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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신간 중에 '오래된 새책'으로 눈길을 끄는 책은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산책자, 2008)이다. 재출간된 책인 만큼 자세한 서평은 올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북페이지에서 자세한 소개를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돼 있다.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을 다시 한국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이 책은 1997년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오래도록 절판된 상태로 ‘기호’로만 남아 있어, 적지 않은 인문 지성 독자들이 재발간을 기다려온 텍스트였다. 이번에 스키라 판(Skira, 1970)을 번역한 1997년 번역 판본에 더해 세이유 판(Seuil, 2005)의 몇 군데 수정사항을 반영해, 동일한 역자의 섬세한 재작업을 거쳐 새로운 한국 판본을 출간하게 되었다. 특히 이번 산책자 판 『기호의 제국』은 <산책자의 에쎄Essaie>라는 이름으로 이어질 ‘그윽한 사유와 새로운 비평이 담긴 지성 에세이 시리즈’의 첫 권으로써, 현대적 감수성으로 빚은 ‘텍스트의 즐거움’을 찾는 탐서가(산책자)들을 인도하는 ‘산책로 표지판’이기도 하다.

나는 이전 민음사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몇 군데 수정사항만 확인하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은 콘텐츠로만 읽는 것도 아니어서(e-book을 나는 즐기지 않는다) 막상 표지를 보면 견물생심이 된다. 비록 민음사판의 표지가 더 마음에 들지만(알라딘에 이미지가 없어서 리브로에서 가져왔다).

소개를 조금 더 따라가본다. "구조주의 시대의 도래를 예고한, 혁신적인 이론과 문체로 빛나는 현대 비평의 핵심 텍스트『기호의 제국』에서 바르트가 구성해낸 일본은 하나의 텍스트이며, 그는 “그곳에서 나는 여행객이나 방문객이 아니라 독자”라고 말한다. 그가 일본에서 읽고 있는 여러 문화 현상들은 간단한 사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씌어진 텍스트다. 그것도 단순한 논리나 사건 중심으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하이쿠처럼 언어를 통해 언어의 핵심에 이르려는, 몸짓으로서의 글쓰기를 통해 씌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일본 문화라는 텍스트에 대한 일종의 비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기호의 제국>은 일본이란 텍스트보다는 바르트란 텍스트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텍스트이다. 바르트에 대해서 말해주는 텍스트도 그 자신이 쓴 것을 포함해서 몇 권이 소개돼 있다. 역시나 절판된 자서전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강, 1997), 문학이론가 조너선 컬러의 <바르트>(시공사, 1999), 그리고 최근의 책으로 그레이엄 앨런의 <문제적 텍스트 롤랑 바르트>(앨피, 2006)가 '바르트 로드맵'으로 추천할 만하다.

얇은 책으론 트리포나스의 <바르트와 기호의 제국>(이제이북스, 2003)도 유용하다. 바르트라는 '기호의 제국'에 대한 1시간짜리 유람기이다. 그리고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을 직접 맛보고 싶다면 가장 '대중적인' 바르트 텍스트인 <사랑의 단상>(문학과지성사, 1991; 동문선, 2004)부터 집어드는 것이 안전하겠다...

08. 09. 21.

P.S. 바르트의 책을 검색해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은 한명숙 역의 <유행과 문자의상 체계>(경춘사, 1994)이다. 짐작엔 <모드의 체계>(동문선, 1998)와 같은 책이 아닌가 싶은데, 분량이 258쪽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완역은 아닌 듯싶다. 책은 바르트의 박사학위논문으로 씌어진 것이어서 가장 '딱딱하다'. 현재는 둘다 절판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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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9-21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운 [재]신간 소식이군요! "동일한 역자[들]의 섬세한 재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너무 궁금해서 책을 빨리 구입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로쟈 2008-09-22 16:39   좋아요 0 | URL
리뷰도 올려주시길.^^

열매 2008-09-21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동일한 역자(들)의 섬세한 재작업'이란 말이 왠만해선 믿어지지 않으니 출판계에 대한 제나름의 불신이 심하긴 한가 봅니다.

재번역본이 나오면 무작위로 3~4군데 정도 펼쳐서 구판과 비교해보는데, 이때까지는 글자 한자 변한 케이스도 보지 못했습니다. 가격은 변화무쌍했지만요. 물론 개역때마다 (원전과도 무관해보일 정도로 변신하는) 임석진교수의 <정신현상학>같은 개역판은 드문 케이스일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저렇게 광고하는데 얼마나 개역되었는지 궁금하긴 합니다만,
영 구입버튼은 눌러지지 않을 것 같네요-..-;

람혼 2008-09-21 15:47   좋아요 0 | URL
실로 이심전심입니다... 임석진 선생이 저 <정신현상학> 번역에 '투신'하는 끊임없는 노력은 정말 보기 드문 경우죠("원전과도 무관해 보일 정도"라는 말에 잠시 웃었습니다^^ 한길사 판은 지식산업사 판보다 조금 더 '부드럽게' 의역하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고 또 헤겔 원문의 복잡한 복문들을 좀 더 끊어서 번역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임석진 선생의 번역은 한 저자를 오랜 세월 동안 만나고 또 그의 문장을 여러 시간 동안 옮겨올 때 갖게 되는 일종의 '동체화(同體化)'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기호의 제국>의 재번역도ㅡ그러한 불신의 와중에서도ㅡ'최소한' 그런 개역이기를 바라는 마음 한 자락 담아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1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겔의 노동의 개념>지식산업사 도 저자의 프랑크푸르트 대학 학위논문인데 이을호,황태연 번역을 10년 뒤에 저자가 다시 직접 번역해 내놓는 걸 보니 성실하고 꼼꼼한 분인가 봐요.음...정신현상학 번역도 그랬군요.

로쟈 2008-09-22 16:40   좋아요 0 | URL
헤겔이 독일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면 임석진 번역의 헤겔도 한국어로 번역되어야 하다고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2 22:24   좋아요 0 | URL
황태연 씨는 요즘 주역에 열중한 나머지 전공인 독일 사상은 소홀히 하시는 듯...

