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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자주 눈에 띈다 싶었지만 '대박'이 난 줄은 모르고 있었다. <잉글리시 리스타트>(뉴런, 2008) 시리즈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기껏해야 나의 관심은 저명한 문학비평가 'I. A. 리처즈'의 이름을 이제 사람들은 <잉글리시 리스타트>의 저자로 기억하겠구나 정도였는데, 한겨레21의 '베스트셀러 워스트리더' 꼭지를 읽어보니 '장난'이 아니다. 오죽하면, '무시무시한' 영어 욕망일 것인가! 알고보면, 원제가 <그림으로 보는 영어>이고 한번 나왔던 책이 다시 나온 것이다. 아마도 올해의 가장 '기이한' 베스트셀러가 아닐까 싶다(출판사회학의 연구대상이다)...

한겨레21(08. 10. 31) ‘무시무시한’ 영어 욕망

신기한 물건 하나가 등장했다. 원래 있던 겉표지를 어디에 두고 온 듯한 노란색·파란색·초록색의 단순명료한 디자인, 한글 제목은 귀퉁이에 둔 과감함, 우유 한 갑 무게도 안 되는 가벼운 종이, 듣기용 MP3는 인터넷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1만원이 안 되는 가격…. 가벼운 책이 무겁게 베스트셀러를 가격했다. <잉글리시 리스타트>(I. A. 리처즈·크리스틴 깁슨 공저, 뉴런 펴냄)가 터졌다.

<잉글리시 리스타트>의 ‘BASIC’편은 발간(7월2일) 한 달 만인 8월2일 인터넷서점 ‘예스24’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9월4일에는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에도 올랐다. ‘어학’ 부문이 아니다. 종합베스트셀러다. 이후 연속 7주 종합 1위를 지키고 있다. 10월 둘쨋주 교보문고에는 ‘ADVANCED1(스피킹편)’이 종합 2위, ‘ADVANCED2(리딩편)’가 종합 6위에 올라 있다. 편집부에서 전하는 판매부수는 30만 부(인쇄는 35만 부). 첫 쇄는 3천 부를 찍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베스트셀러’였던 것이다.

‘영어 교재’가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것은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정찬용 지음, 사회평론 펴냄)의 2000년 2~4월 총 9주, <해커스 토익>의 2006년 7월 첫째·둘쨋주 총 2주가 있었다.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가 ‘학습법’에 관한 것이라면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본격 영어 교재’를 표방한다. <해커스 토익>의 베스트셀러 등극이 대학 여름방학 초기 거의 모든 대학생들이 토익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머리를 동여맸음을 보여준다면,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한국 일반인들이 영어 공부를 하려는 욕구가 꿈틀대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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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낸 뉴런은 ‘전략적’으로 가볍게 만들었다. 홍은숙 대표는 영어 원제인 ‘그림으로 보는 영어’(English through Pictures)를, 타깃을 명확히 가다듬으면서 ‘리스타트’로 바꾸었다. 1997년 <그림으로 보는 영어>(창문사)로 국내에서 한 번 나왔다가 사라진 타이틀이 일신한 것이다. 그리고 카페를 통해 학습그룹을 조직했다. 카페 가입자는 현재 6만4천 명을 헤아린다.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앞부분 ‘학습법’과 ‘소감’을 덧붙인 글을 제외하고는 시작되는 첫 장부터 해답까지 모두 영어와 그림으로 돼 있다. ‘I’와 ‘YOU’로 시작한다. 단어 아래 철사로 만들어진 단순한 남자가 자신을 가리키고 상대방을 가리킨다. 장이 끝나면 연습문제가 있다. 책을 딱 반으로 나눠서 뒷부분은 연습문제로 이뤄진 ‘워크북’이다. 한 출판사 편집자는 “일반인이 몽땅 영어로 된 한 권의 책을 읽어내려간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한 경험일 것”이라고 말했다.

책 표지엔 제목보다 크게 ‘영어 한 달만 다시 해봐’라고 쓰여 있다. 능률영어사 대표인 이찬승씨는 “영어 공부에 손을 놓았던 일반인들이 책을 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영어를 할 필요도 없고 생각도 없던 사람들이 요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영어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능률영어사 홈페이지에는 65살 할머니가 한국방송통신대에서 영어를 배우는 사연을 적어놓기도 하고, ‘발음을 배우고 싶다’고 문의를 해오기도 하는데, “옛날에 없던 분위기”다. 이명박 정권의 ‘영어 몰입’도 한몫했고, 해외여행이 많아지는 환경도 더해졌을 것이다.

이 폭발은 일반인들에게 ‘영어에 대한 욕구’가 무시무시하게 잠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어 학습 시장은 점점 분화돼왔다. 쓰기, 말하기, 읽기, 단어, 문법 등. 이런 조류는 영어를 적극적으로 구하는 이들을 위한 시장이다. 일반인들을 위한 학습서 시장이 존재해오긴 했지만 미미하다.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이런 조류를 역행한다. ‘영어 공부 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어 교재 시장의 여집합 ‘영어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략했다. 그 부분은 ‘영어 공부 하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방대한 시장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베스트셀러의 여건 또한 완성된다. 베스트셀러의 기본 조건은 ‘누구나 집어든다’이다. 그런 면에서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본격’ 영어 교재를 표방하긴 하지만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의 ‘일반인이 보는 영어책’이라는 욕구와 비슷하다. <잉글리시 리스타트>의 키워드는 ‘제너럴’이다. 영어책을 겨냥하고 있지만 핵심은 ‘누구나’다. 아주 특수한 분야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키워드는 ‘일반인 독자’인 것이다.

