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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이면 주말 북리뷰들을 미리 훑어보는데, 대략 30분 정도면 네댓 일간지들의 리뷰를 일람할 수 있다. 보통은 일주일에 3권 안팎의 책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중 1-2권 정도를 실제로 구입하는 듯하다(물론 그렇게만 도서구입이 이루어진다면 매달 몇십 만원씩의 책값을 물고 있지는 않겠지만). 이번주도 사정은 비슷한데, 그 3-4권의 책 중 하나가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역으로>(이매진, 2007)이다. 책을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하는 것은 예전에 <핀란드역까지>(실천문학사, 1987)로 출간된 바 있기 때문이다(다시 출간되었으면 하는 책으로 꼽은 적이 있다. http://blog.aladin.co.kr/mramor/1080104 참조.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근대혁명사상사>(을유문화사, 1962)로도 번역됐었다!).

보아하니 1940년에 나온 원서 자체가 영어권에서도 몇 년전 새로 출간되었고(2003년에 나온 듯하다) 이번에 나온 건 그걸 대본으로 한 새 번역이다. 간단히 말하면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역사를 만들어나간' 유럽의 혁명적 사상가/혁명가들의 발자취를 좇고 있는 책이다. 그 여정은 핀란드역으로 가는 철로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아래 사진의 배경으로 보이는 것이 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이다. 전면에 있는 거대한 동상은 물론 레닌이고. 책은 지난주에 출간됐지만 리뷰는 이번주에 실리고 있다. 한겨레의 리뷰가 가장 자세하기에 옮겨놓는다.

한겨레(07. 11. 24) 역사를 새로 쓴 자와 새로 쓸 자 누구인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서른 살의 죄르지 루카치(1885~1971)가 <소설의 이론>(1915) 첫줄에서 고대 그리스 신화시대의 영광을 떠올리며 이 영탄조의 문장을 내뱉었을 때, 거기에 회한만 깔려 있었던 건 아니다. 이 젊은 문예이론가의 가슴에는 희망도 살아 있었다. 역사에 대한 희망, 진보에 대한 희망이었다. 3년 뒤 루카치는 혁명 정당에 가입해 정열적인 활동을 시작함으로써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는 믿음을 실천에 옮겼다.

루카치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산 미국 문필가 에드먼드 윌슨(1895~1972)도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윌슨은 인류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일어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것이라는 진보적 견해를 평생 고수했다. 공산당에 가입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삶의 지침으로 삼았고 러시아 10월혁명에 마음으로 동참했다. 그의 젊은 시절 관심과 열정을 응축한 책이 <핀란드 역으로>다.

1935년 쓰기 시작해 5년 만에 펴낸 이 책은 역사의 기관차가 인간해방의 세상을 향해 난 철로를 달려간다는 신념을 펼쳐놓은 저작이다. 문체의 유려함, 묘사의 생동감, 신념의 절실함으로 인해 이 책은 현실 사회주의 실험이 파산한 뒤에도 여전히 역사교양서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이 대학시절 탐독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유명해진 이 책이 완역돼 나왔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역사의 기관차가 다다른 가장 중요한 지점이 ‘핀란드 역’ 곧 러시아혁명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어판 서문을 새로 쓴 루이스 메넌드(뉴욕시립대 교수)는 이 책의 가치가 ‘제목’이 아니라 ‘부제’에 들어 있다고 말한다. ‘역사를 쓴 사람들, 역사를 실천한 사람들에 관한 탐구’라는 부제는 역사를 창조하려고 분투했던 사람들의 감동어린 삶이야말로 이 책의 진정한 주제임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사람들의 신념에 찬 투쟁을 동력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지은이 윌슨은 1789년 프랑스혁명 직후부터 1917년 혁명까지 역사의 기관차에 올라탔던 혁명가·사상가들을 독자 앞으로 불러들인다.

이 책이 그려 보이는 역사의 철로는 한 방향으로 놓인 단선 철로가 아니다. 철로는 두 방향으로 나 있다. 책의 앞부분에서 지은이는 프랑스혁명에서 출발한 두 철로 가운데 하나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부르주아 철로다. 19세기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에서 시작해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로 끝나는 이 철로는 희망과 믿음의 점진적 쇠퇴를 보여준다. 미슐레는 프랑스혁명의 감격적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인간의 가슴이 그렇게 활짝 열리고 훤히 트인 적이 일찍이 없었다. 계급·당파·재산의 구별이 그렇게 완전히 사라진 적도 없었다.” 이 역사가에겐 “민중이야말로 주연배우였다.” 그러나 미슐레의 낙관은 세대를 거치면서 힘을 잃었다. 두 세대 뒤의 아나톨 프랑스는 1871년 파리코뮌을 세운 민중을 두고 “쓰레기 같은 놈들, 흉측한 놈들”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부르주아의 혁명적 열정은 쇠락했고 이들이 세운 철로는 끊어져 전망을 잃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지은이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다른 한 철로를 살핀다. 프랑스혁명의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표어의 차원에서 실제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현실에 구현하려 한 사람들이 만든 철로다. 29살 때 혁명에 참여한 그라쿠스 바뵈프가 첫 번째 주인공이다. 1794년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이른바 ‘테르미도르 반동’이 개시됐을 때 바뵈프는 ‘평등협회’를 만들어 민중봉기를 조직하고 ‘평등선언’을 썼다. “프랑스 인민이여! 우리와 함께 평등의 공화국을 선포하자!” 최초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시작이었던 셈인데, 그러나 바뵈프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뒤를 이어 생시몽·푸리에·오언과 같은 인도주의자들이 등장해 ‘사회주의 공동체’ 방안을 내놓고 그 방안을 실천했다. 이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는 머지않아 ‘공상’에 가까운 실험이었음이 드러났다.