로쟈 2008-09-23 00:08   좋아요 0 | URL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다 보니 '관념론'이라는 게 시시해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PhEAV 2008-09-22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를 요즘 원전과 국역구판을 함께 읽고 있는데, 국역신판과 구판을 비교해보니, 한 부분이 나아졌다 싶으면, 다른 한 부분이 엉망이 되어있는 걸 보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헌책방에서 구한 『기호의 제국』 민음사판을 업그레이드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을 하게 되네요. -_-...
이렇게 불신하면서도 결국 또 책을 사게 될 것 같다는 이 중독자의 불안감 ㅠ,.ㅠ (저는 왜 하라는 공부를 하는게 아니라 책 수집만 하는지... 후덜덜;;)

로쟈 2008-09-22 16:40   좋아요 0 | URL
증상이 저랑 비슷한데요.^^;

람혼 2008-09-23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도착해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Garabagne'에 대한 역자의 주석이었는데요, 보고나서 크게 웃어버렸습니다, 그 웃음의 의미는 참으로 다층적이고 복잡했었지만요...^^

로쟈 2008-09-23 22:16   좋아요 0 | URL
언젠가 페이퍼로 쓰셨죠?^^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부키, 2008)가 거의 20년만에 다시 나왔다. 첫 번역본 <레이스 뜨는 여자>(예하, 1989)의 역자인 이재형씨가 손을 더 보아서 냈는데, 덕분에 잠깐 2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을 했다(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과 함께 이 책을 읽던 부대 관사의 당번병 방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1989년이었다). 젊은 독자들에겐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책은 "콩쿠르 수상작이자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영화 <레이스 뜨는 여자>(1977)의 원작 소설"이다. "얀 베르메르의 동명의 그림(하지만 '레이스 짜는 여인'으로 표기된다)에서 제목을 따온 이 소설은 문학이 씨줄로, 철학과 사회학, 심리학이 날줄로 엮혀 있는 프랑스 현대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개인적으론 이자벨 위페르와 관련한 페이퍼들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http://blog.aladin.co.kr/mramor/1548659 참조). 반가운 마음에 자료를 찾으니 바로 얼마전에 장석주씨가 쓴 '독서일기'가 있어 스크랩해놓는다.  

 

뉴스메이커(08. 08. 20) 뽐므는 정말로 ‘흔해 빠진 여자’일까?

프랑스 낭테르 대학에서 남학생의 여학생 기숙사 출입을 막는 데 따른 불만에서 촉발한 시위는 5월 한 달 동안 프랑스 전역에서 대학생 시위와 1000만 노동자의 대규모 파업으로 번진다. 불이 산소를 만나 타오르듯 냉전과 베트남전과 같은 시대의 화두를 끌어안으며 젊은이들을 저항과 해방의 열망으로 타오르게 했다. 그러나 ‘68혁명’은 하나의 이념과 기획으로 묶을 수 없다. 모든 금지에 대한 저항, 구속 없이 즐기는 삶에 대한 열망이 그 이념과 기획을 대체했다. 궁극적으로 낡은 정치체제와 신체에 가하는 낡은 도덕 관습들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이었다.

‘68혁명’의 거센 불길이 지나간 뒤에 남은 것은 마리화나와 히피, 마오주의(Maoism), 그리고 성의 해방이다. 그 중에서 마오주의는 최악의 유산으로 꼽혔다. 젊은이들 사이에 번진 파시즘 독재자에 대한 이상한 열광은 이해할 수 없었다. ‘68혁명’에 대한 평가는 낡은 도덕과 정치체제를 새것으로 바꾸려는 ‘혁명’이거나, 혹은 무질서와 파괴로 얼룩진 재앙이라고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분명한 것은 ‘68혁명’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대중의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는 점이다. 그 움직임은 국가와 권위에서 오는 일체의 통제와 억압에 대한 저항이고, 혹은 하나로 묶일 수 없는 다양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만든 사건의 연속체였다. ‘68혁명’은 저렇게 다른 목소리들이다. 다양한 차이 안에서 그 목소리는 변화하려는 열망과 그 극단을 드러낸다. 그 목소리는 조직되지 않고, 기성 조직에 기대지도 않는다. 그 목소리는 신체를 포획하는 그 무엇을 스스로 바꾸고자 하였을 뿐이다.



파스칼 레네는 ‘68혁명’의 중심을 가로질러 나온 프랑스 출신의 철학자이자 소설가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레이스 뜨는 여자’는 ‘68혁명’의 여진(餘震) 속에서 씌어진, ‘68혁명’이 지핀 변화를 향한 열망이 스민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68혁명’이 젊은이들의 의식과 행동에 어떻게 스며들고 변화의 무늬를 남겼는지를 찾아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그들은 확실히 ‘68혁명’ 이전 세대와는 무언가 다를 것이다. ‘금지만이 금지된다’ 혹은 ‘구속 없는 삶을 즐겨라’라는 ‘68혁명’의 강령을 간접적이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체화해낸 세대는 성에 대한 낡은 도덕적 관습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녀는 매일 밤 그렇게 하기라도 했듯이, 서두르지 않고 스스로 옷을 벗었다. 그녀는 바지의 주름을 잡아서 의자 등받이에 놓아두었다. 청년은 그런 식의 침착함에 얼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계속되어온, 육체를 향한 그의 육체의 동작의 탐색은 그토록 단순하고 말없는 침착성과 비교할 때 정말 우스꽝스러운 노력이었고 어려움이었던 것처럼 그에게는 보였다. 하지만 그는 뽐므가 평소에는 덜 세심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 앞에서 자발적으로 옷을 벗는다. 스스로 옷을 벗음은 하나의 비밀의식이다.



한 존재란 그 자체로 얼마나 충만한 존재인가. 파스칼 레네가 묘사하는 여주인공 뽐므는 다음과 같다. “충만이란 그 나이(열네 살이라고 해두자)의 여자 아이에게는 적합한 말이 아니지만, 이 아이는 꽉 차 있다는 인상을 즉시 풍겼다. 바삐 움직이거나 앉아 있거나 길게 드러누운 채 꼼짝 않고 꿈을 꾸거나, 눈을 감은 채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거나, 그녀의 정신이 그녀에게서 벗어나 잠시 꾸벅꾸벅 졸거나 간에 그녀의 육체의 존재는 온 방 안에 군림했다. 뽐므, 그녀는 이제 막, 그러나 완전한 동질성과 놀랄 만한 밀도를 갖추고 완성된 것이다. 그녀의 영혼 또한 틀림없이 단단하고 두툼할 것이다. 그것은 그 존재가 추상화한 눈길이나 말 속으로 흡수되어 버리는 그런 사람들의 영혼이 아니었다. 정말 하찮아 보이는 그녀의 움직임과 활동조차도 그녀를 매 순간의 영원성 속에 구현시켰다.”