그런데 정말 영어 학습은 효과가 있을까. 이찬승씨는 지금 아무런 해답을 내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베스트셀러에 등극하고 사람들을 자극하고 있을 뿐 아직까지 검증된 건 없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수천 시간이 필요하다. 머리에 들어가고 나오는 과정까지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책은 어쨌든 책이다. 책은 단순 지식이지 사용과는 관련이 없다”고 덧붙인다.

이 책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영어교재’이다. 머리말에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문구도 나온다. 출판사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원서에 나온 말을 옮겼다고 한다. 10월23일 현재 미국 ‘아마존닷컴’의 이 책 순위는 ‘26만2788’. 2005년판인데 ‘템포러리 아웃오브 스톡’(일시 품절)이다. 원서의 출판연도는 1945년, 성경 이후로 가장 오래된 영어교재인지도 모르겠다.(구둘래 기자)

08. 11. 02.

P.S. 이미 적은 대로 <잉글리시 리스타트>에 대한 나의 반응은 'I. A. 리처즈'(보통 그렇게 읽었다)가 이런 책도 썼나 하는 것이었다('썼다'기보다는 '만들었다'는 게 맞겠지만). 이 저명한 신비평가의 책으로 현재 구할 수 있는 건 <문학비평의 원리>(동인, 2005)와 <수사학의 철학>(고려대출판부, 2001)이 있다. 모두 베스트셀러와는 거리가 먼 책들이다. <문학비평의 원리>는 예전에 <문예비평의 원리>(현암사, 1981)로 출간된 적이 있고, 내가 갖고 있는 것도 이 현암사판이다.

리처즈의 책으론 고전인 <시와 과학>(을유문화사, 1947)이 고 이양하 선생의 번역으로 나온 적도 있다(저자가 'I. A. 리차아드'로 표기됐다). 그리고 또 하나 C. K. 오그든과의 공저 <의미의 의미>(현암사, 1987; 한신문화사, 1990)도 예전엔 많이 읽히던 책이다. 물론 독자는 주로 어문학 전공자들이었지만...

영미비평사 3 - 뉴 크리티시즘 : 복합성의 시학

미국의 신비평(뉴크리티시즘) 얘기가 나온 김에 정평있던 연구서도 적어두도록 한다. 영문학자 이상섭 교수의 <복합성의 시학: 뉴크리티시즘 연구>(민음사, 1987)가 그것인데, 나중에 <영미비평사3 - 뉴크리티시즘: 복합성의 시학>(민음사, 1996)이라고 재출간됐다. 하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된 듯하다. 현역에서 은퇴한 책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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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03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저자가 문학비평가로군요.몰랐네요.

로쟈 2008-11-03 22:22   좋아요 0 | URL
네, 나름 저명한 비평가이면서 대학 영문학과에서 무얼 해야 하는지 틀을 마련한 사람이죠...
 

아침에 기사를 보고 저녁에 서점에 들러 손에 든 책은 사르트르의 자서전 <말>(민음사, 2008)이다(알라딘에는 아직 입고가 안된 듯하다). 예전에 정명환 선생의 다른 번역본으로 읽었지만, 이번에 역자가 새롭게 개정판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말>은 좋아하는 책이고 또 내가 불어 원서까지 갖고 있는, 많지 않은 책 중의 하나여서 이번 번역본의 재출간이 반갑다. 오직 '읽기'와 '쓰기'만으로 자신의 삶을 기록한 이 독특한 자서전은 오래전 기억을 다시금 잠시 떠올리게 해주는 '기억 재생기'이기도 하다. 계기가 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8. 10. 28) '나는 왜 문학병을 앓았나' 사르트르의 고백

20세기를 대표할 만한 자서전으로 꼽히는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의 자서전 <말>이 44년 만에 새로 번역돼 나왔다. 최근 민음사에서 발간된 <말>은 고 김붕구(1922~1991) 서울대 교수와 함께 1964년 이 책을 번역했던 정명환(79) 서울대 명예교수가 본문을 수정하고 새로 주석을 단 판본이다.



정 교수는 이 책의 해설에서 "1964년 <말>의 출간이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그 해 가을 사르트르가 노벨상 수상을 거절하자 한 출판사의 요청으로 김 교수와 함께 거의 한 달 만에 번역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내가 맡은 1부의 번역에는 지금 누가 들추어볼까 겁이 날 정도로 잘못된 곳이 많았다"며 박맹호 민음사 회장의 권유로 개역을 시작해 1년 반에 걸쳐 작업을 마쳤다고 밝혔다.

자서전은 한살 때 아버지를 여읜 사르트르가 외조부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낸 유년시절로부터 시작된다. 그 시절은 사르트르의 정신적 토양이 됐다. 이 책의 1부와 2부인 '읽기'와 '쓰기'가 그 토양이다. 키 작고 병약했으며, 약한 사시(斜視) 증세를 보였던 소년 사르트르는 양서로 가득찬 외조부의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스스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 일곱살 무렵부터 외조부와 운문으로 편지를 교환한 일화 등을 들려준다.

정 교수는 '읽기'와 '쓰기'를 통해 자존감을 획득했던 사르트르지만 그는 자서전에서 이를 일종의 '문학병'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사르트르는 자서전에서 "할아버지가 나를 구해 주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속임수로 나를 끌어넣었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말>을 쓸 무렵 '문학 결별' 선언을 하며 문학과 현실참여의 분기점에서 양자의 관계성에 대해 고민하던 사르트르의 심경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그러나 자서전 말미에서는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지금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앞으로도 쓸 것이다"라도 적고 있다. 정 교수는 이는 단순히 정치적 참여를 촉구하기 위한 문학이 아니라, 정치는 정치대로 중시하되 기존질서를 비판하고 절대미의 경지를 추구하는, '정치적 참여를 넘어서는 문학'을 추구하겠다는 사르트르의 문학적 지향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말>을 어떤 각도에서 읽느냐의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여러 각도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 야릇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사르트르의 여러 철학적 저서와 문학작품의 씨앗을 어김없이 찾아볼 수 있고, 또 당시의 정치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귀중한 시사를 얻을 만하다"고 <말>이 가지는 의미를 밝혔다.(이왕구기자)

08. 10. 28.

