을 통해서 극복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대신 "평등한 인관관계에 토대를 둔 사람들 사이의 우정(友情)과 환대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프레시안>은 김종철 발행인과 녹색평론사의 양해를 얻어 이 글을 재수록한다. 그간 한미 FTA에 대해 둔감했던 이들이라면 이 글 한 편을 읽는 것만으로도 한미 FTA가 가져올 여러 가지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손님은 하늘이 보내주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어느 집에서나 늘 손님이 묵을 방과 입을 옷을 준비하라. 온 정성을 다해서 밥상을 차려라. (터키 이슬람 사회의 격언)
  
수많은 이의제기(異議提起)에도 불구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타결하려는 정부의 의지에는 아무런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이 정한 시한이 가까워옴에 따라 모든 절차를 서둘러 끝내려는 조급한 움직임들이 여기저기서 노출되고 있을 뿐이다.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서 꼼꼼하게 챙기면서 협상을 하겠노라는 정부 측 홍보는 여전히 넘쳐나고 있지만, 그게 결국 헛된 약속이 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한 정부의 자세는 강경일변도이다. 최근 인터넷 뉴스매체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대통령은 한미 FTA로 인해 서민들의 삶이 더 어려워지고,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고 하는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제시해보라고 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이 발언은 그동안 수많은 독립적인 학자, 지식인, 활동가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밝혀온 숱한 자료와 분석, 그리고 현지 취재와 탐방의 기록들이 정부에 의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 취급을 받아왔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생각이 옳다면, 그동안 국가권력에 의한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거리에서 끊임없이 싸워온 농민과 노동자, 시민들은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없이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나라를 시끄럽게 해온 어리석은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 과연 민주정부인가?
생각해보면, 지금 한미 FTA를 둘러싼 여러 문제 중에서 가장 우려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간단히 답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민의(民意)를 존중한다는 대원칙을 저버리고 민주주의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통치자의 리더십의 원천은 그의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을 넘어 기본적으로 그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지지에 있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민주적 지도자는 구성원들에게 오직 '복종함으로써' 그들을 '이끌어갈' 수 있을 뿐이다.
  
한미 FTA는 만약 타결이 되고 국회에서 비준된다면 거의 헌법에 준하는 구속력을 가지고 국민들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위력적인 통상조약이다. 더욱이, 그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소수 특권층을 제외하고 농민과 노동자, 영세상인을 포함한 대다수 서민들에게는 거의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여러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무엇보다도, 소위 '참여정부'가 왜 이 시기에 꼭 이 협정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부 측의 설명은 처음부터 매우 설득력이 부족했고, 협상을 위한 사전준비도 어이없을 만큼 불철저했다는 것이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점점 더 분명해졌다. 따라서, 협상의 내용은 별개로 하더라도 최소한 이와 같은 식으로 진행되는 협상의 졸속성과 부실함에 대해서 항의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부는 여하한 성실한 답변도, 관련 자료의 공개도 거부하고, 오로지 한미 FTA를 반대하는 목소리들을 가능한 한 억제하거나 봉쇄하면서, 막대한 국가예산을 들여 정부 측 홍보물을 온갖 매체를 동원하여 광범위하게 유포시키는 데 열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민주사회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시민적 권리인 시위·집회의 자유마저 노골적으로 억압하는 한편, 정부 측 홍보물에 맞서서 시민들이 자주적으로 제작한 대항 광고에 대해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 방송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한미 FTA에 관련하여 지금 정부가 민중의 목소리를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완강히 되풀이하고 있는 독선적인 행태를 보면 대체 이 나라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다는 것인지 보다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 정부는 이러고서도 자신을 민주정부로 간주하고 있는 것일까.
  
최근 몇몇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와 향후 한국의 '진보진영'의 과제를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는 논쟁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논쟁은 말할 것도 없이 '민주화' 운동세력이 사실상 국가권력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력에 의해 민중의 생존조건이 실질적으로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열악해지는 데 따른 불만과 함께 '민주세력'에 대한 다수 국민의 혐오증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는 상황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참여정부'와 '민심'의 괴리현상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진 게 분명하고, 이에 동반하여 연말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금 한국의 '진보적' 정치세력이 몰락하다시피 내려앉은 것도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이 되었다. 이것은 누구라도 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일 것이다. 이것은 차기 정권을 누가 맡느냐 마느냐 하는 차원을 떠나서 건전한 민주사회를 위한 필수적인 구성요건으로서 정치적 이념과 가치와 세계관을 달리하는 복수(複數)의 정치세력들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크게 우려할 일임에 틀림없다.
  
군사독재 체제로부터 벗어난 지 20년이 경과한 이 시점에서, 그것도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이 주도해왔다는 정부 밑에서 오히려 민주주의의 장래를 심각히 걱정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장래문제가 아니라, 오늘 당장 여기서 우리의 민주주의에 가해지고 있는 위협이다. 지금 한미 FTA라는 현안(懸案)에 관련하여 정부가 보여주는 일방주의적 처리방식은, 따져보면, '참여정부'에서는 예외적인 것이라기보다 전형적인 통치방식이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평택 대추리 농민들이 가장 생생한 증언자가 될 수 있겠지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 되겠다고 공공연히 약속함으로써 집권에 성공한 정부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참여정부'는 국가적 중대사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데 있어서 국민의 의사를 묻거나, 해당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데 지극히 인색한 태도로 일관해왔다. 국가권력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만 하는 폭력과 다름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그 과정에서 풀뿌리 민중은 자신들이 주권자로서 존경은커녕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괴로운 느낌에 시달려야 했다.


  
이번의 소위 '진보논쟁'을 촉발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한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현재 한국사회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두개의 상이한 이해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그중 지배적인 이해방법이란 "민주주의는 정치의 영역에 한정된 원리일 뿐 경제는 시장과 성장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는 논리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경향신문>, 2007년 2월 28일). 지배적인 이해방법이라는 것은 아마도 현재의 집권세력과 이 나라의 기득권층 특히 경제 엘리트들이 그러한 입장을 갖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에 반해 최장집 교수를 포함한 '소수파'가 이해하는 민주주의에서는 정치와 경제의 영역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민중의 열악한 사회경제적인 지위가 개선되지 않거나 더 나빠지고 있다는 느낌 속에서 일반적으로 민중은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절망이 확산되기 쉽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가 '정치적' 영역에서 이룩한 몇몇 개혁적 성과나 치적이 최장집 교수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부분적인 성과나 치적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경제정책이 '양극화'의 심화로 귀결되고, 그 과정에서 민중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개선이 갈수록 요원한 일이 된다면, 그러한 '정치적' 업적이 근본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것은 대체로 정상적인 사고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의 기본적 경제정책이라는 것은 정책 결정자들의 주관적인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결과적으로 대통령 자신의 말처럼 시장권력에 국가권력을 넘겨주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고, 이것은 한미 FTA 협상의 추진에 극적으로 집약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경제의 오늘날의 현실이 현 정부의 전적인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과거로부터의 누적된 모순, 뿌리 깊은 타성에 의한 정책의 실패들로 인해 지금 보는 것과 같은 양극화 추세가 심화되어온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참여정부'의 출범 당시에 새로운 정부가 과거 어느 정부보다도 사회적 약자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정책을 펼 것이라는 기대가 대중 속에 근거가 있든 없든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지금 민주주의의 위기가 운위되고 있는 것도 '참여정부'에 대한 그러한 기대가 환멸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출발한 정부 밑에서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점할 정도로 양산되고, 역대 어느 정권에 못지않게 많은 노동자들이 구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농촌공동체를 괴멸상태로 몰아넣고서도 정부가 이 사태가 갖는 심각성에 대한 인식의 결여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 등에서 현 정부의 '민주적 성격'이 근본적으로 의심받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정부 밑에서도 꾸준히 수출이 증가되고, 국가 전체의 부의 총량이 증가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흔히 지적되고 있듯이 '고용 없는 성장'으로 특징지어지는 오늘날의 경제성장 방식 속에서 그러한 부의 증가는 결국 대기업을 비롯한 경제 엘리트들의 헤게모니 혹은 사회지배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음을 의미할 뿐,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지지해주는 데 기여한다고는 말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유례없는 수익을 올리는 대기업과 부동산 투기꾼들이 존재하고 있는 다른 한편에 평생직장이라는 전통적인 개념 자체가 사라진 상황에서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절대 다수 민중이 존재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심각한 '격차사회'로 빠르게 들어가고 있다. 게다가,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불균형과 왜곡된 고용구조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항구적인 틀로 고착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 상황이 계속되는 한 민주주의를 들먹인다는 것은 희극이 될지도 모른다.
  
성장할수록 삶을 죄어오는 '가난'의 정체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잠시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민중의 사회경제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반을 유지하는 데 빠트릴 수 없는 요건이라고 할 때, 그때 해결되어야 할 민중의 사회경제적인 욕구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절대적 궁핍상태의 해결을 말하는가, 아니면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를 말하는가. 물론 이 두 가지를 엄격히 갈라놓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고, 많은 경우에 두 가지 차원은 중첩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고 하는 한국에서도 최소한의 생존 자체를 어렵게 하는 비참한 빈곤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적 산업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전통사회에서는 '결핍'으로 느끼는 일이 전혀 없었을 산업문명 특유의 물자와 서비스를 획득하거나 이용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기 쉽다. 전통사회에서 사람은 대개 보행을 통해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였지만, 산업사회의 우리들에게 자동차는 이동수단으로서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이 일생을 통하여 단 한 번도 체험하지 않았던 건강검진을 정기적으로 받지 않으면 우리는 문명적인 삶에 참여하는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의 자동차나 정기검진과 같은 문명의 이기나 '혜택'에 접근하지 못할 때 느끼는 것이 오늘날의 '가난'이며, 이것을 철학자 이반 일리치(*일리히)는 '근대화된 빈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결핍되어도 생존 자체에 당장의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서 이러한 '근대화된 빈곤'이 참을 만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것은 물이나 식량이 없어서 당장 고통에 직면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오늘날 많은 도시 사람들은 물이나 식량을 사먹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 자동차를 타야 하거나, 아플 때나 혹은 아프지 않을 때도 병원에 가야 한다.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근대화된 빈곤'을 견디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가난을 견디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통사회에서는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돈과 물자와 서비스의 혜택은 없었지만, 그 대신 우리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풍부한 인간관계에 토대를 둔 공동체의 상호부조적, 호혜적 그물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아무리 궁촌(窮村)일지언정 마을 속에서 굶어죽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을사람이 홀로 굶어죽도록 내버려두는 마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생활에서는 돈이 없으면 속절없이 굶어죽거나 냉랭하고 기계적인 관료적 관리대상으로 전락하는 수밖에 없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가족과 친지들이 위기 때의 구명정 노릇을 해주었으나, 이제 그것도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돈이 없으면 곧바로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날 우리는 너나없이 돈을 벌기 위한 투쟁에 필사적으로 가담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도시에서 월수(月收) 평균 110만 원으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우선 조금이라도 소득이 향상되거나 약간이나마 안정된 일자리를 얻는 것보다 더 절실한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 평등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것도 좋지만 우선 먹고사는 게 더 절박한 문제라는 주장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서도 이 열악한 고용구조를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한 사회 속에서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경제적 평등이 없는 상황에서 공평한 정치적 발언권이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궁핍이 바로 재앙으로 이어지기 쉬운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경제적 평등화는 한갓 관념적인 이상이 아니라 다수 민중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시급히 해결하여야 할 실천적 과제가 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길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한미 FTA를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겠다고 하는 시장개방 만능주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경제적 평등을 기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날 세계무역기구(WTO) 혹은 FTA로 대변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체제는 한마디로 초국적기업과 금융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무제한한 이윤추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려는 목적으로 여러 다양한 사회에서의 공동체 및 자연세계에 대한 전통적인 보호조치를 남김없이 철폐할 것을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오늘날 세계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권력은 어느 국민에 의해서도 선출된 바가 없는 초국적기업이나 금융기관의 간부, 그리고 그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경제학자, 전문가들이 밀실에서 행하는 결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 권력 엘리트들은 세계적 기업들의 무제한한 영리활동을 통해서 '세계 전체'가 부유해질 것이며, 그럼으로써 세계의 빈곤문제가 해소될 것이라고 말해왔고, 이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를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원래 철저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경제사상으로 출발하였다.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은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나 공적 권력에 의한 개입을 극도로 혐오하면서 오직 시장의 규칙만 따를 것을 강력히 주문해왔다. 그들에게 시장은 무소불위의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들은 늘 경제는 어디까지나 경제논리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때 경제논리란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요구에 의해서도 제어(制御)되지 않는 자율적인 시장 메커니즘을 뜻한다. 그러나 이 무한대의 자유경쟁을 부추기는 시장만능주의의 필연적인 귀결은 극단적인 약육강식의 상황, 즉 세상의 가장 힘없는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들끼리 피나는 경쟁, 투쟁 속으로 내몰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 결과 당연히 경쟁에서 진 패배자들이 속출하지만, 이들을 껴안는 시장은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대처 수상이 매몰차게 말했듯이, 자유시장주의의 교의(敎義) 속에서는 "사회적 연대라는 개념은 없다."
  