가난이 진부한 재앙이라면 “완전한 동질성과 놀랄 만한 밀도를 갖추고 완성된” 뽐므의 삶은 진부한 재앙의 억센 손아귀에 잡힌 셈이다. 그러나 가난이나 천직(賤職) 따위는 한 사람의 심오한 본성을 어쩌지 못한다. 그러나 관습의 독재에 빠진 시선은 한 사람을 심오한 본성을 가진 충만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내의를 책임 맡은 하녀’ ‘물 배달하는 여인’ '레이스 뜨는 여자’로 보게 한다. 남자의 시선은 그 여자의 존재로 스미지 못하고 그 여자가 수행하는 직분 위로 미끄러진다. 그럴 때 몸은 소통하지 않고 다만 소비된다.

처녀와 청년은 우연히 만나 성교를 하고, 함께 식사를 한다. 두 존재의 다름은 이내 드러난다. “그들은 제비콩 샐러드를 먹었는데, 청년은 처녀의 의도를 해독할 수 없었고, 처녀는 그런 건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순히 청년과 함께 있는 데, 그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데 만족해했으며, 그래서 그녀는 할 말을 찾아내지 못해서 주눅이 들어 있는 그 청년의 침묵을 불안해하지 않았다.” 처녀는 청년의 존재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마찬가지로 청년 역시 처녀의 존재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요컨대 그들은 동일한 세계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이었다. 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은 상대방을 만족시키지 못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똑같은 즐거움을 나누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서 태어났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녀가 자기에게 뭘 기대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존재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감은 몰이해와 혐오감으로 나타난다.

청년은 처녀가 이빨 닦을 때 내는 소리, 침대에서 처녀의 발이 제 몸에 닿는 것, 잠든 처녀의 숨소리조차 견디기 힘들어한다. 처녀의 현전 자체가 욕구를 휘발시키고 실망과 유감 속으로 빠뜨린다. “그에게는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뽐므가 일을 끝내고 돌아와 방으로 들어오면, 충만감도, 기쁨도 사라져버렸다. 반대로 그녀의 현전은 그녀에 대한 욕구를 그에게서 앗아갔다. 그것은 매번 변함없이 가볍고 겨우 느껴지면서도 진정한 실망이었으며 똑같은 유감이었다.” 미래의 박물관장인 청년은 어디에나 있는 흔한 처녀를 만나 성교까지 나누지만 처녀 존재 자체에서 오는 실망과 환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약하자면 이 처녀는 그 ‘68혁명’에 대한 하나의 은유는 아닐까. 그리고 청년은 실패한 혁명에서 오는 실망과 환멸에 빠진 그 숱한 자율주의자들, 작가 자신을 포함한 지식인 계급의 표상은 아닐까.

“그런데 그로 말하자면 자아를 기증하려고 하는 그 처녀를 만류할 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잠자기 전에 끄는 것을 잊어버린 전등만큼도 그 촛불에 대해 염려하지 않은 채로 그는 자신을 숭배하는 그 작은 촛불이 자기 앞에서 타도록 내버려두었다.” 정욕의 시선들은 어디서나 ‘덮칠 대상’을 찾아 이리저리 떠돈다. 타자에게 제 자아를 기증하려는 ‘흔해 빠진 여자'는 잠자기 전에 불 끄기를 잊는 남자의 수만큼이나 희귀하다. 흔한 것은 그 여자를 ‘흔해 빠진 여자’라고 믿는 일방적 해석의 오류에 빠지는 남자들이다.

우연히 만난 처녀를 남자가 ‘흔해 빠진 여자’로 묶을 때 여자는 영원히 남자의 이방(異邦), 바깥에 머문다. 여자를 제 생의 가치 영역에서 배제할 때 남자 역시 여자의 이방으로 전락하는 결과에 이른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날리는, 아주 조금은 비극적인 꽃가루로 비유했던 이 인물을 포착하면서, 작가는 이 인물을 손상시킬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렇게 연약한 존재에 어울릴 만큼 섬세하고 정밀한 글쓰기는 존재할 수 없으리라. ‘레이스 뜨는 여자’는 그녀가 짠 세공품의 투명함 그 자체 속에서 나타나게 해야 할 것이다.”



태생적 배경이 다른 두 남녀의 만남, 동거와 헤어짐, 여자의 거식증과 정신병원행 따위는 흔한 연애소설의 외관을 취하지만 이 소설은 흔한 연애소설은 아니다. 이 섬세하게 연애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 시대에 대한 중의적 사유를 덧씌운 ‘레이스 뜨는 여자’는 선택과 배제의 오류에 대한 관찰을 보여준다. 더 또렷하게 말하자면 선택과 배제에 대한 심리적 고찰과 철학적 탐색으로 이루어진다. 작가는 정교하게 짠 레이스와 같이 아름다운 세공품 그 자체인 여자가 가난이나 천직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해석의 폭력에 의해 비참한 자아로 떨어지는지, 해석의 폭력이 어떻게 여자의 현전이 감춘 감수성, 아름다움, 평온함 따위를 지워버리는지를 묘사한다. 파스칼 레네는 그 묘사를 실패한 혁명이 만든 실망과 환멸 위에 덧씌운다.(장석주)

08.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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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akim 2008-09-13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읽어보네요. 극한 디테일이 주는 각성의 시선과 의식의 깨어남 같은 것. 그러면서 그 눈을 통해 머리속이 환해지는 경험이 오랜 시간을 거슬러 접속되네요. 로쟈님 잘 지내시죠?

로쟈 2008-09-13 08:53   좋아요 0 | URL
바쁜 일은 끝내셨나요?^^

2008-09-13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3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3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3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5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9-15 09:57   좋아요 0 | URL
축하합니다.^^ 이사도 하셨으니 제2의 인생이시겠는데요.^^
 

한때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에코의서재)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지만, 가장 저명한 행동주의 심리학자 B. F. 스키너의 책이 출간된 건 오랜만이 아닌가 싶다. 이번주의 신간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부글북스, 2008)가 일단 반가운 건 그래서인데, 개인적으로 그 반가움은 이 책이 잠시 20년쯤 전으로의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이기 하다. 학부때 읽은 책의 표지와 책장의 감촉이 잠시 되살아난 것. '비싼' 책이어서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구입했던 기억이 새롭다. 물론 지금은 어느 박스에 들어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디지털타임스(08. 08. 21) 인간행동은 자율보단 환경이 좌우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미국 심리학계를 휩쓴 행동주의 심리학의 기본 입장은 생각하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기억하는 `정신활동'은 직접적으로 관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환경의 자극에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에 집중했다. 그들에게 인간의 행동은 진화의 과정을 통해 유전적 자질과 외부 환경이 만들어낸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인간이 원래 목적적이고 자율적이라는 전통적 인간관은 허튼소리에 불과했다.