P.S. 잠시 찾아보니 기사에서 언급된 최초의 번역본은 <말>(지문각, 1965)이다. 1964년 사르트르가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고 나서 김붕구 교수와 함께 한달만에 옮겼다고 하니까 책은 1965년초에 나왔겠다. 내가 읽은 번역본은 다시 나온 <말>(민예사, 1992)이다. 역자는 동일한데, 부분적으로 수정이 가해졌는지는 모르겠다. 김붕구 교수를 역자로 한 책으로 <책읽기와 글쓰기>(삼문, 1994)도 출간됐었다. 이 역시 <말>을 옮긴 것이다. 완역이었는지는 긴가민가한데, 만약 그렇다면 김붕구본의 독자적인 <말>이겠다. 이 두 불문학자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도 각각 번역하는 바람에 나는 두 종의 번역본을 읽었다...

사르트르 얘기가 나온 김에 한권만 더 적어놓자면, 계약결혼한 아내 보부아르가 그의 죽음에 부친 책 <작별의 예식>(두레, 1982)도 다시 출간되면 좋겠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평론집 <책읽기의 괴로움>(민음사, 1984)에서 이 책에 관한 아름다운 평문을 읽고 시립도서관에서 찾아 읽은 기억이 난다. 아, 손에 닿을 듯이 기억이 나는데, 너무도 오래전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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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 Les Mots (이경석 옮김)
    from 성실히 살았으면 2009-08-25 23:39 
    장 폴 사르트르가 50대 후반에 쓴 자전적 소설이다. 사르트르의 (엄마쪽) 증조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사르트르가 처음 책을 접하고 말을 배우고, 혼자 영화 찍는 것처럼 연기 놀이를 하고, 소설을 읽고 쓰게 되는 이야기가 나오고, 이것이 사르트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야기하는 책이다. 참고로 예전에 번역되어 "책읽기와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1990년대에 나온 책도 있고, 최근 민음사 시리즈로 나온 것도 있다. 이 책을 접하게..
 
 
2008-10-29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9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8-10-2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시안 프로이트 같애, 아님 말고.^^ 오랜만이어요, 언제 만나서 밥먹읍시다.

로쟈 2008-10-29 22:51   좋아요 0 | URL
아님 같애요. 한번 밥 먹으면 몇 년씩 가네요.^^;
 

<인간 없는 세상>(랜덤하우스코리아, 2007)의 저자 앨런 와이즈먼이 다시 한국을 찾았다. ‘DMZ 보존을 위한 국제콘퍼런스’ 참석과 함께 그의 책 <가비오따쓰>(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재출간을 기념하는 뜻인 듯하다. 지난주 서점에 깔린 <가비오따쓰>가 재출간 도서(월간 말, 2002)라는 건 알았지만 역자가 생태공동체운동가인 황대권씨라는 건 이번에 알았다. 마침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 저자와 역자, 두 사람의 대담이 게재되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10. 27) “DMZ는 자연의 자기치유력 산 증거”

‘가비오타스(Gaviotas)’는 콜롬비아 동부 야노스의 오지에 있는 작은 생태공동체다. 그러나 인구 200여명의 조그만 마을이 일으킨 작은 기적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가비오타스인들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불모의 땅에 열대우림을 부활시켰다. 태양열 에너지를 사용하고 소나무를 심었다. 또 수경재배법을 통해 채소를 자급자족했다. 무상 교육, 무상 의료를 실시하며 구성원들이 창조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 가비오타스를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모델로 보여주면서 전 세계에 감동과 각성을 불러일으켰던 책이 <가비오따스>(랜덤하우스)다.

저자 앨런 와이즈먼(61)은 가비오타스인들의 고군분투기를 통해 환경을 손상시키는 힘이 거꾸로 그것을 회복시키는 데도 사용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그는 ‘인간 없는 세상’이라는 도발적인 상상을 통해 오늘날 ‘인간 있는 세상’의 문제점을 통찰한 <인간 없는 세상>(랜덤하우스)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DMZ 보존을 위한 국제콘퍼런스’ 참석과 <가비오따스> 재출간을 맞아 한국을 찾은 그를 <가비오따스>의 번역가이자 <야생초 편지>의 저자인 황대권씨(53)가 지난 24일 만나 대담을 나눴다.



황대권=<인간 없는 세상>은 DMZ(비무장지대)가 모티브였다. DMZ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앨런 와이즈먼(이하 와이즈먼)=같은 민족이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사이를 뚫고 새가 날아와 먹이를 먹는다. 한때 폐허였던 곳이 생명들로 가득 차 있다. DMZ는 자연의 자기치유력을 보여주는 증거다. 많은 사람들이 내 책의 DMZ 부분이 가장 감동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DMZ처럼 연약하고 아름답지만 위기에 처해 있다. DMZ 보존은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종을 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대립 상태에 있는 남북한이 협력하는 일이기도 하다.