모든 종류의 경제발전이 민중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신자유주의 노선에 충실하면서 민중의 복지를 말한다는 것은 난센스이다.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적 노선을 취하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은 가령 '복지 프로그램'과 같은 정치적인 의제(議題)로 다룬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말은 그럴듯하지만 이게 정말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관한 근원적인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에 설마 고의적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을 무너뜨리고, 민중을 배신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자신의 정책의 결과가 민중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변함없는 신념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른바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나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서 시장원리주의가 최우선적인 경제논리가 될 때, 거기에는 사회적 약자들과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는 공공성의 공간이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미 세계 전역에 걸쳐 충분히 증명되어온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제논리를 계속하여 고집한다면, 그것은 결국 정책 결정자들이 무슨 이유로든 사회적 약자와 환경, 그리고 민주주의를 제물로 바치더라도, 국내외의 자본과 기업 혹은 경제 엘리트들의 이해관계에 굴종하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동조해야 할 동기(動機)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미 FTA, 파국으로 가는 지름길
앞에서 말한 대로, 지금 한미 FTA 협상은 무엇보다도 국민에 대한 정부의 설명책임의 방기(放棄) 등 절차상의 문제에 있어서 이미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손상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두려운 것은 실제로 이 협정이 맺어져서 발효가 되었을 때의 예상되는 상황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한미 FTA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에 관한 규정이다. 이 규정이 갖는 잠재적 위험성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전문가들이 소상하게 지적해왔지만, 핵심적인 것은 이 조항으로 인해 향후 한국사회에서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공공기관이 공익을 위한 정책을 펴는 일이 극히 어려워질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이 조항은 투자자의 사적 이익을 절대적으로 보장해야 할 것을 최우선적인 원칙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사실상 국가의 공공정책 능력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그럼으로써 국가의 주권에도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이 점 때문에 벌써 몇몇 법률전문가들에 의해서 이 조항의 위헌성(違憲性)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미 FTA는 단순히 무역에 관한 협정이라고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여타의 FTA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포괄성'으로 인해 한국경제가 미국경제에 통합된다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정치, 사회, 문화를 뿌리로부터 흔들어놓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변화 그 자체를 기피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를 초래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미리 겁을 먹을 필요는 없지만, 한미 FTA로 인한 이러한 예상되는 변화 혹은 전면적인 '혼돈'을 생각하면, 실로 두렵지 않을 수가 없다. 간과해서 안 될 것은, 한미 FTA와 같은 통상조약이 한번 맺어지면 일방이 원한다고 해서 폐기하거나 부분적으로라도 쉽게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예컨대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와 같은 규정이 엄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민주주의를 말하고, 그 실천에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부질없는 노력이 될지도 모른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 대하여 시장개방을 요구할 때, 그 요구가 얼마나 일방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다시 주목해 둘 필요가 있다. 필리핀 대학의 사회학자이자 세계적인 '반세계화' 이론가, 활동가이기도 한 월든 벨로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오늘날 미국정부가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는 자유무역주의를 설파하고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철저한 '보호무역주의'를 고수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미국이 근년에 와서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한 다자주의 무역방식 대신에 개별국가와의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따져보면, 미국이 국제사회의 게임의 규칙을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한다는 정당한 요구에 응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작년 WTO 도하라운드 협상에서도, 미국은 자국의 농업에 대한 막대한 보조금을 철폐하라는 개발도상국들의 일치된 요구를 끝끝내 거부했고, 이것이 협상의 좌절을 자초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다자주의 무역의 이상'을 스스로 훼손하면서까지 자기중심적인 입장에 철저한 미국이 FTA와 같은 양자 간 무역협상에서 그 기본적인 자세를 달리할 리가 만무하다. 실제로, 지난 1년간 진행되어온 한미 FTA 협상의 지금까지의 경과를 보더라도 미국의 자세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시사하는 여하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이 협상 종료시까지 변함없이 계속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이 오늘날 '자유무역협정'을 열심히 추구하면서, 정작 협상과정에서 상대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신은 거의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것은 결국 미국경제가 허약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현재 미국은 점점 불어나는 막대한 재정적자 및 무역적자로 매우 위태로운 경제상황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최대의 시장을 가진 국가로서 당면한 인류사회 공통의 난제들에 대응하는 데 너그러운 지도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오히려 세계평화를 어지럽히고, 지구온난화를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인권과 민주주의까지 위협하는 장본인이 되고 있는 데에는 여러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악화일로에 있는 경제가 그 주요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일찍이 소련의 붕괴를 정확히 예측하여 주목을 받은 프랑스의 사회이론가 엠마뉘엘 토드는 2002년에 처음 출판된 그의 저서 <제국 이후>(*<제국의 몰락>)에서, 오늘날 미국이 '연극적 소규모 군사행동주의'를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것은 미국 자신의 산업적 기반의 허약함을 은폐하려는 기도라는 견해를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행동주의'가 반드시 '연극적'인 은폐수단에 그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라크에 대한 침략이 석유자원 확보라는 숨겨진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의 군사행동은 경제적 목적을 추구하는 유력한 수단으로도 사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뉴욕타임스〉의 논설필자 토머스 프리드먼이 솔직하게 말했듯이, 미국의 군대는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여하튼 미국이 다른 나라에 대하여 시장개방을 요구할 때 그 요구가 일방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집요하다는 것은, 예를 들어, 지금 한미 FTA 협상과 병행하여 커다란 쟁점이 되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2003년 12월 미국에서 광우병(BSE) 소가 발견됨으로써 수입이 중지된 미국산 쇠고기는 그후 우여곡절 끝에 작년 하반기에 다시 수입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세관의 검역과정에서 쇠고기 속에 뼛조각들이 들어있는 게 확인됨으로써 다시 잠정적으로 수입이 중단되었고, 그 때문에 이 문제는 지금 한미 간 주요 통상현안이 되어있다. 그런데, "광우병 위험물질은 뇌와 척수 등 신경조직에 고농도로 축적되어 있으며, 뼛조각이 들어있다는 것은 배근신경절 등 신경조직이 살코기에 포함되어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뜻한다."('미국산 쇠고기 수입 저지 국민운동본부 성명서' 2006.12.7)

따라서 뼛조각은 수입되는 쇠고기 속에는 당연히 포함되지 말아야 하고, 그렇게 하도록 양국 사이에 이미 양해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는 뼛조각이 포함된 쇠고기에 대한 통관금지를 결정한 한국정부의 조치에 불쾌감을 표시하는 수준을 넘어서, 향후 미국산 수입쇠고기에 대한 위생검역 자체를 면제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자기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최소한의 소임마저 포기하라는 이러한 요구는, 간단히 말하면, 국가주권을 포기하라는 것과 다름없는 압력이다.
  
그런데, 미국산 쇠고기가 과연 안전성이 보증될 수 있는 것일까. 2003년 12월 미국에서 광우병 소가 발견되기까지 미국의 전체 성우(成牛) 4200만 마리 중 검사를 받는 소는 연간 2만 마리에 불과했다. 즉, 0.05%만의 소가 검사를 받고 있었다. (검사 규모의 축소는 1주일간 100만 달러 정도 드는 검사비용과 관계있을 것이다.) 광우병 발생 후 여러 나라 학자들로 구성된 국제조사단의 권고에 따라 미 농무부는 그 후 2년간 약 76만 마리를 검사하였다. 그 결과는 "광우병 발생률은 어른소 100만 마리 당 1마리 이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소는 건강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2006년 2월의 미 농무부 감사국의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의 검사체제로는) BSE(광우병) 발생률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추계는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 이유는 "검사 표본을 채취하는 방법이 엉터리인데다가 그 수도 적기 때문"이라는 것이다.(大野和興,〈檢證―美國産牛肉(上)〉日刊ベリタ, 2006년 7월 24일)
  
광우병 소가 발생하면 그 목장은 수많은 소를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엄청난 손해를 입기 때문에 과연 미국의 축산업자들이 그러한 원칙을 지키는지 매우 의문스럽다. 일본이나 유럽에서는 모든 소에 귀걸이를 부착해놓고 일평생 소를 관리, 추적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시스템이 없다. 아마도 괴상한 동작을 나타내거나 땅바닥에 털썩 쓰러지는 소만 목장의 한 구석이나 사막에 묻어버리고 말 가능성이 있다고 많은 사람이 지적하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문제를 생각할 때 빠트릴 수 없는 또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미국에서는 육골분(肉骨粉)을 소의 사료로 쓰는 것을 아직도 전면 금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나 양 등 반추동물의 시체나 내장을 원료로 해서 만든 이 육골분 사료로 인해 초식동물인 소들이 육식을 강요당했고, 그 과정에서 광우병의 원인물질이 생성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과학자들이 경고해왔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반추동물의 육골분을 반추동물에게 먹이는" 것만을 금지하고 있을 뿐이다. 즉, 죽은 소의 시체나 내장으로 만든 육골분을 닭이나 돼지에게 주는 것은 허용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광우병의 원인물질이 먹이사슬에 따라 계속 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도 그 사슬 가운데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영국 수의(獸醫)시험장에 의하면, "소는 광우병에 걸린 뇌조직의 불과 10밀리그램을 먹어도 감염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이터가 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허다한 문제가 있지만 또하나 특기할 것은 미국의 쇠고기 처리공장에서의 작업과정이다. 2004년 여름 일본을 방문한 미국 최대 식육회사 '타이슨푸드'사의 노조위원장의 증언에 의하면 "12초에 1마리라는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의 빠른 속도로 소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노동재해가 빈발하고,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에 늘 인부들이 교체되고, 그래서 숙련노동자가 드물다. 게다가 위험 속에서 작업을 늘 거칠게 하는 탓에 특정위험부위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섞이는 일도 드물지 않다."(大野和興,〈檢證―美國産牛肉(下)〉日刊ベリタ, 2006년 7월 27일)
  
미국산 쇠고기가 이렇다고 해서 한국정부가 언제까지 미국정부의 압력을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조금 버티는 척은 하겠지만, 결국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재개를 허술한 검역과정을 거쳐서 받아들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서 미국산 쇠고기를 회피하려면 그것을 먹지 않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소비자들은 쇠고기의 원산지 표시를 명확히 해줄 것을 상인들이나 정부당국에 강력히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한미 FTA가 발효된 상황에서, 쇠고기의 원산지 표시가 미국산 상품에 대한 차별조치 금지 규정에 걸리거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의 대상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꺼림칙한 고기를 먹지 않으려면 우리는 모두 극단적인 채식주의자가 되기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은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가 한미 FTA라는 덫에 빠진 것은, 좀더 깊이 따져볼 때, 지금 정부의 책임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성장동력'이 꺼져간다고 하면서 '이대로 가면' 선진국 진입은 고사하고,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토로하는 목소리는 이른바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허다한 사람들 사이에서 들려오고 있다.