이 책은 프로이트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로 평가받는 행동주의 심리학자 스키너를 대중들의 뇌리에 사회사상가로 각인시킨 책이다. 스키너는 과학적 심리학에서 얻은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인간관과 문화관을 제시한다.

스키너는 자유와 존엄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관점을 분석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자유와 존엄을 누리는 인간 내면의 자율적인 존재가 행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강화요인을 통해 인간의 행동을 다듬어나간다는 것이 스키너의 일관된 주장이다. 따라서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열쇠도 인간의 성격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개선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세계에 중요한 문제들은 모두가 글로벌하다. 인구과잉, 자원고갈, 환경오염, 핵전쟁의 가능성 등이 그렇다. 이것들은 현재의 행동양식 때문에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결과들이다. 그러나 예상 결과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런 예상 결과들이 인간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1972년 스키너는 이 책으로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하며 대중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동시에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은 맹공을 퍼부었다. 미국 대학생들에게 건전한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해 조직된 비영리기관인 `대학비교연구소'는 이 책을 20세기 최악의 책 50권 중 하나로 꼽았다. 그런가 하면 노암 촘스키는 스키너를 비롯한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을 전체주의 사상의 지지자들이라고 공격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인간행동의 원인을 순전히 환경 탓으로만 돌리는 책의 내용에 경악을 거듭했던 것이다.

인간행동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스키너의 주장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자유와 존엄을 옹호하는 전통적 관점이 인간행동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행동이 인류문화의 생존을 돕는 쪽으로 다시 설계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거듭 강조한다. 읽어내기가 녹녹지 않은 분량에 몇몇 대목에서는 급진적인 성향도 보이지만 각종 사회현상의 분석을 통해 드러나는 스키너의 일관된 주장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진중한 메시지를 던진다.(이지성기자)

08. 08. 22.

P.S. 내가 읽었던 책은 심리학자 차재호 교수가 옮긴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탐구당, 1989)이다. 200쪽 조금 넘으니까 얇은 책이었는데, 대신에 딱딱한 하드카바였고 책값이 좀 셌다. 지금 확인해보니 알라딘에서도 1994년판을 판매하고 있다. 아직 품절되진 않은 모양이다(왜 같이 검색이 안되는지는 모르겠다).

스키너에 관한 가장 쉬운 입문서를 고르라면 나는 레즐리(레슬리) 스티븐슨의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일곱 가지 이론>(종로서적, 1981)을 꼽겠다. 그 일곱 가지의 하나로 스키너의 행동주의가 다루어지고 있다. 스티븐슨의 책은 판을 거듭하면서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갈라파고스, 2007)으로까지 확장됐지만, 아쉽게도 스키너에 관한 장은 빠지게 됐다.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게 이유였던 걸로 기억한다. 보다 전문적으론 임의영의 <스키너의 행동주의적 인간관>(문학과지성사, 1993)을 참조할 수 있다. 기억에는 행정학 전공인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스키너의 또다른 대표작 <월든 투>를 읽어야겠다(책의 이미지들은 편의상 사이즈가 맞는 걸로 가져왔다. <월든>이나 <월든 투>나 여러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제목은 물론 헨리 소로의 <월든>에서 따온 것으로 스키너가 생각하는 이상세계를 그려내고 있다(그는 심리학을 전공하기 전에 영문학을 공부했다). 촘스키가 "스키너를 비롯한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을 전체주의 사상"이라고 공격했을 때, 그 사정권 안에는 <월든 투>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젝을 따라서 이렇게 반문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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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미로 2008-08-23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심리학에 빠졌을 때 스키너의 글들 접했어요^^같은 알라딘에 서평을 올리면서도 몰랐네요^^ 스윗도넛님 블로그에 갔다가 님의 글이 우수북로거로 추천이 됐기에 배우러 왔어요^^
가끔이라도 들러야겠네요^^

로쟈 2008-08-23 10:16   좋아요 0 | URL
네, 반갑습니다. 가끔 들르시길.^^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론>이 재출간됐다. 주해를 크게 보강했다고 하니까 개정판이라고 해도 좋겠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정수는 논리학이고, <변증론>은 그 핵심적 저작이라고 하니 당장은 아니더라도 도전해봄 직하다. 저자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8. 07. 24) 민주주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워라

현대 철학까지는 아니어도 고대 그리스 철학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이름은 초등학생도 되뇔 수 있다. 그들이 남긴 경구는 시사 퀴즈에도 등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정말 서양 고전 철학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요?” 학문적 인생 전체를 그리스 철학 고전의 번역·주해에 바쳐온 김재홍 관동대 연구교수다. 그는 최근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론>(길)을 번역·주해했다. 1998년에 번역본(까치)을 냈는데, 이번에 주해를 크게 보강하여 새로 발간했다.

지금까지 그가 펴낸 책을 일별하면 이번 작업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김 교수는 <그리스 사유의 기원>(살림), <에픽테토스 ‘담화록’>(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등을 썼다. 역서로는 <정신의 발견>(브루노 스넬·까치), <엥케이리디온>(에픽테토스·까치), <니코마코스 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공역·이제이북스), <소피스테스적 논박>(아리스토텔레스·한길사) 등이 있다. <변증론>의 재번역은 그리스 철학의 핵심인 논리학 연구의 큰 매듭을 짓는 일이다.

그가 펴낸 책 가운데 이른바 ‘대중서’는 하나도 없다. “고전을 번역하고 주석 다는 데 매달려 살았던” 시간의 열매다. 그가 추구하는 바는 널리 읽히는 게 아니라, 정확히 읽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어디에 나오는 걸까요. 누가 어떻게 지어냈는지 모르는 말이 아무 근거도 없이 버젓이 교과서에까지 실리는 걸 보세요. 이건 엄격성과 엄밀성을 추구하는 학자적 정신의 부족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엄밀함과 엄격함의 잣대를 굳이 서양 고전에 들이밀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신 서양 이론이라는 게 서양 학자들이 고전을 재해석한 결과거든요. 그런데 한국 학자들은 새로운 서양이론이 나오면 무조건 쫓아가잖아요. 고전에 대한 엄격한 이해를 바탕에 두고 이를 새롭게 해석하여 새로운 사상을 만들 수 있다면, 그런 일이 줄어들겠지요. 서양 고전에 대한 이해는 우리만의 사상을 만들어나가는 길입니다.”