황대권=나는 <야생초편지> 등을 통해 전통적 농업이 타격을 입을 것이기 때문에 야생의 풀을 식량으로 삼고 야생에 적응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와이즈먼=그렇다. 화석연료에 기초한 전통적 농업은 지속될 수 없다. 물을 오염시키고 토양을 파괴한다. 20세기 농업 기술은 화학비료와 유전자조작으로 지구를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식량 생산량이 증가한 만큼 빈곤층도 20세기에만 4배가 늘었다.

황대권=이 시점에 <가비오따스> 출간 10년을 놓칠 수 없다.

와이즈먼=<인간 없는 세상>이 제목처럼 ‘우리가 없는 세상(The World Without Us)’에 대한 얘기라면 <가비오따스>는 인류가 어떻게 자연과 함께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가 주는 교훈이 필요하다.



황대권=10년 동안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는 어떻게 변했나.

와이즈먼=가장 중요한 것은 가비오타스가 콜롬비아의 극심한 폭력적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비무장 공동체인데도 사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지금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실험을 하고 있다. 야자나무를 심어서 지속가능한 바이오연료를 개발하고 있다. 대부분 바이오연료를 위해 숲을 밀어버리지만 가비오타스는 기존 숲과 함께 야자나무를 심고 그것이 숲의 토양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

황대권=가비오타스가 자급자족 공동체지만, 생산물을 바깥 세계에 파는 구조여서 예측하기 힘든 세계 경제에 의존한다는 딜레마가 있는 것 아닌가.

와이즈먼=가비오타스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세계와 연결돼 있다.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까지는 생태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지만 너무 커져버리면 부작용이 생긴다. 우리가 커지는 것만을 위한 성장을 계속한다면 스스로를 파괴하는 사태에 직면할 것이다. 지금의 경제위기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번영’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다. 지금까지 크기를 키우는 성장을 번영이라고 했다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인류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가비오타스는 ‘선한 자본주의’의 사례다. 지속가능성에 가장 가까운 생태공동체다. 좋은 제품을 만들고 그것이 쓰레기를 만들지 않고 재활용되도록 노력한다.

황대권=한국에도 생태공동체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 생태공동체 운동의 현황은 어떤가.

와이즈먼=미국에는 LA 한가운데에 커다란 생태공동체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태양에너지를 이용하는 등 매우 저렴하게 살면서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미국에는 또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소비자가 생산자의 영농을 미리 지원하고, 수확물을 분배하는 것)가 확산되고 있다. 석유 에너지의 위기와 심각한 대기 오염 등으로 인해 생태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더 늘어날 것이다.

황대권=좌우 대립이 심각한 콜롬비아에서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가 살아남은 것을 보고 희망을 봤다. 가비오타스의 성공 이유는 무엇일까.

와이즈먼=가비오타스는 철저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또 모든 이들이 공동체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했다. 그들이 비무장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게 필요할 때도 있지만 정치적 중립이 효과적일 때도 있다. 나는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고 운동가도 아니다. 저널리스트다. 연구하고 사실을 발견해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내 책에는 무엇이 그렇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명백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설교하는 게 아니라 사실만을 보여준다. 그것이 책이 성공한 이유다.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도 단지 보여줌으로써 수많은 깨달음을 준다.

황대권=세계 금융위기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인간 없는 세상’에 한 발 다가가는 것 아닌가.

와이즈먼=금융위기는 <인간 없는 세상>에서 말한 대로 어떤 것이 지나치게 커지면 더 이상 지속적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지구는 수많은 재앙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아름답게 살아남았다. 문제는 우리 인간이 지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다. 이는 순전히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는 우리가 지구와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할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앨런 와이즈먼은 누구?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애리조나대 국제저널리즘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하퍼’ ‘뉴욕타임스’ ‘애틀랜틱먼슬리’ 등의 매체와 미국 국영라디오방송인 NPR에 진보적 관점의 글을 기고해왔다. ‘LA타임스’ 객원편집위원을 지냈다. 다수의 수상경력을 가진 베테랑 작가이기도 하다. 꼼꼼한 현장 취재와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간결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글을 써왔다. 지난해 펴낸 <인간 없는 세상>으로 ‘미국 최고의 과학 저술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한국을 비롯해 세계 20개국에 출간되면서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08.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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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 시몬느 베이유(1909-1943)의 <중력과 은총>(이제이북스, 2008)이 재출간됐다. 책의 제목은 그대로이지만 출판사와 표지는 바뀌었고, 그에 따른 것인지 저자의 표기도 '시몬 베유'로 변경됐다(나는 가급적이면 고유명사 표기를 갖고 장난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애장하고 있는 책이니 관심은 책의 내용이 아니라 표지이고 품새이다. 이번엔 이렇게 나왔다(알라딘의 표지가 작아서 교보에서 빌려왔다).

아직 실물을 보지 못해서 어떻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지난번 표지보다는 조금 나은 듯도 하다. 지금은 절판된 사회평론판은 이런 표지였다. 더 나오지도 않을 책에 '사색1'이라고 붙인 것부터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한불문화출판판. 역자가 동일하므로 내용이 그다지 바뀌었을 성싶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수집가들은 순전히 '표지'만 가지고도 유혹받는다.

세 권의 이미지를 모아놓으니 신간의 표지가 나쁘진 않아 보인다. 한데 어떤 책인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시몬 베유의 철학적 사유와 종교적 통찰을 묶은 책. 베유는 세상의 모든 것이 중력이라는 필연성의 영향 아래 놓여있으며 인간의 구원은 지성과 신앙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게 해주는 초자연의 빛인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생전의 베유가 남긴 노트를 사상적 동지였던 귀스타브 티봉이 발췌해 엮은 것으로 1943년 처음 출간됐다."라는 게 설명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아니 '중력과 은총'이란 제목만으로도 충분한 책이다. 우리에게 충분한 영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영감 때문에 나는 자작 시집 한권의 제목을 '중력과 은총'이라 붙였더랬다(http://blog.aladin.co.kr/mramor/933104 참조). 역자의 소개는 이렇다. "<중력과 은총>은 제목 그대로 밑으로 끌어내리는 중력에 맡겨진 인간의 불행과 초자연의 빛인 은총을 통한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주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책은 중교적 수상록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 비극성에서 출발하여 모든 인간이 처한 근본적 삶의 조건을 파헤친 인간 탐구의 기록이다."