지은이는 이 즈음에서 혁명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카를 마르크스(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2895)를 등장시킨다. 이 책에 서술된 혁명가 마르크스의 삶은 익히 알려진 대로 추방과 망명과 궁핍의 연속이다. 그러나 지은이의 펜은 마르크스의 반항적 정신을 묘사하는 데서 더 빛을 발한다. 스물세 살 마르크스가 쓴 시는 자기 내부의 들끓는 정열을 이렇게 묘사한다. “파도는 왜 으르렁거리는가? 우레와 같은 소리로 절벽에 부딪쳐 깨지기 위해서요.”

1845년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썼던 마르크스는 3년 뒤 역사적 문건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다. 이 팸플릿은 “시종일관 고성능 폭탄 같은 힘으로 가득 찬” ‘부르주아에 대한 선전포고문’이었다. 1850년 런던으로 망명한 마르크스는 무려 17년의 세월을 바쳐 <자본> 1권을 완성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진통에 진통을 거듭한 끝에 탄생한 도구”, 역사를 바꾸고 창조하는 데 곧바로 쓰일 변혁의 도구였다. <자본>을 출간한 뒤 마르크스는 이 책을 쓰는 일이 “내 건강과 내 삶의 행복과 내 가족을 희생시킨 작업”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을 쓰는 동안 런던의 빈민굴에서 세 아이를 병으로 잃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전 저작을 통해 자본주의가 불러낸 지하의 힘, 곧 프롤레타리아가 서유럽을 뒤엎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그가 죽고도 한참 동안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졌다. 1917년 4월 망명지에서 돌아온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 역’에 내려 곧바로 단상 위에 올라가 “동지들!”로 시작하는 사자후를 토했다. 그날로부터 일곱 달 뒤인 11월 6일(옛 러시아력 10월 24일)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꼭 90년 전에 터진 그 혁명은 인간이 역사를 창조한다는 신념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는 그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어른거린다.(고명섭 기자)

역사를 믿었던 트로츠키…인간을 믿었던 레닌

<핀란드 역으로>에서 지은이 에드먼드 윌슨은 러시아혁명의 두 주역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1924)과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1879~1940)를 비교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레닌이나 트로츠키나 ‘역사를 자신과 동일시했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그 동일시의 방식은 달랐다고 윌슨은 말한다.

지은이의 트로츠키에 대한 평가는 다소 인색한 편이다. 그는 혁명 동지 루나차르스키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소중히 여겼으며, 인류의 기억 속에 진정한 혁명 지도자라는 영광된 인물로 남기 위해 어떤 개인적 희생도 달갑게 받아들일 게 분명했다. 자기 목숨조차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관찰자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한다. “이 사람은 관중만 많으면 서슴지 않고 러시아를 위해 싸우다 죽을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트로츠키는 연극무대의 주인공처럼 역사의 무대에 섰던 것이다.

특히 트로츠키에게 역사란 곧 섭리와 같은 것이었고, 자신은 그 섭리를 알고 그 섭리를 실현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강했다고 지은이는 평가한다. 볼셰비키의 승리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트로츠키는 경쟁상대 멘셰비키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당신들은 가련한 고립된 개인들이다. 당신들은 파산했으며, 이제 당신들의 역할은 끝났다. 이제는 당신들의 자리로 돌아가라-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그러나 머잖아 그 자신도 스탈린에게 패배해 멘셰비키 신세가 됐다고 지은이는 씁쓸하게 말한다.

레닌은 트로츠키에 비하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었다고 이 책은 평가한다. “레닌은 트로츠키와 달리 이론 속에서 살지 않는다. 언제나 실제 상황을 살피며, 자기 이야기의 조리가 맞는지는 괘념치 않은 채 가능한 한 상황을 정밀하게 포착한다.” 또 트로츠키와 달리 레닌에게 역사는 수호천사 노릇을 하지 않는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역사는 미적거리다가 승리를 놓친 혁명가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레닌은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역사와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태도가 더 분명했던 것이다. 그런 레닌조차도 러시아에서 10월혁명의 전주곡인 2월혁명이 터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변화는 때때로 불현듯 찾아오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민중임을 이 책의 지은이는 넌지시 보여준다.(고명섭 기자)

07. 11. 23.