여러 철학자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건조하고 간결하지요. 재미는 덜하지만 학문적 엄격함에 비중을 두는 태도에 마음이 끌렸어요.” 그가 길어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수는 논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격적인 학문을 하기 위한 하나의 토대로서 논리학의 기초를 마련했어요. 논리학은 인문학적 사유 능력을 기르는 학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재현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어떤 주제를 놓고 정보를 모아 서로 토론하고 집단이성을 통해 오류를 걸러내어 올바른 방향을 찾는 일련의 과정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이 추구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을 견뎌내는 사람, 즉 논리적으로 훈련이 잘된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고요.”

그는 인문학 고전을 번역·주해하는 일의 고단함에 대해서도 말했다. “학술진흥재단이 그나마 인문학자들을 후원해왔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 지원 규모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요. 즉시 결실이 나와야 실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인문학의 유용성은 장기적으로 나타나지요. 그래서 국가적 투자가 필요한 겁니다.”

스스로를 ‘아리스토텔리안’이라고 말하는 김 교수는 앞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 전서·후서>도 번역할 예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큰 얼개를 국내에 소개하는 작업의 마무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는 말을 통해 이뤄지는 정치 과정입니다. 어떤 주장을 어떤 형식에 담아야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지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배웠으면 합니다.” 논리가 아닌 힘이 지배하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변증론>의 가치는 더욱 새롭다.(안수찬 기자)

08. 07. 24.

P.S.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이해하는 데 참조가 될 만한 기사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에 연재됐던 '헤르메스의 빛으로'의 한 꼭지이다.

경향신문(07. 11. 17) [헤르메스의 빛으로](43)추론(쉴로기스모스,syllogismos)의 발명

인간은 특별한 동물이다, 로고스가 있으므로
“앞을 내다 볼 줄도 알고, 똑똑하며, 다채롭고, 날카로운 동물. 기억할 줄도 알고, 이성(ratio)과 계획으로 가득 차 있는 동물. 우리는 이를 인간이라 부른다. 가장 높은 신은 바로 이 동물을 돋보이는 조건 속에서 태어나게 했다. 수많은 종류의 생명체와 자연물 가운데서 이성과 생각을 나눠가진 단 하나의 존재. 다른 모든 것들에는 그런 것이 없다. 인간 안에, 아니 모든 하늘과 땅 속에 이성보다도 더 신비로운 것이 있겠는가? 이성이 활짝 피어나 완성될 때, 그것을 지혜(sapientia)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이성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이성이야말로 인간에게도, 그리고 신에게도 있는 것이기에, 이성은 인간을 신과 함께 묶어준다.”

이성적인 신이 이성적인 존재로 인간을 태어나게 했으며, 이성을 통해 인간은 신에게로 곧추 솟아올라간다는 이 말, 키케로의 말이다. 그 이성으로부터 법(ius)과 법률(leges)이 인간에게 생겨났다고 한다(‘법률에 관하여’ 1권 22-23). 키케로(기원전 106~43년)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적인 자산, 특히 철학과 수사학을 열심히 익혀 로마에 소개한 인물이다. 그는 그리스말로 되어 있는 수많은 고전들과 그 속에 알알이 박혀 빛나는 고급 개념들을 라틴어로 옮겨놓음으로써 빈곤한 라틴어를 풍부하게 살찌운 로마의 최고 지성인으로 꼽힌다.

위의 글에서 그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만 있으며, 인간에게 있으되 신으로부터 받은 신비로운 것, 그래서 인간과 신을 하나의 동아리로 묶어줄 수 있는 것을 이성이라 선포한다. 키케로의 생각은 로마에선 일찍이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키케로가 말한 라티오(ratio)란 그리스말로는 로고스(logos)이기 때문이다(키케로는 로고스를 ‘생각하는 이성’을 뜻하는 ‘ratio’와 ‘생각이 이성에 맞게 표현된 말’을 뜻하는 ‘oratio’로 구분했다).

스토아학파의 사상 속에선 맑디맑은 불로 형상화된 신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로고스, 곧 이성이었다. 이성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안에서 생각하기와 바깥으로 말하기. 신이 품은 생각은 세계로 펼쳐져 드러나며, 그래서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로고스적 존재이며, 로고스가 그어놓은 길을 따라 조화롭게 움직인다. 결국 세계란 신의 생각이 바깥으로 넘쳐 드러난 언어인 셈이다. 그 가운데 인간은 신을 쏙 빼닮았기에, 인간에겐 이성이 넘쳐난다. 넘쳐나 흘러나오는 것이 말이겠다. 말은 혼잣말(monologos)로 텅 비어 울리지 않고, 다른 사람과의 나눔말(dialogos)로 공명(共鳴)할 때, 그 뜻을 이루어낸다. “말(oratio)의 힘, 그것은 인간 사회를 묶어주고 조절하는 가장 큰 힘이다.”(‘법률에 관하여’ 1권 27).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말은 한갓 말에 그치지 않고, 행위로 이어져 뭔가를 있게끔 이루어내는 힘을 뿜어내며, 감추어진 세계의 비밀을 드러낸다.

대화가 필요하다, 진리를 찾기 위해
그리스말로 진리를 아레테이아(aletheia)라 한다. 이 낱말에는 감추어져 있던 것(lethe)이 벗겨져(a-) 환하게 드러난다는 뜻이 깃들어 있다. 이 말과 관련해 철학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준다. 인간의 영혼이란 모든 것이 환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진리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망각의 레테(Lethe)강을 건너오며 육체를 옷 입음으로써 진리를 잊고 있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진리에 대한 간절한 사랑(philosophia)으로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영혼을 깨끗하게 해방시키려고 한다면, 잊혀진 옛 기억을 되살려(anmnesis) 진리를 밝혀낼 수 있다(플라톤 ‘파이돈’ 72e). 그런데 망각의 늪에서 벗어나 진리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되살려낼 수 있을까? 그것은 올바른 말(logos)을 주고받는 가운데(dia-) 잘못된 생각을 버려나가는 참된 대화(dialogos)를 통해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들에겐 오로지 진리를 찾아 드러내 밝혀나가는 대화의 기술(dialektike)이 필요하다. 그것을 열심히 실행하며 철학을 하였던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였다.