'기독교적 비극성'에서 출발하지만 베이유의 기록에는 유머와 위트가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해마지 않는 아포리즘은 이런 것이다. "사랑은 우리들의 비참함을 말해주는 표시이다. 신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수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것만을 사랑할 수 있다."

당신 또한 이러한 인간적 삶의 조건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면 <중력과 은총>은 애장서로서 충분하다. 펴보지 않아도 된다. 다만 책장 가까이에 두시길. 우리를 잡아끄는 삶의 중력 속에서도 은총의 빛을 잃지 않도록... 물론 가끔씩 들춰봐도 좋겠고...

08.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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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ann 2008-10-16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 Simone Weil의 한글표기 '시몬 베유'는 현행 국립국어원 외래인명 표기법에 따른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임의로 바꾼 것이 아니랍니다.

로쟈 2008-10-16 20:59   좋아요 0 | URL
네, 알고 있습니다. 그 외래인명 표기법이 저로선 맘에 들지 않습니다. 고유명사는 원래 언어체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밖에 있는 것인데, 일률적으로 짜맞추는 건 상식 밖입니다(폭력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sophia49 2008-10-16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시몬느 베이유라는 이름이 익숙해서 좋아요....
현행법이 그렇다하니...시몬 베유로 불러야겠네요..

로쟈 2008-10-16 21:01   좋아요 0 | URL
사람 이름 '개명'하는 걸 국립국어원은 너무 쉽게 생각하는 듯해요...--;

비로그인 2008-10-16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름 그 표기법일 때 시몬느면 여자, 시몬이면 남자라고 생각해왔는데 표기법이 바뀌어서 다시 헷갈리게 생겼네요;

로쟈 2008-10-16 21:09   좋아요 0 | URL
그런 차이도 표시했나요?.. '느'라고 늘려 발음하면 조금 우아하게 들리지 않나 싶어요...

hemiola 2008-10-17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아름다운 제목이네요. 꼭 사서 읽어보고 싶습니다.

로쟈 2008-10-17 12:52   좋아요 0 | URL
그냥 꽂아두시기만 해도 됩니다.^^
 

생각해보니 금요일이어서 언론사 북리뷰들을 훑어보았다. 눈길이 가는 책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주중에 '처리'한 책들이 여러 권 되는지라 따로 스크랩해둘 만한 리뷰는 많지 않다. 그 중에서 새 번역본으로 다시 나온 슈퇴리히의 <세계철학사>(이룸, 2008)에 대한 리뷰를 옮겨놓는다. 저자나 책보다는 박민수라는 역자가 눈에 띄어서다.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 2003) 이후에 믿을 만한 번역자로 꼽아두고는 있었지만 그새 독일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활발한 저술/번역 활동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분량에서도 알 수 있지만 <세계철학사>는 저자뿐만 아니라 역자에게도 '역저(!)'라 할 만하다...

한겨레(08. 10. 04) 전공자들도 몰래 읽는 교양 철학사

독일 학자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는 수많은 철학사 책들 가운데 돋보이는 자리에 놓일 만한 책이다. 이 책은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구나 읽지만 아무도 언급해서는 안 될 책’으로 통한다고 한다. 철학사를 명료하고도 일관성 있게 알려주기 때문에 읽으면 큰 도움을 받지만, 한편 일반인을 독자로 삼아 쓴 교양서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모른 체해야 하는 책이라는 뜻이다. 1915년에 태어난 지은이는 철학과 법학 두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 연구자이면서 오랫동안 출판 편집인·번역가·사전 편찬자로 활동했다. 이런 독특한 이력이 대중성과 정확성을 동시에 품은 철학사 책을 쓰게 한 힘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1950년 처음 출간된 뒤 1999년까지 모두 17번이나 판을 갈았다. 그때마다 내용을 보충하고 확장했으며, 그 결과로 20세기 현대 철학 전반을 마저 아우르게 됐다.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마지막으로 나온 1999년 판이다.

이 책의 또다른 미덕은 인도·중국 철학을 주목한 데 있다. 지은이는 책의 제1부를 ‘동양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인도·중국 철학의 성립과 전개에 할애한다. ‘동양철학’에 대한 이런 관심은 초판이 나온 시점에서 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 공정성은 개별 철학자들의 사상을 객관적으로 소개하는 데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은이가 서술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철학자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중심이 그가 ‘서양 철학의 정점’으로 평가하는 이마누엘 칸트(1724~1800)다. 칸트 철학을 설명하는 데 한 장(챕터)을 할당한 것도 그렇거니와, 철학사 서술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도 칸트는 나침반 노릇을 한다. 말년의 칸트는 자신의 연구가 세 가지 물음에 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는데, 그 세 가지 물음이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인식),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행위), ‘우리는 무엇을 믿어도 좋은가?’(믿음) 흥미로운 것은 “철학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이 물음들은 칸트가 나열한 것과는 정반대의 순서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먼저 종교적 믿음이 출현했고 이어 인간 행위를 문제삼는 윤리학적 물음이 나타났으며, 세계 자체에 관한 앎의 문제가 마지막에 솟아났다는 것이다. 이 세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변들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 철학사 서술의 기본 방향이 된다.