한평생 문학에 관한 글을 쓰고,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쳐온 어느 원로 문학평론가는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가난"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수십 년간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던 한 지식인은 최근 들어 "지금 한국은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다. 어쩌면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심정을 토로하면서, "한국을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고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노동운동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다소 뜻밖의 제안까지 내놓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반드시 노무현 정부가 아니라 하더라도, 조만간 어떤 정부, 어떤 정책 결정자이든, 그것이 돈이 되고,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말해지는 것이라면 한미 FTA건 혹은 다른 어떤 도박이건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뛰어들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니까, 정말 문제는 한미 FTA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고, '성공'을 해야 한다는 이 사회에 팽배해 있는 밑도 끝도 없는 욕망이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하는 한국의 현실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 20년 남짓 "무섭게 성장 질주를 해온" 중국이나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고 있다"는 일본과 같은 이웃나라들을 포함해서 소위 글로벌화 시대의 세계 전체의 현실을 냉정히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와 같은 성장지상주의에 입각한 경제발전이 더 확대되어서는 조만간 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공멸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인간성과 농촌공동체의 파괴를 비롯하여 빈부격차, 전쟁, 환경 및 에너지 위기 등 온갖 난제를 안고 있다. 이들은 모두 시급한 해결을 기다리고 있는 과제들이지만, 이러한 과제들이 계속적인 경제발전에 의해 극복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진실을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경제발전이야말로 이 모든 위기와 난제들의 원인이었거나 이러한 사태를 악화시켜온 주범이었다. 우리는 이 기초적인 사실을 정확히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흔히 우리는 경제성장을 통한 빈부격차 해소를 운위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빈부격차란 경제성장의 필연적인 산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계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토대라는 점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이윤창출 메커니즘은 본질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힘의 격차라는 구조적 조건에 의해서만 작동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경제성장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의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전제로 할 뿐만 아니라, 그 성장의 결과는 또 필연적으로 불평등의 심화에 기여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정말로 고르게 산다면 거기에는 자본주의도, 경제성장도 성립할 수 없을 것임이 확실하다.
  
실제,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이 확대되는 과정에는 반드시 그 내부든 외부든 식민지의 존재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왔다. 오늘날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하는 국가들은 실은 모두 과거에 어떤 식으로든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토착민들에 대한 식민지적 침탈과 지배에 연루되어 있었던 나라들이다. 그러니까, 식민지가 없는 상황에서 경제성장을 추구한다면 해외가 아니라 국내에서 식민지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농촌공동체의 와해와 하층민에 대한 착취는 불가피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경제 시대에는 국경을 넘어 초저임금 노동자와 세계 각처의 농민들이 사실상의 식민지 역할을 떠맡게 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과정을 근대화 혹은 산업화라고 불러왔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경제발전 혹은 근대화라는 기획의 계속적인 확대를 통해서 빈곤도, 누추함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인가 하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의 명민한 관찰처럼, 대도시의 화려한 고층빌딩만 근대 건축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 고층빌딩들 사이의 누추한 슬럼도 틀림없는 근대 건축이다. 근대화된 세계란 이처럼 현대식 빌딩이 대변하는 표(表)와 슬럼이 대변하는 리(裏)의 동시적 공존에 의해서 구성되는 구조물이다. 여기에서 표리관계를 무시하고, 표의 세계만의 독자적인 발전을 꾀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슬럼을 원하지 않는다면 화려한 현대식 빌딩도 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도, 근대교육을 받아온 우리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뿌리 깊은 미신의 하나는 일반적으로 문명적인 삶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일정한 수준 이상의 물질적 풍요와 생산력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한 생각의 연장선에서 '생활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좋고 선진적이라는 검토되지 않은 믿음이 확산되고, 그런 맹목적인 믿음 속에서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 2만 달러로, 그리고 다시 3만 달러의 시대로….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언제까지 가야 할지도, 또 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끝없는 길을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 질주가 허망한 것임을 설혹 모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달리기를 멈추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 다른 사회들도 똑같이 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절멸 직전의 '이스터 섬(Easter Island)' 사람들의 상황과 흡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국내에서도 소개된 제레드 다이어먼드의 책 <문명의 붕괴>에는, 한때 풍요로웠던 문화를 일구었던 남태평양의 고도(孤島) 이스터 섬의 주민들이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모르지만, 거대한 석상(石像)들을 부족간에 경쟁적으로 세우는 데 몰두한 나머지 석상의 제작과 운반에 필요한 나무를 함부로 베어냄으로써 마침내 불모화된 자연 속에서 절멸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이 생생하게 복원되어 있다. 생태계가 붕괴되고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최종 단계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침내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동료인간을 죽이고, 식인(食人)까지 할 수밖에 없는 처참한 상황에 내몰린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것을 그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직도 숲이 남아있었을 때 이 절해고도의 숲을 죄다 파괴해서는 자기들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여태까지 계속해왔던 관성대로 석상 건립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권력욕망을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섬의 마지막 남은 한 그루 나무까지 베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책에는 '이스터 섬' 외에도 생태적 조건에 적합하지 않은 생활방식을 고집하다가 결국 지상에서 절멸되어버린 몇몇 인간집단의 경우가 더 소개되어 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 책의 저자가 이런 사례를 소개하는 것은 단순히 신기한 옛날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이어먼드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악화일로를 치닫는 생태적 위기 앞에서 한사람의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 손자들의 할아버지로서 깊이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이들 인간집단이 절멸되어버린 공통의 원인은 그들 자신의 생태적 조건에 반하는 생활방식에 있었지만, 그러한 생활방식이 계속된 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삶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핵심적 가치(core values)'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지배하고, 인류사회를 절멸의 벼랑으로 데려가고 있는 '핵심적 가치'란 바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적당한 성장'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개념이라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회에서든 경제성장이란 언제나 그 사회의 가동(稼動) 가능한 모든 인적·물적 에너지를 전면적으로 투입할 것을 강요한다. 경제성장은 절제라는 개념과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고도경제성장뿐만 아니라 어떤 경제성장이든 그 실현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일종의 국가총동원체제이다. 그러므로 성장지향 국가란 본질적으로 군사국가 혹은 독재국가와 동일한 '폭력'의 논리에 의해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국가주도의 개발독재 시대가 과거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고 믿는 순간, '개혁'이니 '구조조정'이니 '노동시장 유연성'이니 혹은 '경쟁력 없는 농업의 퇴출'이니 하는 갖가지 이름에 의한 인권 탄압과 시민적 권리에 대한 제약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우리는 보아왔다. 이 새로운 억압은 그 강도와 방식에 있어서 어쩌면 개발독재 때보다 더 가혹하고 간교한 억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 군사독재 치하도 아닌데, 노동운동을 제약하고, 필요하다면 노동쟁의 자체를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압도적인 지배하에 들어가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민주주의의 진정한 반대개념은 정치적 독재가 아니라, 경제성장이라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희망의 보루, '우정'과 '환대'
일찍이 근대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은 대체로 민주주의의 성립과 발전은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과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류'의 관점과는 달리, 오히려 자본주의의 발달이 민주주의의 기반을 파괴할 가능성에 대해 깊이 우려해온 사상가들도 적지 않게 존재해왔다. 지금은 이러한 사상가들에게 좀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상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의 정치사상사가 셀던 월린 교수도 그러한 사상가 가운데 하나인데, <정치와 비전>이라는 고전적인 저서 속에서 그가 예민하게 주목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양산되는 것은 이기적이고, 약탈적이고, 경쟁적이며, 불평등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지위가 하락하는 것에 대해 심히 두려워하는 인간들, 즉 민주적 시민으로는 부적당한 인간들"이라는 사실이다.
  
건전한 민주사회가 성립되기 위한 가장 필요한 조건의 하나는 사적 이익에 못지않게 공공성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정신적 능력이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와 자유시장을 동일시하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서는 이런 의미의 정신적 능력에 대한 관심은 희박하다. 그들은 자유시장의 발달만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역사적인 현실로도, 과학적인 분석으로도 입증될 수 없는 주장일 뿐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오직 형식적인 대의제 민주주의의 차원으로 축소시켜 이해함으로써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극히 왜소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결국, 진정한 민주주의란 물질적 생산력이나 생활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의미하며, 개인들의 정신적 자질에 관련된 문제이다. 우리는 이 점을 좀더 명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역사가로서 영국 노동당의 지도적 이론가이기도 했던 R. H. 토니가 오래 전에 했던 발언은 매우 인상적이다.―"가난하기 때문에 올바른 인간사회가 될 여유가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 어떤 사회도 단순히 부유해짐으로써 올바른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투철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토니는 민주주의가 형식적인 정치제도가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무엇보다 '폭군적인' 경제권력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단호하게 말하였다.
  
"민주주의가 하나의 정치적 제도에 머무를 뿐, 그 이상의 것으로 되지 않는 한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부형태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의 사회유형이며 생활방식이다. (…) 하나의 사회유형, 생활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가 되려면 첫째, 그것은 모든 형태의 특권을 단호하게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둘째, 그것은 흔히 무책임한 폭군이 되어있는 경제권력을 제어하여, 사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전환시켜야 하고, 그 권력이 또한 명확한 한계 내에서 활동하도록 하여, 공적 권위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R. H. Tawney, Keeping Left, 1950)


  
토니의 말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핵심이 무엇인가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집약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온갖 문제들이 무분별한 생산력 증대를 부추기는 경제성장을 통해서 극복될 것이라는 미신에 더 이상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 끝없는 생산력의 증대와 물질적 풍요를 겨냥하는 성장경제 논리는 차별과 격차를 끊임없이 양산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세계의 황폐화를 초래한다.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궁극적으로 평등한 인간관계에 토대를 둔 사람들 사이의 우정(友情)과 환대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07. 03. 14.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인 2007-03-15 04:19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

마립간 2007-03-15 08:03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redann 2007-10-15 00:33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지난주 강준만 교수의 칼럼 하나를 옮겨놓는다. 이미 알라딘의 다른 서재들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굳이 옮겨놓는 것은 이달의 '사회적 독서'로 제안한 바 있는 고종석의 <바리에떼>와 무관하지 않아서이다. 컴퓨터의 하드를 교체하는 바람에 즐찾 설정부터 하나하나 다시 해야 하는 처지라서(예전의 하드를 카피해오는 건 좀 미뤄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이래저래 불편한 터라 다른 학술적/시사적 동향들에 대해서는 며칠 관심을 접어두어야겠다(사실 그런 일들만 챙기는 걸로도 24시간을 꼬박 보낼 수 있겠지만 그게 '생활'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생활만 돌보기에도 24시간이 모자라는 '현실'이기에 피로와 무기력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게 요즘이다). 사실 혼자서 읽을 책들 읽는 데에도 늘 시간은 부족하거늘...