P.S. 두어 가지 '주석'을 보탠다. 먼저, 책의 표지는 국역본보다 영어본이 훨씬 '현장감'이 있다. 윌슨이 1930년대 후반에 조명한 현실 사회주의로의 역사와 1991년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되돌아보게 되는 그 역사는 분명 다른 의미를 갖는다. 서평은 끄트머리에서 러시아 10월 혁명의 그 감격이 이 책에는 채 가시지 않은 채 어른거린다고 적었는데, 오늘날의 독자가 그 감격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동참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아마도 새로 첨가된 루이스 메넌드의 서문은 이런 점을 짚어주고 있을 듯하다. 메넌드는 작년에 <메타피지컬 클럽>(민음사, 2006)이 소개된 '미국철학' 전문가이다.  

기사의 한 대목: "1917년 4월 망명지에서 돌아온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 역’에 내려 곧바로 단상 위에 올라가 “동지들!”로 시작하는 사자후를 토했다. 그날로부터 일곱 달 뒤인 11월 6일(옛 러시아력 10월 24일)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물론 오늘날의 지명으론 '상트페테르부르크'이지만 1917년 당시에는 '페트로그라드'였다. 1차대전 기간이라 러시아는 독일과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독일식의 '페테르부르크'란 이름을 '페트로그라드'로 개명했기 때문이다(레닌 사후에는 '레닌그라드'로 변경된다). 그리고 러시아 10혁명은 11월 7일(옛 러시아력 10월 25일)에 일어난다. 윌슨이 잘못 기재한 것인지 기자가 착오를 일으킨 것인지 모르겠지만.

덧붙이자면, 러시아의 역명은 종착역에 준하여 붙여진다. '핀란드역'이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건 그런 이유에서인데, 핀란드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는 역이란 뜻이다(때문에 '레닌그라드역'은 모스크바에 있고 '모스크바역'은 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식이다). 해서, 문제는 '핀란드역'이 종착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우리는 '핀란드'로 이제/다시 출발해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하나? 헬싱키역으로 가야 하는 건가?.. 

P.S.2. 2007년의 레닌은 어떤 모습일까? 사진작가 이상엽이 만난 '오늘의 러시아 풍경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레닌이 있는 풍경>(산책자, 2007)도 '핀란드역으로' 가는 길에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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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1-24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왜 '핀란드'일까 읽는 내내 궁금했었어요.좀 헷갈리겠는데..러시아사람들은 익숙해져서 괜찮겠지만.

로쟈 2007-11-24 11:20   좋아요 0 | URL
문화적 차이죠. 사실 차들이 좌행하는 나라와 우행하는 나라가 있는 것처럼요...

소경 2007-11-25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먼의 <맑스주의의 향연>에서 관련 대목들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정황도 모른 채 버먼의 묘사만 넋놓고 읽기만 했다는.....

로쟈 2007-11-25 19:03   좋아요 0 | URL
버먼의 책들은 저도 좋아하는데 기대만큼 읽히지는 않는 것 같네요...

turk182s 2007-11-2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그런뜻이..근데 궁금해서그러는데 로쟈님은 이많은 책들을 언제다읽어요? 전 회사 술자리에 모임에 도저히 안되던데..쉬는날에는 자기바쁘고,,어쩌다 연차휴가내는날 도서관가서 읽어봐야 100페이지남짓,,절망!! 님은 무슨 속독법공부하시나요?정말궁금,,^^

로쟈 2007-11-29 01:00   좋아요 0 | URL
책을 보는 것과 읽는 건 다르지요. 저는 많은 책을 보고 그보다 훨씬 적은 책을 읽습니다.^^;

jose78 2007-11-29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궁금했는데~^^ '본다'라는 구체적 방법은 뭔지 궁금궁금~~ㅋㅋㅋ

로쟈 2007-11-29 01:03   좋아요 0 | URL
대략 어떤 내용의 책이구나, 라는 윤곽을 보는 것이죠. 일종의 인상을 기록하는 것이고, 읽기는 같이 살림을 차리는 것이죠...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내가 따로 자리를 마련하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 관련서는 하나의 트렌드를 이룬다. 가령 지난주에 나온 쑨리핑의 <단절>(산지니, 2007)이나 이번주에 나온 <캠브리지 중국사 10, 11권>(새물결, 2007)은 모두 주목에 값하는 책들로 개인적으로는 여러 편의 서평을 이미 읽어두었다. 하지만 당장 읽을 만한 여력이 안된다는 생각에 '낚시질'조차 미뤄두고 있다.

대신에 밀린 글들의 진도나 나갈까 하다가 머리가 가뿐한 것도 아니어서 잠시 '단순작업'을 하기로 했다. 한편으론 새로 나온 책들을 둘러보다가 단박에 재출간도서임을 알아본, 비탈리 루빈의 <중국에서의 개인과 국가: 공자, 묵자, 상앙, 장자의 사상 연구>(도서출판 율하, 2007)에 대해서 약간의 호기심이 생긴 때문이기도 하다(알라딘에는 저자가 '비탈 루빈'으로 오기돼 있다).