명확성과 체계성이라는 이 책의 장점은 인도 철학사를 설명하는 부분만 보아도 분명해진다. “인도는 철학적 인간 정신의 탄생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인간 문화 발상지 중 하나다.” 아리아족의 정복과 함께 성립한 브라만교는 철학적 사고의 첫 씨앗을 품고서 전개됐다. 고대 인도 철학의 모든 물음은 ‘브라만’과 ‘아트만’이라는 개념으로 응축됐다. 브라만이란 애초 지배자인 승려 계급의 기도·주문을 뜻하다가 이어 ‘신성한 지식’이란 뜻으로 확장됐고, 마침내 ‘세계 창조의 원리’로 승격됐다. “자신 안에 머물면서 모든 것을 탄생시키고 또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쉬고 있는 거대한 세계정신”이 브라만이었다. 브라만이라는 관념에 이어 아트만이라는 관념이 생성됐다. 본디 입김·호흡을 뜻했던 아트만은 ‘우리 자아의 가장 깊은 핵심’이란 뜻으로 진화했다.

인도 철학에서 결정적인 지점은 이 브라만과 아트만이 하나라는 인식에 도달했다는 데 있다. 이 놀라운 인식의 도약은 동시에 지배이데올로기 강화 기능을 포함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거기에 대항해 유물론이 나타나 오직 감각적 세계만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설파했다. 브라만교에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한 것은 기원전 6세기에 출현한 불교였다. 불교는 브라만이니 아트만이니 하는 영원한 실체를 모두 부정하고, 무상한 감각적 세계만을 인정했다. 그러나 전 시대의 유물론처럼 이 감각적 세계를 즐기라고 하지 않고, 이 세계에 대한 애욕과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쳤다. 그 벗어남이 바로 ‘타던 불이 꺼진 상태’를 뜻하는 ‘니르바나’(열반)였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불교의 도전에 맞서 브라만교의 반격이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목숨을 걸다시피 한 이 사상 투쟁은 유례없이 풍요로운 사유의 마당을 열었다. “여러 정신사조가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이 시대의 인도만큼, 철학 문제에 대한 관심이 일반 민중에게까지 퍼진 경우는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찾기 어려울 것이다.” 도처에 철학 학당이 들어섰고, 철학 논쟁이 가는 곳마다 벌어졌다. 논쟁은 흡사 로마 시대 검투사들의 싸움판 같았고, 관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인도 철학의 이런 장관은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 지역에서도 나타났다. 소피스트들의 활보와 함께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라는 3대 천재의 시대가 열렸다. 특기할 것은 페리클레스가 이끌던 아테네 민주주의의 황금기가 저물고 난 뒤에 철학이 만개했다는 사실이다. 지은이는 여기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야 날아오른다”라는 헤겔의 명제를 확인한다.(고명섭기자)

08. 10. 03.

P.S. 슈퇴리히의 <세계철학사>는 예전에 저자가 '슈퇴릭히'로 표기되어 <세계철학사>(분도출판사, 초판1978)로 나온 적이 있다. 임석진 선생 번역에 상/하 두 권짜리였다. '세계철학사'나 '세계문학사'란 개념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런 류의 책들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다만 기억만 하고 있을 따름이다. 단, 이번에 나온 슈퇴리히의 책에는 관심이 간다. 내용보다는 철학사의 개념과 용어들이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궁금해서다. '누구나 읽지만 아무도 언급해서는 안 될 책’이라고 하니까 이런 관심도 비밀로 해야할까?..

슈퇴리히의의 <세계철학사>와 함께 시중에서 같은 타이틀로 돌아다니던 책은 중원문화사에서 나온 10권짜리 <세계철학사>였다. '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편'으로 돼 있었고 이을호 편역이었다.

그랬던 책이 올해 임석진 감수로 재출간됐다. 10권짜리 한 질의 정가가 30만원이니까 만만한 가격은 아니다. 출판사 제공의 소개는 이렇다. "이 책은 <철학사전>(임석진외 20여명 지음)과 함께 출간한 책으로 2년간의 번약과 편집을 거쳐 완성된 책이다. 본래 이 <세계철학사 History of Philosophy>는 러시아연방 사회과학 연구소에서 30여년의 연구를 걸쳐 완성하여 방대한 세계철학을 일목요연하게 실천적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는 '철학사'를 이을호씨가 재편집하였으며 임석진박사께서 책임가수 하셨다. 이 책은 유럽을 기점으로 하여 인도, 중국, 한국은 물론 아메리카 철학까지 폭넓게 저술하고 있으며 철학을 공부하는 모든 이에게 많은 자양분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설마 이런 교정 상태일까?

История философии. В четырех томах

짐작에 러시아어판에서 바로 옮긴 것은 아닐 테지만, 원 대본이라 할 소련과학아카데미판 <철학사>(1957)는 4권짜리다. 전체분량은 2720쪽이고, 현재 가격으로는 10만원 정도.

Бертран Рассел История западной философии. В 3 книгах History of Western Philosohy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철학사>는 무엇일까 알아보니, 한 인터넷서점을 기준으로 러셀의 <서양철학사>다. 올해에 새 판이 다시 나온 걸 보면 신빙성이 없지는 않다(러시아어판을 구해오려다 참았었는데). 대학 1학년때 집문당 번역본으로 읽은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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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03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도출판사 책이 좋은 게 많죠.저는 몇 년전 가톨릭 서점에서 분도 출판사 할인행사할 때 많이 샀어요.일반 인문사회과학 서적도 좋은 게 많죠.