한겨레21(07. 03. 08) '고종석'식 진보주의를 위하여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께 질문을 하나 드리겠다. 민주노동당(민노당)이 창당 기념일 행사로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여론 형성에서 민노당의 발전과 성장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지식인에게 감사장을 수여한다면, 1순위로 누구를 꼽겠는가?

나는 고종석이다. 고종석의 반열에 오를 만한 다른 지식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의 이런 주장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 고종석이 펴낸 <바리에떼: 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개마고원)이라는 책을 읽기를 권한다. ‘사람’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고종석의 ‘복잡성’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복잡성'에 대한 강조는 소설에 대한 쿤데라의 예찬 근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고종석식 진보주의'를 나는 따로 '산문적 진보주의'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혹은 '산문학의 정신'). 아니 무심코 읽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나는 자칭 ‘고종석 전문가’로서 그가 얼마나 ‘복잡한 사람’인지에 대해 이제부터 예비 지식을 드리고자 한다. 고종석에 대한 칭찬도 비판도 아니다. 담담하게 해부해보는 것이다.

고종석은 “개인적으로 나는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나는 진보 정당의 지지자가 아니다”(203쪽)라고 했다. 고종석은 진보주의자가 아닐뿐더러 집단주의를 혐오한다. 그는 “만국의 개인들이여, 흩어져라! 흩어져서 싸우라! 민족주의의 심장에, 모든 집단주의의 급소에 개인주의의 바이러스를 뿌려라!”(30쪽)라고 선동적인 개인주의 선언을 한 바 있다.

고종석이 낙관적 열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나는 염세주의자에 가깝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탐욕과 포악과 비굴에서 사람에게 맞설 만한 동물이 있을지 모르겠다”(291쪽)고 털어놓았다. 이 정도면, 고종석을 잘 모르는 분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그런 사람에게 왜 민노당이 감사장을 줘야 한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고종석만큼 효과적인 민노당 지지를 역설한 지식인은 찾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이다.

민노당 당원이거나 당원은 아니더라도 민노당 색깔을 가진 진보적 지식인들은 평소 글쓰기 활동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민노당 당원들도 잘 알아듣기 어려운 용어로 논문식 글을 쓰는 지식인들이 다수다. 대중적인 글을 쓰는 지식인들도 있지만, 이들은 보수(자유주의 포함) 정당 비판에만 몰두한다. 보수 정당 비판이 곧 민노당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충분히 입증된 것 같은데도, 이들은 왜 민노당을 지지해야 하는지 겸손하고 간곡한 자세로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보수 정당 지지자들에 대한 호통, 야유, 조롱이 주요 메뉴다. 비극은 많은 민노당 당원들이 그걸 말리면서 “손님 쫓아내지 말라”고 고언을 하는 게 아니라, “아이고 속 시원해라” 하면서 즐긴다는 사실이다.

호통, 야유, 조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 차분하고 정중한 설득보다는 그게 더 필요할 때도 있고 효과를 낼 때도 있다. 문제는 시종일관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져 본말이 전도되는 사태다. 나를 위한 진보인가, 민중을 위한 진보인가? 고종석은 시종일관 겸손하게 민노당 지지를 설득한다. 그는 한국 사회의 극우 편향을 개탄하면서 ‘이념적 정상화’를 위해 자유주의자들이 민노당에 표를 던져야 한다고 타이르고 호소한다. 이 책에도 그런 호소가 나와 있지만, 고종석이 정치를 주제로 쓴 많은 글엔 명시적·암묵적인 민노당 선전이 들어 있다.

고종석이 묘한 사람인 건 분명하다. 한국 사회의 야만에 대해 그 어떤 진보주의자보다 더 진보적 의분을 표출해왔으면서도, 자신은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딱 잡아떼니 말이다. 문학평론가 백철(*'백철'이 아니라 '김철'이다)은 고종석의 소설집 <제망매>에 쓴 발문에서 고종석의 묘한 이념 지향성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그는 우리나라의 어떤 ‘좌파들’보다도 더 좌파적이었고, 어떤 ‘우파들’보다도 더 우파적이었다. 인간과 세상의 진보를, 아니 진보의 험난한 좌절들을 진실로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그는 충실한 좌파였고, 많은 좌파들을 부끄럽게 만들 줄 안다는 의미에서 또한 충실한 우파였다.”

사회과학적 분석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고종석은 한국형 진보주의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진보 세력이 ‘고종석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선 큰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 시험의 이름은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 정립 문제다. 개인주의는 오랫동안 사회주의와 갈등 관계를 유지했다. 사회주의에 호의적인 사람들도 개인주의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해 유보적 자세를 취하곤 했다. 예컨대, 미국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사회주의에 공감했지만 사회주의가 개인과 천재에 반대하는 것을 싫어했다. 가치 있는 것은 오직 개인뿐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그런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1891년에 낸 <인간의 영혼과 사회주의>에서 “우리가 사회주의를 통해 이르고자 하는 것이 개인주의”라고 주장했으며, 조레스는 1898년에 낸 <사회주의와 자유>에서 “사회주의는 완전하고 논리적인 개인주의”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를 개인주의의 논리적 완성으로 보았으며, 빅토르 바슈는 1904년에 낸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에서 “일관성 있는 개인주의는 사회주의로 귀결된다”고 주장했다.(알랭 로랑의 <개인주의의 역사>)

한국에서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주의’를 시사한 이는 한양대 교수 임지현이다. 그는 “낡은 전통에 가위 눌려 있는 남한의 좌파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에서만 건설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회한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 것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론 없이 곧장 실천으로 들어간 대표적 인물이 바로 고종석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종석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 가운데 사회주의자는 얼마나 되겠는가? 고종석은 진보주의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고종석은 한사코 자신이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개인주의와 진보주의가 양립하지 못하는 한국의 진보주의 풍토를 정면 돌파할 뜻이 없기 때문일까? 나는 그게 고종석의 개인주의가 요구하는 ‘책임 윤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책임 윤리가 박약한 편이다. 책임 윤리란 어떤 일을 할 때 나타난 결과뿐만 아니라 예상 가능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윤리의식을 말한다. 옳은 일이니까 결과에 개의치 않고 무조건 밀어붙인다는 진보주의는 책임 윤리가 없는 모험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선 곧잘 모험주의가 진보주의로 통용되기도 한다. 독재정권 시절에 형성된 습속이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지속된 탓이다.

이념을 떠나 일상의 차원에서도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공직을 맡는 걸 두려워한다. 책임 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비극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공직자, 특히 고위 공직자들의 책임 윤리 부재 또는 박약을 들겠다. 대부분 고위 공직을 출세로 생각한다. 그건 ‘출세’가 아니라 ‘봉사’하는 거라고 반박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봉사하기 위해 치열한 로비를 하고 남이 자신보다 좋은 봉사 기회를 갖게 되면 배 아파하고 헐뜯는 사람들이 왜 그리도 많단 말인가?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함부로 공적 단체를 만들지도 않는다. 공공의 목적을 위한 단체면 성공 가능성을 검토하지도 않은 채 무조건 만들고 보는 게 우리 시민사회의 풍토다. 하다 안 되면 때려치우면 그만이다. 책임? 공익을 위한 이타적 활동에 무슨 책임?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이타성을 면죄부로 내세우는 그런 반문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책임 윤리 유전자를 가진 고종석이 영원히 공직을 맡거나 상시적인 공적 단체를 만드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여태까지 내가 분석해온 고종석은 그렇다는 것이다.

고종석은 진보마저도 책임 윤리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선뜻 “나 진보요!”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진보를 고위 공직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백철(*강교수가 작고한 평론가와 혼동한 모양이다)의 평가를 다시 읽어보라. 가슴에 와 닿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고종석은 과격한 개인주의 선언을 하였지만, 나는 실천에선 내가 고종석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이기주의에 더 충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2003년 12월 나는 고종석과 민주당 분당 문제로 논쟁을 한 바 있다. 이와 관련된 글이 <바리에떼>에 실려 있으므로, 이 이야기를 좀 해보자. 민주당 분당에 비판적이었다는 점에선 나와 그의 생각은 같았지만, 전체 또는 집단을 생각한다는 점에선 고종석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고종석은 “가난한 부모가 창피하다며 집을 뛰쳐나갔다가 세상에서 따돌림당하는 자식을 거두어 보살피는 어미의 심정으로 호남 유권자들은 신당을 감싸야 한다”(187쪽)는 주장을 폈다.

나는 이런 ‘부모·자식·어미’론이 부적절한 유추라고 생각한다. 고종석이 ‘참여정부의 파산’을 염려해 열린우리당 지지를 역설하고, 다른 대안으로 민노당 지지를 제시한 건 나로 하여금 “이 양반 개인주의자 맞나?”라는 의문을 갖게 했다. 고종석은 나의 주장이 ‘민주당 지지’를 ‘암시’한다고 해석했지만, 나는 “이 양반 진짜 개인주의자 맞나?” 하는 생각을 했다. 혹 ‘대안 중독증’이나 ‘독수리 5형제 신드롬’에 빠져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했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노무현의 해체주의는 ‘창조적 파괴’라고 예찬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그건 노무현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란 말이냐고 내심 쏴붙였다.

나는 열린우리당은 내가 반대한 정당이므로 열린우리당이 파산하건 말건 아무런 책임 의식이 없는 반면, 고종석은 대선에서의 투표에 대한 책임을 말하면서 노 정권에 대한 책임 윤리마저 역설하는 게 아닌가! 고종석이 자유주의자요, 개인주의자라고?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노무현은 자신의 약속을 뒤집고 민의를 폄하하면서 결과야 어떻게 되든 모험주의라고 불러주기조차 어려운 도박주의로 치달리는데도 고종석은 그런 노무현까지 어미의 마음으로 껴안자고 역설했으니, 나로선 “오지랖도 참 넓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종석은 “노무현이 아무리 나빠도 최병렬이나 이회창보다는 수백 배 덜 나쁘고, 전두환보다는 수만 배 덜 나쁘다”(199쪽)는 논리를 내세워 특검법 통과에 한나라당과 공조한 민주당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나는 여기서 고종석의 평소 ‘쿨함’이 사라졌다는 게 흥미롭다. 이는 그가 ‘개인’보다는 집단적 ‘대의’를 앞세운 탓이리라. 나도 평소 대안을 어지간히 강조하는 편이지만, 잘못된 것을 비판함에 있어서 늘 그 결과와 대안까지 미리 생각하고 비판에 임하진 않는다. 그런데 고종석은, 비록 그가 ‘국가’와 ‘민족’이라는 단어를 혐오할망정, 사실상 국가와 민족을 염려하는 지극한 애국심을 발휘했으니 이 어인 일인가.