표지 자체가 예전에 출간된 현상과인식사의 표지를 바로 떠올리게 해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같은 제목의 책이 1988년에 현상과인식사에서 출간된 바 있다. 인터넷에 떠 있는 출판사 소개에는 "이 책은 다른 여러 나라들뿐만 아니라, 대만의 여러 대학ㆍ대학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교과서로 계속해서 읽히고 있는 것도 이 책이 주는 가치를 입증해준다. 18년전에 이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었지만 오래 동안 절판 상태에 있는 가운데 본 출판사가 이 책의 가치를 거듭 확인하고 다시 출간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전문분야의 독자들뿐만 아니라 일반독자들에게도 좋은 책으로 평가받으리라 믿는다."라고 돼 있다.

물론 다시 출간되었다거나 '중국' 관련서란 이유 때문에 내가 호기심을 갖게 된 건 아니다. "소련이 붕괴되기 전 구 소련의 학자 루빈 교수가 1970년 모스크바에서 펴낸 <고대 중국의 이데올로기와 역사>를 번역한 책으로 중국 지성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온 공자, 묵자, 상앙, 장자의 네 사상가의 정치사상을 논의하고 있다."란 소개에서 '구 소련의 학자 루빈 교수'란 말에 눈길이 간 것뿐이다. 국역본은 'Individual and state in ancient China : essays of four Chinese philosophers'(1976)이란 영어본을 옮긴 것이지만 원저 자체는 러시아어로 씌어졌다는 것이니까, 한번 '찾아보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1970년 저작이라면 관련정보를 거의 기대할 수 없는 게 아닌가라는 게 일차적인 판단이었지만.

예상대로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의 이미지들은 찾아볼 수 없었는데, 러시아어본의 제목이 <고대 중국의 이데올로기와 역사>가 아니라 <고대 중국의 이데올로기와 문화>(1970)라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책은 <고대 중국에서의 개인과 권력>(1999)이란 제목으로 다시 나왔던 듯하다(이미지가 너무 작아서 옮겨놓지 않는다). 

저자인 바실리 아로노비치 루빈은 1923년생으로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철학을 전공으로 1969년 박사학위(칸지다트)를 받았다. 유대계로서 유대인 이민운동가로도 활동했으며 결국 1976년 당국의 허가를 받아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예루살렘대학의 교수를 지내다가 1981년 세상을 떠났다. '중국에서의 개인과 국가'에서 왠지 '러시아에서의 개인과 국가'란 뉘앙스가 읽히는 건 그런 맥락에서이다.

07. 0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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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7-09-09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물과 사상 9월호 이상수 전 한겨레 기자의 글도 재미있던데요.
현재 중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속마음. 니네는 우리의 속국이었다.
캠브릿지 중국사는 가격의 압박이 윽.

로쟈 2007-09-10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수 기자의 책을 재밌게 읽은 적이 있는데, 이젠 전업 '학자'로 나선 건가 보군요...
 

정신없이 지나간 한 주였다. '정신없다'는 건 한 가지에 얽매여 다른 걸 생각할 여지가 없거나 적은 경우를 이른다. 때문에 정신없다는 것 자체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삼매경도 있고, 황홀경도 있으니까. 다만 그것이 타의에 의한 것일 때 '정신없는 삶'은 '정신나간 삶'보다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 불행한 건 우리가 때로 정신없이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다행스러운 건 내가 몇 시간 전에 해방되었다는 것. 다시 읽어야 할 책들과 써야 하거나 쓰고 싶은 글들이 읽는 책상머리로 되돌아왔다...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와 브루스 핑크의 <에크리 읽기>와 크리스테바의 <반항의 의미와 무의미> 등이 책상과 그 주변에 놓여 있지만(실상은 거의 헌책방 수준인지라 책상에 쌓아올려놓은 책만도 몇 십 권은 되겠다), 기운이 없는 관계로 주말 북리뷰나 훑어보다가 별로 관심이 가는 책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짐멜의 두꺼운 책이 출간됐지만 나는 <돈의 철학>이나 재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다만 레세크 코와코프스키의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유로서적, 전3권, 2007) 출간을 다룬 기사들이나 옮겨놓기로 했다.     

문화일보(07. 08. 24) 마르크스주의 계보 총정리 혁명가·정책 비판도 담아

책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안내서이자 개괄서다. 저자는 1권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기원을 검토하면서, 헤겔과 계몽주의를 거쳐 신플라톤주의에 이르는 마르크스주의의 유산들을 추적한다. 이어 마르크스 사상의 발전을 분석하고, 여러 형태의 사회주의와 갈라지는 지점들을 짚는다. 2권에선 주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교의와 제2인터내셔널 시기에 벌어진 그들간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쏟아졌다. 마지막 3권에선 스탈린주의를 분석하고, 마르크스주의가 소비에트 형성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다. 이어 저자는 트로츠키·그람시·루카치·마르쿠제와 여타의 마르크스주의 논객들이 세운 공적들을 검토하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마르크스주의가 걸어온 다양한 발전 양상들을 추적한다.