뭔가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찾아가 대화를 통해 논파(elenchos)하던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기존의 주장과 논의를 해체하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방법을 이어받은 플라톤은 이 논파의 기술을 좀 더 발전시켜 진리의 세계를 찾아가며 새롭게 구축하는 생산력을 가진 대화의 방법, 곧 디아렉티케로 체계화시켜 나갔다. 그는 참되고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와 잠시도 쉬지 않고 숨가쁘게 변화하는 현상의 세계를 나누었다. 그리고 현상세계에 대한 감각을 통해 얻은 어렴풋한 한갓 의견(doxa)에서 벗어나 로고스를 통해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참된 지식(episteme)을 얻기 위한 철학적 방법을 다듬어내었다. 그것이 바로 말(logos)을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진리를 드러내는 대화의 기술, 곧 변증술(辨證術, dialektike)이었다.

그런데 플라톤의 학원에서 20년간 철학을 공부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이 갈고 닦은 길에 이어져 나가는 새로운 길(methodos)을 마련한다. “이 작품의 목적은 어떤 문제가 우리들에게 던져지든지 그것에 관하여 상식(endoxa)으로부터 추론할(syllogizesthai) 수 있으며, 또 우리 자신이 하나의 주장(logos)을 밀고나려고 할 때, 어떤 모순도 일으키지 않고 말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변증론’ 100a18-21). 이때 상식으로부터 출발하는 추론이 바로 대화의 기술과 관련된 추론(dialektikos syllogismos)이다.

추론하라, 세계를 건져 올리기 위해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낱말이 있다. 바로 쉴로기스모스(syllogismos)다. 추론(推論)이라 번역되는 이 낱말은 원래 로고스(logos)들을 함께(syn-) 엮어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매우 자부심을 갖고 아끼는 발명품이다. 말과 말을 엮어 말끔한 말의 묶음(syllogismos)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추론(syllogismos)도 하나의 말(logos)인데, 그 속에서는 어떤 주장들이 이미 전제로 놓여 있고, 그 주어진 주장들과는 다른 어떤 주장이 바로 그 주어진 주장들에 의해 반드시 결론으로 따라 나온다.”(‘분석론 전서’ 24b19-21). 주어진 전제로부터 반드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결론을 끌어내는 방법, 그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낸 추론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국민의 참된 신임을 얻는 사람(B)이 한 국가의 지도자(A)가 되어야 한다’라는 주장과 ‘법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사람(C)만이 국민의 참된 신임을 얻을 수 있다(B)’라는 주장이 주어졌을 때, 이로부터 반드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법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사람(C)만이 한 국가의 지도자(A)가 되어야 한다.’ 이 결론은 앞에 전제로 주어진 두 개의 주장이 참이라고 합의되는 순간, 언제나 참일 수밖에 없다. 이 추론은 ‘B이면 A이다. C이면 B이다. 따라서 C이면 A이다’라는 틀을 가지고 있는데, 이 틀은 논리적으로 언제나 타당하다. 말과 말을 엮어 반드시 타당한 추론의 망을 촘촘히 짜낸다면, 그것으로 세계를 차곡차곡 기술해나간다면, 세계의 모습을 오롯이 건져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품고 있던 철학적 야망이었다.

위에서 보았듯, 가장 기본적인 추론은 대체로 2개 전제와 결론으로 이루어진다. 전제와 결론은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는데, 문장은 주어와 술어로 나뉜다. 주어와 술어를 이루는 낱말들은 그 낱말들이 가리키는 대상이나 의미하는 특징에 따라 실체(ousia)로 구분되거나, 몇 개의 술어의 모둠, 이른바 범주(範疇, kategoria) 안으로 나뉘어 모여든다. 거꾸로 말하자면 하나의 주어에 모둠 속의 낱말이 술어로 나와 붙어 문장을 만들고, 문장들이 전제와 결론의 형태로 묶여서 추론을 만든다. 이 순서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추론의 방법을 짜임새 있게 정리하였다.

그는 우선 낱말들의 모둠을 가다듬는다(‘범주론’). 그리고 낱말들이 엮여 이루어지는 문장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명제론’), 두 개의 문장을 각각 대전제와 소전제로 두고, 두 개의 전제를 이어주는 매개항을 통해 두 전제를 묶어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추론, 이른바 삼단논법의 타당한 틀을 16개로 압축해서 보여준다(‘분석론 전서’). 그리고 타당한 추론의 틀을 세 가지 분야에 적용한다. 가장 먼저, 참된 것으로 인정되는 전제를 내세워 그로부터 필연적인 결론을 끌어내어 진리를 드러내(apo-) 보이는(deixis) 학문적인 논증(apodeixsis)에 새로운 추론의 틀이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분석론 후서’). 그 다음에는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지며 상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진리에 이르는 대화의 기술(dialektike)에도 이 추론의 방법을 적용한다(‘변증론’). 거기에 덧붙여 사람들을 교묘하게 속이는 거짓 추론을 낱낱이 분석하여 그 본색을 드러낸다(‘소피스트적 논박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여섯 권의 책들은 세계를 파악하는 철학적 수단이요 도구라는 뜻에서 ‘오르가논(Organon)’이라는 이름으로 나중에 다른 사람(아마도 안드로니코스)에 의해 시리즈로 묶인다. 이는 아프로디시아스 출신의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로기케(logike)라고 불리게 되는데 논리학(logic), 곧 말(logos)의 타당성이 성립하는 원리를 다루는 기술(-ike)이라는 뜻이겠다. 서구 합리주의 전통의 핵심을 이루는 논리학은 이렇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 속에서 대학입학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수많은 학생들이 이제 다시 열심히 논술을 준비해야 하는 오늘 우리들의 풍경 속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손길이 닿아있는 셈이다.(김헌|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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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7-25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고전을 묵묵히 공부하고 번역하는 사람들이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죠.당장은 눈에 뜨이지 않지만 이런 사람들 덕분에 학문이 발전한다고 봅니다.

로쟈 2008-07-26 00:42   좋아요 0 | URL
요즘은 그래도 관심과 처우가 예전보다는 나아진 편이죠. 대신에 다른 인문학 '놀박'들은 학문에 기여한다는 소리도 못 듣고...^^;

노이에자이트 2008-07-26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몇년전에 강정인<소크라테스,악법도 법인가?>(문학과 지성사)를 읽고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란 말을 안했다는 사실을 안 뒤에 아연실색.교실에서 가르치는 거짓말이 얼마나 해독이 큰가를 깨닫게 되었죠.그런데 요즘은 교과서에서 그런 거 뺐나봐요.다행이죠.