<바리에떼>엔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 대한 성실한 반론이 실려 있다. 87쪽에서 137쪽에 이르는 긴 글이다. 고종석 스스로 “식민지 시기의 역사적 복권을 통해 민주주의 운동의 정통성을 흔들려는 온갖 ‘경제론’들의 급소를 이 글이 비교적 정교하게 움켜쥐었다고 나는 판단한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그 이상이다. 최근 홍수처럼 쏟아져나오고 있는 식민지 시절에 대한 모든 논란에 대해 명쾌한 교통정리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종석은 복거일을 내내 비판하지만 그의 비판은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하다. 나는 복거일에 대한 과분한 대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복거일은 철저한 사회진화론자이며,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니 보수주의니 하는 건 편의적으로 동원되는 것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고종석이 복거일의 자기 교정 가능성에 대해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건 자신이 복거일로부터 배운 점이 있다는 것에 대한 책임 윤리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닌가 의심하곤 한다(*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고종석과 같은 희귀한 지식인이 있다는 건 한국 지식계의 축복이지만, 내가 정작 높이 평가하는 그의 미덕은 매사를 깊이 꿰뚫어보는 시력이다. 내 기준으론 보아선 과도할망정 고종석의 엄격한 책임 윤리가 곳곳에 스며드는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다. 물질적으론 낮은 곳에 있을망정 정신적으론 높은 곳에 서서 진보 아닌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일부 진보주의가 고종석형 진보주의로 교체되는 그런 세상은 언제 올 것인가?(강준만)

07. 03. 11.

P.S. 내친김에 <바리에떼>에 대한 한겨레의 서평도 옮겨놓는다(알다시피 한겨레는 그가 한때 몸담았던 매체이다). '이너'도 '아우터'도 아닌 (보통은 남들에게 욕먹는) 그의 포지션을 나는 지지한다. 언젠가 적었지만 나는 고종석과 대동소이한 입장을 갖고 있다(차이라면 내가 그보다 개인주의와 쾌락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해서 덜 지지한다는 것 정도이다).  

한겨레(07. 20. 16) ‘이너’도 ‘아우터’도 아닌 고종석의 자유생각

1993년 첫 저서 <기자들>을 펴낸 저자가 17번째로 세상에 내놓은 책이다. 지난해 3권을 출간했고 올해 1월이 가기 전에 다시 새 책을 펴냈다. 1년 사이 4권의 책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저자가 상당한 독자층을 확보한 인기글쟁이라는 점과, 그의 글쓰기가 밥벌이와 직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 저자는 2005년 3월부터 직장 출근을 하지 않고 있다. 돈을 초월한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여가와 행복을 위해서라도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이 책은 삶을 털어 글을 쓸 수 있는 조건을 완비한 한 ‘행복한 글쟁이’의 자유로운 사변의 모둠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 많은 친구인 소설가 이인성의 산문집 발문에서부터 지난 대선에서의 호남 몰표를 옹호한 정치 에세이와 한국 보수주의에 대한 비판 글까지 동시대를 종횡무진 횡단한다. 저자 글의 미덕은, 그가 소리높여 외치는 좌파적 주장이 편벽한 이념의 틀 속에서 획일적으로 생산된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실존적 성찰 속에서 잉태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의 텍스트가 놓인 지점이 공과 사를 버무린 제3의 공간에 있다는 점과도 상통할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자유의 의미를 가르쳐준 사부 복거일과 격렬히 대결한다. 일제와 친일세력에 대해 정황론을 들이대며 옹호하는 사부를 거침없이 밀어붙인다. 이 전투에서 그가 어떤 논리를 갖다 대더라고 그가 퇴직의 변으로 실토한 넋두리보다 더 설득력을 갖기 힘들 것이다. “점점 기력과 지력이 사그라드는 세월을 좀 더 자유롭게, 홀가분하게 살고 싶었다.” 식민 이상의 부자유스러움이 어디 있겠는가. 

유난히 자주 나오는 ‘친밀도’에 대한 언급도 그의 사유방식을 가늠케한다. “내가 아직 순수하지 않고 기품과 거리가 있는 것은 내가 황인숙과 충분히 가까운 친구가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시인 황인숙에 대해) “그와 나 사이에는 무수한 친구들이 있다. 그를 중심으로 한 ‘이너’라는 것이 있다면, 거기에 내 자리는 없기 쉬울 것이다. 내 자리는 아마 ‘이너’와 ‘아우터’의 경계에 있을 것이다.”(소설가 이인성에 대해) 그리고 덧붙였다. “이방인들이 들이 쉬는 공기는 자유의 공기이므로.” 그의 글의 특장인 인간과 사물을 바라보는 섬세한 태도의 근원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이정도면 설명되지 않을까.(강성만 기자)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iosculp 2007-03-11 19:37   좋아요 0 | URL
오마이뉴스에 노회찬이 대통령이 되면 매년 20조씩 걷어 양극화를 해소한다고 나오네요. 좀 무서워 지는게 그러나 엿되면 뒷감당은, 지금 노무현 정부도 양극화를 내세우고 격차줄인다고 하다 더 벌어지게 만들고 있는데요.

심산 스쿨에 들어가보니 조중걸 선생이 암으로 강의를 중단했다고 나오더군요.
학생들에게 쓴 편지가 게시판에 있던데 안습되더군요.

로쟈 2007-03-11 20:20   좋아요 0 | URL
민노당은 그런 게 어필할 거라고 생각한 거 같군요... 생면부지이지만 조선생 얘기는 안타깝네요. 그의 본격적인 저작들이 나온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드팀전 2007-03-11 22:23   좋아요 0 | URL
저도 한겨레21 기사는 읽었습니다...
한겨레 기사 중 이 부분
.......저자 글의 미덕은, 그가 소리높여 외치는 좌파적 주장이 편벽한 이념의 틀 속에서 획일적으로 생산된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실존적 성찰 속에서 잉태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의 텍스트가 놓인 지점이 공과 사를 버무린 제3의 공간에 있다는 점과도 상통할 것이다.........

여기에 힘을 주고 싶어지네요.좌파 우파보다 우선시 되야할 것은 그의 이념이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실천적 영역에서 살아내고 있는지..그거 아닐까 싶습니다.....그렇지 못한 '공부'는 제게 그다지 존경받지 못합니다.'자본론'을 100번읽고 암기할 수 있다 할지라도.

로쟈 2007-03-11 22:32   좋아요 0 | URL
저는 거기에 보태서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책임 윤리가 박약한 편이다. 책임 윤리란 어떤 일을 할 때 나타난 결과뿐만 아니라 예상 가능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윤리의식을 말한다. 옳은 일이니까 결과에 개의치 않고 무조건 밀어붙인다는 진보주의는 책임 윤리가 없는 모험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는 '상식적인' 지적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말들'과 자칭 진보주의자들을 제가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마태우스 2007-03-11 22:35   좋아요 0 | URL
진정한 자유주의자 고종석... 저도 그분 책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많이 배웠죠.... 바리에따 주문했습니다 꾸벅.

로쟈 2007-03-11 22:45   좋아요 0 | URL
저도 재미있게 읽고 많이 배웠으니 '동학'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제가 인사받을 일은 아닌 거 같은데요.^^
 

중간에 예기치 않은 펌질을 하게 됐지만 내가 찾으려고 했던 박노자의 칼럼은 '이슬람의 이광수, 루시디'이다. 그의 두번째 책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한겨레출판, 2002)에 재수록되어 있는데, 그맘때쯤 '강의자료'로 사용했던 기억이 있다. 문득 이 칼럼이 생각난 것은 이달의 '사회적 독서' 목록에 이광수의 <무정>을 올려놓은 데다가 마침 루시디(루슈디)의 신간 <분노>(문학동네, 2007)가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박노자의 칼럼제목을 뒤집어 '한국의 루시디, 이광수'로 읽을 수 있다면 <분노>는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그런 상처"(김현) 같은 이광수를 읽기 위한 자료로서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먼저, 칼럼을 다시 일독해본다.

한겨레21(01. 11. 04) 이슬람의 이광수, 루시디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의 사관에는 ‘도전과 응답’이라는 도식이 중심적인 위치에 놓여져 있다. 각 문명권이 그 역사의 전환기에서 내부적 모순이나 외부 세력의 ‘도전’을 받게 돼 있고, 그 ‘도전’의 형태·심도·규모와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그 ‘응답’을 제시한다는 논리다. 그 논리에서, 사회 현상들의 의미와 인과론적인 뿌리를 내외부적 상황의 ‘도전’에서 찾아야 한다는 역사 연구의 접근 방식이 성립된다. 필자는 토인비의 관념주의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않지만 세상의 표피만 보지 말고 ‘도전’이라는 ‘뿌리’를 중시하라는 신중한 논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완전히 무시된 ‘도전과 응전’

토인비의 ‘도전·응답론’ 이야기를 왜 꺼내게 됐는가? 지금 노르웨이를 포함한 북구사회에서는 반전의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경우에 평상시에 주로 우파를 두둔해주는 루터교회(노르웨이의 국교)마저도 주요 이슬람 단체와 공동으로 강한 반전 성명서를 낼 정도이다. 주요 좌익 정당인 노동당의 대중적 기반인 전국 노총(LO, 약 80만명의 노조원을 대표함) 등의 핵심적 단체들이 확고한 반전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보수적 일간지마저도 미국의 전쟁을 ‘중앙아시아의 자연자원에 접근하기 위한 인종주의적 민간인 말살·인권침해’로 보고 있는 만큼, 인종차별 방지·인권옹호 운동가들이 앞장서서 전국적으로 데모를 이끌어나간다. 보수적 일간지에서마저도 “내 식구들을 이유도 없이 죽인 미국을 나는 평생 용서못할 것”이라는 미국폭격의 희생자 유가족들의 인터뷰들을 선보인다.

그런데 이번 사태의 책임을 전적으로 아랍·이슬람 세계에 물어 미국 행동의 ‘당위성’을 암시하는 한 저명한 지식인의 논문이 나와 반전 운동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그 논문의 영향력이 크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저자가 다름아닌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1947년생)라는 인도의 이슬람 출신 영국 문호이기 때문이다. 몇 작품이 각급 학교의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명성을 떨친 그는, <악마의 시>라는 이슬람의 교주 마호메트를 풍자한 포스트모던 소설로 1980년대 후반부터 이슬람 극우의 극단적인 노여움을 산 뒤에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는데, 미국의 <뉴욕타임스>(11월2일치)와 노르웨이의 <다그블라데트>(11월3일치)에 실린 그 논문의 비중은 매우 높다. 그러나 찬란한 문체로 쓰인 그의 논문을 읽어가면서 느낀 것은, 사회 현상의 표피 뒤에 숨겨져 있는 ‘도전에 대한 응답’이라는 인과론적 구조를 루시디가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루시디의 논문은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그게 바로 이슬람이 문제다”는 제목은, “이슬람과의 전쟁이 아니고 테러리스트와의 전쟁이다”는 식의 미국 지도부 궤변의 맹점을 찌른다. 루시디의 진단의 핵심은, 전쟁의 원인이 이슬람 과격분자들의 ‘반(反)서구적·반(反)근대적 편집병’에 있다는 것이다. 루시디가 생각하는 ‘편집병의 증후군’은, 이슬람주의를 이질시·적대시하는 대부분의 서구의 보수 논객들이 많이 언급하는 신에 대한 공포심리의 강조와 여성인권의 부정, 성직자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의 강요와 현대 대중문화의 절대적 부정 등이다. 한마디로 루시디는 이슬람주의를 ‘근대에 대한 중세 복고적·정신병적인 반란’으로 규정하고 이 반란이 마땅히 패배해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반전운동 확산에 찬물을 끼얹다