1927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저자는 1953년 바르샤바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 임용돼 철학역사학부의 학장에까지 올랐다. 처음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스탈린주의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는 ‘무엇이 사회주의인가’라는 글을 썼다. 이 글 때문에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저자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과 영국 옥스퍼드 대학 등에서 객원 교수를 역임했다. 자신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이 책으로 미국의 ‘국회도서관상’을 수상했다.



저자는 신판(2004년) 서문에서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된 이후 지성의 면에서 무능했지만 억압과 수탈의 도구로서는 효과를 발휘했던 마르크스주의가 연구의 주제로서는 완전히 매장되어, 망각의 늪에서 더 이상 그것을 건져 올릴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면서 “그러나 이는 근거 없어 보인다. 과거의 이념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 지적 가치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들의 현재적 설득력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론적·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몇몇 학술기관들의 복도를 초췌한 모습으로 배회하고 있는” 형국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연구할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저자는 1981년판 서문에서 책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의 안내책자로 씌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책 곳곳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정책들, 혁명가들의 성격을 은근히 비틀어 꼬집고 있는 저자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말 무정부자들의 입을 빌려 “마르크스주의 교의는 인간사회를 거대한 집단수용소로 바꾸는 데 적합한 청사진이었다”고 지적하는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사회철학의 교과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자는 말한다.(김영번기자)

한국일보(07. 08. 25) [저자초대석]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변상출

변상출(46)씨는 이제 좀 낯이 서는 기분이다. 1990년대 손에 넣은 뒤로는 떼 놓은 적 없던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을 막 옮긴 것이다. 국내 초역. 폴란드 마르크시스트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의 역저다. “마르크시즘이 이론과 현실 사이를 오가던 당시, 사회주의 몰락 소식을 접하고는 미뤄뒀던 번역을 하자고 결심했어요.”

그러나 2,00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정말 출판될까가 아니라, 지루한 번역 작업을 감내해낼 지가 현안이었다. “일이 끝난 밤 10시께부터, 이 닦듯 매일 최소한 1~2쪽은 옮겼습니다.” 그 결과, 도서출판 유로서적에서 전 3권의 두툼한 세트로 선보이게 됐다.

“2권까지 옮겨 놓고 나서, 저작권 문제를 놓고 함께 논의했던 출판사예요. 갈수록 수요가 높아져 가고 있는 고전이라는 확신도 공유했죠.” 스탈린 비판으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정통 마르크시스트의 따가운 지적은 이 시대 한국에도 중요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

신자유주의적 세계, 아니 한국에서부터 영향력이 체감돼 가고 있는 마르크시즘이 걸어 온 방대한 여정을 철학적ㆍ역사적ㆍ현실정치적으로 곱씹어 보게 만드는 책이다. “자본주의의 지구화, 자본주의적 물질주의, 인간 소외, 비정규직 문제, 현실 사회주의 등에 대한 통찰은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죠.” 특히 신비주의적으로 비칠 수도 있을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에 대해 한 장이나 할애하고 있음은 이 책을 더욱 미덥게 하는 일례이기도 하다.

리얼리즘 문예 이론가 루카치를 전공한 그는 “마르크시즘을 재정립하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론적 담론과 정면 대결하는 데 긴요한 책을 쓸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자신은 좌파는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그는 “인간이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을 추구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론적 실천에 경도된 구조주의적 마르크시즘은 이를테면 단성 생식이죠.” 1980년대말, 알튀세류의 현란한 구조주의가 마르크시즘의 본령을 흐린다며 못마땅해 하던 그는 영국의 좌파 역사학자 E. P. 톰슨에게서 진정한 지성인을 보았다. 톰슨과 서신으로 쌓은 친교는 그의 주저 <이론의 빈곤> 번역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톰슨은 코와코프스키와 이론적 실천의 문제를 두고 공개 서한을 나누기도 했으니, 톰슨-코와코프스키-변씨 사이에는 모종의 ‘좌파적 연대감’이 흐르고 있는 셈이다. 영남대 등지에서 독문학, 미학, 문예 이론, 민중 문화 등을 강의중이다.(장병욱 기자) 

07. 08. 25.