로쟈 2008-10-03 23:14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론 <철학의 뒷계단> 같은 책을 구해놓지 않은 게 아쉽습니다...

푸른바다 2008-10-0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다시 번역되어 나왔군요.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임석진 교수 번역의 세계철학사는 소장하고 있습니다. 분도출판사 책은 마지막 장이 분석철학에서 끝나고 있는데 새로 번역된 책은 표지를 보니 데리다나 푸코까지 포함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구판을 보면 중국철학이나 인도철학을 다루고 있기는 하나 그 비중이 서양철학에 비해서 극히 낮고, 중국 외에 한국이나 일본, 베트남 등은 전혀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과연 '세계철학사'라는 타이틀을 가질 자격이 충분한가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아직 인류가 '세계철학'을 논할 만큼 상호이해가 성숙하지 않았다는 회의도 있구요. 아무튼 서양철학만을 다루었으면서도 '철학사'란 타이틀을 내걸었던 코플스톤보다는 낫겠지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자기의 시각과 한계를 당당히 밝힌 버트란드 럿셀의 '서양철학사'를 좋아합니다. 이책은 교과서적인 권위로 다가오기 보다는 오히려 개별적 철학자들에 대해 독자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를 마련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현재까지 출판된 책 중에 '세계철학사'에 가장 가까이 오는 책은 소련과학아카데미에서 출판된 10권짜리 '세계철학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학부에 다닐 때 중원문화에서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소련 사회과학 서적들 번역본이 거의 절판된 지금까지 판과 제본을 달리하며 출판되고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그 내용의 우수성이 검증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옛날에 책이 저렴할 때 한두권씩 사둘껄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는데, 그 당시에는 '세계철학'이 가능하지 않다는 회의와 소련에서 편찬된 책이라 이념적으로 경직되어 있지 않을까하는 편견이 있었던 것 같네요.

로쟈 2008-10-04 01:10   좋아요 0 | URL
네, 10권짜리로 재출간됐더군요. 러시아에서는 절판됐을 책인데요... 찾아보니 1957년판이 아직 절판되지는 않았네요.^^

Joule 2008-10-04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를 위한 책이군요, 이거. 근데 이상하게 철학사 책은 아무리 재미있게 읽었어도 시간이 흐르면서 존재감이 흐릿해져요. 근데 왜 난 여전히 바보인 거지? 뭐 그런 거.

로쟈 2008-10-04 09:21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은 걸 정리해서 쓰시면 '존재감'이 좀 오래가지 않을까요.^^;

푸른바다 2008-10-04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히 세계철학사가 러시아에서도 아직 나오고 있군요^^ 그나저나 중원문화사 번역본은 러시아어 본을 옮긴 것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어로 옮겨진 것을 중역한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암튼 한질을 집에 갖다놓고 싶은 맘이 있긴 한데, 책값이 만만치 않아서(할인해도 27만원!) 내년에나 고려해 봐야 할 것 같군요^^ 아니면 헌책방에서 구판본으로 한두권씩 사 모으던지^^

그나저나 슈퇴리히 세계철학사는 일독을 할만한 좋은 책이기는 하지만, 암암리에 전제되어 있는 서양 중심주의는 반드시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위 기사에 쓰여진 대로 슈퇴리히는 칸트의 질문에 따라 철학사를 배열했다고 하면서, 현실적으로 인류 의식의 발달이 믿음 (종교) -> 행위(윤리) -> 인식의 단계로 진보해 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인도철학=종교, 중국철학=윤리, 서양(희랍)철학=인식으로 각기 배당하고 있는데, 이는 영락없이 헤겔의 철학사를 모방한 것입니다. 진정한 철학은 희랍에 와서나 시작된다는 헤겔류의 진보사관을 무반성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셈이지요^^

로쟈 2008-10-04 11:06   좋아요 0 | URL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세계철학사'란 말 자체가 '허구'입니다. '철학'이란 말 자체가 특정한 발생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과거'에 투사하고 '세계'에 덮어씌운 것이니까요. 어떤 경우든 중국이나 인도 '철학'은 들러리밖에 안되는 것이죠. '철학들의 역사'라고 하면 조금 더 정직한 것이 되겠죠...

노이에자이트 2008-10-04 22:43   좋아요 0 | URL
중원의 세계철학사에 대해서 러시아 철학사 (녹두) 역자해설에 엄청난 비난을 했더군요.발췌번역이라는 거죠.특히 러시아 철학 다룬 쪽이 심해서 그 책 원본의 러시아 철학사만 다시 완역했다고 밝혔더군요.
중원 세계철학사를 찾는 분들이 많으시군요.저는 약 10년 전에 헌책방에서 한권 1000원 씩 10000원에 샀는데...색인이 잘 되어 있어서 인터넷 검색하듯 찾아볼 때 편해요.중동이나 제 3세계 사상도 나와 있어서 서양철학사에서 접하지 못한 사상가들도 알게 되었죠.

로쟈 2008-10-05 08:59   좋아요 0 | URL
헌책방에서도 인기 없던 책들이 다시 주목받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5 15:52   좋아요 0 | URL
요즘은 광주 헌책방도 그 책 10권 다 나오지는 않아요.저는 운이 좋았죠.

푸른바다 2008-10-05 17:54   좋아요 0 | URL
녹두 러시아 철학사도 예전에 서점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초록색 표지^^ 비록 읽지는 않았지만... 그게 중원 세계철학사와 같은 책을 번역한 것이었군요. 이번에 신장개업한 중원 세계철학사는 완역인지 여부가 궁금하네요^^ 헌책방을 검색해보니 구판본 전질은 지금도 4 ~ 5 만원이면 구할 수 있는 것 같네요. 언제부턴가 임석진 감수라는 말이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임석진 교수의 권위를 이용해서 학계에서도 인정을 받고자 하는 모양입니다.