루시디의 논리가 헌팅턴의 악명높은 ‘문명 충돌론’과 확연히 다른 점은, 그가 이슬람주의를 ‘문명’도 아닌 단순한 ‘집단 정신질환’으로 보고, ‘이슬람 문화권의 이슬람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외친다는 것이다. 수백만명의 이슬람 신도들이 동시에 ‘집단 정신질환’에 걸린 이유로서, 루시디는 미국의 ‘부패한 독재정권에의 지원’도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지만, 주된 이유로는 ‘근대에의 적응 실패, 종교를 사생활적인 부분으로 보는 개인주의 수용에의 실패’ 등을 제시한다. 요약하자면 서구적 근대를 제대로 자기화하지 못한 자신들이 결국 ‘문명’한 인류를 위협할 만한 집단 정신질환이 생길 토양을 만들어낸 만큼, 반성하여 ‘근대화’에 좀더 힘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프간을 공격하는 미군과 영국군을, 루시디는 물론 공개적으로 ‘치료해주는 의사’로까지 칭찬하지 않지만 그가 이번의 전쟁에 ‘정신질환의 치유’라는 명분을 부여하는 것이 문맥상으로 파악된다. 지성인답게 루시디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공동적인 책임 유기에 대한 이슬람 세계 지성인의 반성”을 촉구하고 나선다. 식민주의 침략의 책임이 열등하고 잘 개화되지 못한 조선인들에게 있다는 개화 지상주의자 출신의 친일파 윤치호나 이광수의 논리와 놀랍게도 닮은 루시디의 논지는, 이미 일부의 보수 노르웨이 독자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이로 봐서는 그의 글이 반전 운동의 확산을 억제하는 쪽으로 작용할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까지 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이 전쟁에 명분이 있다”는 주장을 펴고자 하는 일부 우파와 극우들의 위치를 크게 강화시킬 가능성이 많다. 그들 ‘주전’(主戰)쪽에서 루시디의 ‘근대화 실패론’이 귀중하게 평가되는 이유는 외부인인 서구인이 아니라 이슬람 문화권의 내부인이 이슬람의 ‘내재적 결함’을 논한다는 것이다.

루시디의 글을 읽으면서 필자가 안타까웠던 부분은, 이슬람권 출신의 작가가 중동 상황의 표피만 보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피상성과 그 글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이용될지에 대해 관심없는 무책임성이었다. 루시디가 이미 글머리에 언급했던 토인비의 ‘도전·응답론’만이라도 인식했다면, “근대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기에 이슬람주의라는 집단 정신병에 걸렸다”는 자기비하적이며 단순한 논리를 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다 아는 서구·미국, 그리고 그 첨병인 이스라엘의 노골적인 침략과 약탈, 제국주의적 착취에 의한 ‘강요된 빈곤’ 이외에도 이슬람권이 20세기에 직면한 ‘서구의 도전’이 과연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지적인 도전 정도였는가?

서구적 제국주의적 ‘근대’가 중동의 후진성 심화라는 결과를 가져다준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루시디 자신도 미국에 의한 ‘중동 독재들의 지원’을 간단히 언급했지만, 이를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대부분 이슬람 국가 정권들의 전반적인 예속화와 대미 예속관계에 의한 부패한 독재의 영구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동·북아프리카의 친미 독재정권의 대다수는 그 주민들에게 약탈자·폭군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몇천명의 주민들을 “이슬람 게릴라 지원을 했다”는 혐의로 살육한 알제리의 군사정권, 고문의 기술로 전세계적인 악명을 떨친 이집트의 독재,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장군도 정상적인 정통성의 부재를 미국의 원조로 메우고 있다.

친미 약탈정권의 희생자인 주민들이 결국 반미 운동의 중심지인 사원과 이슬람주의를 구심점으로 결집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국가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과연 ‘집단 정신병’만으로 취급할 수 있는가? 과연 민중 복지와 교육, 그리고 전통 풍속의 옹호에 주력을 경주하는 모든 이슬람주의자들이 다 테러리스트인가? 그리고 친미 압제하에서 약탈적 정권의 희생자들이 힘을 모을 수 있는 또다른 구심점- 예컨대 좌익 정당이나 독립적 노조- 이 존재하는가?

용서받을 수 없는 ‘오만한 귀족주의’

물론 현재 뉴욕의 고급 주택가에서 살고 있는 루시디는(*지난 2004년에 루시디는 인도의 모델 겸 여배우 파드마 라크시미와 네번째 결혼을 했다. '신여성'에 대한 취향에 있어서도 루시디는 이광수와 닮은 듯하다), 언제나 고문과 암살의 위험하에서 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운동 방식을 ‘정신병’으로밖에 보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오만한 귀족주의이다. 그리고 과연 그는 양민들을 죽이는 미국 폭탄들이 중동인들로 하여금 사생활과 여성인권, 그리고 개인주의의 중요성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믿을 만큼 순진한가? 미국의 침략이 중동의 오히려 ‘저항적인 종교적 극우’들의 영향력만을 키울 것이라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사실이다.

루시디는 반전 운동의 무의미성을 암시하지만 사실상 그가 갈망한다는 ‘중동에서의 근대의 달성’은 반전 운동의 성공에도 크게 달려 있다. 반전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인 미국의 중동 독재 지원의 중지가 이루어져 중동에서도 민주화가 시작해야 그들이 공포·복종 심리를 떨쳐버리고 개인주의의 매력과 사생활의 귀중함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루시디가 이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가 속하는 포스트모던 문화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와 같은 ‘문화 귀족’들이 약자의 보호라는 문학인의 본연의 의무를 망각하고 제국주의에 대한 주구(走狗)적 역할을 하는 것이 사회적인 해악을 끼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반제·반전 운동의 큰 흐름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칼럼에서 언급되고 있는 뉴욕타임즈 기고문(http://www.nytimes.com/2001/11/02/opinion/02RUSH.html?ex=1172898000&en=7a8a39033f2c46bf&ei=5070) 전문은 아래와 같다.

November 2, 2001

Yes, This Is About Islam

By SALMAN RUSHDIE

LONDON -- "This isn't about Islam." The world's leaders have been repeating this mantra for weeks, partly in the virtuous hope of deterring reprisal attacks on innocent Muslims living in the West, partly because if the United States is to maintain its coalition against terror it can't afford to suggest that Islam and terrorism are in any way related.

The trouble with this necessary disclaimer is that it isn't true. If this isn't about Islam, why the worldwide Muslim demonstrations in support of Osama bin Laden and Al Qaeda? Why did those 10,000 men armed with swords and axes mass on the Pakistan-Afghanistan frontier, answering some mullah's call to jihad? Why are the war's first British casualties three Muslim men who died fighting on the Taliban side?

Why the routine anti-Semitism of the much-repeated Islamic slander that "the Jews" arranged the hits on the World Trade Center and the Pentagon, with the oddly self-deprecating explanation offered by the Taliban leadership, among others, that Muslims could not have the technological know-how or organizational sophistication to pull off such a feat? Why does Imran Khan, the Pakistani ex-sports star turned politician, demand to be shown the evidence of Al Qaeda's guilt while apparently turning a deaf ear to the self-incriminating statements of Al Qaeda's own spokesmen (there will be a rain of aircraft from the skies, Muslims in the West are warned not to live or work in tall buildings)? Why all the talk about American military infidels desecrating the sacred soil of Saudi Arabia if some sort of definition of what is sacred is not at the heart of the present discontents?

Of course this is "about Islam." The question is, what exactly does that mean? After all, most religious belief isn't very theological. Most Muslims are not profound Koranic analysts. For a vast number of "believing" Muslim men, "Islam" stands, in a jumbled, half-examined way, not only for the fear of God ?the fear more than the love, one suspects ?but also for a cluster of customs, opinions and prejudices that include their dietary practices; the sequestration or near-sequestration of "their" women; the sermons delivered by their mullahs of choice; a loathing of modern society in general, riddled as it is with music, godlessness and sex; and a more particularized loathing (and fear) of the prospect that their own immediate surroundings could be taken over ?"Westoxicated" ?by the liberal Western-style way of life.

Highly motivated organizations of Muslim men (oh, for the voices of Muslim women to be heard!) have been engaged over the last 30 years or so in growing radical political movements out of this mulch of "belief." These Islamists ?we must get used to this word, "Islamists," meaning those who are engaged upon such political projects, and learn to distinguish it from the more general and politically neutral "Muslim" ?include the Muslim Brotherhood in Egypt, the blood-soaked combatants of the Islamic Salvation Front and Armed Islamic Group in Algeria, the Shiite revolutionaries of Iran, and the Taliban. Poverty is their great helper, and the fruit of their efforts is paranoia. This paranoid Islam, which blames outsiders, "infidels," for all the ills of Muslim societies, and whose proposed remedy is the closing of those societies to the rival project of modernity, is presently the fastest growing version of Islam in the world.

This is not wholly to go along with Samuel Huntington's thesis about the clash of civilizations, for the simple reason that the Islamists' project is turned not only against the West and "the Jews," but also against their fellow Islamists. Whatever the public rhetoric, there's little love lost between the Taliban and Iranian regimes. Dissensions between Muslim nations run at least as deep, if not deeper, than those nations' resentment of the West. Nevertheless, it would be absurd to deny that this self-exculpatory, paranoiac Islam is an ideology with widespread appeal.

Twenty years ago, when I was writing a novel about power struggles in a fictionalized Pakistan, it was already de rigueur in the Muslim world to blame all its troubles on the West and, in particular, the United States. Then as now, some of these criticisms were well-founded; no room here to rehearse the geopolitics of the cold war and America's frequently damaging foreign policy "tilts," to use the Kissinger term, toward (or away from) this or that temporarily useful (or disapproved-of) nation-state, or America's role in the installation and deposition of sundry unsavory leaders and regimes. But I wanted then to ask a question that is no less important now: Suppose we say that the ills of our societies are not primarily America's fault, that we are to blame for our own failings? How would we understand them then? Might we not, by accepting our own responsibility for our problems, begin to learn to solve them for ourselves?

Many Muslims, as well as secularist analysts with roots in the Muslim world, are beginning to ask such questions now. In recent weeks Muslim voices have everywhere been raised against the obscurantist hijacking of their religion. Yesterday's hotheads (among them Yusuf Islam, a k a Cat Stevens) are improbably repackaging themselves as today's pussycats.

An Iraqi writer quotes an earlier Iraqi satirist: "The disease that is in us, is from us." A British Muslim writes, "Islam has become its own enemy." A Lebanese friend, returning from Beirut, tells me that in the aftermath of the attacks on Sept. 11, public criticism of Islamism has become much more outspoken. Many commentators have spoken of the need for a Reformation in the Muslim world.

I'm reminded of the way noncommunist socialists used to distance themselves from the tyrannical socialism of the Soviets; nevertheless, the first stirrings of this counterproject are of great significance. If Islam is to be reconciled with modernity, these voices must be encouraged until they swell into a roar. Many of them speak of another Islam, their personal, private faith.

The restoration of religion to the sphere of the personal, its depoliticization, is the nettle that all Muslim societies must grasp in order to become modern. The only aspect of modernity interesting to the terrorists is technology, which they see as a weapon that can be turned on its makers. If terrorism is to be defeated, the world of Islam must take on board the secularist-humanist principles on which the modern is based, and without which Muslim countries' freedom will remain a distant dream.

Salman Rushdie is the author, most recently, of "Fury: A Novel

 

 

 

 

맨마지막 필자 소개가 최근작 <분노>의 작가라고 돼 있는데, 그 소설이 이번에 번역돼 나온 것이다. 소개에 따르면, "1988년 작 <악마의 시>로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 동시에, 이슬람계의 격분을 촉발하며 사형선고를 받은 작가 살만 루슈디. 그가 영국에서의 도피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집필한 첫 번째 작품이다. 2000년 뉴욕을 무대로 쓴 이 자전적 소설에서 루슈디는 '분노와 폭력의 21세기'를 냉소적으로 그려낸다."