P.S. '국내 초역'이라는 이 책을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한 것은 예전에 출간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Leszek Kolakowski)와 서명 자체가 낯설지 않아서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콜라코프스키의 마르크스주의>(한겨레, 1989)로 출간됐었다. 도서관에는 서지가 1-3권이라고 돼 있지만(그렇다면 완역돼 있는 셈이다) 기억엔 1권만(혹은 2권까지?) 번역되었던 게 아닌가도 싶다. 아무튼 이건 직접 확인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국내 초역'이란 말은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겠다. 코와코프스키(콜라코프스키)의 또 다른 책으론 <베그르송>(지성의샘, 1994)가 있다. 이건 내가 읽은 책이니 저자의 이름이 어찌 낯익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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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타 2007-08-25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 보는 순간 우선 1권만 주문했는데 어떨지 모르겠군요. (아, 저는 항상 로쟈님 서재에 기웃거리기만 했던 풋내기 서재인이랍니다;;. 처음으로 답글을 남기네요^^;)

로쟈 2007-08-25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풋내기'도 금방 노장이 됩니다. 실상은 저도 '서재인' 생활 4년차에 불과하니까 신참 하사관 정도라고나 할까요...

짱꿀라 2007-08-25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로쟈님을 신참이라고 하겠습니까? 항상 큰 도움을 주시는 전문가시죠.

람혼 2007-08-25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들뜨게 하는 신간 소식에 감사드립니다.^^

philocinema 2007-08-25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감사의 말씀!

로쟈 2007-08-2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제목을 빌자면, 그냥 '스토커'일 뿐입니다. 어느 '구역'의 입구까지만 안내하는...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깜짝 눈길을 끈 책은 에드워드 윌슨과 베르트 횔도블러의 <개미 세계영여행>(범양사, 2007)이다. 나는 잠시 '긴장'했었는데, 혹 두 사람의 대작 <개미>가 번역된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확인해보니 <개미들>의 다이제스트판으로 지난 96년에 번역출간된 책 의 개정판이다(그러니까 나도 갖고 있는 책이다. 박스보관도서이긴 하나). 즉, "곤충학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받는 베르트 휠도블러와 에드워드 윌슨의 <개미들>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든책"이며 "개미학 개론서이자 개미에 대한 자신들의 연구 과정을 보다 쉽게 이야기화해서 만든 책"이다. 약간의 아쉬움을 달래면서 문화일보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7. 07. 13) '개미’ 통해 본 인간 세계의 성찰

이 책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책이 아니다. 1996년 같은 내용과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는 책이다. 절판됐던 책이 10여년 만에 그대로 재출간됐는데도, 이렇게 정색하고 지면을 할애하는 것에는 물론 이유가 있다. 개미학 개론서이자, 저자들의 연구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의 탁월함과 감동이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기 때문이다(*96년판은 원서의 표지를 그대로 쓰고 있다).



알려지다시피 저자들은 개미와 사회 생물학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적인 권위자다. 독일 뷔르츠부르크대와 하버드대를 오가며 연구한 베르트 횔도블러나 하버드대 생물학교수인 에드워드 윌슨은, 현존하는 가장 걸출한 과학저술가다.



우선 이들의 공동저작인 ‘개미(The Ants)’는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의해 ‘모든 곤충학 저서 중 가장 훌륭한 책’으로 선정됐을 뿐 아니라, 과학도서로서는 드물게 퓰리처상을 받았다(*지난 1990년에 출간됐고, 746쪽 분량이다). 이들이 체계를 세운 사회생물학은 20세기 생물학뿐 아니라, 인문·사회학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국내에서 학문간의 통섭을 주장하는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도 하버드대에서 에드워드 윌슨에게 배운 학자 중 한 사람이다(*이젠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재천 교수의 <개미제국의 발견>(사이언스북스, 1999)는 다이제스트의 다이제스트 버전이라 할 만하다).



이들의 기념비적인 저작인 ‘개미’가 전문 생물학자를 겨냥한 전문서적이면서, 개미의 백과사전이라면 ‘개미 세계 여행’은 일반인을 위한 책이다. 그렇다고 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처음 대하는 이들에겐 경이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개미에 대한 모든 것이 풍부한 도판과 함께 매력적인 문장으로 펼쳐져 있다.

개미는 우리가 사람 다음으로 흔히 볼 수 있는, 대수롭잖은 생명체다. 그러나 개미만큼 인간과 비슷한 사회 구조를 가진 생물은 어디에도 없다. 고도의 의사소통이 전제돼야 가능한 각종 합동 작전을 비롯해, 군체(群體) 구성원들의 조직화는 복잡하고 긴밀해서 경이에 가깝다. 일개미의 충성은 거의 완벽하다. 개미의 군체간 싸움도 인간의 전쟁보다 더 자주 일어난다. 종에 따라 개미들은 선전, 기만, 고도의 감시, 대규모 공격 따위를 단독이나 연합으로 수행한다.

개미 세계에서 조화와 충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난소를 가진 일개미들은 더러 여왕과 경쟁을 벌이기도 하고, 순위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군체에 대해 몸을 던져 충성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군체 안에서 다른 개체와 투쟁하는 모습이 인간에 다름 아니다.