로쟈 2008-07-27 16:31   좋아요 0 | URL
박홍규 교수의 책에서도 나왔던 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7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강정인 씨 책이 나온지 한참 뒤에 한 10년 후 쯤?소크라테스 재판에 대한 책들이 연이어 나오더군요.90년대 중반 경 이시돌 스톤의 <소크라테스의 비밀>이 나왔는데 그땐 별로 반응이 없었어요.박홍규 씨는 우상파괴 식 글쓰기의 상징이죠.카뮈 평전에서도 이화영 씨를 사정 없이 비난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진 마이클 왈쩌의 카뮈 옹호도 시원하게 두들기더군요.하하하...통쾌하긴 한데 너무 공격적이라 좀 염려는 되더라구요.저야 학계에 없으니까 상관없지만 같은 동업자를 너무 공격한다는 염려...저렇게까지 해도 되나...하는...

로쟈 2008-07-27 22:42   좋아요 0 | URL
'김화영' 교수를 공격했나 보군요. '동업자'는 아니죠. 불문과 교수하고 법대(교양학부로 옮기셨나) 교수니까요. 승진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7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법과 교과과정도 엄청나게 두들기더라구요.사실 우리나라 법대 교과과정을 속칭 수험법학이라고 하잖아요.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박교수 입장에선 한심하기도 할 거에요.
그건 그렇고 인문학 놀박이 뭔가요?

로쟈 2008-07-27 23:22   좋아요 0 | URL
'노는 박사'를 놀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2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서글픈 단어군요.우리나라도 중고교 때 참고서나 교과서 외의 책을 많이 읽혀서 대학에 와서는 교양과정에 세계의 명저 읽고 독후감내는 그런 과정을 필수로 해야 하는데... 사실은 부모나 교사들도 학창시절에 교과서와 참고서만 읽었으니...저도 마찬가지구요.정말 억울해요.
 

주말 북리뷰 기사에서 눈에 띈 것 중 하나는 미국 '뉴요커'의 필진이자 영화평론가라는 데이비드 덴비의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 완역본에 대한 평이었다(책도 저자도 꽤 유명하다고). 나는 표지가 그닥 맘에 들지 않아서(조잡하다) 서점에서 자세히 들춰보지 않았는데, 예전에 나온 <호메로스와 테레비>(한국경제신문사, 1998)와 같은 책을 옮긴 것이라고 한다(표지만 기억이 나는데, 알게 모르게 입소문을 탔던 책이고 출판평론가 최성일씨는 '올해의 책'으로 꼽기도 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10년만에 2판의 완역본이 나왔다. 리뷰기사와 함께 10년전 리뷰도 같이 옮겨놓는다.    

한겨레(08. 07. 12) '완역’을 부루퉁하게 여기는 이유

십년은 강산이 변하는 세월이다. 짧지 않음을 새삼 실감한다. 9년 전, 어느 매체에다 이 책의 첫 번역인 ‘미디어시대의 고전읽기’ <호메로스와 테레비>(1998)를 거론하며 이런 말을 했다. “이 책은 500쪽이 넘는다. 그나마 번역자가 일부 편집을 한 게 그렇다.” 앗! ‘초역’에는 이것의 근거였을 ‘옮긴이의 말’ 같은 게 따로 없다. 본문에 있나, 아니면 나의 착각인가.

‘초역’을 통해 이미 이뤄졌을 수도 있지만, 이런 책도 ‘잘리지’ 않고 우리말로 옮겨졌으면 한 내 바람이 실현되었다. 이와 별개로 ‘초역’에 짐을 지우는 ‘완역’의 성립 근거는 온당치 못하다. “(이 번역의 질과 수준이 신뢰할 만한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판단에서 새로운 번역이 시도되었다고 하겠다).”(역자 서문) 뚜렷한 물증 없이 이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완역’에 의미를 부여했다.

‘완역’ 첫쨋권 초반에서 보이는 “데이비드/데이빗”과 “유대/유태”의 뒤섞인 표기는 꽤 큰 흠이다. 또한 원문을 그대로 싣는 ‘참고문헌 목록’은 전문적인 비평서 중심이라 수록하지 않았고, 학구파는 원서를 참고하라는 ‘일러두기’는 지나친 배려다. 월권으로 볼 수도 있다. ‘완역’에도 없는 게 있는 셈이다. 번역자와 편집자가 번역서의 ‘문지기’라면, 그들의 재량권은 어느 선까지 허용되는지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완역’ 읽기는 달뜨지 않았다. (달뜬 느낌을 눅인 ‘초역’ 독후감은 <인물과 사상> 1999년 3월호 ‘최성일의 출판동네 이야기’ 참조) 나는 데이비드 덴비가 지칭하는 “우리”와 “누구나”에 들지 않아서다. 그가 말하는 “우리”는 “서양”이다. ‘초역’에선 “서방”이라고 옮겼다. 우리가 동구권에 대응하는 서방세계의 잠정적인 일원이긴 했다. 그러나 우린 서양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금방 분명히 이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플라톤의 <국가>는 여전히 흐릿하기만 하다. 나는 번역서를 주로 읽지만 번역시집은 거의 안 읽는다. 시구가 퍼뜩 와 닿지 않는 탓이다. 테일러 교수가 인용한 “모든 진실을 말하되 비스듬히 말하라”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구에서 “비스듬히 말하라”의 뜻을 도통 모르겠다. 감을 못 잡겠다.

사실 나는 고전에 약간의 가중치만 부여한다. 미국 컬럼비아대 교양필수 강좌의 독서목록이 지닌 권위와 상징성에도 회의적이다. “옛 작품을 현재 상황을 그려내는 데 미흡했다는 식으로 평가한다면 고전은 살 수 없다”는 시각이 옳다면, 우리가 아무리 미국식 삶의 방식을 추종한다 해도 우리 나름으로 살아온 장구한 세월에 비하면 그것은 일천하기에, 우리는 서양 고전 없이 살 수 있다는 관점 역시 맞다.