소개된 줄거리에 따르면 "케임브리지 대학의 사상사 교수인 말릭 솔랑카는 학문적인 삶에 염증을 느끼고 종신 교수직을 포기한다. 학교를 그만둔 그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온다. BBC에서 그에게 대중적인 심야 철학사 시리즈 기획을 제안하면서, 방송계에 진출하게 된 것. 지식인 인형들이 나와 대담을 나누며 논쟁을 벌이는 '리틀 브레인의 모험'은 당대의 컬트 클래식으로 자리 잡고, 이 프로그램의 사회를 맡은 여자 인형 '리틀 브레인'은 신드롬 수준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인형 '리틀 브레인'이 곧 저속하고 속물적인 대중의 아이콘으로 변질되자, 솔랑카는 참을 수 없는 노여움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이 가족들을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다 도망치듯 미국으로 건너간다. 부와 힘이 절정에 달해 있는 곳, 모든 과거가 사라지고 현재만 있는 곳, 모두가 현대인이라는 익명 속에 살아가고 있는 미국 땅에서 솔랑카는 철저하게 은둔생활을 한다. 그러나 분노는 잠재워지지 않는다."

거기에 덧붙은 코멘트에 따르면 "인도 출생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것, 아내와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미국으로 도피한 것,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연인의 흉터까지... 자신의 실제 이력과 매우 흡사한 주인공 솔랑카의 입을 빌려 루슈디는 21세기 미국의 표정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그런 점에서도 루시디판 <나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광수의 <나의 고백>(1948)은 소설이 아닌 수필 형식의 회고록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덧붙이자면 루시디는 재작년에 부시 대통령과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이슬람교를 풍자한 소설 ‘악마의 시’로 유명한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58)가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의 일방주의 외교정책이 이슬람 테러리즘을 부추긴다고 비판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12일 보도했다. 루시디는 “사람들을 반미로 뭉치게 하는 현 (미국) 행정부의 기묘한 능력이 이슬람 테러주의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며 “9·11테러 이후 세계가 미국에 느낀 엄청난 동정이 급속히 사라지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은 미국을 떠나자마자 미국의 적들과 미국의 우방들이 아주 비판적으로 미국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루시디는 미국에 대한 자신의 감정 변화 이유가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 정책들과 세계 다른 나라들과 진지하게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 태도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따라서 “세계사의 이 특정한 순간에 일반 미국인들은 세계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넓히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면서 국제적 대화를 강조했다.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성장한 루시디는 전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1989년 ‘악마의 시’를 불경하다며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이후 살해 위협을 받으며 수년 간 숨어 살아왔다
.(국민일보, 05. 04. 14)

그렇다고 루시디가 반미주의로 전향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이슬람을 '비하하는' 소설 <악마의 시>를 썼다고 해서 그를 반이슬람주의 작가로 매도하는 것만큼이나 성급한 일로 보인다. 문제는 그러한 불경과 분노의 '문학적 형식'이다(이 점에서 이광수는 적어도 '작가'로서는 철저하지 못했다. 물론 그에겐 '소설'보다 더 중요한 '대의'들이 많았겠지만). 루시디의 <분노>는 그런 점에서 흥미를 끈다. 그의 고백/분노는 미국이란 나라, 더 나아가 '이 세계'에서 한 (망명)작가가 어떤 삶을 살 수 있고 어떤 소설을 쓸 수 있는가에 대한 한 가지 척도를 제시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덧붙여 이광수에게 결여돼 있었던 게 무엇인지 확인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07. 03. 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해 들어 내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유일한 (반)강제는 매달 '사회적 독서'의 목록을 올리고 취지에 공감하는 몇몇 이들의 책읽기를 꼬드기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나 자신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은 있지만 매달 같이 책을 읽거나 적어도 책을 서가에 꽂아두는 분이 몇 분 계시기 때문에(땡스투 추천으로 보자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는 된다) 아주 헛일은 아니다 싶다.

지난 2월에 꼽은 네 권의 책들 가운데 나는 케빈 스미스의 <순결한 할리우드>를 마지막으로 손에 들었고 '톰 크루즈와의 인터뷰' 같은 몇몇 꼭지를 전철에서 읽었다. "이 책으로 인해 성경은 인류 사상 두번째 위대한 책으로 밀려났다"는 밴 애플렉의 허풍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건질 만한 대목이 없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머지 책들, 니스벳의 <보수주의>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책장을 많이 넘기진 못했으나 언제나 사정거리 안에 두고 있다. 그리고 남재일의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도 여러 꼭지를 읽었으니 과락은 면할 만하다.

내 경우 자랑할 만한 습관은 아니지만 한두 권의 책을 완독해가면서 보통 20여 권의 책을 같이 뒤적이기 때문에 막상 '실적'으로 남는 책은 많지 않다. 최근에 완독한 책은 박이문의 <예술철학>(재판 2006) 정도이다(별첨으로 덧붙여진 번역논문 '양상론적 예술의 정의'는 부분적인 오역에다 오타 등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나머지 책들은 모두 부분적으로 읽거나 참조하는 식이다(그렇게 건드리는 책들이 한달에 50권은 훌쩍 넘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여러 종류의 강의를 해야 하고 한편으론 원고/논문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남독의 습관도 딴은 강제된 것이라고 해야겠다. '사회적 독서'의 목록에 올려놓는 책들은 그런 가운데에서 매달 좀더 신경을 쓰기로 작정한 책들이다. 나름대로 '특혜'를 부여하는 셈이다. 이유는 함께 읽어봅시다, 라는 것이고.   

 

 

 

 

3월에 읽을 첫번째 책은 '한국문학 읽기'로 올해 발표 90주년을 맞는 이광수의 <무정>(1917)이다. 나로선 20년만에 다시 읽게 되는 작품인데, 사실 <바로 잡은 '무정'>(문학동네, 2003)이라고 새로운 '정본'이 나온 게 불과 몇년 전이다(<'국민'이라는 노예>(삼인, 2005)에도 편자의 후기 등이 재수록돼 있다). 편자인 김철 교수가 다시 책임편집을 맡아서 낸 <무정>(문학과지성사, 2005)도 불과 재작년에 나왔을 뿐이고. 그러니까 20년의 세월이라고는 하지만 다시 읽을 만한 분위기가 조성된 건 비교적 최근이라는 얘기이다.

물론 이광수를 읽을 때 옆에 두고서 필독해야 하는, 김윤식 교수의 평전 <이광수와 그의 시대1,2>(솔출판사, 1999)의 재판이 나온 건 좀 오래 됐다. 내가 처음 그 책을 읽은 건 아마도 80년대 후반쯤이었을 걸 같고, 그때 판본은 <이광수와 그의 시대1,2,3>(한길사, 1986)이었다(나는 2/3쯤 읽은 기억이 있다). 그때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고는 나중에 절판되고 나서 구입해두지 않은 걸 후회했었는데, 솔출판사판의 재판이 나왔을 때도 그냥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리고 이번에도 다시 읽어보기 위해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보관해둘 만한 장소가 여의치 않은 탓이다(이러다 또 절판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도서관에서 같이 대출한 책은 젊은 이광수 연구자 최주한 박사의 <제국 권력에의 야망과 반감 사이에서>(소명출판, 2005). 학위논문을 손질한 것이기도 한데 이광수 연구서들 가운데서는 '드물게도' 재미있다(주로 다루는 건 <무정>이 아니라 <유정>이지만). 그밖에도 여러 권의 참고문헌을 꼽을 수 있지만 사설을 여기까지만. 참고로, 절판된 책들 가운데 가장 유익한 건 김현 편, <이광수>(문학과지성사, 1977). 김동인의 '<무정> 분석' 등이 포함된 유익한 자료집이다.  

 

 

 

 

두번째 책은 '한국사회 읽기'란 핑계로, 얼마전에 출간된 고종석의 <바리에떼>(개마고원, 2007)을 꼽는다. 책은 이미 구입해두었는데, 사실 '잡다함'이란 뜻의 프랑스어 '바리에떼'를 제목으로 삼은 건 내 취향이 아니다(내가 저자인가?). 기억에는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이 <프랑스문학을 찾아서>의 한 부에 그런 제목을 붙였고, 연원을 따지자면 프랑스 시인 발레리가 그런 책인가 에세이 묶음을 또 썼다(발레리만 그런 제목을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서 '발레리 따라하기'를 거쳐서 '김현 따라하기'의 연장이 아닌가도 싶다(얼마전 연재를 끝낸 '말들의 풍경'이 알다시피 김현 평론집의 제목을 훔쳐온 것이었다). '따라하기' 자체가 문제는 아니고 ('바리데기'도 아닌) '바리에떼'란 말이 우리말에 아무런 소속을 갖고 있지 않은 '겉멋'이란 생각이 들어서이다.

'잡다함'을 빙지한 그런 '겉멋부림'에도 불구하고(사실 저자가 프랑스 포도주 마니아라고 하니까 '바리에떼' 정도의 멋을 부리는 건 이해할 만하다) 책은 여느 고종석의 책들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재미있다(목차를 보니 내가 이미 읽어본 글들도 여럿된다. 잡지에 실린 에세이나 단행본에 실린 발문들이 그런 종류이다). '군소리'라고 붙여놓은 서문을 보면 그가 이 책에서 제일 자신하는 글은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알음, 2003)를 다룬 '식민주의적 상상력'이다.

"비판의 대상이 된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의 저자로부터 별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진 못했으나, 식민지 시기의 역사적 복권을 통해 민주주의 운동의 정통성을 흔들려는 온갖 '경제론'들의 급소를 이 글이 비교적 정교하게 움켜쥐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이런 '자화자찬'이 본래 고종석스러운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아는 고종석은 허튼 소리를 할 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온갖 경제론들의 급소'를 같이 움켜쥐어보도록 하자.

덧붙이자면 '1970년대를 사는 백수의 잡감'이란 부제를 단 그의 자기세대론 '우리 세대를 위하여' 같은 글을 읽으면 저자와 포도주라도 같이 한잔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왜 포도주인가는 읽어보면 안다). 고종석도 거의 '아줌마' 다 됐다는 걸 확실하게 입증해준다.

안쪽 책갈피에는 '저자의 다른 책들'이라고 16권의 책 목록이 적혀 있는데, 훑어보니 내가 안 갖고 있는 건 <히스토리아>(마음산책, 2003)과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개마고원, 2006), 그리고 <고종석의 영어이야기>(마음산책, 2006) 세 권이다. 앞의 두 권은 주로 신문의 칼럼들을 모은 것이고 짐작엔 그 대부분을 나는 지면에서 읽었다. 그리고 기억에 고종석의 '영어공부' 책은 그 한권이 아니지만 나는 모두 안 갖고 있다. 그런 책들은 그가 '코리아타임스'의 기자였다는 전력을 떠올리게 해주지만 내가 좋아하는 고종석은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에 대한 애정과 아는 체를 늘어놓는 고종석이다. 그 영어책을 사둘 만한 여력이 된다면 그보다 먼저 <기자로 산다는 것>(호미, 2007)을 사서 읽고 싶다. 사실은 이 책을 '3월의 책'으로 올리려고도 했지만 그건 나중 생각이었다. 뭐 결과적으론 엎어치나 메치나 두 권 모두를 꼽아놓은 셈이 되는군.  