저자들은 개미에 대한 이같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하는 사소한 관찰에서 시작해 개미라는 개체의 삶과 죽음, 사회 조직, 환경과 세세한 생활, 그리고 성공적인 진화에 이르기까지를 흥미진진한 드라마처럼 풀어나간다. 책을 따라 개미 세계를 여행하다 보면, 독자는 사회의 기생자에서 아이를 기르는 양육자, 군대, 사냥꾼, 건축가들을 만난다.

인간 세계의 또 다른 모습이자, 축소판이다. 사회생물학이라는 학문이 세계를 통틀어 500명 밖에 안되는 개미 연구가 사이에서 체계화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비단 개미 세계를 돌아보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특이한 방법으로 인간 세계를 성찰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김종락기자)

07. 07. 14.

P.S. 저자인 에드워드 윌슨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명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개인적으론 '에드워드 윌슨과 나'(http://blog.aladin.co.kr/mramor/267854)란 제목의 리뷰도 쓴 적이 있는데, 최근 몇 년간 출간된 책들은 다 챙기질 못했다. <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바다출판사, 2005)나 <생명의 미래>(사이언스북스, 2005) 같은 책들이 그렇다.

'에드워드 윌슨'과 '개미'라고 하니까 개인적으론 두 권의 책이 떠오른다. 하나는 '개미'와 관련된 것으로 데이비드 아텐보로의 <생명의 신비>(학원사, 1985)이다. BBC의 자연다큐로도 만들어진 듯한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주우, 1982; 사이언스북스, 2006)와 함께 고등학교 시절 내가 소장하고 있던 '가장 고급스런 교양서'였다. 특히 <생명의 신비>의 경우는 주로 개미에 관한 얘기를 독후감으로 써서 교육감상을 받은 기억이 있다(언젠가 재출간된 걸 본 듯한데 검색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에드워드 윌슨'과 관련해서는 <도덕적 동물>(사이언스북스, 2003)의 저자 로버트 라이트가 쓴 <3인의 과학자와 그들의 신>(정신세계사, 1991). 여기서 3인의 과학자는 에드워드 프레드킨, 에드워드 윌슨, 그리고 케네스 볼딩 세 사람인데, 에드워드 윌슨이란 독특한 과학자에 대해서 처음 접하게 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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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7-14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개미하면 떠오르는게 중학교 때 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인적으로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게 봤던...)이네요/

로쟈 2007-07-14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르베르의 <개미>는 저도 읽었었는데, 그래도 소설보다는 과학책이 더 재미있습니다...

가넷 2007-07-14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든책'이라는데 가격은 그렇게 쉽게 접근할 만하지는 않군요...--;

로쟈 2007-07-15 10:4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이 책 같은 건 사정이 나은 편이죠. 화보도 없는 200여쪽짜리가 만원이 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마늘빵 2007-07-14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빈스키 님과 같이 개미는 중학교 때 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요즘엔 세 권짜리로 나오는거 같던데. 이쁘게 양장본으로. 전 이거 재밌었어요.

로쟈 2007-07-15 10:42   좋아요 0 | URL
베르베르야 그 자신이 놀랄 정도로 한국에서 가장 많이 읽혔으니까요...
 

얼마전 지성사가인 스튜어트 휴즈(1916-1999)의 '서구 지성사 3부작'이 출간됐다. 오래전에 나온 국역본들이 때깔을 달리해서 재출간된 것이라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나도 3부작 중의 두 권(1,2권)은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어느 박스에 들어가 있는지 알길이 없다. 예전에 나온 책의 모양새가 궁금한 독자라면 나귀님의 페이퍼(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1255649)를 참조해볼 수 있겠다. 새번역도 아닌 다음에야 다시 사두기도 뭐한 책이어서 자세한 리뷰만 챙겨두도록 한다.

경향신문(07. 06. 09) 20C 들추면 ‘지식인의 위기’ 답이 있다

사법시험이나 행정고등고시 등에서 특정 기수에 인재가 몰리는 현상은 심심찮게 발견된다. 이런 현상은 어떤 조직에서나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이 회사든 학교든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봐도 그런 경우가 흔하다. 대표적으로 공자, 노자, 석가,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이나 위대한 사상가들이 한결같이 기원전 500년 전후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약했던 사례를 들 수 있다.

서유럽에서 1890년대 이후 40여년간은 20세기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와 지성인들의 역할이 두드러진 시기로 꼽힌다. 흔히 좁은 의미의 ‘세기말’로 통칭되는 19세기 말과 1차 세계대전을 거친 20세기 초를 관통하는 때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막스 베버, 베네데토 크로체, 에밀 뒤르켐, 앙리 베르그송, 카를 융, 오스왈트 슈펭글러 등 독보적인 이론을 세운 지식인들이 출현한 그 시기다.

유럽 지성사 연구의 권위자 스튜어트 휴즈가 이 시대를 각별하게 주목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저자는 전후 유럽사 분야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낳은 연구자로 평가된다. 스스로 국적은 미국인이지만 지적 교양은 주로 유럽적이라고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그의 역저 ‘서구 지성사’ 3부작은 이 대변혁기와 2차 세계대전을 거친 또다른 격동기의 서유럽 사상사를 인물과 형성과정 중심으로 접근한 현대 고전이다. 이런 점이 통상적인 사상사와 차별화된다.