내가 ‘완역’을 부루퉁하게 여기는 결정적 이유는 ‘완역’에 추가된 ‘제2판 머리말’(2005)에 있다. 데이비드 덴비는 9·11 이후 미국이 직면한 상황에 대해 당혹해하면서도 건전한 애국심을 견지하려 든다. 미국이 세계 평화를 크게 해치는 ‘악의 제국’이라는 세계인의 여론을 곱씹기는커녕 이에 억울한 감정이 있는 듯싶다. 그에겐 ‘신이여, 미국을 굽어 살피소서’가 더 다급해 보인다.(최성일 출판칼럼니스트)

물과사상(1999년 3월호)'올해의 책'과 에머슨의 세 가지 독서 법칙

내가 뽑은 올해의 책    
<출판저널>에서 '올해의 책' 추천을 내게 청했다면, 나는 국내 저자의 책과 외국 필자의 책을 하나씩 꼽았을 것이다. 조병준씨의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와 데이비드 덴비의 <호메로스와 테레비>를 말이다. 이 책들은 앞서 살펴본 7개의 지면에서 각기 1번씩 소개된 바 있다. 조씨의 책은 언론노련의 30권 안에 들었고, 덴비의 책은 <출판저널>의 68권에   속했다. '그린비'와 '박가서장' 두 곳의 출판사를 통해 나온 조씨의 책은 '분산 출판'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깊지만, 책의 성격이 이 글의 주제와 딱 맞아떨어지는 <호메로스와 테레비>를 자세히 좀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호메로스와 테레비>(한국경제신문사)는 아직 책의 품질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출간 직후 언론의 이렇다 할 조명을 받지 못했다. 신문사 출판부에서 펴낸 책이기 때문이다. 국내 출판 저널리즘에는 묘한 관행이 하나 있는데 다른 언론사 기자가 쓴 책을 홀대하는 것이다. 홀대하는 방식은 아예 다루지 않거나 '두 줄'로 처리하는 것이다. 신문사 출판부가 만든 책에 대한 대접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출판저널> '올해의책'에 포함되는 영예를 누렸다. 이중한 출판평론가는 추천의 변을 이렇게 밝혔다. "마흔 여덟의 언론인이 하버드대학에 다시 복학해 들은 교양교육을 듣고 소감을 적었다. 생동감 넘치는 묘사로 인문학의 역사와 문명론을 살핀다."

잡지에 실린 그대로 옮겼는데 여기에는 큰 오자(?)가 있다. 처음에는 사소한 실수로 여겼지만 책을 확인해 보니 그렇지가 않다. 덴비의 모교는 하버드가 아니라 뉴욕에 있는 콜럼비아대학이다. 배경의 측면으로는 콜롬비아나 하버드나 그게 그거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가 되는 교양강좌는 콜럼비아대학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콜럼비아대학에서 시작돼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가 지금은 콜럼비아와 시카고대학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서다.

<호메로스와 테레비>는 대학 강좌 수강기이다. 덴비는 졸업 30년만에 두 개의 교양강좌를 재수강한다. 유럽의 표준적인 문학선집을 강의하는 '인문학'이 그 하나고, 철학 및 사회 이론 분야의 걸작선집을 다루는 '문명론'이 다른 하나다. 이 둘은 나뉘어 있지만 '서양문명개론'에 해당하는 하나의 강좌로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책에는 두 강좌가 뒤섞여 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강좌의 중심에는 서양의 고전이 자리한다. 이 책에 언급된 고전들만 읽으면 에머슨의 두 번째 독서 법칙은 쉽사리 지켜진다. "유명한 책만 읽는다."
    
백인·남성 중심의 서양사상사
호메로스와 플라톤에서 조셉 콘라드에 이르는 고전 목록은 백인·남성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흑인 여학생의 비판에 직면한 대학 당국자의 해명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리 교수들은 서방의 고전들을 가르치기에도 벅찹니다. 그 분들에게 동양 문헌에까지 정통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쳐요." 강좌의 교수진은 관련 학과에서 차출된 여러 명으로 구성된다.

이 중 한 명을 국내 TV뉴스를 통해 볼 기회가 있었다. 제임스 샤피로 교수는 지난해 9월 23일 문화방송의 <9시 뉴스>에 등장했다. 이우호 특파원의 방문을 받고, 클린턴의 지퍼게이트를 보는 미국민의 상반된 견해에 대해 코멘트하는 샤피로 교수는 책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금발의 젊은 영어 교수인 그는 큰 키에 스포츠팀 코치 같은 모습이었다."

나 역시 흑인 여학생의 기세등등한 목소리에 잠시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지만, 콘라드에 대한 덴비의 평가를 읽고 오히려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균형된 시각을 갖게 되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에는 제인 오스틴과 콘라드를 제국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대목이 있다. 덴비는 그것을 가혹한 처사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치누아) 아체베와 사이드의 고뇌에 찬 거부는 콘라드의 확고한 위치, 서방 문학의 핵심 커리큘럼에 대한 가능한 결론으로서 그의 위치를 확인시켜 줄 뿐이다."라는 진술을 통해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런 류의 책에서 항시 느끼는 것이지만, 서양 사상사에서 마르크스가 차지하는 지위는 대단하다. 그리고 이 책은 마르크스에 앞서 다양한 사상을 탐구하라던 1980년대 '웃어른들'의 가르침이 갖는 일면적 진실을 깨우쳐 준다. "마르크스만 읽으면 된다"는 이야기는 에른스트 블로흐 같은 대가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우리 같은 중생이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 사상사에 대한 기초지식의 습득이 필수적이다.

이 책은 5백 쪽이 훨씬 넘는다. 그나마 번역자가 일부 편집을 한 게 그렇다. 이런 책도 '커트' 없이 우리말로 옮겨지고,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세월이 왔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램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다시 한 번 아주 천천히 이 책을 음미해 가며 읽고 싶다. 그것은 한편으로 에머슨의 세 번째 독서 법칙을 준수하는 일이다. "좋아하는 책만 읽는다."

08. 07. 14.

P.S. 최성일씨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8)도 사실 지난주에 선을 보인 책이다. 같은 타이틀의 첫권이 2002년에 나온 이후 네번째 책이다. 분량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주로 국내에 소개된 '사상가들'의 저작과 사상을 간명하게 정리해주는 장점이 있다. 출판칼럼니스트답게 서지사항을 꼼꼼하게 챙겨주고 있어서 관심있는 독자들에겐 유익하다. 참고문헌에 대한 평도 포함됐다면 더 좋았을 듯하다(나는 1, 2권만 오래전에 훑어본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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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08-07-15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좋은 책들을 알려 주시네요^^ 전 백수로 또 돌아왔습니다. 비평고원은 이제 잘 안 오시나봐요. 저도 알라딘에 와서 로쟈님의 추천 책들을 보고 갑니다.



로쟈 2008-07-15 11:12   좋아요 0 | URL
비평고원도 가끔 들르는데 예전만큼의 활력은 없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7-15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룬 책들이 지나치게 고대 전근대 쪽에 치우쳐 있더군요.저 같으면 19세기 이후 것을 더 많이 취급했을 거예요.

로쟈 2008-07-15 23:33   좋아요 0 | URL
강의 자체가 '고전 읽기'여서 그런 듯합니다. 말 그대로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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