 

 

 

 

세번째 책은 '미국을 알자'는 취지로 좀 '뒤늦은' 화두이면서 아직 진행중인 사안인 한미 FTA 관련서들을 목록에 올려둔다.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녹색평론사, 2006)를 먼저 꼽아두긴 했는데 관련서들은 더 많이 나와있으며 적절히 참조하면 되겠다. 협상마감 시한인 4월을 코앞에 두고 있는지라 도대체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더 늦기 전에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눈뜨고 코 베이는 일을 당하기 전에 말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론을 읽자' 범주에서 꼽은 책은 지젝의 신간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이다. 번역본 상으론 450여쪽에 이르니까(원저는 280여쪽 분량이다) 다소 부담스럽긴 한데, 대신에 맨마지막 6장 '당신의 민족을 당신 자신처럼 즐겨라'를 먼저 읽을 예정이다. 지젝의 '민주주의론'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계획한 것이고, <삐딱하게 보기>와 <혁명의 다가온다>를 다시 참조할 생각이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박종철출판사, 1999)와 위너 본펠드의 <무엇을 할 것인가>(갈무리, 2004)를 옆에 나란히 놓아두고서. 더불어 같이 읽기 위해 엊그제 꺼내놓은 책은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갈무리, 2004). 요약하면 '민주주의'와 '레닌'이 3월의 이론적 화두가 될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목표는 목표이다. 일정으로 보아 몇 페이지 건드리지도 못하고 3월 한달이 후딱 지나갈 가능성이 농후하지만(벌써 봄이라니!) '사회적 독서'의 의의라는 게 따로 있겠는가. 읽다가 다 못 읽으면 옆에서 이어서 읽어주고 뒤에서 마저 읽어주는 게 사회적 독서다. 당신이 그 옆사람, 뒷사람이 되어주면 좋지 아니한가!..

07. 03. 01.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07-03-01 00:29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페이퍼에 제 책짐이 늘어납니다. 읽는 속도도 느려서 줄 기미도 안 보입니다. 책정리하는 시점에서 괜시리 원망 한 번 던져보고요. ^^

수능세대, 교과서에서 접했던 택스트들을 재미로 다시 읽기는 쉽지가 않더라구요. 김승옥 전집을 읽으면서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었단 말야!! 버럭! 혼자 막 화났던 기억 나요. 이광수의 '무정'이라.. 제 얇은 귀가 팔랑거리는 소리.. 들리시나요? ^^

로쟈 2007-03-01 01:55   좋아요 0 | URL
제가 '물귀신'이군요.^^ 계획으로 치면 하이드님이 저보다 덜 읽으시는 것도 아니던데요.^^

동대장 2007-03-01 06:54   좋아요 0 | URL
엎어치나 메치나로 소개하신 기자로 산다는 것이 끌리는 군요.
언제나 좋은 책 소개에 분주하신 님 덕분에 이달에도 또 한권 도전해 볼랍니다.
좋은 공휴일 보내시길.....총총

로쟈 2007-03-01 09:50   좋아요 0 | URL
그 '몇 명' 가운데 '동대장'님도 포함되시는군요.^^

에바 2007-03-01 10:14   좋아요 0 | URL
저는 '이론을 읽자'의 그 화두('레닌')가 마음에 들고 기대가 되는군요.^^ 저도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의 6장을 먼저 읽어 보겠습니다.

로쟈 2007-03-01 10:44   좋아요 0 | URL
에바-지젝님의 리뷰도 고대하겠습니다.^^
 

'필름2.0'에서 지난주에 읽었던 칼럼, 보다 정확하게는 편집장 직무대행이 쓴 '편집장의 말'을 옮겨놓는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달에 '사회적 독서' 목록에 올려놓았던 케빈 스미스의 <순결한 할리우드>(Media2.0, 2006)에 대한 코멘트가 포함돼 있어서이다. 나로선 연휴나 지나서야 들춰볼 수 있을 듯한 책이지만 책의 성격을 미루어짐작해볼 수 있도록 해준다. 더불어, 칼럼 자체도 읽어봄 직하다.

필름2.0(07. 02. 13) 가볍고 싶은 무거운 마음

지난 주말 TV를 보는데 쇼 프로그램에 ‘컨츄리 꼬꼬’가 나왔다. 온갖 버라이어티 쇼를 잠식하고 있는 엔터테이너 탁재훈과 신정환이 아니라 둘이 짝을 이룬 그룹 컨츄리 꼬꼬다. 검은 선글라스로 한껏 멋을 낸 그들이 “헬로우~ 콩가~ 달나라 꿈꾸는 나의 허니~” 하며 그들의 마지막 히트곡 ‘콩가’를 신나게 부르는 순간, 내 몸이 일종의 무중력 상태에 들어간 듯 함께 들썩인다.

나는 그들의 그 가벼움을 사랑한다. 마치 세상의 모든 엄숙한 것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컨츄리 꼬꼬는 새벽잠 깨우는 수탉 마냥 사람들을 부산하게 깨워놓고는 한바탕 놀아보자고 유혹한다. 그런데 그들의 유혹에는, 이른바 ‘그루브’라는 게 있다. 노래를 썩 잘하는 것도 아니고, ‘동방신기’처럼 아크로바틱한 몸놀림을 선보이는 것도 아닌데, 대신 그들은 놀고 싶어 안달이 나 옆 사람까지도 꼬드기고 마는 날라리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들의 퍼포먼스에서 그 어떤 음악적 성취나 대중문화적 맥락을 따지는 것만큼 무용한 짓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피로감을 가벼움의 미학으로 돌파한다는 측면에서만큼 컨츄리 꼬꼬는, 싸이나 DJ DOC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뮤지션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가끔 이렇게 가벼움을 체현하거나 몸소 실천하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고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읽은 <순결한 할리우드>라는 책의 저자 케빈 스미스는, 가벼움이라는 측면에서는 장인적 경지를 보여준다. <점원들>이나 <제이 앤 사일런트 밥> 같은 엉뚱하고도 생기 있는 영화를 찍어온 미국 독립영화계의 스타 감독이자 만화작가인 케빈 스미스는, 근엄한 척하는 주류사회에 ‘퍽큐’를 날리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인물인 것 같다.

책 속에서 그는 리즈 위더스푼을 거침없이 '왕재수'라 부르며 독설을 퍼붓는가 하면, 인터넷 칼럼에 대한 독자들의 빈정거림을 더 강도 높은 빈정거림으로 응수한다. 과장과 거짓이 난무한 칼럼을 통해 만화광은 프리섹스를 즐기는 변태들이라는 근엄 세계의 편견에 한방 먹인다. 물론 절친한 친구 벤 애플렉을 묘사할 때는 지나치리만큼 개인적 애정에 경도돼 있긴 하지만, 육중한 몸무게의 이 괴짜는 층위를 가리지 않는 온갖 텍스트들의 숲에서 스카이 콩콩을 탄 것처럼 풀썩풀썩 뛰어 다닌다.

19세기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모두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다고 안타까워했지만, 그래서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숙명에 대한 경건한 수용만은 아닐 것이다. 버트란트 러셀이 시니컬하게 충고한 대로 삶을 견디는 무기로 ‘지성과 의지’를 발동하고 싶지만 그것도 말만 쉬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가벼움에 몰입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가해한 삶과 모순투성이의 세계를 견디는 가장 유효하고도 현실성 있는 대안이라는 직관 때문일 것이다.



설 연휴에 맞춰 개봉하는 두 편의 영화 <1번가의 기적>과 <복면달호>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휴먼코미디를 표방한 두 영화는 누추한 삶의 조건에 내몰린 사람들, 혹은 꿈과는 거리가 먼 현실의 질퍽함을 보여주고는 관객들로 하여금 눈물을 쏟게 만든 뒤 그 현실에 낙관의 베일을 덮어씌우며 막을 내린다. <1번가의 기적>에서 필제는 철거 현장에서 울부짖는 아이들에게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를 부르게 하고는 깡패들한테 맞아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한다. <복면달호>의 달호는 트로트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됐으므로 복면을 벗어 던지고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에 선택을 맡긴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 낙관이며 거짓 희망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두 대중 영화는 현실의 무게를 이 앙다물고 가슴에 새기는 다짐이 아닌, 그냥 가볍게 툭툭 털고 일어나는 가벼움의 힘으로 돌파하고 싶어 하는 관객들의 욕망에 흔쾌히 부응한다.

아직 영화를 못 봤지만 지난 호에 실린 장문일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니 <바람피기 좋은날>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영화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장 감독은 가볍고 자유롭고 싶은 우리의 욕망이 제도의 굴레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나는 풍경을 담아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불륜’이라는 수사로 가둘 수 없는 그 아수라장의 미학이 사뭇 기대되지만, 혹시라도 이데올로기의 폐허 위에서 깊이 팬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 본 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들판을 바라보는 듯한, 그런 허허로운 가벼움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살포시 고개를 든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그렇기 때문이다.

고백컨대, 나도 한때 ‘촐랑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가벼운 녀석이었다.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이라도 더 웃길 수 있을까, 유행하는 온갖 유머를 수첩에 적어놓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지금? 매일 ‘에헴’ 하느라 후배들과의 소통장애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 ‘꼰대’가 됐다. 아, 가볍고 싶은 무거운 마음이여.(최광희 편집장 직무대행) 

07. 02. 15.

P.S. 고백컨대, 나는 한번도 '촐랑이'라 불려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알라딘의 이 서재 덕분에 간혹 상당히 수다스러운 '아줌마'란 평도 뒤에서 듣는다. 내게는 아마도 이 서재가 '가볍고 싶은 무거운 마음'을 풀어놓는 공간인가 보다(순결한 로쟈?). 내 수준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한편, 편집장 대행 체제가 오래 가는 걸 보면 이지훈 편집장의 건강이 아직 호전되지 않은 모양이다. 직무대행 또한 만만찮은 '말발'을 자랑하지만 그럼에도 빈자리는 느껴진다. '필름2.0'을 손에 들면 언제나 가장 먼저 읽었던 게 맨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편집장의 말'이곤 했다는 걸 빌미로 그의 쾌유를 바란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7-02-15 22:5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수다'는 수다치고는 너무 어렵죠. 로쟈님의 레이더망은 한계가 어디입니까. 필름 2.0은 한번도 안봤는데. 전 아주 가끄음씩 씨네21만 봐요. 유토피아 디스토피아가 좋아서 봤더랬는데 막상 본문은 별로 안보게 되더라구요.

로쟈 2007-02-16 00:14   좋아요 0 | URL
'수다'도 여러 종류가 있을 뿐이겠지요. 글고, 필름2.0은 저렴해서 자주 사봅니다(신문 2부 값이니). 씨네21을 가끔 보고요. 물론 한주만 기다리면 다 온라인으로 서비스가 되지만...

2007-02-16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80 2007-02-16 10:45   좋아요 0 | URL
'순결한 로쟈?'에서 마시던 녹차가 사레걸렸어요. ^^

로쟈 2007-02-16 12:52   좋아요 0 | URL
**님/ 그 '수다'는 다른 곳에서도 듣는 얘깁니다.^^
소이부답님/ 저는 책임 안 지겠습니다.^^

노부후사 2007-02-16 15:39   좋아요 0 | URL
'로쟈의 순결한 19' 진행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ㅎㅎ

로쟈 2007-02-16 15:57   좋아요 0 | URL
나름대로 19+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곧잘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