푸른바다 2008-10-04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공화국이 현실화 된다면 이른바 '세계철학'이라는 것도 구체화되겠지요^^ 역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세계철학이 구상되면 세계공화국이 현실성을 갖추게 될지도 모르겠지요^^

다른 이야기지만 예전 운동권의 필독서였던 녹두출판사 '세계철학사'가 떠오르네요^^ 이 책은 소련에서 어느 시절에 교과서로 사용되었던 책이라고들 이야기 했지만 정확이 어떤 책의 어떤 판본을 번역한건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죠^^ 그래서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 지요? 개인적으론 변증법적 유물론을 다룬 제 2권은 지금 읽어봐도 상당히 잘 쓰여졌다고 생각합니다. 1권과 3권은 너무 편향되있다고 생각하지만...

로쟈 2008-10-04 13:27   좋아요 0 | URL
저도 알 수는 없구요. 편집분 편이라 일어본을 번역/중역한 게 아닌가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4 22:42   좋아요 0 | URL
마르크스와 엥겔스 다룬 것은 랴쟈노프스키 저서라고 하더군요.정문길<니벨룽엔의 보물>에 한국의 마르크스 주의 연구목록이 나와 있으니 한 번 참고하십시오.1980년대에 번역된 마르크스주의 문헌이 많이 소개되어 있어요.

로쟈 2008-10-05 09:00   좋아요 0 | URL
80년대에 워낙 조급하게 나온 책들이 많아서 아직도 유효한 책들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5 15:57   좋아요 0 | URL
그런데 그때는 나오다가 지금은 안 나오는 책들도 많으니까 헌 책방에서 구하는 수밖에 없죠.조잡한 번역이라고는 하지만 다들 그런 책을 통해서 공부도 했고,그런 사람들이 이젠 학계에도 많이 진출한 것도 사실이지요.그때 번역한 이들 중 지금 뉴라이트 쪽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구요.세계적인 명저인데도 절판된 책들은 다시 냈으면 좋겠어요.

푸른바다 2008-10-05 18:09   좋아요 0 | URL
정문길 교수님도 정말 집요하게 한 우물을 파시는 분이군요^^ '소외론 연구'와 '에피고넨의 시대'는 소장하고 있지만 완독하지는 못했네요. 니벨룽의 보물 검색해 보니 책값이 무려 3,5000원... 책을 쓰고 만드는 수고에 비해 큰돈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정서상으론 요즈음 책값은 왜이리 비싼지 모르겠습니다. 암튼 언젠가 한번 읽어봐야 할 것 같네요^^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자 불명의 책 중에서 지금 읽어봐도 잘쓰여졌다고 생각하는 책은 녹두 세계철학사 II (변증법적 유물론)과 거름 출판사 '변증법적 논리학'입니다. 특히 '변증법적 논리학'은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읽었던 책이라 남다른 애착이 있는 책입니다^^

그러고 보니 세계철학사를 펴낸 녹두 출판사 김영호 전대표(현 성신여대 교수)도 뉴라이트로 전환했지요. 사상적 전환이야 개인적 자유지만 뉴라이트로 전향한 사람들의 '전향의 변'들은 왜 그리 유치하고 전향 이후의 말과 행위들도 왜 그리 엉성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유치함과 엉성함이 먹히고 있는 사회도 문제긴 하지만...

노이에자이트 2008-10-07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원문화에서 옛날 책을 새로 단장해서 내놓는데 너무 가격을 올려서 우와!!! 마르쿠제 이성과 혁명도 엄청난 값을 붙였더라구요.그러고 보니 이 출판사에서 독일 철학 번역서를 많이 냈던 황태연 씨도 2000년 이후 행보가 상당히 울퉁불퉁했죠.

노이에자이트 2008-10-07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겔 논리학 입문서 중에서 거름에서 나온 그 책과 한마당에서 나온 헤겔 논리학 입문을 정독했답니다.저는 서른이 넘어서 봤어요.고교시절은 교과서와 참고서 외에 본 책 기억이 없네요.

로쟈 2008-10-07 20:5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니 제가 읽은 정신현상학 입문서예요. 역자가 황태연으로 돼 있던...

푸른바다 2008-10-07 23:39   좋아요 0 | URL
변증법적 논리학을 읽고 헤겔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다음에 구매한 책이 바로 한마당 출판사 헤겔 논리학 입문이었죠^^ 일본헤겔철학회(소판 진 등)에서 출판한 책을 권오걸이 번역한 것이었지요. 최재희 교수님이 감수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로쟈 님이 기억하시는 책은 아마 리차드 노만이 쓰고 오영진이 번역했고 한마당에서 출판한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이 아닐까 싶네요^^ 그러고 보니 황태연도 헤겔 '정신현상학 해설'이라는 편역서를 이삭 출판사에서 낸 적이 있지요^^

로쟈 2008-10-08 17:32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이거 갑자기 80년대 정담 모드네요...^^

푸른바다 2008-10-08 19:52   좋아요 0 | URL
이 참에 '로쟈의 사랑방'도 하나 만드시죠 ㅎㅎㅎ

노이에자이트 2008-10-08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오걸 번역본 뒤에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쓸 때 헤겔 논리학을 어떻게 적용했는지 쓴 논문이 있죠.황태연,세연 형제가 독일 철학에 대해 번역을 많이 했죠.

로쟈 2008-10-08 17:32   좋아요 0 | URL
그런 듯싶긴 했는데, 두 사람이 형제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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