이미 40여년전에 첫 출간되기 시작했던 이 책들은 오늘날까지 이를 능가하는 저술이 없을 정도라는 호평을 받는다. 이처럼 오래 전에 첫 선을 보였던 책의 번역본 ‘서구지성사’ 읽기가 이 시대에 요긴한 이유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위기’가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운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87년 6·10항쟁 이후 지금처럼 ‘지식인의 몰락’이라고까지 표현될 만큼 지식인 담론이 우울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 3부작은 전체적으로 중요한 시기의 지성상을 통해 그 시대상을 정립하려는 목표를 설정했다. 개개인의 전기적(傳記的) 요소를 중시하는 한편 그 시대 지성인들의 동선(動線)에 역점을 두고 재구성한 점이 특기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일련의 지적 전기는 결코 아니다. 그런 점에선 단순한 사상사가 아니라 ‘개념화된 사회사’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통상적인 사상사가 다 익어서 수확한 과일을 분류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이 책들은 과일나무에 과일 하나하나가 열리는 과정을 자세히 소묘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개별 인물에 대한 평가는 매우 엄정한 잣대를 들이댄다. 이를테면 지적 거장들 가운데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어떤 모습으로 계승되고 있는지 공정하게 기술하고 있다. 문장은 시종 품격이 있으면서도 글맛이 느껴진다. 짧은 예를 하나 들면 이렇다. “모든 종합자들 중에서 아도르노는 가장 눈부신 성과를 올렸지만, 그는 그런 멋진 고공비행을 하면서도 헤겔주의라는 귀찮은 모래주머니를 영원히 끌고 다녔다.”



1권 ‘의식과 사회’(황문수 옮김·2만5000원)는 3부작의 중심축을 이룬다. 휴즈는 1890~1930년까지 40년간의 지성적 상황을 실증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대결 구도로 삼는다. 여기에다 무의식의 등장과 주관주의에 비중을 두고 시대를 정리한다. 이에 따라 중심 인물로 프로이트, 베버, 크로체를 세우고 있다. 그 주변에 뒤르켐, 베르그송, 융, 슈펭글러, 안토니오 그람시, 앙드레 지드, 토머스 만, 마르셀 프루스트, 헤르만 헤세 등 수많은 지성들을 배치한다. 무엇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소문난 프로이트의 지적 세계를 이 책만큼 명쾌하게 해부한 것은 찾기 힘들다는 평판을 얻을 만큼 권위를 인정받는다. 저자는 1930~60년의 지적 세대를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눈다. 첫번째는 프랑스 사람으로 한정했다. 두번째는 유럽과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이나 영국에 정착한 반(反)파시스트 망명자들로 구성됐다.

2권 ‘막다른 길’(김병익 옮김·2만원)은 앞의 프랑스 지성인들을 다뤘고, 3권 ‘지식인들의 망명’(김창희 옮김·2만원)은 두번째로 분류되는 인물들을 엮은 것이다. 휴즈는 프랑스 사상사에서 1930~60년대의 한 세대를 ‘절망의 시대’로 상정한다. 그렇지만 ‘막다른 상황’을 타개하는 마지막 희망을 알베르 카뮈, 테야르 드 샤르댕,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서 찾아낸다. 3권에서는 히틀러의 나치 정권과 무솔리니의 파시즘이라는 시련에 직면한 지식인들의 고뇌를 현실감 있게 엮어냈다. 3부작을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같다. 각기 독립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심층적인 지성사를 공부하고 싶은 독자들은 이 시대의 일반적인 사상사를 곁들여 읽으면 한층 정교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주에 함께 나온 니콜 라피에르의 ‘다른 곳을 사유하자’(이세진 옮김·1만4000원·푸른숲)도 더불어 읽을 만하다(*엊그제 소개한 책이다). 이 책은 ‘서구 지성사’ 시리즈 3권 ‘지식인들의 망명’과 비교된다. 20세기 초 망명한 지식인들로부터 학제간 연구에 열중하고 있는 지금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비판적 지식인들의 삶과 사유를 다루었다는 점이 흡사하다. 이 책은 통행, 이주, 이동, 이산, 혼합, 전환, 소통을 이야기한다. 들머리에 인용한 “세계가 그토록 광대한 것은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흩어지기 위함이니”라는 괴테의 말이 이 책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상징하는 듯하다.(김학순 선임기자)

07. 06. 08.

Dominick LaCapra

P.S. '지성사'라고 하니까 떠오르는 이름은 도미닉 라카프라(1939- ) 미 코넬대 교수이다. 그의 <지성사를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 Intellectual History)>(1983), <역사, 정치 그리고 소설(History, Politics, and the Novel)> 등을 소장하고 있어서겠다(최근작들이 아니어서인지 마땅한 책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언제 번역서들이 나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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